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만의 밤 4권
8장 (2)
익숙한 백색궁에 발을 디디고도 카를로스의 표정은 풀어질 기미가 없었다. 깍지 낀 손이 답답했던 아서가 팔목을 비틀었지만, 카를로스는 놓아주지 않고 도리어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장미궁의 소요는 조용히 수습되었다. 궁 주변이 철저하게 통제되었던 터라 아직까지 탄신연이 별 탈 없이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음악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거 좀 그만 놓지.”
침실까지 질질 끌려오듯 한 아서가 중얼거렸다. 문이 잠긴 걸 확인하고 나서야 카를로스는 손을 놓아주었다. 연회의 들뜬 소음은 침실 문이 닫히자마자 곧바로 끊겼다.
치료제를 가지러 간 기사 대신 카를로스가 아서의 탈의를 도왔다. 카를로스는 옷을 입히는 것엔 어설픈 대신 벗기는 데엔 웬만한 시종 못지않게 능숙했다. 다만 정돈하는 데엔 별 관심이 없어 벗겨진 옷은 침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뜨렸다.
카를로스가 아서의 옷을 벗기는 내내 아서는 조금씩 비틀거렸다.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장소에 도착하자 긴장이 풀린 것 같았다.
틀어막고 있던 약 기운이 뒤늦게 퍼진 듯, 두 발로 서 있는 것이 힘이 들어 보였다. 마나가 묶인 채로 최음제까지 음용했으니 여태 정신을 놓지 않은 게 놀라운 일이었다.
어지간히 힘겨웠는지 보통 때면 곧장 욕실로 향해 몸부터 씻어 냈을 아서가 곧바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불룩해진 이불 끄트머리에 새하얀 발만 비죽 튀어나왔다.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열 오른 숨소리가 이불 속에서 맴돌았다. 아서에게 다가가려던 카를로스가 멈칫 행동을 멈추었다.
「최음제는 해독약이랄 게 따로 없어서요. 일정량의 정액을 빼내면 원상태로 돌아올 겁니다. 황제께서 전하에게 최음제를 먹였습니까? 점잖게 보이더니 폐하께서도 역시 제정신은 아니었군요.」
장미궁을 나서기 전 힐다가 쾌활하게 건넨 해결책은 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정액을 빼내라는 것이었다.
아서를 해할 생각이 없던 황제는 포도주에 독이 아닌 약재를 섞었다. 마나 과다증 환자를 위해 쓰이는 약은 부작용이 적은 편이었는데, 아서는 지나치게 많은 양을 들이켜 문제가 되었다. 만일 아서가 기사가 아니었다면 신체에 영구적인 손상이 남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다행히 힐다는 그 또한 2주 정도면 회복될 것이라 예측하였다.
카를로스의 시선이 불긋한 복사뼈로 향했다. 아서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면서도 욕구를 감추지 못한 눈동자는 매끈한 곡선을 훑었다.
언뜻 보아도 아서는 평소보다 흐트러져 있었다. 약에 취한 형님은 그를 거부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한 발 한 발 걸음을 떼는 게 쉽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끈질긴 시선은 여전히 한곳에 붙박여 있다. 그의 머릿속을 차지한 아서는 자그마한 계기로도 손쉽게 발가벗겨지곤 했다. 그게 지금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당장이라도 형님에게 입을 맞추고, 열 오른 살 위로 흔적을 새기고 싶었다. 형님의 다리를 벌려 그 안에 제 것을 쑤셔 박을 수만 있다면….
잇새로 탄식과 닮은 숨이 샜다. 카를로스의 눈매가 짜증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는 황제가 먹인 약을 핑계로 제 욕정을 채우고 싶지 않았다. 약 기운이 사라지고 난 뒤 아서의 심정이 얼마나 비참할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결국 카를로스는 모든 욕구를 뒤로 하고 카우치에 기대앉았다. 손으로 눈가를 덮어 차라리 보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시야를 가리자 반대로 귀가 열렸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희미한 한숨이 귓전을 스쳤다. 이불 안에서 조금씩 젖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작고 희미하던 마찰음은 점차 물기를 얻어 가며 노골적으로 변해 갔다. 아서가 그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명명백백했다.
마치 어디까지 참을 수 있겠냐고, 대놓고 그의 인내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카를로스는 차라리 이 자리를 피해 버릴까 싶었지만 이전 날의 맹세가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다시는 그런 식으로 도망가지 않겠다고, 제 입으로 그렇게 맹세했다. 물론 그런 말뿐인 맹세쯤은 잊어버린 척 자리를 피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카를로스는 고집스럽게 자리를 지켰다. 그날의 약속은 그가 아서의 옆에 머무를 수 있는 명분이기도 했다.
카를로스는 끝끝내 얌전히 그 자리를 지켰다.
이불 속에 있던 아서가 애간장이 닳다 못해 속이 터질 때까지 말이다.
“…하고 싶어.”
아서는 이불 속에서 애타게 속삭였다. 하고 싶어 미칠 것 같아, 카를로스. 그가 미약한 속삭임으로 카를로스의 귓가를 두드렸다.
최음제에 취한 이가 제정신이 아니리란 건 아무리 약물에 문외한일지라도 아는 사실이었다. 카를로스는 고개를 내려 제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가 지금 어떤 심정으로 인내하고 있는지 아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니 저따위 방식으로 그를 부추기는 것이었다.
“카를로스.”
“…부르지 마세요.”
카를로스는 제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그만하란 말을 무시한 아서는 끝을 모르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렇지 않아도 끊길 것처럼 이어지던 인내가 얄팍하게 흔들렸다.
카를로스가 찰나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켰다.
물러날 때와 달리 그는 서너 걸음 만에 아서에게 다가가 이불을 들추었다.
소리만으로 추측했던 광경이 눈앞에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아서의 성기는 여러 차례 사정한 흔적을 달고선 다시 사정 직전처럼 발기해 있었다.
“빨리, 칼….”
넋이 나간 아서는 이미 부끄러움이란 게 뭔지 잊어버린 듯했다. 카를로스가 빤히 쳐다보는데도 제 것을 쥐고 훑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이 언젠가 꿈에서 보았던 아서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위하는 아서. 똑같은 광경인데 카를로스가 느끼는 감정은 그때와는 정반대였다.
“…내일이면 후회하게 될 겁니다, 형님.”
“후회는 네가 해야지…. 하아, 내가 이렇게 된 건 전부 네 잘못이니까.”
아서는 내게 색사를 알려 준 것이 너이니 네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요지의 말을 두서없이 내뱉었다. 카를로스는 뒤늦게 그 말을 이해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약에 절은 사람과 무슨 대화를 하겠다고 생각한 건지, 제가 어리석었다.
그가 아서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잡았다. 자위를 돕기 위한 손길로, 끝까지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손 틈새로 물기 어린 소리가 새어 나왔다. 데일 것 같은 열기가 그의 피부로도 전염되었다. 카를로스는 입 안 살을 너덜거리도록 깨물었다. 손아귀에 힘을 차츰 주었다.
“흐윽, 아….”
위아래로 몇 번 훑기 무섭게 아서가 몸을 떨며 사정했다. 흐느끼는 듯한 신음이 터졌다. 몽롱한 눈동자가 쾌감으로 눅눅히 젖어 들었다. 그렇지만 그도 잠시뿐이었다.
다시금 괴롭게 발기한 성기를 쥐고 아서는 헐떡거렸다. 쾌감은 찰나였고 그보단 뒤따르는 갈증이 극심한 듯했다.
“그냥, 하아. 빨리, 빨리….”
애원하는 목소리에 짜증이 실렸다. 아서는 카를로스를 걷어차고 싶은 것처럼 노려보면서 카를로스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속옷과 하의를 끌어 내리는 손길만으로도 아서는 바르르 허벅지를 떨어 댔다. 흘러내린 정액으로 뒷구멍은 이미 적실 필요 없이 축축했다.
아서가 스스로 다리를 벌렸다. 카를로스는 욕지거리가 나오려는 것을 씹어 삼켰다. 와인 한 모금 마시지 않은 맨정신이었는데 눅눅한 약 기운이 제게로까지 옮아온 것만 같았다.
적실 필요조차 없는 구멍에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기다렸다는 양 내벽이 순간적으로 꽉 조여들었다. 그는 예민한 부분을 익숙하게 찾아 손끝으로 꾹 눌렀다.
“흑, 아…!”
아서가 하반신을 비틀었다. 극점을 누르고 빠르게 왕복하자 정제되지 못한 신음이 마구 터졌다. 사정의 전조도 없이 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 흐으….”
“…좋아요, 형님?”
아서를 따라 카를로스의 호흡 역시 점차 거칠어졌다. 안을 쑤셔 대며 구멍을 응시하는 시선이 습하게 가라앉았다.
마른 입술을 혀로 훔친 카를로스가 들썩거리는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눌러 고정시킨 채 쑤셔 넣은 손을 털었다. 팔뚝의 핏줄이 새파랗게 돋아났다.
“응, 아, 잠깐, 잠…. 아…!”
갑작스러운 자극을 견디지 못해 아서가 자지러지며 몸을 물리려 했다. 잔뜩 충혈된 내벽이 마구 수축했다 풀리기를 반복했다. 손등뼈가 엉덩이 살에 부딪히는 소리로 침실이 시끄러웠다.
아서의 발버둥이 커졌다. 눈 밑부터 목덜미까지 드러난 피부가 열병에 걸린 것처럼 새빨갰다. 흐느끼는 와중에도 젖은 성기에선 물처럼 묽은 정액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잠깐, 칼, 사정이, 사정이 안 멈춰….”
아서가 두려운 목소리로 애원했다. 기나긴 절정으로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눈두덩이가 뜨거워 눈알마저 타는 것처럼 달아올랐다.
“…무서워하실 것 없습니다, 형님. 이렇게 전부 다 빼내고 나면 괜찮아진다고 하더군요.”
그리 말한 카를로스는 마치 아서의 정액을 전부 짜내는 게 제가 맡은 임무인 마냥 행동했다.
애가 탄 아서가 참다못해 불룩하게 솟은 앞섶에 손을 대자 인상을 찌푸리고 치워 버렸다.
“할 생각 없으니 건드리지 마세요.”
“왜….”
분명 흥분한 흔적이 뚜렷한데 거부하기만 하니 아서로선 서러워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그러나 카를로스는 손장난까지가 끝이라고 선언하곤 더는 양보하지 않았다. 아서는 어쩔 수 없이 감질나는 자극에 몇 시간가량을 시달렸다. 고문과 같은 시간이었다.
“이제, 읏, 다 나은 것 같아. 그만해도….”
“좀 전까지만 해도 빨리 해 달라면서.”
“…….”
나중엔 자포자기하여 손발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아서의 이마에 손을 대 열을 재 보더니 아직이라고 생각했는지 다시금 아서를 강제로 절정에 도달하게끔 만들었다.
더 참았다간 미쳐 버릴 것 같던 아서는 차라리 몸을 버리고 도망가 버리는 쪽을 선택했다. 혼이 빠져나간 아서의 몸이 힘을 잃고 스륵 늘어졌다.
무겁게 내려앉은 눈두덩이는 잠이 든 것처럼 미동 한 점 없었다. 가쁘게 내쉬던 호흡이 점차 차분해졌다.
땀에 젖어 엉망인 이마를 커다란 손이 쓸어 올렸다. 카를로스는 아직 열이 남아 불그스름한 뺨에 입을 맞추고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왔다. 아서가 잠이 든 사이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
새벽 사이 황성이 뒤집혔다.
정확히는 황성은 시작점에 불과했고 제국 전역이 간밤에 뒤집혔다. 황제가 유폐된 것을 기점으로 숙청이 시작된 것이었다.
저택으로 돌아가 취기에 절어 곯아떨어졌던 이, 해가 밝기 전 은밀히 밀회를 즐기던 이, 철통같이 방비를 하고 있던 이. 누구도 예외는 없었다. 황제 진영에 속한 귀족들이 줄줄이 끌려가며 황성 바닥을 핏물로 적셨다.
이미 승자와 패자가 결론지어진 전쟁이었다. 황제의 일신이 붙잡혀 있는 상황에서 전쟁을 일으킬 만큼 충성스러운 자들은 극소수였다. 대부분의 귀족은 싸워 이기기보다 제 피해를 최소화하기에 급급할 뿐이었다. 구심점이 사라진 황제 진영은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이기지 못하고 맥없이 무너졌다.
탄신연을 위해 제국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밀집해 있던 것도 전쟁을 단시간에 끝내는 데에 기여했다. 예정되어 있던 것은 아니었으나, 미리 계획해 두었던 것처럼 완벽한 변혁이었다.
하여 끊이지 않던 소요가 잠잠해진 것은 고작 십 일 만이었다.
탄신연이 끝난 지 십 일 후, 인파로 북적였던 홀은 을씨년스러울 만큼 텅 비었다. 그러나 황성의 사용인들은 전보다 더 분주하게 몸을 움직였다. 차기 황제에게서 황제 즉위식을 수십일 내에 준비하라는 명이 떨어졌던 것이다.
황태자 탄신연이 얼마 지나지도 않아, 2황자 카를로스의 황제 즉위식이 치러진다. 심지어 차기 황제는 즉위식과 동시에 국혼을 치를 것이라 선언했다.
하룻밤을 기점으로 권좌의 주인이 뒤바뀌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극도로 언행을 조심하며 몸을 낮췄다.
한편 바깥이 온갖 비명과 소란과 소문, 아우성으로 시끄러운 때에 백색궁은 종일 적막이었다. 궁의 주인 아서는 바깥의 소란과 유리되어 있는 양 며칟날이 지나고도 침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침실에 틀어박힌 아서는 며칠간은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기만 하였다. 들이켠 약물 탓에 구속구를 찬 것과 비슷한 상태였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지켜보던 카를로스도 서서히 우려가 들었다.
금일 낮, 아서는 유난히 날이 선 채로 이불 안에 박혀선 나올 생각을 않았다. 전날 새벽 황태자궁까지 쳐들어와 ‘태자 전하’를 원망스럽게 부르짖던 귀족 탓인지도 몰랐다.
아서의 심정이 어떨지 카를로스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때문에 위선적으로 보일지라도 그는 충격받은 형제를 다독이기 위해 아서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입 한 번 맞추지 않았고, 몸을 희롱한 적도 없었다. 바쁜 와중에 간간이 찾아가 아서를 품에 끌어안고 잔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아서의 상태는 도통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끼니를 챙기는 것조차 거부하여 누군가 먹여 주지 않으면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입에 넣어 주는 것까진 뱉지 않으니 다행이었다.
아서는 하루하루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지금 아서에겐 카를로스의 존재 자체가 독인 것만 같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카를로스는 가브리엘의 쓸모를 조금이나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일 가브리엘이 없었다면 그는 쉽사리 아서의 곁을 비우지 못했을 것이다. 혹여나 아서가 자해라도 할까, 구속구를 채운 뒤 감시인을 촘촘히 세워 두고 떠났을 게 분명하다. 그 구속은 분명 아서의 육신을 보전하는 대신 약해진 정신을 갉아먹는 데에 일조했을 테고.
“형님.”
카를로스는 이불에 가려진 아서의 몸을 쓰다듬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아서는 카를로스의 기척이 느껴지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나오지 않았다.
“…형님, 오늘도 종일 그 안에 틀어박혀 있을 작정입니까?”
“…….”
한참 침묵이 이어지다 ‘신경 꺼.’라는 답이 주어졌다. 그 뒤로 무언가 혼잣말이 뒤따랐으나 발음이 부정확하여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카를로스는 동그란 이불을 그대로 두고 카우치에 몸을 기댔다. 강제로라도 끄집어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아서의 기분이 풀리기를 기다렸다.
“…거기가 편하면 그러고 계세요, 그럼.”
대체 제가 왜 이런 헛수고를 하고 있나 싶었지만 이미 몸은 이미 얌전히 그 자리에 엉덩이를 붙인 뒤였다.
기실 그가 이렇게 허투루 보낼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진 않았다. 점점 초조해지는 그와 달리 아서는 여전히 모습을 보여 줄 의향이 없는 듯했다.
“실례합니다, 전하.”
채 십 분이나 지났을까, 역시나 누군가 침실 문을 두드렸다. 카를로스는 아서 쪽을 빤히 쳐다보다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필립을 심문하기 위한 준비가 끝이 났습니다.”
“알겠다. 잠깐 대기하도록.”
카를로스가 피로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생각 같아선 이대로 아서의 옆에 눕고 싶었지만, 필립을 심문하는 건 더는 미뤄서는 안 될 일이었다. 오늘이 아니면 어느 때 시간이 날지 기약이 없었다.
가브리엘이 직접 그자를 맡겠다 자처한 지가 십여 일이 지났다. 이미 지금쯤 기사 필립은 무엇을 묻든지 전부 말할 준비가 되었을 것인데, 카를로스가 조금 늦게 찾아가는 감이 있었다.
“형님, 이따 또 뵙겠습니다.”
카를로스는 심통이 난 아서를 두고 방을 나섰다. 인사를 건네도 아서는 이불로 꽁꽁 싸매고서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순간 카를로스의 눈빛이 차가워졌으나 그는 이내 등을 돌려 침실을 나섰다.
통로를 지나치는 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아서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그는 제 형제의 속내를 가볍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즉 과거에는 그러했단 뜻이다.
이제는 조금 사정이 달랐다. 아서의 속을 들여다보려 해도 안개가 낀 듯 모든 것이 모호하기만 했다.
그러니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서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캐내는 수밖에는.
“이쪽입니다, 전하.”
백색궁의 지하는 화려한 궁성 외관과 달리 음산했다. 의도적으로 청결을 포기한 감옥에선 퀴퀴한 악취가 났다. 숨을 쉴 때마다 밀려드는 탁한 공기에 카를로스를 뒤따르던 마법사 하이브가 인상을 한껏 찌푸렸다.
작은 소리도 크게 울리도록 설계된 지하는 은밀하게 무언가를 하기엔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핏방울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마저 선명하게 터졌다. 비어 있는 철창을 훑어본 카를로스가 이내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걸었다.
빛 한 줄기 비치지 않는 철창 안에 기사 필립이 있었다. 사지가 구속된 채 축 늘어진 몸은 걸레짝과 다를 바 없었다. 발 아래 고인 웅덩이로 핏물이 떨어져 내렸다.
실상 이미 황제가 유폐된 때에 고작 기사 하나를 공들여 심문할 필요는 크지 않았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 황제의 최측근은 모조리 처형될 예정이긴 하나, 그 과정은 아주 간결하고 빠르게 진행될 터였다. 필립은 운이 나쁜 케이스였다.
“하이브 공. 주위에 차단 마법을 걸어 주겠나.”
“예, 전하.”
카를로스와 필립 주위에 반원 모양의 불투명한 막이 둘러졌다. 카를로스는 그 자신을 제외한 모두를 철창 밖으로 물렸다. 지금부터는 오로지 그 혼자만이 들어야 할 진실이었다.
축 늘어져 있던 필립이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목을 지탱하는 것조차 힘에 겨운지 눈동자만을 올려 카를로스를 바라본다.
“정신이 들었나 보군.”
“…쿨럭…! 무엇을 물으셔도, 저는, 아는 게 없습니다….”
저는 아는 게 없습니다. 기사는 오직 그 말만을 할 줄 아는 백치처럼 중얼거렸다. 좀 전까지는 무엇이든 답하겠다고 빌었다더니 그사이에 다시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그나마 황제의 전속 호위 기사라고 입이 가볍진 않은 듯했다.
“아는 게 없다는 건 경의 생각이고. 그대도, 나도 안부를 물을 처지는 아니니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지.”
카를로스가 담담히 말했다. 필립이 텅 빈 눈을 끔뻑였다.
“경에게 자식이 하나 있다 들었어.”
차분히 말하자 필립의 발끝이 움찔 흔들렸다.
“그간 정을 많이 주었던 모양이야. 꽤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더군.”
본디 황제의 전속 호위 기사는 황제 외에는 지킬 자가 없어야 한다. 기사의 약점이 곧 황제의 약점이 되기 때문이다. 그토록 충성스러운 개처럼 굴던 이가 남몰래 제 핏줄을 기르고 있었단 사실이 카를로스는 자못 흥미로웠다.
“하이브.”
신호를 주자 하이브가 뒤편에 있던 성인 몸 반만 한 자루를 끄집어냈다. 덩치는 커도 약골인 마법사는 낑낑대며 힘겹게 자루를 끌어다가 카를로스 옆에 두었다.
“…끄응차. 여기 있습니다. 입구를 열까요?”
“열어.”
하이브가 자루 주둥이를 묶고 있던 끈을 풀었다. 입구 반대편으로 돌아간 마법사가 자루 끄트머리를 질질 끌어당겼다. 천이 끌려가며 그 안에 있던 무언가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에는 키가 작고 까무잡잡한 소년이 곤히 잠에 빠져 있었다. 제가 처한 상황을 알지 못하고 깊게 잠이 든 모습이 평온했다. 신장이 크지는 않지만 다부진 신체가 기사 필립을 쏙 빼닮았다. 소년의 얼굴을 확인한 필립이 눈을 크게 부릅떴다.
“이 아이가 이대로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할지, 경과 똑같은 과정을 거쳐 죽게 될지는 그대의 선택에 달렸다. 강요하지 않을 테니 편히 결정해.”
“아이는…, 아이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그렇지. 아이는 늘 죄가 없지. 안타깝게도.”
카를로스는 짐짓 안타까운 듯 혀를 찼다. 필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십여 일간 이어진 고문, 제 앞에서 목숨이 위태로워진 자식은 기사 필립의 의지를 약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검을 빼어 든 카를로스가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이러면 경의 선택이 조금 더 쉬워질까.”
어깨와 팔을 잇는 부분을 겨눈 검이 서서히 살을 파고들었다. 검이 지나간 자리에서 핏물이 새어 나왔다. 살을 가르는 고통에 깨어난 소년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찢어지듯 고함을 지른 필립이 핏발이 선 눈으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나 아직까지 카를로스가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감옥 바닥에 널브러진 녹슨 도구를 주워 들었다. 이미 여러 차례 사용하였는지 전부가 피범벅이었다.
가브리엘이라면 아마 손끝부터 차차 타고 올라갔을 것이다. 카를로스는 그렇게 짐작하고 소년의 오른팔을 쥐었다.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이십니까…! 제발….”
필립은 그제서야 굴복을 선언했다. 황제의 손에 누가 죽어 나가든 묵인하던 이가 제 자식의 자그마한 생채기 앞에선 이토록 쉬이 무너진다. 아이러니한 광경이었다.
“말이 쉽게 통하니 좋군.”
“제 아이만은 고통스럽지 않게 보내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전부…, 콜록, 콜록!”
다급히 말을 뱉던 필립이 목을 쥐어짜듯 기침을 해 댔다. 카를로스는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요란한 기침 소리가 끝나고 난 뒤 카를로스가 답했다.
“아이는 평온히 보내 주지.”
“…황공, 하옵니다.”
필립은 괴로움에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제 자식에 대한 염려와 황제를 배반해야 한다는 자책감이 뒤섞인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경이 알려 주어야 할 건 몇 가지 없어.”
카를로스는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 갔다. 그는 저들 이면에 있을 절절한 사연엔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건 아서가 숨기고 있던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잠깐의 침묵 뒤, 일방적으로 묻고 대답하는 대화가 시작되었다.
카를로스가 짤막하게 물으면 뒤이어 필립이 느릿느릿 이야기를 풀어 놓는 식이었다. 한 번씩 메마른 기침이 터지며 흐름을 끊었다.
오고 가는 대화가 길어질수록 필립은 부쩍 지쳐 갔지만 카를로스는 무심히 질문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이어지던 대화가 끊기고.
카를로스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지하 감옥을 빠져나왔다.
그가 입구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 갤릭에게 물었다.
“형님께서는?”
“좀 전에 식사를 끝마치셨습니다. 힐다 경이 식후에 중화제를 전달하였으나 바닥에 쏟아 버리셨다 합니다. 그 뒤론 침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가브리엘은.”
“평소와 같으십니다.”
평소처럼 정성껏 아서의 수발을 들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느새 바깥은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시야 가득 주홍빛으로 물든 하늘이 펼쳐졌다.
카를로스는 침실을 향해 걷다 무심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시선이 흩날리는 눈을 따라 허공을 배회했다.
축축하던 지하의 공기 대신 시리도록 냉한 바람이 카를로스를 휘어 감고 지나갔다. 밤새 쌓이던 눈은 지치지도 않고 사위를 뿌옇게 물들였다. 한 장의 화폭과 같은 정경이었다.
금빛으로 발그스름하게 물든 태자궁은 그저 아름답기만 했다. 드러난 외관만으론 그 누구도 스산한 어둠이 깔려 있던 지하 감옥의 존재를 예측할 수 없을 터였다.
이 아름다운 궁성과 그 궁의 주인은 닮아 있다.
「폐하께서 태자 전하께 엄하게 굴기 시작했던 건…. 태자 전하께서 2황자 전하를 찾아가셨던 때부터였습니다.」
머릿속에 또렷한 음성이 들리기 시작한다. 기분이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지독히 아래로 가라앉았다.
어린 아서가 나왔던 꿈을 기억했다. 덜 자란 소년의 발그레한 뺨을 보고 카를로스는 조소를 지었었다. 그의 가슴팍에나 겨우 닿을 법한 어린 소년이 어른 행세를 하는 꼴이 우스웠으니까.
「처음으로 손을 올리셨던 것은 역시….」
「…….」
「태자 전하께서 어린 아우에게 패배했던, 그날이겠지요.」
「…뻔한 이야기군.」
「검을 들었던 오른쪽 팔이 부러졌습니다만, 부러진 뼈는 곧바로 신관을 불러 처치하였습니다.」
고작 열다섯 살의 나이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학대. 강도를 더해 가던 폭력은 그 형태를 달리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황제 폐하께선 태자 전하를 상과 벌로 길들이셨습니다. 벌을 내릴 적엔 이 모든 게 다 네가 카를로스보다 모자란 탓이라고, 하나부터 열까지 손아래 형제와 비교하셨지요…. 콜록, 콜록! ……어느 순간부터 태자 전하께선 그분께 닥친 모든 불행을 형제 탓으로 돌리셨습니다. 전부 황제 폐하께서 의도하신 그대로였습니다.」
「태자 전하의 곁엔 감시자가 한시도 쉬지 않고 따라붙었습니다. 그것 또한 그분의 성품에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그리 짐작됩니다.」
과거를 하나하나 되짚어 볼수록 뱃속에 자리한 새까만 덩어리가 조금씩 크기를 불려 갔다.
이번에 카를로스의 머릿속에 들린 건 또 다른 목소리들이었다.
「대외적으로는 황제가 황태자를 끔찍이 아낀다고 알려져 있지 않사옵니까. 황제의 행보로 보아 분명 황태자를 강경히 지지하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만…. 헌데 제가 겪어본바, 조금 꺼림칙한 면이 있었습니다.」
「신이 아무리 황태자의 모습으로 완벽히 위장하고 있다 할지라도 부자연스러운 모습이 없지 않을진대, 황제는 그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대체 무슨 재주를 부렸기에 태자를 이리 말 잘 듣는 개로 만들어 놓았을까….」
마법사 하이브의 목소리, 황제의 목소리가 차례차례 지나간다.
자식이 바꿔치기 당했음에도 의심조차 하지 않던 황제와, 황제에게 이상하리만치 순종적으로 굴던 아서. 제 육체를 상하게 하는 일에 지나치게 무심하던 아서.
그가 깨닫지 못한 사이 단서는 곳곳에 흩뿌려져 있었다.
어째서, 진즉 알아차리지 못했나.
답은 명료하다. 그가 자만하고 있었던 탓이다. 고작 겉으로 보이는 단면 하나만으로, 아서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다 자부하였기 때문이다.
카를로스는 뒤늦게서야 제가 무심코 흘려보냈던 단초를 하나둘 되새기며 모든 전말을 파악했다. 알고 나니 이토록 쉬울 수가 없는 것을, 왜 알아내지 못하였는지.
속이 끝없이 침전한다. 만일 그가 제때 알아차렸다면. 잘못 꿴 첫 단추를 처음부터 다시 끼울 수 있었다면 그들의 관계가 이렇게까지 엇나가지 않았을까. 떠오른 의문을 쉽사리 떨쳐 낼 수가 없었다.
형제에게 들이닥쳤던 폭력과 방치는 피해 갈 수 없는 일종의 거대한 자연재해와 같았다. 그들이 제아무리 서로를 보듬었다 한들 기어코 황제는 두 사람을 갈라놓고 말았을 테다.
“…일찍이, 죽였어야만 했는데.”
검을 쥔 손이 당장 누구라도 베고 싶은 듯 경련했다. 분노, 불안, 당혹, 자책, 후회. 무엇으로도 정의 내리기 어려운 감정이 휘몰아쳤다.
황제의 팔목을 으스러뜨린 걸로는 부족했다. 사지를 부러뜨리고 개처럼 목줄을 단 채 바닥을 기어 다니게 만들었어야 했다.
아비란 작자는 평생에 걸쳐 아서를 짓밟아 길을 들였다. 아서의 영혼에 남은 상흔은 무엇으로도 씻어 낼 수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을 상기하자 카를로스는 당장이라도 황제를 찢어 죽이고만 싶었다. 이미 망가져 있던 것을 재차 짓밟고선 그로도 만족하겠다 되뇌었던 과거의 자신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기실 이 순간 가장 혐오스러운 건 황제가 아니다. 이런 때조차 아서를 놓아줄 생각을 추호도 않는 카를로스 그 자신이었다.
그는 황제에게 분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안도하는 제 모습을 깨달았다. 그리 엇나갈 운명이었음에도 마침내 형님을 손에 쥐었다고, 아서를 가진 현재에 안도하고 있는 제 자신을….
부정할 수 없이 혐오스러운 감정의 민낯이다.
카를로스는 계속해서 걷고 걸었다. 밀려드는 조급증이 어디로든 가라고 그의 등을 떠밀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을 바로잡아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분명한 건 단 하나였다. 끝끝내 형님은 황제가 아닌 그의 손안에 들어왔다. 결국 아서는 제 반려가 될 것이며, 그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한 황성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카를로스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아서가 있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하, 이쪽은 집무실과는 반대 방향이옵니다만.”
“형님께로 가야겠다.”
그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형님이 제 손이 닿는 곳에 있음을 당장 확인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았다.
“…예?”
부관 마노가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황제가 유폐되고 아서마저 침실에 틀어박힌 상황에서, 카를로스가 처리해야 할 업무는 그야말로 수초마다 산더미처럼 쌓여 가고 있었다.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전하, 잠깐….”
뒤이어 기사 갤릭이 카를로스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 역시 시도에 그치고 말았다.
카를로스의 얼굴을 확인한 갤릭이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무언가 보아선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
돌아간 침실에서 아서는 여전히 이불 속에 파묻힌 채였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카를로스는 펄떡이던 심장이 서서히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그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침실로 들어섰을 가브리엘은 아서의 곁에 앉아 있었다. 기사가 눈으로 건넨 인사에 카를로스는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불을 내려 얼굴만 드러낸 아서는 선잠을 자는 듯했다. 가브리엘이 아서의 머리칼을 가만가만 쓰다듬어 주는 게 보였다. 평온해 보이는 아서를 보며 카를로스는 안도감과 불쾌함을 동시에 느꼈다.
“저는 문 앞에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필요하신 때에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가브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예를 갖춰 인사한 그가 침실을 떠났다. 얼핏 여유롭게 보이는 기사였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을 것을 알았다. 카를로스와 가브리엘의 차이는 제 속내를 밖으로 드러내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것밖에 없었다.
기사가 떠난 자리는 곧바로 카를로스가 차지했다. 카를로스의 기척을 느끼고도 아서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좀 전까지 가브리엘이 만지던 머리칼 위로 제 흔적을 덧대듯 손을 대고 쓸어내렸다.
웬일로 아서는 그를 만지는 손길이 카를로스의 것인 걸 알면서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 무언의 허락 하나로 까맣게 끓어오르던 속이 신기하리만치 빠르게 고요해진다.
그에게 온갖 번민을 심어 주는 아서였지만, 뒤엉킨 머릿속을 깨끗이 씻어 주는 것 역시 결국엔 아서였다.
“형님.”
카를로스는 아서의 뺨을 매만졌다. 자꾸만 건드리는 손길이 성가셨는지 아서가 눈을 떴다. 매일 침실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아직도 잠이 부족한 듯 눈꼬리 끝에 졸음이 매달려 있다.
“잘 쉬고 계셨습니까?”
“그럭저럭….”
반쯤 잠꼬대 같은 대답이었다.
“…내내 이불 속에만 들어앉아 있다가, 이제서야 겨우 얼굴을 내비치시는군요.”
아서는 ‘그게 뭐.’라고 적어 놓은 듯한 얼굴이었다. 여전히 그를 쳐다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저런 얼굴을 봐도 화가 나기는커녕 헛웃음이 비집고 나오려 했다. 분명 좀 전까지만 해도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는데 말이다.
아서의 눈짓 한 번, 손짓 한 번에 휘둘리는 스스로를 인지한 지는 오래되었다. 그는 어떻게든 아서를 손에 쥐고 휘두르려 했지만 정작 길들여진 건 아서가 아닌 카를로스 그 자신이었다.
“그리 바쁜 척을 하더니 이제 한가한가 봐.”
아서는 무언가 불만이 많은 투로 말했다. 그가 바빠질수록 아서에겐 좋은 일일 텐데 무엇이 그리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바쁜 척을 하는 것이었으면 좋겠군요. 다시 가 봐야 합니다.”
“그럼 여긴 왜 또 왔어.”
“형님 생각이 나서요. 내내 숨어서 얼굴 한 번 안 보여 주셨잖습니까.”
카를로스는 제 속내를 반만 드러냈다. 차마 불안에 쫓겨 여기까지 왔다곤 말할 수 없었다.
뭔가 불만스러웠는지 아서는 아무 답이 없었다. 흰 눈으로 카를로스를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카를로스도 아서를 마주 보았다. 창백한 뺨과 유려하게 자리한 눈, 코, 입을 차례대로 훑었다. 제법 단단한 턱선은 아서의 굽히지 않는 성격을 드러내는 듯했다. 날카로운 눈매는 신경질적이면서 한편으론 무심하다. 저 날이 선 눈매가 이 순간 왜 이렇게나 제 마음을 진정시키는지 그도 알 수 없었다.
아서가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는 것보단 화를 내는 것이 낫고, 화를 내는 것보단 다정한 편이 낫다. 그러나 거짓으로 꾸며 낸 다정은 그에게 아주 짧은 만족감만 줄 뿐으로, 그 후에 남은 건 공허하기까지 한 갈망이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속내를 숨기지 않는 쪽이 나았다. 그가 변혁 이후 달라진 아서를 다그치지 않는 이유였다.
“…형님께 손을 댈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카를로스는 조금이나마 아서의 기분을 풀어 주고자 시도했다.
“누가 그런 걸 물어봤나?”
한데 아서는 그의 말에 도리어 인상을 구겼다. 어딘가 잔뜩 약이 올라 보이기도 했다. 황제가 유폐된 것이 아서에게 그리도 화가 날 일인 걸까.
황제는 서슴없이 아서의 뺨을 내려치고, 모욕적인 말로 아서를 내리 깎았다. 그런 황제일지언정 아서에게는 여전히 소중한 사람인 모양이다.
“형님.”
결국 카를로스는 참지 못해 불쑥 내뱉고 말았다.
“…하나 여쭤볼 말이 있습니다만.”
그는 좀 전부터 입 안에서 맴돌던 이름을 끄집어냈다.
“한슨이라는 자를 아십니까?”
“…한슨?”
다소 뜬금없는 물음이었는데 아서는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카를로스를 한 번 올려다본 게 끝이었다. 만일 카를로스가 확신을 품고 있지 않았더라면 속아 넘어갈 법한 태연한 반응이었다.
「형님을 치료했던 신관의 이름은?」
「한슨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도 종종 황성에 드나들었습니다만, 태자 전하께서 성인이 된 이후 살해당했습니다.」
「누구에게?」
「현장을 제 눈으로 목격한 것은 아닙니다만…. 태자 전하께서 직접 손을 쓰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입막음을 위한 것이었나.」
「그렇다기보단… 황제 폐하의 개입이 있었던 걸로 추측됩니다. 태자 전하께서 신관에게 의지하기 시작하자, 후에 그자가 전하께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하며 직접 죽여 없애길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악영향? 형님을 제 말만 듣는 꼭두각시로 만들고 싶었던 거겠지….」
필립은 카를로스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전부터 형님은 강박적일 만큼 타인에게 정을 주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아서의 독선적인 성격이 스스로를 고립시켰다고 생각했으나 그 또한 황제의 영향이었던 것이다.
“형님과 그자가… 꽤나 돈독한 관계였다고 들었습니다. 들은 적이 있습니까?”
“글쎄, 이전 시종장의 이름이 한슨이었던가.”
“정확히는 신관의 이름입니다. 유망한 인물이었으나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 하더군요.”
“그래? 그것참 안타까운 일이로군.”
그렇게 툭 답한 아서는 흥미가 사라진 듯이 카를로스에게서 반쯤 등을 돌렸다.
“형님.”
등을 보인 아서는 그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시선을 외면하거나 등을 돌리는 건 카를로스가 가장 싫어하는 행동 중 하나다. 그럼에도 아서는 늘 아무렇지 않게 그와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기본적으로 아서가 타인의 감정에 무신경한 탓도 있겠지만, 지금 같은 때는 예외다. 저건 그의 기분을 끌어 내리려 의도적으로 행한 짓이었다.
카를로스는 평소 버릇대로 구불구불하게 엉킨 뒷머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대로 형님을 강제하는 것쯤이야 장난처럼 간단한 일이다. 고민하듯 그가 머리칼을 만지작거리자, 아서의 어깨가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
아서에게 닿아 있던 손이 힘을 잃고 툭 떨어졌다. 카를로스는 제 손을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혼란스러웠다. 조급증을 이겨 내지 못하고 여기까지 달려왔건만 무얼 어찌하고 싶어 이 자리에 서 있는 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폐하께선 태자 전하께서 그분만큼, 아니, 그분 이상으로 카를로스 전하를 증오하길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원하였던 바를 완벽히 이루셨지요.」
그토록 괴롭게 원망했던 시간들이 전부, 황제의 농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아서가 카를로스를 그토록 증오하였던 것. 카를로스에게 강한 열등감을 품게 되었던 것이 전부 그렇게 되도록 길들어졌기 때문이라고.
형님이 그의 궁을 찾았던 날로부터 황제의 은근한 냉대가 이어졌고, 그와의 대련을 기점으로 손찌검이 시작되었다. 카를로스에겐 구원이었던 나날들이 아서를 고통으로 내몰았다.
과거 카를로스는 아서가 제 손을 너무 쉽게 놓았다 원망하였지만 실은 그 반대였던 건지 몰랐다.
뒤늦은 깨달음이 서서히 그의 목을 조여 왔다.
묻고 싶었다. 그렇다면 아서가 카르로스를 죽이려 시도했던 건 오로지 그 자신의 의지로만 행한 일인지.
그러자 연이어 또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아서의 의지라는 게 정말 온전히 아서만의 것일 수 있는 걸까.
아서의 순종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황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아서를 무너뜨렸다. 긴 시간에 걸친 학대는 서서히 아서를 좀먹어 갔을 터였다.
어째서 아서가 들이닥친 폭력 앞에서 무너지지 않았는지, 카를로스는 한참 늦게 깨닫고 말았다. 그가 한 짓은 오래된 상흔 위에 또 다른 상처를 덧바른 행위에 불과했다.
무너지지 않을 만큼 강인하거나, 본래부터 무너져 있었거나.
아서는 후자였다.
지난 나날을 하나씩 반추한다. 만일 형님을 감금하였던 그날로 돌아간다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를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적어도, 그리 어설프게 형님을 찍어 누르려 들진 않을 것이다.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형님의 의지를 꺾고,
…제 손에 쥐고자 하였겠지.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그려졌다. 과정을 어떤 식으로 바꾼다 하여도 결과적으로 그가 욕망하는 것은 같다.
후회하냐 묻는다면, 후회를 한다. 진실을 알지 못했던 것을. 다른 수단을 택하지 못한 것을.
형님께 용서를 빌어야 할까. 당신을 탓하고 경멸하였던 것, 당신을 겁간하고 짓밟았던 것을? 이제 와 용서를 빈다 한들 무언가 달라질 수나 있을까. 그는 회의적이었다.
진정 사죄를 하고자 한다면 아서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게 옳았다. 한데 카를로스는 여전히 아서를 놓아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형님의 부재를 잠깐 고려한 것뿐인데도 불안감에 심장이 우그러지는 감각이 들었다. 고작 상상만으로도 이러한데 실제로 형님을 놓아준다는 건 단연코 불가능했다.
사고가 쳇바퀴 돌듯 빙빙 그 자리를 맴돈다. 카를로스는 움직이지 않으려 드는 몸을 일으켰다.
아서에게 인사말을 건넸지만, 역시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재차 아서의 모습을 눈에 담은 후에야 그는 침실을 나섰다.
문을 열고 나가자 초조하게 서 있던 부관이 크게 반색했다.
“전하…! 얼른 집무실로,”
“아니. 탑으로 가겠다.”
“…예?”
놀란 부관을 뒤로하고 카를로스는 이번엔 황제가 유폐되어 있는 탑으로 향했다. 마노와 갤릭은 다시 울상을 지은 채 카를로스를 뒤따랐다.
노을이 번졌던 하늘은 그사이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해가 사라진 가운데 눈을 장식처럼 두른 황성만이 창백한 빛을 흘렸다. 휘날리던 눈송이는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조금씩 잦아들었다.
***
밤과 새벽 중간 즈음에 걸친 시간이었다.
잠에 빠진 아서 곁에 무언가 놓였다. 비릿한 냄새에 잠결에도 아서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서는 내리감은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인기척을 느꼈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은 쉽사리 잠기운을 떨쳐 내지 못했다. 눈이 뻑뻑했다. 슬며시 눈을 떠 옆에 있는 것이 카를로스임을 확인하곤 다시 감았다. 또 제 복장이 뒤집힐 때까지 가만히 지켜만 보다 가겠거니 싶었다.
짧은 눈 맞춤 이후 다시 선잠에 빠져들기 직전,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이 아서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찬 기운에 바르르 떠는데 곧장 상체가 일으켜 세워졌다.
“일어나 보세요, 형님.”
잠이 덜 깬 몸이 힘없이 딸려 갔다. 아서를 끌어당긴 카를로스는 축 처진 몸을 뒤편에서 끌어안았다. 떨쳐 내는 몸짓은 없었다. 잠에 취한 아서는 무방비하기 그지없어 이렇게 품에 안아도 얌전히 기대 있곤 했다.
흰 목선을 따라 푸르스름한 핏줄이 비친다. 카를로스는 그곳에 고개를 묻고 달콤한 체취를 흠뻑 들이켰다.
아서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 그는 입술로 살결을 지분댔다. 코끝을 묻고 뺨을 부비적거렸다. 몸의 주인이 잠에서 깨어나면 사라질 한시적 평화이나마 느긋하게 즐겼다.
“…졸려.”
가슴팍에 등을 기댄 채 꾸벅꾸벅 졸던 아서가 뒤늦게 눈을 떴다. 초점이 흐릿한 눈이 다시 반쯤 감겼다.
“통 정신을 못 차리시는군요. 분명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였는데.”
“중간에 깨고 다시 잔 거야. 그보다 손 좀 떼지…. 차가워.”
“깨워서 미안합니다. 형님께 드릴 선물을 가져온 참이라.”
카를로스가 침대 위에 내려놓았던 것을 들어다가 아서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형님의 탄신을 기념하는 선물입니다.”
“…새삼스레.”
퉁명스럽게 말한 아서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탄신연이 지나간 지 한참이 되었건만 이제 와 무슨 선물을 준다는 건지 의문이었다.
아서는 멍하니 제 손에 들린 것을 훑었다. 점차 또렷해지는 시야에 익숙한 물체가 들어왔다.
기다란 손가락이 네 개, 약지는 잘려 나가고 없는….
“…손?”
“예. 황제의 것입니다.”
손목째로 뜯어낸 듯한 거친 단면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불로 지져 낸 단면에선 기이하게 피 한 방울 흘러내리지 않았다. 사람의 손이라기보단 찰흙 모형처럼 보였다.
그러나 어쩐지 이상하게도 그것은 여전히 온기를 머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섬찟 치미는 오한에 아서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떨어트렸다. 카를로스가 바닥을 나뒹구는 손을 보며 웃었다. 다분히 만족스러워하는 눈빛이었다.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형님을 건드렸던 손입니다만.”
아서는 황제의 손이 닿았던 부위를 침구에 닦았다. 이딴 걸 무슨 선물이랍시고 칭한 건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등 뒤의 카를로스를 밀어냈다.
“이게 무엇 하는 짓이냐. 폐하께 무슨 짓을….”
“죽이진 않았으니 안심하세요.”
담담히 말한 카를로스가 아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어깨와 목이 만나는 지점에 제 턱을 걸치고 그가 말했다.
“처음엔 분명 황제의 인장만을 떼어 내려 했는데 말입니다.”
그것이 다섯 손가락 중 약지만 뜯겨 나갔던 까닭이었다.
“…문득 화가 치밀어 오르지 않겠습니까.”
“…….”
“놀라실 것 없어요. 황제를 죽이진 않을 생각입니다. 그자의 사지를 끊어도 목숨만은 붙여 두겠습니다. 형님께서 바라신 대로.”
아무런 말을 못 하고 굳어 있는 아서에게 카를로스가 말을 덧붙였다. 아서로선 황망할 따름이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전부 형님께서 자초한 결과입니다.”
“뭐?”
아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물었다.
“어째서 내게 단 한 번 언질조차 주지 않았습니까?”
“내가 폐하의 손을 멀쩡히 붙여 놓으라 부탁하였어야 했단 말이냐.”
“아뇨, 황제의 손 따위를 말씀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무얼,”
“한슨.”
카를로스가 아서를 제 품에 가두고 속삭였다.
“정녕 그 이름을 잊은 건 아니겠지요.”
“…….”
“답해 보십시오, 형님. 그자가 왜 죽었어야 했는지. 형님의 의지로 선택한 일이 맞기는 한 건지.”
품 안의 몸이 긴장으로 굳는 게 느껴졌다. 기사 필립은 많은 것을 들려주었지만, 한슨이란 자의 죽음에 대해선 추측만을 늘어놓았다. 카를로스는 또다시 아무것도 모른 채로 멍청한 짓거리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계속 입을 다물고 계신다면, 내일 밤엔 황제의 반대쪽 손을 자르겠습니다.”
카를로스가 태연히 아서를 재촉했다. 허울뿐인 경고가 아니었다. 황제의 반대쪽 손까지 잘라낼 수 있다면 기쁘게 반길 카를로스였다.
“대체 그 이야기를 왜 캐묻는 건지 모르겠지만….”
바닥에 널브러진 손을 응시하던 아서가 단념한 얼굴을 했다.
“한슨, 그자는 내가 직접 죽였다.”
“어째서?”
“…폐하께서 내게 그자의 처분을 맡기셨기에.”
그건 꽤 오래전의 일이었다. 아서가 머리 한구석에 묻어 둔 채 잊어버리려 했던 기억이기도 했다.
아서의 성인식 날이었다. 정신없던 연회가 끝이 나고, 침실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황제가 있었다.
「…아바마마?」
「이리 오거라, 아르디. 네 성인식 선물을 가져다 놓은 참이란다.」
황제는 아서의 성인식 날 한슨을 ‘선물’로 던져 주고 직접 죽이기를 종용했다. 황태자로서 위엄을 보여야 할 아서가 한낱 신관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단 게 그 이유였다. 황제는 제 자식에게 그를 제외한 다른 버팀목이 있는 걸 바라지 않았다.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성인식 당일, 아서는 한슨의 몸에 직접 검을 박아 넣었다.
그게 전부인 이야기로, 하나 특이점이 있다면 그것이 아서의 첫 살인이라는 것 정도였다.
아서는 그날 일을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여 늘어놓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던 카를로스는 가만히 아서를 끌어안고 동요하는 감정을 가라앉혔다.
이내 카를로스가 입을 달싹였다.
“……그렇게나 귀히 아끼는 양 굴더니. 황제, 그자는 항상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을 보여 주는군요.”
아서를 끌어안은 손에 힘이 실렸다. 빈틈없이 밀착한 탓인지 쿵쿵 뛰는 심장 소리마저 서로에게 전달되는 듯했다.
화를 삭이는 듯한 목소리에 아서가 망설이다 물었다.
“…폐하를 해할 생각이냐.”
“아니요.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죽이지는 않겠다고.”
“말장난을 하자는 게 아니다.”
“죽이지 않는 대신 화풀이는 해야겠습니다. 그 정도는 형님도 이해해 주시겠지요.”
노기를 가라앉히고자 카를로스는 느린 호흡을 이어 갔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길게 뱉었다.
그러나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머릿속엔 고작 한쪽 손을 뜯어낸 것만으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단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황제를 감싸고 드는 아서의 태도 또한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이 맹목을 굳건하게 만들었을 시간들을 상상하면 화를 참는 것이 더욱 힘들어졌다.
아서가 황망한 얼굴로 물었다.
“…손을 뜯어낸 걸로도 만족하지 못했나.”
“예. 고작 그런 걸로 만족할 수 있을 리가요.”
“…카를로스.”
“전날부터 정신이 나간 것마냥, 온종일 한 가지 생각만 반복하고 있더군요.”
아서의 목덜미에 습한 속삭임이 들러붙었다.
“…진작에, 저걸 죽였어야 했는데.”
깊은 후회가 담긴 목소리였다. 카를로스는 황제를 죽이지 않은 과거를 진심으로 후회했다. 그 어느 때보다 뼈저리게 뉘우치고 있었다.
“황제만 죽였다면 진즉 해결되었을 것을. 나는, 그도 모르고 그저 머저리처럼 형님만을 원망하지 않았습니까.”
“…무슨.”
“늘 궁금했었습니다. 왜 형님이 전처럼 나를 어여삐 여겨 주지 않을까. 내가 불쌍하지도 않나. 가엾지도 않나? 어찌 내게 저렇게나 매정하게 굴지.”
카를로스의 눈동자가 아서에게로 닿은 찰나 기묘한 빛깔로 번들거렸다. 비틀려 있던 안광은 한 번 눈을 깜빡이자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밤낮 가릴 것 없이 고민했습니다. 나한텐 이제 형님밖에 남아 있지 않은데. 어째서.”
과거엔 그렇게 홀로 질문을 던졌다. 우습게도 한동안은 꿈에 빠져 산 나날도 있었다. 현실에서와 달리 꿈속에서는 아서와 전처럼 함께 지낼 수 있었으니까.
어쩌다 아서가 꿈에 나온 날엔 억지로 베개에 머리를 붙여 다시 잠이 들고자 애쓰기도 했다. 곧 사라질 허상이라도 손에 쥐어 보고자 발버둥을 쳤다.
순진하고도 어리석었던 때였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있을 게 아니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형님을 제 손에 쥐면 그만이었던 것을. 그 당연한 사실을 몰랐던 시절이었다.
“이제야 형님께서 어찌 그리 매정히 굴었는지 조금은 납득이 갑니다만…. 나는 여전히 형님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요. 그 점이 미안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걸 기대한 적도 없어.”
“그건 다행이네요.”
카를로스는 전혀 다행이 아니라는 듯한 투로 말했다.
“그럼 이제 어찌해야 할까요. …대체 형님을 어찌해야 할까.”
“…….”
“나는….”
무언가 말하려던 카를로스가 뒷말을 삼켰다. 그리고 곧바로 아서에게 물었다.
“답해 보세요, 형님. 여전히 나를 죽이고 싶습니까?”
“…….”
직설적인 물음에 아서가 동요했다. 잠시 망설이는가 싶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카를로스는 소리 없는 웃음을 흘렸다. 황제를 볼모로 붙들고 있는 마당에 정직한 답을 기대하는 쪽이 어리석었다.
“그리 불안해할 것 없습니다. 적어도 당분간은 형님을 건드리지 않을 생각이니까.”
“……당분간?”
꾹 다물려 있던 아서의 입이 열렸다. 그렇게나 반가운 소식인가 싶어 카를로스는 실소를 흘렸다.
“예. 적어도 한동안은 그럴 생각입니다.”
카를로스가 아서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살이 닿으니 자연스레 입맞춤을 하고 싶단 욕구가 치밀었다. 아서의 목덜미에서 흘러나오는 체향 또한 늘 그랬던 것처럼 그의 충동을 부추겼다.
갈급함을 억누른 카를로스는 아서의 목 뒤에 박힌 자그마한 점을 몇 번이고 빨았다. 백금색 머리칼에 이마를 비비며 그 보드라운 감촉을 만끽했다.
“아직 잠이 부족하실 테지요.”
“…….”
“더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이만 자죠.”
말과 달리 카를로스는 아서를 재차 가두듯 껴안았다. 그가 아서의 어깨를 힘주어 주무르자 굳어 있던 목 근육이 조금씩 풀렸다.
아서를 침대에 눕히고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카를로스는 어설프게나마 어깨를 토닥이며 아서가 다시 잠이 들기만을 기다렸다.
졸린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서의 숨소리가 가지런해졌다. 황제의 일로 아서가 쉽게 잠들지 못할 거란 예상은 다행히 빗나갔다. 카를로스는 조용하게 안도했다.
서서히 밝아지는 창밖을 바라보다 그 역시 눈을 감았다. 아서를 끌어안고 잠이 드는 순간만큼은 깊은 물에 잠긴 듯 평온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새벽, 카를로스는 아서의 꿈을 꿨다.
잠시나마 현실과 혼동되었을 만큼 유난히 선명했던 꿈이었다. 꿈은 평소보다 길고 그악스럽게 이어졌다. 그간 눌러 왔던 욕구가 꿈속에서 고스란히 표출되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카를로스는 그렇게 자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