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47화
배기수가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계속 통화하고 싶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일단 바꿔 주세요.”
얼른 전화를 넘긴다. 마치, 폭탄을 건네주는 것처럼 말이다.
“닉스 대표, 강현웁니다.”
-요즘 잘 나간다더니, 그 소문이 사실인가 보네. 통화하기 이렇게 힘들어서야.
“영양가 없는 전화까지 받을 만큼 한가하지 않아서 말이죠.”
-그놈의 싹수하곤. 너, 알량한 재주로 설치다가 큰코다친다.
“재벌 집에서 태어난 재주밖에 없는 그쪽만 하겠습니까.”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가 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쯤에서 육두문자가 한 번 나오리라 생각했는데, 예상을 깨고 정상적인 대화가 이어진다.
-이렇게 나오리란 건 예상했으니 넘어가지. 개인적인 감정은 접어두고 업무적인 대화를 하고 싶은데.
“지금은 제가 좀 바빠서요.”
-……좋아. 언제 한 번 찾아갈 테니,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고.
뚝.
흠, 의외다.
대놓고 긁어 댔는데도 참는 걸 보니, 진짜 닉스에 투자할 생각으로 전화한 걸까?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의 닉스는 닉스 챗 덕분에 투자하겠다는 투자자가 넘쳐난다.
그런데 굳이 재벌 아들내미와 엮여서 피곤해질 이유는 없지 않은가.
* * *
닉스 서클이 닉스 챗과 연동된 첫날.
1000명을 간신히 넘었던 닉스 서클 회원은 단번에 10만 명을 돌파했다.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 고작 3시간 동안 가입 받은 숫자가 10만이었으며, 지금은 일부 서버가 불안정한 탓에 가입을 막아둔 상태다.
손 놓고 있다간 멀쩡한 서버도 과부하로 뻗을 지경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사무실에선 총괄팀장인 서진서의 진두지휘로 복구 작업이 한창이다.
“추가 서버 언제 가능하대요? 늦어도 저녁까진 정상화해야 한다고요!”
“배기태 팀장님이 직접 서버를 확인하러 가셨습니다. 급한 대로 다른 업체 쪽에도 연락해볼까요?”
“어디든 좋아요. 가능한 곳은 다 연락 넣으세요.”
“알겠습니다.”
전쟁터 같은 사무실의 분위기완 다르게 대표실의 분위기는 느긋함, 그 자체였다.
난 편한 자세로 기댄 채 닉스 서클에 대한 반응을 모니터링했다.
-디자인은 깔끔하네.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다고 할까? 역시 닉스 챗을 디자인했던 디자이너가 만들었다더니 그 실력 어디 안 가지.
└그 사람이 애플폰4도 디자인했다더라고. 애플에서 스카우트했는데 거절하다던데.
└미친, 애플 입사를 거절한다고?
-간결한 인터페이스도 장점이야. 꼭 필요한 부분만 배치하고 나머지는 옵션으로 숨겨 버렸어.
└페이스북보다는 가볍지만, 트위터보다 부가적인 요소가 많다. 이거, 사용자만 많으면 대박 날지도?
└이미 닉스 챗 쓰는 사람들은 먹고 들어가는 거라 무난히 성공할 듯. 플랫폼 연계는 신의 한 수. 친구들 따로 등록할 필요가 없음.
└이런. 오전에 가입했어야 했는데, 지금은 막혔죠? 서버 다운 이라니, 닉스 챗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조금 실망.
└그만큼 사람이 많이 몰렸다는 거 아닐까?
드문드문 서버에 대한 불만 사항도 있었지만, 오픈 첫날이라는 걸 고려해서 대부분 이해하는 분위기다.
“이 정도면 쾌조의 출발이라 할 수 있으려나. 내가 개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말이야.”
물론 네티즌 반응만으로 성공을 확신한 건 아니다.
대표실로 쉴 새 없이 넘어오는 팩스와 우편, 거기다 미팅을 원하는 투자자들의 전화가 빗발치는 게 성공의 시그널이었다.
그들은 돈 냄새 맡는 데 전문가였으니까.
사무실의 소란이 어느 정도 잦아들자, 서진서가 대표실로 들어온다.
그녀는 목이 쉬었는지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표님, 죄송해요. 만반의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예상 트래픽의 10배가 몰렸으니, 어떤 준비를 했어도 서버는 퍼졌을 겁니다. 이번 일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니, 복구에만 최선을 다해 주세요.”
“옙, 일단 2시간 뒤 서버 리셋을 한 번 진행하고 가입을 재개할 생각이에요.”
“2시간이라…… 가능하겠어요? 너무 촉박한 거 같은데.”
“촉박해도 해낼 수밖에 없죠. 오늘은 첫 날이라 더 중요하잖아요.”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무리하다가 다른 서버마저 뻗으면 일이 더 커진다.
“지금까지 회원가입을 신청한 회원은 따로 분류해뒀죠?”
“예, 임시 데이터를 따로 저장시키고 [가입대기] 상태로 돌려뒀어요. 아이디 정보만 있으면 나머지 정보는 닉스 챗에서 따오면 되니까요.”
“잘하셨습니다. 현재 가입 대기 인원부터 파악해주세요.”
“파악은 끝났습니다. 대기 인원만 30만 명이 넘었고, 지금도 그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어요.”
오픈하고 겨우 6시간이 지났는데 40만 명이라니.
대부분이 닉스 멤버십 승격을 노리고 가입해오는 허수라 해도 엄청난 실적이다.
운영에는 최대한 개입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가 패닉 상태에 빠지기 전에 힌트를 슬쩍 던져 줘야겠다.
“운용 서버는 계속 열고, 가입 서버는 계속 막아두세요.”
“예? 전부 여는 게 아니라요?”
“서버가 폭주하면, 폭주하는 나름대로 좋은 점이 있습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두 손을 마주친다.
“아! 오늘 가입자가 몰리는 걸 홍보로 쓰시려는 거군요?”
“많은 인원이 몰렸다는 것만큼 큰 홍보 수단은 없죠. 서버는 천천히 열어도 되니까 공지사항부터 올리세요. 50만 명이 몰려도 버틸 서버를 준비했으나, 순간적으로 100만 명이 몰려서 서버가 퍼졌다고 말이죠.”
실제론 순간적으로 10만 명이 몰렸지만, 원래 홍보에는 조미료를 팍팍 치는 거다.
서진서가 대표실을 나가자 바통 터치하듯 배기태가 들어온다.
“강 대표님, 손님 오셨는데요.”
“누가 찾아오면 저 없다고 하라 했을 텐데요.”
나도 모르게 신경질적인 말투가 나온다.
새벽부터 닉스에 투자하겠답시고 연락해 오는 투자자들이 많아서 더 그런 듯하다.
“어, 그게…… 대표님 있는 거 알고 있다고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터라.”
“대체 누구기에 그런 짓을 하는 겁니까?”
그때, 문이 열리며 사내 한 명이 들어온다.
잘 아는 도련님이다.
“건방지게 내가 찾아오도록 하다니. 제법이야, 강현우.”
SG그룹의 막내아들, 신용화였다.
“까인 지 하루 만에 찾아오시다니, 제법 급하신가 봅니다?”
“어. 내가 좀 많이 급해.”
우리 눈치를 보던 배기태는 슬쩍 방을 빠져 나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용화는 대표실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다.
“급하시면 고개라도 좀 숙여 보시죠?”
“웃기는 소리 마. 그런다고 네가 안 해줄 걸 해주진 않을 거 아냐. 선수끼리 왜 이래?”
난 의자에서 일어나, 그의 맞은편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그럼 왜 왔습니까? 시간 죽이러?”
“아니. 투자하러.”
“투자는 안 받습니다. 아니, 설령 투자가 필요하다 해도 SG그룹 돈은 필요 없습니다.”
“돈에 이름이라도 달렸어? 누구 돈이든 무슨 상관이야.”
“제게 이빨을 한 번 드러냈으면, 그걸로 끝입니다. 언제 배신할지도 모르는 사람과 엮이고 싶진 않군요.”
“이거 참. 꽉 막혔군.”
신용화는 품에서 담뱃갑 하나를 꺼내 든다. 그곳엔 일반 담배가 아닌, 담배 담배가 가득 들어 있었다.
갑에서 2개를 꺼내더니 하나는 내게 건네준다.
“담배 끊었습니다.”
“재미없는 놈.”
그는 능숙하게 담배를 세팅하며 말을 이었다.
“난 너완 달리 성공을 위해서라면 개인적인 감정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한들, 닉스와 SG그룹은 사업적으로 겹치는 게 너무 많습니다. 냉정하게 따져도 서로 총구를 겨눈 경쟁자죠.”
“필요하다면 어제의 적이 오늘의 전우가 될 수도 있는 거지.”
“그럼 다른 전우를 찾아보시죠. 닉스보다 호의적인 곳도 많을 텐데요.”
명백한 축객령. 그럼에도 그는 요지부동이다.
어제 전화도 그렇고, 자존심 덩어리인 재벌집 자제의 행동치곤 의외다.
“꼭 닉스에 투자해야 할 이유가 있어 보이는군요.”
“까놓고 말해서 단기 실적이 필요해. 그것도 세상이 깜짝 놀랄 정도의 어마어마한 실적 말이야.”
“지분 싸움 때문입니까?”
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그의 손이 멈췄다.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신용화.
“너, 그걸 어떻게 안 거냐?”
“콧대 높은 재벌집 사람들이 급해서 낑낑거릴 땐, 항상 지분이 이유더군요.”
“칫. 말하는 꼬락서니 하곤.”
그는 담배를 한 모금 빨고 이야길 이어나간다.
“오마이투데이가 NHU에 넘어가고, SG컴즈의 모바일 전환은 모회사인 SG텔레콤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과정에서 뒷전으로 밀려 버렸지. 그래서 난, 몽골로 떠났다. 한국에 남아 있어 봐야 재기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몽골은 SG텔레콤이 내수기업이라는 딱지를 떼기 위해 진출한 곳이다.
선로부터 직접 깔아서, 이동 통신 서비스를 했지만 2009년에 쫄딱 망해서 철수하는 거로 아는데.
“어찌 몽골 진출은 성공했고, 난 기회를 잡았어. SG텔레콤에서 키를 잡고 움직일 기회 말이야.”
“몽골 진출이 성공했다고요?”
내가 놀란 표정으로 되묻자 그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내가 성공하면 이상해?”
“그런 건 아니지만, 조금 의외군요.”
“솔직히 말하자면 거의 공짜로 퍼주다시피 해서 자리를 잡았다. 완전한 성공은 아니지만 몽골 내 2위 점유율을 달성했으니 나쁜 결과는 아니야.”
통신 사업은 손해를 보더라도 점유율을 유지하면 나중에라도 수익이 나는 시스템이다.
문제는 그 손해를 어디까지 감수할 것이냐를 판단하는 게 힘들다는 거고, 극단적인 손해를 버틸 만큼 강심장인 경영진이 드물다는 거다.
단기적으론 실적이 바닥에 처박히니 말이다.
본디 실패할 몽골 진출을 녀석이 개입해 성공으로 바꿨구나.
신용화,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다.
“어쨌든, 덕분에 2년 동안 SG텔레콤을 경영할 기회를 얻었다. 그 안에 아버지가 흡족할 만한 실적을 낼 수 있다면 뒷전으로 밀렸던 내게도 지분이 돌아올 테지. 아버지는 지독할 만큼 성과를 중시하는 분이니까.”
“2년이면 너무 짧군요. 게다가 한정된 내수를 나눠 먹는 통신 사업이 크게 실적을 낼 방법도 없을 텐데요.”
“직접 성과를 낼 수 없다면, 크게 성과가 날 기업에 투자하면 돼. 그게 네가 쥔 닉스다.”
예전 대화에서 느꼈지만, 신용화에게는 선견지명이 있다.
그런 녀석이라면 닉스 챗과 닉스 서클의 파괴력을 누구보다 잘 알아봤겠지.
난 짐짓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닉스에 투자하고 싶다, 이겁니까?”
“단순한 투자가 아니야. 닉스 챗과 닉스 서클이 연계된 시점에서 포털서비스인 세이트와 SG텔레콤의 서버 운용력이 더해진다면 국내 1위인 NEVER를 넘어 설지도…….”
난 그의 말을 중간에서 자르고 들어갔다.
“깔끔하게 본론만 말해주시죠. 제가 투자받을 만한 메리트가 뭔지.”
“투자받는 메리트? 거액이 들어온다는 데 어떤 메리트가 더 필요하지?”
“알면서 말 돌리지 마시죠. 닉스는 SG텔레콤 말고도 투자받을 곳이 널렸습니다. 이미 날갯짓을 시작한 유니콘 기업엔 한 다리 걸쳐보려는 사모펀드나 벤처 캐피털이 발에 챌 정도로 많습니다.”
내가 말을 쏟아내자 신용화가 눈을 이리저리 굴려댄다.
“단순 투자로는 제가 승낙하지 않으리란 거, 모르고 오진 않았을 텐데요. 특별한 패를 가져 왔으면 지금 까세요.”
“이래서 눈치 빠른 놈은 싫다니까.”
담배을 비벼 끈 신용화는 서류뭉치 하나를 꺼내 들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서류는, SG텔레콤이 5000억 원 규모를 닉스에 투자하겠다는 계약서였다.
최근 투자서류를 지겨울 정도로 읽어봤던 나다. 순식간에 요점만 파악해서 내용을 훑어 나간다.
“음?”
끝까지 읽었음에도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다.
뭐지, 이 평범한 서류는? 이걸로 먹힐 거라 생각한 건가?
내 표정을 보던 신용화가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봉투 안에 서류 한 장이 더 있다. 진짜는 거기야.”
봉투 속에 숨어 있던 서류를 펼쳐 든다. 그곳엔 빼곡하게 쓰인 추가 계약 사항이 있었다.
“이거…….”
“그래, 이면 계약이다.”
지금까지 읽었던 서류는 정상적인 지분 투자 계약이었지만, 마지막 서류에 적힌 내용은 전혀 정상적이지 않았다.
닉스는 SG텔레콤과의 투자를 받은 후, 3년이 지난 시점부터 투자금을 반환할 수 있다.
반환과 동시에 닉스는 지분 전량을 돌려받을 수 있다.
투자금을 갚는 시점에서 지분을 돌려받는다?
이건 SG텔레콤에서 닉스에게 무상으로 5000억을 대출해준다는 소리나 같았다.
신용화,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