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21화
잠시 덕후끼리의 찐한 눈빛 교환이 이루어진다.
먼저 말을 틔운 건 그녀였다.
“휴대폰 좋아하시나 봐요.”
“네?”
내가 되묻자 그녀가 진열된 휴대폰을 가리킨다.
“아까부터 봤는데, 휴대폰을 하나씩 둘러보시면서 미소 짓고 계시더라고요. 아,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일부러 보고 있었던 건 아니에요.”
눈에 띌 수밖에 없었을 거다.
매장에 전시된 휴대폰을 하나하나 다 만져보고 있었으니까.
난 멋쩍어서 시선을 휴대폰에 던지며 말했다.
“다 한 번씩 써봤던 기기들이라, 저마다 추억이 있거든요.”
“이 많은 폰을 다 써보셨다고요?”
“대부분요.”
“설마, 이것도요?”
그녀가 휴대폰 하나를 집어 든다.
KG전자의 야심작 프라다폰이었다.
명품 브랜드 프라다와 KG전자가 합작해서 만든 세계 최초의 풀터치폰으로, 시대를 앞서나간 디자인 덕분에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판매량은 저조했던 비운의 작품이기도 했는데, 기기의 최적화에 실패해서 속도가 절망적으로 느렸기 때문이다.
디자인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준 폰이랄까.
“써봤습니다만 여러모로 좀 아쉬운 기기더군요.”
“그죠? 디자인은 잘 뽑았는데 출시일이 너무 빡빡해서 최적화에 실패했지 뭐예요. 윗선에서 좀 진득하게 기다리면 될 텐데. 이것저것 참견하니까 산으로 가는 거라고요.”
윗선? 최적화?
부담스러울 정도의 미인이었기에 처음엔 홍보 모델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대화에서 묻어나온 지식으로 보아, 그녀는 업계 종사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차, 내 정신 좀 봐. 이걸 물으려고 했던 게 아닌데. 방금 썼던 옴레아, 어떻게 생각하세요?”
수첩까지 꺼내며 눈을 빛내는 그녀.
평소의 나였다면 건성으로 끄덕이며, ‘뭐, 쓸 만한 수준이네요.’ 같은 코멘트를 했겠지만.
상대는 나와 같은 덕후.
내 주장을 확실히 전달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꿈틀거렸다.
“옴레아는 제가 단언컨대, 역사에 남을만한 망작입니다. 완벽하게 망할 거예요.”
“최신폰이 망작이라…… 흥미롭네요.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난 내가 만지던 옴레아를 그녀가 서 있는 방향으로 비춰준다.
“윈도우 모바일은 기본적으로 모바일을 배려하지 않은 플랫폼이에요. 그걸 알면서도 개선의 여지없이 터치펜을 고수했다는 건, 개발하면서 별생각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저, 스마트폰이 유행이니 하나 만들어봐, 라는 높으신 분들의 지시로 만들어 낸 제품일 뿐이죠.”
그녀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눈을 껌뻑이면서도 열심히 필기해 나간다.
“결정적으로 최적화도 엉망이에요. 자, 보세요. 간단한 작업도 버벅거리는 거.”
“최적화 말고 다른 문제는 없나요?”
“전부 다 문제예요. 요즘 나온 풀터치폰도 이렇진 않습니다. 이딴 물건을 팔아먹겠다고 내놓은 오성전자가 제정신인가 싶네요.”
생에 첫 스마트폰을 옴레아로 시작해 2년의 실사를 거치고 화형식까지 마친 1인으로, 평가에 한이 서려 있었다.
“어……. 그래도 카메라나 액정 같은 부분은 고품질로 탑재했던데요. 플래시도 짱짱하고 또……. 그러니까 뭐가 있더라? 아무튼, 보조 기능적인 부분도 많이 추가됐고요.”
그녀는 열심히 옴레아를 변호했지만,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고 보세요.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안정성과 편의성이 빠졌는데, 기교를 부려봐야 봐야 소비자의 반응은 싸늘할 겁니다. 이걸 사준 소비자들은…….”
아니 잠깐.
언제부턴지 그녀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져 있었다.
어깨는 닿기 직전이었고, 얼굴은 한 뼘만 더 다가서면 숨결이 느껴질 정도다.
아무래도 내가 쥔 폰의 화면을 보려고 붙은 탓이겠지.
나이를 먹고 어느 정도 여자에 대한 내성이 생겼다고 자신했는데, 아니었구나.
갑자기,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 정도의 미인이라는 말이던가? 아무튼, 지금까진 과장된 말이라 생각했다.
여자 하나가 나라를 망하게 하다니 그게 가당키나 하냐고 말이다.
하지만 진짜가 내 눈앞에 있다.
그것도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말이다.
“왜 그러세요?”
모른 척하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이러는 건지.
난 필사적인 인내력으로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저기, 혹시 해서 하는 말인데. 오성전자에서 일하시나요.”
“아뇨, KG전자 스마트폰 부서예요.”
어쩐지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녀도 내 한숨의 의미를 알아챘는지 픽 하고 웃어온다.
“그래도 오성 쪽에 아는 사람 많은데. 이 말을 들었으면 충격 좀 받겠는데요?”
“개발 팀은 충격을 받을 게 아니라 반성을 해야죠. 까라면 까는 게 월급쟁이지만 이건 좀 심했어요.”
“후후, 그건 저도 인정해요.”
헙. 냉기가 풀풀 날리는 얼굴로 웃으니 분위기가 180도 바뀐다.
마치, 새하얀 설경 속에 핀 꽃처럼 말이다.
이거, 심장에 안 좋아.
어느새 한 발짝 더 다가온 그녀.
“저……. 괜찮으시다면.”
“예?”
“같이 커피라도 한잔하실까요?”
* * *
그녀의 이름은 유수아.
나이는 나와 동갑인 25살이며, 현재 KG전자 스마트폰 개발 팀에서 일한다고 한다. 오늘은 시장조사 겸 출장을 나온 거라고.
안타깝게도 커피 마시자는 이야기는 ‘같이 데이트할래요?’ 가 아니라 ‘우리 회사에서 만든 폰 좀 봐주세요.’였다.
강현우 이 자식아, 뭘 기대한 거냐.
실망한 것과 다르게 그녀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남자와 여자로서가 아니라 스마트폰이라면 눈이 빛나는 진성 덕후로서 말이다.
“어때요?”
“디자인은 무난하네요.”
테이블에 놓여 있는 휴대폰은 KG전자의 전략 스마트폰인 인사이드였다.
이미 과거에 실사용했었던 폰이지만 아직 미출시 된 기기인 만큼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이걸 수아 씨 팀이 개발했다는 거죠?”
“개발은 끝났고 이제 막바지 검수 작업 중이에요.”
“이거 오성에서 옴레아 만든다니까 윗선에서 만들어 보라고 해서 만든 거죠?”
“에엣? 어떻게 아셨어요?”
이건 미래를 몰라도 뻔한 거다. 만년 2등인 KG는 오성에 무서울 정도로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사실, 인사이드는 옴레아보다 모든 면에서 떨어져요. 부품도 더 싼 걸 썼고 일정도 급하게 잡아서 마감도 불량이 많거든요. 사실상 미완성폰을 출시하는 셈이죠.”
“음……. 실패를 예상하고 내는 꼴이네요.”
“그래서 요즘은 울고 싶을 때가 많아요. 어찌 보면 소비자를 속이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역대급 쪽박 작품인 옴레아에 가려서 인사이드는 조명을 덜 받았지만, 이것도 망한 건 매한가지였다.
얼마나 판매가 저조했으면 출시 3개월 만에 0원으로 풀릴 정도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업계 투톱인 오성과 KG의 수준으로도 벅찬 스마트폰 시장에 내가 뛰어든다고 달라질까?
대기업인 SK와 현대도 휴대폰 사업에 발을 담갔다가 쓸려나갔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팬틱의 말로는 어떤가?
현대큐리텔과 SK텔레텍을 인수하고 몸집을 불렸지만, 스마트폰 사업에는 적자와 워크아웃을 전전하다 매각당하고 만다.
한때 SKY, 베가 시리즈 같은 히트작을 만들었던 회사의 최종 매각 대금은 고작 1000만 원이었다.
냉정하게 따져봤을 때 내가 뛰어든다고 해도 성공 확률은 낮다.
설령 대기업에 입사해서 개발을 진행한다 해도 경직된 대기업 특성상 변화를 끌어내긴 힘들 것이다.
내가 미치도록 좋아하는 분야를 진입 장벽 때문에 시도조차 못 해보다니.
다시 태어나도 힘든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커피가 쓰다. 너무너무 쓰다.
젠장.
심각한 표정 탓인지 대화가 끊어졌다.
난 말 없이 커피만 홀짝였고, 유수아는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려댔다.
부담스러운 침묵을 깨 준건 그녀가 꺼낸 휴대폰이었다.
“어, 그거.”
“이 폰이 뭔지 아세요?”
국내에 출시조차 안 된 애플폰3G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눈이 다시 반짝인다.
“미국에 사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구한 거예요. 개통이 안 돼서 와이파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지만요.”
“국내는 통신사를 안 끼면 개통이 안 되니 어쩔 수 없죠. 이렇게 좋은 폰을 못 쓰는 국내 이용자만 불쌍하다고 할까요.”
“맞아요! 국내 스마트폰은 정말이지…… 엣?”
그녀는 동의하고도 아차 했는지 입을 틀어막는다.
자신도 국내 스마트폰을 만드는 사람이란 걸 잠시 잊었나 보다.
민망했던지 그녀는 상체를 테이블에 축 늘어트리며 말했다.
“후아- 애플은 어떻게 이런 걸 만들 수 있을까요? 이 심플한 구성과 직관적인 UI. 거기다 빠릿빠릿한 성능까지.”
“애플폰은 시대를 앞서나간 물건이죠. 게다가 앱스토어는 진정한 혁신이라고 생각해요. 개발자와 사용자 사이의 장벽을 허물어 버렸으니까요.”
“앱스토어요?”
유수아가 고개를 갸웃한다. 의아한 반응에 내가 되묻는다.
“앱스토어 모르세요? 앱을 내려받는……. 아 실수, 애플리케이션 소프트웨어를 구매하는 마켓요.”
“아, 마켓. 알아요. 그런데 잘 쓰진 않아요. 몇 번 들어가 봤는데 소프트가 별로 없더라고요. 그래서 처음부터 설치된 소프트만 쓰고 있어요. 제 친구들도 앱스토어는 별로 안 쓰는 거 같던데요?”
이상하다. 수아 씨 정도의 덕후가 앱스토어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열광하는 게 아니라?
2008년이면 애플OS 2.0으로 앱스토어가 활성화된 시기일 텐데.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걸까?
사실, 이 시기엔 나도 애플폰이 없었기에 자세히는 알 수 없다.
“수아 씨, 잠시만 폰 좀 볼게요.”
“예? 아, 예.”
급히 앱스토어에 접속해서 리스트를 훑는다.
1위부터 30위까지 랭크 된 앱은 몽땅 처음 보는 것뿐이다.
게다가 카테고리 대부분이 게임이었고, 아이콘도 디자이너가 아닌, 프로그래머가 직접 만든 듯 어설픈 것들 천지였다.
조악한 앱들이 대부분에, 유명한 앱이 하나도 없어? 그래도 스토어 1위가 다운로드 수 10만은 넘는구나.
어? 잠깐. 10만? 국내에 애플폰은 미출시잖아?
“수아 씨, 이거 국내에서 만든 소프트만 표시되는 건가요?”
“아뇨, 그게 전 세계에서 올라온 소프트예요. 국내는 아직 앱스토어 자체가 없더라고요.”
전 세계 10만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잠시 식었던 내면의 열정이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수아 씨! 고마워요! 진짜 고마워요!”
“예? 예?”
처음부터 크게 가려니까 불가능해 보였던 거다.
하드웨어 시장에 진입 장벽이 있으면 다른 곳으로 물꼬를 트면 된다.
아마존이 킨들폰을 만들고, 구글이 픽셀폰을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