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20화
부산 컴퓨터 상가.
지방에선 나름의 이름 있는 전자상가다. 지금은 기억도 흐릿하지만 어릴 적 미니 겜보이를 사려고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곳이기도 하다.
내 방문의 목적은 겜보이가 아니라 스마트폰 시장조사였다.
여길 둘러보다 보면 스마트폰 사업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것 같았으니까.
컴퓨터 부품을 파는 1층을 지나쳐, 2층에 오르자 본격적으로 휴대폰 판매점이 줄지어 있다.
“손님, 폰 바꾸시려고요?”
“여기요. 여기 오세요. 초콜릿폰 신제품 있어요.”
“오늘만 특가! 공짜 폰입니다. 완전 공짜예요! 할부금 남은 것도 다 면제해 드립니다!”
갓 전역한 군인은 이들에게 좋은 호구였기에 호객꾼들이 승냥이 떼처럼 몰려든다.
내 나름대로 군인 냄새가 빠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프로들의 눈을 속이는 건 역부족이었나 보다.
난 승냥이들에게 마법의 단어를 꺼내 들었다.
“최저 할부 원금만 불러주세요.”
한 달 요금이 얼마고, 할인이 어떻게 돼서 어쩌고저쩌고……. 다 들어줄 필요 없다.
실제 휴대폰 가격을 뜻하는 할부 원금.
그 한마디로 몰려들었던 호객꾼들이 바퀴벌레처럼 사라진다.
“으이그, 망할 놈들. 호구 하나 잡아서 소고기 파티하려고 작정을 했네. 쯧.”
이 시기엔 판매점마다 할인 제도가 제각각이었다.
가물에 콩 나듯 양심적으로 판매하는 매장도 있었지만, 대부분 매장은 호구하나 잡아서 악성 재고폰을 출고가로 팔아먹어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
이들의 행태는 훗날 통신사가 단통법이라는 괴물을 만드는 데 일조한다.
“통신사가 제일 문제야. 복잡한 요금제와 할부 상품으로 소비자를 기만했으니까. 기기 판매와 통신 판매를 분리만 시켰어도 이 꼴은 안 났을 텐데. 쯧.”
이 시절은 통신사를 거쳐야만 휴대폰을 구매하고 개통할 수 있었다.
덕분에 외산폰들은 국내에 들오려면 까다로운 통신사의 요구 조건을 거쳐야 했기에 길게는 1년 넘게 출시가 지연돼 기도했다.
아, 잠깐. 통신사. 통신사?
젠장, 국내는 스마트폰을 출시해도 무조건 통신사를 거쳐야 하잖아.
내 계획은 시작부터 암초에 걸렸다.
이때의 통신사는 스마트폰을 적대시했다.
이유는 다름 아닌 스마트폰에 기본 탑재되는 Wi-Fi 모듈 때문이다.
공짜로 인터넷에 연결되는 Wi-Fi는 지금껏 데이터료로 폭리를 취하던 통신사로서 재앙과 같은 일이었으니까.
실제로 이 시기엔 통신사의 갑질로 멀쩡한 폰의 Wi-Fi 모듈을 강제로 제거하는 일이 잦았다.
“이거……. 생각을 처음부터 수정해야겠어.”
하드웨어는 중국의 ZTA나 대만의 VAL 같은 곳을 파운드리(foundry) 업체로 선정해 일임시키고, 디자인과 소프트웨어 최적화로 승부를 보는 팹리스(fabless) 업체를 생각 중이었다.
하지만 판매망을 못 뚫으면 모든 일이 허사였으니.
이래선 제2의 애플이 아니라, 제2의 팬틱이 될 판이다.
“세상이 호락호락하진 않구나.”
고민이 깊어질수록 내 손으로 스마트폰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점점 희미해져만 갔다.
대형 매장은 입구부터 북새통을 이뤘다.
매장이 크다고 가격이 저렴하거나 서비스가 좋은 건 아니지만, 일단 규모에서 먹고 들어가기에 자연스레 사람들이 몰린다.
매장의 출입로엔 신제품 프로모션을 위해 본사에서 파견 나온 직원과 춤추는 풍선이 흐느적거리며 열일 중이다.
매장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직원 한 명이 말을 건넨다.
“찾으시는 제품 있으세요?”
소규모 판매점에서 호객하던 삐끼스타일이 아닌 진짜 직원 냄새가 나는 사내였다.
“일단 구경 좀 해보고요.”
“예, 필요하시면 불러주세요.”
직원은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다른 손님에게 가버렸다. 내가 굳이 먼 거리에 있는 대형 매장까지 찾아온 이유.
별거 없다. 그저, 눈치 볼 것 없이 모든 휴대폰을 둘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열장을 쭉 둘러본다.
폴더폰과 바(bar)형폰, 풀터치폰, 그리고 최근에 출시 된 스마트폰들이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한다.
천편일률적인 대화면 스마트폰만 진열된 미래의 매장과는 완전 딴판이다.
KG의 자존심 초콜릿폰, 지금 봐도 흠잡을 데 없는 깔끔한 디자인이다.
액정을 가로로 돌릴 수 있는 가로본능폰, 폴더폰 시절엔 혁명적인 시도였지.
스터디셀러 아이스크림폰, 누나가 이걸 5년 넘게 썼던 기억이 난다. 저렴한 가격에 예쁜 디자인. 휴대폰 본연의 역할을 다하는 녀석이다.
터치폰의 조상님 햅틱도 있다.
대화면이라고 광고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실물은 엄청 작았구나. 미래의 큰 폰에 적응돼서 그렇겠지.
옛 휴대폰들을 하나씩 둘러보며 추억에 젖는다.
진열대의 외곽부터 순서대로 구경하다 중앙까지 도착하자, 가장 큰 진열대가 보인다.
역시 이 시기에 메인으로 진열된 것은 오성전자의 최신작 옴레아였다.
당시 최고의 하드웨어로 만들어진 옴레아는 오성전자의 마크를 달고 광고폭격을 퍼부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버벅거리는 사용감에 툭하면 꺼져 버리는 전원은 물론이고 터치 먹통도 심심찮게 나타나 하루에도 몇 번이나 재부팅을 해야 했다.
이 폰의 한 줄 평을 하자면. 그냥 쓰레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마침, 옴레아의 새 제품을 진열하는 중이었기에 직원의 양해를 구하고 전원을 켠다.
[…….]
음? 버튼이 안 눌러졌나? 가 아니라 켜지는 게 너무 늦어!
한참 뒤 떠오른 오성전자 로고.
그 후에도 1분여를 더 기다리자 간신히 부팅이 끝난다. 물론 화면만 떴지 아직 조작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다.
인고의 시간을 기다려 옴레아의 구동을 시작했다.
먼저 설정에 들어가려는데 터치가 쉽지 않다.
너무 둔하기도 했으며, 뭔가 나사가 하나 빠진 듯한 느낌이다. 고장이라도 난 건가?
그때였다.
뒤편에서 여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펜을 쓰셔야죠.”
그녀의 조언대로 펜을 뽑아 들어 터치했다.
“오, 이제 그나마 터치가 되네.”
“옴레아는 펜으로 터치하는 걸 기본으로 만들었답니다. 처음 쓰시는 분은 낯설어하시더라고요.”
조금 낫다는 정도지 여전히 적응 안 되는 터치 반응속도다.
물론 2020년에 살다 온 놈이기에 지금 시기의 어떤 폰을 써도 답답한 건 매한가지겠지만.
설정 기능에 들어가서 여기저길 건드려본다.
터치 응답속도와 정확도, 가속도까지 만지고 나서야 거북이 같은 반응이 좀 나아진다.
“오성에서 제법 공을 들인 기기라서 부품도 비싼 것만 팍팍 넣었다던데. 써 보니 어때요? 잘 뽑힌 거 같아요?”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곳엔 살가운 목소리와는 정반대로 차가운 인상의 여직원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하얀색 블라우스와 묶어 올린 긴 머리, 커다란 뿔테 안경은 전형적인 회사원의 모습이다.
하지만 길게 쭉 뻗은 라인과 이쁘장한 얼굴 덕분인지 TV나 화보에서나 보던 모델 느낌이 났다.
“누구신지요?”
“앗, 전문 테스터분 아니셨어요? 설정에 너무 능숙하셔서. 죄송합니다.”
“전문 테스터는 아니지만, 이쪽 계통 기기는 자주 다뤄봤죠.”
“아, 그러시구나. 그나저나 이번에 오성에서 출시한 옴레아. 진짜 만듦새가 장난 아니죠? 오성전자는 마감하나는 끝내주죠?”
“뭐, 하드웨어는 업계 최고니까요.”
“그쵸그쵸.”
그녀의 차가운 외모와 달리 휴대폰을 쳐다보는 눈망울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마치, 달콤한 케이크를 쳐다보는 소녀처럼 말이다.
아, 냄새가 난다. 이 익숙한 냄새…….
이 여자, 나와 같은 폰덕후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