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간만에 아서는 진짜 꿈을 꿨다. 바다 위에 대자로 누워 아무 생각 없이 둥둥 떠다니는, 시시하고 평화로운 꿈이었다.
사실 기억나는 건 얼마 없었다. 꿈이란 게 대개 그렇듯 잠에서 깨자마자 절반 넘게 잊혀졌다. 남은 건 시야를 가득 채웠던 밤하늘이 신비로웠다는 감상뿐이었다. 설탕처럼 뿌려진 별들이 지나치게 가까워 제게로 쏟아져 내리진 않을까, 그런 시답잖은 걱정도 했던 것 같다.
한창 속이 탁 트이는 광경을 만끽했던 아서는 눈을 뜨니 정작 현실에선 카를로스의 가슴팍에 숨 막히게 끌어안겨 있었다.
잠이 들기 전만 해도 이 반대의 자세였던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바뀌었는지 모를 노릇이다. 조금 답답하긴 했지만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포근하긴 했다.
눈을 반만 뜬 채로 아서는 다시 꾸벅꾸벅 졸았다. 멍한 머리로는 전날 있었던 일도 전부 꿈처럼 느껴졌다.
잠에서 깬 것과 별개로 아직까지 정신이 몽롱했다. 그러니 아마, 눈을 감은 순간 희미한 피비린내를 느끼지 못했더라면 그대로 다시 잠이 들었을 것이다.
아서의 눈이 반짝 뜨였다. 전날에도 맡았던 냄새였다.
분명 씻고 잠자리에 들었던 것 같은데 왜 아직까지 피 냄새가 나는지 의아했다. 혹시 한나절의 소란 중에 다치기라도 한 건가 싶어 카를로스의 손을 끌고 와 확인했지만 피 냄새의 출처는 그곳이 아니었다.
손에서 나는 건 아니고. 좀 더 위쪽인 것 같았다. 어느새 홀로 심각해진 아서는 아래에서부터 냄새의 족적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눈 뜨자마자 뭘 하고 있는 겁니까, 형님.”
카를로스는 아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이 황당한 듯했다.
“별거 아니니 신경 쓰지 말고 마저 자.”
“지금 형님이 더듬고 있는 게 누구 몸인 줄은 알고 하는 말이신지요.”
카를로스의 타박을 한 귀로 흘려보낸 아서는 마침내 피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냈다. 구속구를 차도 보통 사람보다는 오감이 예민한 편이었던 터라, 희미한 흔적을 뒤쫓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냄새의 출처는 목이었다. 아서가 카를로스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이렇게 가까이서 맡으니 확실히 알겠다. 어쩐지 목을 가리는 옷을 입고 있던 게 수상쩍더라니.
아서는 목을 가리고 있던 천을 주욱 잡아당겨 안을 들여다보았다. 카를로스가 제지할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카를로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서의 미간만 구겨졌다.
“…뭐야 이거?”
날카로운 것으로 길게 그은 듯한 상처는 어떤 치료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기다란 피딱지가 잔뜩 앉아 있는데, 상처가 깊은지 군데군데 다시 터졌다 아문 흔적이 보였다. 마스터급 기사의 비인간적인 회복력을 생각해 보면 어제는 이것보다 더 심했을 게 뻔하다.
아서가 재차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왜…, 아니다. 물어볼 필요도 없겠군.”
어떤 연유로 생긴 상처인지는 알 만했다. 어차피 카를로스 본인이 아니면 이런 부위에 손을 댈 자는 전무했다.
왜 이랬는지도 알 만했다. 보나 마나 아서 자신 때문이었을 테다.
아서는 별안간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일주일도 한 달도 아닌, 기껏해야 한나절의 부재였다. 고작 그 정도 일로 카를로스가 자해를 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심각한 수준의 상처를 바라보며 아서는 시름에 잠겼다.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바로 따지지 않은 건, 도무지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던 탓이다.
“우선… 그래. 일어나, 치료부터 받아야겠어. 마법사는 어디 있나?”
“치료는 됐어요. 며칠 내버려 두면 나을 상처입니다.”
아서가 제 상처를 유심히 살펴보아도 카를로스는 덤덤했다. 왜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나 했더니 딱히 숨길 만큼 큰 상처라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애초에 목을 어설프게나마 가린 것도 측근의 권유를 따른 게 아닌가 싶었다.
순간 아서는 목구멍에 바윗덩어리가 걸린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일단 일어나. 당장 마법사한테 가야겠다. 분명 황성 어딘가에 데려다 놨을 텐데.”
“예, 지하 감옥에 있습니다.”
“…지하 감옥에 있다고?”
지하 감옥은 일반적으로 죄인을 고문하기 위해 쓰였다. 그곳에 집어넣는다는 건 ‘사지 중 하나가 잘려 나가도 좋다’는 의사 표명을 한 것과 동일했다. 아서가 황망하게 물었다.
“왜?”
“형님의 도주를 도운 죄로…. 알지 않나.”
알긴 뭘 알아. 물론 마법사가 과하게 순진했던 건 사실이지만, 하이브는 카를로스의 최측근 중에서도 최측근이다. 하이브의 다른 공적을 감안했을 때 이런 취급을 받을 만큼 큰 죄를 지은 건 아니었다.
더불어 카를로스도 사감을 앞세워 제대로 진의 확인도 하지 않고 측근을 감옥에 집어넣을 이가 결코 아닐….
아닌가?
생각할수록 아서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이때까지 카를로스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하였는데, 자꾸만 오판을 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었다.
아서가 아는 카를로스는 이곳의 주인공이자, 어떤 방해에도 무너지지 않는 영웅이었다. 애초에 그는 아서의 고작 한나절 부재로 동요는 할지언정 자해를 할 인물이 아니었다.
제가 잠깐 없어졌다고 우는 건, 못된 심보였지만 솔직한 말로 보기 좋았다. 하지만 그게 자해로까지 이어지면 말이 완전히 달라진다.
전날 그렇게 눈물을 뚝뚝 흘려 놓고선 카를로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다친 걸로 모자라 심각한 상처를 아무렇지 않게 방치해 두는 걸 보고 있으니 속이 참을 수 없이 답답했다.
아서는 침실에 있으려는 카를로스를 기어코 억지로 끌고 나왔다. 마법사를 찾으러 가는 참에 넌지시 궁금했던 것도 물었다.
“…남매 둘은 어찌 되었어. 마법사와 함께 있나?”
카를로스의 성정상 그들을 해하진 않았을 것 같긴 하나, 확인은 해 두고 싶었다.
“그들도 지하 감옥에 있습니다.”
“사지는 멀쩡한 채로?”
“…그게 왜 궁금하지? 그런 건 형님이 알 바가 아니지 않습니까.”
돌아오는 답이 냉랭했다.
“곧장 목을 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세요.”
살아 있긴 한가 보네.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예상보다 반응이 더 날카로웠다. 더 물어봤다간 괜히 카를로스를 자극하는 꼴이 될 것 같아 아서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아서가 남매를 감싸 줄수록 그들의 목숨은 위태로워질 것이었다.
원작에서는 카를로스가 먼저 남매의 사정을 듣고, 마법사를 보내 그들의 동생을 구했다. 마법사처럼 동정심을 품은 건 아니었다. 그리하면 남매에게 충성을 이끌어 낼 수 있으리라 계산했기 때문이다.
본래 카를로스는 상대가 어떤 범법자라고 해도 도덕적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그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오로지 이용 가치였다. 쓸 만한가,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아서는 그가 제레미의 맹세를 받아냈으니 나머지 엠마는 카를로스가 어련히 알아서 데려가겠거니 했다.
그 또한 아서의 오판이었다. 카를로스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자는 필요에 따라 포용할 수 있으나, 아서의 도망을 도운 자는 그럴 수 없던 것이다. 오히려 카를로스가 말했던 대로 남매를 당장 죽이지 않은 게 다행인 지경이었다.
이쯤 되니 아서는 슬슬 자신의 판단력에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제가 카를로스의 마음을 상당히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것인지 몰랐다.
“이쪽으로 따라오십시오, 형님.”
카를로스의 뒤를 따라 아서는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의 습한 공기가 아서의 복잡한 속내를 대변하듯 축 가라앉았다.
철창 속 마법사는 하룻밤 사이 무슨 고초를 겪었는지 초췌한 몰골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꼴이 참…. 말이 아니게 됐군.”
“아서 전하….”
다행히 하이브는 좀 꼬질꼬질해 보일 뿐 달리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지하 감옥에 끌려온 것치고는 양호한 편이었다.
아서는 카를로스를 재촉해 마법사를 감옥에서 꺼내도록 했다. 아서를 옆에 끼고 있자 카를로스도 이성을 되찾은 듯 순순히 시키는 대로 따랐다. 철창을 빠져나온 하이브가 카를로스의 상처를 치료해 주니 ‘수고했다.’라며 한마디 덧붙이기도 했다.
목의 상처를 치료하고 나서야 아서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을 했다. 시무룩한 하이브를 달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 때문에 그대가 괜한 고초를 겪게 되었군. 미안하네.”
“아닙니다, 전하. …제가 잘못을 한 걸요. 모포도 깔려 있었고 견딜 만했습니다.”
한껏 우울한 얼굴이 된 하이브는 당분간 자택에서 칩거하며 반성을 할 것이라 말했다.
“잊지 않고 꺼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카를로스 전하께서 다시 불러 주실 때까지 제 연구실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서가 마법사의 축 처진 어깨를 다독였다. 돌아오겠단 아서의 말을 하이브는 믿었고, 카를로스는 믿지 못했고. 그 차이 하나로 이런 일이 생긴 것뿐이니 너무 자책하지 말라며 말을 덧붙였다.
지하 감옥을 찾은 김에 아서는 남매의 생사도 확인했다. 다행히 사지가 멀쩡히 붙어 있었고 고문을 당한 흔적도 없었다. 아마 심문을 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듯했다. 우선 마법사가 쓰던 모포를 남매에게 넣어 주며 며칠 뒤를 기약하였다.
또 다른 피해자가 없을까 지하를 둘러보던 아서는 웬 백금발을 한 남자 여럿이 한곳에 갇혀 있는 걸 발견했다. 나이도 외모도 제각각인 남자들은 특이하게도 아서와 머리 색깔이 죄다 똑같았다.
그걸 보고 나서야 아서는 전날 밤 카를로스가 아서와 대화하던 중 급격히 태도를 바꾸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무엇 하러 부탁하지도 않은 짓을 해서.”
아서가 중얼거렸다. 저런 명명백백한 증거가 있으니 그가 아무리 진실이라고 주장한들 카를로스로선 당연히 믿기가 어려웠을 테다. 범인은 굳이 캐 볼 것도 없이 오를레앙 대공일 것이다. 대공은 호의를 베푼답시고 이런 짓을 저지른 것 같았는데 그게 도리어 큰 사달을 만들 뻔했다.
보아하니 저 무리도 아무것도 모르고 휘말린 이들처럼 보여, 아서는 저들은 적당히 심문하다 사지 멀쩡하게 보내 주어라 전했다.
***
대체 한나절 사이에 카를로스가 얼마나 많은 일을 저지른 건지 모르겠다.
적색궁 집무실로 갔더니 가관이었다. 전날 일의 여파로 여러 곳에서 온 항의 서한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피해를 입증하는 서류, 얼마만큼의 보상이 필요한지에 관한 증명서 등이었는데, 한두 장으로 줄여도 될 것을 대부분 과하게 내용을 늘여서 보냈다. 수도 출입을 통제한 것으로 모자라 귀족가를 무력으로 점거한 결과였다.
물론 저 서신이 진짜 카를로스랑 부딪혀 보겠단 뜻은 아니었다. 대개는 많은 손해가 발생했고, 귀족들의 경우 제 위신이 깎였으니 어느 정도 체면치레는 해 달라는 뜻일 터였다.
아서는 벌써부터 질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입구에 우두커니 서서 도통 들어갈 생각을 않자, 카를로스의 부관들이 황급히 다가와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아서 전하. 어서 들어오세요. 이쪽에 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한 부관이 반가운 목소리로 아서를 안내했다. 평소와 다른 수상쩍은 환대를 받다 보니 어느새 아서도 서류가 놓인 자리에 카를로스와 나란히 앉게 되었다.
“…여기가 내 자리라고?”
“예, 전하.”
또 다른 부관이 공손한 손길로 깃펜을 내밀었다. 딱히 업무를 볼 생각이 없던 아서는 떨떠름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기실 아서가 이곳에 온 것도 카를로스가 도통 아서와 떨어질 생각을 안 해 피치 못해 끌려온 것뿐이었다. 적당히 애착 인형 역할 정도만 수행하면 되겠거니 했건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결국 아서는 손에 깃펜을 들었다. 어쨌든 아서가 이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건 사실이었으므로, 수습을 도울 의향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수십 년간 해 왔던 짓이라 그리 어렵진 않았다. 대강 핵심적인 사항만을 휘갈겨 적고 나머지는 카를로스의 부관에게 맡겼다. 건성으로 하는 듯 보였으나 그간 쌓아 둔 경험 덕에 결과물은 그럴싸해 보였다.
그러나 책임감을 느꼈던 것도 잠시, 몇 시간째 머리를 쥐어 짜내고 있으니 아서는 돌연 제가 왜 이러고 있나 억울해졌다.
“…난 이만 내 궁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아서의 불평에 옆에 있던 카를로스가 곧바로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좋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그럼 남은 일은 어쩌고?”
“당장 해결해야 할 것들만 챙겨 가면 됩니다.”
카를로스는 아서에게 빈말이라도 절대 먼저 가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아서와 떨어질 생각이 추호도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들의 대화를 엿들은 부관이 제발 가지 말라며 아서에게 눈빛으로 호소했다. 당장이라도 아서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질 것만 같은 절실한 눈빛이었다.
결국 빠르게 단념한 아서가 비스듬히 턱을 괴고 앉았다. 더 머리를 쓰고 싶지 않아 깃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한량처럼 시간을 보냈다. 조금만 몸을 일으키려 하면 옆에 있는 카를로스가 당장 따라나설 것처럼 굴었기에 도망갈 엄두도 못 냈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데 무어가 그리 불안한 건지 카를로스는 아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예전에도 아서에게 집착하는 감은 있었지만 이제는 강박적으로 보일 만큼 아서를 감시했다.
게다가 가만 보고 있자니 일을 처리하는 속도가 카를로스 본인이 맞나 의심스러울 만큼 느렸다. 저거 알고 보면 카를로스로 위장한 하이브인 거 아닌가.
그러나 유심히 살펴보니 과연 속도가 느릴 만도 했다. 서류를 보는 시간보다 아서의 얼굴을 보는 시간이 훨씬 길었던 것이다. 그 꼴을 지켜보다 못해 아서가 물었다.
“계속 그러고 있을 생각인가?”
“무얼 말입니까.”
“그렇게 나만 보고 있을 거냐고.”
“…예.”
무의식중에 그러는가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비아냥거리는 데에 익숙한 입이 근질거렸지만 아서는 더 따지고 들지 않았다.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도 카를로스의 목에 빼곡하던 상처를 떠올리면 무거운 한숨이 비집고 나왔다. 그날의 상흔이 자꾸만 아서의 어딘가를 쿡쿡 찔러 댔다.
하는 수 없이 아서는 가지고 놀던 깃펜을 다시 쥐었다. 차갑게 굳은 표정이 누구 하나 잘못 걸리면 쥐 잡듯이 잡을 것처럼 살벌했다.
“거기 갈색 머리.”
“예?”
“그거 전부 이쪽에 올려놔 주겠나?”
아서가 카를로스의 부관에게 손짓했다. 부름을 받은 부관 브라운이 흠칫 어깨를 들썩였다.
“일이 많아 보이는데 차라리 빨리 끝내 버리는 게 속 편하지 않겠어?”
“아….”
브라운의 시선이 카를로스에게로 향했다. 카를로스가 달리 저지하지 않자 그가 머뭇거리며 아서의 앞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백색궁의 부관들도 불러와. 기밀 서류는 알아서 치우고.”
“…예, 사용인을 보내겠습니다. 서류는 이미 따로 분류해 둔 터라 우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군.”
아서가 지긋지긋하단 얼굴로 서류를 펼쳤다. 그는 제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자괴감을 느꼈다가 이내 체념했다. 마음 편히 침실로 돌아가려면 차라리 오늘 치 일감을 빨리 해치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먼저 오를레앙 대공가로 가는 서신부터 작성했다. 대공이 괜한 짓을 저질렀으니 그쪽에는 딱히 대단한 보상을 해 주지 않아도 될 터였다. 아서는 쥐꼬리만 한 금액을 보상 확인서에 적고 서신을 봉인했다.
“실례합니다….”
그렇게 집무실이 한창 바삐 돌아가고 있을 즈음, 아서의 부관 둘이 쭈뼛쭈뼛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아서 전하께서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들어와.”
아서는 새 일꾼을 반갑게 맞이했다.
“에드윈, 라일. 그간 많이 심심했을 테니 일을 할 때도 되었겠지.”
“황송하옵니다, 전하.”
“가브리엘 경도 안으로 들어오는 게 좋겠군. 그를 이리로 불러 주겠는가?”
“예, 전하.”
뒤이어 집무실 밖에 서 있던 가브리엘까지 합류했다. 전 주군의 집무실에서 현 주군과 함께 일을 하는 기이한 장면이 연출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브리엘 같은 훌륭한 인력을 내버려 두는 건 낭비나 마찬가지였다.
인원수가 늘어나니 확실히 일 처리 속도가 서너 배는 빨라졌다. 그럼에도 저녁 늦은 시간은 되어야 끝이 보일 것 같았다. 그간 카를로스가 홀로 얼마나 많은 업무량을 감당하고 있었는지 짐작이 되었다.
고개를 살짝 틀자마자 카를로스와 시선이 곧장 맞부딪혔다. 마치 아서를 감시라도 하는 듯한 눈빛이다.
아서에게 신경을 쏟느라 카를로스는 본래 업무 속도의 채 반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쪽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어떤 생각에 잠긴 듯 깊게 침잠했다. 서류를 든 손 역시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런 카를로스는 어딘가 고장 난 인형 같아 보였다. 겉만 멀쩡할 뿐, 태엽을 감으면 한자리만 빙글빙글 도는 그런 것 말이다.
아. 또 이상하게 가슴 언저리가 따끔했다. 깃펜을 부러뜨릴 것처럼 꽉 쥔 아서가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이럴 바엔 차라리 머리 아픈 활자나 읽는 게 낫겠다. 몰두할 게 있어 한편으론 다행이었다.
잡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때마다 아서는 서류를 한 뭉텅이 쥐고 제 앞에 내려놓았다. 열정적이다시피 집중하는 아서를 카를로스는 무언가 가늠하듯 지켜보았다.
벽 한 면을 차지한 창이 점차 어두워졌다. 하늘 한가운데 떠 있던 해가 사라질 때까지 집무실은 쉴 새 없이 바삐 돌아갔다.
모든 업무를 끝마치고 나니 아서의 뺨이 해쓱해졌다. 아서는 썰렁한 밤하늘을 배경 삼아 제 궁으로 돌아갔다. 천천히 걷는 아서의 옆에는 카를로스가 있었고, 뒤에는 가브리엘이 있었다.
터덜터덜 침실로 걸어 들어간 아서는 허물을 벗듯 옷을 벗어 던졌다. 다가온 가브리엘이 아서의 탈의를 도왔다.
욕조에 한참 몸을 담그고 나오자 비로소 아서의 뺨에 활기가 돌았다.
카를로스는 아서가 씻는 동안 바로 옆의 욕조에서 기다렸다. 본래는 옆 방에서 씻고 오던 그는 이젠 그 짧은 시간조차 아서와 떨어지기가 싫은 듯했다. 내내 아서를 지켜보다가 목욕 시중이 끝난 때에 바로 다가와 아서를 끌어안았다.
기사는 제 임무를 마치고 익숙하다는 듯 유유히 침실을 떠났다. 요사이 카를로스가 아서와 떨어지려 하지 않아, 기사와 아서는 함께 있되 대화는 거의 나누지 못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브리엘은 그 사실에 아무런 불만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기사는 카를로스가 별말을 하지 않아도 제가 빠져야 할 것 같으면 말없이 몸을 뒤로 물리곤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카를로스와의 충돌을 철저히 피하는 태도였다.
가브리엘을 손쉽게 쫓아낸 카를로스는 아서의 몸에 연신 제 몸을 부비적거렸다.
물기를 닦아 내지도 않고 온 건지 맞닿은 피부가 축축했다. 덜 마른 머리칼에서 떨어져 내린 물방울이 아서의 목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물기 좀 털고 와.”
기껏 닦아 낸 몸이 다시 젖자 아서는 평소 그랬던 것처럼 무심코 카를로스를 밀어냈다.
억지로 끌어안고 있을 생각이 없었던 듯 카를로스는 가벼운 손짓에도 쉽게 밀려 나갔다. 그래도 저러다 또 금방 돌아와 좀 전보다 더 강하게 끌어안을 것을 알았다.
아서는 카를로스의 반응을 은근히 기대하면서 등을 돌린 채로 기다렸다.
한데 평소였으면 벌써 아서에게 철썩 달라붙었을 카를로스가 별 반응이 없었다. 의아해진 아서가 시야를 가리고 있던 수건을 치워 내고, 뒤돌아 카를로스의 얼굴을 살폈다.
뒤편의 카를로스는 아서에게 힘없이 밀려나고선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멍하니 아서 쪽으로 향한 눈동자는 색이 바랜 듯 창백했다.
“…뭐 하고 있어, 이리로 안 오고.”
아서가 조심스레 카를로스를 불렀다. 눈이 마주쳤지만 카를로스는 아서가 보이지도, 아서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눈앞에서 손을 휘적휘적 저어도 아무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뒤이어 물감이 번지듯 서서히 카를로스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갑자기 왜 그래?”
아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조금씩 숨을 헐떡이던 카를로스는 갑작스레 물속에 깊이 잠긴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미처 말릴 틈도 없이 그가 스스로의 목을 쥐었다. 놀란 아서가 카를로스를 붙잡았다.
“무슨… 카를로스!”
카를로스의 손끝이 피부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둥근 손톱이 삽시간에 날카로운 흉기가 되어 그의 살갗을 긁어내렸다. 카를로스는 제 목을 꿰뚫어서라도 어떻게든 숨구멍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목 주변이 피범벅이 되고 피비린내가 번져 나갔다. 병적으로 목을 긁어 대는 손길에 아서가 황급히 그의 손을 부여잡았다. 그러나 구속구를 찬 몸으로는 카를로스의 자해를 막을 수가 없었다.
아서는 패닉에 빠졌다. 어서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데, 순간적으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설렁줄을 마구 당기자 가브리엘이 급히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달려온 기사가 카를로스의 손을 억지로 떼어 냈다. 의식이 없던 카를로스는 평소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허억, 허억….”
목을 긁지 못하게 되니 그는 이제 피를 토해 낼 것처럼 헛구역질을 해 댔다.
핏줄 선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구역질의 영향으로 눈 주변이 새빨갛게 충혈되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물기 맺힌 흰자는 반들거렸다.
아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카를로스를 끌어안았다. 발작하듯 숨을 몰아쉬는 그에게 입을 맞추고 호흡을 나누었다.
“괜찮, 괜찮아…. 카를로스.”
끌어안고 괜찮다며 한참 동안이나 속삭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카를로스의 호흡이 조금씩 진정되는 게 느껴졌다.
굳은 등을 쓰다듬는 아서의 손이 덜덜 떨렸다.
카를로스가 진정되기 시작하자 그의 몸을 누르고 있던 가브리엘이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갔다.
아서는 머리가 멍해졌다.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던 것을 보니 기사는 이미 카를로스의 증세를 알고 있었던 듯했다.
카를로스의 목에 남은 흔적으로 아서 역시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나 머리로 아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건 다르다고, 실제로 자해 장면을 목격하자 일순간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품 안의 카를로스는 서서히 차분해져 가는데 정작 아서가 오한을 느끼듯 간헐적으로 몸을 떨어 댔다.
“…형님.”
정신을 차린 카를로스가 도리어 아서를 끌어안고 불렀다.
“카를로스….”
아서는 제 심장을 찌르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죄책감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인지 알지 못했다.
놀란 마음이 가라앉고 나니 뒤이어 신체가 반응했다. 심장이 소금물에 절인 듯 욱신거렸다. 이전 날 아서는 카를로스가 영영 제게 종속되는 상상 따위를 한 적이 있었지만, 막상 지금 그는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카를로스의 목을 껴안고 아래로 끌어당겼다. 입술이 맞닿으니 그제야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혀가 느리게 섞였다. 그들은 서로의 호흡을 확인하며 조심스러운 입맞춤을 이어 갔다. 서로를 핥으며 위로하는, 평소와 달리 성적인 함의가 없는 부드러운 교감이었다.
입맞춤은 점점 더 깊어졌다. 느긋하던 결합이 어느샌가 점점 애가 타듯 가쁘게 변했다.
아서는 카를로스가 들어오는 대로 전부 받아 주다 점점 호흡이 부족해지는 걸 느꼈다.
“칼, 읍, 으응….”
숨을 쉬지 못하겠다고 말하려 해도 도무지 틈을 주지 않았다. 아서는 버티다 못해 카를로스의 등을 두드렸다.
입술을 떼어 내자 카를로스는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그의 몸이 또다시 경직되는 것만 같았다. 목 주변이 피범벅인데 수습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아서는 카를로스가 괜찮은 체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숨이 막혀서 그런 거야. 밀어낸 게 아니고….”
카를로스를 진정시키려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 위로 입 도장을 꾹 찍었다.
뺨에 입을 맞추고 이어 눈이며 귀며 가릴 것 없이 간지럽히자 카를로스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더는 아서에게 입 맞추려 들지 않았다.
아서는 카를로스를 안고 그의 등을 토닥였다. 손에 닿는 침의는 이미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흘러내린 피로 옷깃도 붉게 물든 지 오래였다.
연고를 발라야 할 것 같아 설렁줄로 손을 뻗으려던 순간 카를로스에게 붙잡혔다. 카를로스는 아서의 손을 끌어다 제 등에 두르게 했다. 혹여나 다시 카를로스를 자극하게 될까 아서는 잠자코 그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침실의 불을 끄고, 카를로스가 잠이 들 때까지 아서는 그를 안고 등을 어루만졌다. 평소 아서보다 먼저 잠들지 않던 카를로스는 기운이 빠진 듯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그제서야 아서도 긴장을 풀고 편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때, 카를로스의 몸에서 스멀스멀 이상한 기운이 새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꾸벅꾸벅 졸던 아서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카를로스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악몽을 꾸고 있었다. 어깨를 잡고 흔들어도 그는 깨어나지 못했다. 보통 때엔 아서의 숨소리만 달라져도 일어나는 카를로스였는데 그럴 겨를조차 없어 보였다.
아서는 망설임 없이 카를로스의 꿈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현실의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침실과 판에 박은 듯 똑같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카를로스의 아래에 현재의 아서가 아닌 스무 살의 아서가 깔려 있다는 점이었다.
어린 얼굴을 한 아서는 경멸 어린 눈초리로 카를로스를 노려보았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곤 독설밖에 없었다.
‘역겨운 놈. 짐승도 너처럼 아무 데서나 발정하진 않겠지.’
‘네 누이를 따라 죽지 그랬느냐?’
‘죽은 네 누이가 지금 이 꼴을 본다면 개탄을 할 거다. 제 형제에게 발정하는 더러운…. 너 같은 놈을 세상 누가 좋아해 주겠….’
아서는 꿈속 아서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지워 버렸다. 그리고 현재의 모습으로 나타나 카를로스를 끌어안고 무게를 실어 누웠다. 카를로스는 엉겁결에 아서를 등에 달고 풀썩 침대 위로 쓰러졌다.
갑자기 눈앞에서 아서가 사라지자 카를로스는 어안이 벙벙한 듯했다.
‘…형님?’
그가 눈을 깜빡이며 새롭게 나타난 아서를 보았다. 아서의 독설을 들으며 울고 있었는지 눈 주변이 축축했다. 현실에선 단 한 번 보여 준 눈물이 꿈에서는 조금 더 잦은 모양이었다.
아서는 카를로스의 젖은 눈가를 핥아 주며 물었다.
‘칼, 왜 이런 꿈을 꾸고 있어?’
그 말 한마디에 카를로스는 이곳이 현실이 아닌 걸 자각했다. 그 순간 사방이 종이 구겨지듯 한 번에 일그러졌다. 꿈의 주인이 잠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카를로스가 꿈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스스로 잠에서 깨어났다. 다행인 일이었다.
그곳에서 쫓겨난 아서는 다시 제 몸속으로 들어갔다. 잠에서 깨어난 카를로스가 품에 있는 아서를 보고 눈에 띄게 안심한 얼굴을 했다.
“악몽이라도 꿨나 봐.”
아서는 카를로스를 끌어안고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본 그것은 고작 악몽에 불과할 뿐이라고, 넌지시 알려 주었다.
땀에 젖은 카를로스의 옷을 아서가 손으로 잡아당겼다. 천이 피부에 달라붙어 찝찝해 보였다. 젖은 옷 대신 가운을 입히고 싶은데, 설렁줄을 못 건드리게 하니 직접 가져다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서는 간만에 게으른 몸을 일으켰다.
카를로스가 또 아서를 붙잡았다.
“…어딜 가시려고요.”
“가운 가지러.”
“내 것이라면 굳이 필요 없어요.”
카를로스는 아서의 허리를 끌어당겨 침대에 눕도록 만들었다. 젖은 옷이 아서의 신경을 건드렸다고 생각했는지 그가 상의를 벗어 던졌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상반신이 어둠 속에서 유난히 선명했다.
끌어안자마자 훅 끼치는 뜨거운 열기에 아서는 묘한 기분에 젖었다. 이번만큼은 양심껏 참아 보려 하는데 발기한 카를로스의 성기가 허벅지를 찔러 댔다.
“…피라도 좀 닦지 그래.”
아서가 괜스레 중얼거렸다. 아서를 빤히 쳐다보던 카를로스는 잠자코 시킨 대로 움직였다. 그가 벗어 둔 옷을 가져와 목 부근을 꼼꼼히 닦아 냈다. 다행히 피는 멎은 듯했지만 진득한 피 냄새가 공기 중으로 번져 아서의 뺨까지 들러붙었다.
카를로스가 아서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붙잡은 손을 끌어다가 제 등허리 위로 올려 두고, 은근히 하반신을 맞대고 비볐다.
그는 평소처럼 아서를 유혹하는 듯했는데 목 아래가 온통 피투성이였던 터라 오히려 역효과를 자아냈다. 얼핏 보면 갓 사람을 죽이고 나온 처형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런 카를로스를 타박할 것도 없었다. 그보다 더 이상했던 건 카를로스의 별거 아닌 몸짓에 이미 홀려 넘어간 아서 자신이었던 탓이다.
아서는 정말 오랜만에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에 머뭇거렸다. 본래라면 뭐가 어찌 되든 내키는 대로 굴었을 그가 먼저 상황에 제동을 걸었다. 당장 목의 상처를 치료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치료부터 해.”
아서가 그리 말하니 카를로스로선 어쩔 수 없었다. 불만스레 미간을 좁히고 있던 카를로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서는 카를로스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그가 사용인을 불러 제대로 치료를 끝낼 때까지 참견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해가 동쪽 끄트머리에서 차오르고 있었다. 아서는 커튼을 닫아 빛이 새어 들어오지 않게 했다. 카를로스가 약 냄새를 풍기며 아서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새벽의 공기는 차가웠으나 맞닿은 몸은 녹아내릴 것처럼 뜨거웠다. 자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던 카를로스는 몇 번 등을 쓰다듬어 주자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아서도 뒤늦게 잊고 있던 잠기운을 자각했다. 아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카를로스의 숨소리를 느끼며 긴 새벽을 보냈다.
***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늦은 아침, 흉곽이 조이는 압박감에 아서가 끙끙거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좁은 틈새로 겨우 팔 하나를 꺼내 뻑뻑한 눈을 비볐다. 두꺼운 팔이 억센 밧줄처럼 아서를 묶고 있었다.
커튼 틈으로 들어온 해가 침구 위로 가느다란 선을 그렸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벌써 아침이었다.
아서는 자신이 눈을 제대로 뜬 건지 만 건지 헷갈렸다. 눈두덩이가 퉁퉁 부어 앞이 평소의 반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의 기억은 어느 지점에서 뚝 끊겨 있었다. 아무래도 또 정사를 치르다 기절하듯 잠이 든 것 같았다.
이젠 새삼스레 놀랄 것도 없었다. 매일 밤마다 한계까지 몰아붙여진 탓에 최근 며칠 내내 이런 식으로 아침을 맞이해야만 했다. 정신을 잃거나, 혹은 정신을 잃은 척을 하거나.
“일어나셨습니까.”
“…졸려.”
반쯤 죽어가고 있는 아서와 달리 카를로스는 아침부터 눈동자가 또렷했다. 잠기운 하나 보이지 않는 걸 봐선 한참 전부터 아서가 깨기만을 기다린 듯싶었다.
아서가 멍하니 숨만 쉬고 있으니 눈가에 부드러운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그걸로 끝났다면 다행이었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소리 없이 도장을 찍어 대던 입술이 어느새 귀밑을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불현듯 위기감이 차올랐다. 여기서 더 했다간 또 밤이 될 때까지 시달릴 게 뻔했다. 아서는 재빨리 중얼거렸다.
“목말라.”
“잠깐 기다리세요.”
말 한마디에 카를로스가 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제서야 아서는 편안하게 몸을 뉘었다. 조금만 밀어내도 극심히 불안해하는 카를로스를 알기에 요령껏 다른 방식으로 그를 움직였다.
창밖은 이미 날이 밝았다. 아직 오후는 아닌 듯했지만 늑장을 부려도 되는 시간대는 아니었다.
잠시 정신이 팔린 사이 입가에 차가운 잔이 닿았다. 입을 벌려 물을 받아 마시면서 아서는 고심했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과거 카를로스가 집무실에만 틀어박혀 얼굴을 보이지 않았을 때도 문제였지만, 이처럼 제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것도 문제였다. 그간 눌러 참던 게 터진 탓인지 완전히 응석받이가 되었다.
이제 카를로스는 아예 제 자신을 제어할 마음이 없는 듯했다. 온갖 곳에서 애원과 비난이 쏟아지는데 들은 체도 안 했다. 최근 들어선 아서의 설득마저 먹히지 않았다.
그 탓에 애꿎은 아서만 그의 공백을 메우느라 죽어나고 있었다. 매일 카를로스를 적색궁까지 데려다 놓는 건 물론이고, 제 것도 아닌 일거리에 종일 골머리를 썩였다.
낮에는 일에 치여, 밤에는 카를로스에게 치여. 아서는 이러다 제가 과로사로 죽게 되는 건 아닐지 진지하게 미래에 대해 고민했다.
“우선 씻어야겠어….”
다짐하듯 아서가 중얼거렸다. 아서는 침대 기둥에 달린 끈을 당겨 가브리엘을 불러들였다.
우선 씻고 카를로스를 집무실로 보내야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카를로스를 보내는 게 아니라 카를로스와 함께 가야 했다.
“금방 나올 테니 거기 있어.”
“예.”
아서가 씻는 동안 카를로스는 욕실 입구를 지켰다. 매번 욕실 안까지 들어오려 하는 걸 겨우 설득해서 그 정도로 합의를 봤다.
사실상 물 떨어지는 소리마저 죄다 전달되는 거리라 옆에 있는 것과 그다지 다를 게 없었다. 그 때문인지 아서는 종종 가브리엘과 딴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묘하게 감시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좋은 아침입니다, 전하.”
카를로스의 감시 아닌 감시가 며칠 내내 물샐틈없이 이어지자, 요사이 아서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던 가브리엘은 이제 체념한 얼굴이었다.
며칠 전부터 기사는 아서와 깊은 대화를 나눌 순간을 고대하는 것 같았으나 불운히도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만 있었다. 이제 그들이 둘만 있을 시간이라곤 목욕 시중을 드는 시간이 유일했다.
“밤사이 편히 주무셨습니까. 몸은 좀 어떠신지요.”
“나쁘지 않아.”
가브리엘이 평소처럼 묻고 아서도 평소와 비슷하게 답했다.
“오늘도 몸이 많이 굳으셨습니다.”
뭉친 근육을 풀어 주는 손길이 정성스러웠다. 청초한 눈매가 평소보다 풀이 죽은 듯 보여 옆에서 지켜보던 아서가 괜스레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머리카락 끝을 타고 흘러내린 물줄기가 아서의 뺨을 간지럽혔다. 욕실의 습한 공기가 어쩐지 무겁게 느껴졌다.
아서는 기사가 어떤 이유로 자신과의 대화를 원하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가브리엘이 이토록 꺼내기 고심하는 말이라고 해 봐야 어차피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가 이번에야말로 아서에게 맹세를 바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이번 아서의 한나절 외출을 계기로 그에게도 어떤 심경의 변화가 생긴 듯했다.
아서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채로 곰곰이 생각했다. 가브리엘을 흘끗 보니 여전히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다. 보다 못한 아서 쪽에서 먼저 말을 꺼냈다.
“리엘.”
“예, 전하.”
“할 말이 있으면 지금 해. 얼마든지 들어 줄 테니까.”
고백하자면 이미 아서는 답할 말을 정해 두었다. 그래서 자신만만하게 가브리엘을 종용했다.
“뭐, 나한테 서운한 점이라거나. 바라는 일이라거나….”
몸을 일으키자 욕조 가득하던 물이 바닥을 적셨다. 아서는 한쪽 벽에 걸려 있던 가운을 걸치고 가브리엘의 앞에 앉았다. 몸이 좀 축축하긴 하나 나체로 마주 보는 것보단 나을 터였다.
“왜 답이 없어. 아직 말할 기분이 아닌가?”
“…서운한 점이라. 전하께서 정확히 무얼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가브리엘이 의뭉을 떨었다.
“그래?”
아직 아닌 건가. 우선 알겠다며 아서가 한발 물러나려고 할 때였다.
가브리엘이 다가와 아서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좀 전까지 아슬아슬하게 맺혀 있던 물방울이 그의 손 아래에서 짓뭉개졌다. 그가 낮게 속삭였다.
“이를테면, 전하께서 제게 한마디 언질도 없이 사라지신 것이나… 혹은 돌아온 뒤로 내내 제게 무심하게 구신 것? 그런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래. 그런 거 맞아.”
조금 당황했던 아서가 애써 태연함을 유지했다. 그러니까 가브리엘은 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그 중 어느 하나를 꼽을 수 없었던 것이다.
“…며칠 전엔 정말 금방 돌아올 생각이었어. 그대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외출이었고 말이지.”
왠지 모르게 아서는 구차한 변명을 하고 있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저 그날 일로 전하께서 저를 신뢰하지 않는단 걸 재차 깨달았을 뿐이지요. 그리고 저를 전하의 기사로 생각지 않으신다는 것 역시 말입니다.”
예의 바른 말투와 어울리지 않게 그는 참 가감 없이 제 속내를 털어놓았다. 아서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조용히 삼켰다.
의심 많은 아서가 가브리엘을 믿지 못하는 건 실은 당연한 결과나 마찬가지였다. 가브리엘에게만 박하게 구는 게 아니라 애초에 아서는 모든 사람을 믿지 않았다. 그가 지닌 인간에 대한 불신은 전생과 현생 전부에 걸쳐 쌓인 것으로, 타인이 짧은 시일 내에 쉽사리 무너뜨릴 만한 게 아니었다. 원한다면 믿는 척이야 해 줄 수 있겠다만 가브리엘이 그런 걸 원할 것 같진 않았다.
기사가 손끝으로 아서의 턱선을 덧그렸다. 간지러운 손길에 아서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허나, 전하. 서운한 마음은 저 홀로 추슬러야 할 것이고 전하께서 저를 다독여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투정을 부려 본 것이니 그리 곤란해하지 않으셨으면 하옵니다.”
마치 아서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가브리엘이 말했다. 다독여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니 아서는 준비했던 어설픈 변명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다만 한 가지 후회가 드는 건 사실입니다.”
“…무슨 후회?”
“진즉 전하께 당신의 기사가 되고 싶다며 졸랐어야 했는데 하는, 그런 후회 말입니다.”
“그게 조른다고 될 일인가.”
어린아이가 사탕을 사 달라고 조르는 것도 아니고, 표현이 우스웠다. 한데 가브리엘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 보였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억지를 부리면 전하께서 받아 주실 거라는, 그런 이상한 믿음을 품고 있었습니다만….”
“…….”
아서는 차마 기사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객관적으로는 이상한 믿음처럼 보이겠지만 실은 가브리엘이 아서의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한 것과 같았다.
예전부터 아서는 끈질긴 타입에 유독 약해지곤 했다. 아마 처음 몇 번은 거절하다 시간이 갈수록 귀찮아진 나머지 알겠다며 수락하고 말았을 터였다.
“그거야, 뭐….”
아서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모호한 소리만 내고 있으니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전하께선 참으로 다정한 분이십니다.”
“…내가?”
“이렇게 제 앞에 계신 건, 이미 제가 할 말을 짐작하고 계시기 때문이지 않으십니까.”
“그건 맞긴 한데.”
“과분한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낯선 칭찬을 들은 아서는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가브리엘이 부드러운 눈으로 아서를 바라보았다.
사실 기사가 아서의 옆을 지켰던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그에게 맹세를 바칠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한 발짝 나아가려는 때마다 지난 과오가 앞을 막아섰다. 아서에게 기사의 맹세를 바칠 것이라 마음먹었지만 실제로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기까지는 각오가 필요했다. 이제야 조금씩 아서의 신뢰를 얻어 가는 참에, 제 맹세로 모든 게 무위로 돌아갈지도 모른단 우려가 그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이전 날 하신 말씀이 아직까지 유효하다면…. 이제라도 제가 감히, 전하의 기사가 되고자 합니다.」
과거 아서를 기만하고자 내뱉었던 맹세가 정말이었다면 어떠하였을까. 기사는 이미 수차례 생각했던 물음을 또다시 속절없이 떠올리고 말았다.
‘만약에’라는 가정은 그에게 잠시나마 기분 좋은 상상을 안겨 주는 반면, 그 끝은 매번 씁쓸했다. 놓쳐 버린 기회는 이따금씩 그에게 미련이라는 낯선 감정을 불러왔다. 기사는 활자로만 배웠던 어렴풋한 감정들을 아서를 통해 하나하나 배워 가고 있는 중이었다.
목 안에서 여러 말이 맴돌았다. 가브리엘은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 아서가 이토록 그를 배려해 주었는데 아직까지 망설이는 건, 이미 아서의 대답이 무엇일지 어느 정도 그려졌던 탓이었다.
그러나 당장으로선 가브리엘은 이 순간 아서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고 있단 사실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또다시 언제 올지 모를 기회를 스쳐 보내고 싶지 않았다.
“전하, 괜찮다면 이쪽으로 와 주시겠습니까?”
그가 아서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아서를 일으켜 욕실 한편의 간이의자에 앉도록 했다. 가브리엘 자신은 그 아래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약식으로나마 모양새를 갖춘 것이다.
조용한 공기 속에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이 선명했다. 맹세를 바치기엔 초라한 장소였음에도 둘 중 누구도 그 사실을 개의치 않았다. 침묵하던 가브리엘이 아서를 올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전하께 청을 드려도 될까요.”
아서는 대답 대신 기사의 말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침묵을 지켰다. 말간 눈동자가 가브리엘의 속내를 투명하게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채 깨닫지 못했던 긴장감이 서서히 기사의 목덜미를 타고 기어올랐다. 거절을 당할 것을 각오하고 몇 번이고 반복하리라 다짐하였던 것이 무색했다.
“부디…. 제게 전하의 기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다시 한번 더 주신다면.”
목소리가 처량하게 떨리진 않았다. 가브리엘이 아서의 손을 끌어 와 제 뺨에 붙였다. 젖은 손에서 옮겨 온 물방울이 메마른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서가 무얼 좋아하는지를 알고서 하는,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평생토록 전하의 옆자리를 지키고 싶습니다.”
물기를 머금은 손등에 가브리엘이 입을 맞추었다.
“전하의 기사로서.”
스치듯 마주친 붉은 눈동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로선 알 도리가 없다. 가브리엘은 선고를 기다리듯 겸허히 고개를 숙였다.
이후의 일은 전부 아서의 선택에 달렸다. 어떤 답이 돌아오더라도 당분간은 모든 걸 겸허히 수용할 생각이었다.
수증기가 가득 차오른 공간은 시야를 희뿌옇게 물들였다. 그 한가운데에 다리를 꼬고 앉았던 아서는 가브리엘이 쥐고 있던 손을 빼냈다.
아서가 가브리엘의 입술이 닿은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열기로 달아오른 뺨은 발그레했고 입술은 붉었다. 군데군데 덧입혀진 색깔 탓인지, 가만 앉은 모습이 다 자란 성인의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천진해 보였다.
장밋빛으로 물든 입술이 작은 물소리를 내며 달싹였다.
“좋아.”
툭 내뱉어진 작은 소리에 가브리엘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아서는 차분한 투로 한 번 더 말했다.
“그렇게 해, 가브리엘.”
아서의 눈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농담을 던지는 것 같지 않았다.
다소 허무하리만치 빠르게 돌아온 답이다. 그렇지만 가브리엘은 아서에게서 저 짧은 긍정을 얻어 내는 게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알고 있었다.
“단, 조건이 있어.”
“…어떤 조건을 바라시는지요.”
“정식 맹세를 바치는 건 일 년 뒤로 미루는 걸로 하지.”
역시나라면 역시나였다. 아직 기뻐하기는 이르다는 듯 아서는 일 년 뒤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일 년이라는 시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일종의 유예 기간인 셈이야. 사람 일이란 게 어찌 될지 모르는 법이지 않나.”
“그건….”
“그건?”
“…예, 좋습니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맹세는 일 년 뒤를 기약하겠습니다.”
가브리엘이 무겁게 동의했다. 아서가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나 그 사실을 이런 식으로 확인당할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기사는 습기를 머금은 것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너무 시무룩해할 것 없어. 그러다 나중엔 나한테 고마워하게 될지도 모르지.”
“…황송하옵니다.”
아서를 멀리서, 또 가까이서 지켜보며 가브리엘은 아서에게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단 걸 알게 되었다. 이렇게나마 작은 틈을 내준 아서의 선택에 감사해야 마땅했다.
“전하.”
“응.”
“저는 제 위치가 어찌 변하더라도, 지금 방식 그대로 전하를 모시고 싶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도 약조해 주시겠습니까.”
당장 무결한 맹세를 바치지 못한다면 그는 제 다른 지위나마 견고히 해 두고 싶었다.
“무엇을 약속하란 말이냐.”
“앞으로 전속 시종을 들이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전속 시종?”
아서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야 상관없지만, 이미 있는 전속 시종은 어찌하고.”
“얼마 전 다른 궁으로 차출되어 갔습니다. 전하께서도 허가해 주신 일이옵니다.”
“…내가 그랬었나?”
전혀 기억나지 않는지 아서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예, 그러셨습니다.”
아서가 잠이 덜 깨 있던 때 여쭤보았던 일이라 잊어버렸을 만도 하다며, 가브리엘이 설명을 덧붙였다.
침음한 아서가 기사를 내려다보았다.
“……뭐, 그래. 어차피 그대 말고는 내 시중을 들고 싶어 하는 자도 아무도 없는 마당에.”
“황송하옵니다.”
냉큼 나온 감사 인사에 아서는 조금 황당하게 웃었다. 아서의 반응과 관계없이, 가브리엘은 제 미래의 경쟁자를 미리 치워 낸 사실에 크게 만족했다.
이야기가 마무리되어 가자 바깥의 인기척이 더 초조해하는 게 느껴졌다. 구속구를 찬 아서는 모를 테지만 가브리엘은 카를로스가 중간에 몇 번이나 안으로 들어오려다 물러났단 걸 알고 있었다.
대화를 끊지 않은 것에 대한 보답으로 가브리엘도 더 지체하지 않고 아서의 가운을 벗겼다.
“그럼, 전하. 목욕 시중을 마저 끝내도 괜찮으신지요.”
“응.”
“밖에서 애가 타게 기다리고 있는 듯하니 조금 서두르겠습니다.”
“그러지.”
가운을 벗고 맨몸이 된 아서가 욕조로 걸어 들어갔다. 가브리엘은 평소보다 조금 더 서둘러 목욕 시중을 마쳤다.
처음 아서의 목욕 시중을 들었을 땐 그와 아서 중 대체 누가 씻고 나온 건지 모를 꼴이었는데, 이제는 전혀 군더더기가 없었다. 기사는 새삼 많은 것이 변했다는 걸 느꼈다.
“오늘도 적색궁으로 가시겠습니까?”
“응. 당분간은 그래야 할 것 같군.”
아서가 맨발로 욕실을 나섰다. 가브리엘도 아서의 뒤를 곧장 따라나섰다.
수증기로 가득했던 욕실을 빠져나가자, 주위를 감싸고 있던 습한 공기가 물러갔다. 입욕제의 달콤한 잔향이 그들의 걸음을 따라 함께 퍼졌다.
***
“가브리엘을 형님의 기사로 맞이하기로 한 거지요?”
밤이 되고 아서와 단둘이 남자마자 카를로스가 물음을 던졌다. 다 들어 놓고선 무얼 확인하나 싶었지만 아서는 우선 그렇다고 말했다.
“그래. 절반 정도는.”
“나머지 절반은?”
“나머지 절반은 일 년 뒤에 가브리엘의 마음에 어떠하느냐에 따라 결론이 나겠지.”
순순히 답을 하면서도 아서는 조금 의아해졌다. 카를로스 입장에선 가브리엘을 기사로 받아들이는 걸 탐탁지 않아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묘하게 그 반대인 느낌을 풍겼던 것이다.
“…그렇군요.”
무언가 다른 답을 기대했는지 카를로스의 얼굴 위로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무언가 아서로선 알 수 없는 이유로 불안함을 느끼는 듯이 보였다.
카를로스의 발작을 목격한 뒤로 아서는 나름대로 그를 안정시키려 애썼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카를로스는 아서에게 보다 더 병적으로 집착할 따름이었다.
한 번 그런 모습을 보이고 난 뒤로 카를로스는 자신의 증세를 숨기려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아서를 붙잡기 위한 용도로 제 불안증을 이용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잠결에 살짝만 밀어내도 불안해하고, 나란히 걷다 걸음이 조금 느려지기만 해도 초조해하고. 입을 맞추다 숨이 막혀 떼어 내면 목이 졸린 사람마냥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럴 때마다 아서는 충동적으로 가출을 감행한 과거의 자신을 붙잡아다 머리통을 갈기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카를로스는 아서를 특별히 강제하진 않았다. 단지 가만히 두면 어느 날 죽어 없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일 뿐이었다. 제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이러하다면 옆에 없을 땐 어떨지 상상하기가 두려울 지경이었다.
아서는 불안한 얼굴로 굳어 있는 카를로스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칼.”
이렇게 부르면 카를로스는 안심하고 아서에게 다가왔다. 품에 안고 등허리를 쓰다듬어 주자 떨리던 손끝이 서서히 진정되는 게 보였다.
“또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내가 무슨 얼굴을 하였다고요.”
카를로스가 아서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선 웅얼거렸다. 아서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그가 어울리지 않게 응석을 부리는 걸 보면 귀엽기는 했다.
“절벽에 매달린 사람도 너만큼 절박해 보이진 않겠어.”
“절벽이야 기어올라 가면 그만이니까요.”
“보통 사람은 못 그래.”
“…그야 그렇긴 합니다만.”
이런 시시한 대화마저 기꺼운지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서는 카를로스가 충분히 진정될 때까지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낮부터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아무래도 가브리엘 때문이었나 보다.
“그래서, 가브리엘 얘기는 왜 꺼낸 걸까. 무어가 그리 궁금해서.”
고민하던 아서는 직설적으로 묻는 쪽을 택했다. 일단 물어보면 카를로스는 답을 회피할지언정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
“…그건.”
망설이던 것도 잠시, 카를로스가 곧 고해 성사라도 하듯 입을 열었다.
“……가브리엘을 애첩으로 끼고 살든, 무얼 하든 전부 묵인해 드리겠다고. 언젠가 내가 그런 말을 했던 걸 기억하십니까.”
“그랬지.”
“그래서 형님이 차라리 그를 첩이 아닌 기사로 받아들이길 원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가브리엘은 내 기사가 될 것 같으니까.”
아서가 카를로스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도 정식으로 맹세를 바치지 않았을 뿐 기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고. 기사뿐이겠어? 시종 역할까지 자처하고 있군.”
거기에 애첩 자리까지 맡으면 너무 과하지 않겠냐며 아서가 웃었다. 카를로스는 따라 웃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서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뇌리 깊숙이 스며든 체향이 묘한 흥분을 불러옴과 동시에 요동치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카를로스는 한결 차분한 투로 물었다.
“허면 그를 첩으로 맞이할 생각이 없단 말이십니까?”
“그래.”
대수롭지 않은 듯 끄덕이는 아서를 보며 카를로스는 안도했다.
대부분의 욕심 많은 인간이 그렇듯, 카를로스 역시 제 손에 쥔 한 가지로 만족할 만큼 아량이 넓지 않았다. 아서가 전과는 달라진 모습을 보이니 어느 순간부터 또 다른 게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형님을 독점하고 싶었고, 형님의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형님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남김없이 전부 씹어 삼키고 싶었다. 형님의 터럭 한 올마저 집어삼키고 형님과 한 몸이 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형님에게 제 모든 걸 내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이제는 가브리엘과 잠자리를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가브리엘을 첩으로 들이지 않겠단 아서의 말을 카를로스는 제 좋을 대로 해석하여 물었다. 그 직설적인 물음에 아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카를로스는 아랑곳 않고 아서를 빤히 쳐다보며 독촉했다.
“형님. 가브리엘과 잠자리를 하지 않을 생각이냐 물었습니다.”
“…그래. 지금 내가 그러면 네가… 아니, 어차피 그럴 여유도 없어.”
아무리 아서라도 지금 같은 상황에 딴 짓거리를 하겠냐만, 카를로스의 귀엔 아서가 무언가 여지를 남겨 둔 것처럼 들렸다. 만일 앞으로 여유로워진다면 어찌 될지 모른다는 말 같기도 했다.
카를로스가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묘하게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어 두는 아서의 태도가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처럼 비아냥을 던지거나, 아서를 강제하거나 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제 그는 아서의 행동 하나하나를 파헤쳐 들어가지 않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였다. 굳이 전처럼 애써 비꼬아 보지도 않았다.
「네가 옆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 …좋아서 그래.」
옆에 있는 게 좋고, 네가 좋다는 그 가볍디가벼운 말은 카를로스의 눈을 가리고 있던 장막을 마법처럼 걷어 냈다. 그가 아서를 바라보는 방식을 달리하자 모든 게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어찌 꿰뚫어 보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보통 때 아서는 카를로스 그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불안도 삽시간에 알아차리곤 했다. 빤히 쳐다보면 곧장 눈을 마주 보았고, 매일 밤마다 다정하게 그의 몸을 어루만져 주었다. 다른 일을 하느라 등을 돌리고 있을 땐 궁금해하는 시선을 보냈다. 아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불안해하는 그를, 귀찮은 내색 하나 않고 느긋이 다독여 주었다.
그러니까 결코 그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아서의 손길, 몸짓, 시선 모두가 마치 그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듯했다. 놀랍기 그지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놀라웠던 점은 전부터 아서는 구태여 그 사실을 숨기려 들지 않았단 것이다.
왜 진즉 알아차리지 못하였나 싶을 만큼 아서의 행동은 이전과 흡사한 점이 많았다. 어쩌면 아서가 정말로 자신을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단 예감이 들자, 카를로스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간지러운 행복에 잠겼다.
그러나 마냥 그 기쁨을 누리기만 했냐면 그렇지는 않았다.
그는 여전히 제 안에 깊숙이 뿌리내린 불안을 떨쳐 내지 못했다. 아서가 다정해질수록, 아이러니하게 카를로스는 보다 더 불안해졌다.
아서의 다정함이 기꺼우면서 동시에 견디기 어려울 만큼 두려웠다. 지척에 아서를 두고선 아서가 사라질까 봐 매일 밤 불안해했다. 어떻게든 아서를 붙잡아 두어야 한단 강박에 사로잡혔다.
아서에게 그의 나약한 모습을 숨기지 않는 건 그 때문이었다. 그가 불안해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서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에게 한층 다정하게 구는 건 물론이었다. 그 인과를 깨달은 카를로스는 제 나약한 내면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아서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실렸다. 그는 전처럼 지레짐작하는 대신, 먼저 아서에게 물었다.
“그럴 여유가 없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만일 후에 여유가 생기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글쎄. 아마 그렇게 된다고 해도 안 하지 않을까.”
“좀 더 분명하게 답해요.”
불편한 대화를 피하려는 듯 아서는 대강 얼버무리고 넘어가려 했지만, 이번만큼은 카를로스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카를로스가 입술로 아서의 목덜미를 지분거렸다. 답을 재촉하고자 옷자락에 손을 밀어 넣고 가슴을 움켜쥐어도 아서는 움찔 몸만 떨 뿐이었다.
얼마 전 아서의 손에 밀쳐진 카를로스가 발작한 걸 본 뒤로 아서는 두 번 다시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아서가 그런 식으로 구니, 카를로스의 안에서 어떤 기대감이 자라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카를로스는 목마른 사람처럼 형제의 체취를 들이켜고 또 삼켰다. 마음 한구석에 야트막하게 쌓였던 충동이 점차 몸집을 키워 갔다.
“형님이….”
결국 카를로스는 며칠 내내 머릿속에서 맴돌던 말을 선택의 여지 없이 입 밖으로 끄집어내고 말았다.
“형님이 먼저… 나를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덜컥 밀려든 불안을 숨긴 채 그는 아서와 시선을 마주했다. 매달리는 모습이 구차해 보인다 한들 상관하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먼저 다가가 아서의 입술을 부드럽게 핥았다. 옅은 색의 속눈썹이 그의 눈앞에서 파르르 떨렸다.
“…답해 봐요. 형님은 내가 다른 사람과 몸을 섞어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습니까?”
카를로스가 도박을 하는 심경으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아서는 무표정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게 가라앉은 시선의 의미를 카를로스는 알지 못했다. 단지 끝내지 못한 말을 힘겹게 이어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안 그래요. 형님이 더는 그러지 않았으면,”
“너한테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어?”
내내 조용하던 아서가 갑작스레 그의 말을 끊고 물었다.
“다른 사람, 누구.”
아서는 카를로스의 말엔 답하지 않고 엉뚱한 것을 궁금해했다.
갑자기 왜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간 건지 카를로스로선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에게 다른 사람이 없단 걸 알면서 그 잠깐 사이에 어디까지 생각한 건지,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끈질겼다. 카를로스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지금 누구냐는 얘기가 왜 나옵니까. 그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지 않나요.”
“아니, 그런 말을 하려던 게 맞는데. 내가 네 뜻대로 따르지 않으면 너도 다른 놈이랑 붙어먹겠다는 말 아니냐.”
아서의 목소리는 높낮이가 없이 평이했다. 화를 내고 따지는 게 아니라 사실의 유무를 확인하는 것처럼 들렸다. 카를로스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어찌해야 내 말이 그렇게 들리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몰라도 돼. 네가 말한 다른 사람이 누군지만 말하면 되니까.”
“그게 누구인지가 중요한 겁니까.”
“그럼 그것 말고 뭐가 중요하지?”
카를로스는 아서의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는 한편 조금 화가 났다. 그를 두고 다른 이와 밤을 보낸 건 정작 형님이면서, 고작 그의 말 한마디에 추궁하듯 굴고 있었다.
그렇지만 카를로스는 제 속내를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는 아서의 연인이 아니었고, 제 해묵은 상처를 토로할 자격 또한 얻어 내지 못했다. 그때도 지금도 어디까지나 아서는 그에게 강제로 붙들려 있는 것일 뿐이었다.
“…그걸 내가 형님에게 말해 주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내가 형님에게 간섭할 자격이 없듯, 형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카를로스는 자조하듯 현실을 읊었다.
“내가 어느 누구랑 붙어먹든, 어디서 무얼 하든 형님이 상관할 바는….”
“…그만 좀.”
시선을 내리고 나직이 중얼거리는데 아서의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말을 멈춘 카를로스가 아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서는 보통 때와 같았다. 무표정한 얼굴, 눈썹 사이는 주름 없이 매끈했고 입술은 가볍게 다물려 있었다. 겉모습만으로는 화가 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됐어. 그만 말해. 무슨 뜻인지 알겠으니까.”
아마 눈동자 깊이 타오르는 심지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보이는 대로 그렇게 착각했을 것이다.
“…알겠다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안 해. 아무랑도 안 자.”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십니까? 가브리엘뿐만 아니라, 다른 이까지 포함하여 하는 말입니다.”
“그래, 약속해. 그러니 너도 두 번 다시 그딴 헛소리 지껄일 생각을 않는 게 좋을….”
아서가 말을 하다 말고 화를 참듯 긴 숨을 내뱉었다. 채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였기에 카를로스는 아서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표정도 목소리도 평소 그대로 평온한데, 눈동자만 펄펄 끓는 것이 기묘했다.
평상시 수틀리면 비아냥거리는 건 물론 몸싸움까지 불사하던 아서였다. 한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불같은 성질을 애써 누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른 무엇도 아닌, 오직 카를로스 그 하나 때문에.
지난 며칠간도 아서는 이와 비슷하게 굴었다. 당장의 제 감정보다 카를로스의 반응을 생각하며 움직였다.
그러니까 아마도 그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서가 건넨 경고가 카를로스에겐 조금 다른 말처럼 들린 건.
아서가 다시는 그런 소리를 하지 말라며 화를 내는 게, 그에게는 마치 열렬한 고백처럼 다가왔다.
네가 다른 이를 만나는 게 화가 날 만큼 싫다고, 그러니 다른 사람을 만날 생각 따윈 하지 말아 달라고. 그렇게 애원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큼이나 카를로스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것만 같았다.
제가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는 걸까. 늘 불안을 동반하던 심장 고동이 이제는 다른 이유로 쿵쿵 뛰었다.
아서가 부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더 할 말 없지.”
“…예.”
“이제 잘 거니까 건드리지 마.”
차갑게 뱉어 낸 아서가 몸을 눕혔다. 아서를 안고 있던 카를로스는 자연스레 딸려 가 그 옆에 함께 누웠다.
“형님. 아직 자기엔 이른 시간입니다만.”
“졸려.”
“…알겠습니다. 그럼 일찍 주무세요.”
평소였다면 자는 형제를 붙들고 괴롭혔을 카를로스가 순순히 물러났다.
무언가 말할 것처럼 그의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왜, 언제부터, 따위의 말이 떠올랐으나 머지않아 곧 사라졌다. 그와 같은 속도로 뛰는 아서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다른 모든 것들이 사소하게 느껴졌다.
이 순간 카를로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아서도 그를 오롯이 독차지하기를 바란단 사실이었다. 그것도 하물며,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화를 낼 만큼이나.
의식하지 못한 사이 카를로스는 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흐릿하던 시야가 반짝 밝혀진 기분이 들었다. 그는 아서를 끌어안고 맨살을 만지작거렸다.
좀 전까지 다소 신경질적으로 숨을 몰아쉬던 아서는 금방 잠잠해졌다. 삽시간에 잠에 빠진 듯했다. 마치 의식을 잃은 것처럼 순식간에 잠이 든 게 조금 의아했지만, 카를로스는 별말 없이 아서의 품으로 파고들며 눈을 감았다.
오늘 밤은 기분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
제 몸에서 빠져나온 아서는 혼백인 채로 방 안을 굴러다녔다. 도무지 치솟는 열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을 언급한 카를로스의 말은 아서의 상상을 지극히 부추겼다. 아서가 무언가를 가정할 때는 지나치게 낙관적이거나 지나치게 부정적이거나 둘 중 하나였는데, 당연히 이번엔 후자였다.
카를로스는 알지 못하는 사이 그는 이미 아서의 머릿속에서 어느 로맨스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그가 다른 사람과 손을 잡는 것부터 시작해,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사람을 끌어안는 장면까지. 그 모든 흐름이 아서의 머릿속에서 생생히 재생되었다. 아서는 카를로스가 혼인식을 올리고 입을 맞추는 모습 또한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그 전부가 마치 방금 눈앞에서 본 것처럼 뚜렷하게 그려졌다.
도무지 치미는 짜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원작의 결말을 아는 아서는 시기의 문제일 뿐, 언젠가는 카를로스가 본래 자리로 돌아가게 될 거라 생각했다. 그들의 관계가 끝이 날 것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었단 의미였다.
때문에 아서는 자신이 어느 정도 미래의 일을 대비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만일 카를로스가 자신에게서 마음이 뜨면 ‘어차피 나도 이럴 줄 알았다’라고 한마디 해 주고는 유유히 황성을 떠나리라 마음먹었다.
한데 지금 자신이 하는 양을 보니 그때의 각오가 우스울 따름이다. 고작 카를로스가 외도에 대한 가능성을 언급한 것만으로도 분기를 참지 못해 날뛰고 있었다. 머리로만 각오를 하였다 생각했지,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참으로 한심했다.
타인의 성향을 꿰뚫어 보고 상대의 마음을 사는 데엔 일가견이 있는 아서였지만, 태어나 단 한 번도 성숙한 관계를 맺어 본 적이 없었다.
오래 볼수록 진가가 드러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도 있기 마련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밑바닥을 드러내는 인간. 아서는 자신이 그쪽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만나기도 전에 헤어짐을 생각하고, 사랑을 말하기도 전에 앞서 권태를 예감했다. 기대는 늘 실망을 동반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의심 많고 제멋대로에, 불안정하기까지. 상대가 누구든 질려서 떠날 만했다.
얄팍한 연기로 자신을 감추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카를로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서가 별달리 가치 없는 인간이란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서는 카를로스의 집착적인 성격을, 한 번 가지겠다 마음먹은 건 기필코 손에 쥐고 마는 성미를 이용했다. 그의 소유욕을 부추겨 여기까지 왔다.
만일 이제 와 아서가 카를로스에 대한 마음을 대놓고 드러낸다면 어찌 되는 걸까. 완전히 손에 쥐었다는 만족감에 카를로스의 소유욕이 서서히 식어 버릴지 모르는 일이다.
아서는 미약한 우울감에 휩싸였다.
언젠가 끝이 날 거라면 차라리 아무 이름을 붙이지 않은 관계가 좋았다. 서로에게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은 관계 같은 것. 기약한 사실이 없으니 언제 떠나도 이상할 것 없는 관계가 편했다.
그런 제 속도 모르고, 자꾸만 카를로스는 아서에게 그 이상을 바랐다. 애초에 시작이 없다면 끝도 없을 것을, 기어코 그를 관계의 시작점으로 떠밀었다.
카를로스가 다른 이랑 만나는 걸 두 눈 뜨고 볼 생각은 없어 홧김에 그러겠다 하였지만, 아서는 제 발로 관계의 끝으로 걸어 들어간 기분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면 차라리….
아주 잠깐, 약 삼 초가량 반려식을 고려해 본 아서는 이내 고개를 휙휙 저었다. 좋은 날은 한때였다. 시간이 흘러 서로 마음이 뜬 상태에서 평생을 붙어 있어야 한다 생각하니 절로 숨이 막혔다.
카를로스가 아서보다 약했다면 평생 외도 따위 꿈도 못 꾸게 어디에든 가둬 두었을 텐데, 대체 오러 마스터인 차기 황제를 무슨 수로 묶어 둔단 말인가.
아서는 다시 한번 우울감에 빠졌다.
물론 카를로스의 마음이 아서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크다는 건 알았다. 지금 이 순간을 의심하진 않았다. 아서가 불안해하는 건 늘 그렇듯 현재가 아닌 먼 미래였다.
가능만 했다면 죽는 날까지 살아 본 뒤 도로 돌아오고 싶었다. 아니면 주위에 단 한 쌍이라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의 전형 같은 연인이 있든지. 그렇게 정답을 확인하고 난 뒤에는 편안히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별의별 생각으로 이맛살을 한껏 찌푸린 그와 달리 카를로스는 근래 가장 평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저걸 보고 있으니 그래, 둘 중 한 명이라도 만족해야지 싶었다. 한편으론 이게 저렇게나 좋아할 일인가 신기하기도 했다.
카를로스가 깊은 잠에 빠질 때까지 아서는 그의 옆에 누워 그 과정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고요히 잠든 모습이 괜히 불안하여 가슴팍이 오르내리는 것을 눈에 담았다. 혹시나 악몽을 꾸는 것 같으면 밤마다 그랬던 것처럼 곧장 거두어 갈 생각이었다.
편안히 잠든 모습을 보니 오늘의 카를로스는 나쁘지 않은 꿈을 꾸는 듯했다. 한결 걱정을 덜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아서는 한 번 더 확인해 보고자 카를로스의 꿈으로 스며들었다.
꿈속은 해가 뜬 정오였다. 눈을 뜨자마자 밝은 빛이 뺨을 찌르듯 쏟아져 내렸다. 아서는 얼굴을 찡그리며 주위를 살폈다.
화사한 유리 정원이 시야 가득 펼쳐졌다. 까마득한 높이의 천장이 둥그스름했다.
하얀 꽃으로 채워진 정원에 어린 아서와 카를로스가 있었다. 둘 다 손발이 지금 것의 반도 안 될 만큼 어렸다.
싱그러운 꽃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유리 정원엔 훈기가 돌았고 열어 둔 문 틈새로 스며든 바람은 보드라웠다. 하늘에 뜬 구름마저 그림처럼 완벽했다.
아마 카를로스의 머릿속에 남은 과거의 기억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 같았다. 보통 꿈은 일부 뭉개진 부분이 있곤 했는데, 이곳은 아서와 카를로스를 제외한 나머지의 색이 바랬다는 점만 빼면 현실과 다를 게 없었다.
어린 자신의 몸에 갇혔을 카를로스는 아마 아서처럼 과거의 그들을 지켜보는 입장일 터였다. 고민하던 아서는 이번엔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귀족 도련님처럼 차려입은 어린 아서가 카를로스의 손을 잡고 걸었다. 아직 저도 팔다리가 다 자라지 않은 몸으로 동생이 넘어질까 보폭을 맞추는 게 나름 기특했다.
‘칼. 이리로 와 봐.’
햇빛을 받은 맑은 적안이 총명하게 빛이 났다. 눈동자 속엔 지금의 아서가 잃어버린 순수가 머물러 있었다. 저번 카를로스의 악몽에서 보았던 몹쓸 아서와 비교하면 이쪽 아서는 순한 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저번에 네가 화관이 뭔지 모른다고 했지. 맞아?’
‘…네. 죄송해요.’
‘죄송할 거 없어. 원래 황족은 그런 거 몰라도 돼. 이리 와 봐, 내가 만들어 줄게.’
시무룩한 카를로스에게 아서가 어설프게 위로를 건넸다. 사실 당시 아서는 화관이 뭔지만 알았지 그걸 제 손으로 만들어 본 적은 없었다. 소년이 섬세하지 못한 손길로 하나하나 꽃줄기를 엮어 갔다.
제게도 저런 순수한 때가 있었단 사실에 아서는 감회가 새로웠다. 몇 발자국 뒤에서 지켜보니 어설픈 소꿉놀이를 하는 것도 같았다.
‘이렇게 하면 반지도 만들 수 있어. 몰랐지?’
‘네…. 몰랐어요.’
물론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동생을 상대로 으스대는 건 여전히 아서다웠다. 아서는 타고난 성품이 썩 좋지 않아 어릴 때라고 딱히 겸손하진 않았다.
‘봐, 쉬워.’
지켜보다 보니 웃긴 게, 어째 으스대면서도 귀찮은 짓은 제가 다 도맡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새로 생긴 동생의 존재가 반갑긴 반가웠나 보다.
아서가 하는 걸 지켜보던 카를로스도 이윽고 조그마한 손으로 아서를 따라 꽃을 엮었다. 어릴 때도 힘이 좋았는지 쥐는 족족 줄기가 부러졌다.
‘괜찮아. 더 연습하면 잘될 거야.’
‘…네.’
풀이 죽은 카를로스를 어린 아서가 제법 어른스럽게 다독였다. 카를로스의 손에 들린 뭉개진 꽃을 힐끗 보고 소년이 웃음을 터트렸다. 다독이는 건지 놀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오늘은 안 되겠네. 다음번에 네 궁으로 가면 내 것도 만들어 줘.’
‘…그건…. 제 궁에는 꽃이 없는걸요.’
‘아 참, 그랬지.’
어린 아서가 뚱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지켜보던 아서도 덩달아 함께 생각에 빠졌다.
과거 무작정 카를로스의 궁으로 쳐들어간 아서는 그곳의 초라함에 충격을 받았더랬다. 게다가 제 동생이라는 아이는 어찌나 조그맣던지. 아서보다 다섯 살이 어리니 당연히 작을 수밖에 없는데 아서 눈엔 카를로스가 톡 치면 쓰러질 것처럼 연약해 보였다.
놀란 나머지 카를로스를 제 궁으로 데려오면 안 되냐 어머니께 달려가 한참을 졸랐지만,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서는 황제와 황후가 동생에게 무심하니 자신이 대신 카를로스를 돌봐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 나름대로 카를로스에게 죄책감이라 해야 하나, 의무감 비슷한 것을 품고 있었다.
‘괜찮아. 그냥 한 말이야. 난 화관 같은 거 없어도 돼.’
어린 아서가 제법 어른 흉내를 내며 말했다.
‘그치만….’
‘아쉬워?’
‘…네.’
‘그럼 이렇게 해. 나중에, 내가 황제가 되면 더 큰 궁전을 지어 줄게. 이만한 정원도 같이. 그때 네 궁에 있는 꽃으로 만들어 오는 거지.’
‘…….’
‘어때?’
‘…좋아요.’
아이답지 않게 표정이 없던 카를로스가 그제야 웃자 어린 아서는 한껏 뿌듯해했다. 제 미래에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고 저런 해맑은 얼굴을 하고 있다. 보고 있자니 기분이 점점 더 이상해졌다. 그에게도 저런 아무 걱정이랄 게 없던 때가 있긴 했다.
어릴 적 아서에게 황좌는 쟁취해야 하는 목표가 아니었다. 타고나길 붉은 눈을 지닌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가지게 될 자리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제 것이 아닌 줄 알았더라면 조금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적어도 자신을 깎아 내면서까지 아등바등 살지 않았을 텐데. 어차피 지나가 버린 과거이지만 그런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두 소년이 유리 정원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아서는 그 뒤를 천천히 따라 걸었다. 걸음걸음마다 부드러운 바람이 그들을 감싸 안았다.
형제가 도착한 곳은 황량해 보일 만큼 아무것도 없는 카를로스의 궁이었다. 빛바랜 궁성 주위로 군데군데 마른 풀이 머리채를 쥐어뜯긴 것처럼 남아 있었다. 사이사이로는 미처 치우지 못한 쓰레기까지 바닥을 굴러다녔다. 황성 내에서 이런 초라한 정경을 볼 수 있단 사실이 지금에 와서도 새삼스레 놀라웠다.
‘밤에 다시 보러 올게.’
하루에도 여러 일정을 소화해야 했던 아서는 카를로스와 오랜 시간을 보내진 못했다. 대신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카를로스를 찾아왔다.
그게 여의치 않을 땐 카를로스의 꿈으로 들어가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아마 카를로스는 그게 진짜 아서였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어린 아서가 짧은 인사말을 남기고 수행원들과 함께 그 자리를 떴다. 남은 카를로스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아서가 떠난 자리만 쳐다보았다.
지켜보던 아서가 내심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래서 그가 어쩌다 한 번씩 뒤를 돌아보면 기다렸다는 듯 카를로스와 눈이 마주쳤던 거였다.
저 날의 아서는 뒤를 돌아볼 생각이 없는지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카를로스는 수행원 한 명 없이 홀로 그 자리에 있었다. 아서가 사라진 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게 꼭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 같았다.
한참을 그대로 서 있나 싶던 카를로스는 구석진 자리에 조용히 웅크려 앉았다. 설마 종일 저렇게 있겠나 싶어 잠시간 옆에서 지켜보았다.
이미 어린 아서는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음에도, 카를로스는 그 자리에 앉은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서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과거엔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웅크리고 앉은 카를로스 주변을 그가 빙빙 원을 돌듯 맴돌았다. 저기서 기다린다고 가 버린 아서가 돌아오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저렇게 미련하게 기다리고 있나, 지켜볼수록 속이 답답해졌다.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고 지켜보려 다짐했던 게 무색하게 이미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공중에서 턱을 괸 채 고민하던 아서가 이내 결심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이지만 저 웅크린 아이의 몸속엔 현재의 카를로스가 있었다. 쓸쓸했던 기억을 조금 다른 색으로 칠해 주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서는 먼저 초라하던 궁성을 지우개로 문지르듯 슥슥 지우고 새하얀 궁을 세웠다. 아서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퍼즐 뒤집히듯 모습이 뒤바뀌었다.
궁전에 장식이 없으니 허전해 보여 군데군데 금칠을 하고 조각을 새겼다. 입구를 지키는 기사, 종종걸음으로 다니는 하인도 만들어 내 생동감을 주었다.
아서는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썩 완벽한 모습은 아니지만 멀리서 보면 좀 전보다 훨씬 그럴듯했다.
뒤이어 메마른 정원 위로 흰 안개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올랐다. 보라색 재스민도 무리 지어 움츠린 꽃망울을 터뜨렸다.
황량한 궁성 주위로 수백 수천의 몽우리가 부풀어 오르며 색감을 덧씌웠다. 미적 감각이랄 게 없어 구획을 나누지 않고 마구잡이로 피어오르게 했는데 그 또한 장관이었다.
버림받은 아이 같던 소년이 이젠 동화 속 한 페이지에 자리한 것처럼 보였다. 아서는 그제야 좀 만족스러워졌다.
밀려든 꽃의 너울에 카를로스가 고개를 들었다. 아서는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귀여운 흰 토끼로 변해 여 보란 듯 그 주위를 어슬렁어슬렁 맴돌았다.
마음에 들어 하려나. 아니면 이건 또 무슨 개꿈인가 싶으려나.
‘…….’
그렇게 나름 설레는 맘으로 다가갔건만, 놀랍게도 카를로스의 반응은 아서를 한 번 힐끗 쳐다본 게 전부였다. 변한 정경이 신기하지도 않은지 방해하지 말라는 듯 가슴팍에 무릎을 모아 끌어안기까지 한다. 늘 아서를 졸졸 따라다니던 아이였던 터라 그 무심한 태도에 아서만 당황했다.
동심이 없네…. 물론 카를로스의 성격상 아무리 어릴 때라 해도 호들갑을 떨 거라고 생각진 않았지만 이 정도로 시큰둥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 적어도 놀란 척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서는 이제 어찌할까 싶어 카를로스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뛰지 않고 느릿느릿 돌아다니는 토끼가 수상쩍을 만도 한데 역시나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아무래도 사라진 아서가 돌아오지 않는 이상 카를로스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듯했다.
그렇담 어쩔 수 없지. 빠르게 단념한 아서는 카를로스의 옆으로 가 둥글게 몸을 말았다. 얼마나 기다려야 어린 아서가 돌아올지 모르겠다만 곁에서 함께 기다려 줄 생각이었다.
꽃송이가 아서의 헛고생을 비웃기라도 하듯 고개를 좌우로 살랑거렸다. 아서는 풋내 가득한 공기 속에서 천천히 선잠에 빠져들었다.
***
아직 날이 밝기 전이었다.
카를로스는 잠이 든 아서를 바라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튼을 반만 걷어 바깥을 보니 새벽 어스름이 깔려 있다. 형님이 깨어나려면 한참이나 남은 때였다.
창문을 한 뼘 열자 서늘한 기운이 안으로 들어왔다. 한낮의 것보다 서늘한 바람이 손끝을 스쳐 지나간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새벽 공기에 머릿속이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카를로스는 눈을 감고 긴 숨을 들이마셨다.
간만에 나쁘지 않은 꿈을 꿨다.
꿈에서 깨면 대개 바닥 깊이 가라앉았던 감정 찌꺼기들이 떠올라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곤 했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이번에는 그와 정반대였다. 엉켜 있던 머릿속이 하나의 길을 따라 정돈된 기분이 들었다.
그간 막연히 생각만 하던 것을 이제는 분명하게 결정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동안 창가에 서서 아서를 바라보던 카를로스가 다시 아서의 옆에 누웠다. 가지런히 놓여 있던 아서의 팔을 제 정수리 위로 옮기고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익숙하고 편안한 자세였다.
아서는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다. 함께 지내는 동안 그의 치근거림에 적응한 것인지, 한 번 깊게 잠이 들면 건드려도 잘 깨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는 아서의 얼굴은 어울리지 않게 말갛다. 특유의 날카로운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 눈매가 큰 역할을 했던 탓이었다.
카를로스는 눈을 뜬 모습이 좀 더 아서답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황제라는 지위에도 그 편이 더 어울렸다.
그는 언젠가 한 번 그랬던 것처럼 황제의 관을 쓴 아서를 그려 보았다. 아무런 이질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치스러운 황관은 마치 원래부터 아서의 부속물이었던 양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전날 밤까지 술렁이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카를로스가 조용히 아서를 불렀다.
“…형님.”
“으음.”
언제부터였던가 아서는 의식이 없을 때에도 그의 부름에 답했다. 깨어 있는 줄 알고 이런저런 말을 했다가 후에 물으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적이 많았다.
이전부터 쭉 그랬다. 그게 신기하고 기분이 좋아, 카를로스는 매일 아침마다 형님을 불러 댔다. 오늘 역시 서너 번은 더 답을 듣고 나서야 부름을 멈추었다.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아서의 가슴께를 만지작거렸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심장 박동과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숨소리를 하나하나 새겨 넣듯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이렇게 한동안 몰두하고 나면 지겹도록 따라붙던 불안이 차츰 사그라들곤 했다. 아서는 모를 그만의 작은 취미였다.
카를로스가 아서와의 관계에 불안감을 느끼는 이유는 여럿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건 하나였다.
아서가 그토록 갈구하였던 황좌를 강탈하듯 차지했단 것. 그 사실이 늘 그의 불안을 부추겼다.
형님이 일생 동안 좇았던 목표를 빼앗고, 형님의 마음을 온전히 얻고자 한다. 더없는 모순이 아닐 수 없었다.
과거 아서가 그를 멀리하였던 계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형제가 틀어지기 시작한 건 카를로스가 태자위를 위협할 만큼 두각을 드러내면서부터였다. 카를로스는 아서의 지위를 위태롭게 함과 동시에 애정을 갈구하였고, 그 결과는 결국 관계의 파탄이었다.
여러 해를 돌고 돌아 이제 겨우 형제의 관계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중이었다. 카를로스는 황위가 다시 갈등의 시발점이 될지 모른단 불안감을 느꼈다.
「보다 강한 자가, 보다 뛰어난 자가 황위에 오르는 건 당연한 인과입니다.」
언젠가 그가 아서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 말대로 카를로스가 황좌에 앉으려 했던 건 스스로를 그 자리에 가장 부합하는 자라고 판단 내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선 그 생각이 달라졌다.
이제 카를로스는 아서를 제외한 그 무엇에도 제 신경을 쏟고 싶지 않았다. 한순간도 형님에게서 떨어질 의향이 없으며, 다른 불필요한 일에 제 시간을 뺏기고 싶지도 않았다.
제국, 신민, 황위. 그 전부보다 오직 아서만을 우선시하는 그는 제국의 통치자가 될 자격이 없다. 아서가 사라졌던 한나절의 시간 동안 뼈저리게 깨달은 사실이자, 오늘 새벽 눈을 뜬 카를로스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는 결코 황제가 되어선 안 된다. 쉬지 않고 생각했으나 결론은 그대로였다.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벌써 푸르스름하던 침실에 서서히 빛이 밀려들고 있었다. 황성을 밝히고 있던 마법등이 하나둘 꺼지고 그 빈자리를 해가 대신 채웠다.
날이 밝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서의 숨소리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기다란 속눈썹이 움찔움찔 떨리더니 말갛던 얼굴에 조금씩 표정이 떠오른다. 카를로스는 늘 그랬듯 아서가 깨어나는 과정을 빤히 지켜보았다.
“…더 자야겠어.”
흐리멍덩하게 눈을 떴던 아서는 졸음이 가시지 않는지 다시 눈꺼풀을 내렸다. 카를로스가 목선을 따라 입을 맞추며 기상을 재촉하자 아서의 미간이 구겨졌다. 귀찮을 만도 한데 역시나 그를 밀어내진 않았다.
“어제 일찍 잠들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더 자려고.”
“몰라. 조금만 더….”
평소보다 한참 빠르게 잠자리에 들었으면서 왜 이렇게 비몽사몽 눈을 못 뜨는지 모르겠다. 아서가 여간 졸려 하는 게 아니라 카를로스는 더 재촉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한 시간가량 뒤에야 아서는 제대로 눈을 떴다. 여전히 눈가에 잠기운이 맺혀 있긴 하나, 아까처럼 정신을 못 차릴 정도는 아닌 듯했다.
다행히 그 정도는 아무 문제 없었다. 카를로스의 말을 듣고 나면 졸린 건 금세 금방 달아날 터였다.
“이제 좀 정신이 드셨습니까.”
“대충은.”
아서가 눈을 비비며 투덜거렸다.
“더 자려는데 자꾸 깨우고….”
“형님께 반가운 소식을 알려 드리려 했던 겁니다.”
“…반가운 소식?”
“예.”
카를로스의 말에 아서는 뒷말을 기대하기는커녕 오히려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그간 카를로스가 이런 식으로 전한 말들은 대부분 그 반대였으니 그럴 법도 했다. 다만 이번엔 정말로 희소식이 맞았다.
아서가 기뻐하는 모습을 어서 보고 싶었기에, 카를로스는 뜸 들이지 않고 곧장 입을 열었다.
“이번엔 정말 반가운 소식이 맞습니다. 형님이 내 말을 곡해하여 듣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대체 무슨 소식이길래.”
“얼마 전 형님이 한나절 자리를 비웠을 때부터 깨달은 사실입니다만….”
카를로스는 아서가 한나절간 사라졌던 때 느꼈던 점부터 시작해서, 황위 계승권을 내려놓겠다 결심한 이유까지 차근차근 입 밖으로 내뱉었다. 혹여나 오해가 생길까 원인부터 과정, 결과를 전부 털어놓았다.
이야기는 차분하게 이어졌다. 은연중에 생각만 했던 것을 입 밖으로 내뱉으니 카를로스는 해묵은 짐을 떨쳐 낸 듯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긴 이야기가 이어지는 내내 아서는 졸린 표정으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카를로스는 곧 아서의 눈이 놀라움과 의심, 미약한 기대로 물들게 되리라 예감했다.
여러 말들이 나왔지만 모든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문장으로 귀결되었다.
카를로스가 아닌, 아서가 황좌에 앉게 될 것이라고.
처음엔 영문을 모른 채로 듣고 있던 아서는 카를로스의 말이 한마디씩 이어질수록 점점 입을 벌렸다. 제 귀를 의심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잠깐. 설마 지금 네가 하려는 말이….”
아서는 부디 제가 카를로스의 말을 곡해하여 들었기만을 바라며 애타는 눈으로 카를로스를 쳐다보았다.
“예. 황좌에 앉는 건 내가 아니라, 형님이 될 겁니다.”
“…말도 안 돼.”
잠기운으로 몽롱하던 눈동자가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또렷해졌다. 아서의 입에서 경악 어린 물음이 튀어나왔다.
“대체, 무슨 가당치도 않은 소릴 하는 거냐.”
“…제가 너무 갑작스럽게 말씀드렸나 보군요. 놀라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느닷없는 상황이었으니 형님이 그의 말을 믿지 못해 되묻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카를로스는 아서가 진정할 수 있도록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아서가 그의 말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까진 이미 짐작했던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을 빗나간 건 이후 아서가 보인 태도였다.
“…카를로스, 설마 지금 장난을 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뇨. 농을 하는 게 아닙니다.”
“하, 이게 무슨.”
도무지 믿고 싶지 않다는 듯이 아서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찌푸린 얼굴은 경악하다 못해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그가 기다린다고 진정될 것 같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이건 못 들은 걸로 하겠다.”
아서는 단호한 투로 말했다.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카를로스가 잠시 침묵했다.
“…미안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물릴 것이었으면 애초에 형님에게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겁니다.”
카를로스는 담담하게 아서의 말을 일축했다. 입을 꾹 다문 아서는 그에게서 등을 돌려 버렸다.
카를로스의 낯빛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그토록 바라던 황위를 손에 쥐여 주겠다는데 아서는 조금도 반기는 기색이 없었다. 자존심 때문에 한 번에 받아들이진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그토록 단호하게 거부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그딴 끔찍한 소리는 집어치우라는 듯이 말이다.
***
고집을 꺾지 않기로는 여느 누구 못지않은 형제였다. 그날을 계기로 형제 사이에 끝없는 실랑이가 시작되었다.
아서는 황위를 원치 않는다고 계속해서 피력하였고, 카를로스 역시 제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황좌를 원하지 않는다. 형님이 먼저 황위가 아니면 전부 싫다 하지 않았느냐.
아니다,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자존심 때문에 후회할 말을 하지 마라.
후회 안 한다, 더는 황좌에 앉고 싶지 않다. 이것 보라, 또 거짓말을 한다…….
즉위식이 십여 일밖에 남지 않은 마당에 결판이 나지 않는 논쟁을 반복하느라 아서는 점점 초조해졌다. 그런 와중에 일은 일대로 했던 터라, 이러다 정말로 자신이 황위에 오르는 건가 싶어 하루하루 마음이 타들어 갔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구속구를 차고 있어 그러지도 못했다. 물론 카를로스의 불안증이 심각한 수준인 걸 알아 속으로만 구시렁거렸을 뿐, 실제로 도망을 시도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서는 애꿎은 고기에다 대고 무자비하게 칼질을 해 댔다. 끼긱, 나이프가 접시를 긁는 기분 나쁜 소음이 일었다. 그는 이가 몇 개 없는 사람이 먹어도 괜찮을 만큼 난도질을 하고선, 한 입도 먹지 않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아서의 측면에 앉은 카를로스는 아서와 달리 품위 있게 식사를 이어 가고 있었다.
아서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연신 투덜거렸다. 지금 고기가 입에 들어간단 말인가. 누구는 뭘 먹어도 체할 것 같은 심정인데. 불만 가득한 눈으로 카를로스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보통 식사 중인 사람을 쳐다보면 부담스러워하기 마련이건만 카를로스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아서가 지켜보고 있으니 평소보다 더 잘 먹는 것도 같았다.
다리를 꼬고 앉은 아서가 잠시 동안 전의를 누그러뜨렸다. 얼마 전엔 아서를 지켜보느라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이제 잘 먹는 게 다행이긴 했다. 열이 받는 것과는 별개로, 식사에 집중하면서도 중간중간 아서를 확인하는 그가 귀여워 보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 카를로스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아서는 절로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잘 먹고 있는 모습이 또 흐뭇하기는 해서, 여유롭게 이어지는 식사를 방해 않고 지켜보았다.
식사가 완전히 끝나고 난 뒤에야 아서는 비로소 대화의 물꼬를 텄다. 즉위식이 코앞이니 여유를 부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서는 식사를 잘 마쳤느냐는 의례적인 물음도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하나 물을 것이 있어, 카를로스.”
“예. 말씀하세요.”
“…너는 진심으로 나를 황좌에 올릴 생각이라 하였지.”
“예.”
이미 수십 번 들었던 물음이었으므로 카를로스는 고민하는 시늉도 않고 곧바로 긍정했다.
아서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엄지 끝으로 눌렀다.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카를로스가 도통 받아들여 주지 않으니 그 전과 다른 방식으로 설득을 시도해야만 했다.
“…다른 가문들이 내가 황위에 오르는 걸 가만 눈 뜨고 보고 있을 것 같나? 그들 입장에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아니겠어?”
카를로스의 위세에 눌려 입을 다물고 있는 거지, 아서의 즉위를 바라지 않는 가문은 무수히 많을 것이다. 아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들을 입에 담았다.
“그 점은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형님. 형님을 지지하던 세력 중 하나가 아직 건재하지 않습니까. 오를레앙 대공 쪽에서 타 가문과의 중재를 도맡아 주기로 했습니다. 저로선 귀찮은 수고를 덜었지요.”
이미 예상했던 질문이었던 듯 카를로스는 막힘없이 답을 했다.
일찍이 카를로스에게 협조했던 오를레앙 대공가는 변혁의 와중에도 무사히 살아남았다. 요즘 들어 조금 위축되어 있다지만 본래 오를레앙은 황태자파를 지탱하는 중심 기둥이었을 만큼 그 위세가 대단했다. 그러니 말만 중재지 협조하지 않으면 대공가의 힘으로 찍어 누르겠단 뜻일 테다.
“한사코 듣지 않겠다 하여 이제야 말씀드립니다만, 형님께서 가브리엘을 기사로 받아들인 덕분에 우드힐 공작도 비교적 쉽게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 정식 맹세를 받지도 않았어.”
“가브리엘은 딱히 개의치 않아 하던데. 그런 점에선 나와 마음이 맞는 부분이 있기는 하더군요.”
“잠깐, 설마….”
중얼거린 아서가 휙 뒤를 돌았다. 최근 가브리엘이 가문에 다녀온답시고 얼마간 자리를 비웠는데, 그사이 엉뚱한 짓을 하고 온 모양이다.
“가브리엘. 누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아서는 대체 시키지도 않은 짓을 왜 하였느냐고 한 소리 하려 했다. 그러나 가브리엘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만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가브리엘은 마치 아서에게 커다란 선물 상자를 한 아름 안겨 준 사람처럼 다디단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동안 시무룩해 보이더니 근래 들어 가장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기사의 미소 띤 얼굴을 본 아서는 차마 탓하는 말을 그의 면전에서 끄집어낼 수가 없었다.
카를로스와의 약속 이후, 아서는 가브리엘과 일체의 접촉을 않고 거리를 두었다. 애초에 그들은 무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던 관계가 아니었기에 달리 정리라고 할 것도 없었다.
달라진 건 그들 사이에 성적인 행위만 오려내듯 잘라 냈다는 사실뿐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평상시 무얼 하든 초연하던 가브리엘이었던 터라, 아서는 가브리엘이 달라진 그들의 관계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기사는 한동안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고 다녔다. 버릇처럼 웃고는 있으나 눈가에 그림자가 져 있어 지켜보는 이를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다. 거기다 대고 무어라 말을 보탰다가 상황만 더 악화될까 봐 아서는 가만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가문에 다녀온 뒤로 가브리엘이 무언가 마음 정리를 하였는지, 이전보다는 상태가 괜찮아 보였다. 한데 설마 그 뒤에 이런 사정이 숨어 있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기쁜 듯 미소 지은 기사가 아서에게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기사의 맹세를 바칠 때만큼, 어찌 보면 그때보다 더 경건한 태도로 그가 아서를 올려다보았다.
“전하. 전하의 오랜 숙원을 이루는 데에 보잘것없는 힘이나마 보탤 수 있어 영광입니다.”
기사는 아서에게 제 어머니를 설득한 과정을 천천히 설명했다. 그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이어졌다. 아서는 딱히 듣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귀를 틀어막을 수도 없으니 듣기야 들었다.
처음 우드힐 공작은 아서의 즉위를 완강히 반대했지만, 공작이 전부터 바라던 스펜 왕국과의 독점 교역권을 얻는 대가로 찬성표를 던졌다고 한다.
가브리엘이 더는 카를로스의 기사가 아니라는 점과, 가브리엘만이 아서에게 속한 유일한 기사라는 사실 또한 공작의 마음을 돌리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
“전하께서 황좌에 오르시게 될 날이 한없이 고대됩니다. 그날, 저를 전하의 첫 번째 기사로 삼아 주십시오.”
그리 말한 기사가 아서의 손등을 끌어다 입을 맞추었다. 아서는 그걸 차마 뿌리치지도 못한 채 멍하니 넋을 놓았다.
목 뒤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경종이 울렸다. 아서는 문득 눈앞이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것 같았다.
카를로스가 그러하였듯, 가브리엘 역시 아서가 황위에 오르고 싶어 한단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거야 당연했다. 제가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으니까….
순간 자업자득이란 말이 날아와 아서의 가슴에 쾅 박혔다. 과거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하나씩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나를 죽이고 싶으셨습니까? 내가 죽으면 황좌가 형님의 것이 되리라 생각하셨습니까.」
「그래. 네가 아니라 바로 내가, 황제가 될 것이다.」
과거 아서는 형제의 피를 손에 묻혀서라도 황제가 될 것이라 당당히 선언하였으며.
「조건이 마음에 차지 않습니까?」
「그딴 조건이 마음에 찰 리가. 무슨 조건을 걸든 내가 황후가 되어야 하는 건 변치 않는다. 황제가 되지 못할 바에야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아.」
황제가 아니면 안 된다고 제 입으로 못을 박았다.
저들의 안에 잘못된 오해를 쌓아 둔 건 다름 아닌 아서 자신이었다. 제아무리 아서가 황위를 원하지 않는다 외친들 다른 이들에게 곧이곧대로 들릴 리가 없었다.
하…….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절로 참담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서는 점차 물러설 곳이 줄어들고 있음을 느꼈다. 한 발 한 발 물러나다 결국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서게 된 듯한 심정이었다. 여생을 한량처럼 보내리란 원대한 계획이 걷잡을 수 없이 멀어지고 있었다.
교양이니 뭐니 해도, 결국 제국은 힘의 논리로 굴러갔다. 그 말인즉슨 카를로스가 원하는 대로 즉위식의 주인공을 바꿔치기할 수 있단 뜻이다. 하물며 아서는 불과 얼마 전까지 황태자였으니 더욱 손쉽게 가능하였을 테다.
오를레앙 대공이 건재하게 살아 있어 카를로스가 직접 검을 뽑아 들 필요조차 없다. 원작대로 흘러갔다면 황제파 전부가 무너져 아서의 지지 기반도 전무했을 텐데, 쓸데없는 희생을 줄이려 했던 것이 이런 결과로 돌아왔다.
아서가 제 스스로 파 놓은 무덤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브리엘마저 그의 모친, 우드힐 공작을 설득해 냈다. 이 또한 아서가 가브리엘을 기사로 맞이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결과였다.
그 외에 건터 공작가의 반발도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카를로스의 기사 마노가 가주 자리에 앉게 되었던 탓이다. 마노는 유독 충성심이 강한 편이었으니 카를로스의 명을 끝끝내 거부하긴 어려웠을 터였다.
델라 공작가는 아서와의 정략혼을 추진하다 실패한 뒤 움츠러든 상태였으며, 골드너 공작가는 애초에 그들 가문을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황위에 오르는 자가 누가 되든 상관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인 것과 별개로, 모든 정세가 급물살을 타듯 빠르고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황제 즉위식이 정말로 현실로 이루어지기 직전까지 온 것이다.
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싶어 아서는 아연해졌다. 전생의 기억을 찾은 이후 처음으로 막다른 골목에 몰린 기분을 느꼈다.
「황좌에 앉는 건 내가 아니라, 형님이 될 겁니다.」
처음 황제가 되어야 한단 소리를 들었을 땐 잠이 덜 깨 환청을 들은 줄 알았다. 그러다 카를로스가 정말 진심으로 내뱉은 말이란 걸 깨닫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나절 충동적인 가출이 이렇게까지 큰 파문을 불러일으킬 거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할 수만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 제 뒷덜미를 낚아채 다시 황성으로 집어넣고 싶었다. 아서는 뒤늦게 땅을 치고 후회하는 중이었다.
“너…. 후회할 짓 하지 마. 카를로스.”
후회할 짓은 제가 해놓고 아서는 괜히 카를로스에게 경고했다.
“글쎄요. 형님이야말로 지금 후회할 짓을 하고 있진 않나 생각해 보시죠.”
“내가 첩을 수십 명씩 들여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해 보세요.”
아서가 숫제 협박하듯 굴어도 카를로스는 흔들리지 않았다.
“형님께 혼약서를 건넬 자가 과연 몇이나 될지, 한 번 확인해 보고 싶긴 하군요.”
“…….”
“개중 과연 몇이나 살아남을지도.”
다시 말해 혼약서를 보내는 족족 죄다 죽여 버리겠다는 소리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전처럼 첩을 눈감아 주겠단 헛소리는 하지 않았다.
“분명 내게 자격이 없다고 말한 건 너였어.”
“그건 그때의 얘기고. 현재로서 황위에 오를 자격을 갖춘 자는 형님이 유일합니다.”
아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양 받아쳤다.
“네가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지. 이제 와 선심 쓰듯 굴면 배알도 없이 덥석 받아들일 줄 알았나?”
“예.”
“뭐?”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황좌에 앉고자 한 건 형님 아니었습니까.”
“…그건.”
카를로스를 죽이려 했던 과거를 언급하는 것이다. 아서가 머뭇거렸다. 지금에 와서 그게 그냥 시늉만 했던 거라고 말한들 믿어 줄까 싶었다.
“…이제는 달라. 지금 내게 황위는 거추장스러운 짐밖에 되지 않는다.”
“막상 손에 쥐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아니, 그대로일 거야.”
“그렇게까지 황좌에 앉는 게 죽도록 싫다면 내 반려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카를로스가 선심을 쓰듯 다른 대안을 건넸다. 아서는 허탈한 듯이 웃음 지었다.
“…어떻게든 나를 이곳에 묶어 두어야겠다 이거로군.”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이미 몇 번이나 반복된 대화였지만 아서는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설득을 시도했다.
“나는 지금 이대로가 편해. 전처럼 그리 바쁘게 살고 싶지 않아.”
“그럼 지금처럼 지내셔도 좋습니다. 내가 옆에서 도울 테니까요.”
“지금 나보고 허수아비 왕 노릇을 하라는 건가?”
“형님이 그러길 원한다면 말입니다.”
거기엔 ‘그럴 리가 없겠지만.’이라는 뒷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카를로스의 생각과 달리 허수아비 왕이라는 말에 지금까지 중 아서의 마음이 가장 크게 흔들렸다. 카를로스가 알게 된다면 어처구니가 없어 웃고 말았을 것이다.
몸을 두고 도망치면 카를로스가 정신을 놓아 버릴까 그러지도 못해, 황제가 되기 싫단 말은 믿어 주지도 않아. 그토록 막막한 가운데 허수아비 노릇이나 하라는 소리는 오히려 아서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평생 동안 황족의 의무를 세뇌당하다시피 한 아서는 해야 할 일을 완전히 내팽개치지 못했다. 대안이 있거나 빠져나갈 구석이 있으면 망설임 없이 도망치기야 했다. 다만 당장 제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은 투덜거리면서 결국 하고야 말았다. 이번 카를로스가 업무에서 손을 놓아 버린 때도 그러했다.
정말로 꼭두각시 노릇만 해도 되는 건가 싶어, 아서가 진지하게 물었다.
“방금 그 말, 빈말은 아니겠지.”
“예. 정말입니다. 형님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그리하셔도 좋습니다.”
“정말 이전처럼 지내도 된다고?”
“예.”
“…업무는 누가 맡고.”
“글쎄요. 형님께서 원하신다면 내가 돕겠습니다.”
“…….”
인상을 찌푸린 채로 아서가 한동안 고민했다.
황제의 반려는 황제가 퇴위하는 순간까지 선택의 여지없이 함께 묶여 있어야 한다. 맹약으로 서로의 영혼이 묶여 버린 상황이니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용이 남기고 간 언령은 황후위에 굳건한 힘을 실어 주는 동시에, 대상자를 속박하는 족쇄가 되었다.
반면 아서 자신이 황제가 된다면 적당히 해 먹다 제 발로 내려오는 게 가능했다. 물론 그 역시 쉬운 일은 아니지만 끝을 기약할 수 없는 반려보다는 상대적으로 양호한 편이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에 아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야…….”
어차피 어디로든 빠져나가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차악을 선택하는 게 나았다.
아서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황위를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다고, 오늘 밤까지 생각해 보고 결정 내리겠다며 확답을 미뤘다. 반쯤 포기를 하고서도 혹여나 빠져나갈 구석이 없을까 미련을 부렸다.
“좋습니다. 천천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
대화를 마친 형제는 식사 자리를 파하고 일어났다.
그날 내내 아서는 정신이 다른 데로 팔려 있었다. 시간은 어처구니없을 만큼 빠르게 지나갔고, 날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캄캄한 밤하늘이 아서를 재촉하듯 내려다보았다.
짧은 하루를 끝내고 터덜터덜 침실로 걸어 들어가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 이렇게 황위에 올라야 하는 건지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을 한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생각을 이어 갈수록 제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아서는 복잡한 머릿속을 깨끗이 비워 냈다. 멍하니 누워 허공을 응시했다. 익숙한 천장을 바라보던 그는 불현듯, 자신이 이미 지금도 황태자였을 적과 비슷한 일과를 보내고 있단 사실을 자각하고 말았다.
그 정도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여유로운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으나….
아서는 재차 긴 숨을 내쉬었다. 졸리지도 않은데 눈꺼풀이 물에 젖은 것마냥 무거웠다.
결국 다음 날까지 버텨 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 싶어진 아서는 새벽이 되기 전에 힘없이 백기를 들었다. 제 입으로 황제가 되겠다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코앞까지 들이닥친 현실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늘 카를로스가 만든 덫에 제 발로 기분 좋게 걸어 들어갔던 아서가, 이번만은 타의로 질질 끌려 들어갔다. 카를로스는 알지 못했지만 최초로 그가 아서의 발목을 잡는 데에 성공한 순간이었다.
***
하루, 이틀, 사흘…. 그날 이후로 아서는 사형 선고가 떨어진 죄인처럼 하루하루 시간을 보냈다.
감정의 변화도 사형수와 흡사한 면이 있었다. 억울하다며 혼자 씩씩거리다가 땅을 치며 후회를 했고, 갑작스레 자기반성을 하나 싶더니 평소엔 찾지도 않는 신을 찾았다. 그러다 결국 마지막엔 체념하고 제 처지를 받아들였다.
즉위식이 임박한 시기라 마냥 현실을 부정하고 있을 여유도 없었다. 정말 믿고 싶지 않지만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황제 즉위식의 당사자가 되었으니 아서가 해야 할 일이 두 배는 늘었다. 긴 선언문을 꾸역꾸역 작성하고,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복잡한 절차를 며칠 만에 완벽히 숙지해야 했으며, 그와 동시에 맡은 바 정무를 처리해야 했다.
혼이 나간 아서는 심지가 없는 헝겊 인형처럼 카를로스의 손에 끌려다녔다.
아서가 직접 해야 하는 일이 아닌 건 그나마 카를로스가 대신 도맡았다. 옆에서 일을 덜어 갔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견디지 못했을 터였다.
다행인 한편으로 아서는 조금 어이가 없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동안은 카를로스가 일부러 일을 못 하는 척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나절 가출의 충격이 여태 이어진 줄 알았더니, 실은 그게 어느 순간부터는 엄살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서는 제가 카를로스의 연기에 속아 넘어갔음을 깨닫고 충격받았다. 과거였다면 결코 못 알아차리려야 못 알아차릴 수 없었을 사실이었는데, 자신이 이렇게까지 넋이 나가 있었단 게 놀라웠다.
옆에 있는 카를로스를 힐끔 쳐다보자 역시나 카를로스는 바로 손에 있던 걸 내려놓고 이쪽을 쳐다보았다. 늘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저만 물끄러미 바라보는 얼굴이 이상하리만치 귀여워 보여, 아서가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형님?”
그가 한참 동안이나 카를로스를 바라보고 있으니 카를로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심각한 눈으로 카를로스를 보고 있던 아서는 한발 늦게 반응했다.
“…왜?”
“오늘은 일찍 끝내는 게 어떠신지요.”
“난 상관없으니 좋을 대로 해.”
“예,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서의 허락이 떨어진 즉시 카를로스가 좀 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손을 움직였다. 아서는 다시금 황당해졌다. 저렇게 할 수 있으면서 내내 못 하는 척을 한 거였다.
심지어 더 황당한 사실은 따로 있었다. 카를로스의 연기에 속았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화도 안 나고 헛웃음만 나왔다. 대체 이게 무슨 영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눈에 뭐가 씌었는지, 언제부턴가 번번이 카를로스의 커다란 덩치와 사나운 눈매가 사랑스러워 보였다. 하는 짓을 보면 하루 종일 주인만 쳐다보고 있는 개새끼 같기도 했다.
카를로스의 우는 얼굴을 보고 난 뒤부터였나, 저만 졸졸 따라다니는 모습에 익숙해지고 난 뒤였나. 어쩌면 꿈속에서까지 내내 아서를 기다리던 모습을 보고 난 후였을 수도 있다. 아니, 실은 그 전부터 하는 짓은 귀엽긴 했다.
한 번 마음이 쓰이기 시작한 뒤로부터 아서는 도무지 다 큰 어른인 카를로스를 혼자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남들이 보면 과보호니 콩깍지니 코웃음 칠 걸 알면서 그랬다.
아서는 매일 작금의 현실을 믿을 수 없다며 투덜거리고 있지만, 지금의 제 처지에서 벗어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가 결심만 한다면 당장이라도 육신을 내버려 둔 채 몇 달이고 돌아오지 않을 수 있었다. 혼이 없는 빈껍데기를 가지고 즉위식을 치를 순 없을 테니 그렇게 도망쳐 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리했다간 분명 카를로스가 어떤 식으로든 무너지고 말 것이었다. 아서는 그 꼴을 보느니 차라리 얌전히 붙잡혀 있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날인을 마친 서류가 부관의 손으로 넘어갔다. 서류 더미를 모아 정리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얼추 일이 마무리되어 가는 걸 본 카를로스가 물었다.
“다 끝나 가니 부관들은 먼저 보내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다들 가 봐.”
무늬만 황제가 되기로 한 아서는 벌써부터 카를로스의 권유대로 움직였다. 제 배만 부르면 이런들 저런들 딱히 상관없는 성미인지라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았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전하.”
이른 퇴근에 들뜬 부관들이 하나둘 인사를 건네며 사라졌다. 집무실을 나서는 발걸음이 거의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 보였다.
아서는 신이 난 뒷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면 이상하게 도로 붙잡아다 놀려 먹고 싶단 심술이 들었다. 역시 저는 관대한 상관이 될 그릇은 아니었다. 그 반대라면 모를까.
“형님이 시킨 대로 전부 내보냈습니다.”
집무실이 텅 비자 카를로스가 칭찬해 달라는 듯 아서를 쳐다보았다.
“…그래. 잘했어.”
딱히 먼저 시킨 적이 없었지만 카를로스의 기대에 찬 얼굴을 보고선 그렇구나, 하고 장단을 맞춰 주었다. 짧은 칭찬이 진심이 아닌 것처럼 보였는지 카를로스가 한마디 덧붙였다.
“형님께서 내보내라고 눈짓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곰곰이 제 행동을 되새겨 봐도 아서는 그런 신호를 보낸 기억이 없었다. 그렇다고 언제 눈짓을 했냐며 따지고 들 것까진 없어 보여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서가 뻐근한 목을 돌렸다. 어쨌든 오늘 치 하루 일과를 마쳤으니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후련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때였다.
“어….”
갑작스레 카를로스에게 허리가 붙잡혔다. 무어라 반응할 새도 없이 몸이 허공에 붕 떴다. 엉겁결에 테이블 위에 앉게 된 아서가 황당한 투로 물었다.
“…뭐 해?”
탁상 위에 있던 것들이 아서의 몸에 하나둘 밀려 떨어졌다. 서류들이 바닥으로 흩뿌려지는데 카를로스는 그 광경을 곁눈질로도 살펴보지 않았다.
놀란 아서가 바닥으로 내려가려 했으나 그 전에 억센 손아귀에 턱이 붙잡혔다. 고개가 위로 확 젖혀졌다.
“뭐 하, 읍…!”
벌어진 잇새로 살덩이가 밀려 들어왔다. 갑자기 달려들다시피 한 카를로스 때문에 아서가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갸우뚱 뒤로 기우는 상체를 커다란 손이 받쳤다.
입천장을 길게 훑은 카를로스가 아서의 혀를 휘감고 빨아들였다. 당황한 것도 잠시, 익숙한 자극에 목 뒤가 저릿하게 당겨 들었다.
“읍, 으응….”
허리를 휘어 감은 팔과 뒷머리를 감싼 손 때문에 아서의 움직임이 제약되었다. 카를로스는 아서의 호흡까지 삼킬 것처럼 달려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오늘따라 카를로스가 왜 이렇게 다급하게 구는지 알 수 없었다.
“아…!”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이 내려와 아서의 성기를 꽉 움켜쥐었다. 이미 일어나 있던 그것을 카를로스가 몇 번 주무르고는, 속옷과 하의를 거의 찢다시피 벗겨 냈다.
순식간에 반나체가 된 아서는 눈을 깜빡였다. 집무실에서 이렇게까지 하겠다고? 짧은 의문을 떠올리자마자 무릎 뒤가 붙잡혔다.
“…하아. 분명 참으려고 했는데… 형님이 자꾸 그런 눈으로 쳐다보니까.”
“내가, 뭘, 아…!”
경악했으나 이미 반응하기엔 늦었다. 등이 탁상에 닿기 무섭게 양쪽 오금이 붙잡혀 다리가 벌어졌다.
아무리 아서라도 좀 전까지 여럿이 앉아 있던 집무실에서 이러고 있으니 뺨이 화끈 달아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그래서 더 좋다는 의미였다.
“못 참겠어요, 형님….”
훤히 드러난 치부에 시선이 들러붙었다. 몸 깊숙한 곳에서 따끔거리며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홀린 듯 아래를 바라보던 카를로스가 몸을 숙였다. 회음에 미지근한 숨이 닿았다.
혓바닥으로 아래를 진득하게 훑은 카를로스가 형님은 자기가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냐며 묻는다. 대체 뭘 어떻게 쳐다봤다고 그러는 건지, 아서는 오늘만큼은 진심으로 무고했다.
그러나 의문을 표할 새도 없이 뾰족하게 세운 혀가 주름을 벌리며 들어왔다.
“흐, 아….”
아서의 몸이 들썩였다. 장소가 달라진 탓인지 보통 때보다 성감이 빠르게 차올랐다.
카를로스는 아서의 안이 눅눅해지도록 혀를 굴렸다. 뒷구멍에 고개를 박고 노골적으로 빨아 대는 모습이 이제는 익숙하디익숙해 보였다.
혀끝이 구멍 부근을 둥글게 덧그렸다. 아래가 벌써 온통 축축했다. 간지러움을 동반한 아찔한 쾌감이 번졌다. 아서가 아프지 않은 자극을 꺼려 하는 것과 별개로 몸은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후였다.
“흐읏, 아, 으….”
입구를 혓바닥으로 핥던 카를로스가 입술로 게걸스레 구멍을 빨아 댔다. 그는 아서가 허리를 들썩이든 말든 손쉽게 제압한 채 뒷구멍을 핥는 데에 몰두했다.
아서의 다리 사이에 머리를 묻은 카를로스는 좀 전까지 사무적인 눈으로 지시를 내리던 이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무표정한 얼굴만 평소와 같았고 눈에는 이미 초점이 없었다.
“읏…!”
아래에 한 번에 두 개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둥글게 돌려가며 안을 넓히던 게 곧바로 세 개로 늘어났다.
아서가 빠듯한 삽입을 좋아하는 걸 아는 카를로스는 일부러 심술을 부릴 때가 아니면 뒤를 넓히는 데 오래 시간을 끌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제 조급함을 해소하기 위한 핑계이기도 했다. 하아, 카를로스가 눅눅한 숨을 뱉어 냈다.
“형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아무리 억누른다 해도 초조한 마음은 자꾸만 새어 나왔다.
발기한 성기를 꺼낸 채로 카를로스가 아서를 올려다보았다. 꺼덕거리는 검붉은 기둥에 핏줄이 넝쿨처럼 휘어 감겨 있었다. 위협적인 수준을 넘어서 조금 징그럽기까지 했다.
그런 걸 꺼내 놓고 불쌍한 척을 해 봤자 소용없다며, 고개를 저으려던 아서가 멈칫했다. 진짜 맛이 갔나 보다. 저러고 있는 모습마저 귀여워 보이다니 말이다.
아서는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더듬었다. 미처 의식하지 못한 사이 눈매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좀 전 카를로스가 왜 그런 눈으로 보느냐 물었던 것이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되었다.
얼굴 근육을 제어하지 못한다는 게 이런 의미구나. 아서의 뺨이 어색하게 경직되었다.
숨 쉬듯 자연스럽게 되던 것이 안 되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무심결에 새어 나온 감정을 읽혔다고 생각하자 괜스레 움츠러드는 듯도 했다.
당황한 아서를 본 카를로스는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아서의 골반을 쥐고 아래로 끌어 내렸다.
책상에서 미끄러져 내려온 아서가 맨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내 뺨에 축축한 좆이 닿았다.
“내 것도 적셔 줘요, 형님.”
카를로스가 성기의 뭉툭한 선단으로 볼을 찔렀다. 짙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아서를 응시했다. 금이 간 아서의 가면 너머를 들여다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아서는 자꾸만 느슨해지는 눈매를 감추고 싶었으나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은 그마저도 허락해 주지 않았다. 이목구비가 제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 낯선 기분에 그는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눈을 감고 순순히 입을 벌리자, 머리 위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뒷덜미가 붙잡혔다.
“눈은 계속 감고 계실 겁니까?”
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에 젖은 선단이 비벼졌다.
“…마음대로 하세요.”
카를로스는 굳이 아서가 보여 주기 싫다는 것을 억지로 강제하지 않았다. 벌어진 입 안으로 두꺼운 기둥이 서서히 밀려 들어갔다.
커다란 손아귀가 아서의 뒷머리를 잡고 앞뒤로 움직이게 했다. 아서는 괴로운 듯 신음했지만 아서의 성기는 조금도 시들지 않았다.
“읍, 아….”
“좆만 물려 주면 좋아 죽네….”
최근 들어 카를로스는 아서에게 제 성기를 물리는 게 조금 꺼려졌지만, 아서가 이렇게 좋아하니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아서의 머리칼을 쥔 채로 느긋하게 허리 짓 했다.
무언가 빨아 먹는 듯한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렸다. 형제의 입 안은 진득했고 델 것처럼 뜨거웠다.
“하아….”
카를로스의 미간이 설핏 찌푸려졌다. 점점 성감은 차오르는데, 아서가 다치지 않게 조절하며 박아 넣기가 힘들었다.
벌써 아서의 입술 끝이 발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입꼬리가 헐고 찢어져도 아무 말 않는 아서였기에 카를로스가 조절을 해야만 했다. 성기의 가장 두꺼운 부분은 입 안으로 밀어 넣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아서가 반쯤 물고 있던 좆을 거칠게 끄집어냈다. 제 손으로 성기를 훑는 동시에 선단을 아서의 얼굴에 비벼 댔다.
“…왜 더 안 해?”
왜 멈추냐며 카를로스를 올려다보던 아서는 눈꺼풀을 누르는 성기 때문에 다시 눈을 감아야 했다. 끈적한 액이 아서의 눈두덩이와 뺨에 온통 들러붙었다.
“더 하면 찢어질 것 같습니다.”
“…그래도 괜찮은데.”
“하, 형님은… 제발 그 입 좀 다물어요.”
짜증스레 말한 카를로스는 아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제 것을 수음했다. 찌걱거리는 마찰음이 귓가를 적시듯 울렸다.
카를로스의 눈매가 조금씩 나른하게 처졌다. 눈동자 색이 짙어지고 입술 새로는 나직한 신음이 흘렀다.
아서는 흐릿한 시야로 그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저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제 좆은 만지지도 않았는데 쌀 것 같았다. 그가 홀린 듯이 다가가 카를로스의 것을 물고자 했다.
그러나 바로 코앞에서 다가가지 못하게 머리채가 붙잡혔다.
“왜….”
올려다봐도 카를로스는 아무 말 없이 제 것을 훑기만 할 뿐이었다.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꿈틀거렸다. 성기를 훑는 손길이 점점 더 갈급해졌다.
파정액이 소리 없이 아서의 얼굴 위로 흩뿌려졌다. 부푼 성기가 코와 뺨을 가볍게 때렸다.
“입이 찢어져도 그저 좋다고….”
피부 위로 점점이 떨어진 정액을 카를로스가 성기 끝으로 느릿하게 펴 발랐다. 아서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카를로스가 아서의 어깨를 눌러 바닥에 눕혔다. 형님이 그와의 관계를 즐기는 것까진 좋았지만, 제 몸이 다치는 걸 개의치 않는 태도는 번번이 그의 신경을 건드리곤 했다.
무언가 화가 난 얼굴로 카를로스는 아서의 다리를 벌리고 들어갔다. 다시금 발기한 뭉툭한 선단이 젖은 구멍 위로 비벼졌다.
“아…!”
두꺼운 기둥이 주름을 벌리고 안으로 서서히 밀려 들어갔다. 아서가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느릿한 삽입이었지만 윤활제가 없어 빠듯하게 느껴졌다.
제 좆을 밀어 넣던 도중 카를로스가 아서의 손목을 잡고 끌어다 저를 끌어안게 했다. 입술이 겹쳐지고 혀가 깊게 얽혔다.
그가 혀를 쑤셔 넣고 멋대로 안을 희롱하다 아서의 뺨을 깨물었다. 귀가 축축이 젖을 만큼 빨고 눈꺼풀을 핥아 댔다. 아서를 온통 핥아 대면서 아래로는 허리 짓을 했다.
“으읏, 흐, 아…!”
아서는 오감이 축축하게 젖은 듯 정신이 몽롱했다. 쓸모없는 생각들로만 가득하던 머릿속이 텅 비워졌다.
혀끝이 눈알을 핥을 것처럼 눈꺼풀 아래로 파고들었다. 타액으로 젖은 눈가는 언뜻 운 것처럼 보였다. 카를로스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아, 읏, 하윽…!”
살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카를로스는 아서의 양 손목을 움켜쥐었다. 아무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서와 몸을 섞어도 부족하단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아, 형님….”
이미 아서와 피부를 맞대고 있는데도 이상하리만치 갈증이 일었다. 여기서 더 무얼 어찌하고 싶은 건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카를로스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처럼 아서를 쳐다보았지만, 결국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
집무실에서 아서의 옷을 벗겨도 된단 사실을 알게 된 카를로스는 더욱더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허다하게 붙어먹다 보니 이제는 부관들도 그들이 떠난 자리에서 형제가 무슨 짓을 하는지 눈치챈 기색이었다.
“드디어 내일이군요, 형님.”
집무실 책상 위에 엎드린 아서의 뒤로 카를로스가 허리 짓을 했다. 엉덩이 살이 벌겋게 달아오를 만큼 거친 삽입에 시야가 앞뒤로 극심히 흔들렸다.
이미 여러 번 사정을 마친 아서는 축 늘어져서 신음만 흘렸다. 기력이 다 빨려 카를로스가 손을 놓으면 그대로 바닥으로 굴러떨어질 것 같았다. 내일이 즉위식인 걸 알면서 어찌 사람을 이렇게나 혹사시키는 건지, 절로 억울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러면, 내일… 윽, 어떻게 버티라고….”
잠깐 삽입이 멈춘 사이 아서가 애원했다. 한 세 번째까지는 저도 좋다고 즐겼지만 더는 버티기가 힘들었다. 이러다 자칫 내일 즉위식에서 졸고 있진 않을까 우려될 지경이었다.
“…알겠습니다. 형님도 쉬어야 할 테니까.”
카를로스도 제가 조금 심하게 굴었다고 생각했는지 안에 있던 것을 빼냈다. 그는 좀 전까지 들락거리던 뒷구멍에서 제 정액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꼼꼼히 밀어 넣고는, 아서의 다리를 벌린 채 한참 그곳을 응시했다. 여전히 얼굴엔 아쉬운 기색이 엿보였다.
옷차림을 추스른 카를로스가 늘어진 아서의 몸을 들어다 카우치에 눕혔다. 그다지 크지 않은 카우치 위에 두 사람이 비좁게 겹쳐 누웠다. 멍하니 누운 아서의 몸 위로 카를로스가 올라탔다. 아서가 밀어내지 않고 가만히 있자, 카를로스는 이때다 싶었는지 아서를 마음껏 만지작거렸다.
“으….”
이미 수없이 짓눌려 퉁퉁 부은 젖꼭지가 손끝에서 희롱당했다. 아서는 낮게 앓는 소리만 흘렸다. 그러자 카를로스가 이번엔 혀로 가슴을 빨아 대기 시작했다.
애무가 아니라 마치 제 것이라고 침을 발라 두는 행위 같았다. 덕분에 아서의 피부는 하루라도 멀쩡할 날이 없었다.
이렇게 사람을 혹사시킬 거면 구속구라도 빼 줘야 하는 게 이치에 맞지 않나, 아서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구속구를 풀어 달라는 내색이라도 보이면 카를로스가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불안한 티를 냈던 탓이다.
안 그래도 지친 몸 위로 한 명분의 무게가 더해졌다. 아서는 부디 카를로스가 제 덩치를 생각하고 움직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달리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몸이 힘든 것과는 별개로 제 앞에서만 유독 어리게 구는 카를로스의 모습이 아서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카를로스가 실수로라도 다른 사람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며 혼자 걱정을 해 댈 정도였다.
아서는 카를로스의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은 보기보다 감촉이 좋았다.
팔을 위아래로 움직이느라 손목에 걸린 구속구가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음이 귀에 걸린 듯, 카를로스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가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불편하겠지만 조금만 더 참으세요. 내일 즉위식이 끝나면 구속구를 풀어 드리겠습니다.”
아서와 마찬가지로 카를로스 역시 구속구의 존재가 거슬렸었나 보다. 아서의 원대로 풀어 주고는 싶은데, 뿌리 깊은 불안을 떨쳐 내지 못해 그로선 이도 저도 못 한 채 시간만 흘려보낸 것이다.
“그래. 네가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
카를로스가 불안해할까 아서는 부러 기쁜 티를 내지 않았다.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카를로스가 도장을 찍듯 아서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꾹 눌렀다. 그는 무언가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이상한 기분이 드네요, 형님.”
“뭐가?”
“그야…. 내일이 지나면 많은 게 달라질 테니까요.”
즉위식 이후 따라올 변화가 카를로스는 두려운 동시에 조금은 기다려지는 듯도 했다. 아서의 태연한 모습을 보고 카를로스가 물었다.
“형님께서 그리 염원하던 자리에 오르는 날입니다. 기쁘지 않습니까?”
“글쎄.”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아서는 애매하게 답을 얼버무렸다. 실지 아서가 황위에 오름으로써 얻는 이득은 몇 가지 없다. 물질적인 것은 이미 지금도 넘칠 만큼 많았기에, 카를로스를 안심시킬 수 있단 걸 제외하면 귀찮은 일만 느는 것 같았다.
아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를로스가 입을 달싹였다.
“폐하.”
시큰둥하게 있던 아서는 움찔했다.
“이제 형님을 그렇게 불러야겠군요.”
“…뭘 벌써부터.”
묘하게 쑥스러워진 아서가 헛기침을 했다. 카를로스의 입에서 나오는 폐하라는 소리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실은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살짝 들뜨기까지 했다. 황제 자리는 전혀 탐이 나지 않지만 저 호칭은 꽤 마음에 들었다. 이왕이면 잠자리에서도 저렇게 불러 주면 어떨까 싶었다.
“단둘이 있을 때엔 계속 형님이라 불러도 되겠지요?”
“…가끔은 폐하라고 불러.”
아서가 은근히 속 보이는 소리를 했다. 그의 마음에 차는 부분이 전혀 없는 건 아니라 다행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아서는 차라리 즐길 거리를 찾자 싶었다. 황제궁 구석구석을 불순한 의도로 써먹을 생각을 하자 조금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황제를 오래 해 먹을 생각은 없었다. 몇 년 진득하게 붙어 있다 보면 카를로스도 아서가 도망가지 않을 거란 걸 믿게 될 거고, 그때쯤 퇴위식에 관한 말을 꺼내 볼 생각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될 대로 되겠지. 아서는 태평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이만 침실로 갈까요, 형님. 말씀한 대로 내일을 대비해야 하니까요.”
구석에 버려져 있던 옷을 카를로스가 집어 들었다. 아서는 구겨진 옷을 걸치며 한숨을 쉬었다.
“처음부터 침실에서 했으면 수고를 훨씬 덜었을 것을.”
“…형님이 자꾸 유혹을 하니까.”
“그런 적 없어.”
아서가 작정하고 꼬시려 든 것도 아니건만, 카를로스는 눈길만 스쳐도 아서가 자신을 유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서로선 조금 억울한 부분이었다. 볼 때마다 제가 눈으로 무슨 말을 한다고 하는데, 누가 들으면 그들이 쳐다만 봐도 꿀이 떨어지는 사이인 줄로 알 것이다.
아서는 찝찝한 몸 위로 의복을 걸치고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들이 뒹굴던 동안 바깥은 벌써 밤이 되었다. 집무실을 나선 형제는 나란히 걸으며 별거 아닌 대화를 나눴다. 부쩍 선선해진 날씨에 걸음걸이가 여유로워졌다. 형제의 뒤로는 가브리엘이 조금의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밤하늘은 어두웠지만 청명했다. 동그랗게 휜 손톱달이 머리 위로 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찝찝한 몸을 씻어 내듯 스치고 지나갔다. 즉위식 전날 치고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또 옷을 버리셨군요, 전하.”
침실로 들어가자 기사가 능숙한 손길로 아서의 옷을 벗겼다. 아서는 대답을 하지 않고 엉뚱한 곳만 쳐다봤다. 구깃구깃하던 옷이 바닥으로 하나둘 떨어졌다.
카를로스가 원하였던 대로 아서는 더는 가브리엘과 몸을 섞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가브리엘도 시중을 들 때면 맡은 바 일에만 몰두했다. 아서를 보살피는 게 가브리엘의 역할로 확정이 된 건지, 카를로스 역시 더는 숨 쉴 틈 없이 그들을 감시하려 들지 않았다.
처음엔 거리를 두는 걸 낯설어하던 기사는 이제는 오히려 전보다 더 편해 보였다. 그는 카를로스와 제 영역이 확실하게 나뉜 점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이전에도 섹스보다 아서의 시중을 드는 것을 더 좋아한 가브리엘이었으니 그럼직도 했다.
찝찝하던 정사의 흔적을 씻어 내고, 아서는 깨끗해진 몸으로 침대에 누웠다. 가브리엘은 아서를 뽀득뽀득 씻겨 내고는 만족한 얼굴로 침실을 나갔다.
“형님.”
아서보다 먼저 목욕을 끝낸 카를로스가 기다린 것처럼 바로 허리를 끌어안고 달라붙었다. 매일을 붙어 있다 보니 이제 몸을 누르는 무게가 없으면 허전했다.
어둠 속에서 아서가 눈을 끔뻑거렸다. 카를로스가 아서의 눈 주변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어서 주무세요, 형님.”
“잠이 안 와.”
“정 잠이 안 오면 재워 드릴까요.”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손이 슬그머니 엉덩이를 더듬었다. 뒤로 손가락이 들어오려 해 아서가 카를로스의 볼을 붙잡았다.
“내가 그만하라 했지.”
“…예. 그만하겠습니다.”
버릇이 되어 무심결에 그랬다며 카를로스가 사과했다.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나. 아서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이유를 불문하고 아서가 웃으니 카를로스도 따라 웃었다. 볼을 꼬집히고 애 취급을 당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도 않은 듯했다. 카를로스가 웃는 것을 본 아서의 눈매도 살풋 휘었다.
쑥스러워진 아서는 괜스레 딴청을 피우다 도로 카를로스를 마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평소처럼 시답잖은 말을 하려 벌어졌던 아서의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카를로스는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렷한 눈동자 위로 그림자가 졌다. 빛이 닿은 한쪽 뺨이 어딘가 창백했다. 보통 때의 카를로스가 그랬듯이 덤덤하게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것뿐인데, 아서는 갑작스레 목이 타는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인지 무어라 형용하기 힘들 만큼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이상하게도 등허리가 견딜 수 없이 간질거렸다. 아서는 카를로스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그의 입술 부근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그때, 카를로스의 입술이 달싹였다.
“…좋아해요, 형님.”
그가 그렇게 말했다. 아무 예고도 없이. 카를로스는 바깥으로 나온 제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제 자신이 무슨 말을 하였는지 깨달은 듯 입을 다물었다.
카를로스가 멈칫 손끝을 움츠렸다. 그것은 카를로스 자신도 원하여서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틀어막고 있던 벽에 한 줄의 틈이 생긴 찰나, 억눌려 있던 마음이 한 방울 툭 새어 나오고 만 것이었다.
흐릿한 달빛만이 전부인 침실 안에 정적이 맴돌았다. 서로의 숨소리마저 의식하게 되는 고요였다.
이내 카를로스가 한숨을 쉬듯 말했다.
“……한 번쯤은 말하고 싶었습니다. 여태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던 것 같아서.”
그가 제 고백의 이유를 변명처럼 늘어놓았다.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의 시선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들 사이로 흐르는 무거운 공기에 아서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고백을 들었으면 답을 해 주는 게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아서는 카를로스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며, 나도 그렇다고 답을 하려던 참이었다.
“억지로 대답하지 마세요.”
말문을 떼기도 전에 카를로스가 불쑥 끊어버렸다. 아서는 반사적으로 반박했다.
“…억지로 아닌데?”
“지금 말고… 형님이 말하고 싶을 때, 말하고 싶은 만큼 말하세요.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잠깐 동안 후회하듯 굴었던 카를로스는 이제 조금은 후련한 표정으로 웃었다.
한 번 금이 간 둑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는 틈을 비집고 쏟아져 나온 것을 그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고자 마음먹었다.
어차피 이제 와서 아서에게 내뱉어 버린 마음을 주워 담는 것도 불가능했다. 카를로스는 내내 속에 품고만 있던 말을 꺼내어 보였다.
“…전부터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더는 예전처럼 억지로 형님의 속내를 들춰 보지 않을 거라고. 형님이 보여 주고 싶은 것만 보여 주고…. 내게 보여 주기 싫은 건 얼마든지 감춰도 괜찮다고 말이에요.”
카를로스가 나직이 말했다. 막상 하나둘 내보이기 시작하니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는 걸, 그는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동시에 깨달았다.
차분하게 이어지는 말을 아서는 가만 입을 다물고 들었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을뿐더러, 카를로스의 목소리를 끊고 싶지도 않았던 탓이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맹세할게요, 형님. 형님이 원치 않는 걸 캐묻지 않을 거고, 내 멋대로 판단하지도 않겠습니다.”
그가 아서를 바라보았다. 카를로스의 눈동자 속에 비친 아서 자신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모습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겠습니다. 형님만 내 옆에 있어 준다면 나는 아무것도 상관치 않아요. 설령 형님의 존재 자체가 거짓투성이라 해도.”
“…….”
아서는 도무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좀 전처럼 가볍게, 나도 너를 좋아한다는 말을 내뱉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목구멍에 커다란 응어리가 고여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틀어막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간신히 떨어진 입술 사이로는 볼품없이 떨리는 숨만 새어 나왔다.
사랑해요. 카를로스가 제게 건넨 기나긴 맹세를 한마디로 줄이면 한 줄의 고백이 완성될 터였다. 그 짧은 한마디를 입에 담지 못해 이렇게나 길게도 늘여 말한다.
이런 순간엔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만 하는 걸까. 거짓을 그리도 술술 내뱉던 입술이 정작 진심을 말해야 할 순간엔 겁을 집어먹고 굳어 버렸다.
아서는 어찌할 바 모르고 굳어 버렸다. 숨 쉬는 것처럼 쓰고 있던 두꺼운 가면이 파스스 부서져 내리는 듯했다.
지금 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아마 두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이상한 얼굴일 게 분명했다.
아서는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제가 느끼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슬프지 않은데 한여름 볕 아래 놓인 것마냥 심장이 뜨겁게 녹아내렸다. 누군가 몇 가닥의 깃털로 뱃속을 간지럽히는 것도 같았다.
아서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카를로스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그를 껴안고 그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잇새로는 가느다란 숨소리만 고요히 흩어졌다.
아마도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도 같았다. 이런 비정상적인 마음에 주제넘게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될지 알 수 없어서, 나 역시 감히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는 없지만… 나는 항상 너를 생각한다고. 어쩌면 네가 나를 원하는 것보다 내가 너를 더 원하고 있을지 모르겠다고.
눈이 마주치자 카를로스가 옅게 웃었다. 그는 이미 아서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전부 읽어 낸 눈빛이었다.
“…형님은 생각보다 수줍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카를로스의 웃음기 어린 말에 아서는 이 세상에 수줍음 많은 사람이 다 죽었냐는 말을 건네고 싶은 것을 참았다.
형제는 서로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 둘은 어느 순간 눈을 감았다. 그러자 이제는 서로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긴 하루가 서서히 끝이 나고 있었다.
몇 시간 뒤면 즉위식이 시작될 것이다. 여전히 아서는 아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일이 지나면 무엇이 달라지게 될까. 카를로스는 많은 게, 혹은 모든 게 달라질 거라 말했다.
아서는 그 말에 반만 동의했다. 내일이 지나도 자신은 지금처럼 카를로스와 함께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이하고 있을 거니까. 그것만은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그들의 일상이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며 점점 달라지는 것들이 생기긴 할 테다. 오랜 시간이 지나 이제야 간신히 변화의 시작점에 선 형제였다. 겁 많은 두 사람은 아직도 그들의 관계에 어떤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하나 지금 당장이 그러할 뿐, 아서는 그들이 영원히 이 자리에 정체되어 있진 않으리라 믿었다.
지금 형제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었다. 아서는 시간을 두려워하는 만큼 시간의 힘을 믿었다. 쌓이는 나날들은 많은 것을 매끄럽게 깎아 주기 마련이다. 그는 세월이 지나 카를로스의 마음이 식을 것을 두려워했지만, 마찬가지로 그들 사이 자리 잡고 있던 불신 역시 흐르는 시간 속에서 마모될 수 있었다.
날이 지날수록 그들은 서로에게 제 진실된 모습을 드러내는 법을 배워 가며, 그렇게 달라진 서로의 모습에 점차 익숙해질 것이다. 시간이 선사해 줄 평온함이 점차 그들 사이에 자리 잡게 될 테다.
그러다 보면 혹시 모를 일이다. 어느 날 문득 아서가 이 순간 차마 입에 담지 못했던 말을 아침 인사처럼 건네는 순간이 찾아오게 될지도.
그날이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언젠가는 그러한 순간을 맞이하게 되리라, 아서의 가슴 속에 막연히 그런 예감이 차올랐다.
당연하게도, 여전히 아서는 무수히 많은 것이 두려웠다. 그의 불신과 불안은 아직까지도 그의 안에 견고히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순간, 단 한 가지만큼은 확신했다. 앞으로의 나날이 카를로스를 안고 있는 지금만 같다면 모든 게 괜찮을 것만 같다고.
앞으로 형제가 걸을 길엔 이정표도 정답도 없었다. 항상 답이 있는 문제와 달아날 탈출로가 있는 길만 찾던 아서였다. 그가 두려워하던 미지의 영역에 한 걸음 발을 내디딜 수 있는 건 그의 곁에서 함께 걸어 줄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늘 혼자 남을 이후를 상상하던 아서가, 이제는 조금씩 카를로스와의 미래를 그려 보고 있었다. 아서는 지금 제 모습이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낯설었고 또 한편으로는 기꺼웠다.
아서는 흐릿하게 보이는 카를로스의 얼굴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카를로스는 늘 그랬던 것처럼 눈을 감고 아서의 손길에 조용히 제 몸을 맡겼다. 기분 좋은 어둠이 그들을 감싸 안았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아서는 어느 때보다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두운 공기 속에 잠긴 몸이 깊은 잠에 빠진 듯 나른했다.
흔히들 밤을 시련에 비유하고, 해가 뜨는 것을 시련의 극복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아서는 해가 뜬 낮보다 이토록 고요한 밤이 더 좋았다.
반만 가려진 창문으로 달빛이 들어온다. 여전히 사위는 어두웠다.
그럼에도 아서는 이대로 날이 밝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설령 해가 사라지고 아침이 찾아오지 않으면 어떠한가.
그들이 지금 이 순간처럼 머물 수 있다면, 해가 뜨지 않는 밤 또한 있는 그대로 나쁘지 않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