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IT 재벌 16화
느지막하게 눈이 떠졌다.
요 며칠간 나를 괴롭히던 두통과 악몽은 말끔하게 사라진 상태였다.
아무래도 나를 짓누르던 걱정거리 하나가 사라진 탓이겠지.
이불 안에서 흐느적거리는 데 방문이 살짝 열린다.
“오늘은 늦게 일어났네?”
“으음……. 누나, 몇 시야?”
“9시 반 조금 넘었을걸.”
이런, 벌써 장이 열렸을 시간이다.
덮고 있던 이불을 집어 던지고 벌떡 일어났다.
모니터를 켜자, 어제 끄지 않았던 HTS 프로그램이 그대로 떠오른다.
[NG소프트 : 현재가 26,800원 / 전일 대비 ▲1600 / 보유량 523,605주 / 평가손익 +1,832,617,500]
허. 돈이 돈을 번다더니.
노동의 가치 따윈 눈곱만큼도 없는 세상이구나.
내 증권 계좌가 벌어들인 돈만 18억이다.
Sol 에너지 대출 건으로 만든 계좌는 이보다 더 많은 주식이 들어 있으니 수익이 곱절은 될 것이다.
회귀 전, 10년간 영일 포장에서 밤낮으로 일했던 것보다 일주일간 손가락 몇 번 까딱거린 게 더 의미 있는 일인지 모르겠다.
뭔가 허전한 느낌이랄까?
“풉, 이게 무슨 궁상맞은 생각이람. 돈이란 건 많을수록 좋은 거잖아. 노동도 돈을 벌기 위한 수단 중 하나일 뿐이고.”
노동의 가치란 단어는 자본가들이 노동자의 자위를 위해 만든 프로파간다 중 하나일 뿐이다.
돈만 풍족하다면 억지 노동에서 해방될 수 있으며, 남보다 더 좋은 집에, 더 좋은 차도 끌고 다닐 수 있다.
배우자가 월 수익 1000만 원을 넘어가면 이혼율이 0%에 가까워진다는 조사 결과도 있지 않던가?
내가 뭘 하고 싶은지는 차차 생각하면 된다.
우선은 돈을 벌자, 벌 수 있는 최대한으로.
“누나, 오늘 오전 출근이지?”
“응, 맞아. 이제 나가봐야지.”
“나도 나갈 거니까 좀 기다렸다 같이 가. 택시 타고 가면 금방이잖아.”
“안 돼. 여기까진 콜 불러도 안 온단 말야.”
“그럼, 나랑 내기할까? 택시가 집 앞까지 오나 안 오나.”
콜을 받고 달동네까지 올라오는 택시가 드물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콜 내역에 [요금 무조건 따블.]이라고 메모를 남기자, 5분 만에 택시가 도착했다.
역시 돈이란 좋은 것이다.
택시에 올라탄 누나는 동네를 빠져나가기도 전에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누나가 일하는 백화점의 출근 시간은 10시, 퇴근은 밤 10시다.
아침은 오롯이 출근준비에 쏟아붓기에 실제로 집에서 쉬는 시간은 밤 11시 이후부터 잠들기 전 시간이 전부였다.
주 6일에 별다른 휴일도 없기에 월 출근 일수는 26일.
시간으로 따지면 월 312시간의 살인적인 일정을 누나는 10년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
“누나.”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여전히 약 먹은 병아리처럼 꾸벅거리는 강현경 씨.
옆구리를 톡톡 두드리자, 그제야 눈을 뜬다.
“왜?”
“시트에 침 흐른다. 기사님 화내셔.”
“아, 안 흘렸거든?”
그러면서도 입 주위를 슥슥 닦아댄다.
쯧쯧, 저러면 립스틱 다 번지지.
“침 그만 닦고 내 말 좀 들어봐.”
“안 흘렸다니…….”
“누나, 일 그만둬라.”
내가 갑자기 치고 들어가자, 방금까지 흐리멍덩했던 눈이 말똥해져 나를 쳐다본다.
이 눈빛을 해석하자면 ‘갑자기 뭔 헛소리야?’ 쯤 되겠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라면 다들 이런 반응이겠지. 역시 이번에도 양념을 좀 쳐줘야겠다. 이러다 쉐프 될 듯.
난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을 이어간다.
“내가 군대 가기 전에 주식을 좀 넣었거든.”
“주식?”
“엉, 주식. 그런데 그게 완전 대박이 났어. 그냥 대박이 아니라 초대박. 그러니까……. 이제 누난 일 안 해도 먹고 산다고.”
믿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누나는 의외로 덤덤하게 말을 받아낸다.
“그것 때문에 준오 씨 만나고 다녔구나.”
“으응. 뭐, 그런 셈이지. 그런데 누나는 안 놀라네. 혹시 형한테 미리 들었어?”
“그런 건 아닌데. 전역하고부터 네 모습이 좀 이상했거든. 애가 좀 의젓해진 거 같기도 하고, 이런 걸 철이 들었다고 하던가?”
“난 원래 철들었거든?”
누나는 갑자기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기 시작한다.
“우리 동생, 이제 장가보내도 되겠어. 이 누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구나.”
“헛소리는.”
“그런데 현우야.”
누나가 잠시 뜸을 들이며 내 눈을 마주친다.
“내가 일을 그만두면 뭘 하며 살아야 할까?”
“집에서 쉬면 될 거 아냐.”
“쉬면. 그 다음은? 계속 쉬기만 해?”
“…….”
“사람은 일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법이야. 게다가 누난 아직 젊고 이 직업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그러니 10년간 같은 곳에서 일 한 거고.”
일하며 살지 않는 사람은 수두룩하다. 지금 창밖에 스쳐 가는 빌딩의 주인들은 대부분 불로소득으로 평생을 놀고먹을 것이다.
아침 늦게 일어나서, 연예 뉴스나 예능 재방송 따위로 오전을 보내고 아침 겸 점심으로 고급 라운지에서 브런치를 먹는다.
오후엔 비슷한 친구끼리 모여, 골프나 요가를 즐기다가. 해가 저물면 분위기 있는 와인바에서 취하거나 클럽에 들러 밤새도록 춤춘다.
흔한 금수저 2세의 평범한 하루다.
하지만 10년간 쉬지 않고 일해온 누나로선 일하지 않고 삶을 산다는 게 이해하기 힘든가 보다.
어느덧 누나가 다니는 백화점이 보인다.
“기사 아저씨, 저 앞쪽 도로변에 세워주세요. 현우야, 돈 번 기념으로 택시비는 네가 쏴. 그럼 간다. 점심 꼭 챙겨 먹고!”
뭐가 그리 급한지 힐을 신고도 잘만 달려간다.
내가 내릴 생각을 않고 있자, 택시 기사가 뒤로 돌아본다.
“손님, 어디로 모실까요.”
“근처에서 제일 큰 부동산으로 가주세요.”
“알겠습니다.”
일단 출퇴근이라도 편하게 도와야겠다. 당장은 내가 뭐라 해도 누난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이니까.
으이그, 저 고집불통 바보 누나를 어찌할꼬.
부동산에 들러 백화점 5분 거리에 있는 오피스텔을 계약했다.
14평 실내 2개를 합친 복층 형태의 오피스텔로, 가전과 가구가 모두 갖춰진 풀옵션 계약이다.
이 오피스텔이 내 맘에 꼭 들었던 이유는 보안 회사와 정식으로 계약한 보안 요원이 24시간 순찰한다는 데 있었다.
내가 집에 자주 있을 게 아니었기에 누나의 안전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집세는 보증금 2000만 원에 월 160만 원으로 계약했다.
회귀 전의 나였다면 엄두도 못 낼 큰 금액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일주일간 벌어들인 돈만 40억이 넘고, 앞으로도 NG소프트 주식은 계속 오를 테니까.
부동산을 나서서 공중전화를 찾았다.
뚜우- 뚜우- 뚜우-.
철컥.
-여보세요.
“접니다, 매형.”
-어, 현우야. 마침 잘 전화했다. Sol 에너지 건으로 할 이야기가 있는데.
“말씀하세요.”
-지분에 관한 거 말이다. 서류상으론 네가 90%에 현경 씨 5%. 그리고 내가 5%라고 쓰여 있던데…….
“5%가 너무 적으세요?”
-인마, 적다는 게 아니고. 내 돈은 한 푼도 안 들어갔는데 지분을 5%나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예전부터 매형은 욕심이라곤 없는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유복하게 자라면 저렇게 되는 걸까? 아니지, 뉴스에 나오는 재벌 2세들은 재산을 더 물려받겠다고 형제까지 감옥에 보내지 않던가.
매형의 저런 성격은 그냥 타고난 걸지도 모르겠다.
“이번 일의 성공 보수로 받았다고 생각하세요.”
-그래도 5%면 너무 많다고 생각해.
“앞으로 하실 일에 비교하면 많은 게 아닐걸요? 나중에 너무 적게 받았다고 투덜대지나 마세요. 흐흐흐”
-또 뭔가를 할 셈이구나. 설마, Sol 에너지를 계속 키우려고?
“사명을 바꾸고 투자 회사로 굴릴 생각입니다. 아참, 그전에 태양광 사업을 정상화해야 할 거 같은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태양광이 해결되지 않으면 내년엔 120억을 전부 토해야 할 테니까.
“그러니 슬슬 준비해주시죠.”
-준비? 내가?
“매형 말고 적임자가 어디 있습니까? Sol 에너지의 지분을 가진 CFO(Chief Financial Officer: 최고재무책임자)로써 힘 좀 써주세요.”
-너, 진짜. 으으……. 지분을 덥석 받는 게 아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