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50화
장 메이의 중재로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갱단으로 보였던 이들은 파산한 U&F에너지의 외국인 직원들이었다.
필리핀, 베트남, 인도, 파키스탄.
출신지도 다양했다.
우린 그들의 안내를 받아 폐쇄된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메이. 아까 저 사람들이랑 무슨 얘길 한 거예요?”
“U&F에너지가 어떻게 됐는지를 묻고 있었죠.”
“어, 음…… 그런데 영어가 맞긴 한 건가요? 전 하나도 못 알아듣겠던데 말이죠.”
“우루드어에 영어를 섞어서 말하는 거예요. 인도와 파키스탄 등지에서 쓰이는 언어죠. 저는 그쪽에서 온 직원들과 자주 마주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익혀지더라고요.”
영어, 불어, 중국어. 거기에 우루드어까지 할 줄 알다니. 메이는 외모만 엘리트가 아니었다.
“영어로 대화는 안 된대요?”
“인도 출신은 영어를 곧잘 하지만 파키스탄 출신은 좀 서툴러요. 듣고 쓰는 건 잘 하는데 말하는 게 힘든가 보더라고요.”
그게 말이 돼? 라고 되묻기엔 한국서 그런 사람을 너무 많이 봐온 터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 내부에서도 그들을 따라 한참을 이동했다.
커다란 자물쇠가 달린 정문을 우회해 좁은 복도로 들어간다.
그곳의 조잡스러운 그래피티 사이에 걸린 천 쪼가리를 들춘다.
그러자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개구멍이 드러난다.
“여기. 이곳 연구실이다.”
단어로 끊어서 영어를 구사하는 사내.
말투는 딱딱하지만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는 거겠지.
그는 전 U&F에너지의 선임 연구원인 무자파다.
파키스탄의 공학도이던 그를 U&F에너지에서 엄청난 몸값을 약속하고 스카우트했다고 한다.
물론 금융 위기 이후, 그 몸값은 공염불이 됐지만 말이다.
구멍으로 들어서자, 넓은 공동이 나타난다.
층고를 보니 3층 건물의 천장을 다 틔운 듯했다.
“내부 설비가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군요.”
“U&F에너지가 파산하고부터 계속 여길 지켰다나 봐요.”
“지켰다고요? 직원이 왜 파산한 회사를 지킨다는 거죠?”
내가 이해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묻자, 메이도 어깨를 으쓱거린다.
“글쎄요. 체불된 임금이 많은 거 같은데 그거라도 받으려는 생각 아닐까요?”
이미 파산한 회사에 어떻게 체불 임금을 받겠다는 거지? 아리송한 이야기였지만 사람은 저마다의 사정이 있는 법이다.
연구소를 둘러보는데, 무자파가 내게 다가왔다.
“여기, 멀쩡하다. 설비, 건물, 팔려야 무자파가 월급 받는다.”
어순은 엉망이고 단어를 나열하는 수준이었지만, 무슨 뜻인지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U&F에너지에서 파산했을 때, 여길 매각하면 체불 임금을 주기로 했나 보다.
“혹시 설비를 지금 구동해볼 수 있나요?”
“전기 없다. 설비 정상이다.”
설비가 멀쩡하다는 걸 자꾸 어필하긴 하는데, 연구소 꼴을 보니 가동을 한다 한들 제대로 되리란 보장이 없어 보였다.
이들의 실력이라도 보고 싶은데, 다른 방법이 없을까?
무자파는 팔짱을 끼고 고민하는 내 모습을 보더니, 다급하게 손짓 발짓으로 대화를 이어간다.
“설비 가동 안 해도 샘플, 샘플은 있다. 필요하면 확인할 수도 있다.”
“샘플? 리튬 에어 배터리를 말하는 겁니까?”
“맞다. 그거다. 여기서 리튬 에어 배터리 만들었다.”
샘플만 확인하면 U&F에너지와 직원들의 실력을 대번 알 수 있을 터.
“어디 한 번 봅시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무자파는 잡동사니가 쌓여 있는 창고로 들어갔다.
그가 자리를 비우자, 남은 사내들도 저들끼리 한참을 쑥덕거리더니 무자파를 따라 가버렸다.
“저 사람들 뭐라고 한 거예요? 무자파 어쩌고저쩌고하던데.”
메이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말한다.
“어……. 그러니까, 본토 발음이라 저도 확실하진 않는데. 무자파가 또 사기를 당한다, 같은 뉘앙스예요.”
“또 사기를 당한다?”
“아마 U&F에너지에서 일할 때 무슨 일이 있었나 봐요.”
그가 이 건물에서 설비를 지키고 있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잠시 후.
무자파는 자루 뭉텅이 하나를 메고 나타났다.
“여기 가져 왔다. 샘플.”
그러곤 자루를 쏟아붓는데. 자루에 담긴 건, 엄청난 양의 배터리 더미였다.
[U&F 배터리]
시중에서 쓰는 건전지 크기보다 조금 더 큰 원통형 배터리였다.
“무자파. 이거 설명엔 리튬 이온 배터리라고 돼 있는데요?”
“아니다. 리튬 에어 배터리가 맞다. 포장만 그렇게 했다.”
“흠……. 이거 좀 꺼림칙한데.”
제품이 정상 작동하는 데 회사가 파산하진 않았을 터.
난 배터리를 집어 들곤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진짜 정상 작동 하는 겁니까? 구조는 어떻게 만든 거죠? 충전 속도는요? 안정성 테스트는 해봤습니까?”
“작동된다. 안전하다. 충전도 문제없다.”
무자파는 영어를 알아듣는 건 문제없는지 또박또박 단어를 쏟아내며 내게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전문 용어가 섞여서 나오자, 이게 영어인지 우르드어인지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단어를 열심히 추리해 답을 도출하는 수밖에.
한참이나 질문과 답이 이어지다, 한곳에서 이상을 느꼈다.
“어, 음……. 그러니까, 전류도 일정하고 충전도 안정적인데. 충전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말이죠?”
“맞다. 효율 떨어진다. 그래서 실패했다.”
“얼마나 떨어지는 겁니까? 정확한 데이터가 있어요?”
지금까지는 바로바로 대답이 나오던 무자파가 말을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최고 59%. 평소 48.7%…….”
충전과 방전을 번갈아 해야 하는 배터리가 50%까지만 재충전이 된다면, 그건 실패작이나 마찬가지다.
처음 한 번은 50%까지 충전되겠지만 서너 번만 충·방전을 반복하면 10% 내외로 용량이 떨어지니 말이다.
무자파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자신 있게 수치를 말할 수 없었으리라.
난 바닥에 굴러다니는 배터리 더미를 바라본다.
U&F에너지는 이 미완성 배터리를 이미 팔아먹었는지 라벨링에 포장까지 해둔 상태였다.
“무자파, 이걸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회사에서 만드는 이론을 가져왔다. 난 그걸 똑같이 따라 했다.”
“이론대로 따라 해서 만든 게 이 배터립니까?”
“만들었지만 실패했다. 이론 엉터리. 충전 안 됐다. 그래서 내가 다시 만들었다.”
잘못된 이론을 가지고 이 정도 물건을 만들어 냈다고?
말도 안 돼. 지금 시대에 이 정도 완성도라면, 적어도 오륙 년 안엔 리튬 에어 배터리 기술이 완성되었을 것이다.
“배터리 기술이 동네 전파상 수준도 아니고 그렇게 뚝딱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진짜다. 진짜 무자파가 만들었다.”
답답했는지 가슴을 쳐 대는 무자파.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더니. 결국, 배터리 껍질을 이빨로 물어뜯어 안을 보여주는데.
“허. 이럴 수가.”
자연스럽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내가 리튬 에어 배터리를 연구한다고 몇 달 동안 배터리만 분해했던 놈이다.
당연히 쪼개본 배터리만 해도 수백, 수천 개가 훌쩍 넘을 정도였는데.
무자파가 보여준 배터리 내부는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한 만듦새를 하고 있었다.
이 정도 수준이면 배터리에 대한 완벽한 지식이 있어야만 제조할 수 있다.
이거, 흉내 낸 수준이 아니잖아? 대기업에서 만들었다고 해도 믿겠는걸.
이걸로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무조건. 그를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다.
“무자파. 설비를 몽땅 사겠습니다.”
“정말인가?”
“대신 저와 함께 리튬 에어 배터리를 완성합시다. 완벽한 이차전지를 만드는 겁니다.”
환하게 웃던 무자파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진다.
“배터리. 완성 못 한다.”
“저도 리튬 에어 배터리에 대한 데이터가 풍부합니다. 당신과 제가 힘을 합치면 완성품을 만들 수 있어요!”
“절대 안 된다. 돈 받는다. 무자파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
의아할 정도로 완강한 거절이다.
몇 번이나 거듭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한결같았다.
대체 왜?
이유라도 알아야 어떻게 할 거 아닌가.
“후……. 여기서 막히네.”
답답함에 속이 썩어들어 가는 거 같다.
내가 머리를 벅벅 긁고 있자, 지켜보던 메이가 다가온다.
“제가 이야기해 볼까요? 설득은 무리라도 이유 정도는 알아낼 수 있지 싶은데.”
“아뇨, 됐습니다. 싫다는 사람 붙잡고 있어 봐야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럼…….”
메이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무자파를 돌아본다.
“여기 남은 설비를 인수하고 싶다고 U&F에너지 사장에게 연락 넣으세요. 아마 무자파는 다른 연락처를 알 겁니다.”
대금 지급 건으로는 연락두절이던 U&F에너지 사장은 설비 인수 의향에는 재깍 반응을 보였다.
전화를 마친 메이가 말했다.
“U&F에너지 사장인 멜븐 씨는 한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다고 하네요.”
“한 시간이면 여기서 기다리는 게 좋겠군요.”
설비 자체에는 별 관심 없었지만, 인수 조건으로 기술이전을 요구할 생각이다.
그래야 리튬 에어 배터리 개발에 착수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다만, 이미 도산한 기업에 기술이 아직 남아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대표님, 눈이 빨갛게 충혈됐어요. 요즘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아, 그런가요?”
퍼스트클래스를 탄다 해도 12시간의 비행은 굉장히 힘들다.
운동을 꾸준히 해서 체력이라도 받쳐주면 좀 낫겠다만 당최 그럴 시간이 있어야지.
“차에서 좀 쉬는 건 어떠세요?”
“그게 좋겠군요. 메이는 안 쉬어도 됩니까?”
“전 여기서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어요. 혹시 마음을 돌릴지도 모르니까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난 혼자서 차로 돌아왔다.
피로가 누적된 탓인지 차 시트에 기댐과 동시에 눈꺼풀이 내려온다.
“음…….”
그렇게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거 같은데, 어느새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시계를 쳐다보자 벌써 2시간이 지난 시각.
“기절한 거처럼 자버렸나.”
내가 몸을 일으키자, 차 문이 벌컥 열린다.
메이였다.
그녀는 내가 깨어나길 기다렸던 듯하다.
“대표님 깨어나셨네요.”
“완전히 곪아 떨어졌었네요. 혹시 U&F에너지에선 왔습니까?”
“아뇨. 그 양아치는 아직 안 왔네요.”
엥? 양아치?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메이가 U&F에너지 사장을 부르는 호칭이 멜븐 씨였는데, 그새 양아치로 바뀌어버렸다.
어딘지 뚱한 얼굴로 입을 달싹거리는 메이.
아아, 이거 잘 알지. 우리 누나가 자주 하는 표정이니까.
이건 ‘나 지금 화났으니까. 왜 화났는지 물어봐 주세요. 빨리요!’라는 신호다.
“메이, 무슨 일 있어요? 표정이 안 좋네요.”
그녀는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 말을 토해낸다.
“제가 무자파와 이야기를 좀 해봤는데요. 그가 미국에 넘어온 계기는 U&F에너지가 현지에서 스카우트해서였다더군요.”
“파키스탄 현지에서 데려왔다고요?”
“U&F에너지는 무자파 말고도 인도와 파키스탄, 필리핀 등지에서 많은 인력을 데려왔어요. 현지 사정에 어두운 인력을 데려다가 싸게 쓰려는 꼼수죠.”
이쪽 업계에선 아시아 쪽에서 인력을 픽업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그쪽 인력은 언어장벽도 옅을뿐더러, 급여가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런데 글쎄, 미국에 도착한 뒤론, 급여는 일부만 지급됐고. 서류를 빠뜨리는 방법으로 그들에게 불법 체류자 딱지를 붙였대요!”
무슨 IT판 염전 노예도 아니고 직원을 잡아두려고 불체자로 만들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
메이는 같은 타지 생활을 한다는 동질감 때문인지, 감정이 격해져 울분을 토하며 말을 이었다.
“그 때문에 무자파는 재취업도 못 하고 노점상을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했대요. 아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예요?”
U&F에너지의 사장이라는 놈. 완전 개새끼잖아?
나라도 저런 꼴을 당하면 지독한 인간불신에 빠졌을 거다.
불현듯, 중소기업에서 착취당하며 일했던 지난날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개인 시간 따위 없이 아침 해가 뜨면 출근해 늦은 밤에 퇴근하는 쳇바퀴 같은 일상.
그럼에도 회사는 매년 임금협상만 다가오면 경기가 어려워지고 어쩌고저쩌고 지껄여댔지.
사장의 외제차 3대는 매년 바뀌었었지만 말이야.
“지옥이 아까울 개자식이군요.”
그때였다.
검은색 고급 세단 한 대가 건물로 다가온다.
“대표님, 드디어 왔나 봐요.”
혹시 했지만 역시 나다.
등장한 차는 벤츠 S클래스 최상급 모델.
순수 찻값만 억대에 차량 유지비까지 고려하면, 직원들 월급은 주고도 남았을 거다.
그럴 의지만 있었다면 말이다.
개같이 일한 직원들은 월급을 못 받아서 노숙자가 됐는데, 망한 회사의 사장이란 놈은 억대 승용차를 몰고 다니다니.
법적으로 어떻고를 떠나서, 인간으로 할 짓인가 싶다.
건물 입구에 고급 세단이 떡하니 멈춘다.
먼저 열린 운전석에서 운전사로 보이는 젊은 사내가 내린다.
문을 열어 줄 때까지 상석에서 느긋하게 차에서 기다리는 녀석이 U&F에너지 사장이리라.
상황을 지켜보는 내 눈매가 가늘어진다.
그 여유로움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두고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