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33화
삐익-!
사무실의 팩스가 울어댄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브릭이 팩스의 내용을 확인하곤 말했다.
“보스, 또 이력서네요. 이렇게 많이 지원할지 상상도 못 했어요.”
“브릭이 저도 모르게 열심히 소문을 내고 다닌 결과죠.”
“하하. 시간이 다급했잖습니까.”
닉스 소프트 사무실에서 설명회가 있고 난 뒤.
열 명 내외의 개발자가 구해질 거란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100통이 넘는 이력서가 사무실에 도착했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는 설명회의 효과도 있겠지만, 가장 큰 영향은 브릭이 개발자 사이트에 흘린 소문 덕택이었다.
닉스 소프트는 애플의 선임 디자이너가 퇴사하고 설립한 회사며, 애플에 자금 지원을 받는다는 소문은 양반이었고, 닉스는 잡스가 숨겨둔 회사라는 소문까지 나 있었다.
“전 진짜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그저 개발자 포럼의 동영상을 짜깁기해서 업로드 한 게 다라니까요.”
“소문의 진위야 어찌 됐든, 단기간에 팀을 꾸려야 하는 우리로선 호재네요. 물 들어올 때, 열심히 노를 저어 봅시다.”
이틀 동안 닉스 소프트 사무실에 다녀간 개발자만 마흔 명이 넘는다.
그들의 면접은 모두 브릭이 담당했다.
“보스, 면접 좀 같이 봐주면 안 될까요? 오후에도 4건이나 면접이 잡혔다구요.”
“전 디자인을 제외하면 회사 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을 텐데요. 조언 정도야 해드리겠지만요.”
“으아…….”
브릭은 앓는 소리를 해대고 있지만,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이런 게 행복한 비명이라는 거겠지.
물론 브릭이 직원 채용에 시달리는 동안, 나도 놀고만 있던 건 아니다.
닉스 챗에 적용될 디자인 시안과 더불어 모바일 메신저의 기본 시스템 얼개를 정립하는 건 전부 내 몫이었으니 말이다.
2020년의 그래픽 툴을 쓰다, 2008년의 그래픽 툴을 쓰니 작업 속도가 붙질 않는다.
한술 더 떠서, 작업을 방해하는 혹까지 하나 붙어 있었으니.
그 혹이란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여인의 시선이었다.
“스칼릿, 거기서 계속 그러고 있을 거예요?”
“하던 일이나 해. 난 그냥 앉아 있는 거뿐라고.”
난 그녀를 노려봤지만, 오히려 실실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인다. 저 강인한 멘탈 하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설명회가 끝난 후, 우리가 첫 번째로 입사시킨 인재는 스칼릿과 친구들이었다.
이들은 야후에서부터 브릭과 합을 맞췄었고, 앱스토어 개발툴에도 능숙했기에 시간이 부족한 우리에게 딱 필요한 존재였다.
다만, 사소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 문제란 내 뒤에서 뚫어지게 내 모니터를 훔쳐보고 있는 여인, 스칼릿의 변덕이었다.
내가 다시 뒤를 돌아보자, 손을 휘휘 내젓는 그녀.
“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렇게 쳐다보는데 어떻게 신경이 안 쓰입니까.”
“그럼 캐비닛 안에 숨어 있을까?”
“어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스칼릿은 닉스 챗 설명회가 끝난 다음부터 줄곧 이런 식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단 하나, 바로 내 디자인이었는데.
단순히 완성된 디자인을 노리는 건 아니고, 내가 작업하는 방법이나, 디자인의 분위기 따위를 현장에서 직접 느끼고 싶대 나 뭐래 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스칼릿의 전공은 본래 디자인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중견 소프트웨어 회사의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개발자들의 개발 속도가 너무 답답했던 나머지 직접 코딩을 배워서 개발자로 전향했다고 했다.
아니, 그럼 코딩이나 열심히 하든가, 왜 다시 디자인을 하겠다고 스토킹을 하는지.
어제는 호텔까지 억지로 밀고 들어오려는 걸 경찰을 부르겠다고 해서 쫓아냈다.
“이봐, 대니얼. 어제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궁금해도 그냥 있으시죠. 아깐 앉아 있는 거뿐이라면서요.”
“난 대니얼이 쿨한 스타일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꽁한 면이 있네?”
자존심을 건드려 보겠다는 수작인데, 너무 뻔하다.
“꽁한 제게 와서 이러지 마시고, 저기 앉은 쿨 가이 브릭에게 물어보세요.”
“브릭의 디자인은 너무 낡았어. 쿰쿰한 아저씨 냄새가 난다고.”
가만 앉아서 의문의 일격을 맞은 브릭이 온몸으로 억울함을 표현해 온다.
브릭, 솔직히 네 디자인이 구린 건 맞아.
다시 작업을 시작하려는데, 스칼릿이 의자를 끌어와 내 옆자리를 차지한다.
“방해된다고 했을 텐데요.”
“그러지 말고 좀 가르쳐 주면서 하면 안 돼? 남자가 치사하게.”
“그거 성차별적 발언입니다.”
“흐음,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그녀는 작전을 변경했는지, 이번엔 은근슬쩍 내 팔을 휘감고서 끌어안는다.
자연스럽게 팔에 느껴지는 물컹한 촉감. 더불어 달콤한 살 내음까지 전해진다.
이건 인내하던 이성을 날려 버릴 정도로 강렬한 자극이었다.
참고로 지금의 스칼릿은 첫 만남에서 봤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변한 모습이었다.
낡은 후드티에 떡진 머리는 가슴을 강조한 블라우스와 찰랑대는 생머리로 바뀌었고, 진한 다크서클은 아이라인이 함께하자 오히려 매력요소가 됐다.
이거, 위험해. 정신 바짝 안 차리면 코 꿴다.
“가르쳐 줄 거야?”
콧소리까지 내며 얼굴을 들이미는 그녀.
“알겠으니까, 일단 떨어져서 이야기하죠.”
“후후, 성공.”
그녀는 끌어안았던 팔을 슬그머니 풀어준다.
“제게 원하는 게 뭐예요?”
“대니얼이 디자인하는 모습을 보면 다른 디자이너랑 확연하게 다른 점이 있더라고.”
“뭐가 다른데요.”
“보통은 스케치나 밑그림을 하고 작업에 들어가잖아? 하지만 대니얼의 작업 방식은 바로 본 작업에 들어가 버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슥슥 작업을 끝내 버리는 게. 뭐라고 할까, 머릿속에 이미 이미지가 완성돼 있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관찰력이 제법이다. 재능은 있어 보이는데.
어떻게 할까?
고민은 잠시. 난 그녀에게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의 굳은 표정을 지어 보인다.
“스칼릿, 회사가 장난으로 보여요?”
“그게 아니라…….”
“무슨 말을 하고 팠는지는 잘 알겠어요. 하지만 작업 중일 때 건드리지 않는 건 기본 예의 아닐까요?”
스칼릿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전 이번 닉스 챗 프로젝트를 무조건 성공시킬 겁니다. 그건 저를 위한 것이지만, 닉스 소프트의 모든 임직원을 위해서이기도 해요.”
새삼 진지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브릭도 하던 일을 멈추고 이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니 스칼릿도 닉스 챗의 개발에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군요. 만약 성공적으로 닉스 챗이 런칭된다면……. 그땐 정식으로 디자인을 가르쳐 줄 여유가 생길지도 모르겠군요.”
조금 전까지 시무룩해 있던 스칼릿의 표정이 확 핀다.
“진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런칭시켰을 때를 전제로 한 말입니다.”
그녀는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 의자 위까지 올라서서 소리쳤다.
“좋지! 난 무조건 오케이야.”
“예,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세요. 자자, 어서요. 스칼릿이 보고 있으면 신경 쓰여서 속도가 안 난다고요.”
내가 떠밀자 그녀 순순히 나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돌아서서 내 뺨에 진한 키스 마크를 새겨 넣는다.
어, 어, 어? 이게 무슨?
“꼭 디자인을 가르쳐 주는 거야. 꼭이다! 약속 지켜!”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입구를 바라보는 나.
그녀는 내가 뭐라고 말을 꺼낼 새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이게 문화 차이라는 건가?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샌프란시스코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까지 함께한 브릭은 혼자서 어떻게 팀을 이끄냐며 우는 소리를 해댔지만, 엄살인 게 너무 티 났다.
진짜 생긴 건 곰인데 여우같은 놈일세.
잘 해낼 거다.
브릭은 내가 없었어도 혼자서 왓츠업을 성공시킨 인물이니까.
* * *
쥐뿔도 없을 땐, 로또만 당첨되면 비행기 좌석도 퍼스트클래스를 타고 다닐 줄만 알았다.
기내에서 스테이크를 썰면서, 고급 와인을 즐기고. 간식으론 승무원에게 라면을 끓여달라고 하며 담소를 나누는, 그런 핑크빛 상상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막상 로또 당첨보다 많은 돈을 가졌음에도 퍼스트클래스를 발권하려 하자, ‘저 돈으로 NG소프트 주식을 200주나 살 수 있는데!’ 같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으니까.
결국, 내 선택은 비즈니스도 아닌 이코노미 좌석이었다. 10시간 남짓한 이동수단에 돈을 쓰는 게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론, 좌석 양옆에 푸짐한 분들이 앉아서 엄청 후회하며 한국까지 왔다.
오늘의 교훈. 돈을 쓸 땐, 그냥 쓰자.
샌프란시스코에서 베이징으로, 베이징에서 다시 김해 공항으로. 장장 17시간에 걸친 일정을 마치고 도착한 김해 공항.
내가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있는 건지, 캐리어가 날 끌고 있는 건지도 모를 만큼 지쳐 버렸다.
탑승 전, 김해공항에서 Sol 에너지 사무실이 가까우니 도착하고 들렀다 갈까? 라고 했던 생각은 이미 저 멀리 사라진 뒤였다.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으로 출국장을 나서는데,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어, 강현우!”
“어?”
반가운 얼굴이다.
군대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동창, 이경훈이었다.
녀석은 쪼르르 내게 달려오더니 다짜고짜 등짝을 후려갈긴다.
“불알 받으러 왔다. 짜식아!”
“큭…….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면회 온다는 놈이 전역하는 날까지 코빼기도 안 보여서 직접 잡으러 왔다.”
아차. 경훈이 놈 면회 간다고 약속했었지.
지난 한 달간 너무 바쁘게 보낸 터라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회귀 전, 주변 사람들에게 소원해졌던 만큼 더 잘해주리라 결심했는데. 그게 마음처럼 잘 안 되는 거 같다.
“뭐, 그리 멀뚱멀뚱하게 생각하고 있어?”
“아니, 냄새나는 거 같아서.”
“무슨 냄새?”
이경훈이 코를 킁킁거린다.
큰 덩치에 저러고 있으니 완전 꿀을 찾아다니는 곰탱이 같다.
브릭은 아메리칸 흑곰, 이놈은 근육질 회색곰.
“무슨 냄새긴, 방금 전역한 군바리 냄새지. 지금부터 나랑 1m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올 수 있도록 한다. 실시.”
“이 자슥이 형님한테 못 하는 말이 없네.”
“3개월 빨리 태어난 게 형님이냐?”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지만 덕분에 비행으로 쌓인 피로를 잊을 수 있었다.
이경훈은 잽싸게 어깨동무를 걸치더니 말했다.
“특별히 거시기는 봐줄 테니까, 오늘 저녁은 네가 쏴. 콜?”
“거시기는 너만 걸었던 거 아니었냐?”
“자꾸 이의를 제기하면 돼지갈비가 소고기가 되는 수가 있어.”
난 끌던 캐리어를 녀석에게 던져 준다.
“끌어.”
“허, 이놈 봐라.”
“소고기 사달라며. 싫으면 돼지갈비로 갈까?”
“아이고 형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짐은 당연히 제가 끌어야죠. 다른 불편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경훈의 너스레에 나도 모르게 피식거리는 웃음이 나온다.
* * *
적당히 마시고 끝내려던 계획과는 달리, 내가 집에 도착했을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 됐다.
1차로 맥줏집에 간 거까진 좋았다.
깔끔하게 마시고 자리를 파하려던 차에 분위기를 탄 경훈이 놈이 주변에 사는 친구 놈들을 죄다 불러내 버렸다.
그 덕분에 오늘의 물주였던 난, 지금까지 잡혀 있어야 했고 말이다.
“으어, 죽겠다.”
걸을 때마다 골이 울려댄다. 막걸리까지 마셨으니 숙취는 내일이 절정이겠지.
한시라도 빨리 침대에 드러눕고 싶은 맘뿐이다.
힘겹게 기억을 더듬어 집을 찾아간다.
영원 오피스텔 701호.
누나가 깨지 않게 들어가려고 조심히 문을 열었는데,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어, 안 잤어?”
거실 소파에서 TV를 보던 누나가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동생이 미국에서 온다는데 얼굴은 보고 자야지.”
“이럴 줄 알았으면 빨리 집에 올 걸 그랬네.”
“가끔은 친구도 만나고 해. 아니면 나중에 서먹해져.”
누나는 내 외투를 벗겨다 걸어주며 말을 이었다.
“상태 보니까 오래 말하는 것도 힘들어 보이네. 빨리 올라가서 자.”
“응, 그래야겠네.”
비틀거리는 내가 불안해 보였던지 누나는 나를 부축해서 2층의 내 침대까지 데려다준다.
셔츠를 대충 벗어 던지고 쓰러지려는데, 침대 앞에 못 보던 박스 하나가 발에 채였다.
“이거 뭐야? 택배?”
“저번 주에 도착했던데. 발송인이 KG전자 유수아라고 적혀 있던가? 아무튼, 박스 같은 건 내일 확인하고 오늘은 얼른 자.”
“어? 어, 그래. 누나도 잘 자고.”
박스를 보자 술이 다 깨버렸다.
미국에 가기 전, 그녀에게 부탁했던 물건이 있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난 조심스럽게 박스를 풀어헤친다.
먼저 겹겹이 쌓인 뽁뽁이를 걷어내자, 귀여운 고양이 캐릭터가 새겨진 포장지가 보인다.
“수아 씨, 이런 취향이었구나.”
포장지를 벗기자, 손바닥만 한 철제 디딤판이 나타난다.
이 녀석의 이름은 KSK017.
KS산전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무선 충전 크래들이다.
미래의 무선 충전기처럼 그냥 올려두면 충전되는 형식이 아니라, 별도의 케이스를 장착하고 올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기에 완벽하게 망하는 제품이기도 하다.
실패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때의 휴대폰들은 배터리가 탈착식이었기에 무선 충전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뭐, 이건 일반 사용자 관점에서 그렇다는 거고. 나로선 이 시기에 무선 충전기가 있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었다.
회귀하면서 들고 왔던 미래의 스마트폰, 애플폰XI. 이 모델은 무선 충전 기능이 기본으로 탑재돼있었으니 말이다.
“수아 씨, 완전 땡큐.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얼른 충전기의 플러그를 꽂고 애플폰XI를 올려둔다.
충전 중이라는 붉은색 LED가 떠오르자, 가슴이 쿵쿵 울리기 시작한다.
“좋아, 시작해 보자고.”
2020년의 스마트폰에서 뭔가를 건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