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36화
“잡지에 실린 사진은 잘 봤습니다. 그런데 실물이 훨씬 낫군요?”
“과찬의 말씀입니다. 전무님이야말로 훤칠하신 걸 보니, 모델을 해도 되겠습니다? 하하하.”
내 말을 들은 녀석의 움켜쥐는 힘이 더 세진다.
구두 굽이 엄청 높더니만, 아픈 곳을 제대로 찔렀나 보다.
“아, 그보다 신 전무님은 SG컴즈에 지대한 공헌을 하셨나 봅니다? 그 나이에 벌써 전무까지 승진하신 거 보면요.”
“제가 타고 나서 그렇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능력을 쥐고 태어났거든요.”
아무렇지 않게 받아치는 녀석.
재벌 집 아들로 태어난 것도 능력이라 이건가. 재수 없는 놈이다.
“이럴 게 아니라 좀 앉으시죠. 손님이 오셨는데 대접은 해드려야죠.”
“그렇게 하죠.”
쥐고 있던 손을 놓자, 빨간 손에 새하얀 자국이 남아 있다.
우린 달아오른 손을 주머니에 숨기고 말을 이었다.
“우리 수아와는 어떻게 아는 사인지요?”
계속 ‘우리 수아’를 강조하는 거 보니 똥개 새끼처럼 낑낑거렸던 이유가 수아 씨 때문이었구나.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라고 할까요.”
“개인적? 그게 무슨 말인지?”
녀석의 눈에서 스파크가 튄다.
“왜 그러시죠? 제가 개인적인 일까지 그 쪽에게 말해드려야 합니까?”
“너, 이놈이…….”
더 놀려먹었다간 눈에서 광선이라도 쏘아 낼 기세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걸 느꼈는지, 유수아가 앞으로 나선다.
“용화 오빠. 제가 연락을 안 하고 온 건, 금방 왔다 갈 거라서 그랬어요. 화선 선배에게 간단한 조언만 들으면 될 문제였으니까요.”
신용화의 시선이 뻘쭘하게 서 있던 김화선에게로 향한다.
그녀는 난처한 듯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고용자 앞에선 피고용자의 위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그 모습이 과거의 날 보는 거 같아서 가슴이 먹먹해 온다.
“수아야, 그래도 좀 서운하다. 회사에 올 거면 미리 이야기를 해주면 좋았잖니.”
“그거랑 지금 상황이랑 무슨 상관이 있죠?”
“무슨 상관이라니. 나는 그저…….”
그가 유수아의 손목을 잡았지만, 매몰차게 뿌리쳐 버린다.
싸늘하게 굳은 표정의 유수아와 당혹감에 물든 신동화.
재벌 집 아들내미에게 저럴 수 있다니. 그녀가 신동화와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지만, 보통내기가 아닌 건 확실했다.
“수, 수아야?”
“오빠가 온 다음부터 분위기가 어떤지 보세요.”
휴게실의 분위기는 싸하다 못 해 한기가 느껴질 정도다.
아까부터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김화선과 잔뜩 인상을 쓴 유수아. 거기다 입을 다물고 관망에 들어간 나까지.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됐는지, 신동화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선 입을 열었다.
“흠흠. 강현우 씨, 아니 대니얼 강이라고 해야 하나요?”
“편하신 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예, 그렇게 하죠. 그럼, 현우 씨.”
그는 곁눈질로 유수아를 슬쩍 쳐다보곤 말을 이었다.
“방금은 제가 좀 흥분했었나 봅니다. 정식으로 사과드리죠.”
의외다. 내가 생각하던 재벌의 이미지라면 좀 더 뻣뻣하게 나올 줄 알았는데.
어찌 됐든 먼저 고개를 숙여오니 나도 삐딱하게 나올 필요는 없겠지.
“저 역시 실례가 많았습니다.”
간단한 인사만 오갔을 뿐인데도 분위기가 많이 누그러졌다.
“개발자 포럼에서 발표하신 건, 저도 잘 봤습니다. 잡스를 대신해서 발표한 게 아니라, 자유롭게 질문 시간을 가지셨더군요.”
“포럼에 참석하셨습니까?”
“아뇨, 저는 녹화 영상으로 봤습니다. 해외 모바일 관련 포럼은 다 챙겨보는 편이거든요.”
놀랄 일은 아니었다.
국내 IT업계는 해외에서 나온 아이디어나 전략을 참고해서 준비하는 게 일반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너 일가가 직접 해외 트렌드를 챙겨 볼 줄이야. 재벌 3세 중에 쓸 만한 인재라는 말이 괜히 나온 건 아닌가 보다.
“발표보다 변수가 많은 질문을 받는 게 훨씬 힘든 법인데, 단 한 번의 막힘없이 답해내시더군요. 상당히 인상 깊었습니다.”
“질문들이 예상했던 것이라 다행이었죠.”
“하하, 이거 참. 그 질문들을 모두 예상했다니. 애플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는 기업 같습니다. 애플폰을 처음 공개했을 때도 놀라게 하더니 말입니다.”
애플폰의 첫 공개는 2007년이다.
그때부터 해외를 모니터링했단 말인가? 아니면 단순한 허세?
난 그를 떠볼 심산으로 떡밥을 던졌다.
“애플폰이 대단하다 한들, 한국은 외산폰의 무덤 아닙니까? 국내 인증을 넘지 못하면 찻잔 속의 태풍이나 다름없겠죠.”
“전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기존의 고만고만한 외산폰들이야 상관없었겠지만, 이번의 애플폰은 다릅니다. 타사의 스마트폰으로 대체할 수 없는 물건이기에 국내의 진입장벽마저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까지 생각하다니. 녀석, 제법이잖아?
“아시다시피 애플폰의 Wi-Fi와 앱스토어는 데이터료와 독점 웹 서비스로 폭리를 취하고 있는 국내 통신사에 대한 도전입니다. 굳건한 통신사 카르텔이 그걸 용납할까요? 거기다 국내의 제조사는 또 어떻고요.”
“내년 정도면……. 아니, 짧으면 올해 안으로 균열이 생길 겁니다. 눈과 귀를 틀어막아도 시대의 흐름은 어쩔 수 없습니다.”
“너무 앞서 나가시는군요.”
“정말 그렇다고 생각합니까?”
신용화의 시선이 나를 천천히 훑는다.
난 그를 떠보려던 속내를 들킨 듯한 착각이 들어 시선을 피해 버렸다.
“터치폰이 폴더폰과 슬라이드폰을 몰아냈듯, 스마트폰의 시대가 오는 건 시간 문제입니다. 자유로운 네트워크 접근과 휴대성은 조만간 PC 시장까지 위협하겠지요. 그때가 되면 웹 서비스 업체들도 PC보다 모바일에 집중할 겁니다. 아니, 이미 시장은 모바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접어들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신용화의 말은 무엇 하나 틀린 게 없었다.
혜안을 가진 자.
잡스를 마지막으로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국내에도 한 명이 있을 줄이야!
게다가 하필이면 그 녀석이 아군이 아닌, 내 최대의 경쟁사에 있다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
어? 그런데 신용화가 이끄는 SG컴즈가 왜 세이월드와 세이트온을 실패하고 쇠락의 길을 걸은 거지?
그의 시장 예측은 소름 돋을 정도로 정확한데 말이다.
나 혼자 생각해봐야 답은 안 나온다. 그저, 미래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 흘러가길 바랄 뿐.
“현우 씨와는 같은 업계 종사자로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자리를 마련했으면 하는군요. 지금은 제가 방해될 테니, 다음에 시간 날 때 연락 주시죠.”
그는 번쩍이는 명함을 내 앞에 남긴 채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 * *
“수아 씨, 집이 어디예요. 거기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저, 진짜 괜찮아요. 집까지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래도 여자를 혼자 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죠. 으음, 차도 없이 바래다준다고 말하니 이상하네. 그럼 같이 타 드릴게요? 이거도 이상하긴 마찬가진데.”
머리를 긁적이는 날 보고 유수아가 쿡쿡대며 웃기 시작한다.
“웃으니까 훨씬 낫네요.”
“앗, 제가 인상 쓰고 있었나요?”
“예, 휴게실에서 나올 때부터 줄곧 이런 식으로 무서운 표정이었다고요.”
난 과장된 표정으로 미간에 주름을 짓는 거로 모자라 눈을 옆으로 찢어 보인다.
그걸 본 그녀가 더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제발 그만 해요. 나 웃겨서 눈물 나올 거 같아.”
“이게 제 나름대로 무서운 표정인데요. 조카들 혼낼 때 이러면 꼼짝도 못 한다니까요.”
“후후, 현우 씨가 그러니까 무섭기보다 귀여운데요.”
확실히 그녀는 평소의 냉랭하고 도도한 표정보다 지금처럼 웃는 게 예쁘다.
그런데 신동화와 그녀는 무슨 사이일까?
연인이라고 하기엔 거리가 있어 보였고, 직장 동료? 아니면 학교의 선후배 사이?
설마, 아침 드라마에서나 보던 약혼자 같은 건 아니겠지.
아니, 잠깐. 내가 왜 이런 걸 궁금해하는 거야.
이야기를 이끌어 가던 내가 잠잠해지자, 이번은 유수아가 입을 열었다.
“저, 오늘 깜짝 놀란 거 있죠. 현우 씨가 개발자 포럼에서 발표했던 대니얼 강이었다니.”
“그건 다 수아 씨 덕분이죠.”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녀는 날 돌아보며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저희가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하시죠? 전자상가에서 카페로, 마지막은 돼지갈빗집까지 갔었잖아요.”
“기, 기억하죠. 끝까진 아니지만…….”
유수아는 술 취해서 뻗어버렸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고개를 푹 숙인다.
“그날 사업 아이디어를 얻어서 무작정 미국으로 떠났어요. 그리고 잡스를 처음 만났죠.”
“에엣? 거짓말. 애플의 선임 디자이너라고 잡지에 실렸던데요?”
“그거, 잘못된 거예요. 애플에 디자인 계약을 맺은 건 사실이지만 진짜 직원이 된 건 아니거든요.”
“그래도 대단해요. 디자인하면 애플인데, 그런 기업에 디자인 계약을 맺다니.”
“운이 좋았죠.”
진짜 하고픈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머릿속에서만 굴리다 보니 입이 안 떨어진다.
신용화와 무슨 사이예요? 신용화를 언제부터 아셨어요? 신용화와…….
그러다 결국, 그녀의 차 앞까지 도착해버렸다.
“오늘은 죄송했어요. 다음엔 좀 편안한 곳으로 모실게요.”
“아뇨, 괜찮아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 * *
그녀와 헤어진 난, 택시를 잡아타는 대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고자 몸을 움직였지만, 어째선지 생각만 더 많아질 뿐이었다.
“흐읍- 후우-”
서울의 차가운 겨울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우고 빠져 나간다.
세이월드. SG컴즈. 그리고 신용화.
어디서 그런 놈이 튀어나온 걸까? 놈이 미래를 바꿔 버리는 건 아닐까? 계획을 앞당겨야 하나?
고민을 거듭할수록 내가 해야 할 일이 명확하게 보인다.
그 일이란, 녀석이 움직이기 전에 시장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철저히 밟아버리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한 최선이다.
“한국에선 슬슬 놀면서 일할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내 팔자가 그렇게는 안 되는 거 같다.
갑자기 나타난 재벌 3세 놈이, 식어가던 내 열정에 다시 불을 지폈으니 말이다.
난 지체 없이 휴대폰을 꺼내 든다.
뚜루루- 뚜루루- 틱.
-어? 보스,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한국은 잘 시간 아니던가요.
“도통 잠이 안 와서 전화해봤어요.”
-흐흐, 저도 요즘 그렇습니다.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윤곽도 안 잡혔는데, 벌써 성공할 거라는 기대가 생기더라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다른 팀원들도 엄청 열심히 해주고 있어요.
“이번 닉스 챗 프로젝트, 무조건 성공하게 만들 겁니다. 두고 보세요.”
-그 말을 들으니 든든하네요.
“그보다 닉스 챗의 사용자 데이터를 다른 앱과 연동시키는 기능은 잘 돼 가고 있나요?
-아아, 그거요? 덕분에 일이 엄청 늘었다고요. 혹시 연동시킬 앱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소셜미디어 서비스를 시작할 겁니다. SNS(Social Networking Service)라고도 하죠. 전 닉스 챗의 사용자를 무기로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끌어 내릴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