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25화
보스턴 HTL호텔의 티파티 룸.
장내엔 모바일 개발자 포럼에 참여하기 위해 모인 인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모바일 개발자 포럼은 미국의 이동통신사인 버라이즌의 주최로 개최되는 소규모 포럼이었다.
하지만 3G 통신의 등장으로 대규모 데이터 처리가 가능해지면서 모바일 개발자의 입김이 강해졌고, 자연스럽게 포럼의 규모도 커지게 된다.
특히, 이번 포럼은 애플의 CEO인 스티븐 잡스의 발표가 예정돼 있었기에 역대 최대의 인원이 몰린 상태였다.
“잡스는 언제 오는 걸까요? 벌써 2시간이 지났는데 말이죠.”
“귀하신 몸이니 포럼이 끝날 무렵이나 등장해서 얼굴만 비추지 않을까요? 그것보다, 그 소문 들었습니까?”
소문이라는 말에 근처에 있던 다른 개발자들도 귀를 쫑긋 세운다.
“잡스가 단체 메일을 보낸 건 아시죠? 애플폰 앱 개발에 참여하면 회사 차원에서 지원해주겠다고 말입니다.”
“아아, 알다마다요. 전 스팸인 줄 알고 삭제할 뻔했지 뭡니까. 천하의 잡스가 자존심 구겨가며 그런 메일을 보낼 줄 몰랐거든요.”
“그렇게까지 하고 앱스토어를 오픈했는데, 네임드 개발자들은 거의 안 넘어왔다더군요.”
“큭, 잡스도 한 방 먹었군요.”
“그래서 급히 이번 포럼에 발표일정을 잡은 거라던데요. 개발자들을 한 명이라도 더 꼬시려고 말이죠.”
아까부터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개발자들도 대화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솔직히, 검증도 안 된 앱스토어에 뛰어들 네임드 개발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유저풀이 너무 적은 게 문제죠.”
“저희 쪽도 같은 생각입니다. 애플폰3G 하나 보고 개발에 참여하기엔 너무 리스크가 큽니다. 차라리 심비안이나 윈도 모바일용 프로그램을 개발하면 기본은 먹고 들어가거든요.”
“앱스토어용 프로그램은 앞으로도 아마추어들이나 몰려들겠죠. 진입장벽이 없으니까요.”
근처의 다른 개발자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애플폰이 잘 만든 기기라는 건 여기 모인 개발자들 모두가 인정하는 바다.
그와는 별개로 앱을 구매할 소비자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기에 개발자들은 앱스토어용 앱 개발에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파격적인 조건이 아니라면 애플폰 전용 프로그램 개발을 시작하는 건 회의적입니다.”
“하핫, 저 역시 그렇습니다. 단지, 잡스가 어떤 말로 우릴 꼬시려 들지 궁금해서 달려온 거지요. 잡스가 오긴 오려나요?”
그때였다.
갑자기 티파티 룸의 입구가 소란스러워진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들려오는데, 중간중간 잡스라는 말이 섞여 있다.
“그도 양반은 못 되겠군요.”
“그런데 잡스 옆에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모두의 시선을 모은 잡스였기에 같이 걸어오는 동양인에게도 자연스레 시선이 몰린다.
“글쎄요. 수행원이라고 보기엔 너무 가까운 사이 같은데…….”
“제 생각엔 이번, 발표에 뭔가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아닐까요? 아니라면 굳이 캘리포니아에서 먼 걸음을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럴 가능성도 충분하군요.”
그때였다.
실내의 조명이 일제히 어두워진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목소리도 점차 잦아들고.
“이제 시작하려나 봅니다.”
잡담을 나누던 사람들은 일제히 단상으로 시선을 향한다. 그곳엔 편한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사내가 천천히 올라서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을 받는 사내는 그걸 즐기기라도 하듯 옅은 미소까지 지으며 마이크를 집어 든다.
“개발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애플의 CEO 스티븐 잡스입니다.”
* * *
개발자 포럼의 발표에서 기본 규칙은 자유로운 질문이다.
하지만 잡스가 발표하는 중엔 그 누구도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없었다.
그 흔한 수군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고요한 티파티 룸.
이곳에 울려 퍼지는 건 잡스의 목소리가 유일했다.
“앱스토어는 지금까지의 닫혀 있던 플랫폼들과는 다릅니다. 누구나 개발에 참여할 수 있고, 판매 역시 공정한 경쟁을 펼칠 수 있습니다. 이건 혁신입니다. 이제는 개발자들이 플랫폼에 휘둘리지 않고 소비자와 직접 연결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잡스의 발표는 정적이면서도 무겁지 않다.
가끔 분위기를 비틀어가면서 조크를 던졌는데, 주위를 산만하게 만들 수 있는 조크가 오히려 집중하는 요소로 변해 버린다.
이것이 프레젠테이션의 신이라 불리는 잡스의 능력인가!
난 단상 좌측에 마련된 관계자 석에서 발표를 보고 있었다.
그의 말을 토씨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수첩을 꺼내 들고 있었지만, 언제부터인지 필기하는 것을 잊었을 정도였다.
넋을 놓고 발표를 얼마나 지켜봤을까?
갑자기 잡스의 움직임에 이상이 발생한다.
“여러분! 혁신의 흐름에 동참하십시오! 애플 OS에서 제공하는 앱스토어는……. 쿨럭. 컥, 컥.”
기침이 나오자 탁자에 몸을 기댄 잡스.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기에 단상 아래에선 안 보였겠지만, 관계자석에 있던 난 잡스의 입에서 토해진 것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저건, 피? 어째서?
헬기의 진동 때문에 몸에 무리가 간 건가? 아니면 시간을 맞추기 위해, 보스턴까지 무리하게 움직인 탓일지도 모른다.
혼란한 와중에도 내 몸은 벌써 단상 위로 뛰어 올라가고 있었다.
“잡스! 괜찮습니까?”
“대니얼……. 전 괜찮습니다. 이건 내게 익숙한 일 중 하나니까요. 쿨럭. 쿨럭.”
“피를 토했지 않습니까? 빨리 911을!”
내가 휴대폰을 꺼내려 하자 잡스가 저지한다.
“잠시, 잠시만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여기서 발표를 망칠 순 없어요. 제가 끝내게 해주세요.”
“바보 같은 소릴. 당신 이러다 망가진다고요!”
“망가질 때 망가지더라도, 전 제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후우- 후우-”
그는 혼자서 몸을 바로 세웠지만, 여전히 숨은 거친 그대로였다.
“대니얼, 이제 내려가 주세요. 발표를 마무리 짓겠습니다.”
“지금의 몸 상태로는 무립니다. 숨 쉬는 것도 힘들어하면서 어떻게 발표한단 말입니까?”
“이번 발표는 성공적으로 끝나야 합니다. 앱스토어를 활성화시킬 절호의 기회니까요.”
그는 진정된 듯 보였지만, 아직 대중 앞에서 발표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만약 강행해서 발표하다 그가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내일 신문의 헤드라인은 잡스의 건강 문제가 1면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개발자 포럼의 발표는 자연스레 묻혀 버리겠지.
최악의 가정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게 된다.
잡스가 위중한 지병을 앓고 있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헬기를 택한 내 실수였던 걸까?
그가 포럼을 망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미래가 바뀌는 걸까? 그럼 앱스토어는? 내 계획은?
홍수처럼 터져 나오는 질문에 머릿속이 엉망이다.
내가 당황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잡스가 어깨를 툭툭 두드려온다.
“대니얼, 당신이 나보다 더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군요.”
“예? 아, 아…….”
“부탁이 있습니다. 들어주시겠습니까?”
“무슨 부탁입니까?”
그의 손이 내 손을 붙잡는다.
애써 웃어 보이지만 경련에 가까운 떨림만은 감출 수 없었다.
“저 대신 발표를 마무리 지어주세요.”
“예?”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잡스의 진지한 눈빛을 보곤, 이게 농담으로 건넨 말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제가 어떻게 당신을 대신해서 발표한단 말입니까?”
“완벽한 프레젠테이션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어디까지 말했는지 기억하시죠?”
“혁신의 흐름에 동참하십시오. 애플 OS에서 제공하는 앱스토어... 까지였던거로 기억하네요.”
“좋아요. 잘 기억하고 있군요.”
그는 흐트러졌던 몸을 바로 세우며 말을 이었다.
“대니얼, 당신은 여기 모인. 아니, 애플의 그 누구보다 앱스토어의 본질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하고팠던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주세요.”
“하지만.”
잡스는 내 말을 가로막고 단상 아래를 가리킨다.
그곳의 개발자들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저들끼리 뭐라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정 힘들겠다고 생각하면 차 안에서 저와 나눴던 이야기만 똑같이 말해도 충분합니다.”
차에서 앱스토어의 현재와 발전,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건 맞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알고 있던 미래에 내 개인적인 의견을 살짝 덧댄 것뿐인데.
그걸 듣고 날 발표시킬 셈이라니. 잡스, 이 사람 제정신인가?
이건 미친 짓이다.
회사에서 가끔 PPT를 하긴 했었지만 그건 사내 발표용이었고, 지금 모여 있는 건 미국에서 내로라하는 개발자들 앞 아닌가?
잡스가 불안해하는 내 어깨를 꽉 움켜쥔다.
“부탁입니다. 전 이번 포럼을 망치고 싶지 않아요.”
포럼을 망치고 싶지 않은 건 나도 마찬가지다.
미래는 한 번 틀어지면 어찌 될지 예측 불가상태로 변해 버린다.
난 아직 바뀐 미래에 적응할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그것만은 절대로 막아야만 했다.
젠장, 할 수밖에 없나.
난 그의 손에 있던 마이크를 이어받는다.
“완전히 망해도 난 모릅니다.”
“제 안목을 믿으세요. 당신은 분명 성공해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