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37화
잠시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사라진다.
“브릭? 제 이야기 듣고 있어요?”
-아, 듣고 있습니다. 소셜미디어 서비스를 한다는 것과 어…… 그리고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끌어 내린다는 말이었죠? 뭔가 엄청난 말을 들어 버린 거 같네요.
“허무맹랑한 소리 같습니까?”
-음, 솔직히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헛소리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전화를 끊었을 겁니다. 하지만 보스는 최근에 보여 준 게 너무 많아서……. 아, 저도 모르겠네요. 너무 혼란스럽군요.
“닉스 챗은 닉스 챗대로, 소셜미디어는 소셜미디어대로 독립적인 운영형태가 될 겁니다. 그러니 닉스 소프트에선 다른 걱정하지 마시고, 3월까지 베타 버전의 완성을 목표로 진행해 주세요.”
-지금 분위기라면 3월까지 베타 버전 완성은 무리 없이 가능할 거 같네요. 아, 그런데 한 가지 의논할 게 있는데 말이죠.
“말씀하세요.”
-닉스 챗을 무료로 개방하자고 하셨는데, 그럼 수익은 어디서 가져올 생각인 거죠? 광고를 넣을 건가요? 아니면 후원?
브릭이 독자적으로 개발했던 모바일 메신저, 왓츠업의 시작은 유료 앱이었다.
가격은 0.99달러.
그 당시엔 스마트폰도 통신사의 문자 메시지를 써야 했기에, 소비자들은 문자 이용료를 내는 셈 치고 왓츠업을 유료로 구매했었다.
유료 앱은 광고나 별도의 수익 사업이 필요 없다.
덕분에 깔끔한 운영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무료 앱처럼 폭발적인 사용자 모집은 어렵다고 봐야 한다.
“브릭, 닉스 챗에 광고는 일절 안 넣습니다. 후원도 필요 없고요. 우리는 사용자 확보에만 신경을 쓰면 됩니다.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그렇게 하면 회사의 재정 상태가…….
“브릭, 절 믿어요. 당장은 아니겠지만, 사용자 수는 돈이 돼요.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보세요. 그들은 수익이 없어도 돈을 펑펑 쓰고 다닌다고요. 우리도 서비스를 런칭하면 벤처 캐피털들이 돈을 바리바리 싸 들고 달려올 겁니다. 제발 투자를 받아달라고 말이죠.”
-듣기만 해도 의욕이 불끈 솟네요.
“계속 이대로만 해주시면 됩니다. 다른 변동사항 생기면 또 전화하도록 하죠. 그럼, 수고해주세요.”
-예, 보스.
통화가 끝난다.
휴대폰와 함께,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자, 따뜻한 온기가 손끝을 찌릿하게 만든다.
통화한다고 손이 시린 줄도 몰랐나 보다.
“거 참, 일하기 좋은 날씨네.”
* * *
따가운 햇볕 덕에 눈이 떠진다.
“으음…….”
어제도 일찍 자려고 무던히 애썼지만, 새벽 3시가 넘어서 잠들 수 있었다.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된 걸까?
고급 호텔에서나 쓰는 헝가리산 구스 침구나, 피톤치드 디퓨저도 아무짝에 쓸모없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본다.
고급 침구, 고급 가구, 고급 가전제품.
심지어 메모장 옆에 꽂힌 볼펜마저 고급품이다.
이곳은 5성급 호텔인 서울 유진 호텔. 규모나 시설 면에서 국내 최고라 불리는 곳이다.
다른 호텔을 제쳐두고, 일부러 서울 유진 호텔을 선택한 이유는 별것 없다.
그저, 돈을 써보고 싶었다.
돈 써보고 싶었다니까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평생을 아끼며 살아온 중소기업 과장 강현우에겐 버거운 일이었다.
단돈 천 원을 아끼고자 인터넷 최저가를 뒤지고, 리터당 10원 더 싸게 주유하려고 옆 동네 볼일 있을 때만 주유하며 평생을 살았다.
돈을 쥐어주며 쓰라고 해도 어디서,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 턱이 있나.
그래서 억지로 최고급 호텔까지 온 거다.
물론, 아끼고 절약하는 게 나쁜 습관은 아니다. 하지만 며칠 전 만났던 재벌 3세에게 느껴지던 여유.
그건 먹고살기 급급한 서민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때, 불현듯 의문이 솟아났다.
타인에게 비치는 내 분위기는 어떨까?
야심에 찬 사업가? 단순한 폰덕후? 아니면 벼락부자가 된 졸부쯤은 될까?
어쩌면 옛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중소기업 과장 강현우 그대로일지도 모른다.
그들과 같은 인생을 살고 싶은 건 아니다.
단지, 앞으로의 비즈니스를 위해서라면 그들과 같은 분위기를 인위적으로라도 만들 필요성을 느꼈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지. 천천히 바꿔나가는 거야. 아주 천천히.”
말은 그렇게 했다만, 지금도 내 머릿속엔 돈을 써야겠다는 생각보다, 호텔 요금이 비싸니 호텔 예약 비교 앱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가만, 이건 제법 괜찮은 생각이잖아?
호텔, 항공을 묶어서 닉스 챗에 애드온을 추가하면 제법 짭짤한 수입이 될 거 같다.
거기에 중개 수수료를 받고 마일리지도 적립시키면 선순환이 이루어지리라.
꼬르륵-.
한참 동안 사업 생각에 몰두하느라 허기가 몰려온 것도 몰랐나 보다.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대충 주워 입고 문을 나선다.
“혼자신가요?”
“예.”
“테이블 안내 해 드리겠습니다.”
“조용한 창가 자리로 주세요.”
언제부턴가 조식을 꼬박꼬박 챙겨 먹게 됐다.
미국에서부터 호텔 신세를 지다 보니, 버릇이 들었다고 할까.
유럽풍으로 꾸며진 실내와 높디높은 천장. 거기에 달린 휘황찬란한 샹들리에와 늘어선 명화까지.
부담스러울 정도의 화려함은 아름답다기보다, 오히려 날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런 곳을 집처럼 드나드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날 때부터 금수저 쥐고 태어난 녀석들? 아니면 성공한 사업가나 전문직?
첫날 유진 호텔에 도착했을 땐 무리를 해서라도 스위트룸에 묵으려 했다.
돈이 아까운 맘에 이를 꽉 물고 “스위트룸으로 주세요.”라고 했는데, 직원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손님, 만실입니다.”였다.
1박에 200만 원인 스위트룸이 꽉 찰 정도라니. 상류층과 일반인의 엄청난 갭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잠시 후.
간단히 속을 채워줄 크림수프와 커피 한 잔이 준비된다.
수프를 몇 번 떠먹고선 버릇처럼 노트를 꺼낸다.
아직 쓸 만한 태블릿이 없는 시기였기에 생각나는 디자인은 연필과 노트를 애용했다.
닉스 챗과 소셜미디어 서비스의 모든 디자인은 내 몫이었기에 호텔에서도 짬짬이 작업해둬야 했다.
앱의 전체적인 틀은 물론이고 세세한 아이콘 디자인과 작동 애니메이션까지 내 손을 거쳐서 탄생한다.
미래 지향적인 요소를 조금 넣고, 지금 유행에 맞는 스타일도 살짝 식은 섞어준다.
너무 급격한 변화는 거부감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까.
과함과 모자람의 밸런스를 잡는 것.
미래의 디자인에 익숙해진 내게 가장 어려운 부분이 이거였다.
사각- 사각-
완전한 집중 상태로 펜을 끄적이길 얼마나 지났을까.
잠잠하던 휴대폰이 부르르 떨어댄다.
“한참 분위기 탔는데. 누구야?”
짜증 섞인 표정으로 휴대폰을 집어 든다.
“여보세요.”
-닉스 이노베이션의 강현우 씨 맞습니까?
“맞습니다. 누구신지요?”
-투데이즈 파티의 정성도 대표입니다. 오마이투데이 인수 건으로 연락 주셨었죠?
* * *
강남대로에서 한참이나 안으로 들어가야 찾을 수 있는 6층짜리 오피스텔.
외부에서 찾기도 힘들뿐더러 주변 빌딩 덕에 볕 하나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단점을 저렴한 임대료가 상쇄해버린다.
나와 매형은 입구에 있는 안내판을 훑어본다.
[2층 Today’s party Studio]
“여기가 맞네요. 길이 어려워서 긴가민가했는데.”
“자, 어서 올라가 보자.”
투데이즈 파티 스튜디오는 국내의 소셜미디어 서비스인 오마이투데이를 개발한 업체다.
한국판 트위터라 불리는 오마이투데이는 간단한 단문 서비스인 트위터보단 무겁고, 페이스북보다는 가벼운 느낌의 소셜미디어다.
국내 성적은 아는 사람만 아는, 딱 그 정도로 세이월드 덕분에 큰 두각은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다.
“인수 의사를 전달하고 사흘 만에 연락이 오다니 대단한 배짱이네요.”
“자금 사정이 여유 있다는 거겠지.”
인수를 위해, 일부러 매형을 대동했다.
기업의 대표가 20대면 색안경부터 끼고 보는 게 한국 사회였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우린 계단을 단숨에 올라 2층에 도착했다.
마침, 문이 열려 있기에 매형이 슬쩍 안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나 역시 그의 뒤를 따른다.
“호오. 실내는 생각보다 넓은데?”
“그러게요. 스타트업치곤 깔끔한 사무실이네요. 제대로 운영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개인 자리도 넓게 마련돼 있고 구석엔 공기 청정기도 2대나 돌고 있다.
거기다 실내엔 방금 내린 듯한 원두커피 냄새가 은은하게 퍼져 있었다.
매형의 말대로 자금이 궁해 보이진 않는다. 쪼들리면 가장 먼저 줄이는 게 직원 복지였으니까.
“누구세요?”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에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 여직원.
매형은 의뢰인들을 만나느라 몸에 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명함을 내민다.
“반갑습니다. 전 법무법인 청담의 박준오 변호사라고 합니다. 대표님을 만나 뵈러 왔는데요.”
“변호사가 왜 저희 사무실에…….”
그때 안쪽 문이 열리며 푸짐한 체격의 사내가 나온다. 눈꼬리가 축 늘어진 게 가만있어도 피곤해 보이는 인상이다.
“누구신지?”
“반갑습니다. 전 법무법인 청담의 박준오 변호사라고 합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리플레이가 흘러나온다.
“어이쿠, 이렇게 젊으신 분들이 오셨네요. 전 투데이즈 파티의 대표 정성도라고 합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시죠. 유 대리는 커피 좀 부탁해요.”
“예, 대표님.”
우린 사무실 구석에 놓인 간이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각자 앞에 커피가 한 잔씩이 놓인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정성도 대표 쪽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저희 오마이투데이를 왜 인수하려고 하십니까?”
“소셜미디어 서비스의 비전을 보고 인수하려는 겁니다. 단순히 인수해서 수익을 내기보단, 장기적으로 성장시켜 판을 키우려 합니다.”
“허허. 어찌 오시는 분마다 같은 이야기를 하시는지. 말을 맞추고 오신 건 아니시죠?”
음? 오시는 분마다? 벌써 NHU와 인수 이야기가 오간 건가.
오마이투데이는 2009년, 거대 포털 NEVER를 운영 중인 NHU에 흡수된다.
인수된 오마이투데이는 이름을 N투데이로 바꾼 후, 유명 연예인을 앞세워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쳤는데.
해외 서비스인 페이스북과 트위터엔 어쩌지 못하고 밀려나 2013년에 서비스를 접게 된다.
NHU에 먹히기 전에 내가 먹는다. 그래야 닉스 챗과 연계해서 미국에서도 싸워 볼 만할 테니까.
난 신중히 생각을 고른 후 입을 열었다.
“오마이투데이만 파실 생각은 없으실 테고, 투데이즈 파티와 직원 전체를 고용 승계하는 방향으로 진행하면 될까요?”
“인수 후에도 제가 팀을 이끌 생각입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죠.”
일단 자리에 앉혀두고 지켜보면 된다. 능력이 있으면 계속 끌고 갈 것이고, 아니면 단칼에 쳐낼 것이다.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댄 사이, 정성도 대표가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툭 까놓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투자사보다는 대기업 쪽을 선호합니다.”
처음부터 삐딱하게 나온다. 시간을 질질 끌고 연락한 것도 그렇고. 이거, 느낌이 싸한데.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제가 손 털고 빠질 생각이면 인수가만 보겠지만, 전 오마이투데이를 더 키워줄 둥지를 찾으려는 겁니다. 국내 웹 서비스 시장은 대기업이나 통신사에 소속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니까요.”
그의 말처럼 국내 시장에선 소규모 벤처기업이 살아남는 건 낙타가 바늘을 통과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다.
지금 시점에 매각하지 않고 버텼다면 오마이투데이의 서비스 종료는 2013년이 아니라 2009년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쪽이 2배 이상의 인수가를 제시하지 않는 이상, 전 대기업에 매각하는 걸 택할 생각입니다. 막말로 해외 투자사가 운용해봐야 국내에선 결과가 뻔한데, 돈이라도 두둑이 받아둬야 노후까지 놀고먹을 거 아닙니까.”
말이 2배지. 분위기만 보면, 안 팔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난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여기서 새파란 젊은 놈이 나서봐야 오히려 역효과만 날 테니까.
“정 대표님, 저희도 국내에 쓸 수 있는 카드가 많습니다.”
“제가 괜히 이런 선택을 한 줄 아십니까? 국내에선 무슨 수를 써도 대기업 장벽을 넘어 설 수 없단 말입니다!”
그의 말끝에 떨림이 묻어난다.
지금까지 대기업을 상대로 겪은 우여곡절이 많았겠지.
그러니 어쩔 수 없이 NHU에 매각을 결정했을 테고.
어? 잠깐.
대기업을 싫어하는데 대기업에 인수되는 걸 원한다? 이거…… 잘하면 내가 개입할 여지가 있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