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점차 부드러워지는 바람에 풀잎이 살랑였다. 황도 근처에 위치한 카딘 숲에도 조금씩 봄바람이 찾아들었다.
제국 남쪽 성문을 통과해 내려가면 볼 수 있는 카딘 숲은 가끔 뭣 모르는 이방인이 길을 잘못 들지 않는 이상 인적이 극히 드물었다.
명목상으론 황실 소유인 숲이지만 특별한 때를 제외하곤 황실에서 직접적으로 관리인을 보내진 않았다. 암묵적으로 방치된 장소라 하여도 무방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고요하던 숲에 낯선 이들의 발자국이 찍히기 시작했다. 폐위된 황후, 다리아가 숲속에 위치한 엥겔 수도원에 가두어진 뒤로부터였다.
역사적으로 엥겔 수도원은 황위 다툼에서 밀려난 황족의 거주지로 이용되곤 했다. 주로 죽이기는 애매한데 멀리 손이 닿지 않는 곳에 풀어 두기도 꺼림칙한 이들이 이곳으로 보내졌다.
이곳 수도원은 울창한 풀숲으로 감싸인 철창 없는 감옥이었다. 겉보기에 온후한 감옥은 면회를 허가받기도 지독하게 까다로웠다.
어찌나 까다로운지, 오를레앙 대공은 제 언니의 얼굴을 한 번 보겠다고 사재까지 탈탈 털어야만 했다. 언니 다리아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주 크게 비웃을 게 분명했다.
대공이 제법 예스러운 멋이 있는 복도를 걸으며 짧게 혀를 찼다. 그는 폐후가 이곳에 머물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수도원을 찾은 방문자였다.
“대공 각하, 이쪽으로 와 주시겠습니까.”
점잖게 생긴 수도사 한 명이 붙어 대공을 안내했다. 대공은 안내인의 뒤를 따르며, 오를레앙가 특유의 옅은 회색 눈동자로 수도원을 빠르게 훑었다.
“건물 한 번 노골적이게도 지었군.”
얼핏 고풍스럽게 위장된 감옥은 모든 건축물이 죄다 중앙의 작은 저택을 지켜보는 형태로 지어졌다.
모든 이의 시선이 집중되는 중앙 저택, 그곳에 폐후가 머물고 있으리란 건 빤한 사실이었다.
엥겔 수도원이 직관적인 형태를 띤 건 대공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더는 안내인의 느릿느릿한 걸음을 참아 줄 필요가 없었으니 말이다.
“실례. 먼저 좀 가겠네.”
대번에 수도사를 앞지른 대공은 큰 보폭으로 수도원 중앙의 저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곳을 처음 방문한 사람답지 않게 그는 곧바로 거침없이 계단을 올랐다. 이 조그마한 저택에서도 가장 높은 층, 햇볕이 잘 드는 침실에서 다리아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짙은 고동색 문 앞에 선 대공이 문을 두드렸다.
“다리아 언니, 접니다.”
방문을 알림과 동시에 대공은 침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어서 한시라도 빠르게 다리아에게 새 소식을 알려 주고 싶어 그는 목구멍이 근질근질한 지경이었다.
문을 열자 씁쓸한 꽃향기가 코끝에 확 끼쳤다. 갑작스레 문을 열고 들어선 대공을 보고도 다리아는 큰 동요 없이 익숙하게 인사를 건넸다.
“…왔구나,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네요, 언니.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보다시피. 황제처럼 손목이 잘릴 일은 없겠구나.”
자그마한 티 테이블에 앉은 다리아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구불거리는 백금발을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자태는 늘 빈틈없이 격식을 갖추고 있던 이전과 사뭇 달랐다.
“흠. 생각보다….”
중얼거린 대공은 검문이라도 하듯 방 안을 샅샅이 살폈다.
널찍한 침실은 황족을 수용하기 위해 지어진 곳인 만큼 값비싼 가구로 채워져 있었다. 방의 한쪽 벽면엔 작은 크기의 문이 달려 있었는데, 그 문 건너편에 사용인이 머무는 듯했다.
침실 한구석엔 무장한 차림의 기사 둘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의도적으로 존재감을 죽인 채 서 있는 저들은 이곳에서 이루어진 대화를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2황자 카를로스에게 전달할 터였다.
감시가 좀 거슬리긴 한다만 고풍스러운 침실, 수발을 들어 줄 하인까지. 황후일 적에 비할 바는 못 되어도 폐위된 처지를 생각하면 과분한 대접이었다. 다소 안심한 대공이 다리아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같이 좀 앉겠습니다.”
터벅터벅 걸어간 그는 작은 의자를 끌어다 다리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길게 뻗은 다리가 다리아의 발끝을 의도치 않게 툭 건드렸다.
“또. 이런 때에도 그 몹쓸 버릇은 그대로구나.”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듯 다리아는 자연스럽게 제 다리를 옆으로 옮겼다.
“그거 조금 닿았다고 유난 떠는 거 보니 언니도 여전하네요.”
“내가 유난을 떠는 게 아니라, 네가 시건방진 것이겠지.”
“언니.”
짧은 대화에도 날이 섰다.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달리 오를레앙 대공과 폐후는 썩 다정다감한 자매는 아니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말이에요….”
엘리자베스의 눈썹이 들썩였다.
“아직도 본인을 황후라 생각하는 겁니까. 말씀을 높여 주시지요?”
“…그 정도야 어렵지 않죠. 대공께서 원하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다리아는 눈 한 번 깜빡 않고 말투를 바꾸었다. 언니라는 호칭과 말투, 무례한 방문까지 하나하나 전부 지적하고 싶었으나 잠자코 수긍했다. 불필요한 말다툼에 기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먼 곳까지 귀한 걸음 하신 분께 내가 무례하였습니다.”
동생이 얼른 제 볼일이나 보고 가길 바라며 다리아가 순순히 무례를 사과했다.
“아닙니다, 언니. 그리 먼 길도 아니었습니다. 출입증을 받는 절차가 까다롭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러셨군요.”
엘리자베스가 생색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으쓱거렸다. 그러든 말든 다리아는 전혀 놀랍지 않다는 듯 무미건조하게 대꾸했다.
그 익숙한 반응에 반사적으로 울컥할 뻔했던 엘리자베스는 이내 평온을 되찾았다. 어차피 오늘 그가 이 자리에 온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더는 다리아도 태연한 얼굴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었다.
“그래서, 무슨 소식을 전하려 대공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셨습니까.”
입이 간지럽던 엘리자베스는 다리아의 물음에 냉큼 답했다.
“기뻐하십시오. 아르디의 경사를 전하러 왔습니다.”
“…경사라. 썩 기껍지 않은 소식일 게 분명하군요.”
“아닙니다. 맹세컨대 이 소식을 들으면 언니도 분명 기뻐하실 겁니다.”
“…….”
다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대공이 물어 온 소식 따위야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진정 반가운 일이었다면 엘리자베스의 눈이 저렇게 기대감으로 빛나지 않을 터였다. 저 반짝거리는 눈빛은 다리아가 아끼던 시녀의 부고를 전하였던 때의 그것과 같았다.
“대공께서 반가워할 소식이 몇 없을 텐데.”
다리아는 미리 최악을 예상하고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마도 황성이 있을 방향이었다.
“황자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습니까?”
“아니요, 그럴 리가요. 너무하십니다. 언니는 나를 조카의 변고를 경사라 칭하는 파렴치한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리 묻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에 웃음이 만연했다.
“나는 단지 아서 전하의 혼인을 알리러 온 겁니다, 언니.”
“…혼인? 그 아이가 말입니까?”
예상외의 소식이었다. 아서가 혼약을 얼마나 끔찍하게 기피하였는지 다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설마 강제로 혼약을 맺게 된 것인가.
다리아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분명 아서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한 게 아닐 것이다. 안타깝진 않았다. 혼인이란 수단을 이용해 경쟁자를 내쫓는 것쯤이야 귀족 사회에선 흔한 일이었다. 다리아가 물었다.
“이제라도 황자가 제 짝을 찾았으니 잘된 일이군요. 상대는 누구입니까?”
“기뻐하십시오. 아서 전하께선 차기 황제의 반려가 될 것입니다.”
창밖을 바라보던 다리아의 시선이 엘리자베스에게로 돌아왔다.
“…차기 황제라고?”
황제라고? 다리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설마 아르디의 혼인 상대가… 카를로스 황자입니까?”
“예. 무척 경사로운 일이 아닐 수 없어요.”
다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엘리자베스의 말대로 차기 황제와의 혼인은 경사가 맞긴 했다. 일반적인 경우엔 말이다.
“달리 보면 우리 가문에서 연이어 황후를 배출한 것과 같지요. 어찌 영광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다리아에게는 아서의 혼인이 영광이나 경사 따위와는 정반대의 의미로 다가갔다.
승계 다툼에서 패배한 다리아가 황후라는 지위를 얼마나 치욕적으로 여겼는지, 엘리자베스로선 모르려야 모를 수 없다. 제 언니가 아서에게 스스로를 투영해 과거의 패배를 설욕하려 했단 사실을 알고 있던 터라, 엘리자베스는 유쾌하게 웃었다.
다리아 자신에 이어 그 자식까지 황후의 자리에 앉게 된다. 아서의 혼인은 다리아에겐 또 다른 끔찍한 굴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화려한 이목구비가 새파랗게 굳어 갔다. 엘리자베스는 그 감미로운 변화를 찬찬히 감상했다. 오랜만에 보는 언니의 동요였다. 하물며 폐위되어 수도원으로 쫓겨났을 때도 다리아는 저런 얼굴을 하진 않았다.
전형적인 푸른 피로 보이는 다리아에게도 철없던 시절은 있었다. 어렸을 때 다리아는 다혈질인 데다가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소녀였다. 나이를 먹으며 차츰 그런 면모가 줄어드는 듯했지만, 실은 불같은 성미를 가면 아래 숨겨 둔 것뿐이었다.
어쩌면 타고난 성질을 지나치게 억누르고 있던 게 잘못이었던 건지 모른다. 애써 감추고 있던 다리아의 본모습은 시간이 지나 아주 극단적인 모양새로 튀어나왔다.
「엘리자베스, 나를 도와다오.」
다리아는 붉은 눈을 지닌 이종족과 통정하였다. 황족이 첩을 두는 건 흔한 일이니 하룻밤 외도 정도는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아이를 낳고 보니 황제의 핏줄이 아니란다.
매사 그렇게나 젠체하더니 한순간의 충동으로, 그런 멍청한 사고를 쳤다. 만일 태어난 아이가 붉은 눈동자를 가지지 못했다면 어떤 비극이 일어났을지 차마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뒤늦게 엘리자베스가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땐 이미 모든 일이 끝난 뒤였다. 제 죄를 털어놓은 다리아는 아이를 황족으로 키울 것이라 선언했다.
「도움을 청할 자가 너밖엔 없더구나.」
「…대체 나더러 무얼 어쩌라는 겁니까.」
「나는 이 아이를 황위에 올릴 것이다. 네가 나를 도와야 해.」
「진짜 미치셨습니까?」
황후의 죄를 고발해 조카와 언니를 주살하느냐, 조카를 죽이고 진실을 묻을 것이냐. 그도 아니라면 가문의 존망을 걸고 모르는 체 입을 다물 것이냐.
엘리자베스에겐 최악의 선택지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한동안은 물만 마셔도 가슴이 답답하였다.
열이 받는 건 다리아는 이미 엘리자베스가 어떤 선택을 할지 확신하고 있었단 점이다. 치미는 화를 참을 수 없던 엘리자베스는 제 집무실의 집기를 죄다 때려 부순 뒤, 결국 침묵을 택했다.
죽이고 싶을 만큼 짜증 나는 언니였으나 진짜 죽는 꼴을 보고 싶진 않았다. 제 무고한 조카 역시도.
그리하여 졸지에 엘리자베스는 원치도 않던 도박판에 강제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판돈이 걸린 도박판에 말이다.
「황후께서 위험천만한 일을 벌이셨더군요.」
때문에 2황자 카를로스가 대공가를 찾았을 땐 차라리 고마울 지경이었다.
드디어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그만둘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엘리자베스는 상대 세력이 의구심을 품을 만큼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투항했다. 영문을 모르는 다른 가문을 비밀리에 설득하거나 겁박하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몇 대를 이어 내려온 대공가가 백작으로 강등될 예정이었지만 엘리자베스는 믿지도 않는 신께 감사를 빌었다. 가문이 몰살당해 마땅한 죄를 지은 처지였으니 이 정도로 그친 건 천운과 같았다.
“언니만 아니었어도….”
당장 찢어 죽였을 텐데. 엘리자베스는 수백 수천 번째인 생각을 반복했다.
열이 받을 때마다 그는 다리아를 빼고 다리아가 아끼는 주변인을 족쳤다. 한데 이제는 수도원에 갇혀 있으니 그러기도 힘들었다. 하나 남은 시녀를 죽였다가는 제 손으로 물 한 번 떠먹어 본 적 없는 다리아가 굶어 죽을 것 같았다.
그런 다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엘리자베스는 이를 갈았다. 그나마 저 허옇게 질린 낯짝을 보니 울분이 조금 가라앉는다.
“언니께서 원하신다면 혼인식에 참여할 수 있도록, 내가 한번 힘을 써 보겠습니다.”
“…필요 없습니다.”
다리아가 애써 차갑게 선을 그었다. 지금은 엘리자베스가 앞에 있으니 참는 기색이었으나 머지않아 폭발할 게 분명했다. 뭐 같은 성질은 잠깐 누를 순 있어도 완전히 없앨 순 없었다.
“그럼 뭐,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여기 밥은 잘 주나? 제가 좀 챙겨 드려요?”
“…….”
엘리자베스를 쳐다보는 회색 눈동자에 수많은 감정이 담겼다. 그 대부분이 악담일 터였다.
“…식사는 됐습니다.”
“그럼 다른 건?”
“됐다니까.”
“모처럼 내가 선심 좀 쓰겠다는데, 참으로 까탈스럽게 구시는군요.”
“나는 됐습니다. 궁에 있는 황자에게나 잘해 주십시오.”
“내가 이 이상 뭐 얼마나 더 잘해 주란 말입니까.”
멸문의 씨앗이 될지도 모를 아이를 죽이지 않고 지켜 주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
“행여나 그 아이의 신변에 무언가 이상이 생기면, 도와달란 얘깁니다.”
“황성 안에서 무슨 이변이 생긴다고…. 하여튼 걱정도 많으십니다.”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차후 황성 밖으로 나갔다가 무슨 변고가 생길지도.”
다리아가 꿰뚫어 보듯 엘리자베스를 응시했다. 정말이지 알고 싶지 않은데 눈빛만 봐도 그 뜻이 읽혔다. 만일 아서가 이전의 다리아처럼 달아나고자 한다면, 붙잡지 말고 거들어 주라는 뜻이었다.
과거 언니의 도주를 방해한 전적이 있던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겠으니 걱정일랑 그만하시고 밥이나 잘 챙겨 드세요.”
“그러겠습니다, 대공.”
“다음에 만날 땐 백작이라 불러 주면 되겠군요.”
“…….”
“이도 전부 언니 덕분입니다. 참으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양심이란 게 아주 쥐뿔만큼은 있었던 건지, 다리아는 엘리자베스의 비아냥에 마주 부딪히지 않았다. 대신 동생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미안합니다. 대공에겐 항상 고맙게 생각합니다.”
손등 위로 느껴지는 온기에 엘리자베스는 탄식을 흘렸다.
“하, 또 이러네 진짜.”
“황자를 잘 부탁합니다.”
“예. 이미 알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꼭 저 필요할 때만 이런 식으로 구는 인간인 걸 안다. 대체 혈육이 뭐라고, 엘리자베스 자신은 그때마다 번번이 부탁이란 부탁은 다 들어주었다. 아무래도 그는 세상 제일가는 멍청이인 게 분명했다.
자매는 그렇게 한동안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먼저 손을 놓아준 건 언니 쪽이었다.
“먼 곳까지 오느라 고생했습니다. 이만 가 보는 게 좋겠군요.”
조용히 서 있던 기사 둘이 엘리자베스에게 작게 고갯짓했다. 엘리자베스가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예. 그럼, 안부도 전했으니 가 보겠습니다.”
“가 보세요, 대공.”
“예. 앞으로도 쭉 몸 성히 지내시길….”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뒤, 엘리자베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실을 나섰다.
느릿한 걸음걸이에 망설임이 물씬 묻어났다. 분명 다리아의 속을 뒤집어 놓으러 여기까지 왔건만 어째 수도원을 나서는 기분은 전혀 후련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수도원 입구에 세워져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다리아가 있을 저택을 바라보는 눈이 심란하게 잠겼다.
“각하, 출발하겠습니다.”
대공의 복잡한 심정과 별개로 마부는 맡은 바 업무대로 곧바로 마차를 출발시켰다. 굴러가는 바퀴 아래로 바닥에 널브러진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검은 마차는 울퉁불퉁한 길도 아랑곳 않고 빠르게 카딘 숲을 벗어났다. 어느 순간부터 울창한 숲은 수도원을 감싸 안은 채 그 속을 내보여 주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이제 어느 날 볼지 모를 언니에게 안녕을 고했다.
***
인간이라면 누구든 변화를 피할 수 없는 법이었다.
엇나가기만 할 것 같던 형제 사이에도 변화는 빠르게 찾아왔다. 아서가 마음을 달리 고쳐먹은 이후로 형제의 관계는 급격히 평화로워졌다.
고작 일주일 만에 이루어진 변화. 이것을 화해라고 명명해도 될지 고민스러웠는데, 여하튼 간에 아서는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며칠 내내 껌딱지처럼 아서에게 붙어 떨어질 생각을 않던 카를로스는 잠을 잘 때도 아서와 몸을 꼭 붙였다. 오늘 아침 역시 눈을 뜨자마자 제 품 안에 카를로스가 보였다. 여전히 썩 편해 보이는 자세는 아니었다.
아서의 몸이 작지 않다뿐이지 저만한 덩치가 편히 안길 만큼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카를로스는 이 불편한 자세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듯했다. 꾸역꾸역 안겨 있는 게 제 몸이 자란 줄도 모르는 아이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서의 눈에 딱히 우스워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콩깍지가 씌었나. 별게 다 귀여워 보이는 게 신기했다.
아서는 카를로스의 상반신을 끌어안고 널찍한 등을 슬금슬금 더듬었다. 허술한 가운이나마 걸친 아서와 달리 카를로스는 완전한 나신이었다. 손에 닿는 단단한 감촉에 절로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간은 카를로스를 만지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다. 일찍이 고집을 버리고 한발 물러났더라면 그렇게 수십 일간 꾸역꾸역 참을 필요가 없었을 텐데. 미련하게 흘려보낸 날들이 아쉬웠다.
진즉에 좀 이럴 걸 그랬지. 아서는 아쉬운 맘을 담아 카를로스의 등을 간지럽게 두드렸다.
몸을 더듬은 손길에 카를로스의 고개가 스윽 들렸다. 미심쩍게 바라보는 눈이 왜 자꾸 저를 만지작거리냐 묻는 듯했다.
이렇게 대놓고 만져도 카를로스는 아서가 아무 생각 없이 구는 건지, 다른 의도가 있어 더듬는 건지 확신하지 못했다.
당연히 일부러 도발하려 건드리는 거였지만 아서는 의도 같은 건 없다는 듯 태연자약하게 굴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이전처럼 카를로스를 괴롭히지 못하는 마당에 이런 소소한 재미마저 잃긴 싫었다.
“…벌써 날이 밝았군요, 형님.”
안타깝게도 카를로스는 아서의 도발에 넘어오는 대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쪽을 택했다.
카를로스의 말대로 창밖이 환했다. 분명 좀 전까지 새벽이었던 것 같은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아서는 내심 가볍게 혀를 차곤 뒤로 손을 물렸다.
“가 봐. 밖에서 또 애타게 기다리고 있나 보군.”
“예, 그런 것 같군요.”
침실 밖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척에 아서가 웃었다.
최근 일주일간 카를로스가 업무 시간을 대폭 줄이고 침실에만 붙어 있던 터라 부관들의 아우성이 컸다. 며칠 전부턴 교대로 궁까지 찾아와 침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부관들의 항의는 아서가 마지못해 카를로스를 내보낼 때까지 이어졌다. 둘 다 넋을 놓고 있다가, 그나마 아서 쪽에서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이다. 그 후론 옆에서 종용하기 전에 카를로스가 먼저 침실을 나서게 되었다.
“쉬십시오.”
“그래. 다녀와.”
“…예, 이따 뵙겠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카를로스가 아서의 인사에 답을 했다. 아직까지 카를로스는 이런 평범하고 일상적인, 보통의 대화가 낯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정복을 걸치는 중에도 카를로스의 시선은 아서에게로 향해 있었다. 아쉬운 건 그 혼자뿐인지, 침대에 늘어져 눈인사를 하는 아서에게선 아무런 미련이랄 게 보이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아서에게로 향하는 시선을 애써 떨어트렸다.
“칼.”
그가 아쉬움을 감추고 문고리를 잡았을 때, 태평한 부름이 들려왔다.
“어디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이리 와.”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키지도 않고서 불러대는 아서의 모습이 무례해 보일 만도 했지만 두 사람 다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이 자리를 떠나기 싫었던 카를로스는 바로 몸을 돌려 아서에게 다가갔다.
“좀 더 가까이.”
한 번의 손짓에 카를로스가 얌전히 몸을 굽혔다. 아서는 모양 좋은 입술에 한 번, 뺨에 한 번 입맞춤을 하고는 미련 없이 떨어졌다.
굳어 있던 카를로스의 얼굴 위로 미미하게 혈색이 돌았다.
“이따 봐. 보는 사람 찝찝하게 그렇게 죽을상 하고 있지 말고.”
“…예.”
대답은 한 박자 늦게 나왔다. 카를로스는 달아오른 눈가를 쓸어내렸다.
아서가 카를로스를 격려하고자 한 입맞춤은 사실상 역효과를 자아낸 면이 있었다. 카를로스는 과거 방만하다는 이유로 처벌당한 뭇 권력자들의 심경을 이해했다. 표정을 굳힌 그는 노역장에 끌려가는 죄인의 심경으로 방문을 열었다.
침실을 떠나기 싫은 만큼이나 발걸음이 무거웠다. 문을 열었을 때 반듯한 자세로 서 있는 가브리엘을 보니 더욱더 그랬다. 발끝에 묵직한 추가 수십 개는 더 매달린 듯했다.
“부관께선 저쪽에 계십니다.”
며칠간 카를로스와 아서가 함께한 것을 보아 놓고도 가브리엘은 큰 동요가 없었다. 멀찍이 서서 그를 기다리는 부관을 향해 눈짓을 할 여유까지 보였다. 물론 기사의 속내까지도 여유로울지는 의문이었다.
“밤까지 형님을 잘 모시도록.”
“예, 염려 마십시오.”
카를로스는 기사와 마주쳤던 시선을 끊어 냈다. 절로 눈매가 서늘해졌다. 형님에겐 기사의 존재를 눈감아 줄 것이라 말하였지만, 마주할 때마다 짜증이 치미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가지.”
“예, 전하.”
제시간에 나온 카를로스를 보고 부관이 반색했다. 카를로스는 부관을 지나쳐 앞서 걸었다. 평생 아무렇지 않게 반복했던 일과가 이제는 성가신 과제처럼 여겨지는 게 생경했다.
주종은 화려한 정원을 지나 적색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서가 있는 백색궁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아서와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단 사실을 인지하기 무섭게, 카를로스의 손끝이 불안한 듯 서서히 경련했다. 카를로스는 떨리는 손끝을 자연스레 말아 쥐었다.
“오셨습니까, 전하.”
먼저 집무실에 있던 부관 브라운이 카를로스를 보곤 예를 갖추었다. 브라운의 주름진 눈가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카를로스를 뒤따라 들어온 다른 부관 역시 그와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질리는 양의 서류는 집무실 탁상을 채우다 못해 바닥까지 켜켜이 쌓여 있었다. 카를로스의 하루 업무량이 어마어마했던 만큼 며칠간의 공백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브라운은 곧바로 카를로스에게 서류부터 건넸다.
“여기 가장 급한 안건부터 확인 부탁드립니다.”
“그러지.”
카를로스가 서류를 훑기 시작하자 두 부관이 눈에 띄게 안도했다. 그 모습을 본 카를로스는 내심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귀족으로 태어나 의무를 행하지 않는 자를 늘 한심하게 여겼건만 어느새 제가 그 꼴을 하고 있었다. 형님에게 이런 제 모습이 얼마나 못나 보였을지 짐작이 갔다.
돌이켜 보면 형님은 태자위에 있던 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제 의무를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황제가 되지 못할 바에야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아.」
황제가 아니면 싫다 하였던가. 형님에게 그 말을 할 자격이 있다는 걸 부정하진 못했다.
만일 형님이 황제의 관을 쓰고, 제국에서 가장 지고한 자리에 오른다면 어떠할까.
자연스레 머릿속에 황관을 쓴 아서의 모습이 그려졌다. 형님이 황위에 오른다면 분명 뛰어난 황제가 될 것이다. 어쩌면 대대로 이름을 남길 성군이 될지도 모르겠다.
카를로스는 문득 생각에 잠겼다.
“참, 전하. 폐후께서 전령을 보내셨습니다.”
그때 자리에서 서류 더미를 뒤적거리던 브라운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침묵을 비집고 들어온 부름에 짧은 상념이 끊겼다.
“이번엔 또 무슨 이유라고 하던가. 전과 같은 용무인가?”
“예, 아서 저하를 뵙기를 원한다 하십니다.”
“꾸준하기도 하군.”
황후는 시종 한 명과 함께 황도 외곽의 수도원에 보내졌다. 맨몸으로 탑에 유폐된 황제보다는 훨씬 양호한 처지였다. 오를레앙 대공의 협력으로 큰 희생 없이 변혁을 도모할 수 있었기에 그 점을 감안해 준 것이었다.
한데 지나치게 황후의 편의를 봐주었던 탓일까. 한동안 잠잠하나 싶던 폐후가 전령을 보낸 게 근래만 세 번째였다.
“일신상의 이유로 형님을 만나는 건 불가하다 전해. 즉위식까지 쭉 그럴 거라고.”
“예. 그렇게 전하겠사옵니다.”
브라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또한 폐후께서 직접 대면하는 게 불가하다면, 서신이라도 전해 주길 청하였습니다.”
탁상 위로 하얀색 서신이 놓였다. 이제는 무용해진 황후의 직인 대신 오를레앙 대공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내용물은 얼마든지 살펴보아도 무방하다고 하십니다. 먼저 하이브 공에게 확인을 부탁드렸더니, 아무 마력도 담기지 않은 평범한 종이라고 합니다. 이건 어찌 처리할까요?”
“음.”
카를로스가 봉인을 한 번에 뜯어냈다. 안을 살펴보아도 좋다는 건 거리낄 것이 없거나, 있어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단 뜻일 테다.
역시나 시원한 필체로 적힌 서신은 그다지 거슬리는 점이 없었다. 형님의 안부를 묻는 게 주된 내용이었는데, 걱정이 많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다는 둥의 말이 적혀 있었다. 길지 않은 편지는 네 안위를 확인할 수 있다면 밤잠을 편히 이룰 수 있을 것 같다는 말로 끝이 났다.
형님에게 쓴 편지라기보단 간접적으로 카를로스에게 제 사정을 봐주길 토로하는 내용에 더 가까웠다. 카를로스는 망설임 없이 서신을 두 갈래로 찢었다.
“태워.”
“예, 전하.”
너덜너덜해진 종이를 건네받은 부관이 집무실 한편의 벽난로에다 편지를 던졌다.
“폐후가 많이 한가한 듯하니, 적당한 소일거리라도 안겨 주도록 해.”
“예. 그리하겠습니다.”
카를로스는 버릇처럼 탁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의 의심을 살 것을 뻔히 알면서 폐후가 이런 쓸데없는 짓을 강행하는 데엔 필히 다른 목적이 있을 터였다. 형님의 즉위를 진즉 단념한 게 아니었나. 폐후가 무엇을 바라 이런 거슬리는 짓을 하는 건지 현재로선 짐작 가는 바가 없다.
“오를레앙가에 감시를 더 붙일까요?”
눈치 빠른 부관이 카를로스에게 물었다.
“현재 차출 가능한 인원이 몇이지?”
“임무를 마치고 귀환한 소수를 제외하곤 대부분 투입되어 있습니다.”
“테르 가문, 루소스 가문에 붙인 인원 절반씩을 오를레앙가로 보내.”
“예, 그리하겠습니다.”
기실 아서와 폐후를 감시하는 데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태자궁을 감시하는 인원은 넉넉하다 못해 과했고, 폐후가 유배된 수도원에 붙은 인원 또한 그만하면 충분했다.
거슬리는 건 역시 오를레앙 가문이었다. 혈족 중심으로 돌아가는 오를레앙가에 첩자를 침투시키는 데엔 아무래도 한계가 분명했다. 분명 그가 놓치고 마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혹, 폐후가 오를레앙가를 이용해 형님에게 접근하기라도 한다면….
순간 관자놀이가 지끈 울렸다. 카를로스는 욱신거리는 눈두덩이를 눌렀다.
“전하, 궁정의를 부를까요?”
부관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카를로스를 바라보았다.
“됐어.”
“허나, 전하. 번거로우시더라도 검진을 받아 보는 게 어떠신지요. 두통이 점점 잦아지는 게 염려스럽습니다.”
카를로스가 고개를 저었지만 부관은 재차 물었다. 생전 아픈 적이 없던 주군이 요새 들어 줄곧 두통을 앓고 있었다. 일시적인 증상일 거라 여겼던 것이 점점 더 잦아진 탓에 주변의 염려도 늘었다.
“이런 정도로 유난 떨 것 없다. 자리로 돌아가도록.”
카를로스는 손을 저어 부관을 물렸다. 부관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고 있으나, 원인이 몸이 아니라 정신에 있으니 궁정의가 온다 한들 헛걸음만 시킬 뿐이었다.
강박증 혹은 불안증. 정확한 명칭은 몰랐다. 다만 그의 정신에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건 명백했다.
언제부터였던가, 그의 머릿속에선 사소한 불안마저 일말의 가능성을 자양분 삼아 거대하게 발아하곤 했다. 특히나 형님과 떨어져 있을 때면 십중팔구 그와 같은 증상이 일어났다.
그건 스스로의 의지로 통제되는 부분이 아니었다. 누군가 무어라 말을 덧붙인다고 나아질 종류도 아니었다.
다행히 이 괴병의 해결법이 존재하기는 했다. 증상을 해소하는 방법은 허무할 만큼 간단했다. 바로 형님을 그의 시야 안에 두는 것.
형님이 근처에 있으면 모든 고통과 두려움, 불안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것이 병증의 유일한 치료법이었다.
그리고 그걸 달리 말하면 형님이 곁에 없는 때엔 그저 견뎌 내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라는 뜻이었다.
지나친 불안과 공포는 어느 날부턴 신체에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범인이라면 감당하지 못할 발작을 그는 오직 육신이 지닌 힘으로 버텨 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조여들면 잠깐 숨을 멈춘 채 기다렸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늪지대로 빠져들어 가는 듯한 때는 보다 힘을 주어 걷는 식으로 이겨 냈다.
천으로 가려진 몸엔 식은땀이 하나둘 매달리는데, 겉보기엔 평소와 다른 점이 없었다. 외관상 그리 티가 나지 않으니 다른 이가 보기엔 그저 간간이 두통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발작이 찾아드는 주기가 점차 짧아지고는 있으나 카를로스는 아직까지 버틸 만하다 생각했다. 펄떡이는 심장이 찢길 것 같은 고통을 토로해도 서류를 넘기는 손을 멈출 수준은 아니었다. 하물며 지금은 등을 기댈 의자가 있으니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
침실을 뒹굴거리던 아서는 불현듯 카를로스가 보고 싶어 백색궁을 빠져나왔다. 카를로스와 화해 비슷한 것도 했겠다, 이젠 내키는 대로 적색궁을 찾아갈 작정이었다.
카를로스의 궁에 도착했을 때 아서를 반기는 건 역시나 경계 어린 눈초리였다. 아서는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집무실까지 쭉 걸어 들어갔다. 뒤따라오던 가브리엘은 입구에 대기하고 있겠다며 물러났다.
아서는 반갑게 안으로 들어가다 끝도 없이 쌓인 서류를 보고는 멈칫했다. 카를로스가 며칠 자리를 비웠다고 집무실 꼴이 이렇게 달라진 모양이었다. 한구석에 벽처럼 쌓인 온갖 자료들이 끔찍해 아서는 조용히 혀를 찼다. 대놓고 질린 눈으로 안을 둘러보는데 카를로스가 아서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셨습니까, 형님.”
“…바빠 보이네. 많이.”
척 봐도 일이 많아 보이니 카를로스에게 바쁘냐고 물을 것도 없었다.
“예, 보다시피.”
다짜고짜 집무실로 찾아온 아서를 보고 카를로스는 그다지 반가운 표정이 아니었다. 서류를 보는 무표정한 얼굴은 평소보다 창백했다. 오전 동안 어지간히 일거리에 시달린 게 아닌 듯했다.
너무 불쑥 찾아왔나. 내심 카를로스의 환대를 기대했던 아서는 실망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점심이라도 같이 들까 싶어 찾아왔건만 어째 바쁜 사람을 붙들고 귀찮게 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아서가 시무룩한 걸음으로 카우치 한구석에 앉자 카를로스가 그제서야 용건을 물었다.
“…많이 바쁜가 봐. 점심을 들 시간도 없나?”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점심이라도 같이 할까 해서 왔는데.”
절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그래도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아서는 처음의 목적은 달성하고 갈 생각이었다.
“점심 말입니까?”
잠깐 사이 평소의 혈색을 되찾은 카를로스가 고개를 들었다. 초점이 흐릿하던 눈동자가 서서히 또렷해졌다. 아서의 방문이 조금은 반갑기는 한 것 같았다.
“좋아요. 드시고 싶은 게 있으십니까?”
처음 무성의하던 인사와 달리 카를로스는 곧바로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먹고 싶은 건 딱히 없어.”
아서는 식탐도 없고 가리는 음식도 별로 없었다. 위생이라면 모를까, 음식의 맛에 관해선 별달리 까탈스럽게 굴지 않았다. 카를로스도 그 사실을 알아 두 번은 묻지 않았다.
“그럼 저와 같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래, 거창한 건 됐으니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걸로 해.”
“예. 간단한 오찬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응.”
아서는 짧은 대화로 금방 기운을 되찾았다. 팔짱을 끼고 파우치에 등을 기대앉은 자세가 제집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거기 계속 계실 겁니까?”
“왜? 안 돼?”
“…안 될 건 없습니다만.”
“그럼 하던 일 마저 해. 난 신경 쓰지 말고.”
편안히 자세를 잡은 아서는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카를로스를 관찰했다. 침실이 아닌 집무실에서 마주한 카를로스는 또 다르게 구경할 맛이 났다. 보는 눈이 있어 멀찍이 떨어져서 쳐다만 봐야 하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침실에만 있는 게 많이 무료하십니까?”
카를로스는 아서가 지루함을 못 견뎌 여기까지 온 거라 생각하고 물었다. 아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궁에서 뒹굴거리며 노는 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아서는 지금의 한가하고 심심한 생활이 적성에 잘 맞았다.
느긋하게 정원을 거닐다 벤치에 누워 낮잠을 자고, 황궁 도서관의 책을 빌려 여유로이 독서도 즐겼다. 몸이 근질거린다 싶으면 백색궁에 딸린 연무장에서 가브리엘과 땀이 나도록 대련했다.
여행이나 모험을 귀찮아하는 아서는 굳이 황성 바깥으로 나갈 필요를 못 느꼈다. 황성만 해도 소도시만 한 규모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니 굳이 문제점을 꼽는다면 딱 하나밖에 없었다.
“답답하더라도 조금만 참으세요. 반려식 이후엔 좀 더 자유롭게 다닐 수 있을 겁니다.”
그래, 반려식. 다른 무엇보다 이 반려식이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즉위식과 함께 반려식의 날짜가 잡힌 지도 꽤 오래되었다. 앞으로 제 미래를 좌지우지할 혼인이 지금으로부터 채 두 달도 남지 않았다. 아서로선 가능한 한 빨리 이 문제에 대해 결판을 짓고 싶었다.
아서는 카우치에 앉아 오찬이 준비되기를 기다렸다. 사람은 배가 부르면 관대해지기 마련이니 카를로스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지켜볼 계획이었다.
어깨를 나란히 한 형제는 여유롭게 오찬장으로 향했다.
상황은 여러모로 나쁘지 않았다. 날은 근래 들어 가장 온화했고, 요리사가 한껏 공을 들인 음식도 훌륭했다. 식사 시간 동안 많은 대화가 오고 간 건 아니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부드러웠다.
마침내 최적의 타이밍이 찾아왔을 때, 아서는 조심스레 운을 뗐다.
“카를로스.”
“예.”
“돌려 말하지 않을게.”
분명 카를로스가 반려식 얘기를 반기진 않을 터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서가 이어 말했다.
“…반려식 일정에 관해서 얘기를 나누고 싶어.”
예상한 대로, 반려식을 언급하기 무섭게 카를로스의 얼굴 위로 표정이 사라졌다. 지난 일주일 동안도 이런 식이었던 터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만은 아서도 물러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나더러 혼인의 당사자라 한 건 너야. 언제까지나 이야기하는 걸 미룰 순 없지 않나.”
카를로스가 식사를 멈추고 아서를 바라보았다. 팔짱을 끼고 빤히 바라보던 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말해 보세요.”
“가능하다면 식을 조금 보류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말하란다고 너무 냉큼 말해 버린 건지, 온화하던 다이닝 룸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게 얼어붙었다. 카를로스가 천천히 잔을 들어 메마른 입술을 적셨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함께 보낸 며칠의 시간이 아무런 효용이 없던 게 아닌 듯, 카를로스는 화를 내는 대신 아서에게 물었다. 물론 언성을 높이지 않을 뿐 바라보는 시선은 서늘했다. 납득이 갈 만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냥은 넘어가지 않겠다는 눈이다.
그 눈빛이 어찌나 유혹적이던지, 아서는 빈정대며 도발하고 싶은 충동을 힘겹게 참아 냈다. 기껏 화해까지 해 놓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짓을 하고 싶진 않았다. 또다시 카를로스가 그를 피해 다니게 되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사양하고 싶었다.
“그 이유를 말하기 전에, 카를로스. 내가 먼저 하나 물어봐도 될까.”
“예. 그러세요.”
“늘 네게 묻고 싶었던 게 하나 있었지. 나를 반려로 들이려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
카를로스가 짧게 동요했다.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던 아서는 카를로스에게 답할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설마 나를 진정으로 네 인생의 반려로 생각해서는 아니겠지.”
“…….”
“아니면, 나를 사랑하기라도 해서?”
“…그건.”
카를로스의 표정이 무겁게 굳었다. 아서는 그런 카를로스를 보고 비소를 흘렸다.
“그럴 리가 있나.”
매정하리만큼 차갑게 단정하는 아서의 모습에 카를로스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는 무엇이든 말하고자 입을 달싹였으나 결국엔 어떤 답도 하지 못했다.
“너는 단지, 나를 네 옆에 묶어 두고 싶은 게 아니냐.”
“…….”
“그렇지?”
카를로스가 아무런 답을 하지 못하자, 아서는 침묵을 무언의 긍정으로 여겼다. 확신에 찬 붉은 눈동자가 카를로스를 가차 없이 후벼팠다.
“그렇다면 또 하나 묻지.”
“…뭐를,”
“내가 이곳에서 달아나지만 않는다면, 그렇기만 하다면… 굳이 반려식을 강행할 이유가 없는 게 아닌가?”
제 말이 맞지 않냐는 듯 아서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황도는 내가 태어나 평생을 자라 온 곳이다. 믿든 말든, 나는 이곳을 떠날 마음이 없어. 네가 나를 내쫓아 버리지 않는 한 말이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쪽에서 먼저 형님을 보내 줄 일은 없을 겁니다.”
반사적으로 나온 카를로스의 답에 아서는 미소 지었다.
“그럼 문제없네.”
카를로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형님이 단언한 것처럼 그렇게 간편히 결론 지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은 언뜻 달콤하게 들렸다. 그렇기에 더더욱 신뢰할 수 없었다.
“칼, 지금 당장 답을 달라 강요하진 않겠어.”
“…예.”
“다만 생각해 보길 바라. 지난 며칠간의 우리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십여 년 전을 제외하면 우리 둘 사이에 이런 평온한 시간이 있었던가를.”
“……처음이었죠.”
“만일 반려식을 강행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다투기 시작하겠지. 서로가 원하는 게 확연히 다르니 말이야.”
“…….”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그런 것이던가.”
숫제 협박이나 다름없는 말을 해놓고 아서는 악의 없는 얼굴로 웃었다.
평상시 자주 보기 힘든 아서의 미소를 보고도 카를로스는 마주 웃지 못했다. 이 말을 하려고 일주일간 그리 다정하게 굴었던 거였나, 자연스레 그러한 의구심이 들었다.
아서가 그를 밀어내지 않았었던 며칠의 시간은 카를로스에게는 가뭄 끝에 맛본 빗줄기와도 같았다. 아서는 그 꿈같은 시간을 볼모로 잡고서 그와의 협상을 시도하고 있었다.
“형님은….”
카를로스는 마치 짧은 단꿈에서 강제로 떠밀려 나온 기분이었다.
“…끝까지 형님답게 구시는군요. 이 같은 요구를 하려고 그렇게 갑작스레 태도를 바꿨던 겁니까?”
상처 입은 눈동자가 햇볕 아래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그럼?”
“…그냥 지겨워져서.”
“무엇이 말입니까?”
카를로스의 굳은 얼굴 위로 체념과 불안, 그리고 미약한 기대가 뒤섞였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평생을 너를 질투하고 미워했다. 너 또한 나를 원망하였으며, 오늘날에 와선 우리가 서로에게 지은 죄 또한 무수히 많지. 그런데 한 날은 문득 그런 의문이 들더군.”
“…….”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아서의 마지막 말이 마치 목숨을 끊겠다는 것처럼 들려, 카를로스가 흠칫 손을 떨었다. 기다란 테이블이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지 않았더라면 참지 못하고 형님을 붙잡았을 것이다.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목숨을 걸고 협박하려는 거라면-.”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아서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은 그거야. 단지 내 쪽에서 먼저 악순환의 고리를 끊겠다는 거다.”
“…….”
아서의 의중이 무엇인지 카를로스도 조금씩 감을 잡기 시작했다.
“우리도 평범한 형제, 아니…. 평범한 형제는 더는 무리겠군. 그저 이제 서로를 그만 할퀴어 대자 이거야. 과거 우리에게 있었던 일은 전부 묻어 두고서.”
십여 년간 이어 온 해묵은 다툼을 이제는 그만두자고, 아서가 그에게 화해의 손길을 건네고 있었다.
카를로스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었다. 분명 기뻐해야 할 순간일진대, 마냥 반가운 마음만 들지는 않았다. 과거의 그가 애타게 바랐던 순간을 맞닥뜨렸으나 오히려 등허리가 차갑게 굳어 버린 듯했다.
“넌 어때. 어떻게 생각해.”
싫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고 올라왔으나 카를로스는 차마 내뱉지 못했다. 모든 걸 내려놓은 듯 편안해 보이는 아서에게선 카를로스에 대한 증오나 원망은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초연해 보이는 아서의 모습이 낯설었다. 꼭 그가 알던 아서가 어디론가 훌쩍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그는 여태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데, 그의 형제는 어느새 앞으로 한 발짝 걸어 나갈 각오를 했다. 반겨 마땅한 순간에 카를로스는 초조함을 느꼈다.
“형님은….”
결국 참지 못해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제 죄를 언급해 봤자 좋을 것이 없단 걸 알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원망스럽지 않습니까?”
“무엇이.”
“형님을 겁간하고, 감금하고, 황제를 끌어내려 형님의 지위를 강탈했는데도.”
카를로스는 억눌린 음성으로 제 죄를 하나하나 읊었다.
“원망 안 해.”
아서의 답은 예상보다 빠르고, 담백하게 돌아왔다.
“마냥 아무렇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그래, 이제는 괜찮아.”
“…괜찮다고?”
“어느 정도 내가 자처한 바도 있으니까.”
사실 아서는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그 과정을 유도하며 즐기기까지 했지만, 진실을 모르는 카를로스로선 믿기 힘든 대답이었다. 불신 가득한 침묵이 이어지자 아서는 연이어 말을 덧붙였다.
“믿기 힘들겠지만 정말이야.”
“…….”
“내가 하는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을 맹세하지.”
제가 뱉은 말이 모두 진실이라는 양 아서가 말했다.
카를로스의 목울대가 짧게 일렁였다. 망연한 시선이 허공을 비추는 빛을 뒤쫓았다. 믿고 싶다. 그러나 간절히 믿고 싶은 만큼 믿을 수가 없었다.
하나 그렇다 하여 못 들은 말로 치부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이것이 형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미는 손길일지 모른다는 우려와, 짧은 단꿈을 끝으로 또다시 원래 관계로 돌아가게 될 거란 불안. 어쩌면 앞으로 무언가 달라질지도 모른단 한 줄기 기대……. 온갖 것들이 그를 붙잡고 하나의 방향으로 끌어당겼다.
아서는 결코 카를로스를 재촉하지 않았다. 거부할 수 없는 미끼를 던지고선 숨죽인 채 기다릴 따름이었다.
고민은 무의미했다. 그의 모든 죄를 없던 일로 만들어 주겠단 말은, 결단코 믿기지 않으면서 동시에 뿌리칠 수 없을 만큼 유혹적이었다. 형님 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저토록 여유로운 것일 테다.
반려식과 아서의 용서를 저울질한다면 그는 단연 후자를 택할 것이다. 반려식을 보류한다 하여 영영 치를 수 없게 되는 건 아니었으므로.
“형님이…….”
하여 마침내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열렸다.
“진정, 원하는 게 그런 거라면.”
“원해.”
아서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좋습니다. 형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때로는 거짓인 걸 아는데도 모르는 체 눈을 감아 버리는 순간이 있다. 형제의 시선이 교차했다. 불안한 듯 흔들리던 검붉은 홍채 속엔 어느새 아서만이 전부였다.
***
그 뒤로는 많은 게 달라졌다. 아서는 카를로스가 보고 싶으면 고민하지 않고 곧바로 적색궁의 집무실로 쳐들어갔다. 제 궁마냥 눌러앉아 뻔뻔하게 끼니를 때우고 간 건 덤이다.
그 횟수가 어찌나 잦았는지, 처음엔 의심스러워하며 용건을 묻던 카를로스도 나중엔 아서의 잦은 방문을 그러려니 생각하고 말았다.
두 사람은 변한 관계에 서서히 적응해 갔다. 가장 크게 달라진 건 스킨십에 거리낌이 없어졌다는 점이다. 얼핏 형제는 다정한 연인 같아 보이기도 했다. 전처럼 날카로운 말로 상대를 상처 입히는 일도 줄었다.
결론적으로는 모두에게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형제가 서로 날을 세우지 않으니 하루하루가 조용히 흘러갔고, 신경을 곤두세울 일이 없었다.
다소 촉박한 감이 있던 즉위식 준비도 큰 잡음 없이 진행되었다. 아마 그 모습 그대로 쭉 평온하게 지냈더라면 아무런 갈등이 일어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인생이 늘 그렇게 동화처럼 평화로운 결말을 맞이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기엔 그들 사이에 너무나 큰 걸림돌이 존재했다.
다름 아닌, 아서 그 자신. 더 자세히 말하면 충동적이고 제멋대로인 그의 성품. 그게 바로 형제 사이의 가장 크나큰 장애물이라 할 수 있었다.
***
아직도 아서는 그때를 회상하면 제 머리를 내려치고 싶었다.
카를로스와 어설픈 화해를 마친 지 십여 일째 된 날. 그러니까 즉위식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던 날이었다. 제 비극의 시발점이 되었던 날이 바로 그때였다.
「전하.」
그날은 웬일로 마법사 하이브가 백색궁으로 찾아왔었다. 아, 정확히 말하자면 하이브가 찾아온 건 아니다.
그날의 방문자는 하이브가 아닌 하이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체리였다. 왕국에서 볼모로 끌려왔던 쌍둥이 중 남동생 쪽 말이다.
체리는 하이브의 말투를 흉내 내어 말했다.
「아서 전하, 카를로스 전하의 전언이 있어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웬일로 카를로스가 직접 안 오고 그대를 보냈군.」
「…예, 그렇게 되었사옵니다.」
아서는 하이브와 대화를 나눈 지 얼마 안 되어 제 앞에 있는 이가 하이브가 아니란 사실을 알아차렸는데, 몹시 놀라 그를 제압했냐면 그렇진 않았다.
간만에 맞이한 새로운 이벤트에 아서는 그저 신이 났다. 그간 누렸던 느긋한 백수 생활이 만족스러웠던 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제 발로 굴러들어 온 재미를 걷어찰 생각은 없었다.
아서에겐 불운하게도, 그날 체리는 아서의 기대를 정확히 충족시켰다.
침실에 아서와 단둘이 남자마자 체리는 곧장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목에 걸려 있던 마법사의 아티팩트를 벗어 제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본모습을 드러낸 제레미는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서 있는 남자였다. 얼굴엔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었으며 키는 훌쩍 자라 아서와 눈높이가 비슷했다.
「전하. 처음으로 제대로 인사드립니다. 저는 체리가 아닌, 제레미라고 하옵니다.」
이어서 제레미는 침통한 목소리로 아서에게 읍소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털어놓은 사연은 아서가 이미 알고 있던 것과 같았다.
진짜 쌍둥이는 왕국에 억류되어 있다는 것. 남매가 그들의 동생들을 대신하여 이 자리에 왔으며, 카를로스를 암살하기 위해 보내졌다는 것. 그 지령은 두 사람의 힘으로 수행하기엔 불가능하였다는 것까지.
「…왕국에선 수십 일 이내에 아무런 성과를 보이지 않으면, 쌍둥이 중 한 명의 목을 베겠다 통보하였습니다.」
실상 왕국의 통보는 남매에게 목숨을 버리라는 의미와 같았다.
만일 목숨을 바치는 걸로 쌍둥이 동생들을 구해 낼 수 있다면 남매는 얼마든지 그리했을 테지만 그들은 알았다. 그들의 죽음 이후, 쌍둥이가 그들이 밟았던 전철을 그대로 밟으리란 사실을 말이다.
남매는 필사적으로 방법을 강구했다. 그리고 끝내 제 동생들을 구출해 내는 데에 도움을 줄 인물을 찾아냈다.
원작에선 그게 마법사 하이브였다. 재미있게도 이번에 남매는 그들의 조력자로 아서를 택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막막한 처지일 때, 전하께서 저희에게 마음을 써 주신 게 떠올랐습니다. 도움을 청할 곳이라곤 태자 전하만이 유일하다 생각했어요.」
사실 남매가 볼모로 끌려온 당시 그들을 돌본 건 아서가 아닌 아서의 모습을 한 마법사 하이브였지만, 아서는 굳이 그들의 오해를 정정해 주지 않았다.
「하이브 공이 알면 꽤나 놀라겠군.」
「하이브 님께서 많은 배려를 해 주신 건 사실입니다. 하나 전하의 탄생연 전후로 어딘가 저희를 감시하는 듯 보였던 터라….」
언젠가 아서가 마법사에게 쌍둥이를 잘 지켜보라 전하였던 게, 남매가 마법사를 불신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모양이다. 아서는 조금 신기하고 놀라운 기분이 되었다.
「전하께 무작정 도움을 바라는 건 아닙니다.」
제레미는 아서의 황성 탈출을 돕는 대신, 그 대가로 아서가 제 동생들을 구출하는 것을 도와주기를 원했다.
아서는 전혀 알지 못한 사이에 그들은 이미 아서를 탈출시킬 방법을 찾아 두었다. 탈출 루트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마법사의 연구실에 있는 숨겨진 포탈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겉보기엔 영락없이 마법사 하이브와 동행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 그곳까지 가는 것도 문제가 없었다. 포탈이 연결된 장소가 하이브의 저택이라는 점이 좀 걸렸지만, 세 명이서 하이브 한 명을 제압 못 할까 싶었다.
제레미의 설명으론 황도 남쪽에 위치한 카딘 숲에 탈출을 위한 대량의 마법 스크롤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 그 지점까지만 도착하면 빠르게 제국을 벗어날 수 있단 것이다.
남매의 동생들은 왕국과 제국의 국경선이 맞닿은 부근에 억류되어 있었다. 거기서 아서가 할 일 역시 간단했다. 남매가 쌍둥이를 빼내는 동안 시간을 벌어 주는 것이었다. 물론 말이 쉽지, 마스터급의 기사는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글쎄, 어찌 들어도 내가 손해 보는 조건이군. 무엇보다 난 굳이 귀찮게 황성을 나갈 생각이 없거든.」
용케 남매가 아서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준비를 다 갖추어 두긴 했다. 하지만 나들이 한 번을 하겠다고 국경까지 나가는 건 영 귀찮았다.
아서가 그다지 내키지 않아 하는 눈치이자 제레미가 재차 읍소했다.
「목숨을 바칠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섶을 짊어지고 불길로 뛰어들라 하여도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그곳에 갇혀 있는 동생들만 살릴 수 있다면…. 기꺼이 전하의 장기말이 되어 보잘것없는 한목숨 전부를 바치겠습니다.」
「흠, 목숨을 바치겠다고?」
「예. 마나의 맹세를 원하신다면 당장 그리하겠사옵니다.」
맹세를 바친다는 말에 아서가 크게 솔깃했다.
「뭐…. 좋아. 그런 조건이라면 나쁘지 않지. 쌍둥이를 구하는 것을 도울 테니 너는 내게 맹세를 바쳐라.」
아서는 사양 한 번 하지 않고 덥석 제안을 받아들였다. 긴장한 채로 떨고 있던 제레미는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나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는지 이윽고 빠르게 조건부 맹세를 마쳤다. 아서가 제 동생들을 구출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면 평생 아서의 수족이 되겠다고.
아서로선 손해 볼 것 없는 거래였다. 마법사와 연결시켜 그쪽에서 알아서 해결하도록 만들면, 아서는 손도 안 쓰고 사람 하나를 얻을 수 있다. 어쨌든 그것도 도움은 도움이니 맹세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셈이다.
아서가 해야 할 일은 얼마 없었다. 이대로 슬그머니 나가 마법사와 남매 사이를 잘 중재해 준 뒤, 생색이나 실컷 부리면 된다. 그러고 나선 한나절 정도 바깥나들이를 즐길 생각이었다. 남매는 아서의 몰락을 적극적으로 부추겼던 자들이니 이 정도면 아주 관대한 처사라 할 수 있겠다.
「가자. 어서 안내해.」
「황송하옵니다, 전하.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카를로스와의 관계도 전보다 많이 회복되었겠다, 아서는 잠깐 외출하는 정도는 문제없으리라 여겼다.
물론 카를로스에게 직접 물으면 허락해 주지 않을지도 모르니 먼저 말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혹여나 카를로스나 가브리엘이 놀랄까 싶어 ‘잠시 출타하였다 돌아올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있어.’라고 적은 쪽지를 침실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유유히 백색궁을 떠났다.
그 뒷감당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
아서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짧게 혀를 찼다.
“읍, 으읍…!”
마냥 순한 줄로만 알았더니, 의자에 팔다리가 결박된 채 재갈까지 문 마법사는 온몸으로 화를 표하는 중이었다. 강아지같이 축 처져 있던 눈매가 처음으로 살기와 비슷한 것을 드러냈다.
하긴 그도 그럴 법하다. 다짜고짜 제 저택의 포탈을 타고 넘어와 집주인을 제압해 버린 셈이니 세상 어느 누가 허허실실 웃고만 있을까 싶었다.
“일단 진정을 좀 시켜야 할 것 같군. 제레미, 이리로 와 보겠나.”
“예, 전하.”
아서는 제게 다가온 제레미를 끌어 내려 바닥에 앉혔다. 무릎까지 꿇게 한 뒤 서로를 마주 보게 하자 하이브가 무슨 속셈이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이브. 눈치껏 체리와 제레미가 같은 사람인지는 알겠지.”
화난 얼굴로 하이브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신감을 느끼는 건 이해하겠지만, 우선 한 번 자세한 사정을 들어 보겠나.”
“…….”
무슨 속셈인지 모르나 절대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겠다, 마법사의 눈은 그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물론 저 결심은 그리 오래가진 못할 터였다.
아서는 마법사가 어떤 지점에서 약해지는지 알았다. 하이브는 약한 것, 불쌍한 것, 어린 것에 아주 취약했다. 어찌 보면 가브리엘보다 더한 지경이었다.
몸을 굽힌 아서가 제레미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제레미, 아까 내게 했던 것과 똑같이 설명해. 눈물, 자세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말이지.”
“예? 하지만….”
“나를 믿고, 어서.”
“…예, 전하.”
제레미는 아서에게 보였던 것처럼 공손하게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마법사에게 제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마법사님. 저는…….”
아서를 찾아오기 전 여러 번 연습을 했었는지 제레미의 말솜씨는 나쁘지 않았다. 아서의 앞에서 진심으로 눈물을 보였던 것과 달리 지금은 다소 작위적인 모습이라는 게 조금 아쉽긴 했다.
마법사에게 제압되어 있다 풀려난 메리, 아니 엠마도 눈치 빠르게 제레미의 옆으로 와 무릎을 꿇었다.
엠마는 아직까지 어린아이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운이 좋았다. 그 덕에 앳된 얼굴의 청년과 어린아이가 무릎을 꿇은 채 하이브에게 용서와 이해를 구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마법사 하이브는 도무지 상황이 어찌 흘러가는지 알 수 없어 눈을 끔뻑거렸다.
제가 나름 아꼈던 아이들이 사연을 토로하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자, 그는 반사적으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긴 이야기 끝에 점점 하이브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하이브는 남매의 말을 경청했다. 제가 어릴 적부터 보았던 쌍둥이가 죽을지도 모른단 말엔 몸을 파르르 떨며 경악하기도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서는 속으로 함께 경악했다.
저런 호구 같은…….
마음이 여린 건지 바보 같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마법사가 원래 약자에게 관대한 편인 건 익히 알았다. 한데 이런 상황에서조차 무한한 동정심이 발휘될 줄은 몰랐다. 아서는 과거 하이브가 제 부탁 하나를 들어주기로 한 일을 언급할 계획이었지만, 그럴 필요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사정이 있었다니…. 내가 몰라주어 미안하구나.”
어느새 제압에서 풀려난 마법사가 소매로 눈가를 찍어 내렸다. 하이브는 아서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흔쾌히 남매를 돕기로 약조했다. 그 대가로 더는 카를로스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단 조건을 내민 것은 물론이었다. 그런 조건을 걸 만한 정신은 있었나 보다.
“그대의 마음씨는 정말…. 비단결 같네.”
아서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내심 자신에게도 이런 이용해 먹기 좋은 호구… 가 아니라 이처럼 쓸 만한 수하가 하나 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럼 그대를 믿고, 나는 이만 돌아가 보겠네.”
“예, 전하.”
상황이 빠르게 마무리가 되었으니, 이제 아서는 잠깐 바깥나들이를 즐겨 볼 생각이었다.
“우선 로브를 하나 빌렸으면 하는데.”
“예? 로브를 말입니까?”
“그래. 얼마만의 출타인데 이대로 돌아가긴 아쉽지 않은가.”
아서의 말에 하이브가 크게 당황했다. 하이브는 아서가 어떤 경로로 이곳까지 왔는지를 상기했다.
“전하. 혹 전하께서 출타하신 것을, 카를로스 전하께선 아시는지요…?”
“알지. 설마 내가 카를로스에게 아무 언질도 하지 않고 나왔겠나.”
“아아….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지만…. 그분께서 쉽사리 출타를 허락하진 않으셨을 텐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불안이 가득했다. 카를로스가 아서에게 품은 집착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익히 보아 왔던 탓이다.
“…허락?”
순간 아서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대의 말은, 내가 카를로스에게 허락을 받아야 황성을 나올 수 있단 뜻인가?”
“흡. 아니, 그것이.”
뒤늦게 제 말실수를 깨달은 마법사가 더듬거리며 변명을 했지만 아서가 먼저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대의 다정함도 나한테만은 예외인가 보군. 수개월 동안 갇혀 산 내 심기는 안중에도 없는 걸 보면 말이야.”
“아, 그, 전하. 송구하옵니다. 그런 게 절대 아니오라…….”
하이브의 처진 눈꼬리가 당황하여 바들바들 떨렸다. 아서는 짐짓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됐네. 그대는 카를로스의 신하이니 그럴 만도 하지.”
“그게, 아…….”
“무얼 우려하는지 몰라도 걱정할 것 없어. 오늘 안에 제 발로 얌전히 돌아갈 생각이니 말이야.”
“아…….”
벌어진 입으로 하이브의 혼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이만 가 봐야겠군. 어서 로브를 가져다주겠나.”
“아, 예, 예…!”
넋이 나간 하이브가 허겁지겁 움직여 제 로브 하나를 가져왔다. 하이브는 이게 잘 어울리실 것 같다며 척 봐도 값비싸 보이는 새하얀 로브를 건넸다.
아서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어디 가서 나 귀족이요 자랑하고 다닐 일 있나. 결국 마법사를 한차례 타박하여 눈에 띄지 않는 검은색 로브를 얻어 냈다.
풀이 죽은 마법사는 로브에 인식 방해 마법이 걸려 있단 설명을 덧붙였다. 그제야 아서는 흡족한 얼굴로 건네받은 로브를 걸쳤다.
“일이 끝날 때까지 남매를 잘 부탁하겠네.”
“예, 걱정 마십시오. 전하.”
“공을 믿고 기다리겠어.”
아서가 선심 쓰듯 하이브를 격려했다.
“예, 이쪽은 우려 마십시오….”
하이브는 마지막까지 이래도 되는가 싶어 아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곧 한숨을 푹 내쉬며 체념했다.
어차피 마법사는 근접전에 약했다. 그의 능력으론 마음먹고 도망치는 아서를 붙잡아 둘 수 없었다. 좀 전처럼 제압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럼 또 보지.”
짧은 인사를 끝으로 아서는 등을 돌려 마법사의 저택을 빠져나왔다.
***
삽시간에 제 키의 두 배나 되는 담을 훌쩍 뛰어넘은 아서가 속도를 높여 달리기 시작했다.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이 얼마만의 자유인지. 귓가를 스치는 바람이 상쾌했다.
간만의 외출에 들뜬 아서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언제 따라붙을지 모르는 추격을 의식한 것이기도 했다. 적어도 해가 질 때까지는 일탈을 즐기고 싶었다.
그는 귀족들이 주로 다니는 상점가를 지나치며 무작정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제국의 중심부라는 위상에 걸맞게 황도는 어딜 가든 인파로 북적거렸다.
시장 거리는 호객과 흥정으로 떠들썩했다. 황성도 수많은 사용인들이 들락거렸지만 역시 이곳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황제가 인간은 덜돼도 통치자로서는 나쁘지 않았던지, 거리는 깔끔하게 닦여 있었고 지나가는 이들의 얼굴색도 밝았다.
온갖 새로운 소리와 냄새가 아서의 감각을 두드렸다. 근엄한 척 구는 귀족에게 진력이 나 있던 만큼 아서는 금세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에 빠져들었다.
홀로 거리를 걷고 있을 뿐인데 자연스레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황성 안이었다면 보는 눈 때문에 넘치는 흥을 조금이나마 눌렀을 것이나, 여기선 그럴 필요가 없었다.
대놓고 콧노래를 부르며 지나다녀도 행인들이 딱히 아서를 신경 쓰지 않았다. 로브에 걸려 있는 인식 마법이 제법 쓸 만했다.
“리엘을 데려왔으면 이런 건 어림도 없었겠군.”
아서는 정체 모를 꼬치를 우물거리며 걸었다. 맛은 생각보다 무난했는데 생긴 걸로는 도통 무슨 음식인지 잘 가늠이 안 됐다. 아마 가브리엘이 옆에서 보았다면 정색을 하고 빼앗았을 테다.
한량처럼 거리를 누비며 처음 보는 음식이 보이면 하나씩 손에 들었다. 얼마냐고 물을 것도 없었다. 마법사에게 로브와 함께 덤으로 얻어 낸 금화를 건네고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어느새 양손에 음식이 가득했다. 아서는 대중없이 내키는 대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소규모 공연을 관람한다던가, 위생 따위 내버린 듯한 음식을 먹는 등 별거 아닌 일을 하는데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부와 권력을 탯줄로 얻어 낸 대가로, 아서의 주변엔 늘 보호 혹은 감시가 뒤따랐다. 제삼자의 눈이 따라붙지 않는 게 얼마나 자유로운 기분인지 그는 새삼스레 깨닫는 중이었다.
시장 골목은 좁으면 좁은 대로 또 구경하는 재미가 좋았다. 처음부터 황도로 쓰일 것을 염두에 두고 지은 도시답게 구획이 잘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수도 어디에서든 우뚝 솟은 황성이 보이니 미아가 될 염려는 없을 것 같았다.
***
그리고 그 시각, 자그마한 쪽지를 손에 든 카를로스는 속이 텅 비어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잠시 출타하였다 돌아올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있어.’
쪽지에는 그런 말이 적혀 있었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는 그 안에 숨겨진 의미라도 파악하려는 것처럼 단 한 줄에 불과한 문장을 읽고 또 읽기를 반복했다.
물론 무의미한 시도였다. 아무리 쪽지를 샅샅이 살펴보아도 그 안에는 아무런 메시지가 담겨 있지 않았다.
종이를 더 살펴보길 포기한 카를로스는 이번엔 방 안을 샅샅이 훑었다.
침실은 비어 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곁에 있던 형님은 그 자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 쪽지 하나만을 남기고 사라진 지 오래였다.
혹시 누군가의 겁박에 의해 끌려간 것은 아닐까. 납치 따위의 가능성을 가늠해 보았지만 그럴 확률이 극히 낮은 것을 알았다.
쪽지는 아서의 필체로 적혀 있었고, 짧은 문장엔 아무런 숨은 메시지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침구가 깨끗했다. 만일 형님이 반항을 하였다면 어떤 식으로든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협박을 당했을 리도 없다. 아서의 양친, 아서의 기사. 그들 전부가 카를로스의 감시하에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남은 결론은 단 하나였다.
누구의 개입 혹은 회유가 있었든 없었든 간에 형님이 제 발로, 자신의 의지로 이곳에서 걸어 나갔다는 것. 이곳에 카를로스만을 남겨 두고 달아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형님.”
카를로스는 목이 졸린 사람처럼 간신히 두 글자를 내뱉었다. 멀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는 부름이면서, 흡사 원수의 이름을 읊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또다시 예의 그 지독한 두통이 일었다. 그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관자놀이로 서늘한 칼날이 파고드는 듯했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빙글 돌았다. 카를로스는 제가 무심결에 호흡을 멈추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뱉기를 반복했다. 넋이 나가 기능을 반쯤 상실해 버린 머리통으로도 생각이란 걸 이어 가야 했다.
구겨진 쪽지를 손에 쥔 채 카를로스는 몸을 돌렸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침실 문을 여는 즉시 반듯하게 선 기사가 보였다.
아서의 부재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게 가브리엘이었다. 카를로스는 아서가 기사에게 무언가 언질을 하였으리라, 그렇기에 이토록 태연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라 짐작했다.
“가브리엘.”
간만에 입에 담는 이름이었다.
“형님의 쪽지를 네가 처음으로 발견하였다 했지.”
“맞아. 그랬지.”
“그런데도 여유로워 보여.”
카를로스는 돌려 말하지 않고 물었다.
“형님이 네게는 무언가 언질을 하였던가?”
“…아니, 그럴 리가.”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황금안이 카를로스에게로 옮겨졌다. 표정은 평소와 같으나 한 겹 들춰 보면 초점이 나간 듯한 눈동자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만 같았다.
가브리엘과 눈이 마주친 즉시 카를로스는 곧바로 제 짐작을 철회했다. 형님은 아무에게도, 심지어 가브리엘에게조차 아무 언질 없이 황성을 나갔다.
“전하께선 내게도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으셨어. 덕분에 썩 여유롭진 않지만….”
가브리엘이 가벼운 미소를 그렸다. 다분히 형식적인 미소였다.
“얌전히 기다리는 중이야.”
“…기다려, 형님을?”
“전하께서 돌아온다 약조하셨으니,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모호한 어조였다. 정말로 아서를 믿는 건지, 다른 선택지가 없어 그리하기로 한 건지 가브리엘의 말은 이중적이게 들렸다.
카를로스는 터져 나오는 조소를 감추지 않았다.
“형님을 믿는다고….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지. 그는 일말의 가능성도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단정내렸다.
애정과 믿음은 별개의 부류에 속했다. 아서가 그의 안에서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카를로스는 아서를 믿지 않았다.
과거의 앙금은 잊을 것이라고, 그를 용서한다고, 화해를 원한다고……. 그 다디단 말을 어쩌면 믿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하나 결과적으로 그는 아서를 믿는 데에 실패했다.
“그럼 넌 거기 있어. 나는 형님을 찾아 나설 테니….”
더 이상 가브리엘과 말을 섞는 건 시간 낭비였다. 마법사와 함께 사라졌단 보고를 들었으니 그곳에서부터 추적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카를로스는 가브리엘에게서 등을 돌렸다.
“카를로스, 잠깐.”
그러나 그가 미처 걸음을 떼기 전, 가브리엘에게 어깨를 붙잡혔다. 반쯤 몸을 돌린 카를로스는 대답 대신 흘끗 시선으로만 반응했다.
가브리엘은 카를로스를 위아래로 훑고는 조금 놀란 눈을 했다.
“너….”
잠시 말을 고르던 기사가 낮게 물었다.
“…괜찮은 거 맞아?”
얼핏 보기엔 카를로스가 평소와 같아 그만 못 알아차리고 지나칠 뻔했다.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을 때는 몰랐던 그의 상태가 뒷모습을 보자 눈에 띄었다. 혈색을 잃은 목덜미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목선을 타고 곤두선 핏줄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게 육안으로 보였다.
살짝 건드렸던 어깨는 천 위로 잠깐 스쳤을 뿐인데 열기가 느껴졌다. 거기에다가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뻣뻣해진 목 근육까지. 누가 보아도 카를로스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오래 보았던 사이였으니 본래라면 카를로스와 말을 섞자마자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제 사정에 정신이 팔려 뒤늦게 발견하고 말았다. 가브리엘 자신마저 동요한 상황에 카를로스는 훨씬 더 큰 충격을 받았을 게 당연하건만.
“고작 그 소리를 하려고 나를 붙잡았나. 하여튼 그 오지랖은 여전하군.”
걱정하는 가브리엘과 달리 카를로스 본인은 덤덤했다.
“…고작이라고.”
팔다리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식은땀이 조금 나는 게 무슨 문제라는 건지. 카를로스는 마저 할 말을 하라는 얼굴로 기사를 쳐다보았다. 이미 그에게는 이 모든 게 익숙할 대로 익숙한 일인 양 말이다.
그 모습을 보고 가브리엘은 곧바로 깨달았다. 카를로스에겐 지금과 같은 신체적 반응이 이미 여러 번 반복되었던 일상적인 상황인 듯했다.
언제부터였던가, 카를로스가 하루에도 몇 번씩 무언가에 쫓기듯 아서를 찾던 걸 기억했다. 추측건대 지금은 그때의 연장선상인 모양이다.
“…그 몸으로 정말 괜찮겠어?”
가브리엘이 우려 섞인 물음을 건넸다. 물론 카를로스는 기사의 염려를 차게 비웃었다.
“괜찮지 않으면 이대로 멍청히 벽이나 보고 있으란 건가.”
“…….”
“이러고 있을 동안에도 형님은 점점 더 멀리 달아나고 있겠지. 가브리엘, 난 너처럼 한심하게 기다리고만 있을 생각이 없어.”
진정 한심하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말을 마친 카를로스는 기사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가브리엘은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카를로스가 걱정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좀 전 그의 말대로 제 참견은 오지랖에 불과할 터였다. 이제 그는 아서에게 속한 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동시에, 한편으로 자조적인 의문이 불쑥 떠오르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제가 정말로 아서에게 속한 몸이 맞는가.
침대 한가운데 있던 쪽지를 발견했을 때 아무런 좌절감을 느끼지 못했다면 거짓이었다. 하다못해 아서가 일찍이 자그마한 실마리라도 흘려 주었다면 버림받았다는 기분이 덜하였을까.
다른 무언가를 탓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따르던 주인에게서 아무런 언질을 듣지 못한 건 그가 주인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며, 또한 그의 자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돌아올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있어.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셨으니 그로선 오직 믿고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가브리엘의 얼굴 위로 그려졌던 미소가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
마법사 하이브와 제레미, 엠마는 즉각 황성으로 끌려와 구금되었다. 하이브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은 카를로스는 그들을 당장 처벌하진 않았다. 정확히는 처벌을 내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카를로스는 머릿속에 맴도는 상념을 떨쳐 내지 못했다. 아서의 도망을 도운 자가 쌍둥이 중 한 명이란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부터였다.
그는 아서를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 끌고 와 추궁하고 싶었다. 묻고 싶은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대체 언제부터 남매의 본모습을 알고 있었던 건지. 혹여나 그들을 이용해서 무언가 꾸미려 하였고, 그것이 여의치 않자 황성에서 도망가고자 한 건지.
그리고 정말로 쌍둥이를 이용할 생각이었다면, 어째서 당신의 탄신연 즈음 마법사에게 쌍둥이를 지켜보라 언질한 것이었는지. 온갖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붙었다. 도무지 일관성이라곤 없는 행동의 근원을 파헤쳐 보고 싶었다.
애당초 아무리 마법사가 쌍둥이를 돌봐 달라 부탁했다 한들, 그 청을 순순히 들어준 것부터가 아서답지 않았다. 그 점 역시 의구심이 들었다. 카를로스는 아서의 쪽지를 품 안 깊숙이 넣고 걸음을 재촉했다.
“지금 이 시간부로 성문을 봉쇄한다. 신분에 관계없이 어느 누구도 황도를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라.”
변혁 이후 안정기로 들어서나 싶던 황도는 다시금 갑작스러운 소란에 휩싸였다. 명이 떨어지자 군단이 성벽을 촘촘히 에워쌌다. 황도 내에선 기사 한 명과 병사 셋이 조를 이뤄 큰 골목마다 검문을 실시했다.
대외적으로는 황족 납치 사건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계승권을 지닌 황족이 사라졌으니 병력을 풀 명목은 충분했다.
카를로스는 기사 몇을 차출해 황성을 빠져나왔다. 어디로든 가야 한다는 압박감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나 달리는 것과 엇비슷했던 걸음은 성문을 나서며 차츰 느려졌고, 어느 시점부터 뚝 멈추었다. 카를로스는 우두커니 선 채로 길가를 응시했다.
넓은 황도를 한눈에 담은 순간, 그는 문득 눈앞이 아득해졌다. 낯선 곳에서 부모의 손을 놓쳐 버린 아이처럼 멍하니 그 자리에 섰다. 수많은 갈림길 중 어디로 가야 할지 쉬이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직 멀리 도망가지 못했을 것이다…. 애써 되뇌었지만 그러할 가능성이 낮다는 걸 알았다.
형님이 도망친 시간을 감안하였을 때 이미 성벽을 넘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디로든 자유롭게 달려가고 있을 아서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불시에 목구멍이 조여들었다. 숨을 쉬어도 공기가 들어설 공간이 부족한 것 같았다.
카를로스는 무심코 손끝으로 제 목을 긁었다. 그를 본 기사 몇이 당황하여 눈동자를 굴렸다.
“카딘 숲으로 간다. 스크롤이 숨겨져 있다는 장소를 찾아라. 에릴, 카슨. 두 사람은 제3 기사단을 이끌고 폐후의 신병을 확보하도록.”
이내 훌쩍 말 위로 올라탄 카를로스가 명을 내렸다. 지시를 받은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추적에 능한 사냥꾼 수십 명이 사냥개와 함께 숲을 헤집었다. 오래지 않아 발견된 장소는 누군가 건드린 흔적 없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아서가 성문을 넘었으나 스크롤을 찾지 않았을 확률과, 추격이 잠잠해지길 바라며 황도 어딘가에 숨어 있을 확률 중 카를로스는 후자를 골랐다.
추격꾼들에게 도망자의 흔적을 찾도록 명령한 뒤 그는 망설임 없이 말머리를 돌려 황도로 향했다.
“전하…!”
황도로 들어서기 무섭게 급보가 도착했다. 시장에서 수상쩍은 자가 물건을 구매할 때마다 금화를 소모하였단 내용이었다. 그 물건 중엔 아서라면 절대 입에 대지 않을 길거리 음식도 포함되었다. 카를로스는 또 다른 협력자의 존재를 의심했다.
이후로 어두운 로브를 뒤집어쓴 자들이 속속들이 붙잡혀 왔다. 그들 전부가 금발이었으며, 변명이랍시고 쏟아 낸 소리는 하나같이 비슷했다.
“저는 억울합니다…! 황족 납치범을 돕는 일인 줄 알았더라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겁니다! 이 주머니에 든 만큼 쓰기만 하면 그 열 배의 금화를 주겠다 하여…….”
예상대로 어딘가 형님을 돕는 세력이 있었다. 오를레앙 대공가, 또는 오나드 왕국. 혹은 그가 미처 인지하지 못한 제3의 세력. 후보는 많았다.
카를로스는 붙잡힌 자들의 면면을 살폈다. 아서처럼 다른 색이 섞이지 않은 백금발은 드물었다. 저들은 값비싼 마법 약물을 이용하여 형님의 머리색을 흉내 낸 듯 보였다. 저토록 자연스럽게 머리색을 바꾸는 마법약은 하루 이틀 만에 구하기엔 어려운 고급품이었다.
쌍둥이는 아서와 사전에 말이 되어 있지 않았다 읍소하였지만, 이로써 아서의 도망이 이전부터 계획되어 있었음이 증명되었다. 카를로스는 입 안의 여린 살을 피가 나도록 물었다. 거짓 증언을 잠시나마 귀담아들었던 제가 어리석었다.
형님을 믿지 않는다 자신하였다. 그럼에도 어째서일까. 다정한 체 그를 바라보던 눈을 떠올리면 속아 넘어갔단 생각이 들고 말았다.
그에게 웃는 얼굴을 보이면서 속엔 칼을 품고 있는 게 형님이었다. 아서가 그에게 먼저 다가오는 건 어떤 목적이 있을 때가 전부였다. 그걸 알면서, 멍청하게도 또…….
비슷한 머리색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괴롭게 일렁였다.
이 자리에 아서가 없는 것을 알면서 그는 강박적으로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러다 참다못해 조여드는 목을 손으로 재차 긁었다.
“…전하, 상처를 가리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따라붙던 기사 하나가 다가와 카를로스의 목에 검은 천을 둘러 주었다.
살갗을 파고든 손끝에 붉은 살점이 비쳤다. 카를로스는 언제 묻어났는지 모를 그것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이상하리만큼 아무런 현실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영혼이 허공에 부유한 채로 육신을 빼앗겨 버린 것 같았다. 모든 감각이 흐려지고 펄떡이는 심장 소리만이 선명했다.
“저들을 전부 구금하라. 마법사를 붙여 심문해.”
“예, 전하.”
마법사를 붙여 심문한다는 건 정신계 마법으로 죄인의 이지를 망가뜨려서라도 철저히 캐내겠단 의미였다.
남매는 아서에게 마법 스크롤을 제공하려 들었고, 협력자들 역시 구하기 까다로운 마법약을 사용했다. 오나드 왕국의 개입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만일 오나드 왕국이 개입하였을 경우 변수는 무수히 많아졌다. 왕국은 이동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를 여럿 보유했다. 국경을 봉쇄하고 이동 게이트를 폐쇄하여도, 마법사의 조력을 얻어 제국을 벗어나는 게 가능할 터였다.
“황후의 신병은 확보했는가.”
“예. 적색궁으로 모셔 두었습니다.”
“소란을 틈타 황제가 탈출을 꾀할지 모른다. 감시를 철저히 하도록.”
“예, 전하.”
남은 희망은 황제와 황후, 두 명의 인질이 남아 있단 것이었다.
카를로스는 아서에게 수도 없이 말했다. 형님이 그에게서 도망치려 드는 즉시 먼저 황제의 목을 성벽에 내걸고, 그다음엔 황후를 죽일 것이라고. 그건 단순히 아서를 겁주기 위한 말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형님이라고 그 사실을 몰랐을까?
만일 형님이 그들을 버리고자 마음먹었다면, 카를로스가 쥔 패는 무가치한 쓰레기로 전락하고 만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불안이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양 마구 치밀어 올랐다.
점차 빨라지는 고동 소리가 마치 경고음처럼 귓전을 때렸다. 쿵쿵 울리는 심장 박동은 어느새 눈알까지 닿았다.
공포가 그를 집어삼키자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몸이 크게 휘청였다. 꺼지기 직전의 불씨처럼 가냘프게 흔들리는 영혼 앞에선, 강인하던 육체마저 쉬이 무너져 내릴 따름이었다.
카를로스는 벽에 몸을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이 거듭 그의 목을 졸랐다.
텅 빈 머릿속엔 오직 단 하나의 생각만이 남아 있었다.
이대로 형님을 영영 볼 수 없게 된다면….
단순한 가정에 불과한 것임에도, 까마득한 공포가 그를 집어삼켰다. 이대로 있다간 제 숨이 멎을 거란 비합리적인 불안감이 치솟았다.
“……형님.”
그는 토해 내듯 내뱉었다. 통렬한 후회가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제가 멍청하고, 순진했다.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싹을 잘라 두었어야 했던 것을.
처음부터 구속구를 풀어 주어서는 안 되었다. 그도 아니면 제 발로 걸어 나갈 수 없게 양다리를 전부 부러뜨려 놨어야….
아니, 아니다. 그런 건 미봉책밖에 되지 못한다. 구속구는 풀어내면 그만이고, 부러진 뼈는 언젠가 붙기 마련이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 위로 서서히 번들거리는 막이 씌워졌다. 차라리 일찍이 형님을 죽이고 저도 그 뒤를 따랐다면. 그랬다면…….
“…파벨, 제1 기사단을 소집해라. 대공의 저택으로 가겠다.”
살을 파고들도록 움켜쥔 손에 핏물이 고였다. 이 순간에도 형님은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을 터였다. 검을 빼어 드는 건 형님을 사로잡은 뒤로 미뤄도 늦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쉬지 않고 말을 재촉했다.
귀족들의 저택이 밀집한 지역에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철 갑옷을 걸친 기사단은 순식간에 대로를 지나쳐 대공의 저택에 도달하였다.
경비병과 한가하게 인사를 나눌 시간은 없었다. 대문을 강제로 부서뜨리고 들어가자, 오를레앙 대공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흔쾌히 제 저택을 내어주었다.
이미 수색을 대비하고 있던 것인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었다. 카를로스는 보복으로 고풍스럽던 저택을 반파시켜 놓았다.
뒤이어 기존 황제파 귀족들의 저택을 샅샅이 뒤졌다. 모든 절차를 생략한 채 다짜고짜 들이닥친 데에 수많은 불만이 제기되었으나 모조리 묵살당했다.
걷고, 사방을 살피는 행동만으로도 전신의 근육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쓰러질 것처럼 휘청이는 몸을 붙들고 카를로스는 끊임없이 수색을 이어 갔다. 일분일초가 모진 고문을 견디는 듯했음에도 시간은 유유히 흘러갔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날이 어슴푸레 저물고 있었다.
카를로스는 땅거미 진 골목에 멍하니 서서, 생각하는 법을 잊어버린 백치마냥 어두워지는 하늘만 바라보았다.
악몽 같은 시간은 빠른 속도로 카를로스를 무너뜨렸다. 그는 스스로 만들어 낸 공포 속으로 힘없이 침몰해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떤 예고도 없이, 아서가 제 발로 카를로스를 찾아왔다. 푸르스름하던 하늘이 완전히 까맣게 침잠한 때였다.
카를로스가 얼마나 끔찍한 불안에 휩싸여 있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아서는 태연한 낯으로 그의 앞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고작 한나절만이었다.
***
어깨에 걸려 있던 상의가 가브리엘의 손길에 미끄러져 내렸다.
“전하, 간만의 외출은 즐거우셨습니까.”
“……그럭저럭 나쁘진 않았어.”
잠시 딴청을 부리던 아서가 차마 가브리엘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답했다.
“다행이로군요.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그냥, 괜찮은 정도.”
“따뜻한 물에 몸을 풀면 기분이 더 좋아지실 겁니다.”
뭐, 그렇긴 하겠지. 아서는 괜히 답을 얼버무리며 창밖만 바라보았다. 깜깜해진 하늘에 별이 총총히 박혔다.
얼마 돌아다닌 것 같지도 않았는데 벌써 밤이 되어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올 걸 그랬나. 잠깐 그런 생각도 들었다.
카를로스와의 짧은 재회도 잠시, 아서는 연행을 당하듯 백색궁으로 끌려갔다. 그 대우에 미처 불만을 가질 새도 없었다. 자신의 부재가 생각했던 것의 수배는 훌쩍 넘는 파란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설마 이 짧은 시간 동안 군대를 풀고 귀족들의 저택을 뒤엎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서가 예상했던 건 고작해야 추격대가 따라붙거나, 성문 출입이 금지되는 정도였다. 아서는 제가 카를로스에 대해 어느 정도 잘못 판단한 부분이 있음을 인정했다.
“강가에 다녀오셨습니까? 물 냄새가 밴 듯하군요.”
가브리엘이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물었다. 아서는 어딘가 뜨끔하여 강 주변을 오래 걸었다며 털어놓았다.
“강변을 걸었어. 노을 지는 때 세느강의 풍경이 그리 장관이라길래.”
“직접 보니 어떠하셨나요.”
“머리로 그렸던 것보다 더 좋더군. 덕분에 강바람을 한참 쐬었지.”
“…그곳의 풍경이 꽤 마음에 드셨나 보군요. 다음엔 저도 함께 데려가 주시겠습니까?”
묘하게 뼈가 있는 말에 아서는 그래, 하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브리엘이 작게 웃었다. 그는 아서의 옷을 개어 콘솔 위에 올린 뒤 아서를 욕실로 이끌었다.
아서가 따끈한 물에 노곤하게 녹아내릴 즈음, 기사는 다시 한번 더 가벼운 투로 물었다.
“전하, 세느강에 관한 얘기는 누구에게서 들으셨는지 여쭤보아도 될까요.”
“아아. 그거…? 책에서 봤어. 수도 폰테네의 모든 것.”
“저런. 얼마 전에 읽은 책이로군요.”
“응.”
잠기운에 아무 생각 없이 답했던 아서는 뒤늦게 가브리엘이 건넨 질문의 의도를 파악했다. 저 말의 본뜻은 누가 당신한테 바람을 불어넣었느냐 이거다.
조금 방심하면 기사는 꼭 이런 식으로 슬며시 빈틈을 파고들었다. 만일 아서가 책이 아닌 사람의 이름을 말했으면 어찌할 뻔했나 싶었다.
물론 내심 탄식했던 것도 그 순간뿐, 바깥바람을 오래 쐬어서 그런지 몸과 마음이 금세 나른하게 풀렸다.
눈을 반밖에 못 뜬 아서는 가브리엘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비몽사몽 끌려다니다 보니 어느새 폭신한 침구 위에 몸이 눕혀져 있었다.
“오늘따라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이대로 주무시겠습니까?”
“눈이 감기긴 해….”
아서는 멍한 눈으로 가브리엘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콘솔의 수납공간을 뒤적이던 기사의 손에 익숙한 물건이 들렸다.
테르단 저택에 갇혀 있던 동안 달고 살아야 했던, 바로 그 몹쓸 구속구였다.
“또 그건가.”
“예.”
“…그건 싫은데.”
“송구하옵니다, 전하.”
아서의 뺨을 어루만진 기사가 미안한 기색 없이 사과했다.
“아무래도 왼 손목이 덜 불편하시겠지요.”
절로 인상이 구겨졌지만 아서는 반항하진 않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어차피 어느 정도 각오한 일이었다. 한 번 도망쳤다 돌아온 이상 전처럼 자유롭게 내버려 둘 거라고 생각진 않았다.
쇠끼리 맞물리는 익숙한 소리와 함께 왼쪽 팔목에 구속구가 걸렸다. 몸이 급격히 축 처졌다. 그와 함께 짜증을 낼 기력도 같이 사라진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노곤하게 늘어진 아서는 눈동자만 굴려 침실을 훑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게, 몸을 씻고 잘 준비까지 마쳤건만 카를로스가 모습을 보일 생각을 안 했다. 이번 일로 당분간 제 옆에서 안 떨어지려 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리엘, 칼은?”
평소엔 목욕 시중이 끝나기 무섭게 덥석 안겨 대더니 웬일로 안 보이는 게 의아했다.
“카를로스 전하께선 옆방에 계십니다.”
“왜 여기로 안 오고?”
“잠깐 안정을 취하고 계신 듯합니다. 기다리시면 곧 오실 테니 전하께서도 쉬고 계시겠습니까?”
즉, 너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아 쉬고 있으니 억지로 찾지 말라는 말이었다.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소리였다. 아서가 아무리 싫다 해도 기어코 옆에 붙어 있던 카를로스이지 않았나.
“무슨, 안정까지….”
아서의 혼잣말에 기사가 난처하게 웃는다. 어쩐지 미묘하게 카를로스를 감싸 주는 기색이었다. 가브리엘이 보았을 때 카를로스의 상태가 썩 좋진 않았나 보다.
“…좀 놀란 것 같긴 했지.”
이불을 돌돌 말아 감고서 아서는 천천히 좀 전의 일을 회상했다. 제가 보았던 카를로스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그려 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출을 실컷 즐기고 카를로스에게로 돌아갔을 때 마주친 시선이, 유독 아서의 마음속에 도장처럼 쾅 찍혔더랬다.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창백하게 넋이 나가 있던 표정.
아서의 존재를 인지하며 서서히 생기가 차오르나 싶더니, 이내 뒤따른 분노에 시꺼멓게 죽어 버린 눈동자.
아서가 무어라 말을 붙이려 하자 카를로스는 듣기 싫다는 듯 등을 돌려 외면했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본 아서는 어쩐지 가슴께가 따끔거려 괜히 제 심장 부근을 문질러 댔다.
아서의 짧은 가출이 카를로스에게 생각보다 더 큰 충격을 주었던 것 같았다. 아서와 약속을 한 뒤로 카를로스는 다른 공적인 용무가 있는 게 아닌 한 결코 아서의 곁을 떠나지 않았는데, 이번엔 아서에게 아무 언질도 않고 등을 돌려 가 버렸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궁에 갇혀 있던 아서로서도 나름 억울한 점은 있었다. 사람이 답답하면 바람 좀 쐴 수 있는 거 아닌가…. 아무리 집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1년 내내 집에만 있을 순 없는 법이었다.
만약 아서가 먼저 외출을 하고 싶다 졸랐으면 카를로스는 절대 허락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도망갈 거라 생각하고 감시인을 늘렸으면 더 늘렸겠지. 그도 아니면 호위를 숨 막히도록 두르고 외출 같지도 않은 외출을 했을 테다.
아마 카를로스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옆방에 틀어박혀 아서의 기척만 훔쳐 듣고 있는 건지 몰랐다. 화가 나지만 제가 화를 낼 처지가 아닌 걸 떠올리고서 말이다.
그래도 그렇지 사람 얼굴도 안 보려고 해? 대놓고 화를 내는 거라면 쌍수를 들고 반겼을 것이나, 이런 식으로 피해 버리는 건 아서가 제일 싫어하는 방식이었다.
본디 카를로스 못지않게 집착이 심한 아서였다. 카를로스가 제게 마음이 있는 한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옆에 붙어 있어야 한다 생각했다.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한 아서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카를로스의 얼굴을 봐야겠어. 오른쪽, 왼쪽? 어느 방인가.”
“…전하.”
“싸우려는 게 아니야. 달래서 데려오려는 거지.”
당장 카를로스를 데려와야겠단 생각에 피로한 기운마저 싹 가셨다. 아서는 체통이고 뭐고 잠옷만 입은 채로 문고리를 쥐었다.
곤란한 얼굴로 침음한 기사가 이내 오른쪽 방이라며 답을 알려 주었다.
오른쪽이란 말이지. 아서는 넓은 보폭으로 걸어가 그쪽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늦은 밤, 등 하나 켜져 있지 않은 방 안은 캄캄했다. 문을 열자마자 카를로스에게 갈 작정이던 아서가 잠시 멈칫했다. 순간적으로 어두운 곳으로 들어서니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발을 들여놓기 전에 먼저 복도에 달린 마법등의 불빛에 의존해 내부를 살폈다. 침대와 탁상을 확인한 뒤 벽 쪽을 훑었다. 멀쩡한 가구를 두고 바닥에 앉은 실루엣을 보고 확신한 아서가 문을 쾅 닫았다.
희미한 빛조차 사라진 공간은 눈을 뜨고 있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서는 성큼성큼 공간을 헤쳐 카를로스에게로 다가갔다. 문을 열자마자 진득하게 달라붙던 시선을 이정표 삼아 걸었다.
“카를로스.”
달빛을 가리던 구름이 걷히며, 찰나 형형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칠 뻔했던 아서가 다시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저런 소름 돋는 눈을 하고 있어 봤자 카를로스가 그에게 큰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을 알았다.
물론 좀 화를 내면 더 좋을 것 같긴 한데. 아서는 슬며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가다듬었다. 눈을 몇 차례 깜빡이자 어둠에 적응한 동공이 까맣게 확장되었다.
“거기 있었네, 칼.”
카를로스는 아서의 침실과 맞닿은 쪽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이목구비의 절반이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는데 반질거리는 눈동자만은 뚜렷했다. 언뜻 보면 눈물이 맺힌 듯이 보였다.
카를로스의 맞은편으로 걸어간 아서가 그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제야 눈높이가 좀 비슷해졌다. 카를로스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주변을 누르는 묵직한 공기에 조금씩 숨이 막혔다. 단지 아서의 착각만은 아닐 터였다. 뛰어난 기사가 내뿜는 기운은 실제로 어느 정도 물리력을 지녔다.
“…화가 많이 났나 봐.”
“…….”
“그만 기분 풀어. 하루도 안 돼서 내 발로 돌아왔잖아.”
압박감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구속구를 찬 몸이 점점 더 무겁게 느껴졌다.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다간 압박감이 해소되기도 전에 제가 먼저 쓰러질 듯했다.
아서가 조심스레 손을 움직였다. 카를로스의 머리칼을 손가락 끝으로 스치듯 건드렸다.
그리고 위로하듯 이마를 쓸어 올리려 했으나, 미처 거기까진 실행하지 못했다. 손이 닿기 전 카를로스가 아서의 손목을 움켜쥐었던 탓이다.
“읏.”
“…누가 마음대로 건드려도 된다 했습니까.”
팔목을 움켜쥔 힘에 아서가 눈을 깜빡였다. 더 가까이 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빛에 배 속이 근질거리는 건, 어디까지나 아서가 글러 먹은 인간이라 그러했다.
“…너는 늘 마음대로 건드렸잖아. 나는 그러면 안 되나 봐.”
저도 모르게 비아냥대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간만에 제대로 화난 카를로스를 보니 상황에 맞지 않게 아서는 가슴이 설렜다. 카를로스를 달래러 온 거지, 싸우러 온 게 아니었는데 그만 제 처지를 잊어버렸다.
욕망과 이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아서는 갈등했다.
근데 왜 싸우면 안 되는 거였더라.
답은 쉽사리 나왔다. 아무리 화가 나도 카를로스는 그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을 테니까.
그런 결론이 나자 도발하고 싶은 충동이 신기할 만큼 싹 사그라들었다.
카를로스는 도망가고, 아서는 속을 태우고. 잘못하다가는 지긋지긋했던 수십 일간의 신경전을 또다시 반복할지 모른다 생각하니 절로 겸허한 마음이 들었다.
“카를로스.”
조용히 숨을 들이켠 아서가 표정을 바꾸었다. 지금은 싸우자고 덤빌 게 아니라 좀 더 조심스럽게 다가갈 때였다. 혹시 카를로스를 자극하는 꼴이 될까 붙잡힌 손목을 빼내려고도 시도하지 않았다.
“약속했잖아. 이제 도망 같은 거 생각 안 한다고.”
아서는 가능한 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쪽지에도 분명히 적어 놨지. 곧 돌아올 거라고 말이야.”
카를로스 쪽으로 상체를 기울인 아서가 단단해 보이는 손등 위에 제 왼손을 덮었다. 그러고는 살며시 깍지를 꼈다.
어쩐지 코끝에 피비린내 비슷한 것이 맴돌았다. 혹여나 저를 찾는다고 카를로스가 애먼 사람에게서 피를 본 건 아닌지 의문스러웠다.
“이리 와, 칼.”
평소라면 얌전히 다가왔을 카를로스는 미동도 없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아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러면 이쪽에서 다가가면 그만이었다.
아서가 먼저 손을 내밀었을 때, 카를로스는 단 한 번도 그를 거부한 적이 없었다. 오늘이라고 예외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왼손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으려 했다.
하지만 그게 제 판단 착오였던 모양이다.
“분명….”
“아.”
그나마 자유로웠던 왼팔까지 붙잡혔다.
“건드리지 말라 했을 텐데.”
삽시간에 시야가 휙 돌아갔다. 얼떨결에 바닥에 등을 붙인 아서가 멍한 얼굴로 카를로스를 올려다보았다.
“…형님은.”
카를로스의 입매가 비뚜름한 선을 그렸다.
“내가 형님의 손길 한 번에 헤벌레하는 꼴이, 어지간히 재밌긴 한가 봅니다. 매번 이런 식이니.”
달빛을 등진, 분노로 일렁이는 눈동자가 아서를 사로잡았다.
한데, 반질거리는 눈에 비치는 건 오로지 노기만은 아니었다. 한 단어로 정의 내리지 못할 오물 같은 감정 뭉치가 그 안에 담겨 있었다.
한계선 부근에서 아슬하게 출렁이던 그것들이 어느 시점부터 조금씩 흘러넘치려 했다. 아서는 홀린 듯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하면 또 내가….”
또 내가 쉬이 넘어갈 줄 알았나 보지. 이런 건 헛수고일 뿐이라고. 형님은 앞으로 죽는 날까지 황성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카를로스는 입술을 달싹였으나 미처 내뱉지 못한 채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는 고개를 아래로 숙여 제 눈동자를 감추었다.
그러나 때늦은 움직임이었다. 어둠은 시각을 방해하는 대신 다른 감각을 예리하게 밝혀 주었다. 카를로스로선 가장 바라지 않은 상황일 것이나, 아서는 칼이 입을 연 즉시 알아차렸다.
갈퀴로 긁어낸 듯한 목소리에 희미한 물기가 서려 있음을.
“…….”
하마터면 아서는 황홀한 탄식을 흘릴 뻔했다. 미처 인지할 새도 없이 흥분감에 몸이 달아올랐다.
귓가에 젖은 음성이 닿은 즉시, 오싹한 전류와 같은 감각이 뒷덜미를 스쳐 단숨에 배꼽 아래까지 도달했다.
아서는 카를로스의 약한 모습에 안쓰러움은커녕 농도 깊은 희열을 느꼈다. 카를로스를 울린 게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이라는 사실이, 그에게 엇나간 만족감을 주었던 것이다.
이를 악문 아서가 가까스로 흥분을 감추었다. 아무리 다소 상식이 부족한 아서였지만, 지금 제 모습이 울음을 참는 아우에게 보일 일반적인 반응이 아니란 건 알았다.
아서의 반응에 카를로스는 무슨 오해를 한 건지 손목을 쥔 손아귀에 힘을 실었다.
“읏….”
뼈가 부러지지 않을 만큼의 강도에 반사적으로 신음이 샜다. 동시에 카를로스의 기세는 더 사납게 변했다. 물론 제 팔이 부러지든가 말든가, 아서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넘어갔다.
카를로스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구속구를 채우도록 내버려 둔 것이 뒤늦게 후회되었다. 마나를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카를로스를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을 텐데.
보통 사람보다 조금 나은 시력으로는 머리카락 그림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필 머리칼도 새까매서 이목구비가 어둠에 녹아들어 간 것마냥 보였다.
생각 같아선 더 울리고, 누가 그랬냐며 다정하게 위로해 주고 싶은 맘이 굴뚝 같았지만….
평소처럼 제멋대로 굴었다가 혹여나 카를로스가 달아나 버리기라도 할까, 아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카를로스.”
목소리는 차분했다. 입을 맞추고 싶어 애가 탈 지경이었음에도, 겉으론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오늘 하루가 많이 길었나 봐.”
“…….”
“…맞아. 내가 갑자기 없어졌으니, 그럴 만도 했지.”
아서는 웅크린 아이에게 접근하듯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여전히 붙잡힌 팔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래. 나로선 지금 네 심정에 완전히 공감하진 못 해. 하지만 너를 달래 주고 싶단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이야. 그것만으로는 부족한가.”
아마 부족하겠지. 카를로스의 답을 듣기 전에 먼저 답을 내린 아서가 이어 말했다.
“말해 봐, 칼.”
부드러운 권유가 방 안을 울렸다. 도망가 버리는 걸 힘으로 붙잡지 못하니, 살살 달래서 이리로 오도록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어찌해야 네 기분을 풀어 줄 수 있을까. 응?”
다정한 물음이 이어진다. 팔목을 옥죄던 힘이 서서히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 손을 조심스레 빼낸 아서는 카를로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한구석으로 차 버리고, 카를로스가 좋아하는 다정한 형님 행세를 했다.
맥없이 끌려온 카를로스는 무너지듯 아서에게로 안겼다.
데일 것처럼 뜨거운 숨이 아서의 목덜미에 닿았다. 뜨거운 숨이 닿을 때마다 아서는 괴로워졌다. 자연히 차오른 오싹한 감각에 발끝이 저절로 곱아 들었다.
“…….”
카를로스는 제 얼굴만 보이지 않으면 그만인 줄 아는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묻은 채 불안정한 숨을 몰아쉬었다.
한 터럭만큼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옷깃이 젖어 드는 것까지 감춰지진 않았다.
아서는 아무 말 않고 카를로스의 머리칼을 가만가만 쓸어내려 주었다. 손안의 촉감만으로 카를로스를 더듬어 내려갔다.
눈으로 보지 못해도 손끝으론 맘껏 그려 낼 수 있었다.
열감이 느껴지는 눈꺼풀, 물기로 축 늘어진 속눈썹, 젖은 뺨, 떨리는 숨결을 토해 내는 입술….
얼굴을 덧그리던 손은 곧 귀밑 턱선을 따라갔다. 가볍게 턱을 쥐고 고개를 들어 올리자, 카를로스는 이번에도 얌전히 따라왔다. 그제서야 아서는 카를로스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어렴풋이 일그러진 얼굴은 툭 건드리면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젖은 눈동자는 부끄럽지도 않은지, 오롯이 아서만을 맹목적으로 시야에 담았다. 눈동자 아래 맺혀 있던 방울 하나가 뺨을 타고 속절없이 흘러내린다. 여길 좀 보라는 듯.
이대로 단숨에 제 목을 꺾을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내가, 아서의 앞에서만큼은 손안에 갇힌 연약한 새처럼 군다.
이런 그를 어찌 사랑스럽다고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가슴께에 간질간질한 바람이 불었다. 이 간지러운 감각을 무어라 정의 내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서는 이것을 꽉 쥐어 터트리고 싶은 동시에, 이대로 영원히 제 새장 안에 가두고도 싶은 모순을 느꼈다.
여전히 사위는 어두웠으며 시야는 흐릿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 따윈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아서는 이 부서질 것 같은 공기에 젖어 들었다. 부디 어둠이 제 속내를 감추어 주길 바랐다.
“…칼, 나를 봐.”
카를로스의 손을 끌어 온 아서가 그에게 제 뺨을 만지게 했다. 살아 있는 체온을 느껴 보라는 의미였다.
“어찌 됐건 중요한 건 지금, 내가 네 앞에 있다는 것 아닐까.”
“…….”
“강제로 끌려온 것도 아니고, 내 발로 돌아왔어. 이로써 내가 도망칠 마음이 없다는 걸 증명한 셈이지 않아?”
아서는 불안해하는 카를로스를 안심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카를로스는 갑작스레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모습이었다.
“…증명이라.”
카를로스의 잇새로 허탈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형님께선 항상… 말만큼은 번지르르하군요.”
이를 악물었던 카를로스가 간신히 대꾸했다.
“형님의 도망이 이미 계획되어 있던 일이라는 걸 압니다.”
“틀렸어. 충동적으로 결정한 일이었을 뿐이야.”
“또, 입만 열면 거짓말이지….”
아서로선 드물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었지만, 카를로스는 또다시 아서가 그를 휘두르기 위한 거짓을 늘어놓는다 여겼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카를로스가 아서를 돕는 세력의 존재를 두 눈으로 확인한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었으므로.
마법약으로 머리색을 바꾼 여러 명의 방해꾼들. 고작 한나절의 시간을 벌기 위해 그런 수고를 들였다고. 차라리 도망을 치려다 일이 어긋나자 제 발로 돌아왔다는 게 더 그럴듯했다.
“…거짓말 같겠지만 정말이야.”
아서는 조금 침울해졌다. 제 스스로 신나게 깎아 먹은 신뢰였던 터라, 다른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그때 아서의 시야를 덮고 있던 그림자가 뒤로 물러났다. 카를로스는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자 몸을 일으켰다. 미련 한 점 없는, 참담해 보이기까지 한 모습에 아서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카를로스.”
아서가 카를로스의 팔목을 쥐고 끌어 내렸다. 구속구를 차지 않았을 때도 힘으로 이기지 못했다. 하물며 지금은 더더욱 그랬지만 카를로스가 자신을 뿌리치고 가지 않을 거라 믿었다. 붙잡힌 팔을 카를로스가 차게 내려다보았다.
“내게 무얼 기대하는지 몰라도, 이렇게 매달리는 척해 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도망가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약속이란 말이 거슬렸는지 화난 목소리가 뒤따랐다.
“…정작, 나한테서 도망치려 한 건 형님이지 않습니까.”
“도망… 안 갔어. 지금 네가 가는 게 도망이지.”
아서가 고집스레 주장하자 카를로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놔주십시오. 영영 가는 게 아닙니다. …어차피 그러지도 못하고. 형님이 잠이 들면, 그때 돌아오겠습니다. 자는 동안 손끝 하나 대지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뭐.”
잠이 들면 찾아오겠다니. 무엇보다 자는 동안 손끝 하나 대지 않겠다니? 아서는 내숭을 떨고 있던 것도 잊고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그럼 정말로, 가 버리겠다고?”
제 눈이 삔 게 아니라면 분명 카를로스의 마음이 어느 정도 풀렸던 건 맞는데, 도망칠 생각이 없었단 말을 믿지 못한 듯 그가 재차 벽을 세웠다.
아서는 불길한 예감에 빠졌다. 저런 말을 하는 걸로 봐선 한동안 카를로스는 아서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을 생각인 게 분명했다.
아서의 머릿속에 카를로스에게 방치당했던 지난 나날이 하나둘 펼쳐졌다. 단언컨대, 그건 두 번은 못 견딜 짓이었다. 아서는 카를로스를 붙든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제가 느끼기에도 너무나 하잘것없는 강도라 어이가 없었으나 다행히 카를로스는 뿌리치지 않았다.
끈질기게 구는 아서의 태도에 카를로스가 돌연 의문을 느낀 듯 추궁했다.
“형님은 전부터 그랬지.”
“…뭐가.”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매번 붙잡아 두려는 건 어째서입니까? …멍청하게 구는 꼴이 재미있어서?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
과거엔 그가 어떤 일을 꾸밀 것이 두려워 붙잡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는 사정이 달랐다.
겨울, 아서의 탄신연 이후 둘의 관계는 실질적으로 역전된 지 오래였다. 카를로스는 더 이상 아서를 강압하지 않았으며 아서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거야….”
카를로스의 추궁에 아서는 말끝을 흐렸다. 그는 제가 이 질문에 어떤 답을 하느냐에 따라, 카를로스가 이곳에 머물지 말지가 결정 나리란 걸 깨달았다.
“…답은 간단한 거 아니냐.”
사실 카를로스를 붙잡는 이유는 많다. 그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가장 단순한 답이었다. 카를로스가 제 옆에 있는 게 좋으니까 붙잡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답이면서 역설적으로 가장 거짓처럼 들릴 말이었다.
카를로스는 듣자마자 거짓이라 생각할 변명이었다. 그럼에도 아서가 카를로스를 좋아하는 마음만큼은 명백하게 진실이었다. 물론 그 마음은 혹자들이 말하는 순수한 연심과 지극히 거리가 멀었다. 소유욕과 집착, 가학과 피학성이 뒤섞인 그것은 오히려 사랑을 거꾸로 뒤집으면 나오는 형태와 더 유사했다.
어쨌든 옆에 없으면 허전하니 보고 싶고, 보다 보면 가슴이 설레고. 이 마음이 좋아하는 게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이미 상식 따윈 심해에 처박아 둔 아서는 제 마음을 그리 정의 내렸다.
본래라면 말할 생각이 없었지만…. 밤이라는 시간이 선사한 이상한 기류 탓인지, 아서는 모처럼 제 속내를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아서가 무슨 말을 하든 카를로스는 전부 거짓으로 치부할 테니까. 아서는 가벼운 맘으로 진실을 입에 담았다.
“네가 옆에 있는 게 좋아서.”
“…….”
“그래서 그래.”
그 뒤로는 침묵이었다.
어쩌면 카를로스가 화를 낼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렇다고 딱히 기뻐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무어랄까, 마치 어느 날 방문을 열었더니 난데없이 바다가 한가득 펼쳐진 걸 본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좋다고?”
잠시간의 적막 끝에, 카를로스는 ‘좋다’는 말을 난생처음 들어 본 사람처럼 되물었다. 아서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어찌 됐건 눈물은 쏙 들어간 듯 보였다.
아서는 이왕 사실대로 털어놓은 것, 카를로스가 믿든 말든 주절거려 보기로 결심했다.
“그래, …네가 좋아서 그래.”
신기하게도 막상 육성으로 내뱉고 나니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스스로를 위장하는 건 아서에겐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라, 감추고 있을 땐 딱히 갑갑한 줄을 몰랐다.
“원래라면 비밀인 거지만, 오늘만 예외인 걸로….”
어차피 아서가 진실이라 주장한들 카를로스는 티끌만큼도 믿지 않는다. 그리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했다.
“칼, 왜 그리 가만히 있어.”
아서는 이참에 아예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부끄러운 걸 무릅쓰고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당장 입을 맞춰 주지 않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요구에 카를로스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굳어 버렸다. 이때다 싶었던 아서가 카를로스의 입술을 느릿하게 훑어 내렸다.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좀 전부터 계속 네 입술만 쳐다보고 있었어.”
달빛에 의존해 앞을 보는 아서와 달리 어둠은 카를로스에게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얼핏 건조해 보이는 아서의 눈동자가 실은 노골적으로 그를 희롱하는 중이란 것을 카를로스는 쉽사리 알아차렸다. 그의 낯빛이 굳었다.
“……이제는, 별소리를 다….”
눈물로 젖었던 입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메말랐다. 마른침이 넘어가는 감각이 거슬려 카를로스가 제 목울대를 쓸어내렸다. 목의 상처를 가린 의복이 유독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제 형님은 하다못해 거짓을 포장할 노력조차 않고, 저런 얄팍한 유혹을 시도한다. 아서의 의도야 뻔하디뻔했다. 저런 허술한 거짓투성이의 말로도 카를로스를 흔들 수 있단 걸 알기 때문이다.
“…형님에겐 이런 구속구가 아닌, 재갈을 물려 두었어야 했는데. 내 생각이 짧았던 것 같군요.”
대체 아서가 무슨 목적으로 그를 흔드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다만 무슨 연유이든 간에 형님이 그를 무조건 붙잡아 두고자 마음먹은 건 명백했다. 저런 말을 해서라도 카를로스를 묶어 두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카를로스는 제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졌다. 형님이 이렇게까지 그를 붙잡으려 드는데 뿌리치는 게 가능한가.
답은 당연히 ‘아니다’였다. 이 자리를 떠나고자 했다면 처음부터 아서의 입을 막아 버렸어야 했다. 그의 실수였다.
한시적으로 오기를 부리며 버티고 있을 뿐, 이미 그의 모든 신경이 아서에게로 쏠린 지 오래였다. 벌써 뇌리 한편에선 설령 보이는 전부가 거짓이어도 무슨 상관이냐는 물음이 떠올랐다.
중요한 건 목적이 무엇이든 형님이 나를 원한다는 사실이 아니냐며, 그의 안에 있는 한심한 자아가 주장했다. 카를로스는 체념한 투로 물었다.
“…하나 묻고 싶군요. 형님이 거짓이 아닌 말을 한 적이 있긴 합니까.”
가끔씩 보이는 다정한 시선까지 전부 계산되어 있던 것일까. 여태 카를로스의 옷자락을 쥐고 있던 아서는 부러 모호한 답을 건넸다.
“글쎄, 적어도 지금은.”
“적어도? …이젠 숨길 생각도 없지.”
카를로스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어차피 형님의 말을 믿을 생각도 없으면서 무엇 하러 묻고 마는 건지, 어리석기 그지없다. 꾸준히도 미련한 제 모습에 짙은 회의감이 밀려들었다.
이만큼이나 겪었으면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나. 아서의 말 한마디, 눈짓 한 번, 손짓 한 번에 휘둘리는 것이나, 문장 하나하나의 진의를 파헤치는 것 또한.
「내 쪽에서 먼저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겠다는 거다.」
형님이 그에게 건넸던 말이 떠오른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겠다고, 그런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내뱉었다.
아서가 말이나마 달라지겠다 선언한 것처럼, 그 역시 이 쓸모없는 소모전을 관둘 때가 되었는지 몰랐다. 카를로스는 일으켰던 몸을 다시 아서에게로 기울였다. 그가 제 자신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어차피 무얼 하든 형님의 의지대로 휘둘리고 말 텐데. 작은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건… 나도 이쯤에서 그만둬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자 순간 아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몰라도 카를로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결국 아서의 의지대로 끌려갈 자신이었다. 형님이 그를 밀어내는 것도 아닌, 입을 맞추고 싶단 소리를 하는데 거부하는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더는 복잡하게 계산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아서가 입을 맞추고 싶다 하였으니, 그는 그 말을 따르면 그만이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달싹이는 입술 위로 카를로스가 입술을 겹쳤다. 말캉한 살덩이를 가볍게 빨아들이고 젖은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뭐.”
예상치 못한 접촉이었던지 아서의 눈동자가 동요했다. 언뜻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빛은 카를로스가 입을 맞춘 순간 또렷해졌다.
“…이쯤에서 관두겠다더니.”
아서가 물었다. 말끝이 무너지는 것처럼 떨렸다.
“뭔가 착각하였나 보군요. 이젠 형님이 무슨 헛소리를 하든 나 좋을 대로 생각하겠단 말입니다.”
카를로스는 더 이상 아서의 속마음을 궁금해하지도, 섣불리 추측하지도 않기로 했다. 형님이 보여 주고자 하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로 단념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속내 또한 더는 감추고 싶지 않았다. 저 좋을 대로 생각하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싶었다. 형님이 그러하듯.
아서는 맥이 빠진 웃음을 지었다.
“…나는 네가, 다 관두고 가 버리겠다는 소리를 하는 줄로 알았지. 누구 마음대로, 감히….”
말끝을 흐린 아서가 양팔로 카를로스의 등을 끌어안았다. 애써 아서의 속내를 꿰뚫어 보려 하지 않아도 등을 안은 손길에서 어린애 같은 집착이 느껴졌다.
카를로스는 제게 매달리는 형제를 마주 끌어안았다. 대체 왜, 하는 의문이 떠올랐으나 곧 잊어버렸다.
해가 걸려 있던 한나절 내내 그가 찾아 헤매던 사람이었다. 익숙한 체온은 그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을 주었다.
단 하나. 지금 이 순간의 아서가 진실하길 바란다는 욕심만 버리면 더 이상 어긋날 일이 없었다.
형님이 그를 속이고자 마음먹었다면 그는 기꺼이 속아 넘어가 줄 것이고, 형님이 진실이라 우긴다면 진실로 받아들여 줄 것이다.
또다시 그는 아서의 몇 마디 말에 잠자코 제 목줄을 내어주었다. 한심하고 어리석다. 그러나 설령 이 모든 게 자기 합리화에 불과한 것인들 어떠한가 싶었다.
형님이 그를 좋아한다고, 입을 맞추고 싶다고 말했다. 처음으로 들은 고백의 말이 너무나 달콤하여 더는 아무것도 계산하고 싶지 않았다.
“…바닥이 차갑습니다, 형님.”
“알아. 네가 눕혔잖아.”
품에 안긴 몸은 전혀 떨어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카를로스 역시 아서를 놓아줄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이대로 형님과 한 몸이 된 채 죽을 날을 맞이하여도 좋을 것 같았다. 카를로스는 아서의 허리를 끌어안고서 몸을 일으켰다. 결코 왜소하지 않은 몸이 가볍게 딸려 왔다. 둘의 시야가 함께 높아졌다.
커다란 창 너머의 풍경이 문득 시야에 걸렸다. 밤하늘. 구름에 가려진 하얀 초승달.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좀 전 골목 어귀에서 올려다본 것과 다를 바 없는 모양인데 거짓말처럼 이렇게나 달라 보인다.
두 사람은 마치 짠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단지 서로를 가만히 끌어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사위가 고요하고 평온했다. 그럴 수가 있는 거였다.
솜털같이 간지러운 정적이 두 사람 사이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형제는 정적 속에서 서로를 느꼈다. 아마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이렇게나 온전히 느낀 순간은.
찬바람에 나무 잎사귀가 흔들렸다. 하얀 달이 그들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창밖을 보던 형제의 시선이 서로에게로 향했다.
아무것도 판단 내리지 않으니 차라리 평온한, 기만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