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1)
사람이 여럿 모이는 곳에선 항상 뒷말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황성 역시 예외는 아니다.
황성 사용인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들은 대개 서넛으로 고정된 편이었다. 개중 가장 압도적인 지지율을 자랑하는 이로는 역시 우드힐 공작가의 둘째, 가브리엘을 꼽을 수 있겠다.
푸른 피가 흐른다는 작자들은 열에 아홉은 거만한 데다 아랫것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그런 암담한 지경에서 눈에 띄게 잘생긴 기사가 태도도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니 황성 내에서 그의 추종자가 아닌 자가 드물었다.
그런고로 가브리엘의 사임 소식에 조용하던 황성이 뒤집힐 듯 들썩인 것도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2황자 카를로스와 그의 최측근 가브리엘 사이에 일어난 갈등.
그 흥미로운 소식에 너 나 할 것 없이 말을 보탰다. 가브리엘이라면 기사의 표본이라고도 불리던 이였기에 어떤 연유로 둘의 사이가 틀어졌는지 의견이 분분했다. 특히나 가브리엘이 황태자를 수행하는 듯한 정황이 드러난 뒤로는 더더욱 온갖 추측들이 뒤따랐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무언가 밝혀진 바는 전무했다.
둘의 관계를 제외하면 우드힐 공작가와 2황자 측의 동맹은 여전히 파고들 틈 하나 없이 굳건했다. 달라진 건 기사 가브리엘이 황태자와 부쩍 친밀한 관계처럼 보인다는 것뿐이었다.
무성한 소문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게 온갖 뒷말이 들끓는 가운데, 시간은 또 빠르게 흘러갔다.
관리인이 여러 사용인들에게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눈이 녹아 질척거리지 않아야 한다. 높으신 분들이 자주 드나드는 길엔 번갈아 자리를 지켜야…….”
“연회장 근방에 소금을 뿌려. 다섯이 짝을 지어 가고, 혹여나 소금을 빼돌리다 걸렸다간 경을 칠 줄 알아라. 그런 경우 고발자에겐 큰 포상을 내릴 것…….”
“한시도 긴장을 놓아선 안 된다. 작년 이맘때 일을 잊지 않았겠지. 앨른 영식이 얼어붙은 길에서 미끄러져 팔이 부러진…….”
관리인의 지시에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제 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마침내 황태자 탄신연이 당일로 다가왔다. 함박눈이 황도를 뒤덮을 것처럼 쏟아져 내리는 날이었다.
황성의 모든 이들이 부디 눈이 덜 내리기를 기도했건만, 그들의 소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늘은 끝없이 눈을 토해 냈다. 문제가 발생하면 결국 힘없는 아랫것들이 덤터기를 쓸 수밖에 없었다. 노련한 책임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시를 내렸다.
사람이 자주 다니는 길은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눈이 쌓이는 즉시 쓸어 내 버렸다. 그 귀하다는 소금도 아낌없이 뿌려 길이 어는 것을 방지했다. 혹여나 귀족들이 끌고 온 값비싼 마차가 상할세라 여럿이 달라붙어 간이 천막을 쳤다.
그 모든 노력의 결과, 높으신 귀족 나리들은 아무 근심 없이 깨끗하게 닦인 길을 걸으며 황성을 누볐다. 흰 눈꽃이 소복하게 내려앉은 황성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냈다. 뺨이 얼어붙는 추위조차 잊게 만드는 황홀한 광경에 하나둘 걸음을 멈추고 탄식을 흘려 댔다.
사람 몸만 한 샹들리에가 여럿 매달린 연회장 내부는 이미 인파로 가득했다. 은은하게 깔린 연주 음악은 웅성거리는 소리에 묻혀 안타깝게도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앙리 백작 부부와 영식 드십니다!”
“게르만 변경백께서 드십니다!”
“리세인 후작님께서 드십니다!”
귀족들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왕국 사절단, 대공, 공작, 변경백, 어중간한 소귀족까지. 전부가 황도로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오를레앙 대공 전하께서 드십니다!”
입장을 알리던 이가 가장 목에 핏대를 세운 순간은 역시 오를레앙 대공이 연회장으로 들어서던 때였다. 근래 외부 활동이 부쩍 줄었다곤 해도 여전히 대공가가 지닌 위명은 타 귀족 가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다음으론 4대 공작 가문이 연달아 입장했다.
뛰어난 기사를 양성하기로 유명한 델라 공작가. 한때 황태자의 검술 스승이었던 델라 공작은, 아직까지 진영을 확고히 정하지 못한 듯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다.
두 번째론 최근 여러 논란 끝에 후계자가 바뀐 건터 공작가. 카를로스의 기사였던 마노가 후계위에 오르며 친2황자파로 노선을 틀 것이 예상되었다.
그리고 2황자의 굳건한 우군인 우드힐 공작가. 공작의 둘째 자제인 가브리엘이 잠시 노선을 이탈했을 뿐, 우드힐 공작가는 명실공히 2황자파를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그 외엔 오로지 돈이 되는 곳에만 슬그머니 발을 담근다는 골드너 공작가가 남았다.
최근 들어 황태자에 비해 2황자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지만 황위 다툼의 결과는 그 누구도 섣불리 예상할 수 없었다. 어느 쪽에든 밉보이고 싶지 않은 자들은 면밀히 정세를 살피며 몸을 사렸다.
주요 인사들이 도착하고 나서야 황제 부부는 느지막하게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연회장 내부에 자리한 귀족들이 일제히 왼 가슴에 손을 올려 예를 표했다. 황제와 황후는 몇 계단 위의 옥좌에 허리를 세워 앉았다.
“황태자 전하, 2황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황제 부부가 입장한 다음으로 탄신 연회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귀를 울리는 요란한 외침과 동시에 모두의 이목이 한쪽으로 쏠렸다.
길게 깔린 카펫을 밟으며 두 형제가 나란히 걸어 들어왔다. 이전처럼 각자 외따로 들어설 거란 예상을 뒤엎은 등장이었다.
형제는 정반대 색상의 정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황태자는 흰색, 2황자는 검은색 정복 차림이었는데 색상만 다를 뿐 금실로 수를 놓은 모양이 흡사했다. 그게 꼭 일부러 한 쌍의 옷을 맞춰 입은 것처럼 보여 지켜보던 이들의 눈이 의아해졌다.
탄신일을 맞이한 황태자까지 입장하고 나자 부산스럽던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산란하며 퍼지는 샹들리에 빛이 연회의 시작을 반기듯 널따란 홀을 밝혔다. 사치란 게 무엇인지 보여 주겠다는 듯 황금을 쏟아부은 연회장은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를 내달렸다.
그 안을 가득 채운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제각각 목적을 품고 공작새처럼 치장하여 간솔하게 차려입은 이가 차라리 눈에 띌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치를 기쁘게 누려야 할 탄신연의 주인공, 황태자는 이어지는 선물 행렬 앞에 심드렁하게 앉아 있었다.
긴 다리를 꼬아 앉아 내려다보는 모습은 늘 그러했듯 거만해 보였다. 가르마를 타 반만 넘긴 구불구불한 백금발이 꼭 금으로 만든 실타래처럼 반짝였다. 석류알 같은 눈동자는 내리깐 눈꺼풀에 반쯤 가려졌다.
언뜻 보기에 무성의한 태도도 황태자의 수려한 자태를 퇴색시키진 못했다. 고작 조금 웃고 다닌다는 이유로 그의 평판이 그리 쉽게 뒤집힌 데엔 저 화려한 외모도 한몫하였을 터였다.
“증정식을 시작하겠습니다.”
황제의 짤막한 축언 이후 곧바로 선물 증정식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오를레앙 대공이 황태자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이어서 델라 공작이 나섰다.
모든 귀족이 직접 인사하는 건 아니었다. 아서에게 눈도장을 찍고 싶은 게 아니라면 대부분 시종을 통해 선물을 전달했다.
“이 검은 릴소드 왕국의 장인이 만들어 낸 역작입니다. 전하께서 귀히 다루어 주신다면 그만한 영광이 없을 것이옵니다.”
“물론 마땅히 그래야지. 고맙네.”
물론 어딜 가든 야심을 품은 이들은 있기 마련이기에, 황태자는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축하 인사를 계속해서 받아 주어야 했다.
선물 증정식이 치러지는 내내 아서는 어떤 귀한 물건을 보아도 영 감흥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렇다 하여 예전처럼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다.
죽은 물고기의 눈처럼 건조한 시선을 보내다, 대화가 끝나는 순간에만 부드러운 미소를 그려 냈을 따름이었다. 분명 성의는 없어 보이건만 막상 지적하려 들면 예법에 어긋나는 점이 없었다.
그 얼굴 위에 미소가 그려지는 건 ‘훌륭하군.’, ‘고맙네.’라며 인사를 건네는 순간이 유일했다. 그런데 그 찰나 주어진 미소가 너무나 그린 듯이 완벽해 심드렁한 태도에 기분이 상했던 이들도 얼떨결에 마주 웃어 버리고 말았다.
백작의 선물을 받아 든 부관이 그것을 다시 조심스레 아서의 전속 시종에게 전달했다.
생일 당사자인 아서가 직접 선물을 건네받고 인사치레를 해야 할 인물은 다행히 그리 많지 않았다. 모두에게 지루했을 증정식은 검을 바친 백작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아서가 뻐근해진 뺨을 손끝으로 가볍게 풀었다. 생각 같아선 기지개라도 시원하게 켜고 싶었으나 불가능했다. 이 부담스러운 자리에선 사소한 눈길조차 어떤 의미심장한 신호처럼 취급된다. 어쩌다 등이 간지러워 미칠 것 같아도 맘 편히 긁을 수도 없었다.
증정식은 지루했지만 제 주머니를 불릴 수 있다 생각하면 견딜 만했다. 겉으로야 점잖게 굴던 아서는 척 봐도 값비싼 선물이 들어올 때마다 한껏 희희낙락했다.
증정식이 끝이 나고, 서서히 커지던 연주 음악이 어느새 대화 소리를 뒤덮을 만큼 커졌다. 그것을 신호로 아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증정식이 끝났으니 이제 하나둘 파트너의 손을 잡고 춤을 춰야 할 차례였다.
아서 또한 의례적으로 누군가와 한두 번은 춤을 춰야 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색색깔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한군데로 모여들었다.
아서가 연회장을 슥 훑었다. 이 많은 인사 중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괜히 엉뚱한 귀족을 무의미한 세력 다툼에 끌어들이고 싶진 않았다.
면면들을 쭉 살펴보니 우드힐 공작가의 후계에게 손을 내미는 게 여러모로 무난해 보였다. 마침 소공작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자리했다. 가브리엘의 누이답게 그와 생김새는 닮았는데 신기하게 분위기는 정반대인 인물이었다.
소공작 역시 인파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렇게 목표를 정한 아서가 사람들을 지나쳐 그쪽으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태자 전하.”
델라 공작이 먼저 선수를 쳐 아서에게 다가왔다. 아서와 눈이 마주친 공작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키르세 폰 델라, 존귀하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델라 공작이로군.”
아서는 귀찮은 속내를 숨기고 짐짓 반가운 척 공작을 맞이했다.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 전하.”
“덕분에 잘 지냈네.”
아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공작 옆에 서 있는 분홍머리 여식을 보니 척 봐도 공작이 어떤 의도로 말을 걸었는지 감이 왔다.
“얼마 만에 마주한 얼굴인지 모르겠군, 공작.”
“예, 정말 오래간만에 인사드립니다.”
한때 아서의 검술 스승이었던 델라 공작은 대부분의 귀족처럼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이었다. 점잖은 듯 굴면서 사실 누구보다 이익에 밝은, 과거 실속 없는 말로 아서를 한껏 띄워 줬던 자. 바로 그 인간이 델라 공작이었다. 공작 덕분에 어릴 때 아서는 자신이 세상에 둘도 없는 천재인 줄로 착각하고 살았더랬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그때 델라 공작이 딱히 큰 죄를 저지른 건 아니었다. 그는 단지 황제의 아들에게 아부를 하고자 했던 것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초면인 얼굴이 있군.”
아서는 소소한 악감정은 잠시 접어 두고 웃음을 지었다.
“예, 전하. 이쪽은 레일라, 올해로 성인이 된 제 여식입니다.”
“…레일라 폰 델라, 존귀하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레일라가 살짝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추었다. 조심스레 내민 손등에 아서가 입을 맞추자 레일라가 창백한 뺨 위로 애써 미소를 지었다.
핏기라곤 없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영애의 안색이 창백해 보이는군. 몸이 좋지 않은 게 아닌가?”
“하하, 워낙에 숫기가 없는 아이라 수줍음을 타는 것뿐입니다. 오래전부터 태자 전하를 흠모해 왔던 아이인지라 지나치게 긴장하였나 봅니다.”
흠모는 얼토당토않은 소리였고 긴장을 한 건 확실했다. 레일라는 심하게 긴장하다 못해 잘못하면 저대로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딸의 안위를 살펴야 할 공작은 제 할 말만 내뱉었다.
“만일 전하께서 제 딸 레일라에게 첫 춤을 함께 출 수 있는 영광을 베풀어 주신다면, 아이에게 크나큰 행복이 될 것이옵니다.”
“공작은 여전히 과장되게 나를 띄워 주는군.”
“송구하옵니다만, 전하. 신은 거짓 한 점 없는 사실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레일라 본인은 아서를 썩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으나, 공작이 이렇게까지 말한 마당에 거절을 하기도 애매했다.
전부터 아서와 카를로스 사이에서 저울질을 해 가며 조금씩 발만 담갔던 공작이었다. 본래는 이렇게까지 대놓고 들이댈 인간이 아닌데 오늘따라 유난히 적극적으로 굴고 있다. 애매모호한 중립을 지키던 공작이 이런 식으로 들이대는 걸 봐선 필히 믿을 만한 구석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믿는 구석은 보나 마나 황제일 테고.
보나 마나 황제가 황후 자리를 미끼로 델라 공작을 끌어들였을 것이다. 하여튼 황제는 귀찮은 일을 벌이는 데에 특출난 재주가 있었다.
델라 공작가라면 이름난 무가로 상당히 번거로운 상대였다. 원작에선 공작이 카를로스와 제 자식을 무리해서 엮으려다가 카를로스의 눈 밖에 났던 걸로 기억했다. 그 후로는 타의 반, 자의 반으로 끝까지 중립을 지켰다.
다만 지금은 아서가 전보다 태도를 유하게 바꾼 탓인지, 공작이 아서 쪽으로 슬그머니 발을 담가 버린 듯했다. 대강 납득이야 갔다. 아서가 황제의 핏줄이 아니란 사실을 모르는 입장에선 한번 도박을 해 볼 만한 상황처럼 보였을 터다. 이곳이 가라앉는 배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아서가 레일라에게 다가가 한 손을 내밀었다. 우선은 공작과의 마찰을 피하고, 이후에 다른 모든 가문의 사람과 춤을 추는 식으로 상황을 모면할 생각이었다.
“레이디 레일라. 제게 당신과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황송하옵니다, 전하.”
레일라는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어떻게든 아서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귀족 자제치고 표정 관리를 아주 못하는 편 같았다.
두 사람은 어색한 공기를 뚫고 연회장 중앙 홀로 나란히 걸어갔다. 먼저 말문을 연 쪽은 아서였다.
“공작이 주책이로군. 그렇지 않은가?”
“예, 그렇사옵…. 예?”
레일라가 대답을 하다 말고 놀라 되물었다.
“보아하니 그대는 내게 마음이랄게 없어 보이는데. 혹여나 내가 오해할 것이 우려된다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예? 전 오래전부터 전하를 깊이 연모해 왔사옵니다만….”
“사정은 대강 알겠으니 그리할 것 없어. 그대도 내 악명은 익히 들었지 않나.”
“…….”
순간 말문이 막혔는지 레일라가 눈을 깜빡였다. 아서는 내심 황제를 비웃었다. 애초 아서가 파탄 낸 혼약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당최 무슨 자신감으로 새로운 혼인을 추진하려 드는지 의문이었다.
차후 카를로스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황제를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아서는 당장 카를로스에게 달려가 고자질을 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저 멀리 인파에 둘러싸인 카를로스가 보였다. 굳이 작정하고 찾지 않아도 흐릿한 배경 속에서 혼자만 툭 튀어나온 양 곧바로 아서의 눈에 띄었다.
본래라면 그 옆에 서 있었을 가브리엘은 이젠 우드힐 공작과 함께였다. 아서를 보고 있었던 듯 그쪽을 바라보자마자 기사와 시선이 마주쳤다. 스치듯이 마주쳤던 시선은 아서가 옆으로 한 걸음 걸어 나가며 자연히 어긋났다.
더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게 된 기사는 아서를 그림자처럼 수행하기 시작했다. 아서를 돌보는 일이 구미에 맞았는지 요즘 그는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표정이야 평소와 같았는데 주변 공기가 확실히 전보다 가벼워졌다.
그러한 기사의 변화는 카를로스의 기사들에겐 배신처럼 보였을 테다. 워낙 인망이 좋아 극단적으로 배척당하진 않았으나 아직까진 카를로스 측 인사들과는 데면데면했다.
슬슬 연주곡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딴생각에 빠진 중에도 몸은 흐르는 연주 음악에 맞춰 착실히 움직였다. 아서와 레일라 둘 다 각자의 생각에 빠져 상대에게 집중하지 못했지만 두 사람은 겉보기엔 그럭저럭 잘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였다.
“그럼, 아무쪼록 즐거운 시간 보내길 바라네.”
“예, 전하께서도. 다시 한번 탄신을 축하드립니다.”
“고맙군. 그대도 오늘만큼은 맘 편히 연회를 즐길 수 있길 바라.”
형식적인 인사말을 주고받은 뒤 두 사람은 산뜻하게 갈라섰다.
그 뒤로 아서는 오를레앙 대공가의 베아트리스, 건터 공작가의 마노, 우드힐 공작가의 에비게일, 골드너 공작가의 엠버와 차례차례 손을 잡고 중앙 홀을 거닐었다. 이 정도로까지 했으면 델라 공작가와 아서를 엮으려 드는 이들은 드물 터였다.
이번 연회는 작년 탄신연 때보다 인파로 붐볐다. 황제가 양위에 대한 의지를 드러낸 시점이었기에 엉덩이가 무겁던 이들도 올해엔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서는 복잡한 인파를 뚫고 곧장 카를로스에게로 향했다. 가는 길이 쉽게 열리진 않았다. 중간중간 몇몇 이들과 인사를 주고받고, 간단한 안부까지 물어 가며 거의 기어가는 속도로 카를로스에게로 다가갔다.
카를로스 역시 온갖 인사들에게 반강제로 붙들려 있는 듯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장인이 혼신의 힘을 들여 깎아 낸 듯한 옆태가 한눈에 들어왔다.
“형님.”
다른 곳을 보는가 싶던 카를로스는 아서가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등을 감싸 안았다. 팔뚝 부근을 은근히 쓰다듬는 손길이 묘했다. 밀어내면 더 이상해 보일 것 같아 아서는 아예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 척하기로 했다.
어깨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이내 목 뒤편에 닿았다. 차가운 손이 피로를 덜어 주려는 것처럼 목덜미를 가볍게 주물럭거렸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과시하듯 구는 건 카를로스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아서가 무려 다섯 명의 파트너와 중앙 홀을 누볐던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서는 부러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며칠간 카를로스에게 밤새 시달린 덕에 아직도 눈 밑이 퀭했다.
황성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낮 동안은 카를로스가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워야 할 때가 많았다. 그 탓인지 카를로스는 아서와 가브리엘이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것과 비등한 시간만큼 아서를 괴롭히려 들었다.
사실 하루 이틀 정도면 아서도 아무렇지 않게 버텼을 것이다. 그러나 카를로스는 아서를 아예 말려 죽이겠다는 양 며칠 내내 때를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아서도 체력이라면 어디 가서 지지 않아 몸이 상한 건 아니지만 정신적으로 몹시 피로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 번만으로 진이 빠지는 섹스를 매일 하루 수차례씩 반복했으니, 이렇게 멀쩡하게 버티고 있는 게 용했다. 만일 아서가 보통 사람의 체력을 가졌다면 지금쯤 병상에 누워 있었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게 카를로스가 바라던 결과였는지도 몰랐다.
“하이브 공도 있었군.”
“전하, 안녕하십니까.”
아서는 카를로스와 대화를 나누다 뒤늦게 그 옆에 꼭 붙어 있던 마법사를 발견했다. 존재감을 감추는 마법을 쓴 듯 기척이 아주 희미했다. 아서가 알은체를 하자 주변에 있던 이들이 그제서야 마법사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회장 내에 쌍둥이는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 하이브를 찾아가 쌍둥이를 보호 겸 감시하라 경고했던 보람이 있다. 이로써 한 가지 우려는 덜었다.
주변은 짜증이 날 만큼 혼잡했다. 카를로스와 아서가 한자리에 있자 자연스레 주위에 사람이 몰려들었다. 차마 직접 말을 붙이지 못하는 이들도 근처에 서서 힐끗힐끗 시선을 주었다.
카를로스 혼자 있을 때도 번잡하던 것이 이젠 주위에 동그란 무리가 만들어졌다. 분명 점잖게들 서 있는데 눈빛은 어디 뜯어먹을 게 없나 살펴보는 각다귀 떼 같았다.
결국 혼잡함을 견디지 못한 아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같이 있으면 안 될 것 같군.”
“……예. 그래 보이는군요.”
카를로스가 떨떠름하게 답했다. 아서와 떨어지고 싶진 않았으나 정황상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먼저 들어가 쉬고 있어도 괜찮아.”
아서가 카를로스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탄신연의 주인공인 아서라면 몰라도 카를로스는 먼저 자리를 비워도 무방했다. 황제가 무슨 짓을 꾸몄을지도 모르는데, 어수선한 연회장에 있는 것보다 궁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나 싶었다.
“아닙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카를로스는 아서의 권유를 단박에 사양했다. 아서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지루할 텐데.”
“괜찮습니다.”
“…뭐, 그래.”
아서는 두 번 권하지 않았다. 마법사도 옆에 찰싹 붙어 있으니 황제가 다른 장난질을 치더라도 큰 걱정은 없어 보였다.
“그럼 이따 보는 걸로 해.”
우선 이 자리부터 벗어나기로 마음먹은 아서가 표정을 차게 굳히고 무리를 빠져나왔다. 혹 말을 붙이려 하는 귀족이 보이면 눈빛으로 경고를 건넸다.
인파를 뚫고 나오자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불쌍한 카를로스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아서야 더는 누군가의 지지가 필요하지 않은 처지이니 냉큼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카를로스는 아무래도 사정이 조금 다를 터였다.
아서는 근처에 돌아다니던 사용인을 불러 칵테일을 건네받았다. 구석진 자리에서 홀짝이고 있자 또 서넛이 주위에 얼쩡거렸다.
다가오는 이들은 짧은 고갯짓으로 밀어냈다. 아서 쪽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카를로스는 아서가 한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자 그제야 안심한 눈치였다.
날이 지기 직전 시작했던 연회는 차차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바깥은 이미 해가 사라진 지 오래다.
한껏 긴장하고 있던 이들도 적응을 마쳤고, 이때 즈음이 가장 사람들의 기분이 붕 들뜰 시간대였다. 달리 말하면 황제가 어떤 수작질을 부리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대라는 뜻이었다.
홀로 술을 홀짝이던 아서 옆에는 언제부턴가 가브리엘이 앉아 있었다.
“전하, 벌써 비운 잔이 많습니다.”
처음엔 가벼운 칵테일로 시작했던 아서는 점점 더 독한 주류로 옮겨 갔다. 조금씩 취기가 올랐다. 마나를 이용해 취기를 몰아낸다면 하루 종일도 마시는 것도 가능했으나, 아서로선 굳이 인위적으로 취기를 몰아낼 필요성을 못 느꼈다.
“전하.”
“걱정 말아. 어련히 알아서 조절할 테니까.”
아서는 느슨히 턱을 괸 채 손에 든 잔을 만지작거렸다. 한창 열기가 오른 연회는 도무지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지루해 죽겠군.”
“전하의 탄신을 경축하는 자리이니만큼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어.”
아서가 재차 사용인을 부르며 손짓했다. 그러나 사용인이 다가오기도 전에 가브리엘이 아서의 손에 은근슬쩍 도수가 낮은 칵테일을 쥐여 주었다.
무슨 짓이냐는 듯 쳐다보자 기사가 무구한 얼굴로 물었다.
“한 번 드셔 보시겠습니까?”
“…….”
아서는 맛없기만 하라는 심정으로 한 모금 삼켰다. 황당하게도 어째 제 입에 딱 맞는다. 언제 또 제 입맛까지 완벽하게 파악해 두었는지 내심 기가 찼다. 하는 수 없이 아서는 별다른 타박을 하지 않고 손에 든 잔을 홀짝였다.
그 후로도 가브리엘은 아서의 취향에 딱 부합하지만 도수는 낮은 술만 쏙쏙 골라서 앞에 놓아 주었다. 마시다 보니 어째 술이 취하기는커녕 점점 맨정신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결국 가브리엘의 원대로 아서는 잔을 내려놓아 버렸다. 술맛도 뚝 떨어졌고 지루하게 늘어져 연회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아서는 이렇게 사람이 많은 자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체면이고 뭐고 전부 포기한다면 이대로 여기서 잠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실례합니다, 태자 전하.”
그때 익숙한 얼굴의 귀족이 다가와 반쯤 잠이 든 아서를 깨웠다.
아서가 반쯤 감겼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남자는 황제의 직속 부관으로, 아서와도 여러 번 얼굴을 마주하였던 자였다.
“룬 백작이로군.”
“존귀하신 황태자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송구하옵니다만, 급한 사안이라 휴식을 방해하게 되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태자 전하를 긴히 찾으시옵니다.”
“…폐하께서 나를 무슨 일로?”
아서는 귀찮은 기색이라곤 일절 드러내지 않고 물었다. 백작이 곤란한 듯이 눈썹을 끌어 내렸다.
“송구합니다. 부르신 연유에 대해선 따로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태자 전하께만 따로 말씀을 해 주시지 않을까 싶사옵니다.”
“그렇군.”
누가 황제 아니랄까 봐 사람을 귀찮게 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 억지로 답을 캐내고자 할 것 없이, 보나 마나 혼인에 관해 다짜고짜 통보하려 들 게 뻔했다.
아서는 귀찮음을 억누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가브리엘이 아서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전하, 뒤따르겠습니다.”
“됐어. 오늘은 나 말고 카를로스나 지켜보고 있어.”
가브리엘이 뒤따라 일어서는 것을 막았다. 어차피 황제는 유일한 후계인 아서에게 해를 끼치고 싶어도 그리할 수가 없었다. 화풀이를 하려고 한들 고작 몇 대 때리는 정도로 그칠 것이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아서를 안전한 곳으로 빼낸 뒤 카를로스를 노릴 확률이 높았다.
“저기 카를로스 옆에 가서 붙어 있어. 싸우지는 말고.”
“명을 내리시는 겁니까?”
가브리엘이 물었다. 이날이 오기까지도 가브리엘은 아서에게 기사의 맹세를 언급한 적이 없었다. 다만 지금처럼 슬그머니 아서의 명을 받고자 몇 번 시도했는데 죄다 불발에 그쳤다.
“아니, 부탁이야.”
고개를 저으며 그리 말하자 가브리엘이 조금 시무룩해졌다. 물론 아서는 눈앞의 그럴듯한 얼굴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가브리엘은 충성스러운 기사처럼 굴다가도 한 번씩 다른 면모를 드러냈다. 아서를 강제하진 않는 대신 자연스레 제 뜻대로 유도하려 하려 들었다. 아서가 지금처럼 단호하게 굴면 순순히 물러서긴 했으나 그거야 예외적인 상황일 뿐이었다.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전하.”
“그러지.”
룬 백작을 따라가던 아서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가브리엘이 카를로스에게 다가서는 게 보였다. 기사가 카를로스에게 무어라 말을 붙이자, 인상을 설핏 구긴 카를로스가 제 옆에 선 기사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아서는 룬 백작의 안내를 따라 두꺼운 커튼 가운데를 벌리고 들어섰다. 카를로스 옆에 가브리엘도 세워 놨겠다, 큰 걱정은 없었다.
천장 양옆으로 띄엄띄엄 달린 마법구가 은은히 통로를 밝혔다. 몇 번 다녀 보았던 길이라 이 통로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었다.
장미궁. 카를로스의 모친이자, 황제가 사랑했던 여인이 생전 지냈던 장소였다.
통로는 길지 않았다. 어두운 길을 빠져나오니 화려한 궁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황제가 자주 드나드는 장미궁은 아직까지도 생전의 황비가 살았던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보존 마법이 걸린 붉은 장미는 여전히 화사했다.
눈송이가 흩날리는 붉은 정원은 아름다웠으나 한편으론 인위적이었다. 밤이 되니 조금 음산한 것 같기도 했다.
이곳에서 황제가 아련하게 홀로 앉아 있는 걸 몇 번 보았다. 이전엔 그런 황제를 안쓰러워했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별생각이 없었다. 동정심을 이끌어 내 혼인을 하도록 설득하려는 심산인가, 당장은 그런 생각만이 들었다.
아서는 정원을 보던 시선을 옮겨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완벽하게 관리된 궁엔 위화감이 들 만큼 인적이 드물었다.
사용인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고, 중간중간 황제의 기사로 보이는 이들만 서 있었다.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것이 지나칠 정도로 과하게 날을 세우고 있는 느낌이다.
“…흠.”
불쑥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이대로 몸을 돌려 연회장으로 돌아가고 싶단 충동이 차올랐다.
천천히 걷던 아서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앞서가던 룬 백작이 아서의 걸음이 멈춘 것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서가 그 자리에 서서 뚫어져라 바라만 보고 있으니 탱글탱글한 얼굴이 당혹스럽다는 듯 붉어졌다.
“전하, 무슨 문제라도…?”
“폐하께서 나를 찾으셨다고.”
“예, 그렇사옵니다.”
룬 백작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백작의 속을 들여다볼 것처럼 빤히 쳐다보던 아서가 기감을 펼쳐 주변을 훑었다. 무장한 채로 서 있는 기사들은 외부에서 오는 침입자를 막는다기보단 안에 있는 자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내부를 감시하고 있었다.
역시 수상한데….
아서는 정원을 흘끗 바라보며 도망칠 경로를 계산했다. 대체 저를 끌어들여 놓고 무얼 하려는지 몰라도 순순히 끌려갈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아서의 도망은 시작도 전에 허무하게 무산되고 말았다. 그가 뒤를 돌아 도망치려던 순간, 황제가 복도 끝에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아르디, 왔느냐.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처럼 온화한 미소를 띤 황제가 아서에게로 다가왔다. 아서는 그 자리에 선 채로 망설이다가, 하는 수 없이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
침실은 온기가 없었다. 벽난로의 장작은 타들어 가고 있었지만 사람이 드나든 지 오래된 곳 특유의 냉기가 흘렀다.
짙은 자줏빛 커튼이 너른 창을 덮어 내렸다. 무겁게 깔린 공기에 아서의 기분마저 한층 가라앉는 듯했다.
“앉거라.”
자그마한 원탁 위로는 포도주 두 병이 놓여 있었다. 황제의 뒤편에는 항상 그러했듯이 기사 필립이 배경처럼 제 자리를 지켰다.
꽤 너른 침실에는 셋을 제외하고는 사용인 하나 보이지 않았다. 황제가 시종을 전부 물렸다는 건 일종의 신호였다. 이 자리에서 제 심기를 거스르면 주저하지 않고 벌을 내리겠다는 신호.
목이 긴 은잔에 붉은 포도주가 담겼다. 황송하게도 황제가 직접 따라 준 잔이었다. 황제는 제 잔을 들어 올리더니 아서에게도 권유하는 손짓을 했다. 아서는 황제가 와인을 삼키는 것을 확인한 뒤, 잔을 들어 한 모금 삼켰다.
“…색다른 맛이 나는군요.”
“이번 스펜 왕국과의 교역에서 들여온 것이다. 향이 독특하지 않느냐.”
“예, 훌륭합니다.”
“입에 맞아 다행이구나. 한 잔 더 하거라.”
혼인 얘기를 꺼내는 순간 아서가 질겁할 것을 알고 있는 듯 황제는 평소보다 더 부드러운 투로 말했다. 짐짓 온화한 눈으로 아서를 소중한 것처럼 바라보는데 살짝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아서의 동정심을 자극하려 장소를 장미궁으로 잡은 것부터, 하여튼 유난이었다.
황제는 연거푸 아서의 잔을 채우며 마시기를 권유했다. ‘오늘은 아비와 자식으로서 진솔한 얘기를 나눠 보고 싶구나.’ 따위의 소리는 덤이었다.
어련히도 진솔하겠다…. 아서는 공손한 손길로 잔을 받아 들며 내심 빈정거렸다.
잔이 여러 번 비워지는 동안 지루한 침묵이 이어졌다. 저 술을 다 마시기 전까진 이러고 있을 것 같아, 답답해진 아서가 포도주를 가득 따라 연거푸 들이켰다.
“아바마마, 무언가 마음 쓰이는 일이 있으신 듯하옵니다.”
병을 다 비우고 말하자 그제야 황제는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여튼 무엇 하나 쉽게 말해 주는 법이 없다.
“아르디.”
“예.”
“요사이 짐이 예전 같지가 않아. 하루하루 시들어 가는 기분이로구나.”
“아바마마, 그런 말씀 마십시오. 여전히 강건하시지 않습니까.”
이것만큼은 빈말이 아니었다. 내용물은 어떨지 몰라도 노화의 흔적이 얼마 엿보이지 않는 황제는 말 그대로 정정해 보였다. 걸음걸이만 봐도 씩씩한 것이 절대 아픈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짐이 언제까지 살아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어.”
“아바마마.”
“익히 보아 알지 않느냐, 아르디. 황족이 돌연 급사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을 말이다.”
“…….”
“태자가 하루빨리 번듯한 짝을 만나야 할 텐데. 짐이 떠나고 나면 누가 태자를 지켜 줄지 마음이 쓰이는구나.”
황제는 그 자신이 카를로스에게 암살당할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아비가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혼인을 하라는 뭐 그런 의미일 테다.
“아바마마. 떠나신다는 그런 말씀은 부디 하지 말아 주십시오. …소자가 여러모로 못 미더운 건 알고 있습니다. 허나 다른 이에게 의탁해야만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나약하진 않습니다.”
“카를로스.”
“…….”
“그것이 너를 죽이려 마음먹는다 해도 말이냐?”
또 시작이었다. 예전부터 황제는 저런 소리로 아서를 흔들고, 불안해하는 아서를 제 손에 쥐고 멋대로 다루곤 했다. 아서가 시선을 내리깔고서 담담히 답했다.
“그와 관해선 염려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카를로스와 제 사이가 이전과 같지 않은 것을.”
“그렇지. 내 눈에도 참으로 친밀해 보이긴 하더구나.”
황제의 말엔 뼈가 실려 있었다.
“본디 네 자리여야 할 것을 내어주고, 그것의 발치에 바짝 엎드리고서야 말이지.”
“…아바마마.”
“한심한 것. 한참 어린 아우의 발밑을 기어서라도 살아남고 싶더냐?”
슬슬 화가 치미는지 황제의 눈빛이 뒤바뀌었다. 다른 대체품을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불량품을 들고 있는 듯한, 할 수만 있다면 아서를 당장이라도 팽하고 싶어 하는 시선이었다.
“아바마마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녀석 밑에서 비위를 맞추고 지내는 게 적성에 잘 맞았나 보구나. 이제는 능청을 떨 줄도 알고.”
“…그런 게 아닙니다.”
아서는 괴로운 얼굴로 부정했다. 기어이 아서가 상처받은 기색을 드러내고 나서야 황제의 책망이 멈추었다.
“그래, 델라 공작의 여식과는 무사히 인사를 마쳤느냐?”
황제는 순식간에 얼굴을 바꿔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함께 서 있는 것을 보니 제법 잘 어울리더구나.”
“소자는 혼인을 치를 처지가 되지 못합니다. 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에 관해선 더는 걱정할 것 없다.”
미리 말을 맞춰 둔 건지 뭔지, 그때 기사 필립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병이 탁상 위에 올려졌다. 척 봐도 수상쩍어 보이는 검은색 병엔 무엇인지 모를 액체가 담겨 있었다.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최음제다. 마시거라.”
놀랍도록 평온한 어조로 건넨 명이었다.
“…소자가 미력하여, 미처 폐하의 심중을 읽어 내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유로 이것을 권하는 것이신지요.”
“혼인을 성사시키려면 초야를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 그를 위한 것이다.”
“폐하, 그 말인즉슨….”
생각을 정리하는 듯 눈을 깜빡이던 아서가 서서히 얼굴을 굳혔다.
“오늘 당장… 이 자리에서 초야를 치른단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어째서 그걸 지금에서야 알려 주시는 겁니까.”
“미리 말했다면 몸을 뺄 궁리만 했을 테지. 어서 들거라, 네 짝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것 같구나.”
“제 짝이라는 건 분명 레일라 영애겠군요.”
“그래. 델라 공작의 여식이 네 반려가 될 것이다.”
황제가 단정하며 말했다. 그가 검은 병을 들어 입구를 개봉했다. 끈적이는 단내가 코끝에 훅 끼쳤다. 일반인이 복용했다간 사망에 이를 만큼 강한 효능을 지닌 최음제였지만 기사에게는 그렇지 않은 약이었다.
국혼을 도둑질하는 것마냥 치르는 것은 황제 역시도 내키는 바가 아니었다. 단지 막바지에 몰린 상황에서 이것이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을 뿐이다.
태자가 정상적인 인간으로 자랐다면 이미 몇 년 전 성대한 혼인식을 올렸을 것을, 모자란 자식 탓에 쉬운 길을 어렵사리 돌아가고 있었다.
황제는 개봉한 병을 아서의 앞에 두었다. 표정을 굳힌 아서가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칠게 밀려난 의자가 듣기 싫은 소음을 만들어 냈다.
“…폐하. 수차례 말씀드렸지만, 저는 혼인을 치를 마음이 없습니다.”
“기어이 자리를 피하려 드는구나.”
“송구하옵니다.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단호히 통보한 아서가 몸을 일으켰다. 황제는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서를 잡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이 문을 열고 나가면 곧바로 황제의 기사들이 아서를 제지하려 들 터였다. 그런들 상관없었다. 어차피 바깥의 기사들은 아서를 죽이지 못했다. 아서는 아예 한바탕 소란을 일으킬 각오를 하고 문고리를 잡았다.
“…….”
그러나 그는 채 문을 열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황제가 와인에 약을 탔던 모양이었다. 무슨 수작질을 부린 건지 몸속의 마나가 움직이지 않았다.
독이었다면 그가 바로 눈치챘을 테니 몸에 해를 끼치는 종류는 아닌 것 같았다. 몸 자체는 상한 곳 없이 멀쩡했다. 입구를 밀랍으로 틀어막은 듯 내부의 마나만이 바깥으로 흘러나오지 못했다.
속았다는 생각에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분명 황제가 먼저 마시는 것을 보고 따라 마셨건만, 다른 날도 아닌 오늘 같은 날 초야를 강행할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내심 한숨을 쉰 아서가 손에 잡힌 문고리를 놓고 천천히 뒤돌았다. 검도, 마나도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선 기사 한둘을 상대하는 게 고작이었다. 섣불리 반항하다간 당장 제압당하여 서둘러 초야를 치르게 될 것이다.
아서는 차라리 순종하는 척 시간을 끄는 게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시간을 끌수록 카를로스나 가브리엘이 아서를 찾을 확률 또한 올라갔다.
뒤돌아선 아서에게 황제는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빙긋 웃었다.
“이제는 조금 생각이 달라졌나 보군.”
“…아바마마.”
“이리로 오겠느냐, 아르디.”
“…….”
아서는 황제에게로 천천히 걸어가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고분고분해진 아서의 모습에 황제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이제야 짐이 알던 태자로 돌아왔구나.”
“…송구하옵니다.”
“고개를 들어도 좋다.”
황제는 부드러운 손길로 아서의 고개를 젖혔다. 입술을 톡톡 두드려 입을 벌리게 하곤, 잇새로 엄지를 밀어 넣었다. 아서가 이맛살을 찌푸리자 황제가 그런 아서를 얼렀다.
“얌전히 있거라.”
황제의 손에 있던 병이 기울어졌다. 벌어진 입 안으로 꿀처럼 진득한 액이 흘러들어 왔다. 지독한 단내에 코가 마비될 것 같았다.
얌전히 액체를 반 정도 삼키던 아서가 고개를 돌려 피했다. 아무리 보통 사람보다 특출난 저항력을 지닌 몸이라 해도 이만큼이나 무식하게 들이부으면 중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채 삼키지 못한 액이 입가로 줄줄 흘러내렸다. 번들거리는 입술을 황제가 손끝으로 닦아 냈다. 어차피 효능이 있을 만한 양을 삼켰기에 작은 반항 정도는 눈감아 주었다.
필립이 건넨 손수건에 손을 닦아 낸 황제가 아서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옳지. 잘 참았다.”
“…….”
“금방 열이 오를 테니 자리에 눕는 게 좋겠구나. 얌전히 눈만 감고 있으면 금방 끝날 것이야.”
몇 마디 건넨 사이 금세 약 기운이 돌아 아서의 뺨 위로 서서히 홍조가 떠올랐다. 일어서자마자 휘청거리는 아서를 황제가 붙잡았다. 앞으로 쓰러지려 하는 몸을 필립까지 합세해 부축했다. 침대 위로 눕혀진 아서가 둥글게 몸을 말았다.
황제는 다정한 손길로 아서를 다독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약효가 더 강하게 도는 성싶었다. 물론 보통 사람보다 강건한 신체이니 그렇다 해서 탈이 나진 않을 터였다.
“걱정 말거라. 오래 살을 맞댈 일은 없게 해 주마.”
황제가 필립에게 눈짓했다. 레일라를 들여보내라는 의미였다.
필립이 황제의 명을 받고 침실 문을 열어 주자, 좀 전부터 문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레일라가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거라, 레일라.”
“…레일라 폰 델라, 지고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새파랗게 질린 낯을 한 레일라가 처형장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처럼 비틀비틀 걸어 들어왔다. 긴장감에 떨리는 몸이 보였지만 황제는 못 본 체 시선을 옮겼다.
“오래 기다리게 하여 미안하구나, 아가.”
“…아니옵니다, 폐하.”
답하는 목소리가 안쓰럽게 떨렸다.
“많이 긴장되느냐?”
“…예, 조금…. 송구하옵니다.”
“그리 긴장하고 있을 것 없다. 금방 끝날 게야. 태자와 인사를 나누겠느냐?”
“예, 황송하옵….”
말을 하다 말고 레일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뒤늦게 침상 위의 아서를 발견한 탓이었다.
“…….”
소리 없는 탄식이 터졌다. 널찍한 침대 한구석에서 이불 한 겹 덮지 못한 채 웅크려 있는 모습, 붉게 상기된 뺨이나 괴로움에 일그러진 눈가는 연회장에서 보았던 그 황태자와 동일 인물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경악한 레일라는 차마 황제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경악하지 못하고 입술만 파르르 떨었다. 황제는 인자한 목소리로 레일라에게 양해를 구했다.
“태자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라, 손이 많이 들 수밖에 없구나. 영애도 이해하는 바일 테지?”
“……예…. 폐하.”
하나부터 열까지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았으나, 황제가 그리 말하는데 감히 반박하고 나설 이는 없을 터였다.
“태자가 다른 이와 살이 닿는 것을 꺼려 하니, 필요 없는 접촉은 자제하거라.”
“예…. 명심… 하겠사옵니다.”
레일라는 혼이 나간 채로 답을 했다. 황태자와 초야를 치러야 한다는 것만 통보받았지, 그것이 이렇게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치러진다고는 듣지 못했다.
마음에 없는 이와 초야를 치러야 하는 것부터 심약한 레일라에겐 버거운 일이었다. 심지어 그 형태가 겁간과 같으니 레일라의 낯이 새파랗게 질렸다.
가능만 했다면 레일라는 이 끔찍한 상황에서 당장 달아나고 싶었다. 그러나 서슬 퍼런 눈빛을 하고 있던 제 아비를 떠올리자 습관처럼 몸이 굳어 버렸다.
“이리로 오겠느냐.”
“…예, 폐하.”
황제의 손에 이끌려 간 레일라는 어찌할 바 모르고, 아서 옆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였다. 황제는 전부 이해한다는 듯 웃었다.
“보아하니 수줍음을 타는 게 아르디뿐만은 아닌 것 같구나.”
“…….”
“필립, 태자를 앉혀라.”
“예, 폐하.”
필립이 아서를 일으키려 손을 뻗었다. 정신이 혼몽한 중에도 아서는 기사의 손을 사납게 쳐 냈다.
“녀석, 까탈스럽기는.”
결국 황제가 손수 아서의 등 뒤로 손을 넣어 쓰러진 몸을 일으켰다. 등 뒤로 푹신한 베개를 두어 앉힌 뒤 식은땀에 축축한 이마를 쓸어 넘겨 주었다. 아직까지 상대를 구분할 정신은 있는지 아서는 황제의 손은 뿌리치지 않았다.
“아르디. 아비의 손은 괜찮으냐?”
“…예.”
“열이 많이 나는구나.”
손을 잠깐 가져다 댄 것만으로도 화끈거리는 열기가 전달되었다. 황제는 아서의 겉옷을 벗기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제 옷을 직접 벗는 일도 드문 황제가 자식의 시중을 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새하얀 정복이 한 꺼풀 벗겨졌다. 아서의 중심부는 살짝만 부풀어 있었다. 경도를 봐선 완전히 발기한 것 같진 않았다. 원활한 삽입을 하려면 성기가 완전히 발기해 있는 편이 좋을 듯했다.
황제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아서의 중심부로 손을 내렸다. 연회가 끝나려면 아직 한참 남았으나 시간이 마냥 무한정하진 않았다. 아서가 황제의 손은 뿌리치지 않으니 차라리 황제가 나서는 게 더 효율적일 터였다.
“…아바마마.”
그런데 겉옷을 벗길 때만 해도 얌전하던 아서가 황제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반사적으로 나서려던 필립이 황제의 눈짓에 뒤로 물러났다.
“…하지, 마십시오….”
“아르디.”
엄한 목소리로 불러도 손목을 쥔 손은 그대로였다. 기가 막힌 황제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는 망설임 없이 반대쪽 손을 들어 그대로 아서의 뺨을 후려쳤다.
살이 부딪히는 소음이 터졌다. 바로 옆에 있던 레일라가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다시 황제의 팔이 올라갔다.
연이어 뺨을 다섯 대나 맞고서도 아서는 손아귀의 힘을 풀지 않았다. 쓸모없는 곳에 고집을 부리는 건 여전했다.
“정녕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는구나.”
한숨을 내쉰 황제가 필립에게 눈짓을 했다. 순순히 명을 따르지 않으니 결국 기사 필립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필립은 아서의 팔을 부러뜨릴 것처럼 쥐고 뒤로 꺾었다.
“윽…!”
다소 감정이 실린 제압에 아서가 짧게 신음했다.
“그만, 필립. 태자에게 너무 큰 무례를 범하진 말거라.”
“송구하옵니다.”
“아바, 마마…. 차라리, 하아, 직접 하겠습니다.”
아서는 한 팔이 뒤로 꺾인 채로 힘겹게 말했다. 황제가 또 나서기 전에, 제압당하지 않은 쪽 팔을 내려 제 고간 위로 올렸다.
독에 강한 내성이 있는 아서였는데 그것을 감안하고 약을 썼는지 전신이 감당하기 힘든 열기에 휩싸였다. 마나 홀이 아닌 몸 전체에 퍼져 있던 극소량의 마나로 발기를 억제하는 것도 곧 한계였다. 약 기운을 완전히 억누를 순 없었다.
황제가 제 후계를 해치지 못할 거란 확신이 방심을 불러일으켰다. 아서는 다시는 이런 멍청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이를 갈았다.
이대로 몸을 두고 영체로 도망가 버릴 수도 있었다. 하나 그랬다간 정신을 잃은 몸이 무슨 짓을 당해도 손 쓸 방도가 없어진다. 그건 마지막까지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때에야 쓸 최후의 수단이었다.
“아바마마. 부디, 잠시만…, 등을, 돌려 주시겠습니까….”
아서는 중심부에 손을 올리고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안쓰러운 얼굴을 만들어 냈다. 당장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축축한 눈으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이를 악물고 있으면서 시선만은 애처로웠다. 몇 차례 맞아 붉어진 뺨이 처연함을 더했다.
“아바마마….”
“…쯧, 이렇게나 수줍음이 많아서야.”
애원하는 꼴이 꽤 처량하긴 했나 보다. 황제는 순순히 아서의 청을 들어주었다. 반 정도는 말이다.
필립과 레일라에게 등을 돌리라 명령한 황제는 정작 저는 침대에 앉아 이쪽을 보고 있다. 아서가 침묵으로 항의하자 황제가 말했다.
“아비에게까지 수줍어할 필요는 없지 않으냐?”
“…….”
아서는 입 안에서 욕을 짓씹었다.
“지금은 짐에게 서운한 맘이 들지도 모르나, 아르디. 머지않아 짐의 마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퍽이나 이해하겠다. 한껏 빈정거린 아서는 부러 여러 번 헛손질을 하며 느릿느릿하게 하의를 풀어 헤쳤다. 그나마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하반신을 까고 좆을 만지느니 차라리 황제 앞이 낫긴 했다.
“아무래도 약이 모자랐나 보군.”
반쯤 일어난 성기를 보며 황제가 중얼거렸다. 아서에게 이 순간이 얼마나 치욕스러울지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어투였다.
황제는 마치 혈통 좋은 말을 강제로 교미시키려는 마구간지기와 같았다. 발정제를 먹인 암수 한 쌍을 창고로 몰아넣고 교미를 유도하는 것과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었다.
본래 황족의 초야에 참관인이 있는 경우가 대다수이긴 했다. 한데 이렇게 바로 코앞에서 지켜보고 있는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다. 그것도 황제 본인이 직접 말이다.
아서는 기계적으로 제 성기를 위아래로 수음했다. 배 안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듯한 열기가 끓어올랐다. 만일 중간에 피하지 않고 병에 든 약을 전부 삼켰더라면 지금쯤 정신을 못 차리고 휘둘리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기분이 얼마나 불쾌하든 간에 몸은 점점 달아올랐다. 억지로 틀어막고 있던 것도 이제 한계여서 점점 아래에 피가 몰렸다.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즐기는 게 낫겠다 싶었는데,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 또 다음 단계가 기다리고 있는 걸 아는 이상 그것도 힘들었다.
“이제 대강 준비가 끝난 성싶구나.”
황제는 삽입이 가능할 만큼 단단해진 성기를 보며 말했다.
“레일라, 뒤를 돌아도 좋다.”
“…예, 폐하.”
뒤를 돌아 있는 내내 굳어 있던 레일라가 삐걱삐걱 몸을 돌렸다. 레일라는 잠깐 사이 무언가 결심한 듯, 결연한 눈빛을 짓고 있었다.
“폐하, 화, 황공하옵니다만… 한 말씀 올릴 수 있도록 윤허해 주시옵소서.”
“무언가.”
“…소녀는 태자 전하를 강제로 취하고 싶지 않사옵니다. 송구하옵니다.”
바들바들 떨면서도 레일라는 끝까지 제 할 말을 했다. 언뜻 무모하게까지 들리는 이 발언은 당장의 어설픈 정의감이나 수치심에서 근거한 말은 아니었다.
레일라는 대귀족의 자제치고 소심한 편이었으나 그렇다 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는 아니었다. 잠깐이나마 황제에게서 등을 돌리고 숨을 가다듬자 그는 보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렇게 초야를 치러 혼인을 확정 짓고 세력 간 동맹이 공고해진다 한들, 레일라가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대로 초야를 치른다면 황태자는 레일라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황제나 델라 공작을 죽일 순 없을 테니, 그 분노의 화살은 상대적으로 약한 레일라에게 쏟아지게 분명했다.
만일 황태자가 황위에 오른다면 상황은 더 최악으로 치닫는다. 황제가 된 아서의 분노 앞에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델라 공작은 적당한 거래만 성사된다면 레일라를 얼마든지 팽할 사람이었다. 레일라는 오직 이 동맹을 위한 매개체로만 이용당하고, 그가 죽어 생겨난 빈자리는 공작의 또 다른 자식이 채울 것이다.
황제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그대인가. 산 하나를 넘으니 또 다른 산이 나오는군.”
“소, 송구하옵니다, 폐하….”
“곤란하군, 곤란해….”
레일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것이 그가 먼 미래까지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두려울지라도 이렇게 해야 황태자의 분노를 피할 구실을 만들 수 있었다.
“하나…. 그래, 태자의 반려가 될 아이가 똑똑한 건 나쁘지 않은 일이지.”
생각보다 황제는 크게 노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구겨진 외투를 황태자에게 건네 몸을 가리도록 배려해 주기도 하였다.
“아무래도 델라 공작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 게 낫겠어. 필립, 공작을 데려와라.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다.”
“예, 폐하.”
안도했던 것도 잠시 제 아비를 불러온다는 말에 레일라의 안색이 거무죽죽해졌다. 필립이 침실을 나가기가 무섭게 레일라는 급격한 초조함에 휩싸였다. 몇 분이 지난 뒤에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레일라는 재차 마음을 다잡고자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눈을 감고 있을 줄 알았던 황태자는 레일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레일라와 시선이 마주치자 흐릿하던 붉은 눈이 마법처럼 또렷해졌다. 마치 ‘잘했어.’라며 칭찬하듯 바라보는 시선에 레일라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아.”
눈을 감았다 뜨자 또렷하던 적안이 스르륵 초점을 잃었다. 신기루 같은 광경이었다.
그렇지만 짧게나마 눈이 마주쳤던 건 착각이 아니었다. 만일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제대로 된 선택을 했다는 생각에 서서히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이로써 설령 일이 잘못되더라도 레일라는 책임을 면하게 될 것이다. 전신을 묶고 있던 긴장이 차츰 가라앉았다.
몸의 떨림이 멎어 드니 다시금 레일라의 눈과 귀가 열렸다. 심장 소리에 덮여 들리지 않던 바깥 소음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어째서 진즉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싶을 만치 제법 큰 소요가 일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접근을 금하신 장소입니다!”
“물러나십시오!”
“이러시면, 윽…!”
황제 또한 이미 소란을 인지하였는지 관자놀이를 감싸고는 긴 한숨을 흘렸다. 소란의 주동자가 누구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내리깐 눈 위로 감추지 못한 역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내 침실 문이 떨어져 나갈 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두꺼운 문짝이 양옆으로 입을 쩍 벌렸다.
“으윽…!”
열린 문 사이로 한 사내가 짐덩이처럼 던져졌다. 기사 필립이었다. 좀 전만 해도 두 발로 멀쩡히 걸어 나갔던 필립은 그 잠깐 사이 피투성이 몰골이 되어 있었다.
너덜거리는 몸뚱이가 바닥을 크게 두 바퀴 굴렀다. 그러곤 마치 의도하기라도 한 것처럼 정확히 황제의 발아래 멈추었다.
“……장미궁에서 치르는 초야라. 악취미도 유별나시네.”
무표정한 낯을 한 카를로스가 침실로 들어섰다. 아래로 늘어뜨린 검신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핏방울이 조금씩 떨어져 내렸다.
꽤 큰 소란이 일었음에도 그는 연회장에서와 같은 완벽한 차림새였다. 뺨에 튄 한두 방울의 피가 유일한 흠이라면 흠이었다.
“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 카를로스.”
뒤늦게 황제가 노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카를로스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양 무시했다. 침실에 들어서기 전부터 그의 시선은 오직 아서에게로 향해 있었다. 황제는 안중에도 없었다.
성마른 눈길이 아서를 위아래로 빠르게 훑었다. 뺨이 불그스레할 뿐 육안으로 보았을 땐 아서는 크게 다친 곳이 없어 보였다.
아서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카를로스는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되찾았다.
약에라도 취한 듯 흐트러진 아서와, 어찌할 바 모르고 굳어 있는 영애 한 명. 그리고 노기를 띤 황제. 가만히 방 안의 광경을 훑어보던 카를로스가 조소했다.
“폐하께선 황제가 아니라 중매쟁이 쪽이 보다 적성에 맞아 보이십니다.”
“…감히 네놈이 무슨 낯짝으로 이곳에 발을 디딘단 말이냐. 이곳이 어딘 줄 알고…!”
평정을 잃은 황제가 소리쳤으나 그럴수록 그의 꼴만 우스워질 따름이었다.
“내가 무얼 하든 신경 끄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신에겐 아무 볼일이 없으니.”
“이… 후안무치한 놈. 염치도 없는….”
황제가 혐오스럽다는 듯 카를로스를 노려봤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게 그리 치가 떨리게 싫다면 형님을 이곳으로 불러들이지 말았어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카를로스는 황제 쪽을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형님.”
아서를 부르며 그가 한 걸음 걸어 나갔다. 그때였다.
“물러나십시오, 전하.”
그가 한 발 내디딘 순간, 카를로스와 황제 사이를 가르고 검은 인영 넷이 내려앉았다.
한 명 한 명 심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는 이들이 황제와 카를로스 사이에 벽처럼 견고히 자리했다. 눈을 제외한 모든 부위를 새까만 천으로 감춘 황제의 호위 기사단이었다.
“…성가시게도 구네.”
카를로스가 태연하게 아서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자, 호위단이 일시에 검을 빼어 들어 겨누었다. 그가 한 발짝 더 나가자 이번엔 그의 뒤편에 네 명이 내려앉았다. 천장과 창가에 몸을 숨긴 호위까지 총 열두 명의 인원. 기사의 나라라는 이명이 무색하지 않게 황제의 기사단은 전원이 마스터로 이루어져 있었다.
카를로스가 쥐고 있던 검을 만지작거렸다. 위협적인 기세가 사방에서 짓쳐 들었다. 노련한 마스터가 열둘이니 쉽지 않은 상대인 건 분명했다. 그러나 다행인 점은 카를로스 역시 혼자가 아니란 사실이었다.
“카를로스, 서두르는 게 좋겠어. 전하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여.”
“알아.”
뒤따라 들어온 가브리엘이 침실 문을 닫았다. 피어오르는 살기 속에서 기사가 아서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
“끄윽….”
마지막까지 버티던 호위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카를로스는 검 끝으로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대강 밀어냈다. 힘을 잃은 몸뚱이들이 융단 위에 짚단 인형처럼 널브러졌다.
침실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잔과 술병이 있던 테이블이 넘어져 걸음마다 유리 조각이 밟혔다. 창을 가리던 커튼은 반 넘게 찢어져 더 이상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너덜거리는 천 사이로 눈 내리는 바깥의 정경이 드문드문 보였다.
카를로스가 장미궁에 발을 들였단 사실에 분노해 있던 황제는 호위가 전부 쓰러지고 나서야 비로소 현실을 자각한 듯했다. 창백해진 안색이 볼만했다.
소란한 와중에도 황제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아서를 묶어 두기 위한 목줄은 튼튼할수록 좋은 법이니, 카를로스는 황제를 멀쩡히 살려 두었다.
“영애, 이쪽으로 오시지요.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예.”
갑작스레 발발한 난전에 레일라는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중간중간 아서가 괜찮다며 다독여주지 않았더라면 공포심을 이겨 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가브리엘이 넋이 나간 레일라를 침실 밖으로 안내했다. 소란 중에 델라 공작이 죽진 않았을까 염려된 레일라가 초조하게 물었다.
“기사님. 제 아버지는… 어디에 계신가요.”
“델라 공작은 무사하니 염려치 마십시오.”
카를로스를 붙잡아 두려 하다 크게 다치긴 하였으나 죽진 않았다. 그만하면 무사히 살아남은 셈이다.
“그렇군요….”
레일라는 비틀거리면서 용케 쓰러지지 않고 침실을 나섰다. 잠깐 휴식을 취하겠냐는 제안에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공작가로 돌아가고 싶었다.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을 목격한 것만 같아 덜컥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침실 문 앞에 있던 이름 모를 기사가 에스코트를 하겠다며 나섰다. 레일라는 공작가의 마차가 세워진 곳으로 걸었다. 레일라를 실은 마차는 그의 염원대로 빠르게 황성을 벗어났다.
“형님.”
초토화되었던 주변이 정리되고, 다시 침실 문이 닫혔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응.”
아서는 몽롱한 얼굴로 답했다. 몸 안에서 끓어오르는 열기는 그대로였지만 완전히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단지 성욕이 이성을 반쯤 집어삼키고 있단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다가온 카를로스가 아서를 일으켜 세웠다.
“이리로 기대세요.”
“…괜찮아. 혼자 걸을 수 있어.”
안아 올리려는 손길을 밀어냈다. 조금 힘들다고 카를로스에게 순순히 안겨 갈 아서가 아니었다.
“태자궁까지 혼자 걸을 수 있겠습니까.”
“응. 괜찮아.”
“그럼 가시지요, 당장.”
아서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선 느릿느릿 침실을 빠져나가려 하는데, 불현듯 어두운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아르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황제와 시선이 마주쳤다. 난장판 속에 홀로 남은 황제는 부쩍 지쳐 보이는 모습이었다.
“폐하.”
“아르디. 짐을 두고 어딜 가려는 게냐.”
“…송구하옵니다, 폐하.”
황제에게로 다가간 아서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소자는 이만 여기서 물러나고자 하옵니다. 몸이 회복된 뒤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아서는 고개를 숙인 틈을 타 제 하반신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소란 중에 하의를 추스른 터라 다행히 흉한 꼴을 보이진 않았지만, 여전히 살짝 부푼 고간은 아서의 체면을 깎아 먹는 데에 일조했다.
좀 전의 쪽팔리던 상황을 떠올리니 아서는 다시 또 슬슬 열이 받으려 했다. 난장판이 된 침실을 둘러보며 그가 애써 분노를 가라앉혔다.
“정녕 짐을 두고 가겠다는 거로구나.”
“송구하옵니다, 폐하.”
황제는 이제 와 불쌍한 척을 했다. 현시점에서 유일한 방패막이라 할 수 있는 아서마저 가 버리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긴 아는 것 같았다. 아서는 뒤늦게 불쌍한 체를 하는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께서 포도주에 약을 탔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습니다. 제게 최음제를 권하실 거라고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오늘 일은… 지나친 처사였사옵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로 폐하를 뵙고 싶지 않습니다.”
“…….”
“앞서 말씀드린 바 있지만, 소자는 그 누구와도 혼인을 치를 마음이 없사옵니다.”
“아비의 명이라도 말이더냐.”
“예. 폐하의 명이라도.”
아서는 황제의 시선을 냉정하게 외면했다. 황제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저것과 어울리더니 나쁜 물이 들었구나.”
“그런 게 아닙니다.”
“짐이 저놈과 어울려선 안 된다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
“이전 날 다시는 저것과 어울리지 않겠다고, 네 입으로 맹세하였던 것을 잊은 게냐?”
“…그건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입니다.”
“괘씸한 것.”
과거 아서는 다시는 저것, 즉 카를로스와 어울리지 않겠다고 눈물로 맹세했다. 강압과 설득에 못 이겨 굽힌 것이었는데 이제 와 따지고 든들 큰 효용은 없을 터였다. 아서가 고집을 꺾을 때까지 몰아붙인 정황은 이미 황제의 머릿속에서 깨끗이 잊혀졌을 테니 말이다.
“아비 앞에 무릎 꿇고는 다시는 저것과 어울리지 않겠다, 용서를 빌던 게 엊그제 같은데.”
“송구하옵니다.”
“…내 아이가 많이 변했군. 더 이상 품 안의 자식이 아니야.”
아서를 담은 황제의 눈은 먼 과거를 회상하는 듯했다. 차가운 손이 아서의 뺨에 닿았다. 열이 오른 볼을 식혀 주듯 손끝으로 뺨을 쓰다듬었다.
“짐의 앞에서 더 이상 눈물을 보이지 않던 때부터였나. …감히 딴마음을 품은 것이.”
볼을 쓰다듬던 황제가 불시에 뺨을 쳤다. 가벼운 마찰음이 났다.
힘이 실리지 않은, 의도적으로 굴욕을 주기 위한 행위였다.
황제는 새까맣게 죽은 눈으로 아서를 내려다보았다. 당연히 그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했던 자식이 제 손을 빠져나가려 든다. 완벽히 길들였다 생각하였으나 전부 그의 착각이었다. 제 품 속의 아이라 여겼던 아서가 달라졌다.
그는 제가 어느 부분에서 실책을 저질렀나 과거를 되짚었다. 처벌의 수위가 약했던가? 그게 아니라면 어리광 부리는 것을 지나치게 눈감아 주었던가?
좀 전만 해도 약에 취해 제대로 걷지 못했던 아서였다. 그랬던 아서가 이제는 제 발로 걸어와 뻔뻔하게 예를 갖춘다. 뺨이 살짝 상기된 것을 제외하면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새다.
황제가 짧은 웃음을 흘렸다. 이젠 아비를 속이기까지 해.
“이제 보니 짐이 여우 새끼를 길렀구나.”
“…폐하.”
“저보다 한참 어린 아우보다도 모자란 것을, 그리도 관대히 품어 주었건만…….”
카를로스 앞에서 아서를 깎아내리면서도 황제는 전혀 스스럼이 없었다. 아서가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다 짐이 부덕한 탓이다. 하자가 있는 것을 기꺼이 품어 주었던 게 오판이었어.”
이런 순간에도 아서의 백금발은 보는 이의 시선을 절로 끌어당겼다. 저 금발은 황족으로서 하자가 있다는 의미와 같다. 황제가 아니었다면 아서는 결코 황태자위에 오르지 못했을 터였다.
얌전히 고개를 숙인 채 경청하는 모습조차 황제에겐 그저 가증스러울 따름이다. 은혜를 잊은 자식이 괘씸해 견딜 수가 없었다.
“약삭빠른 것들이 유독 잘하는 것이 있지. 빌붙어 기생하는 짓거리.”
“…폐하.”
“그러니 이제는 저것에게 기생하며 살아가겠다 이거로군.”
“…….”
“이 아비를 팽하고.”
어둡게 가라앉은 눈이 아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평소 습관대로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보는 눈이 있다 하지만 차라리 잘되었다. 주제 파악을 시키려면 어느 정도 굴욕은 필요한 법이다.
황제의 손이 묵직한 파공음을 일으키며 내려갔다. 그는 아서가 제 손을 피할 거라곤 추호도 생각지 않았다.
그의 예상대로 아서는 인상을 살풋 찌푸리긴 하였으나 순순히 눈을 감았다. 철썩, 한쪽 뺨을 후려갈기는 소리가 날카롭게 침실을 울렸다.
한 번으로 만족하지 않은 황제는 재차 손을 들어 올렸다. 뺨을 내려쳤던 손이 다시금 허공을 갈랐고, 아서 역시 눈을 감았다.
하나 예정되어 있던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감히, 지금 누구에게….”
카를로스의 목소리였다.
그 순간, 뼈가 통째로 뭉개지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황제의 팔목이 기이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미처 손을 쓸 새도 없었다. 아서가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이 꺾인 황제는 비명은커녕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낮은 웃음을 흘려 댔다. 낮게 터트린 웃음과 달리 눈동자는 배신감으로 번들거렸다.
“…아주, 득달같이 달려드는구나.”
“…….”
“내 너를 다시 보아야겠어, 아르디. 멍청한 게 반반한 낯을 이용할 줄도 모른다 싶었건만…. 제 형제도 홀릴 정도라니.”
“…폐하.”
아서가 그만하라는 듯 불렀지만 황제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오로지 아서에게 굴욕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독설이 내뱉어졌다.
“혹 저것에게 다리라도 벌려 주었느냐? 그리도 초야를 질색하더니 저것에게는 몸을 내어주었…, 윽.”
“뚫린 입이라고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군.”
부러졌던 팔목뼈가 이번엔 커다란 손아귀 안에서 으스러졌다. 이어지는 조롱에 카를로스의 눈빛이 선뜩하게 가라앉았다.
황제가 고작 뺨 한 대로는 만족하지 못하였듯, 카를로스 역시 팔목뼈를 부순 걸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팔목을 으스러뜨렸던 손이 이번엔 목을 꺾기 위해 달려들었다.
“카를로스!”
아서는 황급히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카를로스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그 덕에 황제는 단번에 목뼈가 부러지는 일은 모면했다.
그러나 여전히 목을 움켜쥔 손아귀가 숨통을 조이는지 컥컥대며 눈을 뒤집는다. 전에 없이 초라한 모습이다.
일순간 아서가 머뭇거렸다. 황제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더럽게 짜증이 나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막상 이대로 제 눈앞에서 죽게 내버려 두면 꿈자리가 뒤숭숭할 것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목숨만은 구명해 주기로 했었으니….
아서는 카를로스에게 다가가 그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잡았다.
“그만해.”
“…….”
“죽이지 않기로 했잖아.”
끓는 시선으로 황제를 노려보던 카를로스가 이내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반쯤 허공에 떠 있던 황제가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피가 섞이지 않은 아비도 아비라는 건지 마냥 우습지만은 않았다. 물론 약간의 씁쓸함, 딱 거기까지다. 황제가 제 눈앞에 있지 않으면 곧바로 사라질 얄팍한 연민이었다.
틀로 찍어 낸 듯 닮은 부자간의 충돌은 어딘가 보기에 기묘한 면이 있었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고선 카를로스가 일방적인 패륜을 저지르는 것 같기도 했고, 또는 그들 간에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순간처럼 보이기도 했다.
좌우지간 이제 평화로운 황권 교체는 물 건너갔다. 이런 쓸데없는 짓만 꾸미지 않았으면 죽는 날까지 선황 대우를 받으며 호의호식할 수 있었을 것을. 씁쓸해진 아서가 쓰러진 황제에게서 시선을 떨어뜨렸다.
“전하, 침실로 모시겠습니다.”
근처에 우두커니 서 있던 가브리엘이 다가와 아서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기사는 평소와 같은 차분한 표정이었다. 다만 어깨를 끌어안은 손엔 묘한 힘이 실려 있었다.
홧홧한 뺨 위로 기사의 시선이 닿았다. 귓바퀴부터 시작한 시선이 눈썹뼈부터 콧대, 뺨, 입술, 턱까지 찬찬히 훑어 내렸다.
목선을 훑어 내렸던 시선은 이내 불그스레하게 부은 뺨으로 올라왔다. 언뜻 평온해 보이는 눈이 한 번의 깜빡임도 없이 아서를 응시했다.
“침실로 가시면 곧바로 치료제를 구해 오겠습니다.”
“됐어. 별것도 아닌…, 윽.”
불쑥 끼어든 손이 아서의 턱을 붙잡았다.
“이게 별것도 아니라고?”
카를로스가 아서의 턱을 움켜쥐었다. 턱뼈가 눌릴 만큼 강한 힘에 아서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카를로스는 아랑곳 않고 붙잡은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얼핏 봐도 아서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애써 멀쩡한 체 가장하고 있지만 들여다보면 눈동자가 흐릿했다. 눈꺼풀이 무거운지 눈을 감았다 뜨는 것조차 느릿느릿했고, 간헐적으로 새어 나오는 숨은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약 기운 때문에 붉어진 것이라 생각했던 뺨은 이제 보니 한쪽만 유독 부어 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푸르스름한 멍 자국이 올라올 것이 분명했다.
이건 고작 뺨을 한 대 맞았다고 생길 자국이 아니었다. 그들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 이미 황제는 아서에게 여러 차례 손을 올렸던 것이다.
“이거 놔.”
당장 쓰러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면서 아서는 여전히 뻣뻣하게 굴었다. 이렇게나 자존심을 세워 대는 아서가 황제에겐 고분고분하게 뺨을 맞아 주었다고. …대체 왜?
카를로스는 돌연 배 속이 갑갑해졌다.
늘 과시하는 것처럼 아서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던 황제였다. 오래전부터 황제는 지나치다는 말을 들을 만큼 아서를 품에 끼고 돌았다. 과보호 탓에 아서가 저리 오만하게 자랐을 거라는 수군거림은 어느 순간부터 기정사실화되어 있었다.
‘아비 앞에 무릎 꿇고는 다시는 저것과 어울리지 않겠다, 용서를 빌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저보다 한참 어린 아우보다도 모자란 것을…….’
‘하자가 있는 것을 기꺼이 품어 주었던 게 오판이었어.’
황제가 아서의 뺨을 내려친 걸 본 찰나, 카를로스는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손을 들어 올린 황제도, 주어진 폭력에 순종하는 아서도 더없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황제에게 묘하게 순종적이던 아서를 이미 목격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러한 순간에서조차 이어질 거라곤 추호도 예상하지 못했다. 분명 처음이었을 황제의 조롱에도 아서는 익숙한 듯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평소엔 그리도 뻣뻣하게 구시더니 웬일입니까. 지금이야말로 형님께서 길길이 날뛰어야 할 때가 아닙니까.”
카를로스가 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아서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내가 날뛰든 말든, 네가 알 바였던가.”
퉁명스레 대꾸한 아서가 카를로스의 손을 털어 냈다. 감정을 숨기고 있는 모습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때때로 형님은 기이할 정도로 제 몸이 상하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평소에는 사소한 것 하나로도 펄펄 끓어오르면서도 그러했다.
거슬린다. 늘 예민하게 굴던 아서가 종종 맥락 없이 보이는 무심함은 눈에 거슬리는 면이 있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속에 미약한 불안감이 맴돌았다. 무언가 가슴께에 묵직한 것이 걸렸다. 짜증이 치미는 것 같기도, 답답한 것 같기도 했다.
아서는 일평생을 황제와 황후의 품에서 안온하게 살아왔을 것이다. 아서가 겪은 고난이라곤 카를로스 자신만이 유일하다고, 그리하여 저에 대해 그리 열등감을 품게 된 것이라고….
오직 그렇게만 확신하고 있었다. 오늘 이 순간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전하, 침실을 정리하겠습니다.”
“…그래.”
기사 몇이 침실로 들어서며 뒤엉키던 상념이 뚝 끊겼다. 카를로스는 복잡한 속을 잠시 외면하고 명령을 내렸다.
“황제를 끌어내라.”
“예, 전하.”
카를로스의 시선이 침상 바닥에 있는 필립에게로 향했다.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언제 어느 때든 황제의 뒤편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기사였으니, 많은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기사 필립은 궁 지하에 가두어라.”
“예.”
“심문을 위한 준비를 마쳐 두도록.”
모든 명을 내린 뒤 카를로스가 가브리엘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가브리엘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카를로스가 아서의 옆에 있을 때는 기사가 자리를 피하는 게 셋 사이의 불문율이었다. 만일 그런 작은 규칙조차 없었더라면 수많은 다툼이 생겼을 터였다.
“형님, 침실로 가시지요.”
카를로스는 아서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지금 당장으로선 아서를 침실에 가둬 두는 게 먼저였다.
4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