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계절이 두 차례 바뀌고 다시 서서히 낮이 짧아지고 있었다. 바라본 창밖 하늘 위로 어느새 푸른 장막이 드리웠다.
아서가 이 저택에 눌러앉은 지도 꽤 오래로, 이제 가을이 찾아오고 있었다. 괜히 답답하다며 고집부려 창을 열어 두었는지 찬 공기를 견디다 못한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아서는 열이 식다 못해 차가워진 몸을 이불 속에 묻었다. 곧 못 보게 될 바깥 정경들을 눈에 담고, 그간 한 몸처럼 지낸 침대도 괜스레 손으로 쓸어내려 봤다.
끝끝내 시간이 흐르고 흘러 아서가 황성으로 돌아갈 날이 당도했다.
저택을 벗어나는 게 마냥 반갑지만은 않아, 아서는 내심 한숨을 흘렸다. 구속구를 떼어 낼 수 있는 건 환영할 만한 일이었으나 재수 없으면 황후가 되어야 할 판이었으니 기분이 사뭇 찝찝했다.
더 이상은 코앞에 들이닥친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다. 아서는 어떻게든 황후위에 오르지 않을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간 아서는 약점이 잡혔으니 우선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르다가, 또 한날은 언제 그랬냐는 양 변덕을 부리고 독설을 퍼부었다. 카를로스를 질리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죄다 별 효용은 없던 짓이었다. 카를로스는 아서가 아무리 짜증 나게 굴어도 아서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얼마간의 시간을 잡고 멀어지려 했던 건 완전히 아서의 오판이었던 것이다.
이제 아서는 카를로스가 보통 사람처럼 쉽게 떨어져 나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나쁜 꼴을 보기 전에 일찌감치 카를로스에게서 정을 떼 버리려 했는데, 지금 당장으로선 불가능할 듯했다.
사실 아서는 제가 진심으로 카를로스를 밀어내고 있긴 한 건지도 의문이었다. 카를로스가 지금쯤 자신에게 질리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멋대로 굴다가, 한편으로는 정말로 그렇게 될까 조바심을 느꼈다.
머리와 마음이 따로 놀았다. 황당하게도 정을 떼기는커녕 카를로스를 향한 아서의 집착은 날로 더해 가고 있었다.
아서는 아직까지는 카를로스를 선뜻 놓아주기가 싫었다. 다른 이랑 행복하게 지낼 카를로스를 상상하기만 해도 열이 치밀어 올랐다.
그렇지만 그와 별개로 황후가 되는 건 여전히 사양하고 싶었다. 아서는 순간의 감정으로 어떻게 변질될지 모를 앞으로의 나날까지 저당 잡힐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황후위에 오르지 않을 수 있되, 카를로스와도 가능한 한 오래 함께할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벌써부터 골이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계십니까, 형님.”
아서가 천장을 바라보며 맹렬히 머리를 굴리던 사이, 어느새 다가온 카를로스가 아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차가운 손끝이 옷자락 아래로 스윽 들어왔다.
깜짝이야…. 멍하니 누워 있던 아서는 카를로스와 눈을 마주치곤 반사적으로 미소를 그렸다.
구속구를 차고 있으면 이게 문제였다. 카를로스가 본래 기척이 희미한 편이라 일부러 아서를 놀래려 한 게 아님에도 아서 홀로 기겁할 때가 있었다.
“왜 그리 넋이 나간 얼굴입니까. 황성으로 돌아가는 게 썩 기쁘지 않은가 봐요.”
“…아직 잘 실감이 안 나서 그래.”
“그렇습니까.”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카를로스의 손이 은근히 골반 부근을 만지작거렸다. 아서는 가만 굳어서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며칠 전 황성으로 돌아가기 싫다며 온갖 난리를 쳤으니 아직은 얌전히 굴어야 할 때였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서의 앞날이 불투명하다는 점만 제외하면 다른 일들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중이었다.
황후와 오를레앙가는 그 속내는 어떻든 결과적으로 큰 충돌 없이 카를로스에게 몸을 굽혔다.
제아무리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대단한 권세를 지닌 가문이라 해도, 세력의 중심축인 아서가 카를로스에게 붙들려 있는 상황에서 딴마음을 품진 못 했다.
아직까지는 모든 게 물밑에서 은밀히 진행되고 있었다. 차후 권력의 판도가 뒤집히고 숱한 가문이 피해를 볼 것이야 자명했지만, 이 정도면 평화로운 결말이라 할 만했다. 원작에선 수천 명의 목이 잘리고 수십 개의 가문이 몰락한 뒤에야 끝이 난 갈등이었다.
아마 황제 입장에선 이게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인가 싶을 것이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고서야 겉보기엔 황후가 황제의 뒤통수를 치고, 카를로스와 한편을 먹은 걸로밖에 안 보였을 테다. 그 황망해할 꼴이 재밌겠다 싶어 아서가 속으로 웃음 지었다.
“…아야.”
두피가 당기는 아픔에 아서가 몰래 웃다 말고 인상을 찌푸렸다. 딴생각에 빠진 아서를 눈치챈 카를로스가 아서의 머리칼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또 어딜 봐요. 요사이 번번이 넋을 놓고 계시군요.”
“…내가 그랬나.”
“예. 방금도 엉뚱한 곳만 보고 있지 않았습니까.”
“별생각 안 했어.”
실은 요새 아서가 잡생각이 많아지긴 했다. 종일 별다른 활동을 안 하다 보니 이런저런 망상에 빠지기 좋았다. 이곳은 머리 아프게 서류 같은 걸 볼 필요도 없고 종일 멍하니 있어도 괜찮은 장소였다.
갑자기 아서는 이 저택을 떠나는 게 조금 아쉬워졌다.
“또 딴생각하지.”
“아.”
“여기. 이쪽 보세요.”
카를로스가 아서의 볼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아서는 순순히 카를로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눈이 마주친 뒤엔 입꼬리를 끌어 올려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미소는 확실히 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어쩐지 그 변화가 카를로스에겐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엔 아서가 얌전하게 구는 걸로 만족하는가 싶던 카를로스는 이젠 아서의 시선이 잠깐 다른 곳으로 향한 것만으로도 불안해했다. 아서의 순종으로는 부족하다는 양 아서를 더 툭툭 건드려 댔다.
그사이 일어난 변화가 여러모로 적지 않았다.
아서가 거짓으로나마 카를로스에게 전처럼 웃어 주기 시작했고, 마노가 아서를 조금 안타깝게 여기기 시작했다.
가브리엘은 글쎄다. 한 달 전쯤 카를로스가 황성으로 데려가 버려 현실에서 만나지 못한 지 좀 되었다.
그사이 가브리엘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꿈에서는 조금 달라졌다. 이전엔 제대로 건드리지도 못하게 하더니, 그사이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생긴 듯 이젠 아서가 하는 짓을 밀어내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또 당신이군요.’
‘응, 나야.’
‘그렇게나 사내 좆이 좋습니까?’
분명 건드리면 반응하긴 하는데 가브리엘의 흥분한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는 그저 아서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엔 저에게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기사는 꿈속의 아서와 현실의 아서를 별개의 것 취급했다. 꿈속 아서를 자신의 저열한 욕망이 무의식중에 실현된 것으로 여기고선, ‘당신’이라는 호칭으로 아서를 불렀다. 현실에서 보였던 다정하고 정중한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그 모습이 카를로스랑은 정반대였다.
‘형님.’
꿈속 카를로스는 간지러울 정도로 애틋하게 아서를 불렀다.
‘형님….’
매만지는 손길이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건드리지도 않은 손끝이 다 간질간질했다. 솜털이 스치는 듯한 간지러운 감각을 떨쳐 내려 카를로스 몰래 주먹을 말아 쥐었더랬다.
그때 이유 모를 불편함을 느꼈던 아서는 이후로 카를로스의 꿈에 들어가는 것이 조금 꺼려졌다.
그에게 불편함을 안겨 줬던 카를로스는 정작 현실의 아서에겐 섣불리 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서에 대한 제 감정이 약점이 되리라 생각했던 탓이다.
실제로도 그건 정확한 추측이었다. 감정적 약자가 된 카를로스를 아서가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카를로스를 손에 쥐고 흔들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카를로스의 진정한 속내까진 알 수 없지만, 어찌 됐건 아서는 지금 이 상황이 카를로스에게도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카를로스는 잘못된 방식으로나마 원하는 아서를 손에 쥐고 있고, 아서도 이 상황을 즐기고 있으니 두 사람 다 제가 원하는 걸 얻어낸 셈이었다.
“팔 들어 봐요, 형님.”
침대 옆에 아서를 세워둔 채로 카를로스가 인형 놀이라도 하듯 팔다리를 들어 침의를 벗겼다. 아서가 입고 있던 얇은 옷은 카를로스의 손길 몇 번에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곧 맨몸 위에 단정한 상하의가 입혀지고, 그 위로는 두꺼운 로브가 걸쳐졌다.
“답답하진 않으십니까?”
“…응.”
“그럼 이만 가시죠.”
황성으로 돌아갈 날이 되자 카를로스는 주변인을 전부 물리고 본인이 직접 아서의 시중을 들었다. 이게 지금 시중을 들고 있는 건지 그냥 제 것을 꽁꽁 감춰 두려 드는 건지 헷갈리기는 한데, 어쨌든 카를로스 본인 말로는 그렇다고 한다.
후드가 코끝까지 내려와 아서의 시야에 보이는 거라곤 발밖에 없었다. 앞이 안 보여 그 자리에 우뚝 서 있기만 하자 카를로스가 아서를 붙잡고 제 쪽으로 이끌었다.
“답답해도 조금만 참아요. 구속구는 마법사를 만나고 난 뒤 제거해 드리겠습니다.”
“알겠어.”
후드 아래 드러난 입술이 달싹이는 것을 본 카를로스가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꼬리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이젠 대답도 꼬박꼬박 잘하고, 착하네.”
쪽, 하고 붙였다 떼는 가벼운 키스가 몇 차례 이어졌다. 코끝과 입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입맞춤은 다정했다. 입맞춤을 받는 이에게 어떤 거부권도 없다는 사실을 배제한다면 그랬다.
맞닿은 입술이 좀 더 깊이 겹쳐져 아 서가 그간 몸에 익은 버릇대로 호응했다. 뒷덜미를 타고 오싹한 감각이 기어올랐다.
“아, 응….”
가벼운 입맞춤이 깊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물컹한 혀가 깊숙이 밀고 들어와 아서의 것과 뒤엉키고, 맞붙은 입술 사이로 물기 어린 소리가 새어 나왔다. 방 안의 공기가 서서히 달구어졌다.
“하아, 형님.”
기껏 씌운 후드가 벗겨지고, 뺨에 점점이 도장을 찍던 입술이 귓가로 옮겨 갔다. 귓바퀴를 쓸고 내려가는 진득한 감촉을 견디다 못한 아서가 질끈 눈을 감았다.
아서의 몸이 점점 뒤쪽으로 기우는 것이 거슬렸던지, 카를로스가 아서의 허리를 감싸 안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근육으로 짜여진 팔이 등을 휘감자 마치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힌 것만 같았다.
“아.”
맞닿은 하체가 명백히 성적인 의도를 담고 꾸욱 짓눌렸다. 굳이 손을 대어 확인할 필요도 없이 카를로스의 흥분이 선명히 느껴졌다.
“읏, 잠, 깐…. 왜 또….”
둔부를 꽉 쥔 손이 볼깃살을 배려 없이 주물럭거렸다. 좀 전만 해도 황성으로 갈 것처럼 굴다가 갑자기 분위기가 돌변했다.
아서가 당황한 척 달라붙는 형제를 밀어냈다. 카를로스는 순순히 뒤로 밀려나 주는가 싶더니 채 몇 초도 기다리지 않고 다시 아서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영영 가둬 두고 싶은데.”
음울하게 들릴 만큼 건조한 음성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가둬, 그럼. 난 상관없으니까.”
아서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카를로스는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웃음 지었다. 거짓이든 뭐든 간에 듣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허리를 휘감고 있던 손이 올라와 벗겨졌던 후드를 다시 깊이 눌러씌웠다. 아서의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나서야 카를로스는 만족스러워했다.
“이만 갈까요, 형님.”
입매 끝에 다시 가벼운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아서는 상기된 낯을 후드 아래 감춘 채 침실 밖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황성에 도착한 아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의 자리를 채우고 있던 마법사를 만나는 것이었다. 그간 있었던 일을 기억 전이 마법을 통해 알려 준다 하였다. 정신계 마법은 조금 께름칙했지만, 제가 처리했던 업무도 기억 못 하는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감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이브 공은 준비를 끝마쳤나?”
“예, 좀 전에 응접실로 안내해 드렸습니다.”
“형님을 그쪽으로 안내해 드리도록. 정중히 모셔라.”
“예, 전하.”
아서는 카를로스의 옆에 서서 그가 낯선 기사와 대화하는 것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직접 모셔다드리고 싶지만 급한 용무가 있는 터라. 날이 밝기 전 찾아뵙겠습니다, 형님.”
끝까지 집요하게 따라올 것 같던 카를로스는 의외로 간단히 아서를 보내 주었다.
대체 언제 어디로, 어떻게 찾아온다는 건가 싶었으나 아서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황성 어딜 가든 카를로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테니 말이다.
“가시지요, 아서 전하. 자세한 건 하이브 공께서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아서의 안내를 맡은 기사는 정중했다. 눈빛은 영 불순하긴 해도 카를로스의 기사치고는 양호한 편이었다.
마법사가 있는 응접실은 그들이 나온 집무실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안내를 마친 기사가 이쪽으로 들어가라는 듯 문을 반쯤 열고 입구에서 기다렸다. 아서는 별말 없이 응접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풍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후드 아래 감추어진 눈 위로 강한 이채가 떠올랐다. 응접실의 소파에는 아서와 똑같이 생긴 남자가 앉아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서 전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아서는 못 들은 체 무시하고 그의 얼굴과 몸을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이렇게 코앞에서 보고 있는데도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솜털 한 올 한 올마저 아서를 그대로 복제한 것처럼 똑 닮은 얼굴이었다. 살짝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물론 둘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한 뒤에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언가 달라 보이긴 했다. 눈빛이라든가, 서 있는 자세 따위가 그러했다.
황족으로서 숙지해야 할 예법이 숨 쉬는 것처럼 몸에 익은 아서를, 여타 귀족에 비해 비교적 예법에 얽매이지 않는 편인 마법사가 완벽하게 흉내 내기란 불가능했다. 아마 아서를 오래 지켜본 측근이 있었다면 조금은 의심을 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서에겐 믿을 만한 측근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아서의 주변은 아서의 명보다 황제나 황후의 명을 우선시하는 이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그나마 아서가 가장 가까이했던 부관 에드윈조차 황후의 끄나풀 중 하나였다.
아서와 반대로 카를로스의 주변엔 그의 말 한마디면 기꺼이 목숨을 던질 충성스러운 자들이 가득했다. 아서의 눈앞에 서 있는 마법사 역시 그중 하나였다.
아서가 한쪽 입꼬리만 비스듬히 끌어 올린 채로 입을 열었다.
“…이걸 반갑다고 해야 하나.”
그가 삐딱한 태도로 인사를 건네자 마법사의 얼굴 위로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법사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제가 좀 전 건넸던 인사말을 똑같이 내뱉었다.
“그…. 처음 뵙겠습니다, 아서 전하. 저는 하이브라고 하옵니다.”
“반갑네, 하이브. 그대와 내가 초면이던가?”
“…예, 먼발치에선 본 적이 있지만 인사를 나눈 적은 없사옵니다.”
“그렇군. 우선 앉지.”
웃어 보인 아서가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법사도 뒤따라 엉거주춤하게 맞은편 카우치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동안 공이 나의 빈자리를 채웠다 들었어.”
어딘가 뼈가 실린 말에 마법사가 순간 움찔 등을 움츠렸다. 그가 우물쭈물하다 답했다.
“…예, 일단은 그렇사옵니다.”
마법사는 아서의 기분을 살피려 눈을 들었지만 깊이 쓴 후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린 듯 곧은 콧대와 매끄럽게 올라간 붉은 입술이 그가 볼 수 있는 전부였다.
두꺼운 천에 가려진 눈이 그를 당장 죽일 것처럼 내려다보고 있을까 봐, 하이브가 내심 식은땀을 흘렸다. 황태자의 빈자리를 채우다 못해 그의 죽음까지 위장하려 했던 마법사로선 여러모로 찔리는 바가 많았다.
황태자를 본다 해도 카를로스 전하와 함께할 거라 생각했지, 이렇게 독대를 하게 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하이브에겐 숨이 막히도록 불편한 자리였다. 마치 그가 이전 날 전쟁터에서 죽였던 이가 멀쩡하게 살아 돌아온 걸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대. 언제까지 그 모습을 하고 있을 건가? 내 얼굴을 코앞에서 보고 있는 게 썩 기분 좋진 않은데.”
마법사가 입을 꾹 다문 채 눈치만 살피고 있자 기다리다 못한 아서가 먼저 말을 건넸다. 저렇게 소심한 성격으로 어찌 황태자 노릇을 하였는지 의문이었다. 인격이 두 개라도 되는 건가.
“아, 송구하옵니다. 이러고 있는 것이 몸에 익어 버린 나머지….”
못마땅하다는 듯이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마법사는 곧바로 목에 걸려 있던 아티팩트를 벗었다.
수십 일 동안 위장을 하고 있어야 했던 탓에 그는 아예 마법 수식을 새긴 아티팩트를 만들어 목에 걸어 두고 있었다. 대상자의 머리카락과 같은 신체 일부를 첨가하기만 하면 하루 동안 원하는 대상의 모습으로 위장을 할 수 있는 마도구였다.
“그건 마도구인가 보군.”
“예, 그렇사옵니다.”
꺼내든 아티팩트를 품에 넣은 하이브가 예의 바르게 답했다. 그가 아티팩트를 벗은 것과 동시에 모습을 바꾸고 있던 폴리모프 마법이 풀렸다. 머리끝부터 스르륵 모습이 바뀌는 것을 아서가 흥미롭게 관찰했다.
잠시 후 맞은편에 나타난 건 구불구불한 연갈색 머리에 새까만 눈을 지닌, 강아지처럼 순한 인상을 지닌 사내였다.
마법사답지 않게 제법 좋은 체격을 지녔으나 은근히 처진 눈꼬리 탓에 어딘지 모르게 만만한 인상을 풍겼다.
“하이브라고 했던가?”
“예, 전하.”
답하는 목소리가 공손했다. 카를로스에게 속해 있는 인물이면 마땅히 드러내야 할 적개심이 없는 건 이전의 아서가 부렸던 패악을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이브. 소설 후반부 즈음 꽤 비중 있게 등장했던 조연 중 하나로, 소심하지만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마법사였다.
좀 만만한 인상인 게 흠이었으나 비중 있던 인물답게 준수한 외모를 지녔다. 현재의 젊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아서보다 연장자인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정신 연령은 본래의 나이보다 훨씬 아래인 걸로 보였다.
장사꾼 뺨칠 만큼 잇속에 밝은 마법사가 있는가 하면, 하이브처럼 외부와 단절되어 마법 연구에만 치중하다 똑똑한 바보가 된 케이스도 있었다.
순진한데 능력만 좋아 여기저기 이용당하다가, 카를로스에게 구제받은 마법사.
하이브의 정체를 알아낸 아서는 다소 여유로워졌다. 카우치에 느긋하게 등을 기댄 아서가 순해 보이는 새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인사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무얼 하면 되지?”
“아, 그…. 이대로 앉아 계시면 제가 전이 마법을 펼치겠습니다. 구속구를 차고 계신 터라 기억을 옮기는 데에 큰 문제는 없으리라 사료되옵니다. 눈은 감고 계신 편이 좋겠습니다.”
“그러지.”
기억 전이는 상대의 의식 속에 강제로 기억을 새기는 일종의 세뇌 마법이었는데, 섬세한 컨트롤이 요구되는 만큼 저항력이 높은 마스터에겐 사용할 수 없었다. 아서가 굳이 구속구를 차고 마법사를 대면하고 있는 건 그 탓이었다.
아서가 긴장을 풀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준비됐으니 이대로 시작해.”
“예, 전하.”
그제야 하이브가 한결 편해진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조금 날카로운 면이 있을 뿐, 전해 들은 만큼 황태자가 그렇게까지 성격이 더럽진 않은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결코 호락호락해 보이지도 않았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마른침을 삼킨 마법사가 아서의 관자놀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후드를 들추었다가 괜히 아서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조심스럽게 손가락 끝만 집어넣었다.
“조금 어지러우실지도 모릅니다.”
“알겠어.”
아서는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겠습니다.”
마법사의 짧은 말을 신호탄으로 온갖 기억들이 아서의 머릿속으로 물밀듯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순간 메스껍게 치미는 현기증에 아서는 그만 앞으로 무너질 뻔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이 강제로 뇌리에 쑤셔 박히는 감각은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기억의 조각들은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아니라 마구 뒤섞인 형태로 밀려 들어왔다.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도 각오한 것 이상으로 어지러웠다. 눈앞이 소용돌이치듯 어지럽게 돌아 아서가 마법사의 팔을 붙들고 버텼다.
한동안 하이브를 붙들고 헐떡이던 아서는 한참이 지나서야 눈을 떴다. 눈두덩이에 맺혀 있던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마법사는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아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전하,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 우욱.”
눈을 뜨니 다시 메스꺼움이 몰려왔다. 아서는 입을 가린 채 헛구역질을 했다. 깊게 쓰고 있던 후드는 어느새 뒤로 넘어간 채였다.
흐릿하게 뜨인 눈이 가늘게 경련했다. 과장 한 점 없이 누군가 저를 거꾸로 들고 마구 흔들어 젖힌 것 같았다.
“…그, 송구합니다…. 이렇게까지 힘들어하실 줄은. 여러 번으로 나눠 전해 드릴 걸 그랬나 봅니다.”
잠시 넋이 나가 있던 마법사가 조심스레 지니고 있던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것을 휙 낚아챈 아서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쳤다.
카우치에 기대 한참 끙끙 앓은 후에야 겨우 사고할 정신이 돌아왔다. 죽는 줄 알았네. 두 번은 못 할 짓이었다.
아서는 코앞에서 동동거리는 마법사를 손을 저어 진정시키곤 찬찬히 전해 받은 기억을 살폈다. 수십 일간의 낯선 기억들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전해 받은 기억의 구 할은 직무에 관한 것이었다. 마법사는 황제가 반강제로 안겨 준 업무들을 힐다와 함께 처리했다. 호탕한 힐다와 소심한 하이브.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은 조합인데 꽤 사이가 좋아 보였다.
밀려오는 서류가 벅찼는지 단련 시간에도 힐다와 대련을 한다며 모두를 물린 채 서류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 웃겼다.
이 정도 기억이면 이후 업무를 이어서 처리하는 데엔 별문제가 없을 듯했다. 썩 기쁘진 않지만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다.
아서는 다음으론 황제에 관한 기억을 살펴보았다. 아서의 예상보다 마법사는 제법 그럴듯하게 아서 행세를 했다. 여러 번 황제와 대면했음에도 황제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황제는 아서를 황위에 올리는 데에만 관심이 있지, 아서 자체에 대해선 무관심했다. 가짜 아서를 알아보기는커녕 소처럼 일하는 모습을 보고 이제야 정신을 차렸다며 기뻐하는 것을 보니 조금 기가 차긴 했다.
내심 비소를 흘린 아서는 또 다음 기억으로 넘어갔다. 머릿속에 처음 보는 얼굴들이 자연스레 그려졌다.
맑은 날, 웬 어린애 둘이 아서의 맞은편에 앉아 티 타임을 보내고 있었다. 여자아이 하나와 남자아이 하나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목구비가 판에 박은 것처럼 똑같이 생겼다.
“…쌍둥이?”
아서가 한쪽 눈썹을 끌어 올리고 이게 뭔지 설명해 보라는 듯 마법사를 바라봤다.
기억 전이는 말 그대로 오감으로 느낀 사실만을 전해 줄 뿐이라, 그 외의 사정은 하이브가 직접 알려 주어야 했다.
“아, 전하. 그 아이들은….”
고민하듯 머뭇거리던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오나드 왕국에서 온 아이들입니다.”
“왕국에서 온 것이라면 볼모로 데려온 이들이 아닌가?”
“예, 그렇사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쌍둥이가 내 궁에 드나드는 거지?”
“아, 그것이….”
하이브는 어떻게든 아서의 심기를 상하게 하지 않으려 구구절절 설명을 덧붙였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그가 오나드 왕국에 있을 적부터 보아온 아이들이 타국에서 홀대받는 것이 안돼 보여 조금씩 챙겨 주다 보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남의 얼굴 거죽을 뒤집어쓰고 별걸 다 했다. 아서가 어린아이를 가여워하며 무언가 하나 더 챙겨 줄 성격이 아니라는 건 황태자궁의 일개 시종도 아는 사실이다. 이렇게까지 의심 살 짓을 했는데 가짜라는 게 안 걸린 것이 용했다.
하기야, 가짜라고 의심을 받을 거면 그 전에 사람이 달라진 척 생글생글 웃고 다닐 때부터 받았을 것이다.
삐딱하게 마법사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아서가 금세 납득하고 다시 카우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지레 찔린 마법사는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어린애들이 눈치 보며 다가오는 걸 거절할 수가 없어 그만…. 면구스럽습니다.”
“그래, 그런 것처럼 보이긴 하더군.”
“송구하옵니다.”
안 그래도 순해 빠진 얼굴이 시무룩해지자 꼭 비 맞은 강아지마냥 처량해 보였다. 제법 널찍하던 어깨가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저 꼴만 봐선 마치 아서가 아무 잘못 없는 선량한 사람을 붙잡고 괴롭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서는 굳이 마법사를 질책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 어이없긴 해도 납득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애초에 쌍둥이가 작정하고 접근한 것일 테니, 맹해 보이는 마법사가 쌍둥이를 냉정하게 쳐 내긴 힘이 들었을 것이다.
차후 쌍둥이의 정체가 밝혀진 후엔 아서가 무어라 말을 덧붙일 것도 없이 하이브가 스스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을 게 분명했다.
제 주군을 죽이러 온 암살자를 자기 손으로 보살펴 주었다고 말이다.
덧붙여 저 남매는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만큼 어리지도 않았다. 그들이 왕족의 핏줄인 건 맞으나 진짜 쌍둥이는 왕국에 붙잡혀 있었다.
아서는 제 앞에 멀뚱히 서 있는 하이브를 바라봤다. 맹해 보이는 것이 아무리 봐도 한입에 홀랑 삼킬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저렇게 만만해 보여도 마법사는 마법사다. 혼자서 보통 사람 수십 명 몫을 하는 게 가능할 터였다.
마법이란 불가능할 것 같던 일도 쉬이 구현해 내곤 했으니, 하이브처럼 쓸 만한 마법사에게 은혜를 베풀어 두어서 나쁠 건 없어 보였다.
잠깐 사이 딴 속셈을 품은 아서가 마법사를 끌어다가 제 옆에 앉혔다.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야. 화를 내는 게 아니니 그렇게 눈치 볼 것 없어, 하이브 공.”
“그, 그러셨군요….”
아서가 온화하게 웃어 보이자 마법사는 영문을 모르고 얼떨결에 따라 웃었다.
“그대의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야. 어릴 때부터 보아 온 아이들이지 않나. 적잖게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지.”
“예, 그렇사옵니다….”
“원한다면 쌍둥이를 대신 보살펴 줄 순 있어. 그대가 했던 것처럼 말이야.”
“정말이십니까?”
마법사가 화색을 띠며 물었다.
“물론이야. 어린 나이에 볼모로 끌려온 것이 가엾지 않은가.”
“정말 감사드립니다…! 오나드 왕국 출신인 제가 나섰다간 공연히 의심을 살 것이 분명하온지라….”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구구절절 길어지려는 마법사의 말을 아서가 끊었다. 그래도 완전히 바보는 아닌지 조건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 마법사의 까만 눈동자 위로 희미한 경계심이 떠올랐다.
“…조건이라면 어떤 조건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차후에 내 부탁 하나를 들어줬으면 하네.”
“어떤 부탁을 말씀하시는지….”
마법사가 우물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아서는 이전의 거만하던 눈빛을 지우고 얼굴 가득 선량한 미소를 그렸다.
“걱정 말아. 칼에게 해가 되는 일은 결코 아니니까.”
부탁이라고 해 봤자 귀찮은 일을 대신 해 달라는 정도였다. 저 대신 제 빈자리를 채워 달라든가, 피곤한 공식 석상에 대신 참여해 달라든가.
그러나 그리 설명을 해도 마법사의 눈 위로 떠오른 경계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대가 원한다면 맹세를 바칠 수도 있어.”
어깨를 으쓱한 아서가 생각해 두었던 말을 덧붙였다. 마나의 맹세는 자신의 마나를 담보로 맹세를 바치는 것인데, 이후 제 입으로 내뱉을 말을 지키지 못하면 지니고 있던 마나를 모조리 잃게 된다. 목숨을 잃진 않지만 기사나 마법사에게는 숨이 끊기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로 여겨졌다.
마나의 맹세까지 언급하니 그제서야 마법사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좋아.”
혹 마법사가 생각을 바꿀세라 아서가 냉큼 대답했다.
“나는 쌍둥이를 보호해 주고, 그대는 내 소소한 부탁 하나를 들어주는 걸로. 어떤가.”
“…알겠습니다. 대신, 카를로스 전하를 포함해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라면 제 맹세는 곧장 무효로 돌아갈 것입니다.”
마법사가 날카로운 어조로 내뱉었지만 그래 봤자 여전히 덩치만 큰 강아지가 겁을 먹고 짖어 대는 것처럼 보였다.
“맹세하지.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일이야.”
마법사와 시선을 마주한 아서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이번만큼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였다. 일을 떠맡길 사람이 생긴 것만으로도 마음이 잔잔한 호수처럼 너그러워졌다. 언제든 쓸 수 있는 여분의 휴가를 얻어 낸 것 같았다.
아서는 선뜻 앞으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였다. 잠시 고민하던 하이브가 마주 손을 잡자, 아서도 그의 손을 붙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
간만에 찾은 황태자궁은 여전히 삭막했다. 카를로스가 그간 허투루 일을 한 것은 아닌 듯 이젠 대놓고 곳곳에 카를로스의 인사들이 심어져 있는 게 보였다.
침실로 들어선 아서는 모든 시종을 물리고 침상 위에 몸을 눕혔다. 역시 황성은 마음 편히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불손한 눈초리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이 피로했다.
집으로 돌아왔다는 반가움을 느끼기는커녕 어서 빨리 쉬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저, 전하….”
아서가 황태자궁에 들어서면서부터 뒤를 졸졸 따라오던 부관 에드윈이 침실 입구에 어정쩡하게 서서 우물거렸다.
“송구하옵니다만 아직 처리하셔야 할 업무가 남아 있사온데….”
“피곤해. 눈을 좀 붙여야겠으니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록.”
“그렇지만 전하께서 분명 오늘 밤까지 처리해 주겠다고 하셨던 터라….”
“내가 그랬던가? …아아, 그랬네. 당장 결재가 시급한 일은 아니니 그건 내일로 미루고, 우선 나가 봐.”
아서의 축객령에 에드윈은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아침만 해도 쉼 없이 일을 하던 상전이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니 그로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서는 멀거니 누워서 카를로스가 오기만을 기다리다 꾸벅 잠이 들었다. 입구에서 미적거리던 에드윈도 곧 포기하고 침실 문을 조용히 닫고 나갔다.
이후 아서가 눈을 뜬 건 동이 틀 무렵이었다. 창을 가린 얇은 천을 뚫고 희끄무레한 빛이 스며들었다. 일찍 눈을 감았던 탓인지 바깥은 이제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새벽 특유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 아서는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대체 얼마나 누워 있던 건지 모르겠다.
황성으로 와 한 일이라곤 마법사를 만나 기억을 전해 받은 것뿐이었건만 온몸이 무거웠다. 정신적 피로가 육신으로까지 전염된 것만 같았다. 침상에 몸을 뉘자마자 기절하듯 잠이 든 것도 그와 연관이 있을 터였다.
뒤편에서 옅은 숨소리가 들렸다. 아서는 굳이 뒤돌아 인기척의 주인을 확인하지 않았다. 저를 끌어안고 있는 게 누구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무거운 근육으로 짜여진 팔다리가 아서를 칭칭 휘어 감고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과하게 몸이 무겁나 했더니 전부 카를로스 때문이었다. 덕분에 피로가 한층 더 배가되는 듯했다.
평소라면 아서가 뒤척이자마자 깨어났을 카를로스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의식이 전혀 없는 건 아닐 텐데 딱히 일어날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카를로스, 무거워.”
이렇게 온몸을 꽁꽁 감싸고 있을 거면 구속구라도 빼 줘야 하는 거 아니냐며, 아서가 소리 없이 투덜거렸다.
다행히 평상시 아서는 카를로스가 제 몸을 꽉 붙잡고 있거나, 갑갑할 정도로 끌고 안고 있는 것을 좋아했다. 다만 자다 깨서 몸을 움직이고 싶은데 붙들려 있는 건 좀 귀찮았다.
아서가 고개를 꺾어 카를로스의 잠든 얼굴을 바라봤다. 목이 조금 아팠지만 고요히 눈을 감고 있는 카를로스의 모습에 아픈 것도 잊고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칼, 일어나 봐.”
아무런 반응도 없이 눈을 감고 있던 카를로스는 아서가 그의 애칭을 부르자 그제서야 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반쯤 뜨인 눈동자에 가시지 않은 잠기운이 매달려 있었다.
“아직 잠이 덜 깼나 보네.”
아서는 저를 안고 있는 팔이 느슨해진 틈을 타 몸을 틀었다. 그가 검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말했다.
“졸리면 더 자.”
“…형님.”
“마저 자. 팔이 무거워서 잠깐 떨어트려 놓으려 한 거니까.”
말을 마친 아서가 허리에 감겨 있던 팔을 자연스럽게 걷어 냈다. 평소였으면 밀어내는 즉시 끌어당겼을 카를로스는 아서가 제 팔을 치워 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무겁다고….”
카를로스는 느지막이 답을 했다. 갓 잠에서 깨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어딘가 꿈을 꾸듯 몽롱했다.
“…그러면 형님이 나를 안고 있으면 되잖아요.”
묘하게 칭얼거리듯 말한 카를로스가 아서의 팔을 끌어다가 제 허리에 감았다. 아서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웃음을 참다 못 이긴 척 한 팔로 카를로스의 허리를 끌어안으니, 카를로스가 아서의 이마에 제 뺨을 붙이고 눈을 감았다.
하나 그도 잠시, 감겨 있던 눈꺼풀이 스르륵 올라갔다.
깜빡, 깜빡. 두 눈이 감겼다 뜨였다.
“…….”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는지 카를로스가 작은 탄식을 흘렸다.
좀 전보다 확연히 또렷해진 눈동자 속에 아서의 모습이 담겼다. 아서를 바라보는 시선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아무래도 그가 의도하고 어리광을 부린 건 아닌 듯했다.
잠깐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하는가 싶던 카를로스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언제 당황하였냐는 듯 평소 같은 모습으로 아서에게 말했다.
“…마법사를 만나고 오면 구속구를 풀어 드리기로 약조하였지요. 손 이리로 주세요.”
카를로스의 말에 아서는 그를 관찰하던 것도 멈추고 냉큼 손을 내밀었다.
카를로스가 침대 옆 탁상 서랍에서 열쇠가 걸린 얇은 체인 목걸이를 꺼냈다. 아서의 눈동자가 열쇠를 든 손을 따라 움직였다. 반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될 순간이 찾아왔다.
곧이어 열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묵직하던 손목이 가벼워지고, 아서의 얼굴빛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구속구가 풀리자마자 억류되어 있던 마나가 전신을 휘감으며 차오르기 시작했다. 저릿저릿한 감각이 살갗 아래를 간지럽혔다. 아서는 긴 숨을 내뱉었다. 두 번째로 겪는 것이지만 강탈당했던 것을 되돌려받을 때의 고무감은 다르지 않았다.
형제가 저에게 달려들지 않을지 주시하고 있던 카를로스가 이내 아서의 팔목을 잡고 제게로 끌어당겼다.
“몸이 전과 같지는 않을 겁니다. 당분간은 몸 상태를 회복하는 데에 집중하세요.”
“…알겠어.”
“형님의 호위로는 가브리엘을 붙일 생각입니다. 썩 내키진 않지만…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겠지요.”
구속구를 제거한 아서를 제압할 수 있으면서도, 아서와 별다른 충돌 없이 무난하게 지낼 수 있는 자가 현재로선 가브리엘이 유일했다. 카를로스는 원치 않는 결정을 하는 상황이 못마땅했으나 반려식을 치르기 전까지는 이를 감수할 생각이었다.
“다른 헛짓거리는 꿈꾸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형님의 손 아래 여러 목숨이 달려 있지 않습니까.”
“알고 있어.”
카를로스의 경고에 아서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해가 뜨려면 좀 더 남았지만 보아하니 형님께선 이미 잠이 다 깨 버리신 모양이군요.”
“…어제 잠자리에 일찍 들었으니까.”
아서가 뻐근한 몸을 주무르면서 카를로스 쪽을 쳐다보았다.
“나는 지금 바로 연무장으로 가려고. 너는?”
“그럼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그래. 지금은 바쁘지 않나 봐?”
“예, 오늘은 꽤 여유로운 편이네요.”
형제의 대화는 적당히 평온하게 이어졌다. 침상에서 일어난 아서가 의복을 벗어 내는 동안 카를로스는 그런 아서를 관찰했다. 작은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한 시선이었다.
아서의 움직임을 뒤쫓던 카를로스가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무장에서 볼일이 끝나면 가야 할 곳이 있으니, 그리 알아 두세요.”
“…가야 할 곳?”
아서가 의아하게 물었다. 예, 하고 답한 카를로스는 그곳이 어디인지 말은 않고 침대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그가 자연스레 아서의 등 뒤에 바짝 붙어 허리를 끌어안았다.
“…가야 할 데가 있다며. 마저 말해.”
복근 위를 배회하던 손이 상의를 들추고 맨살을 더듬기 시작했으나, 이미 이런 종류의 희롱에 익숙한 아서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황제에게 가 봐야지 않겠습니까.”
아서를 끌어안다시피 붙어 있던 카를로스가 툭 내뱉듯 답했다.
“…폐하께는 무슨 연유로.”
“형님께서 직접 황제에게 태자위를 내려놓겠다 말씀하세요.”
“…….”
“황제를 끌어내리기에 앞서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저와 달리 형님께선 황제에게 품은 정이 깊으실 테니….”
무심한 어조로 이어지는 말을 아서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기회를 주는 것이라며, 배려를 해 주는 척 그럴싸하게 포장된 협박에 아서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가 저택에 감금되어 있던 기간 동안 카를로스는 황권 교체를 위한 준비를 철저히 끝마쳤을 터였다. 아서를 황성으로 데려온 게 그 방증이었다. 이제 와 아서가 어떤 발악을 한들 아무 소용도 없는 상황에서 저 ‘기회’란 건 현 상황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그러니까 저건 기회라기보단 차라리 경고 내지 회유라고 일컬어야 옳았다.
당신이 황제와 황후를 중히 여기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들의 안위가 우려된다면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경고. 또한 아서가 먼저 자존심을 내려놓고 몸을 숙인다면 그들을 관대히 처리해 주겠다는 회유.
이를테면 그간은 아서를 채찍으로 내려치기만 했다면 이제는 조금씩 단 설탕을 내어주는 것이었다. 아서가 자존심을 굽히고 들어갔을 때 이끌어 낼 수 있는 바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보다 자발적으로 카를로스를 따르도록.
“미리 말씀드리지만, 제가 드릴 수 있는 기회는 여기까지입니다. 황제가 비참한 꼴로 끌려 내려오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최선을 다하는 게 좋을 겁니다.”
아서는 입을 꾹 다문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평소였으면 대답을 하라고 강요했을 카를로스는 이번만큼은 말없이 넘어가 주었다.
아서의 얼굴빛이 조금씩 흐릿해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에게 직접 제 굴종을 알려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귀찮기 짝이 없었다. 그 까다로운 비위를 어찌 맞추어야 할지 벌써부터 피로한 기분이 들었다.
기실 황제가 폐위되는 건 시간상의 문제일 뿐 결국엔 그렇게 되도록 예정된 일이다. 황제에게 남은 선택지는 조금이나마 체면을 차리며 제 발로 걸어 내려올 것인지, 타의로 질질 끌려 내려올 것인지 그 두 가지 중 하나였다.
본래 원작의 황제는 제 발로 권좌에서 물러나 황관을 내려놓았다. 원작에선 그의 후계였던 아서가 반역죄로 목숨을 잃고, 황후의 세력마저도 전부 무너졌다. 카를로스를 따르는 세력이 황제 측을 압도한 상황에서 굳이 고집부려 승산이 없는 전쟁에 발을 담글 만큼 황제는 아둔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좀 경우가 달랐다. 뒤 사정이야 어떻든 아서와 황후 세력 대부분이 건재했다. 황제는 쉽사리 물러나려 들지 않을 터였다.
아서는 황제를 사랑하는 자식의 역할에 걸맞게, 가능한 한 그의 마음을 돌려 보려 애써 보기야 할 것이다. 과연 아서가 애를 쓴다고 황제에게 씨알이나 먹힐지 의문이지만 말이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부터 아서는 황제에게 짐승 다루듯이 길들여졌다. 카를로스와의 대련에 패배한 날을 계기로 체벌을 가장한 폭력까지 수시로 자행되기 시작했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기 이전의 아서는 황제를 제 친아버지처럼 생각하며 무조건적으로 따랐었다. 그러나 자아가 뚜렷해진 지금은 황제가 어린 자신을 학대한 장본인임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친모인 황후에겐 미미한 애증이나마 품고 있지만, 저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황제에겐 일말의 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그간 황제의 친자식인 척 그를 기만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 황제의 목숨 정도는 보전하게 해 줄 의향이 있었다.
그 외에 핍박하던 자식에게 황좌를 강탈당하는 거야 자업자득으로, 아서가 알 바는 아니었다.
***
근래 황제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극소수의 측근만을 옆에 둔 채 서서히 고립되고 있는 중이었다. 이쯤 되었으면 황제도 황성 곳곳에 심어 둔 눈을 통해 황후와 오를레앙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차렸을 터였다.
물론 수상쩍은 기미를 눈치챘을 뿐 황후 일파가 카를로스에게 완전히 몸을 굽히고 들어갔다는 사실까진 알아내지 못한 듯했다. 아서의 알현 요청이 쉬이 받아들여진 걸 보면 그러했다.
“지고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지고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알현실로 들어선 형제가 황제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간만에 마주한 황제는 여전히 정정한 모습이었다. 딱히 경지에 오른 기사도 아니건만 그 홀로 다른 이들에 비해 특출날 정도로 노화가 느리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황족의 혈통엔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용의 피가 섞여 있다고들 하는데, 과연 황제를 보면 그 말이 전혀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황제를 차치하고 당장 이 자리에 있는 카를로스만 해도 이종족과 혼혈인 아서보다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어서 오거라.”
손을 저어 두 형제의 인사를 물린 황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온화하게 휘어진 눈매가 곰살궂어 보였다.
늘 그러했던 것처럼 황제는 카를로스가 있는 자리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카를로스도 황제와 말을 섞을 마음이 전무한 듯 아서의 한 걸음 뒤에 서서 흘러가는 상황을 관망했다.
“근래 짐의 두 아들이 퍽 사이가 좋아진 모양이구나. 두 황자가 나란히 걸어 들어오는 걸 보니 감개가 무량하군.”
“황송하옵니다, 폐하.”
황제는 웃고 있으나 아서를 내려다보는 눈동자엔 얼핏 냉기가 흘렀다. 진심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황제의 말에 아서도 별 감흥 없는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헌데, 태자. 짐이 모르는 사이 태자를 꽤나 서운하게 한 적이 있었나 보군.”
그때 아서의 건조한 표정을 보았는지 황제가 짐짓 안타까운 투로 말했다. 아서는 황급히 황제의 오해를 부정했다.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폐하.”
“허면 이전처럼 아바마마라고 불러 주지 않겠느냐?”
“…그건, 폐하께서 허해 주신다면 그리하겠사옵니다.”
아서는 무표정한 얼굴이 실은 긴장한 탓이었던 것처럼 주먹을 말아쥐었다. 황제가 소리 없이 웃음을 머금었다.
“보아하니 태자가 오늘 무언가 단단히 각오를 하고 온 듯하군.”
“…예, 그렇사옵니다.”
“그리 긴장할 것 없다. 내 태자의 청이라면 무엇이든 흔쾌히 들어줄 요량이니. 편히 말해 보거라.”
“황송하옵니다.”
황제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아서에게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차마 그 미소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척, 아서가 황제의 발치로 시선을 옮겼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면구하옵니다만.”
아서는 평온하게 말을 이어 가려 했으나 떨리는 말끝에서 그의 긴장이 여실히 드러났다. 아서의 얼굴이 꼭 혼나기 직전 아이의 그것처럼 기가 죽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한구석에서 조용히 서 있던 카를로스가 한쪽 눈썹을 끌어 올렸다. 카를로스에게 협박을 당할 때도 아서는 저런 약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황제가 아서를 애지중지하는 줄로만 알았건만, 잘못을 저지르면 엄하게 꾸짖기도 했던 모양이다.
잔뜩 풀이 죽은 수려한 낯에 카를로스는 무심코 웃음을 흘릴 뻔했다. 저보다 오 년은 일찍 성인이 된 형제가 고작 아비에게 혼이 날까 두려워하는 걸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생각만 같아선 이대로 당장 어디로든 끌고 가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는 어서 이 지루한 자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오늘, 다름이 아니오라….”
망설이며 말끝을 흐렸던 아서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소자에게 더 이상 황위에 오를 의지가 없음을 말씀드리고자 이렇게 알현을 청하였습니다.”
숨 한 번 쉬지 않고 빠르게 말을 뱉어낸 아서가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전혀 예상치 못했을 말에 심기가 흐트러질 법도 한데, 황제는 부자연스러워 보일 만큼 좀 전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서에게 빙그레 웃어 보인 황제가 말했다.
“좀 더 자세한 사정을 들어 봐야겠구나.”
“송구합니다. 그저 소자가 카를로스에 비해 모자란 자질을 지닌 것을 이제야 받아들이게 되었을 뿐입니다.”
“…흐음.”
“폐하, 저는 더 이상 황위가 탐이 나지 않습니다. 감히 황좌를 탐내려 들었던 과거가 수치스럽고 부끄러울 따름이옵니다. 어떤 말씀을 하시더라도 모두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부디 이런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말을 마친 아서가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이 자리에 카를로스가 없었더라면 필시 아서를 제 발아래 무릎 꿇렸을 황제는 카를로스의 존재를 의식한 듯, 황좌에 턱을 괴어 앉은 채 가만히 아서를 바라보기만 했다.
무거운 정적이 그들을 에워쌌다. 잠깐의 침묵 후 황제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태자. 전부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예, 폐하.”
“정말이지… 믿고 싶지 않은 상황이로군.”
“…송구하옵니다.”
“짐이 인정한 유일한 후계가 제 발로 짐이 내려 준 성은을 걷어차는구나.”
황제가 턱을 괸 손으로 제 뺨을 톡톡 두드리며 웃었다. 줄곧 아서에게로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그의 또 다른 아들, 카를로스에게로 옮겨 갔다. 동일한 빛깔을 지닌 눈동자 두 쌍이 찰나 서로를 마주 보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재주도 좋아. 대체 무슨 재주를 부렸기에 태자를 이리 말 잘 듣는 개로 만들어 놓았을까….”
“…송구하옵니다, 폐하.”
말 잘 듣는 개라는, 저를 일컫는 모욕적인 표현에도 아서는 면목이 없다는 듯이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그래…. 본인이 싫다 사양하는 걸 억지로 손에 쥐여 줄 순 없는 법이지. 태자의 뜻이 어떠한지는 알겠다.”
잠시 허망하게 웃음 짓던 황제는 의외로 선선히 수긍을 했다.
“아르디.”
태자라는 칭호가 아닌 그간 아서조차도 잊고 있던 오래전 애칭으로 황제가 아서를 불렀다. 아서가 태자위를 내려놓겠다 선언한 것을 당장 표면적으로는 존중해 주겠단 의미였다.
“속이 상하는군. 네게 걸었던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크다는 걸 알 테지.”
“…예, 알고 있습니다. 송구하옵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황자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을 것 같구나.”
“…….”
일순간 아서의 표정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 순간을 황제와 카를로스 두 부자가 동시에 목격했다. 그를 본 황제는 만족스럽게 웃었고 카를로스는 눈매를 구겼다. 황제가 손을 내저어 형제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다른 용무가 없다면 이만 물러나 보거라.”
“…예.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아바마마. 다시 뵙는 날까지 몸 성히 보존하시옵소서.”
“가 보겠습니다, 폐하.”
아서와 달리 카를로스는 무성의하게 들릴 만큼 건성으로 인사를 건넨 뒤 아서의 손을 잡아끌었다. 붙잡힌 손을 뿌리치지 않고 잠자코 따라가는 아서의 모습에, 황제가 비스듬히 기대 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이내 알현실의 문이 쿵, 둔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황제는 두 형제가 사라지고 나서도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그 자리에서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가면처럼 그려져 있던 미소는 종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필립.”
“예, 폐하.”
황제의 부름에 그의 뒤를 지키고 있던 기사가 고개를 숙여 답했다.
“델라 공작에게 당장 전해라. 이전 보류했던 건을 받아들이겠다고.”
“예. 그리하겠습니다.”
“…태자도 이제는 제 짝을 찾을 때가 되었지.”
느슨히 황좌에 기대앉은 황제가 중얼거렸다. 보는 눈이 사라지고 나서야 황제의 눈매가 서서히 분노로 일그러졌다. 닫힌 문을 노려보는 시선이 서릿발 같았다. 오를레앙가를 필두로 한 황후 측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지금, 태자까지 속을 썩이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황제는 애써 끓어오르는 화를 식혔다. 최근 태자가 게으름 부리는 못된 버릇을 고친 듯해 크게 기뻐하였건만, 난데없이 태자위를 내려놓겠다 하니 기가 차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족으로서 하자가 있는 것을 그 자질을 높게 사 태자위까지 손에 쥐여 주었다. 그 모든 은혜를 잊고 이제 와 제 발등을 내려찍으려 드는 행태가 괘씸했다. 제가 카를로스에 비해 부족한 것을 알면 어떻게든 따라잡을 방도를 찾아야 할 게 아닌가.
때마침 다행으로 델라 공작이 제 자식 중 하나를 내세워 태자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참이었다. 황제는 보류되었던 공작가와의 혼사를 진행시키고자 마음먹었다.
그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과거 아서가 예비 약혼자를 겁박하여 파혼하게 만든 사실을 감안했을 때, 아서의 혼사엔 처음부터 끝까지 황제의 간여가 반드시 필요했다.
국혼은 여러 성가신 절차가 뒤따르고 오랜 기간이 소요된다. 이참에 황제는 발 뺄 구석을 만들지 못하도록 황제의 입회하에 초야부터 치르는 것도 고려해 볼 작정이었다. 태자가 제아무리 색사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낸들 황제의 명까지 끝끝내 거부하진 못할 테니 말이다.
***
황태자궁의 침실. 문이 닫히자마자 달려드는 카를로스 탓에 아서가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구속구를 제거하였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꼴사납게 뒤로 넘어졌을지도 몰랐다.
“읏.”
뒷머리를 붙잡힌 채 고개가 꺾이자 자연히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것이 카를로스를 건드리는 기폭제가 되었는지 곧바로 침실 문에 등이 부딪혔다.
놀라 벌어진 잇새로 카를로스의 혀가 난폭하게 비집고 들어왔다. 전조도 없이 깊이 파고든 살덩이는 아서의 혀를 진득이 빨아들이고, 입천장을 농밀하게 훑어 내렸다.
“잠, 읍…!”
숨 쉴 틈도 없이 몰아붙이는 입맞춤은 갈급하기까지 했다. 난잡한 소리가 새어 나오도록 정신없이 혀를 섞으며 카를로스가 제 허벅지로 아서의 고간을 꾸욱 짓눌렀다.
“…아…!”
배려라곤 없는 움직임에도 몸은 착실히 반응했다. 아서는 침실 문 건너편에 서 있을 기사들을 의식해 애써 신음을 삼켰다. 두꺼운 문이 어느 정도 소리를 차단해 준다 해도 요란스러운 소음까지 감출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아, 형님. 뒤돌아요.”
“왜….”
“어서.”
“…….”
입술을 사리문 아서가 천천히 뒤돌아 등을 보였다. 그가 뒤돌기 무섭게 카를로스의 손이 상의를 들추고 들어왔다.
“갑자기…. 읏…!”
“입 다물고 얌전히 있어요.”
아서가 고개를 돌리려 들자 커다란 손이 뒷머리를 지그시 짓눌렀다. 어떤 말도 들을 생각이 없다는 의사 표시에 아서는 입술만 짓씹을 수밖에 없었다.
카를로스가 양손으로 아서의 가슴살을 쥐고 난잡하게 주물렀다. 젖꼭지가 툭 불거지게 양쪽 가슴을 모아 쥐고 보란 듯이 가지고 놀았다. 가슴이 희롱당할 때마다 못 견디게 수치스러워하는 아서를 알고서 부러 그리하는 것이었다.
연한 목덜미에 자국이 남도록 세게 빨아들인 그가 손을 내려 아서의 몸을 더듬었다. 제대로 된 단련을 못 한 지 꽤 되었음에도 여전히 탄력 있는 근육이 붙은 몸이었다.
골반 주위를 더듬던 손이 단숨에 고간까지 내려갔다. 얇은 천 아래 성기가 이미 반쯤 일어선 것을 확인한 카를로스가 웃음을 흘렸다.
“늘 저를 탓하시더니, 정작 내내 발정이 난 건 형님이셨군요.”
아서가 흠칫 떨며 몸을 뒤로 물렸지만, 카를로스와 문 사이에 갇힌 처지라 어찌하든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의 안으로 불쑥 비집고 들어온 손이 살 기둥을 움켜쥐었다. 위아래로 몇 차례 훑으니 심지가 곧바로 단단해졌다.
“보세요. 형님이 보기에도 그러하지 않습니까?”
수치심에 입술을 꽉 깨문 아서가 수 초간 바닥만 쳐다보다 이윽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싫다’는 소리를 하지 않을 것. 하는 말엔 무조건 고개를 끄덕일 것. 묻는 말엔 반드시 답을 할 것. 다분히 굴욕적이었으나 전부 아서가 지켜야 할 약속들이었다.
엉덩이 사이로 카를로스의 성기가 비벼졌다. 아서에게 발정이 났다 조롱한 것이 무색하게 그의 것 역시 완전히 발기해 있었다.
침실 문을 짚고 있던 아서의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구속구가 채워져 있을 땐 무기력한 기분이 들고 말았던 것이 이제는 조금 달랐다.
새하얘진 손끝이 화풀이하듯 두꺼운 문을 으스러트리며 파고들었다. 아서의 손끝에서 부서지는 덩어리들을 바라본 카를로스가 좀 전부터 곱씹고 있던 말을 내뱉었다.
“…말 잘 듣는 개.”
“…….”
“황제가 형님을 그리 칭하지 않았습니까.”
과연 좀 전 아서는 카를로스의 눈에도 잘 길들여진 개처럼 보였다.
잘 길들여진 개라, 그 말 자체는 썩 나쁘지 않다. 단지 그 개의 주인이 카를로스가 아니라 황제처럼 보였던 게 지독히 거슬렸을 뿐.
좀 전의 불유쾌한 광경을 떠올리니 본능적으로 스멀스멀 경계심이 차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가 그리 말하였을 적엔 얌전히 있던 아서는 제 형제가 같은 말을 입에 담으니 곧바로 손등 위로 핏대를 세운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으시기에 그 호칭이 마음에 드신 줄로만 알았는데….”
카를로스는 성마른 손길로 아서의 성기를 장난감처럼 주물렀다. 반대쪽 손으로는 가슴을 만지작거리며 튀어나온 돌기를 빙글 돌렸다. 익숙한 자극에 아서가 몸을 떨며 반응했다.
“으….”
“아니었습니까?”
문에 이마를 기댄 아서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썩 신빙성 있어 보이는 대답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럼 왜 가만히 듣고만 계셨을까.”
“…그건.”
아서가 미처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벗겨진 하의가 발밑으로 맥없이 툭 추락했다. 끌어 내려진 속옷 위로 튕겨 나온 성기를 카를로스는 익숙하게 제 것처럼 움켜쥐었다.
단정히 여며져 있던 상의 역시 풀어 헤쳐졌다. 드러난 틈으로 카를로스의 손이 비집고 들어갔다.
뼈마디가 불거진 손이 답을 재촉하듯 가슴을 꽈악, 움켜쥔다. 아서는 그 수치스러운 광경을 무력하게 지켜보다 입을 달싹였다.
“…내가, 읏, 잘못을 했으니까.”
“형님께선 잘못한 게 있으면 무슨 말을 해도 멍청하게 듣고만 있나 봅니다.”
아서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황제 앞에서 더없이 순종적이던 아서를 상기한 카를로스가 비소를 지었다.
“그럼 나한텐 더더욱 고분고분하게 굴어야겠네.”
“아, 읏….”
카를로스는 양손으로 아서의 가슴을 쥐고 돌기를 돌리다가도 성기를 탁탁 쳐올리고, 그 아래 음낭을 주물럭거리는 등 강제로 성감을 고조시키는 손놀림을 이어 갔다. 그렇게 제 손안의 육체를 멋대로 희롱했다.
“안 그래요? 나를 죽이려 들었던 형님을, 이토록 손수 아껴 주고 있으니 말이에요.”
예민한 부위만을 끈질기게 건드리는 손길에 아서가 조금씩 움츠러들었다. 귓바퀴와 목덜미를 빨아들이는 자극이 더해지고 점차 아서에게서 가쁜 숨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 잠, 윽…!”
배려 없이 다그치듯 성기를 수음하는 것에 아서가 카를로스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잡았다. 온 힘을 다해 밀어내면 조금이나마 떼어 낼 수 있었을 테지만 아직까지 이성이 남아 있어 힘을 주어 잡는 것이 전부였다.
성기의 선단에서 흘러나온 미끈한 액이 마찰되어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카를로스는 끈적한 액체로 젖은 선단을 비비며 부러 마찰음을 유도하는 저열한 손장난을 이어 갔다.
그러다 얄궂게도 서서히 절정에 다다를 무렵, 아서의 성기를 훑던 손길을 멈추었다.
“내게도 잘못하였다 빌어 보세요, 형님.”
“…나는, 흣, 잘못한 게 없어. 네가 그리하라고 시켜서….”
“형님의 반려는 난데 엉뚱한 곳에서 배를 까 보이지 않았습니까?”
“무슨…!”
모욕적인 언사에 몸을 떨자 카를로스가 웃었다.
“하물며 형님께선, 나를 죽이려고도 하지 않았나. 이만하면 충분히 큰 죄를 지은 것 같은데.”
그가 찰나 아서의 목을 숨통이 조이도록 꽉 쥐었다가 놓았다. 순간적으로 스친 오싹한 감각에 아서가 등골을 움츠렸다.
“왜, 황제 앞에선 그리도 고분고분히 용서를 구하더니. 지금은 못 하겠습니까?”
“…….”
아서는 입을 달싹이며 망설였다. 황제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과 카를로스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것은 아서에겐 완전히 다른 영역의 일이었다.
아직까지 완전히 굽히지 못한 자존심이 목을 조여 와, 입을 뻐끔거려도 기어이 용서를 구하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시선은 바닥으로 향했다. 결국엔 입을 다문 아서가 끝끝내 침묵을 지키자 카를로스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형님은 항상 그러네요.”
미끄덩한 액을 묻힌 손이 아서의 엉덩이 살을 벌리고 들어갔다. 회음부를 더듬던 검지와 중지가 다물려 있던 주름을 가르고 안쪽을 눌러 대기 시작했다.
“그저, 잘못했다는 한마디면 될 것을.”
“…아, 윽…!”
“왜 부러 매를 버는지….”
손가락으로 안쪽을 무성의하게 쑤셔 대던 카를로스가 완전히 발기한 성기를 구멍에 가져다 댔다. 입구에 선단의 미끈거리는 액을 덧바르며 그가 주먹만 한 귀두를 꾸욱 밀어 넣었다.
“잠깐….”
놀란 눈을 한 아서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리 수차례 관계를 맺었다곤 해도 제대로 풀어 주지도 않고 욱여넣을 만한 크기가 아니었다.
뒷덜미에 뜨거운 숨이 닿았다. 훅 열이 오른 살갗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아, 아직……, 윽…!”
카를로스는 아서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거대한 뱀처럼 두껍고 긴 성기가 한계까지 늘어난 주름을 벌리며 내벽 깊숙이 밀고 들어갔다. 익숙하나 익숙하지 않은 아픔에 아서가 입을 벌린 채 헐떡였다. 온 장기를 짓누르며 밀려드는 압박감이 고통스러웠다.
성기를 반쯤 밀어 넣은 카를로스가 앞뒤로 천천히 추삽질을 했다. 살 기둥이 조금씩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성기가 절반 이상 들어갔을 때, 아서의 허리를 끌어안아 그 자리에 고정한 카를로스는 때려 박듯 전부를 쑤셔 넣었다.
“하윽…!”
쿵, 밀려 들어온 좆이 어딘가를 때리자 시야가 깜빡 점멸했다. 카를로스는 이미 어찌해야 아서를 절정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묵직하던 둔통은 허무하리만치 쉽게 쾌감으로 돌변해 전신을 내달렸다.
“아, 안….”
탁, 탁, 속도가 붙은 허리 짓은 순식간에 아서의 몸을 뒤흔들 만큼 빨라졌다.
눈앞이 어질했다. 핏줄이 징그럽게 일어난 검붉은 성기가 흰 둔부를 푹 가르고 번들거리는 모습을 드러내기를 반복했다. 묵직한 음낭이 둔부를 때리며 시끄러운 마찰음이 일었다.
“아으, 읏, 흐으….”
“그래. 여기, 쑤셔 주는 거, 좋아하잖아.”
아서의 몸이 앞뒤로 흔들렸다. 빠르게 차오르는 사정감에 소리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할 새도 없이 신음이 터져 나왔다.
두꺼운 성기가 내벽 안쪽을 사정없이 때려 박자, 이미 절정 직전까지 갔던 성기가 만지지 않아도 한계까지 팽팽하게 달아올랐다.
“아, 으윽, 아, 아…!”
거친 추삽질이 이어졌다. 두꺼운 성기가 푹푹 박혀 들 때마다 아서는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움칠움칠 휘었다.
“하아. 말해, 보세요, 형님.”
과격한 허리 짓을 이어 가며 카를로스가 명했다. 메마른 음성과 대조적으로 제 좆을 쑤셔 넣는 움직임은 야만스러울 만큼 난폭했다.
“아, 아! 흐윽…!”
“잘못, 했다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음욕으로 번들거리는 눈이 오로지 제 것이 드나드는 삽입부만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주먹을 쑤셔 박는 듯한 삽입은 색사라기보다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한 수컷끼리의 마운팅에 더 가까웠다.
살덩이끼리 치대는 소음은 점차 절정을 향해 갔다. 아서는 흐느끼듯 신음했다. 다른 모든 감각이 멀어지고 두꺼운 성기가 아래를 드나드는 감각만이 선명했다.
예민해진 몸은 주어지는 모든 자극을 쾌락으로 받아들여 울컥울컥 사정액을 토해 냈다. 아서가 흘려 낸 액이 마구 튕기며 침실 문을 더럽혔다.
“아, 으, 그만, 흐…!”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카를로스는 아서가 파정 중인 것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절정에 벌벌 떨리는 몸이 앞뒤로 미친 듯이 흔들렸다. 어지러운 시야에서 벗어나려 아서가 질끈 눈을 감았다.
“하윽…!”
불현듯 단단한 손이 머리채를 끌어당겼다.
고개가 강제로 돌아갔다. 두피를 당기는 고통이 쾌락에 잠식당해 있던 정신을 번쩍 끌어 올렸다.
“으, 읏….”
“형님.”
시선이 마주친다. 형님, 어서. 목을 긁어내리는 듯한 낮은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형형하게 빛나는 적안이 아서를 꿰뚫듯 응시했다. 음욕에 절여진 눈동자는 한편으론 소름이 돋을 만큼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 건조한 눈을 한 형제는 이미 아서의 굴종을 당연시하고 있었다.
“…….”
아서는 소리 없이 전율했다. 등허리를 타고 오르는 오싹한 쾌감에 전신이 가늘게 떨렸다.
축축이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흔들린다. 정사 도중 갑작스레 마주하게 된 얼굴은 무방비하고 볼품없이 흐트러져 있었다. 아서의 흥분은 이 순간 카를로스에겐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비추어졌다.
마침내, 몇 차례 달싹거리던 입술 틈새로 용서를 비는 말이 뚝뚝 끊기듯 흘러나왔다.
“…잘못….”
아서의 눈시울이 서서히 붉어지는 것을, 카를로스는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봤다.
“…잘…, 못했, 어…….”
“또.”
“다시는, 흣, 안 그럴…… 윽, 아…!”
좆머리를 빼낸 카를로스는 아서를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카를로스의 손에 상체를 짓눌린 채 아서는 엉덩이만을 타의로 치켜들었다. 그 상태로 번들거리는 성기가 다시 쑤셔 박혔다.
다시 자행된 난폭한 삽입과 함께 가쁜 신음이 마구 터져 나왔다. 짐승처럼 쑤셔 넣기만 하는 추삽질은 저열하고 난잡했다.
“아, 으, 읏, 흐윽, 흐으…!”
침실 바닥에 개처럼 엎드려 형제의 좆을 받으면서도 아서는 연신 앓는 신음을 흘려 댔다. 혼몽한 정신과 별개로 육체는 여과 없이 쾌락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흐으, 싫, 아, 아….”
가쁜 숨소리에 조금씩 물기가 섞여 들었다. 살덩이를 때리는 척척한 마찰음이 귓전을 농락했다. 쾌락에 잠길수록 이성은 더 초라하게 무너졌다. 아서는 카를로스에게 굴종을 표했지만 카를로스는 그것만으로는 만족 못 해 형제를 더, 저 바닥까지 끌어내리려 들었다.
거칠게 좆을 박아 넣던 카를로스는 아서의 몸을 가리고 있던 유일한 상의까지 아무렇게나 벗겨 냈다. 드러난 나신은 탄탄하면서도 섬세하게 짜여져 있어 가히 누구든 시선을 빼앗길 법했으나 무기력하게 늘어져 활력이 없었다.
바닥에 맞닿은 아서의 가슴팍이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매무새가 조금 흐트러졌을 뿐 완벽한 정복 차림을 갖춘 카를로스와는 대조적이었다.
본래라면 이쯤 되어 지나친 치욕을 참지 못해 달려들었을 아서는 반항할 의지를 상실하고, 카를로스가 저를 어떤 식으로 다루어도 힘없이 앞뒤로 흔들리기만 했다.
“아, 흐…, 으, 으윽….”
아서는 실이 끊긴 인형처럼 휘청휘청 움직였다. 거친 추삽질에 밀려나다가 카를로스가 허리를 끌어안고 당기면 다시 지익 끌려갔다.
눈앞이 축축했다. 쾌락인지 굴욕감인지 모를 것이 뚝뚝 흘러내렸다. 머릿속이 텅 비고 본능만이 그 자리에 남아 밀려드는 자극에 표류하듯 휩쓸려 떠다녔다.
“하아, 형님. 형님….”
아서의 골반을 움켜쥔 채 추삽질을 하던 카를로스가 아서에게 바투 몸을 붙였다. 허리만을 이용해 빠르게 좆을 쑤셔 박다, 이내 길게 신음하며 아서의 몸 가장 깊은 곳에 파정했다.
그는 찰박거리며 얕은 삽입을 이어 갔다. 느긋하게 허리 짓을 하면서도 아서의 귓가를 진득하게 핥아 내리고, 목덜미를 할짝거렸다. 뺨에는 자잘한 입맞춤을 남겼다.
“…형님.”
눈물 자국을 찾듯 아서의 뺨을 더듬던 손이 짐짓 다정하게 눈가를 쓸어내렸다. 달래는 듯한 손길과 다르게 사정한 흔적도 없이 단단한 성기는 여전히 아서의 아래에 뿌리까지 전부 박혀 있는 채였다.
“형님, 울지 마세요.”
아무런 힘도 들어가지 않은 손길이었지만 위협을 느낀 아서는 무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니 꼭 내가 형님을 괴롭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
“좆은 좆대로 세워 놓고, 왜 우실까….”
카를로스는 제 형제를 자신의 아래에 완전히 무릎 꿇리고 나서야 배부른 짐승처럼 웃었다. 지금 이 모습만큼은 황제도, 아니 그 누구도 보지 못했으리라 생각하자 그제야 뒤틀린 심기가 사르르 풀렸다.
아서의 몸을 뒤집은 카를로스가 기가 눌리다 못해 넋이 나간 얼굴을 샅샅이 훑어 내렸다. 축축이 젖어 뒤엉킨 속눈썹과 초점이 흐린 눈, 잔뜩 깨물어 빨개진 입술을 살펴보다 마지막엔 불그스레한 코끝을 눈에 담았다.
카를로스는 아서의 뺨과 눈과 코에 입을 맞추고 위로하듯 눈가를 핥았다.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던 손으론 아서의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땀에 젖어 흐트러진 백금발을 정돈해 주는 손길이 그답지 않게 다정했다.
“…그만, 해.”
어린 형제가 저를 달래는 듯 굴자, 수치심이 든 아서가 젖은 눈을 한 손으로 가렸다.
카를로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손마저 핥아 내리며 입술로 손마디를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아서를 제멋대로 몰아붙이고 언제 그랬냐는 양 얼굴을 바꾸고 달래는 것이 숫제 변덕스러운 폭군과 같았다.
말캉한 감촉에 움찔 몸을 떨던 아서는 더 버티지 못하고 카를로스를 밀어냈다. 밀려나지 않을 것 같던 커다란 몸은 의외로 쉽사리 뒤로 물러났다.
“이만 침대로 가시지요, 형님.”
“…….”
“형님을 울린 건 내가 잘못했습니다.”
전혀 미안하지 않은 투로 카를로스가 사과했다. 늘어진 몸을 안아 올리려 하는 걸 아서가 힘을 주고 버티다가, 마주 쳐다보는 시선에 곧바로 힘을 풀었다.
아서를 침상으로 안아 옮긴 카를로스는 벗은 몸이 드러나지 않도록 이불로 꼼꼼히 덮었다. 아서가 땀으로 끈적해진 살에 천이 닿는 것이 불쾌해 이불 아래의 몸을 뒤척였지만 그는 못 본 체 무시했다.
아직까지도 침실 문 너머는 잠잠했다.
적당히 기다리다 문을 두드릴 만도 한데 묵묵하게 있는 것을 보니 가브리엘이 저와의 약속을 잊지 않은 듯했다.
카를로스는 굳었던 얼굴을 조금 풀었다. 그가 침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들어와도 좋다, 가브리엘.”
허락이 떨어지자 그제야 가브리엘이 문을 두드려 인기척을 드러냈다. 곧이어 침실 문이 매끄럽게 열리고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사가 치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서 있던 것이 썩 유쾌하진 않았을 텐데 그 속내야 어떻든 그의 겉모습은 평소와 같았다.
“당분간 가브리엘이 형님의 호위를 맡게 될 것이라 말씀드렸었지요.”
“…존귀하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전하를 다시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기사가 인사를 건넸지만, 아서는 진이 빠진 듯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가브리엘을 유심히 바라보던 카를로스가 아서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젠 형님께도 전속 시종이 있으니 전처럼 가브리엘의 시중을 받는 건 삼가십시오.”
아서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아서의 시선이 기사에게로 옮겨졌다. 오랜만에 마주한 가브리엘은 여전히 기사의 표본처럼 단정히 서 있었다.
“…전할 말은 그걸로 끝인가? 이제 몸을 씻고 싶은데.”
답답하던 이불을 걷어 내며 아서가 몸을 일으켰다. 침상 아래로 한 걸음 내디디니 끈적한 액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카를로스의 눈에 다시금 은근한 열기가 실렸다.
“사용인을 부르고 싶지 않으실 테지요. 손을 보태겠습니다, 형님.”
“…됐어. 나 혼자서도 충분해.”
“퍽이나 그러하겠습니다. 씻는 법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분이.”
카를로스가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웃자, 아서의 얼굴 위로 설핏 분기가 떠올랐다.
“그 정도도 모르진 않아. 너는 대체… 나를 무어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무리 제 손으로 무언가를 하는 게 익숙지 않은 황족이라 해도 씻는 방법조차 모르진 않았다. 단지 누군가의 수발을 받는 게 숨 쉬는 것처럼 익숙할 뿐이었다.
“뭐라고 생각하긴. 형님 같은 이를 일컫는 말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
“온실 속의 화초.”
카를로스가 아서의 가슴팍을 쿡 찌르며 그리 말했다.
“시중을 들어 드릴 테니 형님께선 얌전히만 계세요.”
아서의 사양에도 카를로스는 아서를 뒤따라 들어왔다. 그러나 애초부터 아서를 뒤따라 온 목적이 목욕 시중이 아니었던 듯, 거친 손은 아서의 가슴부터 허리, 허벅지 안쪽을 제멋대로 희롱했다. 결국 아서는 카를로스의 손에 한 번 더 파정하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
아직 바깥은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더니 하루가 유난히도 길게 느껴졌다.
남은 일정이 있었던 아서는 등 뒤에 가브리엘을 달고 집무실로 향했다. 구속구를 풀고 나니 달라진 점은 카를로스에게 시달리고 나서도 업무를 볼 체력이 남아 있단 점이었다.
아서는 집무실 문을 떫은 눈으로 쳐다보다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에드윈.”
“태자 전하! 오셨습니까.”
안으로 들어서니 부관 에드윈이 얼굴 가득 화색을 띠고 아서를 반겼다. 이미 일찌감치 대기하고 있었는지, 그의 주변으로 서류가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아서가 부관의 초췌한 뺨을 훑어 내렸다. 고작 하루 게으름을 피웠다고 얼굴이 해쓱해져 있는 것이 그동안 마법사의 성실한 업무 처리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해, 에드윈. 뭐 그리 급할 게 있다고.”
본래 아서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에 에드윈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그, 예.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그를 다시 차차 제 게으름에 익숙해지게 만들어 주어야겠다고, 에드윈이 들었다면 몹시 식겁할 만한 생각을 하며 아서가 제 자리로 향했다.
뒤따르던 가브리엘이 아서가 걸치고 있던 겉옷을 자연스럽게 받아 주었다. 몸에 익은 버릇대로 외투를 벗어 넘기면서 아서는 가브리엘을 힐끗 쳐다보았다. 좀 전 침실에선 석상처럼 서 있기만 하더니 이제는 또 갑자기 외투를 받아 주고 있었다. 조금 전엔 카를로스가 있어 그리하였던 건가.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아서와 가브리엘을 다시는 못 만나게 할 것처럼 굴던 카를로스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일어 가브리엘을 제 호위로 두려는지 의아했는데, 둘 사이에서 모종의 협의 같은 게 있었던 듯했다. 아서에 대한 카를로스의 집착을 생각해 보면 아서와 거리를 두라는 등의 명령이 떨어졌을 확률이 높았다.
“전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예상했던 대로, 지켜보는 눈이 사라진 즉시 가브리엘은 다시 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서가 집무실 중앙에 있는 자리에 앉자마자 가브리엘이 곧바로 따라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당연하다는 듯 몸을 굽히는 모습에 아서는 순간 헛웃음을 흘릴 뻔했다.
황성의 상황이 정리되고 아서의 귀환이 결정되었을 때, 카를로스가 가브리엘을 저택에서 내보냈다. 그 뒤로는 한동안 가브리엘을 보지 못했다.
“못 본 사이 어찌 지내셨습니까. 몸이 상하신 곳은 없으신지요.”
“보다시피 멀쩡해.”
“보고 싶었습니다, 전하.”
“아부는. 오랜만에 보는 것도 아니지 않나.”
가브리엘은 자칫 부담스러울 수 있는 말도 담백하게 내뱉는 능력이 있었다. 간만에 가브리엘의 얼굴을 보니 아서도 나름 반가운 기분이 들었지만 그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진 않았다.
“송구하옵니다. 그간 전하가 못 견디게 보고 싶었던 터라….”
가브리엘이 아서를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결코 하늘하늘하다고 볼 수 없는 체격인데도 순간적으로 수줍게 고개 숙인 백합이 연상되는 옅은 미소였다.
아서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끈 기사가 손등 위로 입을 맞추었다. 아래로 길게 내리깐 속눈썹은 그의 머리색과 같은 은빛이었다. 카를로스가 뛰어난 외향을 지니고도 제 외모가 아서에게 먹힌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과 달리, 가브리엘은 제 얼굴이 아서를 상대로 유효하게 쓰일 수 있다는 걸 언젠가부터 알아차린 것 같았다.
기사를 빤히 내려다보던 아서는 그 손을 뿌리칠까 말까 하다가 결국 내버려 두었다. 제가 늘 이런 식이니까 눈치를 못 채는 게 이상하긴 했다. 가브리엘이 아무 의도도 없는 양 순한 눈을 하고서 물었다.
“전하. 전하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호위뿐만 아니라 전하의 업무에도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해도 괜찮겠습니까?”
“…뭐, 그러든지.”
아서로선 손해 볼 게 없는 제안이라 별 고민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황송하옵니다.”
아서와 시선을 마주한 가브리엘이 눈매를 휘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표정 변화였다. 아서가 짐작했던 바와 같이 가브리엘은 아서를 상대로 제 외모를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이 정도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의 외모는 아서의 짜증을 잠시간 사그라들게 하는 데에 그치는 정도였으며 결국엔 한계가 정해져 있었다. 전하의 기사가 되기를 바란다는, 그가 삼키고 있는 말을 내뱉는 즉시 아서의 얼굴이 불쾌함을 담고 일그러질 것을 알았다.
아서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제게는 손을 내밀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그때, 그의 머릿속엔 오직 단 하나의 문장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전하의 기사가 되어야겠다.
물론 그건 오직 그 혼자만의 염치없는 바람으로 현재로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과거 스스로가 뿌려 둔 업이 그의 발목을 끈끈히 휘어 감아 그를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게 막아서고 있었다.
「이전 날 하신 말씀이 아직까지 유효하다면…. 이제라도 제가 감히, 전하의 기사가 되고자 청을 드리고 싶습니다.」
「…가브리엘.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예.」
「경이 먼저 꺼낸 말이야. 쉬이 무를 수 없다는 건 알겠지.」
그때 아이처럼 기뻐하던 아서와, 그 순간 제 안을 가득 채웠던 충족감이 아직까지도 지울 수 없이 선명했다. 가브리엘은 감히 아서의 앞에서 제 이기적인 소망을 드러낼 수 없었다.
「가브리엘, 왜….」
「송구합니다. 전하.」
아서가 얼마나 분노할지, 얼마나 날카롭게 저를 책망할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제 와 다시금 전하의 신뢰를 얻으려면 제가 무얼 어찌해야 하는 걸까. 그저 까마득하기만 한 물음이었다.
가브리엘은 이런 부분에선 아는 바가 많지 않았다. 여태 그가 쌓아 온, 혹은 타고난 힘과 권력은 그를 언제나 선택받기보다는 선택하는 쪽에 속하게 했다.
필요에 따라 상대의 호감을 사기 위해 거짓 웃음을 꾸며 본 적은 있지만 진정 원하는 것이 생겨 그를 손에 쥐려 애쓴 적은 전무했다. 주인의 선택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그에게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러니 그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아서의 곁에서 맴돌며, 제가 가진 보잘것없는 장점이나마 뽐내며 저를 다시 선택해 주실 순 없느냐 구애하는 수밖에.
전하께서 그를 어여삐 여기다, 언젠가는 제 기사로 삼고 싶다 말하여 줄 그 순간만을 숨죽인 채 기다려야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기사가 아서와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앉았다. 기다리고 인내하는 건 그가 가장 잘하는 것 중에 하나였으니, 그는 얼마든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
아서가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내팽개친 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축축했다.
“하아, 하아….”
체면이고 뭐고 힘이 들어서 더 버틸 힘이 나지 않았다. 이대로 드러눕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전하.”
가슴이 크게 부풀도록 헐떡이는 아서와 다르게 기사는 머리칼이 조금 흐트러진 게 전부였다. 대련을 마친 아서는 대답할 힘도 없어 고개만 위아래로 흔들었다. 매일 단련 시간마다 기사에게 대련을 청한지는 좀 되었는데, 어째 격차가 전혀 좁혀지지 않는 것 같았다.
뚝뚝 흐르는 땀을 소매로 대강 닦아 낸 아서가 대련용 검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걸음을 옮겼다.
“태자 전하!”
그가 한 걸음 움직이자마자 대련장 구석에 얌전히 앉아 있던 쌍둥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전하, 오늘도 멋진 대련이었사옵니다. 혹 옥체가 상하신 곳은 없으시옵니까?”
“심려되어 여쭤보나이다.”
쌍둥이 중 남아 체리, 여아 메리가 차례대로 똘망똘망하게 눈을 빛내며 아서에게 말했다.
아서는 제게 달려온 쌍둥이를 귀엽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이전에 마법사와 약속했던 대로 그는 볼모로 끌려온 이들을 나름 신경 써서 돌봐 주고 있었다.
아서가 알기로 체리와 메리는 나름 안타까운 사정을 지닌 남매였다. 남매는 태생부터 왕국을 위해 희생될 패로 길러진 왕족이었고, 그들 손아래 동생인 쌍둥이 대신 제국을 찾은 암살자이기도 했다.
남매는 뼈에 각인된 마법으로 모습을 위장하고 있는 것이었고, 애초에 모습이 똑같이 생긴 쌍둥이도 아니었다. 진짜 쌍둥이는 왕국에 억류당해 남매를 휘두를 패로 쓰이는 중이었다.
원작에서 그들 남매는 나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아서의 열등감을 살살 긁어, 마침내 카를로스를 죽이고자 마음먹게 한 원흉이 다름 아닌 이들이었다.
다만 남매는 아서처럼 처형당하진 않는다. 아서를 부추긴 정황이 있지만 직접 카를로스의 일신에 해를 끼치진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 악역처럼 등장했던 남매는 그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알게 된 호구 마법사 하이브의 도움을 받아 자유의 몸이 된다. 그 이후론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마법사를 따라 카를로스에게 충성의 맹세를 바치고, 은혜를 갚고자 애쓰기 시작한다. 선한 인물에게 감화되는 사연 있는 악역이라, 흔하다면 흔한 전개였다.
현재 남매는 아서의 궁을 하루걸러 하루씩 찾았는데, 원작에서 그랬듯 최선을 다해 아서의 신경을 건드리려 노력하고 있었다. 물론 아서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죄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오늘도 남매는 나름 애를 쓰고 있었다.
척 봐도 다친 곳이라곤 보이지 않건만 굳이 아서에게만 달려와 다친 곳은 없느냐 물음을 건네는 의도야 여전했다. 아부를 하는 척, 은근슬쩍 아서의 자존심도 건드리는 것이다.
보통 남동생인 체리가 길게 꿀 바른 말을 늘어놓으면 누나인 메리가 뒷말을 짧게 붙이는 식으로 대화가 이어졌다.
그간 지켜본바 체리 쪽이 능청스레 귀여운 척을 하는 것이 좀 더 뻔뻔스러운 낯을 지닌 듯했다.
그들의 노력은 다음과 같았다.
「전하의 머리칼은 꼭 금실 같아 참으로 아름다워요. 저도 이렇게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머리색을 가지고 싶사옵니다.」
「저도요! 제 깜깜한 머리보다 전하의 색이 훨씬 예쁜걸요.」
제국에서 황족을 상징하는 색이 검은색과 붉은색이라는 걸, 제국과 오랜 전쟁을 겪은 오나드 왕국의 왕족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쌍둥이는 아서의 머리칼을 동경하듯 바라보며 저런 소리를 해 댔다.
「전하, 너무나 멋있는 솜씨였사옵니다. 전하께서 이 제국에서 가장 대단한 기사인 게 틀림없어요.」
「맞아요. 틀림없사옵니다.」
「전하처럼 강한 기사가 되려면 어찌해야 하나요?」
「저도 전하처럼 제국 제일의 기사가 되고 싶어요.」
마찬가지로 그들은 아서가 아니라 그의 형제인 카를로스가 이 제국에서 가장 강한 기사라는 걸 알면서 과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어찌나 눈빛들이 초롱초롱하던지, 만일 아서가 진실을 알지 못했다면 어린아이들이 멋모르고 하는 말이라며 넘어갔을지도 몰랐다. 상당히 뻔뻔한 위장술이었다.
조금 성가시긴 하지만 지금으로선 딱히 쌍둥이에게 큰 유감은 없었다. 아직 남매가 딱히 아서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었고, 더불어 그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사정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 그런지 더욱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쌍둥이가 검을 달라는 듯 아서에게 뽀얀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 아서는 그 손을 무시하고 근처에 있던 시종에게 검을 건넸다.
“검은 위험하니 안 돼.”
“히잉….”
아서의 말에 체리가 울상을 지었다. 불퉁해진 뺨이 희고 통통했다. 쿡 찌르면 푸딩처럼 말랑거릴 게 분명했다.
아서가 웃으며 체리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쌍둥이가 겉으로나마 어려 보여 다행이었다. 그들이 본래의 모습으로 저렇게 깜찍하게 굴고 있었다면 정말 참아 주기 힘들었을 것이다.
겉보기에 쌍둥이는 동글동글 귀여운 인형 같았다. 오나드 왕국의 왕족 특유의 새파란 보석안은 빛이 비추는 각도에 따라 초롱초롱 빛이 났다. 특히 푸르스름한 빛깔이 감도는 검푸른 머리칼은 해가 지면 새까맣게 보이는데, 그럴 땐 옛날 카를로스 모습이 연상되기도 했다. 그 탓인지 얄미운 짓을 해도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시간이 늦었어. 오늘은 이만 궁으로 돌아가야겠구나.”
“조금만 더 있고 싶어요….”
아서는 아쉬워하는 쌍둥이를 달래 주었다. 쌍둥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그답지 않게 다정했다.
당장 아서 주변에 있는 이들은 죄다 카를로스나 황제에게 속해 있었다. 이제는 아서도 적당히 믿을 만한 사람을 하나 정도는 데리고 있을 필요를 느꼈다. 쌍둥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후보군이었다. 원작을 보면 아예 은혜를 모르는 짐승은 아닌 듯한데, 이대로 꾸준히 잘 대해 주면 쉽게 넘어올 것 같아 나름의 속셈을 품고 행동했다.
작정하고 행동하는 건 아니었다. 넘어오면 좋고, 아니면 말고. 딱 그 정도의 마음이었다.
울상을 한 쌍둥이가 미적미적 연무장에서 걸어 나갔다. 그들이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자 아서는 속내를 감추고 그들을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전하, 오늘도 침실로 바로 가시겠습니까?”
한창 아서가 쌍둥이의 재롱을 구경하고 있던 사이, 가브리엘이 대련용 검을 정리하고 아서에게로 돌아왔다. 아서는 마침 잘됐다는 듯 저 멀리 있는 쌍둥이에게 손을 흔들어 준 뒤 등을 돌렸다.
“그래야겠어. 몸부터 씻고 잠깐 쉬고 싶군.”
요즘 아서는 대련을 끝마치고 난 뒤엔 몸을 씻고 느긋하게 오수를 즐겼다.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태자위를 내려놓을 예정이니 대놓고 업무를 내팽개쳤다. 아무것도 모르는 부관만 애가 타서 발을 동동 굴렀다.
가브리엘과 아서가 연무장을 나서려 하는 순간, 역시나 이번에도 아서를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잠시만요, 전하…!”
에드윈이 빠른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서둘러 왔는지 그의 뺨이 상기되어 있었다.
“에드윈, 왜 또 여기까지 왔어.”
아서는 별 놀란 기색도 없이 그를 맞이했다.
“그야…!”
상전의 심드렁한 표정에 순간 욱했던 에드윈이 아서와 눈이 마주치자 급격히 목소리를 낮췄다.
“…전하께서 연무장만 가시면 도통 돌아오시질 않으시니까요. 땀을 씻어 내고 나선 집무실로 바로 오셔야 합니다. 전날처럼 오수에 빠지시면 아니 되옵니다. 꼭이요.”
에드윈이 애절한 목소리로 아서의 빠른 귀환을 촉구했다.
전부터 아서에게 유일하게 바른말을 하곤 했던 부관은 마법사가 한동안 아서 노릇을 하고 난 후부터 한층 더 끈질겨졌다. 하이브가 제아무리 아서처럼 행동했다 해도 그 특유의 만만한 분위기는 감춰지지 않았나 보다.
“그리 재촉하지 않아도 알아서 돌아갈 테니,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어.”
“…예. 그럼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그래, 그래.”
요사이 부관은 침실뿐만 아니라 연무장까지 졸졸 따라와 아서를 재촉해 댔다. 그렇다고 부관한테 태자위를 내려놓을 것이라 귀띔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아서는 일이 영 귀찮아지면 마법사에게 다 떠넘기고 잠시 도피할 생각이었다.
부관에게 가 보라며 손짓한 아서가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기사가 말없이 따라붙었다. 침실이 가까워지자 내내 조용하던 가브리엘이 입을 열었다.
“전하, 오늘도 사용인 대신 제가 전하의 시중을 들어도 괜찮겠습니까?”
“어차피 늘 그랬잖아.”
아서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로스가 옆에 있는 아침과 밤을 제외하고선 기사는 늘 이렇게 아서에게 갖은 허락을 구했다.
시중을 들고 싶다. 업무에 힘을 보태고 싶다. 훈련을 돕고 싶다. 그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 어떤 것이든 아서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했다. 목욕 시중을 들 때엔 시키지 않아도 아서의 몸을 부드럽게 주물렀다. 어디선가 배워 오기라도 했는지 그 손길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이 능란해졌다.
본래도 제 일거수일투족을 돌보려 들었던 기사이긴 했다. 다만 요즘 들어 무언가 그 결이 달라졌다. 그 전엔 아서를 돌보는 일 자체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면, 지금은 마치 그에게 구애를 하는 것만 같았다. 자꾸만 은근히 눈웃음을 치는 게 심상치가 않았다.
아서는 한 걸음 정도 뒤에서 따라오는 기사를 돌아봤다. 그의 시선이 기사에게 닿기 전부터 기사는 이미 아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니 또 살며시 눈매를 휜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도록 가늘게 눈을 접어 웃는 것이 아닌, 조금 수줍은 듯한 옅은 웃음이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아서는 괜히 퉁명스레 물었다.
“전하의 호위로서 임무를 다하고 있는 중입니다.”
“…….”
거기다 대고 뭘 쳐다보냐고 할 수 없었던 아서가 입을 다물었다. 본래도 늘 희미하게 웃음을 띠고 있던 기사였지만, 그건 딴 의도 없이 습관처럼 그려져 있던 것인 반면 저 웃음은 다분히 목적성을 띠고 있는 듯했다.
심지어 가브리엘은 제 의도를 숨기려 드는 것 같지도 않다. 이쯤 되니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 해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가브리엘이 저에게 구애를 하고 있다. 아서는 확신을 담아 그리 생각했다.
본래는 골이 난 아서가 고지식한 기사를 넘어뜨리려 매번 잔머리를 굴리곤 했었는데, 재미있게도 관계의 전복이 일어났다. 늘 별다른 욕심 없이 초연하게 굴던 가브리엘이지 않았나. 그런 그가 제 마음을 얻으려 하는 걸 즐기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와 별개로 이 구애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캐내고 싶기는 하였다.
아서가 나름 머리를 굴려 유혹한 전적이 있긴 하지만, 가브리엘이 진정으로 사랑에 빠졌다고 믿긴 어려웠다. 순수한 연심이라기보단 아서에 대한 호감과 죄책감, 동정, 의무감이 뒤섞인 감정이 아닐까 짐작되었다. 기사에겐 단순한 애정을 뛰어넘어서 그를 움직이게 만들 원동력이 필요했을 테니 말이다.
침실까지 도착한 아서가 흘끗 뒤쪽을 쳐다보았다. 아서가 문고리를 잡기 전에 가브리엘이 먼저 앞서가 침실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가십시오, 전하.”
아서는 익숙하다는 듯 손 하나 까딱 않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브리엘이 아서의 외투를 받아 주었다.
“몸이 피로하진 않으십니까?”
“그다지, 괜찮아.”
아서보다 먼저 욕실로 향한 기사는 능숙한 손길로 마법석을 조작하여 욕조에 물을 채웠다. 그가 준비하는 사이 아서는 걸치고 있던 의복을 벗어 내렸다. 이제는 암묵적으로 굳어진 그들 나름의 협업 같은 것이었다.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지.”
아서가 욕조 속에 몸을 담갔다. 나른히 등을 기대고 있으니 가브리엘이 젖은 몸을 천천히 주물렀다. 기다란 손가락이 목덜미를 풀어 주다 어깨, 날개뼈, 척추로 차츰 내려갔다. 전신의 근육이 이완되고 절로 기분 좋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목욕 시중을 하고, 받는 동안 그들은 항상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들었다. 점잖게 뭉친 근육을 풀어 주는가 싶다가도 아서가 ‘더 해 줘.’라고 말하면 손이 그보다 아래로 내려갔다.
처음 시중을 들 땐 조심스레 하나하나 아서의 허락을 맡던 가브리엘은 아서가 귀찮아하는 기색을 풍기자 더는 일일이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나중엔 앞서 은근한 손길로 아서의 허락을 유도하기도 했다.
무얼 하든 배움이 빨라 좋았다. 기사도 카를로스와 마찬가지로 무언가에 능숙해지는 것에 그리 긴 시간을 요하지 않았다.
“…으음.”
아서는 눈을 감고 축 늘어졌다. 근육을 풀어 주는 손길에 온몸이 물속으로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처럼 노곤해졌다.
전날도 이러다 그만 잠이 들어 버렸는데, 또 여지없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저를 기다리다 지쳐 거의 울먹거리던 부관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찰나였다.
밀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아서는 그만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서가 상쾌한 얼굴로 부스스 상체를 일으켰다. 한숨 자고 나니 이보다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언제 젖었냐는 듯 뽀송한 몸 위로 푹신한 이불이 덮여 있었다. 다행히 시간이 그리 많이 지나진 않았는지 창 주변이 햇빛을 받고 노란빛을 띠었다.
“에드윈 씨가 서류를 전하고 간 것을 훑고 있었습니다. 더 주무십시오, 전하.”
몸을 세우자 역시나 눈을 돌릴 것도 없이 곧바로 가브리엘과 시선이 마주쳤다. 기사는 침실 한편의 탁상에 반듯하게 앉아 서류를 읽는 중이었다.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한 옆모습도 그렇고, 능숙하게 서류를 넘기는 손도 그렇고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만 선택적으로 부지런해지는 아서는 대체로 게으른 편이었다. 최소의 노력만을 투입해 최상의 효율을 얻고 싶어 하는 양심 없는 인간이기도 했다. 그런 아서의 눈에 제 할 일을 대신 떠맡아 주는 기사가 예뻐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서는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내 자연스럽게 침대 옆에 달린 설렁줄을 당겼다.
“부르셨사옵니까, 전하.”
몇 초 지나지 않아 갈색 머리의 시종이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침실로 들어섰다.
요사이 지루하게 반복해 온 일이었던지라, 시종 루이스는 이미 아서가 어떤 이유로 그를 불렀는지 예상한 눈치였다.
“어제와 같은 용무야. 폐하께 알현을 간곡히 원한다고 전해 다오.”
침실로 들어선 루이스에게 아서는 전날 하였던 말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읊었다. 루이스도 어제와 다르지 않게 공손히 대답했다.
“예, 그리하겠사옵니다.”
“서둘러 다녀와.”
그 말을 할 줄 알았다는 듯 고개 숙인 루이스가 방을 나섰다.
황제에게 태자위를 내려놓겠다 말한 날 이후로 아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황제에게 알현을 청하고 있었다. 황제의 심기가 불편해 보였던 탓에 아서도 그에 맞춰 적당히 대응을 한 것이었다.
황제는 늘 거동이 불편하다느니 뭐니 누가 들어도 대강 지어낸 게 분명한 이유로 알현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간은 아서가 직접 황제궁까지 발걸음을 하였으나, 그것도 수십 일째 반복되자 귀찮아진 나머지 이젠 시종을 대신 보냈다. 기껏 카를로스에게 여러 날 말미를 얻어 두었는데 이래서는 기간이 다 돼 가도록 황제의 그림자도 엿보지 못할 판이었다.
꾸물꾸물 이불 속을 빠져나온 아서가 기지개를 켰다. 부관이 또 울상을 짓기 전에 슬슬 집무실에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평소처럼 속옷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일어나자 가브리엘이 다가와 상의를 걸쳐 주었다.
“집무실로 가자.”
“예, 전하.”
그리하여 아서가 모처럼 부관의 일을 덜어 주어야겠다 마음먹고, 느긋하게 집무실로 향하려던 때였다.
“태자 전하!”
부관에겐 불운히도 그 순간 아서의 걸음을 막는 이가 있었다. 거의 뛰다시피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시종이 다급하게 아서를 찾았다. 궁으로 들기 전까지 급히 달려온 듯 숨소리가 거칠었다. 용케 숨을 가다듬은 시종이 아서에게 말했다.
“태자 전하, 황제 폐하께옵서… 알현을 허하셨사옵니다.”
드디어 황제가 저와의 귀찮은 줄다리기를 끝내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아서는 심드렁한 속내를 숨기고 안도한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어디로 가면 되지?”
“폐하께옵서 거동이 편치 않아, 침소에 자리하고 계십니다.”
“알겠다.”
아서는 곧장 발걸음을 돌려 황제궁으로 향했다. 건강을 핑계로 드러누운 황제는 아서를 알현실이 아닌 제 침소로 불러들였다. 크게 화를 낼까, 그게 아니면 없는 부성애라도 끌어내 아서를 신경 쓰는 척이라도 할까. 어느 쪽이든 별반 재미는 없을 터였다. 아서는 하기 싫은 숙제를 억지로 해치우는 심정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다시 찾은 황제궁은 여전히 변함없이 음습했다. 익숙한 시선들을 한 몸에 받으며 아서는 침소 문을 조용히 열었다.
“지고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왔느냐, 아르디.”
아서를 맞이하는 황제는 역시나 전혀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황제는 부러 평소와 달리 흐트러진 차림새로 침상 위에 앉아 아서를 맞이했다.
뻔히 눈에 보이는 수작이라도 어쩌겠나, 아서는 모르는 체 입에 꿀 바른 말을 내뱉어 주었다.
“폐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서 아서가 황제에게로 다가갔다. 황제를 내려다볼 수 없으니 아서는 자연스레 침상 아래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황제는 무릎 꿇은 아서를 온기 없는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무감한 눈동자가 아서의 표정, 눈동자, 태도를 샅샅이 훑었다. 제 자식이 여전히 저에게 순종적인지, 타의로 혼인을 밀어붙여도 반발 않고 수용할 만큼 고분고분하게 구는지를 판단 내리기 위함이었다.
아직까지 아서에게선 어떤 반감도 엿보이지 않았다. 어린 자식을 길들이려 그는 지난 십여 년간 철저히 공을 들였다. 이제 와 그간 들인 공이 쉬이 무너지리라 생각지는 않았다.
아서를 내려다보던 황제는 아서가 전과 조금 달라 보인단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전의 아서가 순종적이면서도 드문드문 날카로운 성미가 드러났다면, 지금은 전과 비슷하면서 어딘가 어두웠다. 예민해 보이는 눈매는 그대로였으나 주변을 감싼 분위기가 전보다 무겁게 가라앉았다.
황제는 그 무거운 공기가 카를로스에 대한 패배감에서 유발된 것이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쇠심줄 같던 아서의 고집이 한풀 꺾인 건 도리어 잘된 일이었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일에 쓸데없이 반기를 들지 않을 테니.
“아르디.”
“예, 폐하.”
황제는 아서에게 자신의 실망감을 드러내기 위해 폐하라는 호칭을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뒤따라 들어온 이는 가브리엘 경이로군.”
“예, 그렇사옵니다.”
“그가 네 기사가 되었나?”
아서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렇진 않습니다. 가브리엘 경은 카를로스에게 속해 있습니다만, 현재는 임시로 제 호위 기사직을 맡고 있습니다.”
대놓고 카를로스에게 감시당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말이었다. 황제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제 후계로 점찍은 자식이 카를로스의 기사를 감시역으로 달고 다닌다. 이미 보고를 받아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막상 그것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기가 찰 따름이었다.
황제가 가브리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황제와 아서가 저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음에도 기사는 동요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기척을 죽인 채 고요하게 서 있는 모습은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단 반듯한 조각상과 같았다. 황제는 큰 기대를 않고 가볍게 물었다.
“가브리엘 경. 짐이 아르디와 단둘이 담소를 나누고자 하니 자리를 비워 주겠는가?”
“송구하옵니다, 폐하. 태자 전하의 호위를 맡은 몸으로 자리를 비울 수 없습니다. 너그러이 양해 부탁드리옵니다.”
정중하나 재고의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였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사죄하는 모습에선 황제에 대한 경외가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 아서가 제 발로 태자위를 내려놓겠다 선언한 이상, 카를로스와 대치할 정적은 아무도 없었다. 하물며 황제파마저 분열되고 있는 형국이니 황제의 요구에 힘이 실리지 않는 게 당연했다.
“…이해하네. 맡은 바 임무는 그리 철저히 완수해야 하는 법이지.”
“황공하옵니다.”
“경의 충심이 참으로 귀감이 될 만하군.”
끓는 속을 미소로 감춘 황제가 말했다. 이미 황제는 자신의 고립을 충분히 인지한 지 오래였다. 황후와 오를레앙가가 갑작스레 암묵적으로 카를로스를 지지하는 쪽으로 노선을 틀면서, 황제파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공연히 카를로스의 기사를 건드려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극비리에 추진 중인 델라 공작가와의 혼사는 순풍에 돛을 단 듯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식전에 초야를 먼저 치르는 것에 대해 운을 뗀 것은 황제였는데, 정작 공작 쪽이 더 쌍수를 들고 반겼다.
아서가 깨트린 약혼만 서너 개였던 터라 공작 또한 황제와 마찬가지로 일찍이 혼인을 확정 지어 두길 바랐다. 처음 카를로스 측에 먼저 관심을 보였던 공작은 모종의 이유로 2황자파와 틀어지면서 황태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여차하면 제 자식을 팽할 요량으로 아서와의 혼인을 추진하는 듯했다. 그 사실이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황제는 모르는 체 혼사를 추진했다.
황제파에게, 그리고 아서에게도 델라 공작가와의 동맹이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 허가하지, 가브리엘 경. 다만 오늘 이곳에서 본 모든 걸 함구하도록 하게.”
“예, 그리하겠사옵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아르디가 꽤나 부끄러워할 테니 말이지.”
황제는 짐짓 장난스레 한마디 덧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기사의 차분한 얼굴을 보며 황제가 은근한 웃음을 지었다. 마치 그들만의 비밀을 기사에게 공유해 준다는 태도였다.
“아르디. 호위 기사가 있는 곳에서 태자를 아이 취급하고 싶진 않았지만….”
미소를 띤 황제가 손을 내려 아서의 뺨을 매만졌다. 만일 가브리엘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면 그는 이대로 뺨을 내려쳤을 것이다. 기사가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차선으로 아서를 달래는 쪽을 택했다.
“그날 이후로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지. 막상 얼굴을 보니 또 좋기야 하구나.”
“…폐하.”
황제가 아서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 부드러운 미소에 아서의 얼굴 위로 드리워져 있던 그늘이 차츰 거두어졌다.
“제가 드린 말씀에 속이 상하여 알현을 허하지 않으시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 또한 사실이다. 지금 이 순간 역시 마냥 편치만은 않으니 짐의 좁은 속을 탓해야겠구나.”
“…송구하옵니다.”
“그러나 미워하려 한들 어찌할 도리가 있겠느냐. 미워도 짐의 소중한 자식인 것을.”
태연히 거짓을 늘어놓은 황제는 고개를 숙여 아서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아서가 황제의 폭력에 눈물을 보이지 않을 만큼 성장한 뒤로는 받은 적이 없던 입맞춤이었다.
아서는 조금 놀란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다가, 이내 황송하다는 듯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함께 만찬을 가진 지도 제법 오래되었구나. 그간 짐이 무심했던 것을 알아.”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아바마마께서 공사다망하신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머지않은 시기에 소소한 만찬을 열 것이다. 짐과 함께해 주겠느냐?”
“어느 때든 불러 주신다면 기꺼이 자리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짜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레 이어졌다. 그 속내야 어찌 됐든 그들은 겉보기엔 흠잡을 곳 없이 다정한 부자처럼 보였다.
“곧 태자의 탄신일이지. 내 후계로서 마지막 탄신 연회이니 그 어느 때보다 성대하게 치를 요량이다. 폐위식은… 그 후에 조촐하게 치르는 게 좋겠구나.”
황제의 말에 아서가 짐짓 당황스러운 얼굴로 눈썹을 찡그렸다.
“아바마마. 제게는 너무나 과분한 처사입니다.”
아서는 놀란 척 고개를 내저었지만 사실 인사치레에 불과한 사양이었다. 황태자의 탄신연은 그 규모가 성대한 만큼 준비 기간 역시 상당히 길었다. 황제가 이제야 아서에게 통보를 한 것이지, 아서의 탄신연에 어마어마한 예산이 들어갔단 소문은 이미 암암리에 널리 퍼져 있었다.
“아르디. 너는 짐이 가장 아끼는 자식이지 않으냐. 이렇게라도 해야 짐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릴 것 같구나.”
“…아바마마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거부할 도리가 없군요. 황송하옵니다.”
아서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생각에 빠진 눈이 내리깐 눈꺼풀에 자연스레 가려졌다.
황제의 자비에 감격이라도 한 것처럼 그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바닥을 가만히 응시하는 눈동자는 차게 식어 있었다.
지금에 와서 황제가 아끼는 자식이니 운운한 걸 믿을 만큼 그는 순진하지 않았다. 저 꿀 바른 말은 가브리엘을 의식한 것일 테고, 굳이 제 탄신연을 성대하게 치르려 드는 연유가 있을 터였다.
탄신 연회 때 카를로스를 암살하려 들 것까지는 쉬이 예상되는 범위였다. 들뜬 분위기 속 어수선한 틈을 타 독살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았다. 황제가 무얼 시도하든 우려는 되지 않았다. 아서도 저 말을 듣자마자 암살 시도를 떠올린 마당에, 카를로스 측에서 아무 대비를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차피 황제는 안 될 일에 힘이나 빼게 되는 셈이다.
설령 어쩌다 카를로스를 위험에 빠뜨리는 데에 성공하더라도 크게 걱정할 것은 없었다. 카를로스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었다. 쉽사리 위기를 극복하고 기연 따위를 얻어 돌아올 게 분명했다.
애당초 카를로스 개인이 지닌 무력부터가 괴물 같은 수준이었다. 많은 걸 아는 아서조차 카를로스를 암살할 방도를 떠올리기가 힘들었다.
물론 황제의 발악이 아예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어디 황제나 아서 같은 작자들이 옆에서 뜯어말린다고 말려질 사람이었던가. 아서도 천운으로 전생을 떠올리지 못했더라면 지금까지 카를로스를 죽이려 발버둥 치고 있었을 테다.
황제가 무슨 짓을 꾸미려는지는 몰라도 아서 역시 가만히 방관하진 않을 작정이었다. 카를로스는 이미 아서의 것인데, 황제가 멋대로 건드리는 꼴을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사람을 쉬이 믿지 않는 아서로선 카를로스의 집착 역시 언젠가는 식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카를로스의 감정이 당분간은 이어질 거라는, 믿는 것도 믿지 않는 것도 아닌 애매한 믿음 정도는 지니고 있었다.
나중까진 장담할 수 없지만 현재로선 카를로스를 괴롭힐 수 있는 건 아서만이 유일해야 했다. 유치한 독점욕에서 우러나온 생각이었다.
***
그리고 그 시각, 초대받지 못한 손님인 카를로스는 황제궁의 침소 문 앞을 우두커니 지키고 있었다.
침소를 지키는 호위들은 카를로스를 강제로 내쫓을 수 없으니 감시하듯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들은 왜 2황자가 뜬금없이 황제궁을 찾은 건지 의문스럽다는 기색이었다.
실은 그 따가운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카를로스 역시 그들의 의문에 공감했다. 그는 대체 이 순간 제가 무얼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황제께서 알현을 허하였습니다. 아서 전하께서 곧 황제의 침소에 도착하실 것 같습니다.」
아서에게 붙인 감시자의 보고를 들었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황제의 침소 앞이었다. 겉으론 표정을 굳히고 서 있지만 그는 이 순간 제 모습이 우스워 견딜 수가 없었다. 고작 아서가 황제궁으로 가고 있다는 보고 하나에 그리도 다급히.
몇 걸음 안 되는 거리에 아서를 두고 카를로스는 초조함을 느꼈다. 그는 당장 침실 문을 밀고 들어가려는 몸에 제동을 걸었다. 이렇게 주인을 기다리는 애완견마냥 초조하게 굴 것이 아니라, 침소 안에 가브리엘이 함께 있으니 차분히 기사의 보고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이성과는 달리 온 신경이 아서에게로 향한 지 오래였다.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는 걸 인지하고 있음에도 그와 무관하게 당장 아서의 얼굴을 봐야겠단 충동이 불쑥불쑥 들었다.
아서의 목숨줄을 쥔 것으로 모자라 양친인 황제, 황후까지 그의 의지에 따라 죽이고 살리는 것이 가능하건만 치미는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이 익숙한 불안과 초조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은 죽을 때까지 아서의 전부를 가지지 못하리란 불안감. 그것이 그를 괴롭게 만드는 근원이었다.
형제의 육체를 손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되뇌다가도 문득 가슴이 답답해졌다. 황제의 말 한마디에 서러운 낯을 했던 아서. 저와 똑 닮은 황제는 쉬이 손에 쥔 애정을 저는 왜 얻어 내지 못했는지, 그런 유치한 물음이 머릿속에서 가시지가 않았다.
차라리 아서가 그런 얼굴을 할 수 있단 사실을 모르는 게 나았을까.
아서를 몰아붙인 뒤 채웠던 만족감은 한순간의 것에 불과했다. 형제 사이의 본질적인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던 탓이다.
“형님.”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린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서가 문을 열고 나서자 카를로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서의 손목을 끌어 잡았다.
일찍이 카를로스의 기척을 읽었을 아서는 닥칠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한 것처럼 보였다. 카를로스가 저에게 집착적으로 구는 것에 어쩔 수 없이 익숙해진 듯, 아서는 짜증을 내는 것도 반기는 것도 아닌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왔구나, 칼.”
“예, 형님.”
“여기까진 어쩐 일로 왔어.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서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달리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가 아서의 눈엔 이상하게 보일 만도 했다.
“그보다 이쪽 일이 더 중요해서요.”
“…황제궁까지 나를 마중 나오는 것이?”
아서는 희한한 소리를 들었다는 양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예.”
짤막히 답한 카를로스가 아서의 손을 거머쥐었다. 아서는 평상시 그랬던 것처럼 불편한 기색을 드러낼지언정 붙잡힌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그 무언의 허락 하나에 불안하던 카를로스의 마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카를로스는 아서의 손을 잡고 나서야 주위를 둘러볼 여유를 되찾았다. 그는 뒤늦게 아서 곁에 있는 기사의 존재를 상기해 내곤 가브리엘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필히 한심해하는 눈길을 보내고 있을 줄로 알았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기사는 무엇 때문인지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언뜻 보기엔 평소와 같은 차분한 얼굴을 가장하고 있었는데 실상은 아니었다. 종종 생각에 잠긴 기사를 지켜본 적이 있었던 만큼 카를로스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카를로스가 유심히 기사의 눈을 들여다보던 사이, 생각에 잠겨 있던 가브리엘이 카를로스보다 한발 늦게 눈동자를 움직였다.
“…….”
“…….”
두 사내가 짧은 시간 서로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마주함과 동시에 직감적으로 깨닫고 말았다.
상대도 저처럼 황제궁에서 같은 광경을 보았으며, 그로 인해 비슷한 불쾌감을 느꼈다는 것을.
“…형님, 가시지요.”
시선을 돌린 카를로스가 제 것을 품에 감추듯 아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형제를 주시하고 있던 이들이 그 지나치게 친근해 보이는 광경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란히 걷는 형제를 한 발짝 뒤에서 바라보며 가브리엘도 천천히 뒤따라 걸었다. 늘 옅은 미소가 그려져 있던 입매는 미미하게 굳어 있었다. 오랜 친우는 이런 면에선 불편했다. 애써 감춰 둔 속내를 수년간 쌓인 경험을 바탕으로 손쉽게 읽어 내 버리니 말이다.
세 사람이 백색궁으로 가는 동안 그들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카를로스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다가 태자궁의 침소에 도달하자마자 축객령을 내렸다.
“가브리엘 경은 나가 있는 편이 좋겠군.”
“예, 전하.”
가브리엘은 선선히 침실 밖으로 나섰다. 문이 닫히기 직전 틈새로 저를 쳐다보는 눈과 시선이 마주친 것도 같았다.
“가브리엘 경, 오늘도 쫓겨나셨습니까.”
침실 문 앞에 서 있던 기사 중 한 명이 농을 건넸다. 가브리엘이 설핏 웃었다.
“예. 그렇게 되었군요.”
이제 더는 카를로스가 아서에 대한 마음을 숨기지 않아, 카를로스의 측근 대부분이 그의 집착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했다. 그 때문에 종종 가브리엘이 침실 밖으로 쫓겨난다는 것 또한 대부분 알고 있었다.
아직까진 주종 사이에 큰 충돌이 생긴 적은 없었다. 그들이 함께했던 오랜 세월이 아무 의미가 없진 않아서, 어느 선을 뛰어넘을 것 같으면 둘 중 하나가 한발 뒤로 물러나 버렸다.
아주 어릴 때야 치기로 대련을 빙자한 몸싸움을 벌인 적이 있지만 현재에 와서는 무력 충돌을 불사할 정도로 다투진 않았다.
다만 그 암묵적인 합의가 향후 다가올 미래까지 이어질지는 의문이었다. 지금 이 시점에 기사가 카를로스의 명에 반하지 않고 얌전히 물러나는 건 그가 아직 카를로스의 기사여서가 아니라, 아서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의 동정을 살 바에야 차라리 홀로 감당하는 쪽을 택할 아서였다. 자신의 몸이 상하는 일엔 이상할 만치 무심한 면이 있는 아서는 자존심을 건드리면 순식간에 눈빛을 바꿔 노려보곤 했다. 그가 섣불리 나섰다간 도리어 아서의 심기를 크게 상하게 할 것이 분명했다.
아서가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카를로스를 막아설 수 있었지만 기사는 나서지 않았다. 한동안은 몸을 굽힌 채 아서의 믿음을 얻어 내자고, 그렇게 단순히 생각했다. 기다리는 데에는 자신 있으니 남은 건 적당한 시기를 찾아내는 것뿐이라 생각했는데.
그토록 자존심을 굽힐 줄 모르던 아서가 황제의 앞에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무릎을 꿇었다. 황제를 올려다보는 시선엔 파고들 틈 없이 견고한 순종이 엿보였다. 황제를 앞에 둔 아서는 그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얼굴을 드러냈다.
「호위 기사가 있는 곳에서 태자를 아이 취급하고 싶진 않았지만….」
황제의 행태는 어딘가 과시적인 면이 있었다. 아서의 머리를 쓰다듬는 황제는 아서의 아비가 아니라 주인 행세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주인으로서 제 것에 대한 소유권을 공고히 해 두려 하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기사가 느낀 건 다름 아닌 불쾌한 거리감이었다. 그는 저와 아서 사이에 놓인 높다란 벽을 마주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마 이전 날 카를로스 역시 가브리엘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터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황제의 침소 앞까지 한걸음에 달려올 까닭이 없었다.
“혹 태자 전하께서 저를 찾으신다면 집무실에 있다 말씀해 주십시오.”
“예, 그리하겠습니다.”
가브리엘은 침실 문 앞을 지키지 않고 집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복잡한 머릿속도 비워 낼 겸 밀린 업무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한동안 아서가 큰 반발 없이 조용히 자리를 지켰던 터라, 가브리엘은 감시역이라기보단 부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태자위를 박탈당한 이후로 아서는 모든 의욕을 상실한 듯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을 때가 많았다. 밤낮없이 업무에 몰두하던 과거와는 크게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어쩌면 그건 당연한 변화인지도 몰랐다. 걸음마를 떼기 전부터 황태자로 내정되어 있던 이가 한순간에 평생의 목표를 상실했으니 말이다.
태자궁의 집무실로 들어서는 즉시 급격히 침잠하는 아서를 알기에, 기사는 가능한 한 아서가 침소에서 업무 처리를 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다만 그런 방법은 그저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늘어져 있던 아서에게 조금이나마 활력이 생기는 건 대련을 하거나, 수음을 받는 등 육체적으로 자극을 얻는 때가 전부였다.
대부분의 황족이 그렇듯 아서 역시도 묘하게 상식이 결여된 면이 있었다.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 어떤 거리낌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다. 가브리엘은 아서에게 결벽증이 있던 것이 한편으론 다행인 일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서는 일찍이 주변의 유혹에 휩쓸려 색욕에 빠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집무실 앞에 도착한 기사가 화려한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의 시선이 주인이 자리를 비운 탁상 언저리에 잠시간 머물렀다.
자연스레 황제궁에서 본 카를로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초조한 얼굴, 소유욕을 숨기지 못하던 손길.
카를로스가 그답지 않은 짓을 하는 이유엔 늘 예외 없이 아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아서와 관련되어 있는 일에 한해 카를로스는 그의 수하들이 코앞에서 직접 보고도 눈을 의심할 만한 짓을 종종 저지르곤 했다.
물론 가브리엘도 하등 다를 바는 없었다.
오랜 친우이자 주군인 카를로스를 기만하고 새로운 주인에게 예쁨을 받으려 애쓰고 있는 것부터가, 본래의 그가 지켜 오던 법칙을 완전히 깨트리는 행위였다.
가끔씩 가브리엘은 제 행동에 작은 의문을 느꼈다. 그는 주군을 배반하고 망설임 없이 우선순위 아래의 것을 내팽개쳤다. 배운 바에 따르면 자신은 지금쯤 스스로를 자책하거나 혼란에 빠져 있어야만 마땅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는 마치 본래부터 신의를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어떤 죄악감이나 혼란스러움 따위를 느끼지 못했다.
문득 가브리엘은 이것이 그조차 몰랐던 자신의 본질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간 바른 틀에 억지로 몸을 구겨 넣고, 그 반듯한 모양새를 스스로의 모습이라고 착각하고 살았던 걸지도 모르겠다고.
어쩌면 카를로스가 과거 맹세를 바치겠단 기사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한 것이, 이러한 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인 건 아닐지. 그런 확신에 가까운 추측을 하며 기사는 집무실 한편의 제 자리에 앉았다.
***
새벽이 다가오는 때는 아서가 가장 활기를 띠고 돌아다니는 시간이었다.
멍한 얼굴을 한 아서가 투명한 혼백인 상태로 허공을 둥둥 떠다녔다. 해먹에 누운 것처럼 비스듬하게 기운 몸이 느긋하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어지간해선 아서의 침실로 찾아와 잠을 청하는 카를로스가 웬일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낮 동안 아서에게 철썩 붙어 있더니 그 대가로 늦은 시간까지 업무에 시달리고 있는 듯했다.
무료해진 아서는 침실 왼편에 자리한 두꺼운 벽을 통과하여 자연스럽게 옆방으로 향했다. 아서의 침실 옆에는 가브리엘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기사는 숙면을 취하고 있을 터였다. 가브리엘의 수면 시간은 아서의 것과 거의 일치했지만, 기사가 아서보다 조금 더 늦게 자고 빨리 일어났다.
고요히 잠든 가브리엘의 옆으로 아서가 스르륵 다가갔다. 아서의 눈동자가 이윽고 재미있는 걸 목격한 듯 이채를 띠었다.
평상시였다면 한 뼘 거리에서 기사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관음했을 아서였으나, 오늘은 그 주변부를 바라보았다. 가브리엘의 주위로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희끄무레한 연기가 엿보였다.
아무래도 지금 가브리엘이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저건 꿈을 꾸고 있을 때만 나타나는 이름 모를 표식이었다. 대상자의 기준으로 악몽에 가까울수록 주변을 맴도는 기운이 어두워졌는데, 저건 시커먼 색을 띤 걸 보니 안타깝게도 가브리엘이 행복한 꿈을 꾸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살아 있는 생물처럼 꾸물거리는 연기가 아서의 눈을 피해 조금씩 움츠러들었다. 아서도 저 괴상한 걸 정확히 뭐라고 부르는지는 몰랐다. 여하튼 저 이상한 기운이 저에게 아주 좋은 별미라는 사실은 알았다.
악몽을 길몽으로 바꿔 주는 정도야 아서에게 별달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참이라 아서는 간만에 선심을 베풀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가브리엘의 이마 위로 손끝을 올려놓았다. 아서의 혼이 삽시간에 흩어지며 기사에게로 스며들었다.
찰나 어두워졌던 시야가 급격히 밝아졌다. 꿈속으로 들어간 아서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뭔가 눈에 익다 했더니 꿈의 배경은 다름 아닌 황제의 침소였다. 금실이 수놓아진 자주색 캐노피가 무겁게 늘어져 침상을 반쯤 가렸다. 그 틈으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인영 하나가 보였다.
아서는 빠르게 날아가 그자를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구불구불한 백금발에 완벽한 정복 차림을 한 남자. 이 역시 눈에 익었다. 꿈속의 남자는 아서 저 자신이었다.
아서는 몹시 어이가 없었다. 이전부터 가브리엘은 아서가 개입한 꿈은 죄다 악몽 취급했다. 제가 나오는 꿈이 대체 왜 악몽이란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몽정도 아니고 악몽이라니, 아서로선 억울할 따름이었다.
불량스럽게 쭈그려 앉은 아서가 꿈속 아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가짜 아서는 가브리엘의 손에 제 뺨을 대고 있고, 침상 위에 앉은 가브리엘은 딱히 밀어낼 생각이 없는 듯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가만 아서의 뺨을 쓰다듬어 주기만 했다.
모양새를 보아선 오늘 낮 황제의 침소에서 있었던 일이 비슷하게 재현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 있었던 일이 가브리엘에게 꽤 인상 깊었나 보다. 더 상황 파악을 할 것도 없이 아서는 곧장 꿈속 아서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시야가 훅 낮아지고 가브리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서가 가브리엘을 올려다보는 구도였는데 아서는 그 점이 꽤 마음에 들었다.
‘리엘, 머리도 쓰다듬어 줘.’
기사의 손에 뺨을 부비며 요구하자 가브리엘이 아무 말 않고 아서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었다. 신기할 만큼 자연스러운 손길이었다.
현실에선 당연하다는 듯이 아서에게 몸을 낮췄던 기사가 꿈속에선 정반대의 위치에 존재했다. 그 간극이 재미있어 아서는 남몰래 숨죽여 웃었다.
‘이제 침대 위로 올라가고 싶은데…. 그래도 돼?’
이런 물음을 던지고 현실에서라면 어찌했을까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현실이었다면 아서가 이렇게 묻기 전에 가브리엘이 곧장 아서를 침상 위로 옮겨 주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아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올라오고 싶으십니까?’
‘응.’
가만히 아서를 내려다보던 가브리엘이 눈을 깜빡였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슨했다.
기사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이런 때 꿈속 가브리엘은 제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했다. 오로지 저만 아서를 만질 수 있다는 듯, 촉감 좋은 인형 쓰다듬는 양 아무런 사심 없이 아서의 뺨이나 머리칼을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가브리엘에게 꿈속 아서는 그의 안 어딘가에 내재되어 있는 무가치한 욕망 덩어리 취급을 받았다. 그 취급이 아주 박하기 짝이 없었다. 아서는 그런 취급을 당하는 게 재밌어서 가브리엘의 꿈속으로 들어가는 걸 즐겼다.
‘…안 됩니다. 거기 그대로 계세요.’
잠깐 사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가브리엘은 침대 위로 올라가고 싶단 아서의 요구를 거절했다.
‘왜?’
‘보나 마나 발정이 나 달려들 게 뻔하지 않겠습니까. 잠자코 거기 계세요.’
아서를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는 발언이었다. 아서는 그간 제가 너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기만 했나 싶어 잠깐 반성했다.
물론 자기반성은 정말 찰나로 그쳤다. 아서는 투덜거리며 가브리엘에게 말했다.
‘그럼 이대로 가만있으라고? 사람을 바닥에 앉혀 놨으면 하다못해 뽀뽀라도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
‘아까 아바마마께서 하신 거 봤잖나. 그것처럼 해 줘.’
아서의 당당하다 못해 뻔뻔한 요구에 가브리엘이 미묘한 얼굴을 했다.
‘응? 어서.’
자괴감인지 놀라움인지 알 수 없는 기사의 표정에 아서가 재차 입맞춤을 조르듯 끌어 내린 손끝에 입을 맞췄다.
그가 제 요구를 들어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 반복된 꿈속에서 가브리엘이 아서에게 키스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혀로 핥으면 싫어하려나?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아서는 슬쩍 혀로 그의 손등을 핥았다. 입술로 손가락 끝을 물고 흘끗 위를 올려다보았다.
웬일로 가브리엘이 별말 없이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오늘 같은 날은 조금만 건드려도 즉각 밀어냈으면서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침묵을 허락으로 여긴 아서가 좀 더 부지런하게 움직여 그의 손가락을 적셨다. 한창 몰두하여 손등 위로 올라온 푸른 핏줄을 눈으로 감상하며 입 안의 것을 희롱하는데, 예고도 없이 검지가 깊숙이 잇새를 파고들었다.
‘아.’
갑작스러운 침입에 반사적으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혀뿌리를 건드리는 게 괴로워 뒤로 물러나자 가브리엘이 물었다.
‘너무 깊습니까?’
아서는 고개를 저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행동이라 놀란 거지, 그의 손길을 거부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가만히. 핥지 마십시오.’
가브리엘이 특유의 금속성을 띤 눈으로 아서를 응시했다. 한 점의 욕망도 비치지 않는, 무언가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연이어 가장 긴 중지가 잇새를 파고들었다. 입 안의 구조를 파악하려는 것처럼 손끝이 입 속을 천천히 더듬었다. 아서는 눈꺼풀을 내리깐 채 얌전히 가브리엘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혓바닥을 검지로 두드리는 감각이 선명했다. 그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숨이 짧아져 흉곽이 조금씩 가쁘게 부풀었다. 뺨이 점차 달아올랐다.
‘전하.’
그 광경을 목격한 가브리엘이 시선을 더 아래로 내렸다.
‘무얼 했다고 또 좆을 세우셨습니까.’
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답을 바란 질문은 아닌 것 같았다. 혀가 꾹 눌려 있어 아서는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없었다. 벌어진 턱이 가늘게 경련했다. 목에선 신음에 가까운 음성만이 가늘게 흘러나왔다.
살짝 방향을 튼 손가락이 이번엔 입천장을 느긋하게 긁었다. 피부 표면 아래 어딘가가 간질거렸다.
‘여기가 좋습니까?’
‘…응.’
웅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입가를 타고 흘러내리기 직전, 가브리엘이 다른 손으로 훔쳐 냈다.
‘여기는?’
‘…….’
아서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말하는 투엔 고저가 없었다. 예민한 부위를 알아내듯 점막을 더듬던 손이 이내 아무런 미련 없이 입 안을 빠져나갔다.
‘…이게 끝이야?’
순간 허망해진 아서가 물었다. 무언가 할 것처럼 굴더니, 역시나 또 아서 혼자만 애를 태우고 있었다.
꿈에서든 현실에서든 가브리엘은 충동적으로 구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아서가 선을 뛰어넘는 짓만 하지 않으면 그는 대개 정적이고 차분했다. 아서로선 지극히 불만스러운 일이었다.
순순히 입 안을 내어주었으면 돌아오는 보상이 있어야 할 게 아니냐며, 아서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불만을 토로하려 고개를 치켜들었을 때였다.
‘…아.’
입꼬리 옆에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점잖게 내려앉은 것이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고 살며시 도장을 찍더니, 조용히 떨어졌다.
콧대가 스칠 듯 말 듯 한 거리를 두고 가브리엘이 있었다. 손가락 한 마디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서 시선을 마주하자 깊은 홍채가 고스란히 들여다보였다. 황금색 홍채에 은가루를 흩뿌린 듯한 빛깔이 신비로웠다.
아서의 입꼬리가 슬금 말려 올라갔다. 가브리엘에게는 악몽일 꿈이 어째 아서에게는 정반대의 것인지 모르겠다.
‘…이런 걸 하고 싶었던 건가.’
가브리엘이 혼잣말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전날 황제가 했던 짓이 가브리엘을 자극한 듯, 입맞춤 같은 가벼운 스킨십에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던 기사가 안 하던 행동을 한다.
신이 난 아서는 내심 어깨를 들썩였다. 눈앞에 잘 차린 밥상이 있는데 마다할 아서가 아니었다. 아서는 이번엔 굳이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살짝 틀어 가브리엘에게 입을 맞추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담백하게 맞닿았다. 산뜻해 보일 만큼 아무 욕망이 드러나지 않는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아서가 뒤로 살짝 물러나다 한 번 더 입을 맞추었다. 시선이 담백하게 마주쳤다.
한 차례 눈을 깜빡인 기사는 다가간 아서를 밀어내지도 당기지도 않았다. 그는 제 무의식이 만들어 낸 산물인 아서가 무슨 짓을 하는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
집무실 탁상 위로 해가 쏟아져 내렸다.
평상시였다면 대련을 핑계로 연무장으로 향했을 아서가 웬일로 반듯하게 앉아 서류를 훑고 있었다. 한 장씩 빠르게 읽어 내리는 눈길이 무심했다.
아서는 기계적으로 서류를 넘기는 동시에 제 업무와 조금도 연관 없는 딴생각을 이어 갔다. 다행히 그간 황태자로 지내 온 시간이 헛된 것은 아니라,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간에 업무를 보는 모습만큼은 그럴싸해 보였다.
아서의 머릿속을 채운 건 주로 일주일 전 꿈에 관한 생각이었다.
가브리엘이 황제 덕에 무언가 자극당한 것 같은데 이걸 날름 주워 먹어도 될지, 아서는 그날 이후 여러 고민으로 일주일이란 시간을 보냈다.
그가 어울리지 않게 일주일이나 시간을 끌었던 건 전부 카를로스 때문이었다.
아서는 당장의 충동을 억지로 참는 성격도 아니었고, 하고 싶은 건 곧 죽어도 해야 하는 인간이었다. 카를로스의 존재가 신경 쓰이지 않았다면 아서는 고민할 것도 없이 꿈을 본 다음 날 가브리엘을 침실로 끌어들였을 것이다. 카를로스와 그가 연인 사이도 아니건만 무얼 이렇게까지 망설이는 건지, 이런 제 모습이 낯설었다.
아서가 예상한 카를로스의 반응은 크게 추려 두 가지였다. 아서에게 정이 떨어지거나, 아니면 오히려 더 강하게 집착하게 되거나. 이왕이면 옆에는 끼고 있되 황후위에 대한 마음만 접어 줬으면 좋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서의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아서는 일주일 내내 이어졌던 고민을 오늘부로 끝냈다. 일단 코앞에 놓여 있는 건 어찌 됐든 손에 쥐어 봐야겠다고, 그리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 주춤거리는 건 저와는 어울리지 않는 짓이었다. 그의 손이 정확하고 신속하게 서류를 넘겼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자 처리 속도가 보통 때보다 두 배는 더 빨라졌다.
“아니, 웬일로 전하께서….”
탁상 위로 서류가 쌓이는 것을 본 부관 에드윈이 감격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러다 정작 제 할 일 하는 걸 잊어버려서 아서에게 일은 안 하고 뭐 하냐는 타박까지 들었다. 제 상관의 입에서 나올 거라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고 에드윈은 다시 한번 더 크게 감격했다.
오후 단련 시간까지 투자해 아서는 서류 작업을 끝마쳤다. 그가 후련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 다리가 밀려나는 소리에 가브리엘이 고개를 들었다. 아서는 집무실 문으로 걸어가며 기사에게 손짓했다.
“가브리엘, 따라와.”
“오늘 대련은 하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아서가 늘 챙겨 다니던 검을 두고 나가자 가브리엘이 물었다.
“…오늘은 좀 다른 걸 해 보려고.”
집무실을 나온 아서는 연무장과는 반대 방향인 침실 쪽으로 향했다. 가브리엘은 늘 그렇듯 아서보다 몇 발자국 뒤에서 따라붙었다.
아서의 눈엔 그 몇 뼘의 간격이 마치 그들의 애매한 관계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사는 얼핏 아서에게 헌신적인 양 굴지만 일정 선을 그어 두고 그것을 넘지는 않았다. 아서를 만지는 데엔 거리낌이 없으나 제 몸을 아서가 건드리면 부드럽게 밀어냈고, 입을 맞춘 적은 전무했다.
아서는 이번 기회에 가브리엘이 쳐 둔 벽을 완전히 허물어뜨릴 생각이었다. 내세울 명분은 이러했다. 가브리엘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고 싶다는 호기심 반과, 그와 몸을 섞어 카를로스를 상처 주고 싶단 마음 반.
“전하, 오셨습니까.”
“그래. 수고해.”
침실 앞에 서 있던 기사 둘이 아서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평소와 다르게 말끔한 모습인 아서를 보고 그들은 아서가 낮잠을 자러 왔겠거니 짐작한 듯했다.
방 안으로 들어간 아서는 목 끝까지 갑갑하게 잠겨 있던 단추부터 풀어 내렸다. 그 상태로 침대 끄트머리에 털썩 주저앉자 단정하던 모습이 삽시간에 불량해졌다.
“가브리엘, 이리 와.”
“예.”
대련도 마다하고 무작정 침실로 끌어들이는 게 이상해 보일 법도 한데, 기사는 무언가 토를 다는 법이 없었다.
가브리엘이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고 아서의 눈높이 아래로 내려갔다. 전날 꿈과는 정반대의 구도였다.
“오늘 그대를 여기까지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하나 생겨서 그래.”
다리를 꼬아 앉은 아서가 턱을 괴며 몸을 숙였다. 그리곤 기사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곤 말했다.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일단 들어는 보겠어?”
“예, 말씀하십시오.”
“떠올려 보니 그렇더군. 시중을 들 때에 늘 그대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 나랑은 정반대였어.”
“…송구합니다, 전하. 아무렇지 않다는 게 무슨 뜻이신지요.”
“매번 나만 망가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나.”
그 점이 자존심이 상했다는 듯 눈썹을 까닥인 아서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거야.”
“예.”
“나도 그대를 한번 만져 보고 싶어.”
“…….”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기에 가브리엘이 미간을 좁혔다. 드물게 말문이 막혀 침묵했던 기사가 물었다.
“전하께서, 제 몸을 말입니까.”
“응.”
일말의 수줍음도 엿보이지 않는 짤막한 답이었다.
가브리엘의 시선이 아서에게로 가 닿았다. 갑작스러운 제안을 하고도 아서는 제가 거부당할 가능성을 전혀 점치지 않는 듯했다.
기사를 빤히 응시하는 눈동자는 말간 빛을 띠고 있었다. 가브리엘에게 어떤 욕망을 느낀다기보단 그저 타인의 몸을 만져 보고 싶다는 호기심에 건넨 청으로 보였다.
“예,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그리하십시오.”
가브리엘도 다른 사심을 담지 않고 담백하게 답했다. 기본적으로 가브리엘은 성욕을 하등 불필요한 것으로 여겼다. 누군가 제 몸을 만지는 행위나 성적인 자극 자체를 꺼렸지만, 그럼에도 그는 아서가 육체적 쾌락에서 즐거움을 찾으려 한다면 다른 이가 아닌 그 자신을 이용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카를로스의 화를 부추기기 위해 건넨 제안이어도 그를 이용하는 편이 나았다. 아서와 정사를 치르고 살해당하지 않을 이로는 아서의 주변에선 가브리엘이 유일무이할 것이므로.
“좋아. 그럼 여기로 올라와.”
“예, 전하.”
아서가 침대 한가운데를 향해 턱짓했다. 가브리엘이 몸을 일으켜 아서가 가리킨 곳에 자리 잡았다.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그대는 가만히 있어.”
“…예. 그리하겠습니다.”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가브리엘 위로 아서가 올라탔다. 단발성 불장난으로 끝날 놀이에 꽤 흥미가 생겼는지 아서의 눈동자가 반짝 빛이 났다. 꼭 못된 장난을 칠 생각에 신이 난 아이 같았다.
가브리엘에겐 이러한 아서의 변화가 어떤 면에선 당연해 보였다. 다른 모든 성취와 즐거움을 강탈당한 아서가 육체적인 쾌락으로 시선을 돌리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느껴졌다.
그의 살결을 다짜고짜 탐한 건 손이 아닌 입술이었다. 아서 특유의 체향이 코끝으로 스며들어 와 기사는 살갗에 닿은 감촉을 뒤늦게 인지했다.
이를 세워 살갗을 잘근 깨물던 아서가 한 손으로 가브리엘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허리춤을 더듬던 손이 옷자락을 파고들어 와 복부를 더듬었다. 그 손길은 어설펐으나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의 그것처럼 거침이 없었다.
몇 차례 두 형제의 정사를 지켜본 적이 있었던 터라, 기사는 아서가 하는 행위 대부분이 카를로스의 것을 베껴 온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가 느끼는 감정과는 별개로 육체는 눈앞의 아서에게 조금씩 반응을 했다.
그의 몸을 만지는 아서에겐 어쩌면 허무한 소리겠지만, 저를 건드리는 손길보다 길게 내리깐 아서의 속눈썹과 발긋하게 달아오른 귓바퀴, 간간이 뱉어 내는 숨결처럼 아서가 의도하지 않은 것들이 그에게 더 큰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단추를 풀어 내던 아서의 손이 세 번째 단추에서 몇 차례 헤맸다. 그게 답답했는지 아서가 옷감을 손으로 뜯어내 버렸다. 단추를 침대 어딘가에 내팽개친 그는 가브리엘의 옷을 못 쓰게 만들어 놓곤 본인이 불만을 토로했다.
“기사 제복은 쓸데없는 장식이 너무 많아.”
“…괜찮으시다면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가브리엘이 양팔로 아서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팔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평상시 시중을 들 때처럼 건넨 말에 아서가 무의식적으로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옷자락을 거머쥔 손이 그대로 상의를 끌어 올려 한 번에 벗겨 냈다.
가브리엘은 벗긴 옷을 가지런히 접어 머리맡에 두고, 부스스해진 아서의 머리칼을 정돈해 주었다. 그 일련의 과정이 너무나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미처 아서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
딱히 아서는 옷을 벗을 생각이 없었건만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벗겨져 있었다. 황당하게 바라봐도 가브리엘은 별거 아닌 일이라는 듯 담담한 얼굴이었다.
아서를 먼저 벗기고 난 후에야 기사는 비로소 제 상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내렸다. 벙쪄 있던 것도 잠시, 아서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기사의 상반신을 훑었다. 그간은 가브리엘이 딱히 탈의할 일이 없었으니 맨살을 드러낸 건 이번이 처음인 셈이었다.
아서의 눈동자가 곧게 뻗은 목을 타고 내려가 널따란 어깨부터 가슴팍까지 훑었다. 흠잡을 곳 없이 완벽히 다듬어진 육신엔 의외로 군데군데 희미한 흉터 자국이 남아 있었다.
가브리엘이 아서를 자신 쪽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아서가 그의 몸을 처음 보듯이, 그도 욕실이 아닌 장소에서 이런 식으로 아서와 닿아 있는 것이 처음이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굳이 좋은지, 싫은지로 단순명료하게 구분하자면 좋은 쪽에 가까웠다. 보다 정확히는 만족스러운 것이라 일컬어야 했다.
“좀 어색하긴 하네….”
아서 역시 이 상황이 낯설었는지 신기한 걸 관찰하듯 손끝으로 기사의 목 줄기를 훑어 내렸다. 그 별것 아닌 접촉에 목덜미의 솜털이 곤두섰다.
가브리엘이 긴 숨을 들이마시며 익숙한 체향을 폐부 깊숙한 곳까지 밀어 넣었다. 이제 더는 제가 하는 행위가 목욕 시중에 불과한 것이라고 변명할 수조차 없다.
흰 살결 위에 자리한 붉은 자국들을 그가 엄지로 쓸어내렸다. 손에 닿는 살결은 희고 매끄러웠다. 어째서 이 위로 셀 수 없이 많은 자국이 남겨져 있는지 그 이유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아.”
아직 다 낫지 않은 잇자국을 꾹 누르자, 아서가 짧은 신음을 흘렸다.
“…상처가 다 낫지 않았나 보군요. 죄송합니다.”
기사는 태연한 목소리로 사죄했다. 손을 옮겨 연한 색의 유륜을 모양 따라 엄지로 천천히 덧그렸다. 붉은 상처 위로 제 흔적을 덧바르듯 혀로 쓸어내렸다. 그가 건드리는 대로 아서의 몸이 움찔움찔 튕겼다.
조금만 자극해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몸이 사랑스러웠다. 타인의 손길은 매섭게 쳐 내는 이가 가브리엘에겐 그렇지 않다는 것도 그러했다.
아서와 시선이 마주쳤다. 여전히 밀어내는 손길은 없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명에 그리하겠다고 답했던 기사가 언제 그랬냐는 양 태도를 바꾸었는데, 아직까지 아서는 무엇이 잘못됐는지 깨닫지 못한 듯했다.
가브리엘이 아서의 고간에 고개를 묻었다. 좀 더 무방비하게 풀어진 아서를 보고 싶었다. 부드러운 천 아래 선명히 모양을 드러낸 성기를 입술로 가볍게 물었다.
익숙한 체향과 사내의 풋내가 뒤섞여 코끝에 닿았다. 혀를 내밀어 꾸욱, 짓누르듯 핥자 반쯤 흥분해 있던 성기가 순식간에 단단해졌다.
“…아.”
당황한 아서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가 가브리엘, 하고 불러도 기사는 착실히 대답만 할 뿐 하던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도리어 골반 언저리 살이 파일 정도로 꽉 쥔 손으로 아서의 하반신을 끌어당겼다.
물컹한 혀가 다리 사이를 길게 핥았다. 천 위로 혀가 스치는 소리와 함께 바지 앞섶이 조금씩 젖어 들었다.
“읏, 잠깐….”
얇은 천 한 겹 너머에서 주어지는 자극이 낯설고 자극적이었다. 등허리를 타고 차오르는 성감에 점차 농밀한 숨이 새어 나왔다.
아서에겐 익숙하지 않은 자극이었다. 카를로스는 아서의 좆을 적셔 봤자 어느 곳에 쓸모가 있겠냐며, 오로지 뒤만을 눅진해질 때까지 혀로 핥아 주었던 탓이다.
“으, 응….”
어느새 아서는 기사의 머리칼을 쥔 채 얕게 허리 짓을 하고 있었다. 부족한 자극을 채우려는 본능적인 몸짓이었다. 그를 알아차린 가브리엘이 손을 옮겨 허리끈을 풀어냈다.
“아….”
하의가 내려가며 발기한 기둥이 튕기듯이 모습을 드러냈다. 끝부분이 축축하게 젖은 성기가 기사의 뺨을 툭 쳤다.
다분히 굴욕적으로 느껴질 법한 상황이었으나 기사는 태연하게 아서의 성기를 쥐고 제 뺨에 붙였다. 그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구니 정작 당하는 아서만 당혹스러웠다.
“…뭐 하는 거야, 더럽게.”
더럽다는 아서의 말에 가브리엘은 도리어 보란 듯이 혀를 내밀어 성기 끝을 핥았다.
“전하의 것은 신기하리만큼 전하를 닮았습니다. 하얗고, 예쁘고.”
가브리엘이 완전히 단단해진 성기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아서는 별게 다 예쁘다며 중얼거렸지만 아서의 몸 어느 부위를 봐도 더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나하나 예쁘지 않은 부분이 없었고, 성기조차 아서와 똑 닮아 하얗고 모양도 휜 곳 없이 곧았다.
뺨에 문질렀던 성기를 떼어 내자 뺨에 묻어난 선액이 가느다랗게 늘어났다. 평소보다 붉은색을 띤 입술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축축한 점막이 성기의 선단을 살며시 머금었다. 맛을 보기라도 하듯 기사는 성기 끄트머리를 입에 담고 소리를 내며 빨아들였다.
모순적이게도 이런 때조차 가브리엘은 여전히 단정한 자태를 잃지 않았다. 살랑이는 은발과 내리깐 눈꺼풀이 청초하기까지 해서, 꼭 아서가 무고한 기사를 앉혀 두고 강제로 구음을 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성기를 깊게 머금은 가브리엘이 고개를 천천히 움직였다. 열 오른 점막이 성기를 진득하게 빨아들일 때마다 아서는 희미한 신음을 흘렸다.
“흐, 읏….”
어찌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던 아서가 기사를 밀어내지도 당기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가브리엘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좀 더 편안히 계시겠습니까, 전하.”
그가 아서의 몸을 가볍게 밀어 그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도록 유도했다. 동시에 다른 손으론 허리끈을 풀고 하의를 끌어 내렸다.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진 하의는 탈의가 손쉬운 편이었다. 발목에 걸린 것을 한쪽씩 빼내니 기어이 몸을 가리고 있는 천이 전부 사라졌다.
순식간에 나신이 된 아서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아무리 오랜 경력을 지닌 시종이라도 이토록 자연스럽지는 못할 것 같았다.
“자세가 불편하진 않으십니까?”
“…불편하진 않지만.”
허리 뒤에 쿠션을 받쳐주며 묻는 말에 아서가 미심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이상하단 생각을 하는 양 굴면서도 고분고분하게 답은 했다.
가브리엘이 몸을 숙여 성기를 길게 핥았다. 그가 목구멍을 열고 입 안 점막만을 이용해 성기를 깊게 빨았다. 서적으로 배운 어설픈 구음은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만은 않았다.
“……으….”
기사의 손에 잡힌 허벅지가 파르르 경련했다. 선단 갈라진 틈을 혀로 파고들자 아서가 몸을 떨며 신음을 흘렸다. 소리가 샐 때마다 목울대가 선명하게 일렁였다.
좆을 빠는 동안 기사는 아서를 관찰했다. 아서의 턱이 위로 치켜 올라가 긴 목선이 하얗게 드러났다. 흰 뺨이 발그레 달아오르고, 오만해 보이던 눈매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다리를 벌려 제 치부를 훤히 드러내고도 아서는 스스로의 모습이 어떠한지 자각하지 못했다.
아서는 구음을 더러운 행위처럼 취급하였지만 그 누구도 이 모습을 보고 그렇게 매도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볼 수 있다면 그 어떤 난잡한 행위도 기꺼이 자처할 이들이 쏟아져 내릴 텐데, 아서만이 그 사실을 몰랐다.
기사는 양 오금을 쥔 손으로 아서의 하반신을 위로 밀어 올렸다. 타액으로 젖은 살결이 희게 번들거렸다. 곧게 뻗은 성기와 둥그런 음낭과 회음부 아래 옅은 색을 띤 입구까지, 타액으로 난잡하게 젖은 다리 사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거부감과 쾌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아서는 결국 주어지는 쾌락에 굴복한 듯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지금 제 모습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사람처럼 가만히 늘어져서 열이 오른 숨만 들이쉬었다.
살 기둥을 핥아 대던 입술이 허벅지를 희롱하다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 들리는 것이라곤 무언가 빨아들이는 질척한 소리와 간간이 새어 나오는 한숨 같은 신음이 전부였다.
오금을 쥐고 있던 손이 내려가 둔부를 움켜쥐고 벌렸다. 아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며 묻기도 전에 물컹한 혀가 구멍에서부터 길게 회음부를 핥아 올렸다.
“잠깐, 거긴 이상한… 읏!”
간지러운 감촉에 발끝이 움츠러들었다. 회음부를 훑은 입술이 이번엔 음낭을 머금었다. 츠읍, 츱, 물기 어린 소리가 귓전을 녹여 낼 것처럼 진득하게 들러붙었다. 아서에게 들려주고자 부러 젖은 소리를 내는 것도 같았다.
가브리엘이 입 안에 든 것을 혀로 부드럽게 굴렸다. 한 손은 아서의 성기를 수음하고 있는 채였다.
강압과 고통이 배제된 부드럽기만 한 자극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아서는 반쯤 고문당하는 기분으로 죄 없는 입술만 짓씹었다.
“아, 하아, 흐윽….”
팽팽하던 복부가 훅 조여들었다. 번지는 열감을 견디지 못해 흘려 낸 파정액은 가브리엘이 거리낌 없이 목으로 넘겼다. 정액이 목울대를 넘어가는 소리가 선명했다.
회음부를 더듬던 손이 아래로 내려가 구멍을 벌리고 들어갔다. 의도치 않게 이미 아서에 대해 아는 바가 많은 가브리엘이었다. 파고든 손끝이 예민한 극점을 한 번에 찾아 짓눌렀다.
“아…!”
사정의 여운에 젖어 있던 몸이 파드득 떨렸다. 반쯤 감겨 있던 눈이 크게 뜨였다. 갓 사정한 성기를 점막으로 빨아들이며 아래까지 꾹꾹 들쑤시자 시야가 흐릿해지는 기분이었다.
“하, 으읏….”
차라리 이대로 좆을 쑤셔 넣어 줬으면.
아서의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괴로운 자극에 몸을 비틀던 아서는 결국 침대를 짚고 일어나 가브리엘을 밀어 넘어트렸다. 간당간당하게 이어지던 인내가 툭 끊긴 순간이었다.
안달 난 몸짓으로 기사의 무릎 위로 올라타자 가브리엘이 아서가 원하는 대로 순순히 물러났다.
“빨리….”
어설픈 손길로 허리끈을 풀어 내리는 동안 기사는 가만히 그가 하는 바를 방관했다. 밀어내지도 당기지도 않는 게 꼭 꿈을 연상시키는 태도였다. 처음부터 한껏 개방하고 있던 페로몬이 쓸모가 없었다.
저 차분한 황금안은 유혹적이기도 하나 한편으론 얄미운 감이 있었다. 손으로 더듬은 고간에 발기한 흔적이 없었다면 그가 성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대로면 끝까지 이런 식으로 흘러갈지 몰랐다. 가브리엘 저는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서, 끝까지 한 발짝 뒤에서 방관하듯이 말이다.
“하아, 할래. 빨리….”
아서는 정신이 나간 척 기사의 하의를 풀어 헤쳤다. 총기를 잃은 붉은 눈이 기사의 얼굴이 아니라 고간에 붙박였다. 그 노골적인 시선에 담긴 함의는 제아무리 눈치 없는 자라도 쉽사리 알아차릴 만큼 뚜렷했다.
아서가 두꺼운 성기를 손에 쥐었다. 몸을 들어 그 위에 주저앉으면서, 가브리엘보다 삽입 자체가 목적인 양 시선을 결코 위로 올리지 않았다. 초점이 사라져 흐릿해진 눈은 이미 이성이 휘발된 지 오래였다.
“윽….”
입구만 살짝 벌어졌을 뿐인데 고통 섞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고작 손가락 하나만 들어갔던 구멍으로 이만한 크기의 성기가 쉽게 들어올 리가 없었다.
부러 자세를 흐트러뜨려 휘청거리던 아서가 기사에게 사납게 말했다.
“자꾸, 미끄러지잖아. 잡고 있어.”
“…이렇게 말씀이십니까.”
노골적인 도구 취급에 기분이 상할 만도 했는데 기사는 얌전히 명을 따랐다.
“그래, 그렇게.”
가브리엘의 손이 검붉은 성기 밑동을 움켜쥐었다. 두껍고 기다란 기둥에 핏줄이 위협적으로 도드라졌다. 성욕이라곤 한 줌도 없을 것 같은 청빈한 얼굴을 하고선 저런 걸 달고 있다.
아서는 근육으로 빚어진 복부에 양손을 지탱했다. 재차 삽입을 하려 애썼지만 성마른 몸짓으론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 윽….”
꾸욱, 두꺼운 귀두가 아래를 가르고 들어왔다. 입구가 벌어지며 빠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살 기둥을 꾸역꾸역 집어삼킨 입구가 팽팽하게 늘어났다.
하아, 기분 좋아. 아서는 만족스럽게 눈매를 찌푸리곤 조금 더 무게를 실어 앉았다. 파정 후 반쯤 일어나 있던 성기가 저릿한 고통과 함께 서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내뱉는 신음 속 열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아서는 허공에 잠깐 멈춘 채로 보란 듯이 숨을 헐떡였다. 가브리엘이 이런 저를 관찰하고 있을 것을 알고 있었다.
가만히 아서를 지켜보던 기사가 입을 열었다.
“태자 전하.”
“…흐…, 왜.”
아서는 그의 부름에 고개도 들지 않고 건성으로 답했다.
“전하께선, 이런 걸….”
몸을 비스듬히 일으킨 가브리엘이 아서의 성기를 응시했다.
건드린 적도 없는 선단 끝에 몽글몽글 액이 맺혔다. 억지로 성기를 삽입하는 때에, 느껴지는 것이라곤 아래를 쑤시고 들어가는 고통밖에 없을진대.
“…지금처럼, 조금은 아픈 걸 좋아하시는군요.”
담담하나 확신이 담긴 어조로 기사가 말했다. 아서는 짐짓 당황한 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가브리엘은 예상보다 빨리, 그리고 단번에 핵심에 도달했다.
속으로 고개를 주억거린 아서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기사를 노려봤다. 이런 상황에도 가브리엘은 여전히 평온한 모습이었다.
아서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얼굴로 짜증스럽게 시선을 내렸다. 그러곤 멈췄던 삽입을 마저 이어 가고자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가 몸을 움직이던 순간이었다.
“아…!”
철퍽, 하는 소리가 실제로 난 건지 제 머릿속에만 들린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불쑥 튀어나온 손이 아서의 골반을 쥐고 단번에 아래로 처박았다.
급작스럽게 달려든 고통에 아서가 입을 뻐끔거렸다. 불로 달군 작살이 제 몸을 꿰뚫고 들어온 것만 같았다.
“하윽…, 아, 파….”
무의식적으로 벗어나려 뒤로 물러나자 단단한 몸이 저를 감싸 안았다. 벗어날 수 없게 속박하고선 그대로 삽입된 성기를 재차 강하게 쳐올렸다.
“흑…!”
아서가 신음하며 허리를 비틀었다. 깊어진 삽입에 저절로 몸이 맥없이 떨렸다.
가브리엘이 시선을 내려 여전히 빳빳하게 일어선 아서의 것을 바라보았다. 선단에서 액을 흘리는 모양새를 보고 그는 재차 확신했다.
힘줄이 꿈틀대는 팔이 아서를 꽉 옥죄었다. 벗어날 길 없이 가둔 채 아래를 들쑤시기 시작했다.
“흐, 으…, 아…!”
배 속을 꽉 채운 성기가 내벽을 무도하게 가르고 들어갔다. 가른다기보단 꿰뚫는다는 표현이 더 옳을지 몰랐다.
골반을 붙든 손은 빠져나갈 땐 아서를 위로 들어 올리고, 박아 넣을 땐 사정없이 내리꽂았다. 그때마다 철썩, 철썩. 살을 때리는 지저분한 소음이 터졌다.
시야가 위아래로 마구 흔들려 아서는 제대로 눈을 뜨고 있을 수조차 없었다. 아으, 윽, 벌어진 잇새로 정제되지 못한 신음이 마구 비집고 나왔다.
서서히 뒤로 기울던 몸이 풀썩 쓰러지고 다리가 활짝 벌어졌다. 벌어진 둔부 사이를 번들거리는 성기가 가르고 들어갔다. 거칠고 강압적인 삽입에도 아서의 성기 끝엔 여전히 투명한 액이 맺혀 있었다.
“윽, 하아….”
귓바퀴를 지분대던 가브리엘이 참지 못하고 목울대를 울리며 숨을 뱉었다. 여느 때보다 깊어진 눈매에 짙푸른 음영이 서렸다.
“전하, 하아. 께선….”
기사가 아서의 오금을 손에 쥐었다. 무릎이 접히게 밀어붙이곤 다시금 거친 허리 짓을 재개했다. 끊어 먹을 것처럼 조이는 내벽이 그에게도 고통이었기에 반듯한 미간이 어렴풋이 찌푸려졌다.
“아, 윽…!”
“이런, 게, 좋으십니까?”
그는 마치 불쾌한 듯 물었다. 늘 입가에 머물던 옅은 웃음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미소가 사라진 낯은 청초한 분위기가 흐르던 이와는 다른 사람인 것처럼 서늘했다. 눈가엔 미약한 한기마저 맴도는 듯했다.
“그런, 거, 아……!”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몸통을 드러낸 성기가 다시 뿌리 끝까지 처박혔다. 근육으로 촘촘하게 짜여진 강건한 몸이 아서를 찍어 누를 것처럼 뒤덮었다.
“흐, 으…!”
반복된 삽입에 성기를 끊어 낼 것처럼 조이던 내벽이 서서히 풀어져 쑤셔 박는 대로 조붓하게 조였다 풀리길 반복했다.
메마른 입술을 훔치며, 기사는 주인에게 좆을 박아 넣는 행위를 이어 갔다. 제 눈앞에 있는 아서를 제외하고는 주변의 모든 것이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다.
태어나 처음 치르는 정사였다. 육체적 고통이라면 모를까, 이런 식으로 휘몰아치는 자극엔 그는 전혀 내성이랄 게 없었다. 첩첩이 쌓인 성감은 사내의 이성을 흐트러뜨리고 오직 날것의 본능만을 따르도록 강제했다.
정염에 휘둘리는 감각은 불쾌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이 황홀하다. 굳이, 이 갈급한 충동을 억누를 필요가 있을까.
“…전하.”
기사가 손을 뻗어 아서의 뱃가죽을 꾸욱 짓눌렀다. 좀 전부터 둥그런 윤곽이 보이던 곳이었다.
“…뭐, 하윽……!”
뱃속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아서가 숨을 들이켰다. 잔뜩 움츠러든 내벽을 가르고 들어간 성기가 극점을 치받았다.
밀려든 쾌감이 사라지기도 전에 다시금 살 기둥이 푹 쑤셔 박혔다. 엉덩이 살을 후려갈기듯 부딪힌 음낭이 시끄러운 마찰음을 일으켰다. 아서는 저도 모르게 흐느끼는 듯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읏, 잠…! 배가…. 이상, 한…,”
아랫배를 누른 손과 성기가 맞닿을 것만 같았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숨이 턱 막혔다. 짓눌리는 건 뱃가죽이건만 목이 졸리는 것만 같았다.
아서가 거친 숨을 들이켰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소름이 두려움인지 희열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치켜든 턱이 볼품없이 벌벌 떨렸다. 온몸이 납작하게 짓눌린 채로는 물러날 곳도 없었다. 아래를 헤집는 성기가 집요하게 극점만을 때렸다.
“아, 아파…. 아, 윽…!”
예민하게 부어오른 내벽이 집요한 삽입을 견디지 못하고 고통을 호소했다. 힘없이 흔들리던 성기에서 울컥 파정액이 흘러내렸다. 아서는 제대로 된 신음조차 흘리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순식간에 들이닥친 절정에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희끄무레한 액만 줄줄 흘렸다. 발끝부터 밀려든 날카로운 쾌락이 온 신경을 쥐고 당기는 듯했다.
혼몽한 와중 입가에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살며시 닿았다 떨어졌다. 정신을 놓고 있었다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을, 깃털처럼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아서의 넋을 빼놓고 가브리엘 역시 제가 하고 싶었던 행위를 했다.
아서는 손에 닿은 너른 등을 끌어안았다. 이윽고 질끈 눈을 감아 버리자 그를 기점으로 몸을 위아래로 뒤흔들던 추삽질이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게 가빠졌다. 철썩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작은 애원 따위는 잔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
닫힌 창 너머로 새벽이 밀려온다. 저 멀리 보이는 궁성을 배경으로 희끗하게 날리던 눈발은 한 겹 쌓이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녹아내렸다.
아서는 얇은 침의 하나만을 걸친 채로 침대 헤드에 기대앉았다. 가브리엘이 정성껏 씻고 말려 준 몸은 뽀송했고, 흰 뺨에는 은은한 혈색이 감돌았다.
만족스러운 정사를 치른 덕인지 그는 평소보다 아주 너그러운 상태였다. 이런 기분으론 황제가 그를 불러 어떤 헛소리를 한다 해도 즐겁게 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창밖으로 눈송이가 하나둘 휘날렸다. 눈이 내리는 걸 보니 정말로 제 탄신연이 얼마 남지 않은 게 실감이 났다.
지금이야 해가 뜨면 말라 버릴 눈도 아서의 탄신연이 다가오는 때엔 소복이 황도를 뒤덮을 것이다. 아서는 제 탄신연을 썩 즐기진 않았지만, 예외로 이 시기에만 볼 수 있는 새하얗게 빛바랜 황도의 풍경은 좋아했다. 눈으로 인해 뒤따를 불편은 차치하고 어찌 됐건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없는 절경이었기 때문이다.
한 해 대부분 맑은 날을 유지하는 황도에서 아서는 하필 가장 추운 날 태어났다. 그 덕분이라 해야 할지 매해 탄신연을 치를 때마다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뒤따르곤 했다. 궂은 날씨에 온갖 인간 군상들이 다 모이니 사고 없이 조용히 넘어간 적이 드물었다.
이번에도 별다를 건 없을 터였다. 금년엔 벌써부터 귀찮은 사건이 둘이나 예기되어 있다. 황제와 쌍둥이에 관한 일이었다.
사실 황제의 수작질은 크게 우려되지 않았다. 그쪽에서 무슨 짓을 하든 카를로스 측에서 철저히 방비를 해 두었을 테니 말이다.
거슬리는 건 역시 쌍둥이 쪽이었다. 아서가 원작대로 움직이지 않은 터라 그들이 어떤 식으로 암살을 모의할지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다행히 그 점은 마법사에게 살짝 귀띔을 해 두는 걸로 걱정을 덜 수 있을 듯했다. 아서가 원작처럼 휘둘려 주지 않는 한 쌍둥이 둘이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아서는 침대 헤드에 기대 있던 몸을 슬금슬금 내려 보드라운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좀 전부터 뺨을 찌르던 시선이 점점 더 따가워지고 있었다.
침실을 뒤덮은 정적은 고요하다기보단 부담스러웠다. 아서는 이불을 눈 밑까지 끌어 올리고 카를로스를 흘끗 곁눈질했다. 상대하고 싶지 않은 척 카를로스를 외면하는 데에도 한계가 찾아왔다. 언제까지 저렇게 쳐다보고 있을 셈이지 묻고 싶었다.
“…….”
침대 기둥에 기대선 카를로스는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아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 손으론 작고 동그란 단추 하나를 만지작거리길 반복했다.
화려한 양각이 새겨진 백금 단추는 불과 몇 시간 전 가브리엘의 옷을 벗기던 아서가 홧김에 뜯어 버린 것이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백금 단추는 얼핏 아서의 옷에 달려 있던 것이라고 무심코 넘길 법도 했으나….
침실로 들어서던 카를로스는 방을 나서던 가브리엘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구겨져 있던 옷깃과 단추가 떨어져 나간 셔츠. 놀란 것도, 그렇다고 의기양양한 것도 아닌 무표정한 얼굴. 기사는 제 흐트러진 차림새를 감추지 않았다.
그 모든 단서를 보고도 아무 일도 있지 않았으리라 생각할 만큼 카를로스는 안일하지 않았다.
“…형님.”
그가 이어지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눈치 살피는 꼴을 보니 돌려 물을 필요는 없어 보이네요. 요점만 묻죠.”
“…….”
“…가브리엘과 몸을 섞었습니까?”
그렇게 묻자 아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차라리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들은 양 단호히 부정해 주길 바랐건만, 형님은 그런 시도조차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대답해 보세요.”
“…….”
꾹 다물린 입술은 끝끝내 열리지 않았다. 아서는 카를로스를 노려보면서 동시에 은근히 그의 눈치를 살폈다. 성질대로 일을 저질러 놓고 막상 들이닥칠 후환이 두려운 듯 보였다.
형님. 카를로스가 재차 아서를 부르며 답을 종용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초조한지 아서가 입 안의 여린 살을 잘근댔다. 피가 돌아 새빨개진 입술이 달싹거렸다.
“이미 확신하고 있으면서 굳이 묻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군.”
“묻는 건 내 자유죠. 형님한텐 그걸 거부할 자유가 없고 말입니다.”
“……굳이 답을 들어야 하겠다면, 그래. 네가 생각하는 게 맞아.”
떨리는 목소리로 답한 아서가 카를로스에게서 등을 돌렸다.
“…헌데 내가 가브리엘과 몸을 섞었다 한들, 네가 간여할 바였던가.”
아서가 작게 중얼거렸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듣지 못할 속삭임으로 카를로스의 속을 뒤집어 놓고는 등을 보인다.
“너랑 한 약속 중에 다른 이와 몸을 섞지 말란 말은 없었어. 추궁하듯 굴지 마. 나는 아무 잘못도 안 했으니까.”
그의 속을 뒤집어 놓으려 작정한 것처럼 이런 말을 덧붙이기까지.
“…….”
카를로스는 화를 가라앉히려 숨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그 노력이 무색하게, 불씨가 번지듯 서서히 감정이 차올랐다. 몸속의 피가 차게 식었다가 거듭 끓어오르기를 반복했다. 아서는 여전히 그에게서 등을 보인 채였다.
또다.
“형님은, 또 이런 식으로….”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한 패턴이었다.
매번 아서는 이런 식으로 굴었다. 어떻게든 카를로스를 화나게 만들고, 카를로스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 도발에 형편없이 흔들리고.
얌전히 굴다가도 형님은 이따금씩 작정이라도 한 마냥 그를 건드렸다. 한 번 불이 붙으면 눈앞의 지름길을 놔두고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카를로스와 부딪히기 일쑤였다.
그럴 때 터진 갈등은 그가 작정하고 아서를 한계까지 몰아붙여야 잠시나마 소강되곤 했다. 그렇지만 그마저 오래가지 않았다. 아서는 카를로스가 짓밟아 꺼트린 불씨를 번번이 다시 점화시켰다.
아서도 이제는 카를로스의 감정이 어느 정도 깊이와 농도를 지녔는지 알았다. 카를로스가 제게 크게 집착하고 있으며, 무슨 짓을 벌여도 자신을 죽이지 못한다는 것 또한 눈치챈 지 오래였다. 아서가 이렇게까지 대담하게 굴 수 있는 이유였다. 이전 날의 뻔뻔하던 얼굴과 비교하자면 그나마 제 눈치라도 보고 있으니 사정이 나아졌다 여겨야 할까.
분명 객관적으론 카를로스가 모든 면에서 아서보다 확연히 우위를 점했다. 그는 아서의 치명적인 약점을 손에 쥐고 있었고, 심지어 아서의 양친을 살리고 죽이는 것조차 그의 선택에 달렸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무용하다.
이미 그의 형제는 이 비틀린 관계에서 누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지 인지했다.
카를로스의 감정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깊어졌다. 이제 그는 아서의 곁이 아니면 깊게 잠들 수가 없었다. 종종 주인과 떨어진 애완견마냥 불안해했고, 아서를 놓아주기 싫어 반려 자리를 내어주어서라도 묶어 두고자 마음먹었다.
아서의 약점을 쥐고도 매달리는 쪽은 언제나 그였다.
이런 그를 아서는 전부 알고 있을 것이다. 가끔 보이는 다정한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자신까지 전부 다.
두 형제 사이에 놓인 감정의 추가 한쪽으로 쏠려 있는 이상, 결국 그가 지닌 모든 우위가 소용이 없어지는 순간은 기어코 찾아오고야 만다.
아서는 때때로 카를로스에게 예전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를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불쑥 다가와 그를 흔들었다.
손이 닿으면 스친 살갗이 화끈거렸다. 잠결에 그를 끌어안기라도 하면 그저 잠버릇일 뿐이란 걸 아는데도 심장이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종종 드러나는 다정한 얼굴은 진심처럼 보였다.
전부가 거짓이란 걸 알면서 카를로스는 홀로 착각에 빠졌다. 말도 안 되는 착각이지만 아서가 가끔은 정말로 전처럼 그를 귀여워하는 것도 같다고,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를 죽이고 싶어 하던 형님이 그럴 리가 없는데.
카를로스는 뒤늦게 제 실수를 깨달았다. 처음부터 아서에게 예전처럼 굴어 달란 요구를 하지 말았어야만 했다.
아서가 그에게 다정하게 굴수록 속절없이 빠져들고 말 거란 걸, 미처 생각지 못했다. 제가 놓은 덫에 제가 걸려든 셈이었다.
막을 겨를조차 없이 무거운 한숨이 비집고 나왔다. 카를로스는 자조적으로 뇌까렸다.
“…형님은 놀라울 만큼 한결같으시군요.”
한결같은 게 아서뿐일까. 카를로스 자신도 과거와 변한 게 없었다.
만일 아서가 그를 도발하기 위해 이런 일을 꾸민 거라면 바라는 대로 화를 내 주면 그만일 터였다.
한데 지금으로선 어떤 행동을 할 일말의 의욕조차 생기지 않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한 가지 의문이 그의 발걸음을 가로막았다.
만일 지금 아서의 태도가 단순히 그를 화나게 만들려는 게 아니라면….
만에 하나 아서가 정말로 가브리엘에게 마음이 생긴 것이라면, 단지 둘의 마음이 통한 것뿐이라면 저는 어찌해야 하는가.
그런 가정을 하자 가슴 한편이 서늘하게 식어 내렸다.
이전부터 유독 가브리엘에게 한해서 관대하게 굴던 아서였다. 가브리엘의 손만은 불쾌하지 않다 하였고, 목숨을 구명해 준 기사를 구원이라 일컫기도 하였다. 이제 와 그때 그 감정이 다시 되살아났다 하여도 놀랍지 않았다.
머릿속에 수십 가지 의문이 차올랐다.
그러나 그 중 어느 하나의 답도 듣고 싶지 않았다.
전이었다면 필히 투기심을 견디지 못하고 아서의 몸이나마 손에 쥐고자 했을 텐데, 제게서 등 돌린 아서를 바라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손발 하나 까닥할 수가 없었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기는커녕 온몸의 피가 모조리 빠져나간 듯한 무력감이 전신을 휘어 감는다.
“…대체, 내게 형님이 무엇이길래.”
이렇게나 집착하고 연연하게 되는 건지. 한 번 잃었던 것에 대한 미련일까.
그저 제 옆에 묶어 두기만 하면 그만이라 생각하였거늘. 이름을 붙이지도 못한 낯선 감정은 면역이 생기지 않고 도리어 날이 갈수록 버거워진다.
“형님께선 늘 저를 화나게 만들 방도를 궁리하고 계시지요.”
“…….”
“그 시도는 늘 성공적이었고….”
카를로스는 아서의 등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지금쯤 아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내 기분을 망칠 작정으로 그런 거였다면, 이번에도 어김없이 성공하셨군요.”
바닥까지 가라앉은 목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카를로스는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자못 자조적으로 들리는 음성에 등을 돌리고 있던 아서가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축하드립니다, 형님.”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아서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문 너머 기척은 이 공간에 어떤 미련도 없다는 듯 빠르게 멀어졌다. 카를로스는 축하한다는 말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뒤따를 상황을 한껏 기대하고 있던 아서는 당혹스러운 나머지 곧장 몸을 일으켰다. 얼굴의 반을 덮고 있던 이불이 아래로 주륵 흘러내렸다. 잠시 동안 숨죽인 채 기다려도 카를로스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어.”
카를로스가 사라진 자리만 멍하니 쳐다보던 아서가 당황한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
…진짜 간 건가? 정말로?
아서는 처음 겪는 상황에 넋이 나갔다. 화가 난 카를로스가 제게 당장 달려들 줄 알았건만, 평소대로라면 크게 노해야 할 그는 잔뜩 풀이 죽어 방을 나가 버렸다.
당혹스러웠다. 저런 침울한 카를로스를 예상한 건 아니었는데.
허탈한 손아귀에 잡히는 건 이불 한 줌밖에 없었다. 카를로스의 기척은 이제 아서의 감각에 잡히지 않을 만큼 멀어졌다.
아서는 다시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침실 문만을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
날카로운 발걸음 소리가 궁성 복도를 울린다.
지루한 야간 근무를 버티고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일동 불에라도 데인 듯 화들짝 시선을 내리깔았다.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도 누구 하나 쉽사리 고개를 들지 못했다. 평소 넉살 좋게 2황자에게 말을 붙이던 이들 역시 그 순간만큼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만큼 카를로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던 탓이다.
분명 평소처럼 기운을 갈무리하고 있는 카를로스였는데 눈빛이 평소와 확연히 달랐다. 붉은빛을 찾아볼 수 없이 검게 침전된 눈동자가 서늘했다.
지나치는 카를로스에게 기사 무리가 묵례했다. 짧은 고갯짓으로 인사를 받은 카를로스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나서야 그들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기사들을 지나쳐 카를로스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황태자궁 내에 자리한 연무장이었다. 값비싼 마정석을 쏟아부어 만든 연무장 근방을 기사 몇몇이 지키고 서 있었다.
흰 모래가 넓게 깔린 연무장 위로 새하얀 눈발이 흩날렸다. 밤과 눈이 만나 제법 볼만한 장관을 만들어 냈으나 카를로스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한 얼굴이었다.
궁성 내에 일정한 간격으로 박힌 마법구가 흐릿한 빛을 뿜어냈다. 기사와 카를로스는 옅은 불빛 아래에서 서로의 얼굴을 식별했다.
“존귀하신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긴장한 기사 하나가 카를로스에게 다가와 예를 갖추었다.
“파델 경이로군.”
“예, 전하. 어쩐 일로 이 시간에 연무장까지 걸음하셨는지요. 침소에 드신 줄로 알았습니다.”
파델이 물었으나, 카를로스는 아무런 답을 않고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카를로스와 눈이 마주친 파델이 절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2황자는 단 한 번도 사감을 앞세워 아랫사람에게 해코지한 적이 없었는데도, 저 눈을 보면 본능적으로 몸을 사리게 되었다. 파델의 목이 조금씩 움츠러들었다.
“경, 해가 뜰 때까지 주변을 모두 비워 주겠나?”
카를로스는 기사에게 이곳을 찾은 이유를 말하는 대신 다른 요구를 했다. 마치 이곳이 황태자궁이라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자연스러운 명령이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검을 하나 빌렸으면 하는데.”
“제 것을 드리겠습니다.”
파델이 선뜻 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내 카를로스에게 공손히 건넸다.
“고맙군.”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전하.”
검을 받아 든 카를로스가 눈짓을 하자, 경계를 서고 있던 기사들이 조용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모든 인기척이 사라진 자리에 이윽고 정적이 내려앉았다. 바람에 바스락대는 잎사귀 소리만이 간간이 침묵을 비집고 나왔다. 비로소 혼자가 된 카를로스는 연무장 중앙에 자리 잡은 채 검을 뽑아 들었다.
딱히 어떤 목적지를 두고 침실을 벗어난 건 아니었으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적당한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이곳에서 몸을 혹사시키다 보면 뒤엉킨 머릿속을 비워 낼 수 있을 것이다.
잘 닦인 검신 주위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복구 마법이 걸려 있는 연무장이니 어느 정도까진 망가뜨려도 무방했다. 카를로스는 갈무리하고 있던 기운을 풀고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요란스럽게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었다.
오로지 힘을 소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검식이 펼쳐졌다. 한 번의 검격에 바닥이 소리 없이 갈라졌다 빠르게 본모습을 되찾는다. 오러가 넘실대는 검이 흩날리는 눈을 하나씩 가르고, 이내 그로도 모자라 연무장을 망가뜨리기 시작했다.
말끔하던 연무장이 초토화되었다가 조용히 복구되길 수차례 반복했다. 급기야 복구 마법을 위해 박혀 있던 마나석이 하나둘 소모되어 희미한 빛만 남기고 사그라들었다.
카를로스는 긴 숨을 내뱉었다. 하얗게 번져 나간 입김이 소리 없이 흩어졌다.
“하….”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머리를 비우기 위해서든 뭐든, 아무리 그럴싸한 말로 포장한들 이것은 결국 화풀이에 지나지 않은 행위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팽팽하게 당겨진 근육이 차츰 열기를 내뿜었다. 쌓이지 못해 녹아내린 눈이 그의 머리칼을 축축이 적셨다. 여전히 그의 호흡은 조금도 거칠어지지 않았다. 턱없이 부족했다.
마침내 관자놀이에 몇 방울의 땀이 맺힐 즈음, 카를로스는 검을 내려놓았다. 만족스러울 만큼 몸을 움직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카를로스.”
연무장을 방문한 불청객 탓이었다.
“…….”
어두운 불빛 아래로 뻔뻔한 낯짝이 드러났다. 카를로스는 어둠 속에서 빛을 잃은 칙칙한 은발과 그늘진 황금안을 못마땅하게 훑어 내렸다.
그의 노골적인 눈빛에도 가브리엘은 다툴 생각이 없다는 듯 평소처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쯤이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직인가.”
두 사람은 좋든 싫든 서로에 대해 아는 바가 많았다. 카를로스의 화가 적당히 사그라들었을 때를 맞춘 방문은 우연이 아닐 터였다. 카를로스는 손에 쥐고 있던 검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짜증스레 답했다.
“…아니, 안타깝게도 제대로 맞춰서 왔군.”
“다행이야. 너랑 어릴 때처럼 다투는 건 피하고 싶었거든.”
가브리엘의 가문, 우드힐 공작가와 카를로스의 연대는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끈끈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떠하든 서로를 완전히 적대시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카를로스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가브리엘은 가능하다면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고 싶었다.
“분명 용서를 빌러 온 건 아닐 테고….”
“…음.”
“말해. 쓸데없이 시간 끌지 말고.”
차갑게 선을 긋는 태도에 가브리엘이 웃었다. 카를로스의 말대로 더는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기사는 이미 변절을 결심하였고, 오늘 일로 카를로스도 그 사실을 인지한 것처럼 보였다.
가브리엘은 구태의연한 변명을 건네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온 게 아니었다. 오로지 이후 아서에게 미칠 화가 우려되어 카를로스를 찾았을 따름이다. 카를로스가 분노를 쏟을 대상이 가브리엘 그 자신이 될 수 있도록.
“다른 말을 덧붙여 봤자 네 화만 부추기겠지. 솔직히 말할게.”
“…….”
“전하의 기사 자리가 탐이 나.”
카를로스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쪽 눈썹을 끌어 올렸으나 놀란 기색은 없었다.
애당초 그는 가브리엘이 충성스러운 기사 행세를 할 때도 늘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제 기사가 이토록 신의 없는 종자란 걸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랜 친우를 등진 것에 대한 미약한 아쉬움. 그것이 고작해야 가브리엘이 느끼는 감정의 전부였다. 자책하는 시늉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카를로스는 아마 속아 주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카를로스가 말한 대로 쓸모없는 겉치레는 생략하기로 했다.
카를로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이젠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는 거군.”
“이미 짐작하고 있을 텐데 굳이 부정할 필요 있을까.”
이전의 기사는 단지 성가신 다툼을 피하려 한발 물러났을 뿐이다. 지금처럼 명백한 정황이 드러나고도 발뺌을 하며 카를로스의 화를 돋울 필요는 없었다.
카를로스가 늘어뜨리고 있던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그의 입매가 비틀렸다.
“놀랍네. 이토록 확신에 차 있는 모습이라니…. 늘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뭐든 상관없다는 듯 굴지 않았나.”
“그땐 그랬지. 정말로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
“그래, 이번엔 좀 다른가 보군.”
작게 중얼거렸던 카를로스가 연이어 말을 덧붙였다.
“설마하니, 가브리엘. 형님을 연모한다는 둥의 헛소리를 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연모?”
가브리엘이 의외인 말을 들은 것처럼 놀란 눈을 했다. 하나 그도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이게 연모하는 감정인가. 그분께서 괴로워하는 걸 보고 있으면 마음이 쓰여. 전하께서 좀 더 내게 마음을 주고….”
온전히 제 전부를 맡기고, 마침내 그에게 길들어져 홀로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 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기사는 말끝을 흐렸다. 카를로스가 미묘한 얼굴로 되물었다.
“마음을 주고?”
“…나를 아껴 주셨으면 하지. 그 누구보다도 많이.”
기사의 진실된 속내는 바깥으로 끄집어내기 직전, 혀끝에서 조용히 흩어졌다.
충성스러운 기사는 아서를 제 주인으로 섬기기를 소망했지만, 모순적이게도 꿈속에서 그들의 관계는 반대로 전복되곤 했다. 꿈은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 자신도 몰랐던 속내를 낱낱이 까발려 보여 주었다. 어쩌면 그가 진실로 원하는 건 조금 다른 무언가일지도 몰랐다.
“모르겠군. 이게, 연모란 건가?”
기사는 제 안에 숨은 바람을 되돌아보았다. 아서가 그의 시야 안에 없으면 신경이 쓰이고, 아서의 하루하루를 하나도 빠짐없이 알아내고 싶었다. 좋은 것은 전부 제 손을 거쳐 안겨 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는 아서를 완전히 소유하고 싶었다. 아서가 그의 손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되었으면 했다.
이런 걸 연모라고 칭하여도 된단 말인가?
그가 배운 사랑이란 감정은 이런 것과는 조금 결이 달랐다. 그의 감정은 연모라기보단 아서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싶단 소유욕에 가까웠다.
차곡차곡 근거를 세워 가자 생각보다 간단히 결론이 났다. 시선을 내리깐 채 고민하던 가브리엘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감정은 연모와는 다른 것 같군. 나는 그분의 기사가 되고 싶은 것뿐이다.”
“…그래서 이제 와 형님께 기사의 맹세라도 바치겠다 이건가.”
“그분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그렇겠지.”
“꿈도 크군.”
카를로스가 가벼운 투로 단정 내렸다. 내심 우려한 것과 달리 두 사람의 마음이 통한 건 아닌 듯 보였다. 그렇다면 불행 중 다행인 일이다. 그가 아는 아서라면 분명 가브리엘의 맹세에 우스운 소리라는 양 코웃음부터 칠 게 분명했다.
“가브리엘, 형님께서 퍽이나 너를 받아들이겠어.”
“알아. 불쾌해하시겠지.”
“어차피 형님께 너는 나를 도발하기 위한 수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을….”
뱃속 깊이 도사린 불안감을 감춘 카를로스가 기사를 훑어 내렸다.
“차라리 기사는 관두고 애첩 자리를 노리는 게 낫겠어. 그쪽이 더 가망 있어 보이니 말이야.”
“글쎄, 적어도….”
‘적어도 네 처지에 비하자면 양호하지 않을까’라는 답을 하려다, 점점 유치한 말다툼으로 번져 가는 것 같아 기사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두 사람의 다툼은 대개는 이런 식이었다. 어느 선을 넘을 것 같으면 둘 중 하나가 먼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다만 지금은 조금 다른 경우이긴 했다. 말다툼을 멈추려는 것과 별개로, 가브리엘은 자신이 정말로 카를로스에 비해 양호한 위치를 점한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서는 미남자에게 약해 보였고, 기사의 부드럽지 않은 몸에 혐오가 아닌 긍정적인 호기심을 드러냈다. 더군다나, 한사코 부정하긴 했지만 아서는 거칠고 강압적인 성관계에서 쾌감을 느꼈다.
개중 두 가지는 불과 몇 시간 전 알아낸 사실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 카를로스는 그 세 가지 전부를 충족해 냈다.
어쩌면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아서가 카를로스를 싫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터무니없는 가정이 기사의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이내 지워졌다. 잠시 고민하나 싶던 기사가 카를로스의 말에 동의했다.
“애첩이라.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군.”
그는 평생 동안 타인이 옳다며 가리킨 길만을 좇아 걸었다. 그렇게 긴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고 나서야 마침내 얻고 싶은 한 가지가 생겼다. 아서에게 간섭할 수 있는 자격. 가브리엘은 그것을 얻어 내고 싶었다. 그 자격의 형태가 무엇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아서가 그의 외적인 조건을 마음에 들어 하는 건 분명했으니, 그분의 기사가 되는 것보다 차라리 그쪽이 더 손쉬운 길일지도 몰랐다.
“…자존심이고 뭐고 없군. 전부터 이렇게 쉽게 굴지 그랬나?”
카를로스의 얼굴 위로 희미한 짜증이 머물렀다 사라졌다. 답을 원한 질문은 아니었다는 듯 그는 미련 없이 가브리엘을 스쳐 지나갔다. 좀 전보다 짙어진 눈발이 그들 사이를 가르며 떨어졌다.
검집을 쥐고 있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당장 이 자리에서 검을 휘두르는 것쯤이야 간단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카를로스는 끝끝내 검을 뽑아 들지 않았다.
가브리엘의 모친 우드힐 공작은 어렸던 카를로스를 구명했다. 만일 공작이 없었더라면 그는 지금까지 목숨을 보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공작은 카를로스의 친모와 절친한 사이였을뿐더러, 카를로스에게는 제 친어머니와도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형님이 수많은 인물 중 가브리엘을 선택한 것은 정말이지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
연무장을 벗어난 카를로스가 곧장 향한 곳은 역시나 아서의 침실이었다.
시위하듯 그 자리를 벗어나 놓고선 얼마 지나지 않아 제 발로 다시 돌아가는 꼴이 우스웠다. 이런 그를 아서가 우습게 여기는 게 당연했다.
침실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시선에 카를로스가 걸음을 멈췄다. 문이 열리기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는지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아서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불을 담요처럼 두르고 있는데 눈빛이 새파랬다.
“이제 오나 봐.”
아서가 담담히 말했다. 추궁하는 듯하면서 한편으론 그저 사실 확인을 하는 것 같기도 한 어조였다. 달리 대꾸할 말이 없던 카를로스는 아무 답을 않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카를로스가 움직이는 대로 아서의 눈동자가 따라 굴러갔다.
아서의 입이 무언가 따지고 싶은 것처럼 달싹이다 다물어졌다. 아서는 카를로스를 보자마자 여러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애써 삼켰다.
어울리지 않게 시무룩해 보이던 카를로스 덕분에 아서도 덩달아 생각이 많아졌다.
표면적으로 카를로스와 아서는 오로지 강압에 의해 맺어진 관계였다. 둘 사이에는 뭇 연인들과는 달리 지켜야 할 신의 같은 게 없었다. 물론 카를로스가 한눈을 판다면 아서는 어떤 짓을 해서든 훼방을 놓을 생각이지만, 일단은 그런 상황이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아서가 바람을 핀 것도 아니라 생각했다. 질투하고 화를 낼지언정 저렇게 상처받을 일은 아니지 않나? …라고 생각했는데.
어울리지 않게 기가 죽은 모습을 보니 신경이 쓰였다. 미안하진 않았다. 이제 와 이런 걸로 안절부절못하기엔 형제는 이미 서로에게 용서받지 못할 짓을 많이 저질렀다.
아서가 걱정하는 건 오직 하나였다. 카를로스가 어느 날 갑자기 그를 두고 떠나가는 것.
기실 아서는 카를로스 몰래 딴짓을 하는 데에는 별 흥미가 없었다. 반면 대놓고 카를로스를 도발하여 뒤흔드는 쪽에는 관심이 많았다. 평정심을 잃고 사나워진 카를로스는 아서가 제일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카를로스가 화를 내기는커녕 제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처음엔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당황했다가, 카를로스의 부재가 길어질수록 점차 스멀스멀 열이 피어올랐다.
이런 적이 최초였던 터라 카를로스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아서의 머릿속에 별의별 망상이 다 떠올랐다.
이야기는 카를로스가 아서에게 받은 상처를 제삼자에게 위로받는 장면으로 시작되었다. 이름 모를 상대는 카를로스의 마음이 약해진 틈을 타 그의 곁을 조금씩 파고든다. 그자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던 카를로스는 이윽고 완전히 아서를 떨쳐 내는 데 성공한다. 결국 그 이야기는 평온을 되찾은 카를로스가 다른 사람을 옆구리에 낀 채로 아서를 떠나는 걸로 끝이 났다.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행복하세요, 형님.’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은 뻔한 대사에, 이어서 등을 돌려 떠나가는 장면까지. 그렇게 한 편의 시나리오가 완성되었다.
실상 따져 보면 카를로스와 아서는 본래 엇나갈 운명이었는데, 비틀린 채 갈라졌던 관계를 아서가 억지로 끌어다가 겨우겨우 이어붙인 것이었다.
카를로스의 운명은 어딘가에 따로 존재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순간, 아서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몸을 들썩거렸다. 숨소리가 조금 거칠어진 듯도 했다.
아무리 사람 마음에 유효 기간이 있다지만 아직은 턱없이 일렀다. 벌써부터 저를 두고 가 버리는 카를로스라니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아서가 자제한다 하여도 분명 간헐적으로 이런 짓거리를 반복하고 말 거다. 처음부터 미리 도망치지 못하게 단단히 못을 박아 두어야 했다.
그들의 관계가 끝이 날 순간이 언젠가 오기야 하겠지만, 그건 카를로스가 품은 마음을 작은 찌꺼기조차 남기지 않고 모두 소모한 뒤에야 가능한 일이다. 아서는 그 전까진 그가 제 곁을 떠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카를로스는 미칠 것 같이 화가 나고 고통스러워도 아서의 눈이 닿는 곳에서 괴로워해야 마땅했다.
그런 다소 소름 돋는 결론을 내린 아서는 침대 위에 웅크려 앉아 카를로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침실 문이 열렸다. 아서는 문이 열리자마자 카를로스를 반겨 주었다. 이제 오느냐고.
“어딜 갔다 오는 거지?”
먼저 가장 궁금했던 것부터 물었다. 아서 쪽으로 시선을 준 카를로스가 언제 상처받은 얼굴을 했냐는 양 평소처럼 답했다.
“잠깐 연무장에 들렀다 오는 길입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많이 기다렸습니까?”
많이 기다리다 못해 목이 빠지는 줄 알았지만, 아서는 답을 하지 않고 못 들은 척 말을 돌렸다.
“꼴이 말도 아니군.”
“…….”
“눈을 맞고 돌아다녔나 본데, 설마 그 차림 그대로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 네 침의라면 저기 있어.”
카를로스가 오기 전 미리 사용인에게 건네받은 침의가 탁상 위에 곱게 개어져 있었다. 카를로스는 조금 혼란스러운 얼굴로 몸을 돌렸다.
그가 등을 돌려 환복하기 시작하자, 아서는 그 광경을 대놓고 구경했다. 속옷 하나만을 걸친 몸은 완벽하게 짜여져 있었다. 카를로스의 움직임에 따라 등 근육이 도드라지며 꿈틀거렸다. 아서의 눈이 역삼각형을 그린 두꺼운 상체와 길게 뻗은 다리까지 한 번에 훑어 내렸다.
“그리 쳐다만 보지 말고 할 말이 있다면 하세요.”
따가운 시선을 느낀 카를로스가 등을 보인 채로 말했다.
“할 말 없어.”
아서는 무성의하게 답하고 여전히 눈으로는 카를로스를 훑었다.
결국 한쪽 눈썹을 끌어 올린 카를로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몸을 훑던 집요한 시선이 이젠 얼굴로 향했다.
“…형님께서 원하는 대로 눈앞에서 사라져 주었잖습니까.”
눈으로 젖은 검은 머리칼은 촉촉했고, 찬바람을 맞아 창백해진 뺨에선 묘한 색기가 흘렀다.
“뭐가 그렇게 불만입니까?”
열이 올라 붉어진 입술이 달싹였다. 차게 내려다보는 시선을 마주하자 절로 뒷덜미가 오싹하게 당겼다.
아서는 남몰래 혀로 입 안을 훑었다. 다행히 침을 흘리진 않았다.
분명 좀 전까진 불만이 있었는데…. 아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좀 전까지만 해도 그는 저를 두고 가 버린 카를로스 때문에 기분이 상해 있었다.
그런데 막상 카를로스가 제 눈앞에 나타나니, 뭉쳐 있던 짜증이 어처구니없을 만큼 단숨에 녹아내리고 말았다. 솔직한 말로 지금 아서는 카를로스에게 몸이 닿고 싶어 안달이 났다. 스스로를 참 답도 없는 인간이라 생각하며, 아서가 중얼거렸다.
“불만 같은 거 없는데….”
“그럼 왜 그런 눈으로 보고 있는 겁니까.”
불만이 없단 말은 진심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카를로스는 아서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너야말로 불만이 있으면 직접 말하지? 이런 식으로 추궁하지 말고.”
아서는 실컷 끈적한 눈으로 카를로스를 관음하여 놓고서 시치미를 뗐다.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기어 들어가 카를로스를 재촉했다.
“너랑 말씨름할 생각 없어. 그러고 있을 시간에 이리로 오기나 해.”
“…대체 무슨 속셈입니까?”
본래의 아서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듣곤 카를로스가 의심 어린 눈초리를 했다. 아서는 카를로스를 유혹해 보려던 것이었는데 돌아오는 반응이 영 차가웠다.
“언제는 예전처럼 다정하게 대해 달라며.”
“많이 불안하신가 봅니다.”
“불안할 게 무엇이 있어서.”
“제가 형님의 소중한 이들을 해치기라도 할까 두렵냐는 말입니다.”
“…….”
불안감은 무슨. 아서는 이대로 일분일초라도 빨리 카를로스를 제 침대로 끌어들일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하물며 황후와 황제는 아서에겐 그다지 소중한 이들이 아니었다. 차라리 카를로스 자기 자신의 목숨을 걸고 협박하는 게 더 잘 먹히지 않을까 싶었다.
아서는 카를로스의 시선을 외면하고 답을 회피했다. 의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카를로스는 더 추궁해 봤자 나올 것이 없어 보였는지 순순히 곁으로 다가왔다.
저 잠옷을 굳이 입고 있어야 하나, 그냥 다 벗고 자면 안 되나….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는 아서와 다르게 카를로스는 생각이 많아 복잡한 얼굴이었다.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몸을 아서가 냉큼 끌어안았다. 매번 이러면 카를로스의 마음이 약해지는 불상사가 일어날 테지만 오늘 하루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카를로스의 침의 속으로 슬금슬금 손을 넣었다. 좀 전까지 눈으로만 보던 걸 만지고 있으니 흡족한 미소가 지어졌다. 단단한 몸을 끌어안고서 아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칼.”
“…….”
카를로스는 아무 말 없이 아서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서는 끌어안은 몸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음부턴 그런 식으로 뛰쳐나가지 마.”
“…내가 황제한테 달려가 칼부림이라도 할 줄 알았습니까.”
그가 묻자 아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까 내가 어떤 짓거리를 하든 간에 가지 말라고.”
“…무슨.”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카를로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늘이며 재차 요구했다.
“그럴 거라고 약속해.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도망치지 않겠다고 말이야.”
“대체 누가 누구한테서 도망을 간단….”
카를로스가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말하던 도중, 불쑥 코앞까지 다가온 얼굴에 입을 다물었다. 전에 없이 또렷한 눈동자가 카를로스를 직시했다.
“어서 약속해.”
단호히 말한 아서가 카를로스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왔다. 거리가 좁혀지고 이내 서로의 숨결이 맞닿았다. 카를로스가 설마, 하고 뒤로 물러나려던 순간이었다.
상처투성이인 입술이 그의 입술 위로 솜털처럼 가볍게 내려앉았다. 보드라운 점막이 연이어 아랫입술을 살며시 물고는 떨어졌다.
카를로스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어딘가 간절해 보이기까지 하는 붉은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그 이유 모를 시선을 마주하자 마구 뒤엉켜 있던 머릿속이 일순간 텅 비워지는 듯했다.
“어서 약속해, 카를로스. 다시는 그렇게 도망치지 않겠다고.”
“…….”
특별할 것도 없는 가벼운 입맞춤에 몸이 박제라도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붉은 홍채에 비치는 제 멍청한 낯짝을 발견하고 이를 사리물었다.
그조차도 무엇인지 판단 내리길 외면한 마음을, 아서는 낱낱이 읽어 내고 이렇게 그를 뒤흔든다.
어떤 의도로 행하는 짓인지 그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그런데도 결국 그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예, 알겠습니다.”
그의 답을 듣고도 아서는 무언가 불만족스러운 기색이었다.
“더 분명하게 말해. 두 번 다시는 그렇게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라고.”
아서가 재차 약속을 종용했다. 카를로스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순순히 입을 열었다.
“…예. 두 번 다시는, 그렇게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아서의 말을 고스란히 그대로 읊었다. 그제야 만족하였는지 마주한 눈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꼭 상이라도 주듯 아서가 그의 등허리를 끌어안고 몸을 바투 붙였다. 순간적으로 심장을 쥐어짜는 통증이 일었다.
카를로스가 손아귀를 말아 쥐었다. 고작 짧은 입맞춤이 전부였는데 온몸의 피가 달아오른 걸 느꼈다. 맥없이 휘둘리는 제 자신을 향한 경멸은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소리가 단숨에 집어삼켰다.
사심 없이 도닥이는 손길로도 이미 아래는 완전히 발기한 지 오래였다. 아서도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에 카를로스는 등줄기가 팽팽할 만큼 달아오른 욕구를 단번에 외면했다. 만일 여기서 견디지 못하고 손을 뻗는다면 다시 모든 것이 어그러질 것이었다.
그는 뻣뻣이 굳은 팔을 옮겨 아서를 마주 안았다. 여전히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평화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찰나 주어진 달콤함에 카를로스는 그저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