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52화
미국은 총기에 관대한 나라다.
하지만 그만큼 총기사고가 많았기에 대처가 빠른 나라이기도 했다.
천장으로 쏘아진 총성이 구도심에 울린 후.
딱 5분이 지난 시점에서 경찰이 들이닥쳤다.
멜븐은 정당방위를 호소했지만, 현장에 많은 증인과 더불어 녹음 증거까지 있었기에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결국, 멜븐과 수행원이 경찰에 끌려가는 거로 U&F에너지에서 있었던 일은 일단락됐다.
멜븐 정도의 능구렁이라면 짧은 구치소 생활만 마치고 보석으로 풀려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가 풀려났을 땐, 다른 죄명으로 감옥에 처넣을 준비가 끝난 뒤일 테니까.
참고로, 이번은 변호사 선임비를 좀 과하게 쓸 생각이다.
그의 치가 떨리는 악랄함에, 단죄를 내리고 싶은 맘도 있었지만, 말로만 들었던 미국 로펌의 머니 파워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최고의 변호사들이 불량 배터리 판매 건으로 집단소송을 진행하게 되면 멜븐은 개털 신세를 면치 못할 거다.
그날 현장에 있었던 연구원들의 불법 체류 문제는 SPI 측에서 순식간에 해결해 버렸다.
본디 시일이 필요한 절차가 있었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처리 방식으로 일을 진행했으니까.
SPI의 탐정들은 기본 억대의 의뢰비를 받지만, 그만큼 프로페셔널한 일 처리를 보여줬기다.
돈 들인 만큼의 값어치를 한다고 할까?
만약, 탐정에도 만족도 평가가 있다면 매우 만족함으로 체크해줬을 거다.
그들과는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거 같다.
이튿날, 샌프란시스코 공항.
필리핀과 인도 친구들은 미국에 남는 걸 원했고, 파키스탄 친구들은 고향으로 떠날 준비를 마치고 탑승장 앞에 섰다.
“고향에 돌아가는 느낌은 어때요?”
내 질문에 무자파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고향 좋다. 너무 좋다. 무자파는 이번 은혜 잊지 않는다.”
“은혜를 잊지 않을 거면 닉스로 와서 리튬 에어 배터리 개발을 도와주세요. 저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나 연락 끊겼다. 가족들 걱정한다. 미국 싫다.”
옆에 있던 무자파와 같은 파키스탄 친구, 무함마드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이 지금까지 겪은 일들을 생각해보면 미국이 지긋지긋할 만도 하다.
“이거 선물이다. 좋은 거다.”
무자파는 가방에서 USB 하나를 꺼내서 건넨다.
“이게, 뭡니까?”
“연구소에서 기록한 일지다. 내가 직접 했다.”
무자파가 기록했다면 필시 리튬 에어 배터리 개발에 관한 내용일 터.
혼자서 맨땅에 헤딩할 생각만 했는데, 이걸로 개발에 탄력이 붙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두 손으로 USB를 소중하게 받아 들었다.
“고맙게 쓰겠습니다.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대니얼 좋은 사람.”
갈 시간이 됐는지, 무자파와 무함마드는 손을 흔들어 보인다.
난 그런 그들의 손에 사과 마크 쇼핑백 하나씩을 쥐여 줬다.
“이것, 무엇?”
“닉스의 프로그램이 담긴 애플폰4입니다. 우정의 선물로 생각해 주세요.”
“이, 이거 받을 수 없다.”
“회사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거니 그냥 받아주시죠. 이걸 볼 때마다 생각해 주세요. 닉스는 언제든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마지못해 쇼핑백을 받아든 무자파는 감동했는지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출국장으로 떠났다.
* * *
IM케미컬이 닉스 이노베이션에 인수된 후, 기존에 없던 부서가 하나 생겨났다.
[프로젝트 Air]
신소재 개발부 산하로 편성된 프로젝트 Air팀은 오직 리튬 에어 배터리에 필요한 소재를 개발하는 전담부서였다.
당연히 부서장은 U&F에너지에 CNT를 개발해줬던 선임 연구원, 장 메이가 맡았다.
U&F에너지 사건 이후로, 리튬 에어 배터리 개발에는 큰 진보가 있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실험 방식의 변화였다.
기존에 행했던 실험은 간접적인 방식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애플폰XI의 리튬 에어 배터리를 막 굴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U&F에너지에서 미완성 리튬 에어 배터리를 대량으로 입수해왔으니까.
미완성품이라 해도 리튬 에어 배터리의 성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으니.
마음대로 전류도 흘려보내 보고, 쪼개기도 했으며, 추출까지 했더니 기존 몇 달간보다 최근 사흘이 더 많은 실험결과를 정립할 수 있었다.
물론, 무자파가 주고 갔던 개발 일지도 큰 도움이 됐다.
한창 집중하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린다.
“대표님! 대표님! 완전 서프라이즈인 거예요. 대표님이 가져오신 샘플 소재, 기존에 제가 개발했던 소재보다 효율이 110%나 높게 나왔어요.”
메이는 놀라서 호들갑을 떨었지만 나는 당연한 결과가 나왔다는 듯 말했다.
“예. 그걸 똑같이 카피해서 샘플 떠주시면 됩니다. 오늘 오후까지 마무리 지어 주세요.”
“으으…… 당연하다는 듯 말하니까 엄청 분하네요.”
그녀는 툴툴거렸지만, 사실 저 정도면 엄청나게 선방한 거다.
2020년에나 나올 소재와 효율이 2배 정도밖에 차이 안 난다는 소리니까 말이다.
“메이가 할 일은 그 소재를 카피하고 개량하는 겁니다. 지금보다 효율이 더 높게 나오도록 말이죠.”
“후아, 그게 가능은 할까요?”
“물론입니다. 한 번 성공할 때마다 메이의 월급이 2배씩 뛸 테니까요.”
월급 2배라는 말에 메이의 눈이 번쩍인다.
“가능하게 만들고 말겠어요.”
내가 가져왔던 CNT 소재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단계의 제품이다.
리튬 에어 배터리가 탑재된 건 애플폰XI가 최초였으니 말이다.
분명, 머리를 맞대고 연구하면, 개량할 여지가 남아 있을 거다.
“아 참. 무자파 말인데요.”
“예.”
“고향에는 잘 갔을까요?”
“그렇겠죠.”
내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하자 또 툴툴거리기 시작한다.
“대표님, 여기 좀 보고 말하면 안 될까요? 저 벽 보고 말하는 거 같아요.”
메이는 실력이 뛰어난데, 손이 많이 가는 스타일이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그냥 사람을 귀찮게 한다는 말이다.
난 쓰고 있던 보안경을 벗어들었다.
“예, 메이. 말하세요.”
“무자파가 떠난 지 벌써 사흘짼데 연락도 한 번 없었잖아요. 그때, 집에 가면 꼭 연락해 주기로 했는데, 닉스 챗도 안 받고. 저 되게 서운한 거 있죠?”
“그는 돌아올 겁니다.”
“대표님의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궁금할 정도라니까요.”
어디선가 자주 듣던 말이다.
“뭔가 믿는 게 있나 봐요? 무자파가 떠난 날도 똑같이 말했잖아요.”
“글쎄요.”
그때였다.
책상 위에 얹어둔 애플폰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음. 양반은 못 되겠네요.”
“양반? 그게 무슨 뜻?”
“한국에서만 쓰이는 말입니다. 제 말을 할 때 찾아온다는 뜻이죠.”
“엥? 진짜 무자파예요?”
난 대답하는 대신 전화를 집어 들었다.
“예, 무자파. 오랜만입니다. 아, 예. 그러죠. 그럼, 거기서 보는 거로.”
툭.
순식간에 통화가 끝나자 메이가 찰싹 붙어온다,
“무자파 맞아요? 고향에 잘 갔대요? 거긴 어떻대요? 뭐래요?”
“질문은 하나씩만 해주실래요.”
“으으…… 그럼…….”
고민하는 그녀의 모습이 귀엽다고 느껴진다.
요즘 들어 부쩍 꾸미고 다니는 모습 때문인 거 같다. 그렇다고 여자로 느껴지기보단, 수다스러운 동생을 보는 거 같았지만.
“무자파가 뭐라고 했나요?”
“미국행 비행기에 탔답니다. 곧 공항에 도착한다네요.”
“헤엥, 이럴 수가. 진짜 돌아왔다고요? 그것도 사흘 만에?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예요?”
“음……. 신뢰의 힘이라고 해두죠.”
* * *
무자파와 무함마드가 공항에 도착했다.
그들은 단 며칠이지만 고향에 다녀왔다고 얼굴에서 반짝반짝 윤이 나고 있었다.
“무자파!”
마중 나갔던 메이가 쌓아두었던 말을 한순간에 터트린다.
우르드어와 영어가 뒤섞인 알 수 없는 환영 인사가 끝나고.
그들은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온다.
“대니얼, 나 돌아왔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군요.”
“이거 돌려주러 왔다.”
무자파는 내가 줘서 보냈던 사과마크 쇼핑백을 내 손에 쥐여 줬다.
“돌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아니다. 돌려주러 왔다.”
옆에서 지켜보던 메이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어온다.
“그거 애플폰4 아니에요? 왜 다시 돌려준다는 거예요?”
“거기. 돈 같이 들어 있다. 만 달러.”
“에엥? 신뢰의 힘이라는 게. 돈이었단 말이에요?”
그녀는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날 쳐다본다.
떠나는 사람에게 대뜸 만 달러라는 거금을 쥐여 준 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중에라도 닉스에 합류해주길 바라는 의미에서 들려 보낸 건데. 사흘 만에 다시 들고 돌아오다니.
사람이 착한 건지 순진한 건지 모르겠다.
뭐, 둘 중 어느 쪽이든 상관없으려나.
“미안하다. 무자파 안에 돈 썼다. 조금 집 수리에 썼다.”
“이건 무자파에게 준 돈입니다. 썼다고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요.”
“아니다. 그냥 돈 받을 수 없다. 무자파 쓴 돈 만큼 일한다. 무함마드도 같은 생각이다.”
영어가 서툴러서 매번 말없이 있는 무함마드도 내게 쇼핑백을 돌려준다.
난 마지못해 쇼핑백을 받아 든다.
역시나 묵직한 것이 얼마 쓰지도 않은 거 같다.
“하하, 이거 참.”
유쾌한 웃음이 절로 나온다.
팍팍한 현대 사회에서 이런 친구들이 남아 있다니.
이 세상이 아직은 신뢰가 남아 있다는 증거 아닐까?
* * *
파키스탄 친구들의 휴식을 위해, 주말 동안 최고급 리조트에서 묵게 했다.
널찍한 개인 수영장과 무제한 룸서비스.
거기다 전담으로 스파와 마사지를 도와주는 직원까지 붙는다.
그야말로 풀코스가 준비된 리조트였다.
그들은 휘황찬란한 리조트 전경에 주눅이 드는 듯했으나, 친절한 직원들의 응대에 점차 긴장을 푸는 모습이었다.
잠시 헤어졌던 친구들도 리조트에 불러서 같이 지낼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주말이 가고 월요일이 찾아온다.
우리는 곧장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최고급 리조트 생활을 마친 무자파는 아쉬워하는 표정이었으나, 이어서 퍼스트클래스티켓을 받았을 때. 또 한 번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자파는 연이어 호화로운 대접을 받아 부담스럽다는 말을 해왔지만. 난 ‘당신들은 이만한 대접을 받을 가치가 있습니다.’라는 말로 일축해 버렸다.
이들은 아직 모를 것이다.
자신들이 만들어 낼 배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 말이다.
한국에 도착한 우리는 곧장 김해로 향했다.
목적지는 손만호 부장이 운영 중인 Sol 에너지 본사였다.
“강 대표님 잘 오셨습니다.”
“이거. 제가 자주 찾아 봬야 했는데.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이쿠, 뉴스만 보더라도 대표님이 얼마나 바쁘게 지내시는지 알 수 있는데, 어찌 그런 말을 하십니까. 이번에 발표하신 닉스 서클도 호평 일색이더군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손만호 부장은 스리슬쩍 내 얼굴에 금칠해댄다.
노골적인 아부는 인상이 찌푸려지지만, 이런 식으로 치켜세워주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손 부장님, 제가 듣기론, 태양광 공사 수주를 세 곳이나 더 따내셨다던데. 갑자기 어찌 된 일입니까?”
“아, 그거 말씀이시군요.”
그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가 이번 영릉 공사를 말끔하게 끝낸 걸 보고, 공사에 차질을 빚고 있는 태양광 업체들이 앞다퉈 연락을 해왔습니다. 컨텍만 스무 곳 정도가 왔었죠.”
“호오. 스무 곳이나요?”
“예, 그중에 수익성이 있고, 처리가 용이한 곳만 세 곳을 꼽아서 공사를 진행 중입니다.”
망한 회사를 단기간에 정상화할 때부터 느꼈지만, 이 사람 능력이 범상찮다.
“그 외에 애로사항은 없습니까?”
“실무는 제가 담당하고 회계는 박준오 재무이사님이 완벽하게 처리해주시니, 대표님께선 걱정 붙들어 매셔도 됩니다.”
“좋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이곤 옆을 가리킨다.
“소개가 늦었군요. 이쪽은 Sol 에너지의 연구 파트를 담당할 무자파와 무함마드입니다. 파키스탄에서 온 엘리트들이죠.”
“무자파다. 안녕하세요.”
“무함마드.”
한국말을 못 알아들음에도 눈치껏 인사하는 파키스탄 친구들.
비행기에서 계속 중얼거리던 게 안녕하세요였나.
손만호 부장 역시 깍듯하게 인사한다.
한국에서 개발도상국 사람들의 인식이 안 좋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무자파는 간단한 영어를 할 줄 압니다. 그러니 소통해야 할 일이 있으면 영어로 하시면 됩니다. 아니면 김해 쪽 공단에는 파키스탄에서 온 친구들이 많으니 거기서 통역해 줄 사람을 구해보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한다는 연구가 정확히 어떤 연구입니까?”
“차세대 이차전지 개발입니다.”
“이차전지요? 혹시 태양광 ESS(Energy Storage System · 에너지 저장 시스템) 사업 때문에 그러십니까?”
태양광발전 특성상, 해가 뜬 낮에만 전기를 공급받을 수 있으니, 에너지 저장 시스템과의 연계는 필수적이다.
하지만 리튬 계통 전지의 효율성 문제가 항상 발목을 잡았기에, 대부분의 태양광 발전은 전기가 만들어지는 즉시 내다 팔아버리는 게 현실이었다.
“그쪽으로도 생각 중입니다. 우선 이걸 한 번 보시죠.”
내가 가져온 서류를 펼쳐 보인다.
그곳에는 장기적인 이차전지의 로드맵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대, 대표님. 이건 좀…….”
난처하다는 표정의 손만호 부장.
“왜 그러십니까?”
“실현 가능성이 너무 낮아 보여서 하는 말입니다. 이런 배터리의 개발에 성공한다고 한들, 양산과정에서 필요한 공장 규모가 너무 큽니다. 그에 필요한 돈은 천문학적이 될 겁니다.”
대표가 비전을 제시하면 대부분의 부하 직원은 입에 발린 칭찬부터 쏟아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손만호 부장은 내 눈치를 보기보다, 현실적인 문제점부터 짚어댄다.
이러니 그를 더 신뢰할 수밖에.
“그 천문학적인 돈을 대줄 사람이 있으니 이런 계획을 세운 겁니다.”
“예? 벌써 투자처를 찾은 겁니까?”
“아뇨. 그는 저희 쪽에 투자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내가 음흉한 미소를 머금자, 손만호 부장은 궁금해서 미칠 거 같다는 표정으로 물어온다.
“대표님, 그게 누군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힌트라도 좋습니다.”
“로켓을 좋아하고, 인간을 화성에서 보내려는 몽상가. 최근엔 전기차 사업에 열을 올리고 있죠.”
“서, 설마.”
그렇다. 페이팔, 솔라시티, 스페이스X의 창업주이자 영화 아이언맨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모티브로 삼은 남자.
바로, 일론 머스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