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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15/15)

에필로그

하늘에서 분홍색 꽃잎이 흩날린다.

흩날리는 꽃비에 황성 앞을 가득 채운 군중이 연신 감탄사를 뱉었다. 분홍 꽃이 청명한 하늘을 수놓았다. 새벽 일찍부터 황성 앞에 자리 잡은 채 황제 즉위식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이들을 달래듯 황홀한 광경이 펼쳐졌다.

황성 근처 숙소의 맨 위층에 자리한 하이브는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한 얼굴로 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짓을 따라 가느다란 꽃송이가 하늘을 화려하게 휘날렸다.

어느새 중천에 뜬 해가 황도로 내리쬐었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귓전을 간지럽히며 스쳐 지나갔다. 새로운 황제는 계절의 시작과 함께 즉위했다.

모두의 시선이 하늘로 향해 있던 순간, 때맞춰 즉위식이 무사히 끝났음을 선포하는 종소리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설렘 가득한 환호성이 터졌다.

“와아아-!”

귀가 먹먹해질 만큼 커다란 함성에 하이브는 하마터면 시전 중이던 마법을 깨트릴 뻔했다.

“아이고 귀야….”

그가 다시 정신을 집중하여 꽃비를 흩날렸다. 곧 새로 즉위한 황제 폐하께서 모습을 드러낼 시간이었다. 이때 실수를 했다간 카를로스 전하께 조금 혼이 나는 걸로 그치지 않을 터였다.

황성 출입구가 열리고, 기사들이 절도 있는 걸음으로 성벽 주변을 둘러쌌다. 입구까지 몰린 군중들을 몇 발자국 뒤로 물린 그들이 장창을 든 채 우뚝 섰다. 무겁게 걸친 철 갑옷이 빛을 받고 번쩍거렸다.

“와아아아-!”

“황제 폐하 만세-! 인페르노 제국 만세-!”

귀가 먹먹하다 못해 찢어질 것 같은 함성이 터졌다. 좀 전의 환호성을 듣고 미리 각오하고 있던 하이브는 이번엔 평탄히 집중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근처 건물에 머물러 있느라 황성 앞을 보지 못했지만, 황제 폐하께서 모습을 드러냈단 걸 소리만으로도 쉽게 짐작했다.

황제가 짤막한 선언문을 낭독했다. 듣기만 해도 절로 신뢰가 가는 어조에 하이브가 귀를 쫑긋 세웠다. 내심 그도 새로운 황제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였을지 궁금했던 터라, 꽃잎을 뿌려 대다 막바지쯤 슬쩍 고개를 내밀어 황성 쪽을 쳐다보았다.

“악, 내 눈….”

그러나 그쪽을 쳐다보자마자 하이브는 시큰거리는 눈을 감아야 했다. 황성 꼭대기에 걸린 해 때문에 순간적으로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시린 눈을 비비던 하이브가 뒤늦게 시야를 좁혀 황제가 서 있는 쪽을 보았다. 안타깝게도 한발 늦은 타이밍이었는지, 그가 볼 수 있었던 건 황제의 뒷모습뿐이었다.

금발의 황제는 느긋한 걸음으로 황성 발코니를 벗어났다. 그의 신장보다 기다란 붉은색 망토가 바닥을 느릿느릿 쓸었다. 매일 마주치다시피 하는 아서였는데, 하이브는 어쩐지 아쉬운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봐, 봤는가?”

“아니. 도통 눈이 시려서 볼 수가 있어야지….”

해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게 하이브 혼자만은 아닌 듯했다. 아마 황제는 이러한 효과를 노리고 의도적으로 이 시간에 모습을 드러냈을 터였다. 하이브는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시며 마법을 거두어들였다. 흩날리던 꽃잎이 은빛 가루가 되어 허공에서 흩어졌다.

황제가 떠나고 나서도 주변을 감싼 들뜬 공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쉽사리 그 자리를 뜨지 못하는 이들은 모두 제가 본 황제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개중에선 황제 뒤편에 있던 2황자를 언급하는 자도 있었다. 기쁘든 아쉽든 간에 모두가 들떠 있단 건 동일했다.

“오늘 같은 날 한잔해야지, 안 그런가.”

“옳은 말이로군. 가 보세.”

한참을 서서 수런거리던 군중이 하나둘 흩어진 건 해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을 때쯤이었다. 하나둘 뭉친 이들이 눈에 띄는 주점으로 들어갔다.

즉위식이 끝나고도 황도 전체는 왁자지껄하게 활기를 내뿜었다. 여기저기서 요란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황제는 이미 물러난 지 오래였으니, 이제는 그들만의 축제를 즐겨야 할 시간이었다.

벌써 날이 캄캄해진 지 오래였다. 연회장은 아직까지도 들뜬 이들의 목소리로 어수선했다. 한동안 지루한 얼굴로 앉아 있던 아서는 분위기가 적당히 무르익은 것 같자 냉큼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연회장의 열기는 새벽이 될 때까지 식지 않을 것 같았다.

아서는 황제궁의 침소로 힘없이 걸어 들어갔다. 뒤로 시종 여럿이 따라붙는 걸 물리고 가브리엘 하나만 들였다. 그가 기사를 혹사시킨다고 생각한 건지, 홀로 들어가는 가브리엘을 주변 시종들이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정작 가브리엘 본인은 지극히 만족하고 있었건만 말이다.

들어가자마자 황관부터 벗어 던지려던 아서는 두피가 함께 딸려 오는 느낌에 곧바로 포기했다. 가브리엘이 다가와 복잡하게 얽힌 장식들을 차근차근 풀어 주었다.

“매듭이 복잡하여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천천히 해.”

“예, 폐하.”

“…….”

오늘 내내 들었던 폐하라는 호칭에 아서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루 종일 질리도록 들은 소리였는데 어째 조금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머리의 장식을 풀어낸 가브리엘이 조심스럽게 황관을 내려놓았다. 그는 아서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망토를 벗겨 내고, 보기만 해도 질릴 만큼 복잡한 장식들을 하나하나 떼어 내기 시작했다.

아서는 가브리엘이 하는 바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던 아서가 입을 연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시중을 들던 기사가 마침 타이밍 좋게 아서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였다.

“리엘. 혹시 오늘 맹세를 바칠 생각이면 관두고, 한… 다음 달쯤에 해. 오늘은 피곤해서 안 되겠어.”

아서는 가브리엘이 당장 맹세를 바칠 생각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말을 건넸다. 뜬금없는 소리에 가브리엘이 고개를 들었다.

잠시 동안 의외라는 듯 눈을 깜빡이던 기사는 이내 선선히 미소를 지었다.

“…예, 폐하.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는 아서가 어떤 의미로 이런 말을 한 건지 곧바로 이해한 듯 보였다. 가브리엘이 원하였던 대로 이날 당장 그를 첫 번째 기사로 삼아 주진 못하겠지만, 처음 조건으로 걸었던 일 년이란 기한을 이만큼 줄여 준다는 뜻이었다.

오래 걸릴 것 같던 탈의는 아서가 참다못해 장신구 몇 가지를 뜯어내면서 시간이 단축되었다. 평소보다 길었던 목욕 시중이 끝나고, 아서는 침대 위로 쓰러지다시피 누웠다. 침구에 등이 닿자 잊고 있던 피로가 물씬 밀려들었다.

아서는 반만 뜬 눈을 무겁게 끔뻑거렸다. 차오르는 수마를 애써 몰아내고 침실 문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브리엘이 먼저 아서의 속내를 읽고 그가 원하는 답을 알려 주었다.

“카를로스 전하께선 곧 도착하실 겁니다.”

“…아아. 그래.”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들어 아서는 괜히 싱거운 웃음을 지었다. 안 물어봤다고 시치미를 떼기엔 제가 너무 노골적으로 문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편히 쉬십시오, 폐하.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래.”

아서가 부스스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는 문고리를 잡은 가브리엘에게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그럼… 내일 봐, 리엘.”

“예. 내일 뵙겠습니다, 폐하.”

가브리엘이 평소처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침실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아서는 가만히 입구 쪽을 응시했다. 기사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종일 부산스레 보내다가 홀로 남으니 아서는 눈앞이 몽롱하게 늘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은연중에 긴장을 하긴 했던 모양이다.

그는 가벼워진 손목을 한 바퀴 돌렸다. 소매 속에 은밀히 감추고 있었던 구속구는 이제 없었다. 카를로스는 어젯밤 했던 말과 다르게 즉위식 직전 구속구를 풀어 주었다.

무언가 각오를 한 듯한 얼굴은, 아서가 이곳을 뛰쳐나가면 함께 박차고 나가 어디로든 함께할 것처럼 보였다. 그에 웃음을 터트린 아서는 제 발로 중앙 홀까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때의 카를로스를 떠올리며 피식거리던 아서는 이윽고 다시 멍해졌다. 몸이 힘든 건 아니었으나 정신적인 피로도가 컸다. 그는 한동안 생각을 멈춘 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몸을 눕힌 침대는 생각보다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이곳은 폐위된 황제가 쓰던 침소와는 정확히 반대편에 있는 장소였다. 궁을 아예 새로 지어 버릴까 고심하다가, 뒤따를 절차들이 귀찮아 포기했다.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간 아서가 옆으로 몸을 웅크렸다. 가물가물 눈이 감기기 직전이었다. 반만 열린 커튼 틈으로 어두운 밤하늘이 보였다. 검푸른색 바다 같은 하늘에 별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박혀 있었다.

느리게 움직이는 하늘을 감상하던 사이, 침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아서는 졸린 눈을 움직여 방문객을 반겨 주었다.

안으로 걸음한 카를로스는 낮과는 달리 가벼운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도 아서와 마찬가지로 침소에 들 준비를 마친 모습이었다.

“형님, 쉬고 계셨습니까?”

카를로스가 아서에게 다가왔다. 더없이 자연스럽게 침대 위로 올라온 그가 아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 모습이 마치 수년은 반복되어 온 일상 같아 보였다.

아서는 말을 하는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하루 종일 얼마나 진이 빠졌으면, 카를로스가 제 몸을 더듬는데 이상한 생각이 들기는커녕 노곤하게 잠이 들기 직전이었다.

“여간 피곤한 게 아니신가 보군요. 졸리면 자요. 괜히 버티고 있지 말고.”

졸고 있는 아서를 쳐다보는 시선이 녹아내릴 것처럼 부드러웠다. 카를로스가 아서의 이마를 쓸어 넘겼다. 다정한 손길에 겨우 반 정도 뜨고 있던 눈이 저절로 감겼다. 아서가 웅얼거리듯 물었다.

“오늘 어땠는지는 안 물어보고…?”

“자고 내일 말씀해 주세요.”

아서의 하루를 전부 보고받고도, 사소한 것 하나하나 캐묻던 카를로스가 웬일로 재촉하지 않았다. 실은 아서는 그가 들어오기 전부터 무슨 이야기를 해 줄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등을 쓰다듬는 손길 탓인지 자꾸만 눈이 감겼다.

“어서 주무세요, 형님.”

가물가물한 시야에 카를로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간지러울 만큼 따스해 아서는 웃음을 지었다. 웃을 일이 하나도 없는데 자꾸만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눈가엔 잠기운이 가득하고 입으로는 속절없이 웃고 있으니, 제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워 보일지 뻔했다.

“너도 같이 자.”

“예.”

말과 달리 카를로스는 여전히 눈을 감지 않고 있었다. 아서가 손을 들어 카를로스의 눈두덩이를 쓸어내렸다. 순순히 감긴 눈꺼풀 위로 그가 짧게 입맞춤했다. 어느새 두 사람의 입술 끝이 똑 닮은 모양으로 올라가 있었다.

“…얼른 자고 내일 봐, 칼.”

“예. 그렇게 해요, 형님.”

“그래. 내가 잘 때 너도 자야 돼. 그래야지.”

졸린 목소리로 아서가 인사를 하는 건지 헛소리를 하는 건지 모를 것들을 늘어놓았다. 카를로스는 아서의 말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답해 주었다.

헛소리를 하는 입술 위로 카를로스의 입술이 닿았다. 쪽, 하고 떨어진 것을 아서가 다시 끌어다 붙였다. 그러다 문득 해야 할 말을 떠올린 아서가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오늘처럼 너무 일찍 깨우지는 말고.”

입술을 맞대고서 중얼거리자 카를로스가 뜬금없는 소리를 들은 양 웃었다.

“걱정 말고 푹 주무세요. 내일 밤까지 자도 안 깨울 테니….”

그가 아서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아서는 무어라 알아듣지 못할 말을 웅얼거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해졌다.

평온히 감긴 눈꺼풀을 한동안 지켜보다, 카를로스도 눈을 감았다. 그가 어둠 속에서 아서의 숨결에 맞춰 느리게 호흡했다. 가지런한 숨소리는 마치 그를 위한 자장가 같았다.

창가에 옅은 달빛이 아른거렸다. 카를로스는 아서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가 고개를 묻었다. 귓가에 닿는 심장 박동 소리와 함께, 의식이 서서히 아래로 잠겨 들듯 멀어졌다.

뒤척거리던 아서가 몸을 돌려 카를로스를 마주 끌어안았다. 어느덧 침실 안에는 고요한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기만의 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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