기적의 IT 재벌 65화
밤늦은 시간임에도 SG텔레콤의 신사옥은 불이 꺼지지 않는다.
기존에 진행하던 신규 프로젝트를 전면 백지화하고 실행되는, 일명 프로젝트 S의 진행을 위해 전 직원이 비상태세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바삐 돌아가는 사내 분위기의 중심엔 새롭게 SG텔레콤을 이끄는 신용화가 있었다.
“일전에 이야기되던, 애플폰4 물량 확보는 어떻게 됐습니까?”
-KT와 막판까지 각축을 벌일 거라 예상했지만, 싱겁게도 우리가 전량 확보하게 됐습니다.
“전량요? 그럼 SG텔레콤에서 단독출시로 결정된 겁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닉스 쪽에서 입김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칫, 쓸데없는 참견은. 일단 알겠습니다.”
집무실 앞에 도착한 그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문을 열려는데, 어딘가 익숙한 향이 코를 찌른다.
로열 머스크.
자신의 형이자, SG오일의 부사장이 된 신석호가 애용하는 향수였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가자 향이 더 강해진다.
의자가 반대로 돌아가 있었지만 누가 앉아 있는지는 뻔한 일이었다.
‘형이 왔는데 아무도 내게 보고를 안 했단 말이지.’
SG텔레콤은 본디 신석호가 운영하던 곳이었다.
구석구석까지 그의 입김이 닿아 있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내일 회의에서 비서 전원의 물갈이를 지시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차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화야, 왔구나.”
“형님, 이 늦은 시각에 어쩐 일이십니까.”
“우리 아우가 밤늦게까지 고생하는데 한 번 와보는 게 당연한 거지. 우선 앉아라.”
분명 저 자리가 자신의 것임을 알면서도, 그는 신용화를 아래에 앉도록 지시했다.
신용화는 소파에 앉는 대신 천천히 테이블 앞으로 걸어갔다.
“직접 오신 거 보니, 급한 용무라도 있습니까?”
“아니, 전혀. 기름쟁이들이야 알아서 수익이 나니 내가 참견할 일이 있어야지. 급한 건 네 쪽이 아니더냐.”
“그게 무슨……?”
“애플폰을 국내에 들여온다고 들었다.”
놀랍진 않았다.
이미 KT와 유치 경쟁을 벌인다는 소문은 다 퍼졌을 테니까.
“맞습니다. 이번 기회에 스마트폰 부문에서 앞서 나갈 생각입니다.”
“쯧, 내가 그리 말렸거늘.”
여전히 자신을 아래로 보는 저 말투.
분하지만 아직까진 어쩔 수 없이 삭혀야만 했다.
“KT가 먼저 진행했습니다. 가만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KT와 우리가 같다고 생각하는 게냐?”
과거,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았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것뿐만 아니다. 멋대로 SG컴즈와 다음을 합병시켜 버렸던데.”
“이미 아버지께 보고 드린 사항입니다.”
“닉슨지 뭔지에 5000억이라는 돈을 갖다 바친 것도 말이냐?”
순간 말문이 턱 막힌다.
어디지? 대체, 어디서 이야기가 새 나간 걸까?
닉스와의 이면 계약은 직속 부하들만 알게 진행했을 터인데…….
“쯧쯧, 표정을 보니 무슨 생각으로 저질렀는지 알겠다. 너, 회사를 네 개인 주머니쯤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무슨 큰일 날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신석호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러곤 신용화의 어깨를 툭 치곤 지나갔다.
“용화야, 내가 진심으로 충고하마. 회삿돈을 가볍게 생각하지 마라.”
“절대 가볍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셋째, 용현이가 어떻게 감옥에 갔는지, 알지?”
SG그룹의 셋째 아들, 신용현이 감옥에 간 표면적 이유는 횡령이다.
하지만 맏형인 신석호와의 권력다툼에 져서 구속됐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너도 얌전히 2년만 채우고 나가는 게 좋을 거다. 쓸데없는 짓 해서 괜히 판 벌이지 말고.”
신석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던지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
신용화는 이를 꽉 물어 분을 삼킨다.
속으로 수십, 수백 가지 생각이 뒤엉켰으나 어째선지 예전처럼 화가 치밀어 오르진 않았다.
이건 자신의 감정 컨트롤 능력이 좋아진 게 아니었다.
그저, 믿을 만한 한 방을 준비하고 있기에 생긴, 마음의 여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흐음.”
숨을 들이쉬자, 싫은 냄새가 폐부로 밀려온다.
얼른 담배 하나를 꺼내 물고, 비서실에 전화를 넣었다.
“여기 청소 다시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으려는 데 다른 전화가 걸려온다.
방금 걸었던 곳과 이름이 같은 비서실이지만 하는 일이 다른 비서실이었다.
“여보세요.”
-전무님 큰일 났습니다. 오성전자가 움직였습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오성이 움직이다뇨.”
-애플폰의 국내 출시를 막기 위해 수를 썼습니다.
“그건 오성에서 항상 하는 일 아닙니까.”
-이번은 다릅니다. 국회 쪽을 움직여서 긴급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국내외 단말기에 무조건 WIPI 3.0의 탑재를 의무화하겠답니다.
순간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몰려온다.
WIPI 3.0은 국내에서 개발한 독자적인 모바일 플랫폼이다.
국내에서만 쓰이는 플랫폼을 의무화시키겠다는 말은 즉, 외산 휴대폰을 아예 못 들어오게 하겠다는 말과 같았다.
신용화는 입에서 쌍소리가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고 말을 이었다.
“그런 법안이 이리 쉽게 통과된단 말입니까?”
-법안에는 오래전부터 올라갔는데, 무기한으로 계류 중이었다고 합니다. 이번은 그걸 갑자기 통과시킨 거고요.
눈앞이 캄캄해지는 거 같다.
닉스와 협업으로 벌여둔 사업이 얼마나 많은데, 처음부터 이리 삐걱댈 줄이야.
신용화는 힘이 빠져서 의자에 걸터앉았다.
“알겠습니다. 다른 보고 사항은 없습니까.”
-저기…… 그게…….
“뭔데 그리 뜸을 들입니까.”
-공교롭게도 법안이 통과되기 전. 신석호 부사장님께서, 오성전자의 정용재 부회장님을 만났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신용화의 인내심이 바닥나 버렸다.
“그걸 왜 지금에서야 말하는 겁니까? 그런 일은 미리 보고했어야 할 거 아닙니까!”
-죄, 죄송합니다.
신용화는 전화기를 쾅 내려놨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려서 책상 위에 있던 화분을 집어 던져 버린다.
챙강!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화분 파편이 사방으로 튀긴다.
“후, 후우, 후…… 젠장할.”
엉망이 된 집무실 꼴을 보자 짜증만 더 밀려온다.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집무실을 치우기 위해 왔던 여직원이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안에 다 치워두세요.”
“아, 알겠습니다.”
신용화는 급히 차로 돌아갔다.
대시보드 안에는 비서실에서 올라온 서면 보고가 들어 있었다.
급히 서류를 훑다 한 지점에서 동작이 멈춘다.
[신석호 부사장. 오성전자 정용재 미팅.]
역시 있었다.
최근 들어, 일이 너무 많아서 못 보고 지나쳐 버린 것이다.
힘이 쭉 빠져 버린 신용화가 시트에 몸을 묻는다.
“후. 신용화, 이 멍청한 새끼야. 이래서 무슨 일을 하겠다는 거야.”
* * *
“모두 아시다시피 최종 선정된 이모티콘은 에디와 루디입니다.”
서진서가 마우스를 조작하자, 앙증맞은 고양이와 강아지 캐릭터가 벽면에 나타난다.
이게 그 논란의 1000만 달러짜리 애들이다.
“에디와 루디 이모티콘 다운로드 횟수는 약 3400만 번입니다. 이건 닉스 챗 사용자의 60%가 넘는 숫자입니다.”
“예상보다 반응이 좋았군요.”
“예상치를 230%나 웃돈 결과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음으론 기간 한정으로 출시된 이모티콘 팩의 판매량입니다. 1달러로 책정된 프리미엄 이모티콘 팩의 판매량은 1220만 개입니다.”
“그중 에디와 루디 팩의 비중은 얼마나 되죠?”
서진서는 내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 답했다.
“총 950만 개. 그러니까 77.8%가 에디와 루디 팩이었습니다.”
이모티콘 팩 하나당 떨어지는 이익이 0.78달러니까.
대략 740만 달러. 아쉽게도 상금인 1000만 달러에는 못 미치는 수준이다.
어차피 SG텔레콤에서 전액 댄다고 했으니 상관없는 일이지만.
“좋네요. 앞으로 닉스의 마스코트는 에디와 루디로 하겠습니다. 새로운 이모티콘뿐만 아니라, 캐릭터 상품도 이른 시일 내에 연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프로젝터에 비친 화면이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닉스 서클의 국내외 점유율에 대한 보고입니다. 먼저 미국은…….”
회의가 길어지자 딴짓을 하게 된다.
가령, 창밖을 쳐다본다던가.
“음? 눈이 오네.”
내가 중얼거린 말에 다른 팀장들도 밖을 내다본다.
“오오, 진짜네요. 많이 쌓여서 눈사람 만들면 좋겠다.”
배기태의 말을 배기수가 받아친다.
“뭐가 좋다고 난리냐. 쌓이면 퇴근 시간에 차만 막히지.”
“기수, 넌 낭만이 하나도 없다니까.”
“저기요. 아직 회의 안 끝났거든요?”
서진서가 주목시키기 위해 손뼉을 짝짝 치는데, 회의실 문이 쾅 하고 열린다.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사내. 신용화였다.
“오, 신 전무님 오랜만이시네요.”
“전무님, 안녕하세요.”
얼마나 뻔질나게 회사에 드나들었는지, 이젠 팀장들이 먼저 녀석에게 아는 척을 할 정도다.
“예. 간만입니다. 제가 요즘 좀 뜸했죠?”
신용화는 매번 회사를 방문할 때마다 고급 다과를 가져 왔는데, 이번에는 빈손이었다.
그 때문인지 팀장들은 은근히 아쉽다는 눈치다.
“오늘은 왜 이렇게 급하게 오셨습니까. 평소엔 느긋하게 오시더니.”
“급해. 아주 급한 일이다.”
“음…….”
여태까지와 다른 분위기에, 눈치껏 팀장들이 자리를 비켜준다.
“무슨 일이 터졌기에 그러십니까?”
“오성전자가 움직였다.”
“오성?”
그는 근처에 널려 있던 의자를 끌어와 앉는다.
“놈들이 애플폰의 국내 출시를 막으려고 수를 썼어.”
“그건 항상 하던 일 아닙니까. 그리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닐 텐데요.”
이미 오성전자는 애플폰을 막기 위해 다방면으로 로비를 펼치고 있다.
3대 통신사는 물론이고, 정부 기관인 방송 통신 위원회까지 광범위하게 로비를 펼쳤는데.
통신업계에선 오성의 돈을 안 먹은 놈이 이상한 놈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이번은 완전 칼을 뽑았어. WIPI를 의무화시키는 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단다.”
“허, WIPI? 그거 몇 달 전에 폐지했잖습니까.”
“그걸 WIPI 3.0이라는 이름으로 부활시켰다. 애플폰뿐만 아니라 외산 휴대폰을 전부 막아버리겠다는 속셈이지.”
어째서 이런 일이?
본디 역사대로라면 WIPI는 올해 4월에 폐지되고, 11월 말에서나 KT에서 애플폰을 들여오게 된다.
어디서부터 꼬여 버린 걸까.
2위 통신사인 KT 대신, 1위 통신사인 SG가 애플폰 유치에 뛰어든 탓일까? 아니면 이번 애플폰4의 판매량이 역대급 대박을 친 탓일지도 모르겠다.
젠장, 지금 와서 이유 따위 분석할 시간이 없어.
애플폰의 국내 상륙이 실패하면 국내 메신저 시장에서의 닉스 챗은 점점 힘을 잃어 갈 게 뻔했다.
특히 내년에 출시되는 오성의 기함급 폰인 갤럭시스S에 다른 메신저를 선탑재시키기라도 한다면…….
그때, 테이블을 쾅 소리 나게 내려치는 신용화.
“젠장, 내가 안일했어. 이번 일. 보나 마나 큰 형이 기획했을 거다.”
“큰 형이라면…… 지금 SG오일의 부사장으로 있는 신석호 씨?”
그 이름이 나오자, 신용화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그래. 내가 닉스와 연계해서 뭔가 하려는 걸 방해할 셈인 거지. 큰 형은 프라이드가 강해서 다른 곳과 손잡을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성전자와 SG그룹의 장남. 사실상 국내 IT 시장에서는 최강의 조합이 손을 잡아 버렸다는 거네요.”
“면목 없다. 미리 대응 준비를 해야 했었는데. 이번 포털 사업에 집중하느라 시야가 좁아졌어.”
국내 시장은 좁지만, 차후에 출시되는 안드로이드OS 스마트폰의 대표 격인 오성전자와 KG전자가 있는 본진이기도 했다.
안드로이드 시장까지 닉스 챗이 먹어치우려면 여길 어떻게 해서든 수성해야 하는데…….
어? 잠깐.
오성전자. KG전자.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아! 그게 있었지.”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전구가 팍 켜진다.
이번 일을 타개하면서도, 큰 그림에 한 발 더 내디딜 수 있는.
그런 묘수가 선명하게 그려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