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장 (12/15)

9장

아서는 며칠 사이에 사람이 기가 차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워서 천장 벽화를 보다가도 웃음이 샜고, 밥을 먹다가도 문득 헛웃음을 흘렸다. 바로 옆에서 가브리엘이 의뭉스럽게 바라보고 있는데도 도무지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적어도 당분간은 형님을 건드릴 생각이 없다고? 그 말을 듣자마자 아서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그 당분간이 대체 얼마 동안이라는 건데. 당장 카를로스의 멱살을 잡고 묻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카를로스가 아서의 마음을 안심시킨답시고 하는 짓들이 오히려 아서의 속을 끓게 만들었다. 늦은 새벽 카를로스의 꿈속으로 뛰쳐 들어가 날뛰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못 참고 터졌을지 몰랐다.

아서는 카를로스가 무언가를 결심한 때에 얼마나 확고해지는지 알았다. 평상시엔 절제라곤 모르는 동물처럼 달려들다가도, 한 번 인내하기로 마음을 먹으면 아서의 페로몬을 종일 들이켜고도 넘어오지 않았다.

얼마 전 그날도 그랬다. 원래였다면 아서가 최음제에 취한 걸 안 때부터 며칠 밤은 뒹굴었을 거면서, 고작 손장난으로 그치고 말았다.

이 최악의 상황은 죄다 황제 때문이었다. 이상한 짓을 해서 카를로스의 마음이 쓸데없이 약해지지 않았나.

황제가 그딴 짓을 한 마당에 카를로스가 아무것도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필립을 심문하느니 뭐니 했고, 한슨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캐물은 걸 보니 제 과거 역시 죄다 알게 된 것 같았다.

나쁜 짓을 한 인간에게 알고 보니 안타까운 과거사가 숨겨져 있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아서가 지은 죄까지 전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카를로스의 마음을 흔들기는 충분했다. 아서가 그를 버린 데에 다른 사정이 있었구나. 이런 생각이 들게끔 말이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침대에 웅크려 누운 채로 아서가 발끝을 까닥거렸다. 침실 벽을 원수처럼 노려보는 시선이 살벌했다.

아서는 저 혼자 한참 씩씩거리다 고개를 돌렸다. 좀 전부터 가브리엘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무언가 관찰하는 것 같은 묘한 눈빛이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툭 묻자, 가브리엘이 기다렸다는 듯 답을 했다.

“주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게 전속 시종의 의무라 들어, 그리하고 있었습니다.”

“경은 내 전속 시종이 아니잖아.”

“허나 하는 일은 빠짐없이 같군요.”

비단 시종의 역할뿐일까, 가브리엘은 부관이 해야 할 업무까지 도맡아 했었다. 순간 반박할 말을 못 찾은 아서가 입을 다물었다.

“조금 거슬리더라도 너그러이 양해 부탁드립니다, 전하.”

가브리엘이 아서를 다독였다. 아서는 불만으로 꿈틀대던 입을 도로 갈무리했다. 그래, 실컷 구경하든지 말든지….

가브리엘이 옆에 있는 게 점점 익숙해진 탓인가, 기사와 함께 있을 땐 종종 그의 존재를 잊어버릴 때가 많았다. 아서가 긴장을 내려놓은 것도 있으나 대개는 이 충성스러워 보이는 기사가 의도적으로 제 존재감을 죽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서를 배려하기 위한 침묵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배려라기보단 아서의 모든 것을 알아내려는 수작에 더 가깝다.

기사는 신뢰 가는 겉모습과 대조적으로 시꺼먼 속내를 지녔다. 아서가 홀로 있을 적에 어떤 행동을 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낱낱이 읽어 낼 수 있기를 원했다. 그렇게 알아낸 것들을 취합해 아서를 교묘하게 휘두르는 건 물론이다.

아서는 알면서도 그 수작에 속아 넘어가 주었다. 가브리엘이 아서에 대해 알게 되고 잘 다루게 될수록 아서는 점점 더 편해졌고, 더 나태한 하루를 보냈다. 원체 타고나길 게으름뱅이인 아서로선 그런 변화가 만족스러웠다.

단지 가브리엘의 이 지극정성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조금 궁금하긴 했다.

어쩐지 가브리엘이라면 더 중요한 것이 생기는 즉시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떠날 것만 같았다. 카를로스에게 십여 년간 충성하다 한순간에 등을 돌렸던 것처럼 말이다.

아서는 타고나길 소유욕이 강한 편이었다. 상대에 대한 감정과 별개로, 한 번 제 것이라 각인한 것은 쉽사리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고작 상상일 뿐인데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서는 구겨지는 얼굴을 감추고자 둥글게 말고 있던 몸을 반대로 돌렸다.

“전하.”

가브리엘이 침대 언저리로 빙글 돌아와서 아서를 불렀다. 이제 관찰이 다 끝난 모양이었다.

“오늘따라 심기가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무언가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딱히 없어.”

이미 딴생각에 빠져 있는 걸 한참 보여 주었지만 아서는 아닌 척 고개를 저었다. 가브리엘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특유의 엷은 웃음을 그려 냈다. 아서의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미소였다. 기사가 삿된 생각이라곤 하지 않을 것 같은 말간 눈으로 아서를 물끄러미 보았다.

“전하.”

“왜.”

“오늘도 이불 속에 숨어만 계시렵니까?”

“…왜?”

“몸을 씻고 싶진 않으신지요. 그리 누워만 계시니 답답하진 않을까 우려됩니다.”

“…조금 답답하긴 하군.”

“전하께서 괜찮으시다면, 목욕 시중을 들고 싶습니다만.”

가브리엘이 아서의 옆머리를 손끝으로 가볍게 쓸었다. 머리칼을 쓸고 내려간 손이 귓바퀴를 지분거렸다.

“함께 욕실로 가시겠습니까?”

당연하지만 함께 욕실로 가잔 말은 결코 순수하게 몸만 씻겨 주겠단 뜻이 아닐 터였다.

아서는 대답은 않고 가만히 눈만 깜빡였다. 아서가 거절하지 않은 건 곧 허락했다는 의미와 동일하였으므로, 가브리엘은 곧바로 그것을 승낙으로 받아들였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아서의 생각을 읽고 움직여 주니 편하고 좋았다. 가브리엘은 옆에 두기에 나쁘지 않은 인물이었다. 눈치가 빠르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알고, 아서가 원하는 건 족족 손에 안겨 주었다.

보기 좋게 길들여지고 있단 자각은 있었다. 단지 그리되어도 별로 손해 볼 건 없다 생각했을 따름이다.

***

“하아….”

아서는 뜨끈한 물이 담긴 욕조에 몸을 담갔다. 부들부들한 거품에서 기분 좋은 향이 번졌다.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거품부터 적당한 온도의 물, 아서의 선호에 딱 맞는 향까지. 전부 가브리엘이 직접 만들어 낸 것이다. 아서의 전 전속 시종을 붙들고 이것저것 배우더니 향유를 배합하는 법까지 알아 온 듯싶었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물속에 푹 잠긴 아서는 누가 봐도 행복해 보이는 표정으로 노곤하게 늘어졌다.

“기분이 좀 풀리셨습니까?”

“응.”

기사는 까탈스러운 주인이 사르르 풀어지는 과정을 만족스레 바라보았다. 물기를 머금은 머리칼이 기사의 손길을 따라 넘어갔다.

미려한 얼굴은 나른하니 늘어진 채다. 투명한 물방울이 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는 게 눈에 띄었다. 조금 창백했던 뺨은 보기 좋게 붉은 물이 들었다.

본래도 화려한 편인 아서의 외모는 물에 젖으면 그 농도가 더 짙어졌다. 겉보기엔 영락없이 방탕한 귀족 사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서는 어떤 옷을 입느냐, 어떤 표정을 짓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쉽게 달라졌는데 가브리엘은 그런 아서를 관찰하는 걸 즐겼다. 정확히는 타인은 알지 못하는 아서의 모습을 발견하는 걸 좋아했다.

일각에선 2황자와 등진 가브리엘을 두고 어리석은 선택을 하였다며 혀를 차곤 했다. 그러나 기사는 지금 생전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에겐 차기 황제의 측근 자리도, 공작가의 가주 자리도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기사로서 쌓았던 명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정의를 수호하라. 약자를 보살펴라. 주군에게 충성하라. 수년간 주입받은 철칙은 어길 이유가 없어 지켜왔던 것뿐, 그것들은 그에게 어떤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전하, 목욕 전에 중화제부터 드시겠습니까?”

가브리엘이 미리 챙겨 둔 약병을 꺼내 들고 물었다. 중화제라는 말에 아서의 눈이 번쩍 뜨였다.

좀 전까지만 해도 권태로이 늘어져 있던 눈매가 구겨졌다.

“…또 그거야?”

아서는 기사의 손에 들린 병을 혐오스러운 벌레라도 보는 것마냥 쳐다보았다. 끈적한 녹색의 액체가 든 병. 딱 한 번 맛보았지만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그것. 전날 한 모금 마시자마자 바닥에 내팽개쳤던 역겨운 액체였다.

병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역겹고 끔찍한 맛이 연상되었다. 짙은 녹색을 띤 중화제는 향도, 맛도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세상 모든 음식쓰레기를 갈아다가 며칠 숙성시킨 맛이 났다.

“그 역겨운 것 좀 갖다 버려. 내가 필요없다고 했을 텐데.”

몸을 옆으로 옮기며 아서가 단호히 거절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싫었던 적이 몇 없었다.

아서의 몸엔 반쪽이나마 이종족의 피가 흘렀다. 그 말인즉슨 보통 인간에 비해 확연히 월등한 회복력을 지녔단 뜻이다. 저 중화제가 잔여한 독성을 없애 준다 하지만 머지않아 회복될 것을 굳이 저런 괴상한 액체까지 마실 필요는 없었다.

투정을 부리는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그랬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아서와는 조금 다른 입장인 듯했다.

“전하, 잘못되면 마나홀에 영구적인 손상이 남을 수 있다 하였습니다.”

“지극히 희박한 가능성으로 말이지.”

기사에게 마나홀은 심장과도 비등한 가치를 지녔기에, 작은 가능성이라 한들 쉽게 흘려보내서는 안 되었다. 가브리엘이 중화제에 집착하는 이유가 납득이 가기는 했다.

“전하.”

“내 몸은 내가 알아. 그렇게 유난 떨면서 챙길 필요 없어.”

“전하께선 아직 아이 같은 면이 있으시군요.”

작게 웃은 가브리엘이 아서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아서로선 조금 억울한 누명이었으나, 가브리엘을 설득하려면 아서가 이종족과 혼혈이라는 사실까지 전부 밝혀야 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철없는 응석받이가 되는 게 나았다.

“지금 나더러 애 같다고 비꼬는 건가?”

“그렇게 들렸다면 송구하옵니다.”

만일 아서가 보이는 성격 그대로의 인물이었다면 지금쯤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저걸 낚아채 한입에 털어 넣었을 테다. 그렇지만 가브리엘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이 안에 필요하다면 언제든 자존심을 내팽개칠 수 있는 아서가 들어앉아 있단 점이었다.

“그리 말해도 안 먹어.”

“이렇게나 투정을 부리시니 앞으론 아이 취급을 해 드려야 할까요.”

저런 비꼬는 말을 다정하게 들리게 하는 것도 참 재주라면 재주였다. 아서는 대답 대신 엉덩이걸음으로 가브리엘에게서 조금 더 물러났다.

다행히 기사는 더 잔소리를 이어 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처럼 둥그런 솔을 들고 거품을 내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아서는 긴장을 풀고 다시 욕조에 몸을 기댔다.

거품을 낸 솔이 살에 닿았다. 어깨를 지나 목 뒤편으로 이동한 손이 등허리를 타고 내려간다. 그간 카를로스 덕에 강제로 금욕을 했던지라 감각이 본래보다 예민했다. 간지러운 자극에 반사적으로 움찔 허리가 휘었다.

아서의 과민 반응이 어떤 신호라도 되었던 건지, 묵묵히 목욕 시중을 들던 가브리엘이 솔을 내려놓았다.

마디가 뚜렷한 손이 등 한가운데 움푹 팬 길을 훑었다. 그러다 불시에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누가 봐도 묘한 의도가 실린 손길이었다.

“잠깐….”

욕조 바닥과 아서 사이를 쑥 파고든 손이 그대로 아서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물속에서 부유한 몸이 가브리엘 쪽으로 기울었다.

욕조를 가득 채우고 있던 물이 크게 출렁였다. 작은 파도처럼 일어난 물은 욕조 밖으로 넘어가 가브리엘의 옷까지 흠뻑 적셨다.

끌려간 아서는 엉겁결에 가브리엘에게 몸을 기댔다. 눈이 마주치자 기사가 웃는다. 그가 손가락이 움푹 들어갈 만큼 엉덩이를 꽉 쥐었다. 찰나 터질 뻔한 탄성을 아서는 가까스로 삼켜 냈다.

흠칫 몸이 튄 순간, 이번엔 다른 쪽 손이 다가와 아서의 둔부를 쥐었다. 검지와 중지가 입구 부근의 살을 주욱 늘렸다.

벌어진 그곳으로 따뜻한 물이 스며들었다. 손끝이 뒷구멍을 멋대로 만지작거렸다. 무례한 움직임에 몸의 온도가 훅 올랐다.

“…….”

어안이 벙벙해진 아서가 입만 달싹였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이만큼이나 노골적인 유혹이 또 없을 거였다.

가브리엘이 아서의 뺨에 쪽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콧등, 눈두덩에 보드랍게 도장을 찍어 대다 아서와 담백하게 눈을 마주쳤다. 저 깨끗한 얼굴만 봐선 지금 아서의 아래를 희롱하는 이와 동일 인물처럼 보이지 않았다.

“…애 취급을 하겠다더니 무슨.”

황당하다는 양 중얼거리자 기사가 못 들은 체를 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전하.”

“뭘.”

퉁명스러운 물음에도 가브리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태연하게 한 팔로 아서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젖은 구멍에 손가락을 거침없이 밀어 넣었다. 내벽을 벌리며 들어간 두 손가락이 극점을 꾸욱 눌렀다.

“읏….”

척추를 타고 저릿한 자극이 번졌다. 갑작스러운 자극으로 몸이 들썩이자 욕조의 물이 크게 출렁거렸다.

“혹시 모를 후유증에 대비하셔야지요.”

“…….”

“중화제를 드시고, 몸이 원상태로 회복되면 그땐 이 이상도 해드리겠습니다.”

이 이상도 해 준다고? 아서가 눈을 깜빡였다. 태연하게 말을 마친 가브리엘이 이번엔 아서의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금세 아서의 몸이 열감에 휩싸였다. 담백한 입맞춤과 달리 아래를 희롱하는 움직임은 능란하기 그지없었다.

“며칠 전부터 줄곧 참지 않으셨습니까?”

아서의 동요를 읽어 낸 기사가 조곤조곤 말했다. 그러는 중에도 아래로 들어온 손이 느긋하게 위아래로 움직인다.

감질날 정도로 질금질금 차오르는 성감에 조금씩 앓는 신음이 나오려 했다.

“으….”

“크게 삼키면 고작 두세 모금입니다.”

아서는 갈등에 휩싸이고 말았다. 저걸 마시느냐, 마느냐 머릿속에서 바삐 저울질을 했다.

“……좋아, 이리 줘.”

결국 아서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가브리엘이 기다렸다는 듯 욕조 옆에 세워 둔 병을 아서에게 건넸다. 초콜릿도 준비해 두었다며 한마디 덧붙이는 게 얄미웠다.

손에 든 병을 빙글 돌려 가며 살폈다. 시간을 끈다고 이 액체가 줄어들진 않을 것이다. 이왕 맞을 매라면 빨리 맞는 게 낫겠다 싶어 아서는 목구멍을 열고 입 안으로 쏟아부었다.

두 모금까지 간신히 삼켰는데, 마지막 모금에서 구역질이 나 입가로 약이 줄줄 흘렀다.

“으….”

“잘하셨습니다, 전하.”

병이 빈 것을 확인한 가브리엘이 곧바로 초콜릿을 입에 넣어 주었다. 아서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로 초코를 입 속에서 굴렸다.

진한 단맛으로 겨우 혀를 씻어 냈다. 가브리엘이 입가를 닦아 주든 말든 안중에도 없었다.

“이제 충분하겠지.”

“예, 잘하셨습니다.”

“그럼 마저 해 줘.”

늘 그랬듯 아서는 부끄러움이라곤 한 점 없이 뻔뻔하게 요구했다. 순간 가브리엘의 눈동자에 웃음기가 스쳐 지나갔으나 아무렴 어떠랴 싶었다. 이런 유혹에 단번에 넘어간 때부터 이미 황족으로서 권위를 잃은 지 오래였다.

***

“아, 흣….”

내벽을 쑤시는 손가락은 느긋했다. 아서의 목 뒤편에 쪽 입을 맞춘 가브리엘이 살갗을 간지럽게 씹었다.

욕조 바닥에 무릎을 꿇은 몸이 더 큰 자극을 원하며 움찔거렸다. 아서가 이런 부드러운 애무를 못 견뎌 하는 걸 알면서도, 기사는 이런 식으로 사람을 괴롭혀 댔다.

그간 지켜본바 가브리엘은 스킨십 자체를 썩 좋아하진 않았다. 대신 아서가 어떤 행위를 참고 견디는 모습을 보는 걸 즐겼다. 싫은 걸 꾹 참고 있는 모습이 그에게 어떤 만족감을 주는 듯했다. 아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참 좋은 성격은 아니었다.

“리엘….”

간지러운 걸 참다못해 뒤를 돌아보려 하자, 커다란 손바닥이 목덜미를 지그시 눌렀다.

“얌전히 계셔야지요.”

“…….”

아서는 짐짓 눈매를 구겼다가 입술을 씹었다. 지금 이 상황에 불만이 많다는 표시였다.

네발 동물처럼 무릎을 꿇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굴욕적이었는데, 이젠 아예 주종이 뒤바뀐 것처럼 보인다. 가브리엘은 마치 강아지의 콧등 위에 먹이를 올려놓고 ‘기다려’를 시키는 악덕 주인 같았다. 아서는 그 말에 침을 뚝뚝 흘려 대며 기다리는 개 쪽이었고.

아서가 어디까지 용인해 줄지 신중히 살피던 기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행동의 강도를 높여 가고 있었다. 작은 일에도 크게 반발했던 아서 역시 차차 순종하는 법을 배운 척 굴었다. 더 오래 참을수록 더 큰 대가를 얻는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읏….”

엉덩이 골에 가브리엘의 성기가 닿았다. 드디어 이 괴로운 시간이 끝나나 싶어 아서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욕조 끄트머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그의 뒤편에 무릎으로 서서, 둔부 사이에 두꺼운 성기를 느릿하게 문지르기만 할 뿐이었다. 기사는 아서가 우기면 열에 아홉은 들어주었지만 가끔은 오히려 보란 듯이 아서를 애태우기도 했다.

뒤를 쑤셔 대던 손이 떨어지나 싶더니 가슴을 꽉 쥐었다. 말랑하지도 않은 것을 가브리엘이 양손을 이용해 억지로 그러모아 외설스러운 꼴을 만들었다.

“내가, 이거 싫다고, 아…!”

다시 몸을 움직이려 들기 무섭게 단단한 손아귀가 가슴을 꽉 쥐어짜듯 움켜잡았다. 가브리엘이 손가락 끝으로 돌기를 꾹꾹 짓눌렀다.

“아, 으….”

“참는 법을 배우지 않으셨습니까, 전하.”

기사를 아는 이 중 누구도 그가 이런 천박한 손놀림을 보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터였다. 실제로 어떤 난잡한 행위를 해도 가브리엘의 얼굴만큼은 늘 깨끗했다.

“굴욕감은 아주 잠시만이고.”

입구를 느리게 문지르던 성기가 꾸욱, 안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통과 닮은 쾌감이 느리지만 뚜렷하게 밀려들었다. 차오르는 압박감에 아서가 손등 위로 이마를 붙인 채 헐떡였다.

“흐, 아윽….”

“결국 기분이 좋아질 거란 거…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발기한 좆을 밀어 넣으며, 가브리엘이 꼭 세뇌라도 시키는 양 귓가에 속삭였다. 그는 반쯤 들어갔던 것을 뒤로 살짝 물린 뒤 아서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강하게 쑤셔 박았다.

“흑!”

하마터면 그대로 사정할 뻔했던 아서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기사는 좆을 밀어 넣은 상태로 다시 한번 더 허리 짓을 해 깊이 박아 넣었다.

“흐으, 읏.”

“힘 푸셔야지요.”

찰박, 찰박, 여유로운 움직임과 함께 살덩이가 비좁은 내벽을 밀고 들어갔다. 이미 빠듯하게 벌어진 안이 강제로 넓혀지자 아서가 움찔움찔 어깨를 떨었다.

반복된 정사에도 도통 적응을 못 하는 구멍은 늘 기사의 것을 끊어 낼 것처럼 조였다. 허리를 쓰다듬으며 달래도 아서는 괴로운 듯 헐떡이기만 했다.

육체적인 쾌락에 눈을 뜬 지는 꽤 오래되었으나, 아서의 몸짓은 여전히 어설픈 면이 있었다. 제 몸의 회복력을 과신하고 스스로를 막 다루는 경향까지 있었기에 옆에서 제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설령 상처가 생기더라도 모두 그가 예상한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도록 말이다.

“아윽, 아, 아…!”

기사의 허리 짓이 서서히 빨라졌다. 두꺼운 성기가 들락이며 아서의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미끈거리는 물 탓에 욕조 턱을 붙잡은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지지대를 놓쳤다간 아서는 얼굴까지 물속으로 잠길 판이었다.

두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 욕조의 물이 출렁이는 탓에 보통 때보다 시끄러운 소음이 일었다. 철벅거리는 요란한 물소리가 꼭 고막을 때리는 것만 같았다.

“하아. 전하, 이리로. 손.”

“응, 흐읏.”

불쑥 다가온 손이 아서의 양 팔뚝을 잡고 뒤로 꺾었다. 아서는 순간 고개가 아래로 처박힐 뻔한 것을 간신히 모면했다.

팔꿈치 관절이 접히는 곳 아래가 꽉 붙잡혔다. 팔이 당겨지자 자연히 허리가 휘고 턱이 위를 향해 들렸다.

그 와중에도 삽입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더는 손이 미끄러질 일은 없겠지만 순전히 가브리엘에게만 의존한 모양새라 불안했다. 양팔이 뒤로 구속된 것뿐인데 아서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잘못 버둥거렸다간 꼴사납게 미끄러질 것 같았다.

“잠, 깐, 흐읏, 아…!”

배 속을 헤집듯 성기가 쑤셔 박혔다. 예민한 부위를 긁고 지나가는 감각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한 번 한 번이 꼭 둔기로 때리는 것만 같은 강한 삽입이었다.

“흐으, 아, 아!”

뒤에서 세게 처박을 때마다 몸이 크게 덜컹거렸다. 누르기만 해도 괴로운 부위를 뜨겁고 뭉툭한 살덩어리가 마구 짓이겼다. 터지는 신음을 도무지 삼킬 수가 없었다. 몸이 흔들릴 때마다 신음이 끊기듯 터져 나왔다.

“리엘, 아, 파, 으, 흐윽…!”

아서는 허리를 비틀며 신음했다. 아프다는 말이 절로 터져 나왔다. 좆이 때려 박히는 배 속뿐만 아니라 철썩대며 맞부딪히는 부위마저도 아팠다. 온몸의 장기마저 함께 흔들리는 듯한 삽입은 폭력적이기까지 했다.

검붉은 성기가 다시 둔부를 가르며 쿵 처박혔다. 고통 섞인 신음이 터졌다. 목뒤에 힘을 주어 버티려 해도 이내 버티지 못하고 맥없이 흔들리고 말았다. 퍽, 퍽, 거친 삽입을 이어 가며 가브리엘이 물었다.

“…아프, 십니까?”

“응, 으…, 흑…!”

“하아. 잘된, 일이군요. 전하께선 아픈 걸 좋아하시니까요.”

시끄러운 마찰음이 퍼지는 와중에 다정한 속삭임이 머리 위를 울린다. 굴욕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닌 오로지 사실을 확인시키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 부드러운 음성에 치부가 까발려진 양 아서의 목덜미가 화끈 달아올랐다.

순간 벙쪘던 아서는 약점을 공격당한 사람처럼 인상을 구겼다.

“나 안 할, 읏…!”

하기 싫다며 발버둥을 치다 욕조 바닥을 디디고 있던 무릎이 미끄러졌다. 가브리엘이 곧바로 한 팔로 아서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그러곤 순간적으로 붕 뜬 몸을 붙들고 다시 허리를 강하게 쳐올렸다.

“흐, 아…!”

기사는 아서를 달래는 대신 좀 전보다 더 거친 삽입으로 대응하였다. 만일 정말로 끔찍하게 싫었다면 벌써 가브리엘을 걷어찼을 아서이니 작은 거부는 쉽사리 묵살했다. 자존심 때문인지, 이미 한참 전에 들킨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그 점을 말로 꺼내면 아서는 불같이 화를 냈다. 언제쯤 솔직하게 인정을 하게 될까. 이성을 잃고 넋이 나간 순간엔 고개를 끄덕이게 될까, 작은 궁금증이 들었다.

아서의 허리를 팔로 휘어잡은 가브리엘은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성기를 박아 넣었다. 거친 삽입과 달리 그의 신체는 유려한 곡선을 그려 냈다.

“아윽, 아, 아…!”

내벽 깊숙한 곳 급격히 좁아지는 부위가 꿰뚫리자 아서가 온몸을 벌벌 떨었다. 물에 젖은 등 근육이 움찔움찔 경련했다. 아서의 성기에선 아무것도 배출되지 않았으나 등허리는 절정에 달한 것처럼 간헐적으로 경직되었다. 그때 좆을 뿌리 끝까지 밀어 넣은 가브리엘이 둥글게 허리를 돌렸다.

“흐으…! 아, 흑…!”

아서가 일순간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 가브리엘은 그 모든 광경을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버럭 화를 내다가도 이처럼 조금만 얼러 주면 금세 흐트러지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흰 둔부 사이로 번들거리는 성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감추기를 거듭했다. 어떤 말을 할 여유조차 없던 아서는 희미한 신음만을 흘렸다. 아서의 몸이 힘을 잃고 흔들렸다.

“흐으윽…!”

극점을 짓누르는 자극에 미처 적응하기도 전, 검붉은 성기가 쑥 빠져나갔다 처박혔다. 깊숙이 좆이 박힌 채로 몸이 반대로 돌아갔다.

“아프, 아!”

절정의 여운에 젖을 새도 없이 아서는 가브리엘의 허벅지 위에 철퍽 주저앉혀졌다. 기사가 허리를 쳐올렸다.

세게 쳐올릴 때마다 아서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가브리엘이 허리를 끌어안고 있지만 시야가 흔들리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서는 본능적으로 기사의 목에 팔을 둘렀다.

가브리엘이 칭찬이라도 하듯 소리 없이 입을 맞추었다. 이미 이 자세만으로도 버거웠던 아서가 고개를 돌려 입맞춤을 피했다.

“응, 읍…!”

그 순간 커다란 손이 뒷머리를 휘어잡았다. 잇새로 뜨거운 살덩어리가 밀려들었다. 거칠게 쑤셔 박힌 혀가 능숙하게 입 안을 긁고, 핥으며 희롱한다.

젖은 점막끼리 맞닿으며 쉴 새 없이 난잡한 물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린 점막을 헤집는 입맞춤은 탐욕스러웠다.

눈앞이 희부옇게 번졌다. 아서는 간간이 입술이 떨어지는 찰나마다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욕실을 가득 채운 수증기 때문인지 숨이 편히 쉬어지지 않았다.

“하윽, 아, 아!”

몸을 쳐올리는 추삽질은 멈추지 않았다. 아서를 꽉 구속한 손이 좆이 빠져나갈 땐 아서를 들어 올렸다가 박힐 땐 강하게 아래로 처박았다. 명치까지 무언가 쑤셔 박히는 것만 같았다.

내벽을 때리는 고통도 잠시, 번뜩이는 쾌감이 몸속을 미친 듯이 헤집었다. 아서는 입가로 타액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멍하게 넋을 놓았다.

“하아, 전하….”

아서를 끌어안은 팔이 꿈틀거렸다. 손등부터 가지를 뻗어 올라온 푸른 핏줄이 도드라졌다.

기사의 단정한 눈매에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배 속 깊숙이 박힌 좆이 팽팽하게 부푸는 것과 동시에 아래를 처박는 속도가 미친 듯이 빨라졌다.

절정을 느낀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아서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졌다. 끔찍한 절정이 발끝부터 밀려들었다. 서서히 번지던 파문이 이내 큰 파도가 되어 아서를 뒤덮었다. 아서는 어찌할 바 모르고 앞에 있는 것을 끌어안았다.

***

잠깐 선잠이 들었던 것 같다. 축축했던 몸은 언제 젖었냐는 듯 뽀송한 이불 속에 안겨 있었다. 아서는 개운한 얼굴로 기지개를 켰다. 짧지만 달았던 잠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전하.”

가브리엘이 아서의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아서는 반만 뜬 눈으로 대충 긍정하고선 기사의 반대쪽으로 몸을 둥글게 말았다. 눈만 떴을 뿐, 좀 더 침대 위에서 뭉그적거릴 생각이었다.

매일 하는 일 없이 가브리엘과 노닥거리기만 하는데 어째 전혀 지루하지가 않았다. 일을 하지 않으면 몸이 근질거리는 이들도 있다지만 아서는 예외였다. 그는 타고난 게으름뱅이였다.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속이 허했다. 귀찮음과 배고픔 사이를 저울질하던 아서는 누워서 빈둥거리기를 택했다. 반대로 몸을 빙글 돌려 제 뒤편에 있던 가브리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품에 다 들어오지 않고 말랑하지도 않은 몸은 썩 좋은 베개 역할을 하진 못했다.

“일어나셨으니 먼저 식사부터 하시겠습니까?”

제 배에서 무슨 소리가 난 것도 아니건만 기사는 또 눈치 빠르게 물었다. 배가 조금 고프긴 했다. 다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가 심히 귀찮았다.

“조금 뒤에. 지금은 안 내켜.”

“또 끼니를 거르시려고요.”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아서가 중얼거렸다. 왠지 모르게 아서는 기사의 물음에 변명을 하고 있었다.

“별로 입맛이 없어.”

“어제도 그리 말씀하시고 식사를 거르시지 않았습니까.”

그야 음식 맛이 이상해졌으니 그렇지. 투덜거린 아서가 얼굴을 찌푸렸다. 씁쓰레한 맛이 나던 두툼한 고기를 떠올리자 지금도 혀에서 쓴맛이 감도는 듯했다.

“요사이 주방장이 바뀌었던가? 음식 맛이 형편없어졌어. 역겨운 약초 향이 나지 않나.”

“몸을 회복하는 데에 좋은 약초를 우려 넣어 그렇습니다. 기사에게 유용한 영약이기도 하지요.”

“약초고 영약이고…. 전부터 느꼈지만 그대는 너무 과해. 모르는 이가 보면 내가 사경이라도 헤매는 줄 알겠어.”

저번 황제에게 붙들려 쪽팔린 꼴을 보였던 이후로, 가브리엘이 전보다 더 아서를 싸고돌기 시작했다. 아서 역시 제국 내에서 열 손가락은 아니고 대강 쉰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는 강자인데 왜 이렇게 연약한 사람 취급을 하는 건지 의문이었다.

“전부 전하께 필요한 것들입니다. 이전엔 전하께서 스스로 찾아 드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거야 다 예전 일이고. 지금은 필요 없어.”

과거의 아서는 인력을 풀어 기사에게 좋단 약재란 약재는 다 구해다가 먹었다. 별 쓸모라곤 없던 짓거리였다. 그 발악을 했는데도 카를로스와의 격차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세상에는 아무리 죽을힘을 다해도 안 되는 게 있는 법인데 아서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질투심과 패배감, 무력감에 숨을 쉴 수 없던 나날들이었다.

그때와 비교해 지금은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먹고, 자고, 섹스하고. 본능에 충실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아서가 꿈꾸던 인생이 바로 이런 거였다.

여기다 카를로스만 본래대로 돌아오면 정말 완벽할 텐데….

“아까 중화제도 먹지 않았나. 오늘 식사엔 이상한 짓 하지 마.”

아서는 가브리엘에게 나름 단호하게 말했다. 한데 왜 이렇게 떼쓰는 것처럼 들리는지 알 수가 없다.

“글쎄요, 전하. 중화제를 복용한 데에 대한 대가는 이미 치렀습니다만.”

가브리엘이 아서의 귓바퀴를 손끝으로 은근히 만지작거렸다.

“그걸로는 부족하셨습니까?”

또 저렇게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사람을 꼬셔 댄다. 아서는 내심 황당한 기분을 느꼈다.

과거 아서의 목 한 번 못 건드리고 수줍게 물러났던 기사와 좀 전 제 가슴을 난잡하게 주물러 댔던 이가 동일 인물이 맞긴 한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물론 그래서 더 좋기는 했다.

“…알겠습니다. 전하께서 입맛이 없으신 듯하니 오늘은 그렇게 하지요.”

아서가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자 가브리엘이 한발 물러났다. ‘오늘은’이라는 조건이 붙은 것이 불만스러웠으나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주방장에게 가 봐야겠군요.”

식사를 가져올 참인지 가브리엘이 몸을 일으켰다. 아서는 이불 밖으로 나온 기사의 나신을 위아래로 훑었다. 기사는 아서의 시선을 모르는 체할 생각인지 아서가 빤히 바라보는 줄 알면서 아무 내색 하지 않았다. 그에 아서도 안심하고 편안히 구경했다.

카를로스에 관한 것을 제외하면 아서는 가브리엘 앞에서 제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전생의 기억을 찾기 전부터 욕심이 많았고, 그걸 숨기는 법을 모르던 아서였다. 이제 와서 제 욕구를 감추며 수줍어하는 게 더 이상했다.

의복을 걸친 기사가 침실 문을 열고 나가 식사 준비를 마치는 순간까지, 아서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전하, 이리로 오시겠습니까.”

아서가 세상 제일가는 게으름뱅이처럼 빈둥거리고 있을 때, 가브리엘이 아서를 불렀다.

먹기 좋게 차려졌을 식사를 생각하니 그제야 조금 움직일 의욕이 생겼다. 아서는 기지개를 켠 뒤 침실 옆에 딸린 작은 응접실 겸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황태자궁 내에 따로 만찬장이 있었지만 거기까지 걸음하는 일은 드물었다.

이젠 침의를 걸친 부스스한 꼴로 식사를 하는 게 더 익숙했다. 이른 새벽 일어나 갑갑한 예복을 갖추고 곧장 집무실로 향하던 때를 상기하니, 백 년이고 만 년이고 얼마든지 게으름을 피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자리에 착석한 아서를 따라 가브리엘이 그 옆에 앉았다. 아서의 앞엔 포크 하나 놓여 있지 않았다. 그 대신 기사가 스푼을 들어 아기 새에게 먹이를 주는 것마냥 하나하나 떠먹여 주었다.

따끈한 수프를 먹은 다음엔 기사가 고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입에 넣어 주었다. 아서는 뻔뻔스레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먹었다.

“맛은 좀 어떠십니까?”

“음, 맛있네.”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가브리엘의 얼굴 위로 만족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음식에 큰 호불호가 없는 아서는 웬만하면 가브리엘이 주는 걸 잠자코 받아먹었고, 그럴 때마다 가브리엘은 크게 만족스러워했다. 아서가 게을러지고 의존적으로 변할수록 기사는 보람을 느끼는 듯했다.

어째 좀 전보다 더 즐거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몸을 섞을 땐 아서가 이렇게 얌전하게 굴지 않으니 한편으론 당연하긴 했다. 아서는 먹는 건 대충 짜든 싱겁든 입에 넣을 수 있었는데, 섹스에선 호불호가 뚜렷했다. 만일 가브리엘이 하고 싶은 대로 놔두면 아서는 종일 고문과도 같은 다정한 정사를 견뎌야 할 터였다. 생각만 해도 괴롭기 그지없었다.

식사를 대강 마친 아서는 다시 느릿느릿 침실로 돌아갔다. 식곤증에 꾸벅꾸벅 조는 것을 가브리엘이 잘 도닥여 기어이 침실 밖으로 끌고 나갔다. 찬 날씨에 정원을 산책하니 조금 잠이 깨는가 싶다가, 침실로 돌아오니 다시 또 잠이 밀려들었다. 어째 잠은 자면 잘수록 늘어나는 듯싶었다.

***

카를로스가 문고리를 잡기 전 먼저 침실 문이 열렸다. 카를로스의 기척을 느낀 기사가 먼저 방문을 열고 나가려 한 것이었다.

늘 그랬듯 두 사람은 아무런 인사 없이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늦은 새벽, 아서는 곤히 잠이 들어 있었다. 캄캄한 방 안에 들리는 소리라곤 아서의 숨소리만이 유일했다. 카를로스는 복잡하게 밀려드는 감정을 무시하고 귓가에 들리는 숨소리에만 집중했다. 희미한 소리에 흔들리던 마음이 차츰 진정되었다.

그가 손을 뻗어 아서의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불긋하게 남은 자국을 손으로 더듬어 보지만 그런다고 거슬리는 흔적이 지워질 리가 없었다.

기분이 끝도 없이 가라앉았다. 아서와 가브리엘의 관계를 알면서도 눈감아 주어야 하는 건, 카를로스에게 큰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다.

“…형님.”

애초에 자고 있던 게 아닌지 아서가 눈을 떴다. 시선이 마주쳤지만 역시나 다시 눈을 감아 버린다.

카를로스는 오랫동안 기사의 처우에 대해 고민해 왔다. 만일 기사가 우드힐 가문에 속해 있지 않았더라면, 고민 없이 기사의 목을 베었을 것이다.

꼭 죽이지 않고도 기사를 아서에게서 떨어트릴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거동이 힘들 만큼 다치게 만들거나, 이곳에서 한동안 멀리 떨어트려 놓는 정도야 지금으로서도 충분히 가능한 범위 내였지만….

나날이 무기력해지는 아서가 마음에 걸렸다.

그의 기억 속에서 아서는 어떤 수를 써서든 그를 이기고 싶어 하던 형제였다. 이토록 힘없이 늘어져 종일 침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이는 카를로스가 알던 아서가 아니었다.

아서는 하루하루 시들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나 욕심 많던 사람이 이젠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어 보인다. 그 낯선 모습이 카를로스를 두렵게 만들었다.

죽는 날까지 아서를 놓아주지 않는다는 말이, 평생 망가진 빈껍데기만을 끌어안고 살겠단 의미는 아니었다.

빈껍데기만으로 만족하기엔 이미 원하는 게 많아져 버린 지금이었다. 한때는 아서의 몸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척 스스로를 속일 수 있었지만 더 이상은 아니었다. 고작 그런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강요로 인한 웃음이 아닌 진심 어린 미소를 언젠가 한 번 정도는 보고 싶었다. 염치없게도, 꿈이 아닌 현실에서.

그래서 형님에게서 가브리엘을 떨어트리지 못했다. 약해진 형님이 홀로 작금의 상황을 견뎌 낼 수 있을지 도무지 확신할 수 없었다.

기사를 생각하면 여전히 불쑥불쑥 화가 치밀어 오를 때가 많았다. 형님과 가브리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심장이 달군 쇠로 지져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론 형님이 그의 옆에 있는 지금, 다른 건 얼마든지 인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난 일을 되돌아보았을 때 결국 몸은 중요치 않았다. 몸을 섞는다고 마음까지 가져올 수 있는 거였다면 아서는 진즉 그의 것이 되었을 터다. 그러니까 제가 가브리엘에게 형님을 빼앗긴 게 아니라고, 질투심이 차오르는 순간엔 그렇게 몇 번이고 되뇌었다.

카를로스는 아서의 뒤편에 몸을 뉘었다. 자연스레 허리를 끌어안고 평소처럼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목 뒤편에 남은 붉은 자국이 거슬렸다.

꼭 보란 듯이 눈에 띄는 곳에 자국을 남겨 둔 건 그의 심기를 건드리기 위한 걸까. 아니면 그저 행위에 휩쓸린 나머지 흔적이 타인의 눈에 띄든 말든 상관하지 않은 걸까. 생각을 이어 가다 무심코 팔에 힘이 들어갔던지 아서의 몸이 경직되었다.

“…건드릴 생각 없으니 마저 주무세요.”

카를로스는 아서를 다독였다. 끌어안은 팔을 풀지는 않았다. 안고 자는 건 어렸을 때도 곧잘 했던 행동이라고, 이 정도는 건드리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긴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채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다른 모든 걸 뒤로하고 아서의 체온만을 느낄 수 있었다. 형님을 끌어안고 있는 찰나만큼은 풍랑에 흔들리던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곤 했다.

그리 긴 시일이 지난 게 아닌데도 해가 뜬 바깥에서 아서를 본 게 까마득한 일처럼 느껴졌다. 늦은 밤 찾아와 얼마간 눈을 붙이고 나가기 일쑤니 얼굴을 마주할 시간조차 모자랐다.

이따금 일찍 침실을 찾아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서는 인기척에 깨어나더라도 무시하고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러면 카를로스도 별다른 말 없이 아서를 끌어안고 조용히 잠이 들곤 했다.

피로하다. 어린 날의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위를 거머쥐리라 결심했고, 이제 오랜 목적이 이루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럼에도 복잡하게 엉킨 상념 속엔 기쁨 한 자락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하루빨리 형님을 제 반려로 맞이하고 싶었다. 아서는 질색하겠지만 이것만큼은 아서에게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 아서의 과거를 알고 난 후로 많은 것이 달라졌으나, 결코 달라지지 않는 하나였다.

아서를 놓아주는 일을 제외하고 카를로스는 아서에게 모든 걸 해 줄 작정이었다. 가브리엘을 옆에 끼고 있든, 무얼 하든 간에 전부 모르는 척 눈감아 줄 수 있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달래다 보면 언젠가는 아서도 단념하게 될 것이다. 지긋지긋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의 곁에 머물게 될 테다. 아서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는 제 좋을 대로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한참 눈을 감고 있던 아서가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리엘은?”

“…좀 전에 갔습니다.”

카를로스는 치미는 감정을 숨긴 채 담담히 답했다. 아서가 대뜸 가브리엘을 언급한 목적이야 뻔했다. 그를 상처 주고 싶은 것이다. 화가 나서 날뛰는 걸 보며 비웃으려 하는 것이었다.

이런 뻔한 도발에 넘어가기엔 이제 그도 어느 정도 질투심에는 면역이 생겼다.

“아직까지 안 자고 무엇 하고 계셨습니까.”

“…네가 자고 있는 걸 깨우지 않았느냐.”

카를로스가 웃음 지었다. 처음부터 눈만 감고 있었던 주제에 제 탓을 했다.

“형님과 입씨름할 여력 없습니다. 입 다물고 주무시죠.”

몸을 더듬고 올라가 입술 위를 덮었다. 크게 힘을 주지 않았지만 아서의 입을 다물게 하기엔 충분했다. 손가락 틈새로 분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얌전히 주무세요. 시간도 늦었지 않습니까.”

카를로스가 손을 움직여 이번엔 아서의 눈꺼풀을 덮어 내렸다. 억지로 감긴 눈이 움찔움찔 떨리는 게 느껴졌다. 속눈썹이 위아래로 흔들리며 카를로스의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간질간질한 감각이 신경 쓰여, 결국 카를로스는 손을 도로 허리 쪽으로 내렸다.

분명 몸을 눕혔을 땐 조용히 자야겠단 생각밖에 없었는데 또 사소한 자극에 대뜸 몸이 반응했다. 카를로스의 성기가 반응한 것을 느낀 듯 아서가 몸을 조금 떨어트렸다.

“안 건드린다 했습니다. 지레짐작해서 피하지 마세요.”

“…너 같으면 그 말을 믿겠어?”

“편할 대로 생각하시죠.”

카를로스는 아서가 물러난 거리보다 더 바투 끌어당겨 그를 안았다. 구속당한 몸이 티가 나게 굳었다.

사실 아서와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을 때 괴로운 건 카를로스도 매한가지였다. 하나 그렇다 하여 아서와 떨어져 있고 싶진 않았다.

형님을 안는다고 마냥 즐거운 건 아니었지만, 떨어져 있으면 마음이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 형님을 안고 있을 때는 괜찮았다. 하지만 형님이 시야에 잡히지 않는 때부터 서서히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낮 사이 잠깐 피로한 눈을 붙이려 해도 형님이 옆에 없으면 잠이 오지 않았다. 아서를 안고 그 체온을 느껴야만 비로소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간 듯한 안정감이 들었다.

꽉 안겨 있는 게 갑갑하다며 아서가 몸을 꿈틀거렸다. 카를로스는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거의 한 몸처럼 딱 붙어 있으니 움직일 때마다 자연스럽게 그의 것이 자극되었던 탓이다.

“하, 좀 가만히…….”

의도한 상황이든 아니든 아서는 항상 그의 인내를 시험했다. 가브리엘의 흔적을 드러낸 채 일부러 가브리엘을 언급하고, 이젠 제 것에 몸을 비벼 댄다. 아서 입장에선 답답하여 그런 것이겠으나 카를로스에겐 숫제 그를 유혹하는 걸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아서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보다 강하게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평소처럼 고개를 묻고 숨을 골랐다. 인내하는 게 쉽지 않았다.

아서의 과거를 알게 된 이후 그는 제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골몰했다. 과거 제 행동이 뼈저리게 후회스러운 것과 별개로, 여전히 형제를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한참의 고민 끝에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당분간… 그러니까 적어도 혼인식을 치르는 날까지 그는 아서를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 그 이후로도 아서가 원치 않는다면 손끝 하나 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의 곁에 머무는 것.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 카를로스는 아서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여전히 아서에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는 지극히 그만의 일방적인 배려였다.

***

일 년 내내 쉴 틈 없이 바삐 돌아가는 황도였지만 누군가에게는 딱히 그렇지만도 않았다. 특히 제 궁에 콕 틀어박혀 있는 아서에겐 유난히 하루하루가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난 듯 느껴졌다.

요양이라도 온 양 편히 늘어져 있던 것도 잠시, 아서는 시간이 이렇게 한 발… 한 발… 병든 말처럼 느리게 기어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침실에 혼자 남은 아서는 황족으로서 위엄이라곤 쥐뿔도 없는 모양새로 침대 위를 굴렀다. 아서의 몸 위를 덮은 이불이 소리 없이 들썩였다. 그가 갑갑한 속을 견디지 못하고 애꿎은 이불을 팡팡 내려쳤다. 두툼한 이불이 손안에서 구겨졌다.

“대체 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카를로스가 이렇게까지 변한 건지, 아무도 부탁한 적 없는 배려를 하는 건지 아서는 누구에게든 따지고 싶었다. 어째서, 왜. 속으로 수도 없이 묻고 또 물었다.

슬프게도 진정으로 그 이유를 몰라서 묻는 건 아니었다. 단지 아서는 눈앞에 닥친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것뿐이었다.

이제 아서도 머리로는 인지하고는 있었다. 기어코 카를로스가 변했다는 사실을. 그것도 아주 나쁜 방향으로 말이다.

그동안의 일이 전부 백일몽이었던 것처럼, 카를로스와 아서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졌다.

고작해야 밤늦게 침실로 찾아와 아서를 끌어안고 자는 것. 거기까지가 며칠간 카를로스가 보인 행동의 전부였다. 일부러 가브리엘을 언급하며 도발하여도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아서로선 정말이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 약 이 주일까지는 아서도 인내심을 발휘하여 카를로스의 일탈을 참아 주었다. 그 ‘당분간’이 얼마나 오래갈지 몰라도 카를로스가 한 번 제 입으로 말한 이상 쉽사리 철회하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한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 달은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싶었다. 처음 카를로스에게 접근했던 때를 떠올리면 이 정도야 그리 긴 기간이 아닌 것 같았으나,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기분이 다르다고 이젠 고작 한 달이라는 시간이 어찌나 안 지나가던지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다.

당연히 아서라고 이때까지 멍하니 손가락만 빨고 있던 것은 아니다. 죄다 허사로 돌아간 게 문제였지, 그도 어떻게든 이 난관을 돌파해 보고자 노력을 했다.

카를로스가 가브리엘의 흔적을 보고도 넘어오지 않은 건 시작에 불과했다. 아직까지 믿기지 않지만 카를로스는 지난 한 달간 아서를 방치하다시피 했다. 아서의 머릿속에 그 끔찍했던 나날들이 차례차례 지나갔다.

방치 1일째.

처음엔 다소 안일하게 생각했었다. 아서의 손짓 발짓을 넘어서 숨소리 하나에도 곧바로 달려들던 카를로스였으니까, 조금만 건드려도 넘어오겠지 싶었다.

아서는 기대에 부푼 채로 가운을 걸쳤다. 허리끈을 허술하게 매고 침대 위를 몇 번 뒹구니 금세 그럴듯한 모양새가 갖추어졌다.

그러나 카를로스의 반응은 아서가 상상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아서를 목격한 카를로스는 벌어져 있던 가운 속으로 손을 넣기는커녕 옷자락을 단정하게 여며 주었다.

혼백 상태로 지켜보던 아서가 살벌하게 인상을 구기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카를로스는 태연히 아서의 육신을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방치 3일째.

이날은 아서가 크게 마음을 먹고 가브리엘에게 흔적을 많이 남겨 달라 요구했다. 벗은 몸이 안 통하면 화라도 부추겨 보자는 심산이었다.

물론 카를로스는 그때도 썩 유별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싸늘한 눈으로 잠이 든 아서를 쳐다본 것이 전부였다.

오기가 생긴 아서가 이를 갈며 카를로스가 잠들기만을 기다렸지만, 그날 카를로스는 새벽 내내 잠을 자지 않았다.

결국 기다리다 지친 아서가 먼저 도로 제 몸속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서가 눈을 떴을 때, 이미 침실에는 아서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방치 5일째.

아서는 저번처럼 가운을 풀어 헤치고 누웠다. 제가 급하게 굴었음을 인정하고 다시 차근차근 시작해 보려 마음먹었다.

한두 번으로 안 넘어오면 꾸준히 조금조금 인내를 갉아먹으면 그만이었다. 최근 카를로스의 모습에 익숙해져서, 이전의 카를로스를 넘어뜨릴 때 얼마나 오래 골머리를 앓았는지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때를 떠올리며 아서는 다시 초심을 되찾고자 했다. 이번엔 카를로스가 뒤에서 끌어안으면 은근슬쩍 몸을 돌려 같이 끌어안을 계획을 세워 두었다.

그런데 그날 카를로스는 한참 아서를 내려다보기만 하고, 자리에 누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서의 머리카락만 만지작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무얼 하려나 싶어 좀 더 가까이 다가간 순간, 살짝 몸을 숙인 카를로스가 아서의 뺨에 스치듯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 나선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아무래도 눈을 붙일 시간이 없어 잠깐 들르기만 한 모양이었다.

“…….”

며칠 내내 그렇게나 밀어내더니 도둑 키스를 하고 가 버릴 줄이야. 아서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슬며시 올라갔다.

뽀뽀를 받은 건 잠이 든 육체인데 아서는 괜히 제 뺨을 긁적거렸다. 우습게도 그날 아서의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

상당히 관대해진 아서는 카를로스의 입장을 조금 생각해 주기로 했다. 카를로스도 체면이 있을 텐데, 제 입으로 했던 말을 단번에 뒤집기는 창피할 것이다. 아서는 카를로스에게 며칠간의 유예를 주기로 했다.

방치 7일째.

일주일이면 많이 기다린 셈 아닌가? 언제까지 부둥켜안고 잠만 잘 건지 묻고 싶었다. 아서는 카를로스의 조심스럽던 입맞춤을 되새기며 애써 분기를 눌러 참았다.

방치 15일째.

뭐가 진전되는 기미라도 보여야 희망을 가질 텐데, 매일이 비슷한 하루 일과의 반복이었다. 이쯤 되니 아서는 다시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다.

방치 17일째.

역시 가장 화가 머리끝까지 났던 날은, 카를로스가 아서를 먼저 건드렸던 때였다. 십여 일째 먹히지도 않는 유혹을 하느라 아서는 지쳐 있었다.

별 기대 없이 늘어져 있던 도중, 갑자기 침실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무언가 싶어 쳐다보자 카를로스가 서 있었다.

카를로스는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눈으로 침실 내부를 훑더니 아서에게 다가왔다. 멍하니 있는 아서를 그가 훅 끌어당겨 껴안았다.

급히 뛰어왔던 건지 카를로스의 체취가 짙게 느껴졌다. 겨울인 것이 무색하게 뜨거운 열기가 피부로 전달되었다.

“하아, 형님….”

“…….”

평소와 달라 보이는 카를로스를 보고 아서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카를로스는 아서를 끌어안고선 복부 부근을 더듬었다. 그걸로 그치지 않고 아서의 뒷머리에 뺨을 비비적거리기도 했다. 마치 아서의 냄새를 자신에게 묻히려는 것 같은, 갈급하기까지 한 몸짓이었다.

아서는 무언가 기대했으나… 놀랍게도 그날은 그걸로 끝이었다. 카를로스는 내내 성적 뉘앙스라곤 없는 손길로 아서를 끌어안고 몸을 부볐다.

약이 오른 아서는 그날도 결국 도망치듯이 육신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아침 일찍 눈을 떴을 때 카를로스는 또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열이 받은 아서는 카를로스의 베개를 들고 바닥에 내팽개쳤다.

방치 20일째.

더는 못 기다리겠다. 마침내 아서의 인내심이 바닥을 쳤다. 아서는 아예 작정하고 카를로스를 유혹하기로 마음먹었다.

침실로 들어온 카를로스 옆에서 아서는 혼백으로 둥둥 떠다녔다. 어차피 카를로스가 바로 눕지 않을 것을 알고 있으니 여유롭게 허공에 턱을 괸 채로 지켜보았다.

카를로스가 아서를 바라보는 수십 분 동안, 아서도 카를로스의 얼굴을 핥아 내듯 관음했다. 길고 서늘한 눈매는 어쩐지 보는 이의 등골을 저릿하게 만드는 면모가 있었다.

저 오만한 눈동자가 육욕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유려한 턱선을 타고 땀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고 싶었다. 욕정에 취해 뜨겁게 아서를 갈구하는 눈을 마주하고 싶었다.

이제는 꿈 말고, 현실에서.

애가 탔다. 카를로스가 침대 위에 몸을 눕혔을 때, 아서도 잠시 간격을 두고 몸속으로 되돌아갔다.

아서는 뒤척거리다 잠에 취한 척 카를로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래도 안 넘어오고 버틸 거냐는 오기 가득한 몸짓이었다.

“으음….”

카를로스를 끌어안고 가슴팍에 고개를 부비적거렸다. 잠꼬대처럼 신음을 흘리자 끌어안은 몸이 대번에 뻣뻣하게 굳었다.

이 얼마 만에 만져 보는 카를로스인지. 생각 같아선 이대로 올라타고 싶은 걸 꾹꾹 눌러 참았다. 원하는 바를 쟁취하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야 인내할 수 있었다.

아서가 원하는 건 단순히 카를로스를 유혹하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그의 소망은 좀 더 구체적이었다.

카를로스와 이전과 ‘동일한’ 관계로 돌아가는 것. 카를로스는 아서를 강제로 휘두르고, 아서는 카를로스에게 휘둘리는 관계. 쓸모없는 배려 따윈 하지 않는, 오직 각자의 욕망에만 충실한 관계로 돌아가길 바랐다.

고작 포옹만으로도 카를로스의 것이 단단하게 발기했다. 아서는 카를로스의 허리를 만지작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더 해 달라며 은근히 졸랐다. 잠결에 카를로스를 가브리엘로 착각한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이만하면 아무리 대단한 인내심을 가진 이도 화를 낼 법했다.

아서의 허리를 안고 있던 팔에 무게가 실렸다. 카를로스가 제 도발에 반응을 한 것은 명백했다. 드디어 넘어왔구나. 그렇게 아서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때였다.

“…하.”

시체처럼 딱딱히 굳어 있던 카를로스가 다소 거친 손길로 아서를 떼어 냈다. 그는 나직이 욕지거리를 내뱉더니 그대로 침실을 나가 버렸다.

“…….”

아서는 멍청한 얼굴로 텅 빈 옆자리를 바라봤다. 이것도 안 된다고.

열이 받은 아서는 또 카를로스의 베개에다 화풀이를 해 댔다. 그만 참아도 된다고 이렇게나 정성껏 판을 깔아 주는데 기어코 싫다며 판을 엎어 버린다.

아서의 눈짓, 손짓 한 번에 버튼이 눌린 것처럼 달려들던 카를로스였다. 그런데 이젠 몸으로 들이대도 밀어내니 아서도 안달이 났다.

열이 받은 나머지 그날은 하루 종일 구겨진 인상이 펴지지가 않았었다. 할 수만 있다면 카를로스가 변하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하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입술을 짓씹어 대다가 가브리엘에게 한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 아서로선 그저 억울하고 또 억울할 따름이었다.

방치 21일째.

다음 날 카를로스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서는 카를로스를 기다리느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딱 일주일만 참자. 그 문장을 주문처럼 외며 천장을 노려보았다.

자격지심인지 뭔지, 천장 가득 그려진 용이 저를 내려다보며 비웃는 듯했다. 주인을 잃은 베개만 아서의 손안에서 애꿎게 찌그러졌다.

방치 31일째.

아직 해가 뜨려면 조금 이른 아침, 번쩍 눈을 뜬 아서가 주변을 살폈다. 역시나 옆자리는 텅텅 비어 있었다.

카를로스는 아서가 잠이 들었을 즈음 찾아왔다가 날이 밝기 전 침실을 빠져나가곤 했다. 어찌나 비싼 얼굴인지 한 달 내내 빠짐없이 그런 식이었다. 거의 아서를 병균 취급하면서 피해 다니는 수준이다.

웃긴 건 그럼에도 매일 밤마다 꼬박꼬박 찾아와 조금씩 눈은 붙이고 간단 사실이었다. 사람을 병균 취급할 거면 아예 따로 자든가.

혹시나 싶어 꿈속으로 들어가 봤지만 아서를 대하는 태도는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좀 더 애틋해진 면도 있었다. 그런데 겉으로는 그렇게 시치미를 뗐다.

아직 졸음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아서가 침대 옆에 달린 설렁줄을 당겼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침실 문이 열리고 가브리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어나셨습니까, 전하. 오늘은 조금 이르게 기상하셨군요.”

“응, 뭐….”

“아침이 준비되어 있습니다만, 바로 식사부터 하시겠습니까?”

부시시한 머리를 정돈해 주는 손길에 아서가 몽롱한 눈을 깜빡였다. 잠시 나른한 기분에 취해 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됐어. 몸부터 씻을게.”

“예, 목욕 준비를 해 두겠습니다.”

“오늘은 카를로스한테 가 볼 생각이야.”

“예, 그리하십시오.”

멈칫했던 가브리엘이 이내 능숙하게 침의를 벗겨냈다. 갑자기 아서가 카를로스에게 쳐들어간다는데도 역시나 기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엇갈리는 일이 없도록 먼저 사용인을 보내 두겠습니다.”

“응.”

아서는 맨몸으로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카를로스를 찾아가겠다고 결정 내리니 차라리 마음이 편안했다. 부글거리던 속이 잔잔해졌다.

목욕 시중은 평소와 같은 시간대에 끝이 났다. 아서는 갓 씻어 낸 상쾌한 몸으로 침실을 빠져나왔다. 기사는 당연히 그 뒤를 따랐다.

오늘따라 날씨가 좋았다. 황태자궁 복도를 지나 잘 가꾼 정원을 걷고 있으니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그간 하루의 대부분을 침실에 머물렀고 나가더라도 황태자궁을 벗어나지 않았던 터라, 간만에 외출 아닌 외출을 하는 느낌이었다.

하필 근래 들어 가장 날이 화창했다. 차갑지만 깨끗한 공기와, 아직 군데군데 쌓여 있는 눈, 은은하게 퍼진 풀 냄새. 그 모든 것들이 아서의 나쁜 기분을 말끔하게 씻어 내는 듯했다.

무작정 카를로스에게 달려갈 작정이었던 아서는 슬쩍 방향을 틀어 정원을 느긋하게 거닐었다. 겨울의 정원도 그다지 삭막하지만은 않았다.

2황자궁으로 들어서자 정갈한 정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황태자궁의 정원이 화려하게 잘 꾸며져 있는 반면, 2황자궁 정원은 미관보다는 실용성을 추구했다. 외부 침입자를 거르기 위함인지 미로처럼 꼬인 길은 자칫하다간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아서는 일부러 느릿느릿 산책이라도 나온 것마냥 걸었다. 아서의 방문을 알리러 간 사용인은 한참 전에 도착했겠으나 굳이 서둘러 가고 싶진 않았다. 그가 밤새 카를로스를 기다렸던 것처럼 카를로스도 아서를 조금 기다려 보란 심보였다.

느긋한 걸음걸이로 정원을 배회하던 아서는 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2황자궁에 발을 들여놓았다.

궁성 입구엔 마법사 하이브가 이미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울상이던 얼굴이 아서를 발견하고선 밝게 폈다. 진즉 아서가 어디 있는 줄은 보았지만 차마 재촉할 수 없어, 그 자리에 서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하이브였다.

“오랜만이네, 하이브.”

간만에 보는 얼굴을 보고 아서가 나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하이브도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예, 오랜만입니다. 전하.”

“탄신연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로군. 그렇지?”

“…그.”

반갑게 인사했던 하이브는 하마터면 제 혀를 씹을 뻔했다.

“…예. 시간이 벌써 그렇게 지났군요.”

하이브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가 안 그래도 처진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슬쩍 아서의 안색을 살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서가 탄신연을 언급하니 하이브로선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이브보다 키가 큰 아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탄신연 전과 별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변혁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는데 아서만큼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날 탄신연을 기점으로 수많은 것이 달라졌다. 황제가 폐위되고, 그에 줄을 대고 있던 가문들이 몰락했으며, 여러 가문의 주인이 뒤바뀌었다.

그 와중에 황태자였던 아서의 지위가 곤두박질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타 승계 다툼에서 패배한 황족처럼 유폐되거나 처형되진 않았지만, 지닌 위상은 크게 달라졌다. 아서는 패자였다.

하이브가 하라는 안내는 안 하고 요상한 표정으로 눈치만 살피고 있자, 아서가 툭 물음을 던졌다.

“공. 나한테 죄지은 거라도 있나?”

“…예?”

“왜 그리 뭐 마려운 개마냥 눈치를 보느냐고.”

“…뭐 마려운…….”

하이브가 답은 않고 멍하니 되새기기만 하자 아서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하이브는 뒤늦게 더듬더듬 말했다.

“그, 아니. 그게 아니라. …송구하옵니다.”

어버버 하는 꼴이 한심하다는 양 혀를 찬 아서가 물었다.

“카를로스는 어디 있나.”

“전하께선 집무실에 계십니다.”

“뭐 해, 안내하지 않고.”

“아, 예.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퍼뜩 정신을 차린 하이브가 걸음을 재촉했다. 부지런히 집무실로 걸어가면서도 그는 힐끔힐끔 아서를 훔쳐보았다.

어쩐지 하이브는 얼떨떨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폐태자가 된 아서가 전과 같지는 않으리라고, 아마 무의식중에 그리 짐작하였던 모양이었다.

간만에 모습을 드러낸 아서는 모두의 예상과 달리 훨씬 초연해 보였다. 황성의 사람들은 볼품없어진 패자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짐작이 무색하게도 아서는 전혀 망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쳐 보이던 과거에 비해 얼굴이 더 좋아진 것도 같았다.

달라진 것은 고작해야 눈빛 정도일까. 그 또한 그다지 예상했던 모양으로 변한 건 아니었다.

일련의 사건들이 끼친 영향인지, 모든 열정이 거세된 빛바랜 눈.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메마른 시선 앞에 서 있으니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서와 대면하는 상황이 불편했던 하이브는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카를로스 전하.”

하이브가 집무실 입구에 도착하여 문을 두드렸다. 출입구 양옆에 선 기사 둘이 뒤따라오는 아서와 가브리엘을 발견하곤 적대적인 눈초리를 보냈다. 사실 저 따가운 눈총은 비단 저 기사 둘뿐만 아니라 2황자궁을 걷는 내내 이어진 것이었다.

다행히 아서는 기사 둘에게는 관심 한 톨 주지 않고 무심하게 지나쳤다. 무시당한 두 사람은 그에 더 발끈한 것처럼 보였지만 하이브는 안도했다.

무사히 임무를 완수한 하이브가 기쁘게 그 자리를 벗어나는 사이, 아서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형님.”

카를로스는 반가운 기색 없이 아서를 맞이했다. 무어가 그리 바쁜지 그의 시선은 서류에 고정되어 있었다.

“카를로스.”

“예. 듣고 있으니 말씀하세요.”

아서가 이쪽을 좀 봐달라고 불러도 그는 여전히 아서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아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딱히 어마어마한 환대를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대놓고 무시할 줄은 또 몰랐다.

“…그 서류 안에 내 얼굴이라도 그려져 있나 봐? 쳐다보지 않고 인사만 건네는 건 어디서 배워 먹은 예의더냐.”

아서가 무례를 지적하자 그제야 카를로스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쳤다. 한 달 동안 바삐 지낸 탓인지 그의 뺨이 조금 마른 것도 같았다.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은 카를로스가 설핏 웃는다.

“형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의외로군요. 과거부터 내가 드나들든 말든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건 형님 아닙니까.”

“…그게 언제 적 얘기인데 여태 기억하고 있어.”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건 예전뿐만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아서가 슬며시 딴청을 피웠다.

“그래서, 인사는 이만하면 된 것 같고…. 무슨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카를로스가 피곤하다는 듯 관자놀이 부근을 꾹꾹 눌렀다. 아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스러워졌다.

실은 특별한 용건이 있어 찾아온 건 아니었다. 본래의 아서였다면 무슨 일을 꾸밀지 대강이라도 계획하였을 것을, 이번엔 마땅한 계획조차 없었다. 텅 빈 옆자리를 보고 오늘이야말로 제대로 얼굴을 봐야겠다며 충동적으로 쳐들어온 것뿐이다.

과연 얼굴을 보니 답답한 것이 조금 풀리긴 했다. 연통을 받고 미리 부관을 내보냈는지 집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딱히 이렇다 할 용건이 없던 아서는 괜스레 방 안을 훑어보았다.

그러다 이전에는 본 적이 없던 회색 카우치가 시야에 걸렸다. 사람 하나 정도는 누워 잘 수 있을 것처럼 생긴 기다랗고 큼지막한 카우치였다. 침실에 거의 안 온다 했더니, 설마 저기서 잤던 건가.

무언가 계산하기 전에 절로 물음부터 툭 튀어 나갔다.

“저기서 자나 보지?”

앞뒤 말을 생략한 물음에 카를로스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아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물었다.

“밤에 안 자고 여기, 저 카우치에서 자냐고.”

“…….”

“왜 답이 없어. 무어 그리 어려운 걸 물었다고.”

세 번을 연이어 물었는데 답이 없다. 카우치로 다가간 아서가 그곳에 엉덩이를 붙였다. 답을 할 때까지 끈질기게 캐물을 생각으로 다리를 꼬아 앉았다.

평상시엔 예법서의 그림을 그대로 따온 것처럼 정석적인 자세를 유지하던 아서가 다소 불량스럽게 등을 기댔다.

그런 아서를 이상하다는 듯 빤히 바라보던 카를로스가 다시 서류로 고개를 내렸다. 동요를 감추기 위함이었다.

“…그게 왜 궁금합니까?”

저건 불면에 시달리는 카를로스를 위해 부관이 가져다 놓은 소파였다. 몇 번 몸을 눕힌 적은 있지만 거기서 잠이 든 적은 없었다.

“딱히 특별한 이유는 없는데.”

카우치에 기대앉은 아서는 별달리 궁금해서 물은 게 아닌 듯 심드렁히 발끝만 까닥거렸다.

“거기서 종종 눈을 붙이긴 합니다.”

“왜?”

카를로스가 말을 끝맺은 즉시 질문이 뒤따랐다.

“공연한 시간 낭비를 삼가려는 겁니다.”

“시간 낭비? 그럼 새벽마다 침소에 몰래 들어왔다 나가는 건? 그거야말로 시간 낭비가 아니더냐.”

밤중에 드나드는 걸 관두라는 말을, 저렇게나 정성스럽게 돌려서 표현한다. 카를로스는 내심 조소를 지었다.

“그건 형님께서 상관할 바가 아닌 것 같군요.”

자연히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서를 끌어안고 자기는 하되, 그 이상 건드리진 않는 것까지가 그가 물러날 수 있는 한계선이었다. 침실에 드나들지도 말라는 건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그런 얘기나 하러 오신 거라면, 이만 가 보는 게 좋겠습니다. 형님과 쓸데없는 여담이나 나눌 만큼 한가하지 않은 터라.”

서로가 원하는 게 다른 때에 더 말을 섞어 봤자 괜한 충돌만 일어날 따름이다. 카를로스는 의도적으로 아서 쪽을 외면한 채 서류를 살폈다. 서로 얼굴 붉힐 일을 만드느니 여기서 대화를 끝내는 게 나았다.

그러나 아서가 가란다고 곱게 물러날 성격이었던가. 카를로스가 보지 못한 사이 아서의 눈동자가 불이 켜진 듯 이글거렸다.

한 달 만에 겨우 제대로 얼굴을 보고 있는 건데, 또 이런 식이라니. 아서는 시위라도 하는 양 카를로스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못 느낄 리가 없는 카를로스는 여전히 서류만 쳐다보고 있었다.

카를로스에게 방치당했던 수십 일간의 시간이 아서의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잠깐 잊고 있던 화에 다시 불씨가 던져졌다.

간당간당하게 이어지던 인내는 툭 끊기기 직전이었다. 원하는 걸 가지려 뒤에서 공작을 펼치는 데엔 무한한 인내를 발휘할 수 있는 아서였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예외다. 갖고 싶은 걸 얻기 위해 인내하는 것과, 제 것이었던 카를로스를 빼앗기는 건 엄연히 다른 경우였다.

한번 마음먹은 건 끈질기다시피 그대로 고수하는 카를로스였다. 이미 아서를 건드리지 않기로 결심한 상황에서 몇 번 찔러본다고 쉽사리 넘어올 것 같진 않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카를로스는 제 눈앞에서 아서가 가브리엘과 뒹굴어도 이 악물고 외면할 것처럼 보였다.

그가 이 자리에서 무슨 짓을 하든 카를로스는 요지부동일 것이다. 아서는 불필요한 곳에 심력을 소모하느니 차후를 도모하기로 결심했다. 애초에 아무 계획도 없이 이런 데까지 불쑥 찾아오는 게 아니었는데, 괜한 짓을 했다.

물론 그렇다고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물러나는 것도 그답지 않다.

“…카를로스, 내가 어릴 적부터 누누이 말하지 않았던가. 대화를 할 땐 눈을 마주치라고.”

아서가 애써 짜증을 감춘 채로 말하자, 카를로스의 시선이 아서에게로 돌아왔다. 꼭 이렇게 도발을 해야 저 비싼 얼굴을 보여 준다. 과거 아서가 했던 말을 여태 기억하고 있는 건지 반응이 즉각적이다.

「칼, 대화를 할 땐 눈을 마주쳐야지.」

「…네.」

「부끄러워서 그런가? 괜찮아. 형아잖아.」

「형님….」

「형님 말고 형아.」

「…….」

아서의 시답잖은 요구에 부끄러워서 뺨을 붉히던 카를로스. 지금 같으면 코웃음을 쳤을 텐데 그 시절엔 참 순하고 귀여웠다. 아마 카를로스도 아서가 떠올렸던 것과 같은 날을 떠올렸을 것이다.

“어릴 땐 귀염성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아서가 고개를 저으며 비꼬았다. 예전이랑 달라졌다느니, 변했다느니 하는 말은 카를로스가 제일 싫어하는 말 중 하나다.

옛날얘기를 꺼내면 카를로스는 십중팔구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곤 했다. 매달리는 그를 버려 놓고 이제 와 변한 현재를 아쉬워하는 게 얼마나 가증스러워 보였을지, 아서도 충분히 공감하는 바였다.

“아직 그때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런데 오늘따라 카를로스의 반응이 전과는 달랐다. 아서를 쳐다보고 있는 눈이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잘 깎인 이목구비 위로 미약한 웃음기가 떠올랐다. 오히려 조금 기분이 좋아 보이기도 한다.

아서는 내심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예전엔 불쾌하다 여겼을 말을 지금은 다르게 받아들이는 건가. 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기분이 좋아졌는지 의문스러워 급히 머리를 굴렸다. 시선을 돌리게 하겠단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나 영 찝찝하다.

곰곰이 생각하던 아서는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듯 내심으로 감탄사를 흘렸다. 아무래도, 이제 카를로스가 이전만큼 과거의 아서에게 화가 나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서가 잠시 한 가지를 망각하고 있었다. 카를로스가 마음을 준 이에 한하여 끝없이 물러지는 경향이 있다는 걸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황제가 아서에게 무슨 짓을 했든 간에, 아서가 카를로스를 죽이려 했단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렇지만 카를로스의 입장에선 조금 달랐나 보다. 그것이 과거의 아서에게 면죄부를 줄 만한 중대한 사항이었던 것이다.

화를 내게 만들어야 하는데, 기분 나쁘라고 던진 말에 즐거워하니 맥이 빠졌다. 활활 불태우던 전의도 허무하게 식어 버렸다. 아무리 아서라 해도 저 얼굴에다 찬물을 끼얹을 만큼 정이 없진 않았다.

무엇보다 다른 이도 아닌 카를로스니까. 애정의 대부분이 삐뚤어진 방식으로 표출되곤 있으나, 누가 뭐라 해도 아서는 카를로스를 많이 좋아하긴 했다.

카를로스를 괴롭히는 것도 좋고, 카를로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도 좋다. 카를로스가 변하기 전만 해도 둘의 관계는 정말 완벽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변해 버린 건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결국 아서는 카를로스의 집무실까지 찾아가 놓고서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다.

눈에 거슬리던 소파는 간 김에 두 동강을 내 주고 왔다. 그런 게 있으니 밤에 잠을 못 자는 거였다.

그 후로 카를로스가 침실을 찾는 시간이 조금 더 당겨지긴 했다. 아서는 대강 그걸로 만족하고 며칠간 얌전히 지냈다. 언제부터 제가 이런 소박한 변화에 만족하게 되었는지 모를 노릇이다.

여전히 속은 답답했다. 울컥 성질이 치밀 때면 잠버릇인 척 카를로스를 건드려 댔다.

카를로스는 아서가 옆에 있기만 해도 흥분했다. 단지 그걸 억눌렀다. 발로 지르밟듯 아주 꾹꾹. 정말이지 쇠심줄 같은 고집이 아닐 수 없다.

이건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까. 마치 어릴 적 카를로스를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아서가 아무리 밀어내도 묵묵히 버티고 있던, 하루 내내 황태자궁 근처에 쭈그려 앉아 있던 어린 소년.

아직도 그때가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집착이 무려 8년이나 갔으니까.

과거를 회상하다 아서는 문득 아연해졌다. 설마, 이번에도.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8년이나 금욕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고개를 휘휘 저은 아서가 침대 위를 뒹굴며 창밖의 풍경을 구경했다. 바깥 정세는 아직까지 불안정했지만 그와 별개로 황태자궁은 평화로웠다.

물론 지극히 위태롭고 한시적인 평화였다. 카를로스는 여전히 아서를 감시하고 있었고, 아서가 황태자궁에서 일정 거리 이상 벗어나면 곧바로 제지하려 들었다. 아서가 어디를 가든 카를로스의 수하들이 은밀히 그 뒤를 따르도록 했다.

보통 일반적인 사람은 그런 걸 감금 또는 감시라고 불렀다. 본디 한 군데에 틀어박혀 있는 걸 좋아하는 아서였던 터라 크게 개의치 않았을 따름이다.

지금 일시적으로 조용해졌다손 치더라도, 두 형제 사이에 자리한 문제는 어느 하나 해결된 게 없었다. 형제가 서로에게 원하는 바 역시 상충되었다. 아서는 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가길 바랐지만, 카를로스는 전처럼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사실상 둘의 갈등은 이미 예고되어 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형님도 당사자 중 한 명이니 알고는 계셔야겠지요. 즉위식과 동시에 국혼을 치를 예정입니다.”

아서가 카를로스의 집무실을 찾아간 날로부터 며칠이 지나, 카를로스가 건넨 말이었다. 짤막했던 평화를 종식시키는 통보였다.

막 잠이 들기 직전,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차에 들린 말은 밀려오던 수마도 쫓아내는 듯했다.

“…그 국혼이란 건, 너와 나 사이의 혼인을 말하는 거겠지.”

“예, 맞습니다. 잘 아시는군요.”

역시나는 역시나다. 아서가 조용히 한숨을 흘렸다. 아직까지 졸린 기운이 가시지 않아 큰소리를 칠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황후는 싫다 하지 않았느냐. 내 존재가 거슬린다면 차라리 황성에서 내쫓아.”

“황후위에 오르는 게 형님께서 무조건 손해 볼 일만은 아닐 겁니다.”

손해가 아니긴. 황제의 반려가 된다는 건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원치 않는 의무에 구속된다는 의미였다. 아서에게 황후란 지위는 평생 짊어져야 할 거대한 짐덩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황후위에만 오른다면, 형님께서 무얼 하든 전부 묵인해 드리려 합니다.”

“…묵인이라니?”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에 아서가 눈을 깜빡였다. 늘어져 있던 몸을 비틀자 카를로스가 아서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옆에 가브리엘을 애첩으로 끼고 살든, 무얼 하든 전부 눈감아 드리겠단 말입니다.”

“…잠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내가 형님께 바라는 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황후위에 오를 것. 황성을 떠나지 말 것. 이 두 가지만 지켜 주십시오. 그럼 더는 형님을 강제하지 않겠습니다.”

당황한 아서를 두고 카를로스는 제 할 말만 쏟아 냈다. 차분함을 가장한 목소리엔 언뜻 초조한 기색이 내비쳤다. 협박이라기보단 오히려 매달리는 모양새에 더 가까웠다.

아서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황후위에만 오르면 더는 강제하지 않겠다니. 카를로스가 좀 전부터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지 황당하기만 했다.

매일 밤 탈진할 만큼 괴롭혀 주겠다는 말로도 넘어갈까 말까 한 것을 앞으로 건드리지 않겠다는 말을 한다. 대관절 카를로스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알고 싶어 얼굴을 보려는데, 그마저 할 수 없게 몸이 구속당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카를로스의 양팔이 각각 쇄골과 골반을 꽉 감싸 안았다. 넓게 펼쳐진 손이 느릿하게 아서를 더듬는다. 단단한 손끝이 머무른 곳이 불에 덴 것처럼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혼인을 확정 지으려면, 제국법상 초야는 확실하게 치러야겠지요.”

목덜미에 미지근한 숨결이 닿았다. 그 짧은 한마디에 어찌나 진한 색욕이 도사려 있는지 등골을 타고 오소소 소름이 일었다.

마른침이 넘어갔다. 아서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고문이란 게 달리 있나. 이런 게 바로 고문이다.

돌아오는 답이 없자 카를로스가 묻는다.

“조건이 마음에 차지 않습니까?”

“그딴 조건이 마음에 찰 리가.”

아서는 숨도 안 쉬고 바로 답했다. 이렇게 사람을 한껏 도발해 놓고 건드리지 않겠다는 걸 조건으로 거는데 마음에 들 리가 없다.

눈치 없는 카를로스는 또 목 뒤편을 간지럽혔다. 당장이라도 욕이 튀어나오려 하는 걸 아서는 무한한 인내심으로 억눌렀다. 차라리 진짜 때리는 게 나을 지경이다. 몸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억울했다.

“무슨 조건을 걸든 내가 황후가 되어야 하는 건 변치 않는다.”

절로 목소리에 감정이 실렸다. 아서는 카를로스의 손등 위로 손을 겹쳐 잡고 떼어 냈다. 이렇게 건드리기만 할 거면 아예 건드리지도 말아야 한다. 아서를 말려 죽이려는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황제가 되지 못할 바에야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아.”

아서는 상반신을 구속하던 팔을 떼 내고 몸을 돌렸다. 카를로스와 눈이 마주쳤다.

“왜 그리도 나를 황후로 만드는 일에 집착하는 거지? 어마마마와 아바마마를 볼모로 잡은 이상 나는 이곳을 떠나지 못할 텐데. 왜?”

아서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서를 황후위에 올리면 서로의 영혼이 죽을 때까지 하나로 묶이게 된다. 아서가 여러 이유로 황후위를 거부하는 것과 별개로, 카를로스는 진심으로 그런 걸 원하는 건지 의문이었다.

아무리 죽고 못 사는 연인이라 할지라도 결국엔 끝이 난다. 혼인이 일종의 안전장치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사람의 마음이 식는 것까진 막아 주지 못한다.

만일 나중에라도 카를로스가 아서에게 질리게 되면? 혹은 아서가 카를로스에게 질리게 되면? 서로에게 마음 한 톨 없이 의무감에 억지로 붙어 있어야 하는 ‘그런’ 걸 정녕 원한단 말인가.

“답이 뻔한 질문을 하시는군요.”

카를로스가 아서를 집어삼킬 것처럼 응시했다.

“형님을 내 옆에 평생토록 묶어 두려고. 형님이나 나, 둘 중 하나가 죽는 날까지 말입니다.”

아서는 이마를 감싸 쥐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런’ 걸 원하는 게 맞구나.

“혹여나 죽음으로 도망치겠단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형님이 죽고 나면 남은 이들이 썩 좋은 꼴은 못 보게 될 테니까.”

“…….”

“…형님의 다음 차례로는 가장 먼저 황제가 따라갈 겁니다. 우선 그 거추장스러운 팔다리부터 자르고, 목줄을 매단 다음 끌고 다닐까 합니다. 그자는 제법 튼튼한 몸뚱이를 가졌으니 꽤 오래 버티지 않을까요. 아마 그다음 차례는 황후가 될 것이고. 아직 황후를 어찌 처리할지는 생각해 둔 바가 없지만…. 그때가 되면 어련히 떠오르겠지요.”

어딘가에 적힌 글을 줄줄이 읽어 주는 것마냥 담백한 어조였다. 사실 그대로를 읊어 주는 듯한 태도에 아서도 큰 위협을 느끼진 않았다.

애초에 죽을 생각이 전혀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카를로스가 황제에게 무슨 짓을 하든 별 관심이 없었다. 다만 제 눈앞에서 그런 꼴로 끌고 다니면 좀 보기 싫을 것 같긴 했다.

아서는 예의상 한마디 거들어 주었다.

“폐하께선 네 아버지이기도 하다.”

“예, 압니다.”

“지금 네 아버지의 사지를 자르겠다 하는 것이냐.”

“제 아비의 사지를 자르고 목줄을 단 황제라니, 역사에 거창하게 기록되긴 하겠군요. 허나 형님께서 살아서 내 옆에 있는 한은 그럴 일 없으니 안심해도 좋습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카를로스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아서에게 닿아 있다.

아서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답답한 양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붉은 입술이 허탈하게 말려 올라갔다. 네가 그럼 그렇지, 하며 자조하는 듯한 미소가 입가에 그려진다.

“그래, 네가 무얼 원하는지야 알겠다. 그런데….”

작게 중얼거린 아서가 카를로스의 가슴팍을 지지대 삼아 몸을 일으켰다. 냉한 시선이 카를로스에게 꽂혔다.

“더는 안 건드린다, 초야만 치르면 끝이다. 지금 나 보고 그 말을 믿으란 건가? 진정으로?”

아서는 무릎걸음으로 기어 제 형제의 위로 올라탔다. 입가의 미소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아서가 천천히 몸을 숙였다. 양손으로 카를로스의 목을 감싸 잡고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애무는 사치였으므로, 곧바로 혀를 밀어 넣었다. 제가 이렇게까지 해도 안 넘어오고 버틸 수 있나 따지는 것과도 같았다.

그렇게 형제의 혀가 맞닿아 한차례 뒤엉켰다. 어느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지척에서 맞부딪혔다. 카를로스의 눈동자 위로 불꽃이 튀었다.

“읏.”

급작스레 상체가 끌어당겨졌다. 축축한 살덩이는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시작한 건 아서였지만 멈추지 못한 건 카를로스였다. 수십 일 만에 주어진 입맞춤은 뿌리칠 수 없는 미끼였다.

“잠, 윽…!”

순식간에 형제의 위치가 역전되었다.

카를로스는 버둥거리는 아서를 찍어 눌렀다. 얼마 만에 주어진 입맞춤인지 아득한 기분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이성을 잃고 형제의 입 안을 탐닉했다. 허리를 끌어안고 하반신을 문질러 댔다. 혀를 섞고도 부족하다는 양, 뒷머리를 꽉 붙든 손이 결합이 깊어지도록 강제했다.

서로의 혀가 난잡하게 뒤얽혔다. 잇새로 젖은 소음이 비집고 나오기 시작하고, 난잡한 숨소리가 뒤섞였다. 무언가 더듬고 싶어 안달 난 손이 아서의 머리칼을 쓸고 내려갔다.

얇은 침의가 성급한 손길에 찢어발기듯 벗겨졌다. 카를로스가 길게 뻗은 목덜미를 핥아 내렸다.

“하….”

귓바퀴, 턱, 목덜미 어느 부위든 가릴 것 없이 게걸스레 입을 댔다. 오랫동안 눌러 온 갈급을 해소하려는, 오로지 본능만이 남은 행위였다.

카를로스는 익숙하디 익숙한 체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눈앞이 어지럽게 일렁였다. 아서와 단 한 군데도 빠짐없이 닿고 싶었다.

몸을 혹사시킨 것도 아닌데 가쁜 숨이 터졌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짐승이 끙끙대는 듯한 헐떡임이 목구멍을 울렸다.

“하아, 형님….”

아서가 어떤 의도로 그에게 입을 맞춘 건지 모르지 않았다. 이런 별것 아닌 가벼운 도발에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제 모습을 지적하려는 것일 테다.

실낱만큼 남은 이성이 여기서 멈춰야 한다는 걸 알려 주고 있지만, 그럼에도 카를로스는 멈출 수가 없었다.

“이건, 형님이 먼저 시작한 거니까….”

전부 형님이 잘못한 거라고 중얼거리며 상의 틈으로 드러난 가슴을 움켜쥐었다. 가슴에 고개를 박고 억지로 모아 쥔 살덩이를 길게 핥았다.

탄탄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그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늘어진 찰나였다.

“…어처구니가 없군.”

그런 그를 비웃듯, 머리 위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터졌다.

“이런 주제에 뭐, 바라는 게 많지 않아?”

흥분감에 눈앞이 어질해진 카를로스와 달리 냉정하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썩 좋지 못한 타이밍이었다.

카를로스는 이미 반쯤 이성을 잃은 상태였는데, 그 사실도 모르고 아서는 제 도발이 먹힌 것이 우스웠는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당연히 그 여유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거 보, 읏…!”

처음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던 아서는 카를로스의 손이 곧장 하반신으로 향하자 덜컥 당황한 얼굴을 했다. 안이하게도 그가 고작 가슴이나 조금 건드리고 말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하의를 비집고 들어간 손이 성기를 꽉 쥐었다. 오랜만에 치르는 행위였지만 어떻게 해야 아서가 반응하는지 기억했다. 카를로스는 얌전히 늘어져 있던 것을 쥐고 반죽 치대듯 주물렀다.

배려 없는 손놀림에도 손안에 든 성기는 착실하게 크기를 키워 갔다. 놀랍지는 않았다. 아서가 거친 애무에 반응한단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 이거 놓으라고….”

경악한 아서가 칼을 밀어내려 했으나 카를로스는 도리어 아서의 손목을 손에 쥐었다.

형제간 조용한 힘겨루기가 벌어졌다. 정확히는 아서만의 발버둥이라 보아야 했다. 아서가 전력을 다해 밀어내는 것이 무색하게 상대는 미동도 없었다.

팽팽하다 싶던 대치는 역시나 얼마 안 가 아서의 일방적인 패배로 결론 났다. 사지를 구속당한 아서가 이를 사리물었다. 이 이상 저항해 봤자 제힘만 뺄 뿐이라는 걸 수많은 경험 끝에 체득한 지 오래였다.

하나 힘의 격차를 깨달았다 한들 가만히 입만 다물고 있을 아서가 아니었다. 아서는 보란 듯이 짧은 비소를 흘렸다.

“그래, 이게 본래 너지.”

“…….”

“가식 떨 것 없이 처음부터 이러지 그랬어. 그럼 서로 힘 뺄 일도 없었을 것 아니냐.”

“…말은 똑바로 해야지요, 형님.”

카를로스의 얼굴 위로 미세한 균열이 일어났다.

“형님이 대뜸 덤벼들지만 않았어도, 건드릴 생각 같은 건 없었습니다.”

카를로스는 담담히 말하려 했으나 어쩔 수 없이 조급한 숨소리가 섞여 나왔다. 한 차례 힘을 쓴 탓인지 가학적인 충동까지 치솟았다.

그러자 내심으론 의문이 들었다. 정말 형님을 건드릴 생각이 없었던 게 맞긴 했는지.

이전 날 형제의 굴종을 이끌어 내며 느꼈던 충족감을 기억한다. 잘못하였다 눈물을 보일 때까지 제멋대로 몰아붙이고, 알몸으로 바닥을 기는 몸을 범하고, 짐짓 다정한 체 입을 맞추었던 그때를 잊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시끄러운 경고음이 울리는 듯했다. 아서와의 관계를 변화시키고 싶다면 여기서 멈추는 게 맞다. 그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형님이 먼저 제게 입을 맞추지 않았나. 왜 참아야 하는 거지?

얄팍해진 이성과 이대로 멈추기 싫다는 본능이 치열하게 맞부딪혔다.

그러나 늘 그러했듯, 어차피 승자가 정해진 다툼이었다. 카를로스는 오늘도 한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서의 몸만이 아니라 다른 것 또한 가지길 원했고, 그렇기에 더는 이전처럼 아서를 대할 수 없었다.

짜증 섞인 한숨이 터졌다. 카를로스는 양손으로 각각 아서의 팔을 구속한 채 고개를 숙였다.

귀 뒤부터 이어지는 목덜미는 유독 아서의 체향이 짙어지는 곳으로, 카를로스가 가장 집착하는 부위였다. 종일 그곳에 고개를 묻고 아서를 괴롭힌 날도 있을 만큼 유난히 그곳에 매달렸다.

물론 아서는 카를로스가 제 목에 집착하는 걸 질색했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경계하며 목덜미를 뻣뻣하게 굳혔다. 그렇게나 긴장한 티를 내면 오히려 더 건드리고 싶어지는 것도 모르고.

목덜미에 고개를 박은 카를로스가 얇은 살가죽을 이로 잘근잘근 씹어 댔다. 흰 살갗은 몇 번 건드리지도 않아 불그죽죽하게 물들었다. 상처를 혀로 쓸어내리자 아서의 몸이 작게 경련했다.

“더 건드릴 생각 없습니다. 몸에 힘 푸세요.”

겉보기만 조용했지, 기실 두 사람 다 상당한 힘을 쓰고 있었다. 위에서 찍어 누르는 힘이 압도적으로 강해 겉으로 티가 나지 않는 것뿐이었다.

“…몸에 힘 빼라고 했어.”

“싫어.”

카를로스가 재차 말했지만 아서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반대로 구는 듯도 같았다. 차라리 아서가 얌전히 있었더라면 상황이 보다 유하게 흘러갔을 것을, 계속해서 벗어나려 드니 맞부딪히게 되었다.

“다시 구속구라도 차고 싶은가 봐요.”

구속구를 언급하니 그제서야 아래에서 밀어내는 힘이 줄어들었다. 카를로스도 좀 전보다 순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좀 밀어내고… 이리 와요, 형님.”

“…….”

“이리 와서 안아 봐요.”

카를로스는 아서의 손을 끌어 와 제 목을 껴안게 했다. 강제로라도 아서가 그를 끌어안고 있는 모양새가 갖추어지자 그는 점차 안정을 찾아 갔다. 반면 아서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티를 감추지 못했다.

어찌 되었든 아서가 전처럼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는 것보단 나았다. 이렇게나 하나하나 그의 신경을 긁어 대는 걸 보면, 그동안 형제를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 둔 게 무의미한 일은 아니었던 듯싶었다.

열이 오른 뒷덜미가 욱신거렸다. 카를로스는 아서의 뺨에 나란히 제 뺨을 붙이고 부비적거렸다. 부드러운 감촉이 기분이 좋았다. 어지간히 흥분한 게 아니었던 터라 맞닿은 살이 시원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직접적으로 몸을 만지지 않는 대신 그는 아서에게 완전히 밀착했다. 당연히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충족되지 않았다. 오히려 온갖 충동에 불을 지필 따름이었다.

“…형님.”

카를로스는 기어이 손을 내려 제 성기를 손에 쥐었다. 부끄러운 기색은 한 점도 내비치지 않았다.

성기를 쥔 손이 부푼 살덩이를 위아래로 느긋하게 훑었다. 핏줄이 불거진 좆은 이미 흉흉해 보일 만큼 팽창해 있었다. 굵직한 선단은 새어 나온 액으로 번들거렸다.

“형님….”

턱턱 치대는 손길을 따라 두꺼운 성기가 아서의 몸을 때렸다. 아서에게 닿지 않게 하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으니 다분히 고의적인 행동이었다.

절정에 가까워질수록 아래에서 들리는 소리가 더 노골적으로 울렸다. 묘하게 초점이 어긋난 시선이 아서를 훑어 내렸다. 눈길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노골적인 욕정이 진득이 덧발라졌다.

분명 시선에는 촉감이란 게 없을 텐데, 검붉은 눈동자가 닿을 때마다 아서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굳이 카를로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 안에서 아서가 어떤 음란한 꼴을 하고 있을지 쉽사리 읽어 낼 수 있었다.

하아. 카를로스가 낮게 신음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진 순간 아서의 눈동자도 크게 흔들렸으나, 카를로스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제 목을 끌어안고 있던 손이 힘없이 풀린 것만을 알아차렸을 뿐이었다.

“손…. 똑바로 안으라 했지.”

음욕으로 눅눅하게 절은 눈동자가 아서를 응시했다. 갑갑할 정도로 아서에게 꽉 끌어안기고 나서야 카를로스는 사납던 기세를 가라앉혔다.

아서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은 그가 다시 제 성기를 훑었다. 아서를 건드리지 못해 짜증이 나 있음에도 성감은 차곡차곡 차올랐다.

만질 수 없는 게 답답해 카를로스는 재차 아서와 뺨을 맞댔다. 보들보들한 감촉을 만끽하다 팔꿈치로 상반신을 비스듬히 지탱한 채 형제의 표정을 살폈다.

“하아, 시선 피하지 마세요…. 안 건드린다 했잖습니까.”

카를로스는 아서를 강제로 끌어당기는 대신 말했다. 건드리지 않을 테니 눈을 피하지 말라고, 아서의 눈앞에서 자위를 하며 그런 비정상적인 요구를 했다.

“네가 그런 역겨운 짓을 하니까….”

카를로스와 눈이 마주친 아서는 이 상황이 불편한 듯 시선을 피했다.

“안 건드려요.”

“…….”

“그냥, 잠시만. 가만히…….”

늘 아서를 내리깔아 보던 눈동자가 전에 본 바 없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어느샌가 아서에게 애원하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카를로스는 그런 제 모습을 자각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거칠어지는 숨결에 간지러운 듯 아서의 몸이 움찔 떨렸다. 카를로스는 그 떨림에 반응하며 나직이 숨을 흘렸다. 동시에, 끈적한 액체가 아서의 허벅지를 적셨다. 파정을 했지만 여전히 턱없이 부족한 찰나의 쾌감에 그가 아쉬운 눈빛으로 아서를 훑었다.

카를로스는 눈을 감고 아서의 체취를 깊게 들이마셨다. 열이 오른 머릿속엔 온통 한 문장만이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형님에게 닿고 싶다. 어떻게든 형님에게 닿고 싶어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입 맞추고 싶어요, 형님….”

카를로스는 절절 끓는 눈빛으로 아서를 내려다보았다. 거절당할 것을 예상하고도 그는 고개를 내렸다.

입술이 맞닿자마자 뒷덜미가 오싹하게 당겼다. 어차피 아서가 순순히 반응해 줄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기에, 꾹 다물려 있는 입을 열어 달라고 조심스레 입술을 깨물고 비볐다.

다시 삽시간에 발기한 성기가 아서의 허벅지를 짓눌렀다.

“하아, 형님, 제발….”

애가 타는 건 오로지 카를로스 혼자였다. 건드리지 않겠다 하였으니 강제로 아서의 턱을 벌릴 순 없었다. 점점 숨이 차고, 조급한 맘이 드는데 아서는 조금도 허락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고작 선택한 방법이란 게 아서의 동정을 구걸하는 거였다.

“형님….”

형님, 형님. 할 줄 아는 말이라곤 형님밖에 없는 머저리가 된 것마냥 카를로스는 연신 아서를 불러 댔다. 지나치게 갈급한 나머지 스스로의 모습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되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끈질긴 애원 끝에 아서는 말없이 눈을 감아 버렸다. 아무리 간절히 쳐다봐도 내리깐 눈꺼풀은 다시 떠지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돌연 전신의 피가 차게 얼어붙은 듯했으나, 그 순간 맞닿은 점막에 옅은 숨결이 닿았다. 제 착각이 아니란 것을 알려 주듯 아서의 입술이 미미하게 벌어졌다.

마침내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즉시 카를로스는 수일을 굶주린 부랑자처럼 아서에게 달려들었다.

“하아. 형, 님.”

“응, 읏….”

혀가 뒤섞이며 젖은 점막끼리 들러붙는 소리가 끊임없이 번졌다. 뜨거운 숨결이 마구 섞이고, 간간이 나직한 신음이 흐르는 그것은 입맞춤이라기보단 하나의 게걸스러운 색사와 같았다.

입이 잠시 떨어지면 카를로스는 또 무어가 그리 애가 타는지 자꾸만 아서를 불렀다. 그렇다고 달리 대답할 틈을 주는 것도 아니라, 아서가 미처 어떤 반응을 보이기 전에 재차 달려들어 입술을 집어삼켰다.

***

뺨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따스했다. 턱을 간지럽히는 머리칼에 아서의 눈두덩이가 떨렸다.

간지러운 턱을 손으로 긁고서 아서는 뻑뻑한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눈을 뜨기가 무섭게 아, 소리 없는 탄식을 흘렸다.

품 안이 묵직했다. 한동안 뒤에서만 아서를 끌어안고 자던 카를로스가 오늘은 어리광이라도 부리듯 아서에게 안겨 있다.

애초에 품에 쏙 들어갈 크기가 아니다 보니 다소 억지로 몸을 욱여넣은 모양새처럼 보였다. 물론 그러든 말든 개의치 않는 카를로스는 아서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고선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안 불편하나…. 아서는 눈을 뜨자마자 심란한 기분이 되었다.

카를로스의 등을 감싸고 있던 팔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색하게 굳었다. 정오의 햇살이 비치는 침실은 참으로 평화로웠으나, 아서 홀로 고뇌에 차 그 평온을 누릴 수 없었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둔통이 전날 밤을 또다시 선명하게 상기시켰다.

수십 일 만의 정사는 아침 해가 뜨는 순간까지 몰아치듯 이어졌다. 술이나 약 따위에 취해 있던 것이 아니라 모든 대화, 목소리, 눈빛, 손짓까지 전부 다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자신이 얼마나 이성을 잃고 본능대로 움직였는지도.

그걸 못 참고 넘어갔나 자괴감이 드는 한편,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서 자신이 못 견디고 넘어갈 만하긴 했다.

그간 제가 여간 오래 참았던가. 오히려 이때까지 참은 게 장하다며 박수받아야 할 일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형님.”

그렇게 아서가 자기 합리화를 하는 사이, 품에 안겨 있던 카를로스가 때늦은 아침 인사를 건넸다.

두꺼운 팔이 아서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이 평화로운 순간을 더 음미하고 싶은 듯 카를로스가 아서에게 몸을 부비적거리며 치댔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린 낯은 근래 들어 가장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얼핏 봐도 ‘나 기분 좋아요’라고 적힌 얼굴에 아서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기분 좋게 풀어진 얼굴이 낯설었다. 늘 한편에 불안한 기색을 품고 있던 카를로스가 저렇게나 편안해 보이는 건 또 처음이다. 이 상황을 수습할 궁리를 하고 있는 제가 아주 못돼 먹은 망종처럼 느껴졌다.

“곤히 잠든 것 같아 깨우지 않았는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요.”

어느새 카를로스의 손이 얇은 가운을 들추고 들어왔다.

“설마 그렇게 자고 또 잘 생각은 아니겠지요.”

“…깼어. 덕분에.”

“그건 다행이네요.”

얌전히 안겨 있던 카를로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가운을 벌리고 아서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었다.

“또 뭐 하려고, 읏….”

물컹한 혀가 젖꼭지를 짓이기듯 핥았다. 홧홧한 통증에 움츠러든 것도 잠시였다. 몸 이곳저곳을 주무르는 손길에 절로 낮은 신음이 샜다.

커다란 손이 맨살을 주무르듯 희롱하다 등 한가운데 움푹 파진 골을 훑어 내렸다. 등골을 타고 오싹한 감각이 내려앉았다.

포근하던 침실 위로 금세 묘한 기류가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아서의 흥분을 부추기는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전날의 정사로 이제는 카를로스에게 어떤 확신이 생겼기 때문일 터였다. 아서가 전처럼 제 손길을 냉하게 쳐 내지 않으리란 확신 말이다.

「안 건드려요.」

「그냥, 잠시만. 가만히…….」

어젯밤 카를로스의 애원에 마음이 흔들렸을 때, 아서는 의도적으로 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되레 카를로스가 그의 동요를 알아차리도록 유도했다. 어찌해야 그 자신을 흔들 수 있는지 카를로스에게 슬며시 힌트를 건네주었다.

아서는 이미 참을 만큼 참았다. 오랜 기다림으로 지친 탓인지 더 이상 카를로스를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존재 유무조차 몰랐을 오랜 줄다리기 끝에서, 마침내 아서가 먼저 백기를 든 셈이었다.

그 후론 모든 게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아서가 제 애원에 흔들린단 사실을 알아낸 카를로스는 그때부턴 어설프게 거래를 시도하려 들지 않았다. 대신 눈빛과 몸짓으로 호소하여 아서의 동정을 사고자 하였다. 즉, 대놓고 미남계를 쓴 것인데 카를로스 본인은 제가 그러고 있단 자각이 전혀 없었다.

“아파. 어제부터 그러더니…. 작작 좀 핥아.”

가슴 부근의 통증에 아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가만히 있어도 따끔거릴 만큼 퉁퉁 부은 곳을 혀로 핥아 대자, 온통 그곳으로만 신경이 쏠렸다. 카를로스의 혀가 닿은 곳이 열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밤새 무슨 짓을 했는지 젖꼭지가 확연히 부었고 유륜 부근에 검푸른 멍도 비쳤다. 잠들기 직전까지 몸 이곳저곳을 핥아 대던 게 여태 이어진 것 같았다. 이쯤 되면 애무가 아니라 집착이었다.

고민하던 아서가 카를로스를 살짝 밀어냈다. 아픈 것과 별개로 이러다 젖꼭지가 떨어져 나가진 않을까 우려되었다. 그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의외로 고분고분하게 물러났지만,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닌 듯 눈가엔 미련이 비쳤다.

“뭘 그렇게 억울하게 쳐다봐. 사람 꼴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선.”

“…보기 좋기만 합니다만.”

“그 눈은 장식으로 달려 있나 보지?”

울긋불긋 멍이 든 피부는 처참했다. 멍 자국은 한두 군데에 국한된 게 아니라 전신에 흩뿌려져 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이가 봤다면 정사가 아니라 학대의 흔적이라 생각했을 터였다.

“자는 동안 조금 건드리긴 했습니다. 많이 아프십니까?”

핥기만 하고 별다른 짓은 안 했다며, 카를로스가 말을 덧붙였다. 확실히 깨물거나 아프게 했다면 아서가 깨어났을 테니 저 말이 거짓은 아닐 것이다. 깨물지 않는 대신 가슴이 닳아 없어질 만큼 내내 집요하게 빨아 댔겠지.

역시나 허벅지 부근엔 정액이 퍼석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설마 잠도 한숨 자지 않고 내내 이러고 있었던 건가. 저를 깨우지 않으려 조심스레 움직였을 카를로스를 상상하자 황당한 한편 조금 귀엽기도 했다.

어젯밤 괜히 틈을 내줬나 보다. 말없이 빤히 호소하는 듯한 눈 덕분인지 절로 밀어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정 그러면 연고라도 가져오든지.”

“그건 싫어요. 그럼 기껏 새긴 흔적이 지워지지 않습니까.”

단호하기까지 한 대답에 헛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그사이 억지가 많이 늘었다.

본래 카를로스는 아서의 몸에 멍이 비치면 곧장 연고를 발라 주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떤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전혀 치료해 줄 의향이 없는 듯했다. 오히려 한술 더 떠 만족스러워하는 기색마저 내비쳤다. 하는 수 없이 아서가 한숨을 쉬며 손을 물렸다.

뒤로 물러나 있던 카를로스는 기다렸다는 양 재차 아서에게 철썩 달라붙었다. 평소보다 색이 밝아진 눈동자가 아서의 몸에 남은 흔적을 하나하나 살폈다. 내심 기가 찬 아서가 물었다.

“…이 꼴이 마음에 들어?”

“예.”

답하는 목소리가 퍽이나 만족스러웠다. 전부터 아서의 몸에 흔적을 남기길 좋아하던 카를로스였지만, 지금은 그에 대한 집착이 전보다 확연히 커진 듯이 보였다. 용케 피를 보지 않는 선에서 아슬아슬하게 그치고는 있었다.

물론 아서가 지금 카를로스를 나무랄 처지는 아니었다. 가끔은 그가 카를로스보다 한술 더 뜨는 때도 많았다.

이를테면 아서는 종종 남몰래 이런 가정을 하곤 했다. 카를로스의 영혼에 지워지지 않을 상흔을 새기고, 숨이 멎는 날까지 저를 갈망하게 만드는 것. 하루하루 시들어 가는 카를로스는 어떤 모습일지 종일 옆에서 지켜보고 싶기도 했다.

도무지 현실성이라곤 없는 그 장면을 그려 보는 것만으로도 아서는 선득한 만족감에 잠겼다.

그렇지만 그게 실제로 가능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여타 소설 속 주인공들이 그렇듯, 어떤 고된 시련에 처해도 이겨 내는 강인한 부류의 인간이었다.

카를로스에게 아서는 일종의 장애물과 같은 존재였다. 지금이야 잠시 아서라는 예기치 못한 장해로 경로를 이탈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본래 예정되어 있던 길로 회귀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누가 옆에서 무슨 수작질을 벌이든 카를로스는 결국엔 극복해 내고 말 것이었다. 그게 아서가 아는 카를로스였다.

물론 지금 하는 짓을 보면 좀 미심쩍긴 한데….

아서의 가슴을 애무하던 카를로스는 그걸로도 만족하지 못한 듯, 발갛게 멍이 든 엉덩이마저 주물럭거렸다. 드디어 더듬는 부위가 다른 데로 옮겨 가긴 했다.

살덩이를 쥔 손이 둔부를 양옆으로 넓게 벌렸다. 차가운 손끝이 예민한 부위에 닿자 몸이 움찔 경련했다. 젖어 있는 아래로 엄지와 검지가 한 번에 밀려 들어갔다. 아직까지 부드럽게 풀려 있는 구멍은 아무런 저항 없이 카를로스를 받아들였다.

“종일 쑤셔 대서 그런가, 조금 붓긴 했군요.”

예민한 부위를 제 것처럼 만져 대며 카를로스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형님은 이런 걸 더 좋아하지 않나?”

“…….”

발끈하려 들던 아서가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아니라고 부정하기엔 전날의 기억이 생생했다. 다만 제 약점을 아는 것과 그것을 겸허히 인정하는 건 또 다른 얘기라, 표정이 구겨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서가 퉁명스레 입을 다물었다.

웬일인지 카를로스는 그런 아서를 더 추궁하지 않았다. 심지어 입가엔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아서가 어떤 짓을 하든 관대히 넘어갈 것처럼 보였다.

“아, 읏….”

그렇다 하여 아서를 희롱하는 손길을 거두진 않았다. 주름을 벌린 손가락이 안에서 원을 그렸다.

전날 혹사당했던 뒤는 붉게 달아오른 채 멀건 액을 흘렸다. 뒤를 벌리니 속에 머금고 있던 게 당연히 흘러내리기 마련인데, 카를로스는 제 정액을 모아다 다시 아서의 안으로 억지로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이미 눅진하게 풀린 내벽은 삽입을 위한 준비를 다 끝마친 채였다. 허락을 구하려는 건지 애를 태우려는 건지, 카를로스는 손가락을 밀어 넣고 안을 눌러 대기만 했다. 아서는 힘겹게 목 안으로 신음을 삼켰다.

“그렇게, 하고…. 또 하려고?”

“형님이 중간에 잠들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추삽질을 하듯 왕복하는 움직임에 아서의 둔부가 덩달아 흔들렸다. 마찬가지로 아서의 얄팍한 인내심 또한 아래를 쑤시는 자극과 함께 휘청거렸다.

“하아…. 형님, 오늘은 종일 이러고 있을까요.”

밀어낼 것인가, 말 것인가. 아서는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사실 카를로스 스스로 인지를 못 하였을 뿐, 그는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아서를 유혹해 낼 수 있었다. 특히나 그게 수십 일 동안의 방치 후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카를로스가 작정하고 유혹하면 아서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넘어갈 것이었다. 딱 전날처럼 말이다.

아서는 카를로스의 어깨를 은근슬쩍 끌어안았다. 솔직한 말로 매일 밤 홀로 신경전 아닌 신경전을 하는 것도 지겨웠다. 이 상황을 회피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회의감마저 조금씩 들었다.

카를로스를 밀어내며 버틴다고 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갈 것 같지도 않았다. 수십 일 동안 아서도 손가락만 빨고 있진 않았던 터라, 카를로스가 웬만해선 제 의지를 꺾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 극단적으로 반란 따위를 일으킨다면야 어찌 될지 모르겠다만 굳이 쉬운 길을 두고 멀리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까딱 잘못하였다간 황후위에 오를지도 모른단 점이 여전히 거슬리긴 했다. 그야 조금 돌아가는 방법을 택하면 된다. 당장 카를로스를 단념하게 하는 건 힘들어도, 선택을 보류하도록 설득하는 건 가능해 보였다.

그럼 혹시 또 모른다. 1년, 2년, 3년….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카를로스가 생각을 바꿔 먹을지도.

전날 치른 섹스도 기분 좋았던 데다가, 이미 일을 저지른 거 어쩌겠냔 생각까지 들자 아서의 사고는 점점 낙관적으로 흘러갔다.

어젯밤은 무언의 합의하에 치러졌지만 카를로스는 평소대로 거칠고 다소 강압적이었다. 그 말인즉슨 칼은 아서가 어느 지점에서 반응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단 의미다. 그렇다면 굳이 억지로 카를로스를 도발할 필요도 없었다. 몸과 정신이 따로 노는 척하면서 나머지는 카를로스에게 맡기면 된다.

아서는 엎드린 채로 제 팔에 고개를 묻었다. 이왕 저질러 버린 거 그냥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부드럽게 풀어진 카를로스의 얼굴을 보니 그걸 일그러뜨리고 싶지 않았다. 언제 또 몹쓸 변덕이 샘솟을지 모르나 지금 당장으로선 그런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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