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39화
“이번에 승인된 금액은 총 500만 달러입니다. 닉스 소프트의 지분 14%를 NNB캐피털에 예탁하는 조건으로 3년 후 만기일 일시금 상환조건입니다.”
서류를 읽어주고 있는 사내는 NNB캐피털에서 나온 김재천 상무다.
이미 Sol에너지와 NG소프트 건으로 좋은 관계를 맺었었기에, 이번에는 해외 벤처 캐피털 업체 소개를 부탁했었다.
그가 미국의 벤처 캐피털 업체를 연결해줄 거란 예상과 달리, NNB캐피털 미국 본사 쪽과 다이렉트로 다리를 놔줬다.
NNB캐피털은 벤처에 투자하는 곳이 아니었기에 좀 의아스러웠지만.
뭐, 어찌 됐든 내 입장에선 투자만 받을 수 있으면 그만이다.
“대출 형식이 아니라 지분 투자 형식을 적용하면 훨씬 더 좋은 조건이 가능합니다. 대부분의 스타트업들도 지분 투자 형식을 선호하고요.”
“급전이 필요하다고 곳간 열쇠를 넘길 순 없지 않습니까?”
내 말에 김재천 상무가 손사래를 친다.
“열쇠를 넘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분은 최소 경영권 유지만 남기면 아무 문제없으니 하는 말이죠. 꺼림칙하시면 상환전환우선주 형식은 어떻습니까? 경영권을 보장하면서 대규모 투자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들리는 얘기론 사업을 확장하면서 여기저기 필요한 자금이 많다고 하시던데요.”
김재천은 단 이틀 만에 닉스에 대해 조사를 마쳤나 보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 제 대답은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도 더 권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본사 차원에서 내려온 지시라 형식적으로 안내해 드린 것뿐이니까요.”
싱긋 웃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자, 그럼 서류는 충분히 검토해 보시고, 저희 지점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이번에도 강현우 대표님 덕에 본사에도 생색낼 수 있게 됐네요.”
“저야말로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마친 김재천이 서류를 훑고 있는 매형에게 시선을 돌린다.
“준오야, 나 가 본다.”
“그래 다음에 밥 한번 먹자.”
진심이 0% 담긴 인사치레다.
“저 녀석, 항상 저런 식이지. 대표님 다음에도 불러 주세요.”
김재천은 한 번 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어찌 숨통은 좀 틔었네.”
서류를 내려놓고 기지개를 쭉 켜는 매형.
난 새로 산 원두커피 머신을 조작해 커피를 두 잔 뽑아낸다.
“대출 승인이 생각보다 쉽게 낫네요.”
“아마 애플과 로열티 계약 건이 결정적이었을 거다. 요새 애플폰이 잘 나가다 보니, 애플폰과 관련된 스타트업이라면 벤처 캐피털들이 투자를 후하게 한다니까.”
“그래도 시일이 더 걸릴 줄 알았는데 말이죠.”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대출 신청에 500만 달러를 제시한 건 찔러 보기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필요한 돈은 200만 달러는 될까?
이렇게 잘 풀릴 줄 알았으면 통 크게 2000만 달러 정도 불러 볼 걸 그랬다.
“거기다 재천이가 중간에서 힘을 쓴 탓도 있겠지. 녀석은 저번 대출 건으로도 재미 좀 봤었잖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제가 매형 대신 밥 한 번 사드려야겠어요.”
“안 그래도 돼. 이번 건으로 쟤한테 떨어지는 수당만 억대일걸?”
“그래서 입이 귀에 걸려 있었군요.”
“아무튼, 총알이 생겼으니 이번 오마이투데이 인수 건도 해 볼만해졌구나.”
500만 달러면 오마이투데이를 인수하고도 넘치는 돈이다. 미국발 금융 위기 덕에 환율이 1달러당 1500원이 넘어가고 있었으니까.
“매형네 회사에선 기업 가치를 얼마로 책정했대요?”
“오마이투데이만 샀을 때, 최소 6억. 변수가 있다면 페이스북에서 트위터 인수가를 5억 달러나 부른 바람에 소셜 웹 쪽 업체가 전체적으로 거품이 심해졌어.”
내가 아는 미래의 오마이투데이는 NHU가 인수하게 된다.
정확한 인수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대략 20억대였던 건 확실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마이투데이를 무조건 대기업에 매각하려 했던 정성도 대표가 마음을 돌렸다는 것 정도겠지.”
“다른 정보는 없나요?”
“있지, 왜 없겠어. SG컴즈 쪽에서 이번 인수전에 잔뜩 힘을 주고 있다더라. 너, 그쪽 전무인가 하는 사람한테 무슨 말을 했기에 그러는 거야?”
“음……. 현실적인 충고를 해줬달까요.”
“재벌 아들내미한테 충고했다고?”
자세를 고쳐 앉은 매형이 황당한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어쩔 수 없었어요. 그렇게라도 안 했으면 이번 인수 경쟁에서 들러리만 섰을걸요.”
내 계획은 신용화의 생각을 정성도 대표에게 흘려, 대기업 혐오감을 심는 거였다.
그들과는 달리 운영권만 확실하게 보장해주면 SG컴즈를 제치고 인수를 따낼 수 있다는 판단이었으니까.
하지만 정성도 대표는 오마이투데이의 운영권보다, 돈을 택했다.
3곳에서 경쟁 입찰이 진행되면 인수가가 커질 테니까 욕심이 났겠지.
“꼭 오마이투데이가 필요하면 20억 정도만 써보는 건 어때? NHU나 SG컴즈도 그 정도는 안 써낼 거 같은데.”
“글쎄요. 그건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죠.”
이를 빡빡 갈던 신용화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가 쉽게 물러서려 할까?
* * *
성동구에 있는 SG텔레콤의 신사옥.
무리해서 SG그룹이 사옥을 지은 이유는 그룹의 규모가 커진 탓도 있었지만, 흩어져 있던 자회사를 한데 모아 신속한 의사결정을 내리기 위함이기도 했다.
특히 꼭대기 층에 마련된 회의실은 사장급 이상에게만 출입이 허용된 곳으로, 회사의 중대한 사안들이 결정되는 곳이었다.
“형님, 진짜 왜 이러십니까. 이미 시장의 대세는 스마트폰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번이 벌써 네 번째 같은 말이다.
신용화는 자신의 형님이자, SG텔레콤을 이끄는 실세인 신석호를 설득해야만 했다.
“용화야. 말 빙빙 돌리지 말고 본론만 간단히 말해라.”
“아까부터 하고 있잖습니까. 세이월드와 세이트온의 모바일 이식, 터치폰용이 아니라 스마트폰용으로 하게 해주십시오.”
“네가 말하는 스마트폰? 이걸 말하는 거냐?”
신석호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든다. 오성전자의 스마트폰, 옴레아였다.
“이딴 게 대세가 된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이 쓰레기처럼 조잡하게 만든 휴대폰이?”
신석호는 옴레아만 보면 울화통이 터졌다.
SG그룹은 평소 오성전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터라, 신제품으로 밀고 있는 옴레아 프로젝트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했었다.
그렇게 탄생한 스마트폰이 SG텔레콤 전용인 T옴레아였는데.
신석호는 T옴레아가 타 통신사보다 출시 일정이 빨랐기에 시장 점유율을 늘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다.
하지만 결과는 누구나 알다시피 시궁창이었다.
T옴레아를 샀던 소비자의 불만은 폭주했고, 반품률은 일반 터치폰의 10배에 달했다.
덕분에 눈치를 보던 타 통신사는 오성전자에게 옴레아의 발주량을 대폭 줄여 통보했고,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반대로 오성전자만 믿고 T옴레아를 선 출시했던 SG텔레콤은 엄청난 악성 재고를 떠안아야 했다.
“내가 이 쓰레기 같은 폰만 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다. 알긴 아는 거냐!”
소릴 질러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지 신석호는 옴레아를 바닥에 내동댕이쳐버렸다.
“오성에서 튼튼하게는 만들었나 보네요. 바닥에 던졌는데 멀쩡한 걸 보니까.”
신용화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옴레아를 주워다 테이블에 올려둔다.
그러자 바로 쓰레기통에 집어 던져버리는 신석호.
“나랑 농담 따먹기를 하러 왔다면 당장 돌아가.”
“저도 진지합니다. 일단 이거 한 번 써보고 이야기하시죠.”
신용화는 안주머니에 넣어뒀던 애플폰3G를 꺼내 들었다.
“이걸 한 번 써보시면 스마트폰이 어떤 물건인지 알게 될 겁니다.”
“용화야. 내가 안 써봤을 거 같으냐? 출시 전부터 프로토 타입을 받아 봤었다. 잘 만든 기기더구나. 오성이나 KG에서 만든 장난감 따위완 다르게 말이다.”
“그럼, 왜……?”
“그건 국내에 못 들어온다.”
통신 3사는 3G 데이터 요금으로 엄청난 폭리를 취해왔다.
그런 그들에게 자유로운 데이터 통신을 가능케 하는 애플폰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막는다고 해서 계속 막아 질 거 같습니까? 형님, 세상은 변했습니다.”
“안 변했어. 아니, 내가 안 변하게 만들 거다.”
신석호는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무슨…… 이, 이거?”
그건 KG전자가 스마트폰 사업을 포기하고 기존의 폴더폰이나 터치폰에 주력하겠다는 내용의 보고서였다.
“이런 바보 같은 결정을 내리다니. 미국 시장을 보고도 느낀 바가 없단 말입니까?”
“미국에서 애플폰이 잘 나간다 해도 순간의 유행일 뿐이라고 판단했겠지. KG전자에서 맥킨지에 의뢰한 보고서에도 스마트폰보다 기존 휴대폰 라인업에 주력하는 게 낫다고 분석했다더군.”
맥킨지? 통계치나 보면서 예언자 행세를 하는 놈들이 뭘 안다고 스마트폰 사업을 예단한단 말인가? 기가 차서 신용화는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이미 다른 업체들도 방향을 바꿨고, 오성만 뭔가 해보겠다고 설쳐대고 있다.”
“스마트폰 사업은 이제 시작입니다!”
“시작? 벌써 끝났어. 애플을 제외하고 성공한 스마트폰이 있더냐? 오성전자 역시 이번 옴레아가 실패했으니 스마트폰 사업에서 손 떼는 건 시간문제다.”
“…….”
“용화야, 우린 거대한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이다. 알량한 허상에 정신이 팔려 주변을 돌아보지도 않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모르는 소리 말고 돌아가거라.”
서류를 움켜쥔 신용화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스마트폰이 허상이라고요? 모르는 건 형님입니다. 소비자의 니즈가 반영되지 않은 제품을 억지로 만들어서 강요해봐야 그 끝은 외면입니다.’
기업의 경영자라는 사람들이 이렇게 근시안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이대론 안 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판을 뒤집어야만 했다.
“아버지를 만나 봐야겠습니다.”
“용화야!”
“형님 말이라면 다 따르는 착한 동생이었지만, 이젠 아닙니다. 누가 뭐라 해도 저는 제 길을 가겠습니다.”
“너, 이놈이…… 거기 안 서? 야! 신용화!”
신석호의 고함을 뒤로하고 회의실을 빠져나간다.
“후…….”
왜 이렇게 멍청한 짓을 했을까?
평소의 그였다면, 형님에겐 고개를 끄덕여 주고 찬찬히 다른 방법을 모색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리 조급하게 한 걸까? 역시, 그 녀석 때문인가…….’
강현우.
녀석의 행보가 너무 거슬렸다.
단 한 달 만에 애플의 디자이너 자리를 꿰찬 것으로도 모자라, 독자적으로 모바일 메신저 사업까지 진행하고 있다. 거기다 이번에 노리는 건 소셜미디어라고?
녀석의 노림수는 뻔하다.
모바일 네트워크 접근성이 뛰어난 애플폰 사용자를 중심으로 메신저를 활성화하고, 그걸 토대로 소셜미디어까지 연계시킬 생각이겠지.
“건방진 녀석.”
신용화는 언제부턴지 자신의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이건 초조할 때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신경 쓰여. 신경 쓰인다고.”
신용화가 이렇게까지 신경을 곤두세운 이유는 딱, 하나.
모바일 메신저와 소셜서비스의 결합.
이건 세이월드와 세이트온, 세이유를 결합해서 모바일 시장을 먹으려 했던 자신의 생각과 완전 판박이였으니까.
집무실에 도착한 신용화는 급히 비서실 직원들을 호출했다.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원이었다.
“전무님 부르셨습니까.”
“강현우, 그 녀석 정보 캐라는 거 어떻게 됐습니까?”
“저번에 서류를 드렸습니다만…….”
신용화는 괜히 짜증을 내며 말했다.
“제가 더 알아 오라고 했잖습니까.”
“그, 그것이…….”
앞에 있던 직원이 말을 더듬고 있자, 다른 녀석이 앞으로 나선다.
“최근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강현우의 닉스 소프트는 투자 형식의 대출을 받았다고 합니다.”
“대출? 지분 투자가 아니고?”
“예, 저도 의아해서 여러 번 확인했는데. 확실히 대출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오마이투데이의 인수 자금으로 쓰일 듯합니다.”
신생업체의 대출이면 많아 봐야 백만 달러 수준일 터. 그 정도 액수라면 이번 인수전의 이변은 없다.
한시름 놓게 된 신용화는 긴장을 풀고 의자를 뒤로 젖힌다.
“오늘이 경쟁 입찰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죠?”
“맞습니다. 최고의 전문가들이 갔으니 좋은 소식이 올 겁니다.”
녀석이 준비한 카드가 뭐든 상관없다.
이번에 오마이투데이를 SG컴즈가 먹어버리면 놈의 계획은 물거품이 될 테니까.
‘하지만 그 자신감은 신경 쓰여. 뭔가 준비한 카드가 있는 걸까?’
그때였다.
삐리릿- 삐리릿-.
주머니의 휴대폰이 울어대기 시작했다.
-전무님, 입찰 결과가 나왔습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저희가 인수했습니까?”
찰나의 정적이 흐른다.
신용화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킴과 거의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이, 이…….”
신용화는 화가 솟구쳐 전화기를 부술 기세로 움켜쥐었다.
분을 삭이려고 이를 꽉 무는 와중에 이어서 목소리가 넘어온다.
-최종 입찰가 52억 9천만 원으로 NHU가 오마이투데이를 소유한 투데이즈파티를 인수하게 됐습니다.
“NHU라고? 닉스가 아니라?”
-예. 죄송합니다.
자금력이 빵빵한 NHU가 있는데, 왜 닉스가 인수했다고 생각했을까?
‘강현우. 큰소리치더니 허풍이었구나.’
그런 생각과 동시에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죄송할 거 없습니다. 그쪽에서 52억이나 불렀는데 어쩔 수 없죠.”
-그럼, 자세한 사항은 직접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아, 잠깐. 잠깐만요.”
-예, 말씀하시죠.
“혹시 닉스에서 부른 입찰가는 얼마인지 아십니까?”
-닉스 측에선 10만 원을 제시했습니다.
뭐? 10만 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