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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 6장(2) (8/15)

기만의 밤 3권

6장 (2)

이제는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어린 시절, 카를로스가 처음으로 배운 말은 엄마도 아빠도 아닌 배가 고프다는 말 한마디였다.

황제와 황후는 정치적 동맹으로 맺어진 관계였지만 카를로스의 어머니인 황비와 황제의 관계는 달랐다. 황후의 자리는 주지 못했을지언정 황제는 황비를 사랑했고, 제 연인의 생명을 대가로 태어난 자식을 원망하였다.

카를로스가 죽기만을 바랐던 황제는 죄 없는 갓난아이를 청림궁에 방치했다. 사용인들이 드문드문 굶어 죽지 않을 만큼 먹을 것을 챙겨 주었으나 그뿐이었다. 황제의 바람대로 카를로스는 몇 년에 걸쳐 서서히 시들어 갔다.

아마 도중에 황제조차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사육당하듯 자랐던 아이는 그렇게 채 십 년을 버티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카를로스의 형제, 아서.

당시로선 아서만이 황제의 명을 어기고도 아무런 화를 입지 않으면서, 카를로스를 그곳에서 끄집어낼 의향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직도 카를로스는 아서가 그에게 손을 내민 순간을 그린 듯이 선명히 기억했다.

무덤처럼 고요하던 청림궁에 드물게 소란이 일었던 날이었다.

「태자 전하,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

어렸던 카를로스는 방 안에 웅크리고 앉아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익숙한 사용인의 목소리와, 처음 듣는 소년의 목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황성에서 내가 발 디디지 못할 곳이 어디 있단 말이냐? 비켜라.」

「저, 전하! 분명 황제 폐하께서 노하실…!」

잠금쇠 하나 없던 침실 문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벽에 부딪혀 튕겨져 나온 문을 새하얀 손이 성가시다는 듯 밀어냈다.

그날 시끄러운 소란을 일으키며 나타난 이는 다소 오만해 보이는 눈을 한 소년이었다.

짜증이 난 것처럼 찌푸려져 있던 얼굴이 카를로스를 보고는 스르륵 풀렸다. 쳐다보는 시선에 호기심이 드러났다.

「…네가 그 카를로스구나?」

붉은 눈동자가 관찰하듯 카를로스를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그도 잠시, 빤히 내려다보던 눈에 웃음기가 번지자 소년의 주변을 감싼 냉기가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었다.

바깥의 소란에 겁을 집어먹고 있던 카를로스는 그 부드러운 미소에 덩달아 긴장을 풀어 버렸다.

「이제야 네 존재를 알게 되었어. 괘씸하게도 모두가 한뜻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거든.」

아서가 분한 투로 중얼거렸다. 누구를 향해 투덜거리는지 모르게 말하다, 이윽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카를로스의 몸 이곳저곳을 확인했다.

「너무 조그마한데…. 잘못 만지면 부서질 것 같아. 나보다 다섯 해 늦게 태어났다 하였지. 이 나이 때는 다 이렇게 조그마한 건가? 설마한들 황자를 굶겼을 리는 없을 테고.」

「…….」

「넌 왜 말이 없어? 말할 줄 몰라?」

「모르, 몰라요….」

당시의 카를로스는 아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아서의 음성 그대로를 외워 나중에서야 말뜻을 해석해 냈다.

「일단 내 궁으로 가자. 이리 와.」

갸우뚱거리던 아서는 제가 누구라는 설명도 없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상대방이 제 말을 거절할 가능성 같은 건 전혀 고려하지 않는 태도였다.

물론 아서의 예상대로 카를로스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의 손 위로 조그마한 손가락 두어 개가 조심스럽게 걸쳐졌다.

그날 그렇게 카를로스는 아서의 손을 잡았다.

비록 얄팍한 호기심과 동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을지라도, 난생처음 받아 본 애정이었으며 계산 없는 보살핌이었다. 그랬기에 아서가 아무리 카를로스를 질색한들 카를로스는 아서를 쉬이 놓지 못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주변인들이 질려 나가떨어질 만큼 맹목적으로 아서를 따랐던 그였다. 아서가 저를 밀어내는 데엔 무언가 사정이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견디다 못해 말라 죽을 것 같을 즈음엔, 아서가 한 방울씩 떨어트려 주는 적선 같은 말을 받아먹으며 그렇게 버텼다. 그러나 그 혼자만의 일방적인 믿음은 세월이 지날수록 서서히 마모되어 갔다.

결국 그들의 관계는 누이의 죽음을 끝으로 완전히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형님.」

「…네 누이의 소식은 들었다. 안타깝게 되었어. 허나 나는 모르는 일이다.」

「형님, 하지만….」

「오나드 왕국의 급습이 있었고, 네 누이는 그것에 휩쓸린 것뿐이야. 섣부른 추측은 삼가라.」

「그곳에 있는 게 저였더라면, 죽은 이는 제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했더라도 형님께선 아무런 상관이 없으십니까?」

「…….」

한참을 침묵하던 아서는 짜증이 담긴 눈동자로 카를로스를 노려보다 이내 긴 한숨을 흘렸다.

「적당히 해.」

지겨워 죽겠군. 하나 같이 왜 이리들 바라는 게 많은지. 아서가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에 카를로스의 낯빛이 일순간 차갑게 식었다.

「나는 모른다 하지 않았느냐. 대체 이 이상 무슨 답을 해 주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군.」

「…….」

「이만 물러가. 더는 건방지게 기어오르는 꼴을 참아 주고 싶지 않으니.」

맹목적인 애정이 원망으로 변질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카를로스는 다시는 아서를 찾지 않았다.

물론 원망하는 마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좀 더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는 미움마저도 희미해졌다. 기대하는 바가 있어야 상대를 미워할 수도 있는 것이니 말이다.

아서는 더 이상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언젠가 치워 내야 할, 거슬리는 방해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딴마음을 품고 그에게 전과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던 아서가 가증스러웠다. 고작 몇 번 웃어 주고 저를 걱정해 주었다는 이유로, 홀린 듯이 다시 아서에게 마음을 준 그 자신은 머저리 같았다.

카를로스는 아서를 미워했던 만큼 아서를 원했다. ‘원한다’라는 손쉽고 간편한 말로 정의 내리는 게 부족하다고 느껴질 만큼이나.

만일 지금에 와서 형제와 틀어졌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한다면.

「칼, 너 분명….」

「…….」

「분명 검을 배우지 않았다고 했잖아.」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제 손에 들린 검을 놓아 버렸을 것이다.

그러곤 형님이 눈치채지 못한 사이 발끝부터 조금씩 좀먹어 들어가다, 결국엔 형님의 전부를 손에 쥐었을 텐데….

냉정하게 밀어내다가도 상처받는 그를 보고 내심 당혹스러워하던 아서를 알았다. 그때의 자신이 조금만 더 영악했더라면, 아서가 그에게 열등감을 품을 일이 아예 없었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어리석고 무의미한 망상이었다.

그날 대련을 시발점으로 카를로스는 그의 친모와 절친한 사이였던 우드힐 공작에게 후원을 받기 시작했다. 그때 카를로스와 동갑내기이던 우드힐 공작가의 자제 가브리엘을 만나 함께 검을 배웠다.

공작가의 비호 덕에 어린 그가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살아남았기에 오늘날 아서를 제 옆에 묶어 둘 힘 또한 얻게 되었다.

카를로스는 그 자신이 한 번 제 소유물이라 각인한 것 앞에서 얼마나 구차해지고, 집요해질 수 있는 인간인지 알았다. 아서는 이미 그의 것이었다. 만에 하나 아서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지긋지긋해질 날이 올지언정, 그는 기어이 아서를 붙들고 있을 터였다.

이미 형님은 두 번이나 그의 손을 뿌리쳤다. 첫 번째는 힘없이 버려졌으나 두 번째는 달랐다. 아서의 애정을 얻어 낼 수는 없겠지만 그 외의 것들을 전부 가지면 된다.

아서가 그의 반려가 되면 아서를 제 짝이라 명명백백히 공인하는 것과 동시에, 서로의 영혼에 끊어 낼 수 없는 사슬을 채워 둘 수 있었다.

황제와 황후는 깨트릴 수 없는 맹약으로 이어진 관계였다. 이는 용이 남겨 두고 간 언령 중 하나로, 인간의 힘으로 깨트릴 수 없었다. 한쪽이 죽지 않는 이상 다른 한쪽을 벗어나지 못했다.

맹약이 이어져 있는 한 먼 곳으로 달아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버려진 한 사람이 본능적으로 상대방이 있는 위치를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일견 낭만적으로 보일 법한 맹약이었으나 결국은 두 사람을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족쇄로 묶어 두는 것과 같았다. 변절은 곧 둘 중 하나의 죽음을 뜻했다.

죽음이 아니고서야 벗어날 수 없는 것. 이미 두 번이나 그를 버렸던 형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자리이지 않은가. 적어도 카를로스는 그리 생각했다.

***

“상처에 바를 연고를 가져와, 가브리엘.”

“예.”

저녁 식사가 끝나고, 한참을 아서 옆에 붙어 뭉그적거리던 카를로스가 아서의 다리를 벌렸다. 그가 전날 생긴 엉덩이의 상처를 살피는 것처럼 굴자 아서도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할 뿐 거부하진 않았다.

멍 자국 위로 연고를 펴 바른 즉시 푸르스름하던 살갗이 서서히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카를로스가 약을 조심스럽게 펴 바르는 내내 아서는 웬일로 얌전히 있었다.

카를로스가 아서의 얼굴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저녁 산책은 안 하고 싶으십니까?”

“…피곤해.”

아서를 협박한 뒤로 오늘 그가 한 일이라곤 밥을 먹이고 끌어안고 있던 것밖에 없었는데, 아서는 평소보다 피로해 보였다. 머릿속이 복잡한지 얌전히 굴다가도 종종 표정이 굳었다.

“그럼 이만 잘까요.”

바깥은 이제야 해가 어스름히 지고 있었다. 아직 잠을 자기엔 이른 시간이었던 터라 카를로스의 말이 아서에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아서는 냉큼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것을 참고 애먼 입술만 잘근거렸다. 좋다고 할 수도, 그렇다고 상황상 전처럼 제멋대로 굴 수도 없으니 갈팡질팡 고민하는 체했다. 고민하는 티가 역력한 아서를 보고 카를로스가 웃었다.

“정말 잠만 잘 겁니다. 형님이 나를 성심껏 재워 주기만 하면요.”

“…재워 달라고?”

“예. 이전에 그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가 재차 말하였지만 아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예전에 내가 아팠을 때 그랬던 것처럼, 안고 쓰다듬어 달라는 말이에요.”

“예전처럼….”

여전히 아서는 머뭇거리며 굳어 있었다. 어차피 카를로스도 아서가 상황이 바뀌었다고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꿀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던 터라, 아서를 재촉하지 않고 제가 먼저 다가갔다. 그는 먼저 아서의 팔을 들어 제 등에 두르고 품에 파고들었다.

“이대로 쓰다듬어 줘요.”

눈을 빤히 바라보며 요구하자 그제서야 아서가 느릿하게 손을 움직였다. 등을 쓰다듬는다기보단 간지럽히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입을 다문 아서는 당장에야 그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르는 한편 눈에는 불만이 비쳤다. 대체 왜 제게 이런 걸 요구하느냐 따지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물론 카를로스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등 뒤로 느껴지는 조심스러운 손길에 카를로스가 눈을 감았다. 손이 닿은 곳을 시작으로 간지러운 소름이 번졌다.

이제는 아서보다 커 버린 몸을 억지로 아서의 품속으로 욱여넣고, 어릴 적 그가 그랬듯 가슴팍에 뺨을 부볐다. 익숙한 체향이 서서히 그를 감싸 안았다. 전신의 근육이 이완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머리도.”

편안히 눈을 감은 채로 그가 다음 요구 사항을 말했다.

등을 쓰다듬던 손이 위로 올라왔다. 으음. 기분이 좋아진 카를로스는 자신도 모르게 목을 울렸다.

그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안겨 있으니 아서도 점점 긴장이 풀린 듯 서투르던 손길이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손바닥으로 겉만 쓰다듬던 아서가 이내 손가락으로 두피를 살살 긁었다.

아서의 허리를 안고 있던 카를로스의 손이 가운 안으로 파고들었다. 허리까지 올라온 가운은 허리끈만 묶여 있을 뿐 이미 침의로써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카를로스는 허락 없이 엉덩이를 주무르다가 허리선을 타고 올라가 등을 더듬었다. 발기한 성기가 아서의 허벅지에 천천히 비벼졌다.

뒤늦게 무언가 잘못되었단 걸 느낀 듯 아서가 멈칫 손을 떨어트렸다. 쓰다듬는 손길이 멈추자 카를로스가 고개를 들어 아서를 올려다보았다. 왜 계속 만져 주지 않느냐는 눈빛이었다.

“무엇 하고 있어요. 내가 잠들 때까지 계속 만져 주셔야지요.”

“…….”

무언가 묻고 싶은 것처럼 보이던 아서는 이내 체념하고, 다시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그때 카를로스가 고개를 틀어 아서의 젖꼭지를 핥았다.

“아.”

가슴께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느낌에 아서가 몸을 굳혔다. 카를로스는 아서의 동요에도 아랑곳 않고 작은 돌기를 입 안 점막으로 여유롭게 빨아들였다.

“읏, 재워, 달라며….”

아서가 따졌으나 카를로스는 못 들은 척 가슴을 빠는 데에만 몰두했다. 발기한 좆이 아서의 허벅지에 짓눌린 채로 연신 비벼졌다. 상반신만 본다면 형제는 과거와 얼핏 비슷해 보였는데 이불 속에선 이전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읏, 왜 자꾸….”

“여기도 만져 줘요.”

아서가 한마디 더 하려던 찰나, 카를로스가 아서의 손을 하복부 쪽으로 끌어 내렸다.

카를로스는 아서의 손등 위로 손을 겹쳐 잡고 제 좆을 만지도록 강요했다. 아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떼어 냈다가 다시 손목을 붙잡혀 끌어당겨졌다.

“시키는 대로 얌전히 하셔야죠.”

“분명 좀 전엔 예전처럼 해달라고, 아…!”

몸을 뒤로 물리며 반항하자 카를로스가 재촉하듯 다른 손으로 아서의 가슴을 비틀었다.

“빨리, 형님….”

아서의 반응이 어떻든 카를로스는 시종일관 나른하게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아서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딘가 초점이 기이하게 어긋났다.

이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눈을 목격한 아서는 제가 어떤 말을 하든 이 상황을 피해 갈 수 없으리란 사실을 깨달았다.

한 손에 잡히지도 않는 성기를 아서가 어설프게 쥐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남의 것을 성적인 의도로 건드려 본 적이 없었으니, 체념을 한 것과 별개로 차마 성기를 훑지 못하고 가만히 감싸 쥐고만 있었다.

한데 고작 그 작은 접촉만으로도 카를로스는 연신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기분 좋아요. 계속 만져 줘요.”

검붉은 눈동자에 자글자글 끓는 듯한 열기가 차올랐다. 카를로스가 아서의 손에 대고 느릿하게 허리 짓을 했다. 명백히 이보다 더한 걸 원하는 몸짓이었다.

“아….”

카를로스의 손이 반죽 치대는 양 아서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커다란 손은 살덩이를 주무르는 걸로 그치지 않고 구멍까지 조금씩 더듬었다.

무언가 불길하다고 생각하였을 때, 카를로스가 아서의 다리를 벌리고 올라탔다. 허리 아래로 덮여 있던 이불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흘러내렸다.

아서는 침실 입구에 서 있는 가브리엘을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러기엔 양다리를 벌린 제 모습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였다. 얼굴이 절로 붉어지고 이가 악물어졌다.

아서가 애써 울분을 감추고 중얼거렸다.

“…이럴 거면, 가브리엘이라도 내보내.”

“아직 완전히 낫진 않았네요. 연고를 한 번 더 발라야 할 것 같은데.”

카를로스는 아서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좀 전부터 아서의 고간에 붙박여 있었다.

상처 부근을 살피던 눈동자가 어느새 옆의 구멍으로 빗겨 내려갔다. 옅은 분홍색을 띤 것이 혀를 가져다 대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의식하기도 전에 카를로스의 고개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코를 박고 깊게 숨을 들이쉬어도 청량한 비누 향밖에 나지 않았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던 일에 대한 미약한 거부감은 보드라운 향에 쓸려 사라졌다. 카를로스는 몸을 숙여 망설임 없이 아서의 샅에 고개를 묻었다.

“…무슨,”

멍하니 천장만 보고 있던 아서가 이어진 행위에 시선을 내렸다.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물컹한 감촉에 그는 이내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잠깐. 뭐, 하는 거야…!”

아서는 경악하며 카를로스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정신 나간 형제가 이제 제 고간에 고개를 묻고 있었다. 차라리 성기를 건드렸다면 사정이 나았으련만, 혀가 닿은 곳은 그보다 더 아래쪽이었다.

“하지, 놔…! 아…!”

순식간에 엉덩이가 들릴 만큼 허리가 접혔다. 노골적인 자세가 수치스러워 몸을 비틀었지만 구속에서 벗어나기란 요원했다. 이윽고 카를로스의 혀가 회음부를 길게 핥아 내렸다.

“아, 읏…!”

물컹하고 진득한 감촉을 견디지 못한 아서가 진저리를 쳤다. 제 의지와 무방하게 등 뒤로 오싹한 감각이 번졌다.

접힌 무릎이 가슴에 닿았다. 양팔을 제외하고는 온몸이 거미줄에 묶인 것마냥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이상한, 윽, 싫어…!”

가림막 하나 없이 고스란히 드러난 구멍 위로 축축한 것이 닿았다. 샅에 짓눌린 입술이 젖은 소리를 내며 입구를 빨아들였다. 물컹한 혀가 주름을 집요하게 핥아 내렸다.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자극에 아서의 허리가 움찔 휘었다. 싫다며 고개를 내저어도 순식간에 밑이 흐물하게 풀리고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아, 윽…. 하….”

아서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떻게든 카를로스를 밀어내려 발버둥을 쳤으나 무의미한 시도였다. 단단한 몸은 벽을 밀어낸 것처럼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뭉툭한 혀가 입구를 진득하게 핥아 대다가, 꾸욱 구멍을 파고들어 왔다. 축축한 것이 눅진하게 풀린 내벽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것이 카를로스의 혀라는 사실이 아서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아서의 아래를 고개를 박은 카를로스는 넋이 나간 양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구멍을 빨아 대는 데만 몰두했다. 살을 빨아들이는 천박한 소리만이 끝도 없이 귓전을 울렸다.

“너는, 읏, 수치도 없는…, 아……!”

성기를 건드리는 것과는 다른,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 아서를 강제로 고양시켰다. 부정하려 해도 이 순간 아서가 느끼고 있는 건 명백한 쾌감이었다. 어느새 힘을 받은 성기가 복부 위로 꺼덕이고 있었다.

뒤가 타액으로 축축이 젖어 들었다. 카를로스도 그와 마찬가지로 평생을 황족으로 자라났는데, 제 형제의 뒤를 핥으면서 어떤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오로지 당하는 아서만이 수치심에 괴로워했다.

“싫, 하지 말라고….”

“…형님.”

아서를 응시하는 검붉은 눈이 음욕으로 일렁거렸다. 카를로스는 타액에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훔쳐 내고, 재차 아서의 다리 사이에 고개를 박았다.

“얌전히 벌리고 계셔야지요. 우리 그러기로 약속하지 않았나….”

그가 속삭이자 젖은 입김이 입구를 간지럽혔다. 아서의 반항에 카를로스는 오히려 보란 듯이 허벅지를 더 넓게 벌렸다. 아서의 얼굴이 모멸감으로 일그러졌다.

중지로 구멍 입구를 벌린 카를로스가 그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입술이 주름에 뭉개지고 비벼졌다. 타액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젖어 있는 뒷구멍에서 찐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서는 뒤가 축축하다 못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입술을 깨물어 봐도 자꾸만 열기 어린 신음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흐으, 아….”

게걸스럽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카를로스는 한참 동안 구멍을 핥고 빨았다. 그 와중에도 그는 아서가 조금만 거부하려 들면 어젯밤 대화를 상기시켰다. 아서는 반항을 포기하고 얌전히 다리를 벌리고 있어야만 했다.

굶주린 개마냥 한참을 핥던 카를로스가 구멍에 손가락을 쑤셔 넣고 원을 그려 넓혔다. 주름이 늘어날 때마다 모습을 드러내는 붉은 살마저 탐욕스럽게 빨아들였다. 회음부 역시 젖 빨듯 핥았다.

“잠, 아…!”

손가락을 갈고리 모양으로 굽혀 내벽 한 부분을 문지르자 아서가 숨을 헉 들이켰다. 카를로스는 눅진하게 젖은 주름 사이로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도톰하게 튀어나온 부위를 손끝으로 지그시 누르고 위아래로 탈탈 털었다.

“흐, 아, 아…!”

순간 아서는 눈앞이 번뜩였다. 무심코 발버둥을 치려던 아서가 이불보를 꽉 쥐고 신음했다.

반쯤 감긴 눈에 수치심과 쾌락이 뒤섞여 머물렀다. 카를로스는 고개를 고간에 박은 채 눈동자만 옮겨 그런 아서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가 침실 한편에 서 있던 기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브리엘, 연고.”

“…예.”

젖은 숨을 뱉어 낸 카를로스가 한참을 빨아 댔던 구멍을 더듬었다. 그는 가브리엘이 건넨 연고를 죽 짜고는 엉덩이며 구멍이며 가리지 않고 치덕치덕 발랐다.

주름이 눅진하게 풀려 있어 한 번에 세 손가락을 밀어 넣어도 저항감 없이 쑥 들어갔다. 그는 쑤셔 넣은 손을 둥글게 돌렸다.

이내 카를로스가 제 성기를 손에 쥐었다. 아서와 마찬가지로 카를로스의 것 역시 완전히 발기한 지 오래였다. 검붉은 성기가 팽팽하게 달아올라 꺼덕거렸다. 그가 더운 숨을 뱉어 냈다.

“…하아.”

축축이 젖은 구멍에 두꺼운 살 기둥이 비벼졌다. 완전히 발기한 성기가 꾸욱, 내벽을 가르며 들어갔다.

“흐, 아윽…….”

아래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아서가 허리를 굳혔다. 충분히 풀어져 있다 해도 한 번에 밀어 넣기엔 지나치게 버거운 부피감이었다. 뒤로 넘어간 고개가 덜덜 떨렸다.

카를로스의 좆은 박아 넣는 것만으로도 극점을 압박하듯 짓눌렀다.

“흐윽, 읏, 아…….”

기분 좋아…. 아서는 카를로스가 듣지 못하게 속으로만 그리 되뇌었다.

아래를 가득 채운 살 기둥이 어딘가를 꾸욱 누르자 아서가 허억, 숨을 들이마시며 바들바들 떨었다. 곱아 든 발끝이 침구 위로 깊은 주름을 만들어 냈다.

두꺼운 성기가 철퍽 끝까지 박힌 순간, 몸 깊숙한 곳에서 자글거리는 감각이 훅 치밀었다.

“이상, 읏, 빼… 잠깐…, 아…!”

미처 인지할 새도 없이 아서의 성기가 사정액을 줄줄 흘렸다. 뒤를 빨려 달아올랐던 몸이 갑작스러운 자극을 견디지 못한 탓이었다.

“아, 안, 돼… 아…….”

순식간에 예상치 못한 절정에 치달았다. 아서는 아래에 좆이 박힌 채 어찌할 줄 모르고 헐떡였다. 손 한 번 대지 않은 성기가 홀로 파정액을 흘리고 자극에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뺨에 불긋한 열꽃이 피었다. 새하얀 불빛 아래 절정에 이른 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수치도 모르고 넓게 벌어진 다리, 유독 붉은 입술이 잘게 떨리는 것까지 모두 카를로스는 제 시야에 담았다.

“…….”

헐떡이는 아서를 보며 그가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억센 손아귀가 허벅지를 터트릴 것처럼 꽉 쥐었다.

“하아, 이젠 또….”

화가 난 것처럼 눈가를 일그러트리며 그가 허리를 쳐올렸다. 아서는 빨라지는 추삽질에 다시 벌벌 떨며 신음을 내뱉었다.

“아, 아…. 흐, 잠, 깐, 아…!”

“이런, 식으로 사람을 돌게 하네….”

거친 삽입이 이어졌다. 좆을 박아 넣는 움직임은 몇 번 이어지지 않아 무언가에 쫓기듯 급해지고 있었다.

절정이 채 식기도 전에 이어진 삽입이었다. 두꺼운 성기가 거칠게 구멍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쿵쿵, 미친 듯이 처박는 허리 짓엔 조금의 여유도 없었다.

거친 삽입을 못 이겨 카를로스의 음낭이 맞닿은 둔부에 마구 뭉개졌다. 번들거리는 검붉은 기둥이 빠르게 모습을 감추었다 드러났다.

“흐, 으… 아! 아……!”

철썩, 철썩, 진득한 살끼리 맞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히 울렸다. 거칠게 허리 짓을 하는 카를로스는 마치 무언가에 정신이 홀린 사람처럼 보였다. 아서를 내려다보는 검붉은 눈동자가 투명한 막이 씐 것마냥 번들거렸다.

“쑤셔 주자마자, 질질 싸 대질 않나….”

“아, 흣, 그만, 방금, 아……!”

“이젠, 이런 식으로, 꼬리를 쳐.”

아래를 처박는 움직임이 보다 급해졌다. 극점을 주먹으로 내려치는 것 같은 폭력적인 자극이 주어졌다. 좆이 푹 박힐 때마다 아서의 아랫배가 볼록하게 부풀었다 꺼지길 반복했다.

“아, 흐윽…!”

몰아치는 자극을 견디지 못한 아서가 발버둥을 쳤다.

아서의 몸이 위로 끌어당겨졌다. 벌벌 떨리는 등이 카를로스의 가슴팍에 맞닿았다. 양다리가 넓게 벌어지고, 액을 흘릴 수 없을 만큼 쥐어 짜내진 성기가 카를로스의 손아귀에 붙잡혔다.

“형님. 하아. 여기, 가브리엘에게도 제대로 보여 주셔야지요.”

움츠러드는 허벅지를 카를로스가 양손으로 쥐고 벌렸다.

아무것도 걸치지 못한 나신인 아서와 대조적으로 기사는 평소처럼 단정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금색 눈동자가 아서를 차분히 응시했다. 수치심에 아서의 전신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형님이 그리, 탐내던 기사가 코앞에 있는데.”

“하지 마, 싫, 어…, 아…!”

허벅지를 꽉 움켜쥐고 있던 손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한쪽 다리가 자유로워졌다고 안심하기 무섭게 곧바로 성기가 붙잡혔다.

성기의 여린 선단 부근이 마구 비벼진다. 사정 직후 예민해진 부위가 집요하게 자극되자,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아서가 침대보를 손에 움켜쥐었다. 정신없이 뒤에서 치받는 추삽질 역시 다시 시작되었다.

“아, 아, 파… 흐윽, 아! 그만…!”

한쪽 다리가 덜렁 들린 몸이 시야가 어지러울 정도로 흔들렸다. 그만하라고 고개를 저어도 극점을 때리는 자극이 쉼 없이 이어졌다. 철썩거리는, 살갗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거친 손끝이 성기 선단의 갈라진 틈새를 자극했다. 아서의 손끝이 발작하듯 벌벌 떨렸다. 앞뒤 어디서 오는지도 모를 폭력적인 쾌감이 밀려들어 왔다.

아서는 더 이상 자신이 무얼 당하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온몸이 희게 녹아내렸다. 비명을 지르고 싶어도 벌어진 입에선 힘 빠진 신음과 쌕쌕 바람 새는 소리만 새어 나왔다.

거대한 무언가가 제 전신을 쥐어짜는 것만 같았다. 어느 순간부턴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싫, 아…!”

카를로스의 손에 붙잡힌 성기에서 무언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소변을 누는 것만 같은 치욕스러운 광경에 아서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 와중에도 뒤에서 치받는 폭력적인 삽입은 멈추지 않았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칼날 같은 쾌감은 고문처럼 끝없이 이어졌다.

“흐윽, 흐, 아….”

끝나지 않는 절정이 공포스러웠다. 아서는 이지를 잃은 짐승처럼 신음하며 몸을 비틀었다. 점성을 갖추지 못한 투명한 파정액이 마구 흔들리는 몸을 따라 침구 위로 흩뿌려졌다.

벌어진 입가로 타액이 뚝뚝 흘러내린다. 혼몽한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끝의 끝에서 강제로 주어지는 쾌감은 고문과도 같았다.

“도, 도와….”

눈앞이 흐릿했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만이 아서의 뇌리를 지배했다. 아서는 벌벌 떨며 가브리엘이 서 있는 쪽으로 기어갔다.

하지만 채 한 뼘도 벗어나기 전에 카를로스의 손에 붙잡혀 미끄러져 내렸다.

“아윽…!”

축축이 젖은 자지가 끝까지 처박혔다. 꿰뚫린 몸이 가늘게 경련했다. 살 기둥이 쉴 틈 없이 내벽을 추삽질하자 이제 더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성기가 고장이라도 난 양 힘없이 흔들렸다.

좆머리가 닿는 깊숙한 내벽은 이미 진득이 젖어 있었다. 카를로스 또한 파정을 한 것 같았지만 대체 언제였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흐, 으….”

더는 거부할 일말의 힘조차 없었다. 아서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맥없이 흔들렸다. 모든 상념들이 흰 파도에 밀려나듯 사라졌다.

***

아서는 지친 얼굴로 창밖을 쳐다보았다. 얼마 전 흩날리던 눈송이를 시작으로 저택이 온통 눈으로 뒤덮였다. 그동안 날이 평온하던 게 이처럼 한 번에 몰아 내리려고 그랬던 모양이다.

눈이 선사한 고요 때문인지 며칠 내내 시달린 끝에 드디어 저택의 침실에도 잠시간 평화가 찾아왔다.

널따란 창틀 안으로 희뿌연 숲이 아득하게 펼쳐졌다. 만일 아서가 지금의 감금 생활을 즐기고 있지 않았더라면 좌절감을 안겨 주었을 장관이었다.

“드세요, 형님.”

아서는 별말 없이 입을 벌려 한입 크기의 과일을 받아먹었다. 이곳에서 제 손으로 식기를 들어 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가 전과 달리 주는 대로 얌전히 받아먹어 그런가, 자꾸만 카를로스는 아서에게 무언가를 먹이려 들었다.

“…맛있네.”

마지못해 아서가 말했다. 억지로라도 맛있다는 소리를 하지 않으면 식사가 끝이 나지 않았다.

“정말로요?”

“응, 맛있어.”

“표정은 안 그래 보이는데.”

카를로스는 또 딴지를 걸었다. 그는 처음엔 얌전히 구는 아서의 모습에 만족하는가 싶더니 지금은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졸려서 기운이 없는 거지, 정말이야.”

애써 웃어 보인 아서가 카를로스에게 입을 맞추었다. 어릴 때처럼 뺨에 도장을 찍듯 뽀뽀하자 카를로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순해졌다.

아서는 반대쪽 뺨에도 쪽, 입을 맞추고 카를로스에게 팔을 뻗었다. 그러고는 검은 머리칼을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잦은 입맞춤은 카를로스가 요구한 대로였고, 안고 머리를 쓰다듬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계속 쓰다듬어 줘요.”

카를로스가 아서의 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그 모습이 이제는 늘 반복되었던 일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아서도 며칠 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손길로 카를로스의 머리칼을 만져 주었다.

종종 카를로스는 섹스를 할 때보다 아서에게 안겨 있을 때 더 만족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그러다가 어느 순간, 어디서 불이 붙었는지 갑작스레 아서의 위로 올라타곤 했다.

애처럼 응석을 부리는 듯싶다가도 무섭게 돌변하여 달려드니, 아서로선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물론 아서는 그래서 카를로스가 더 좋았다. 날이 갈수록 카를로스의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마음에 들었다.

황후니 반려이니 그런 건 당장 골 아프게 고민해 봤자 달라질 것이 하나도 없었다. 우선 아서는 현 상황을 즐기는 데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구속구를 풀어 주지 않아 몸이 힘든 걸 제외하곤, 카를로스와 하루 종일 붙어 지내는 생활이 무척이나 흡족하기 그지없었다.

“혀 좀 내밀어 봐요.”

지금도 카를로스가 아서에게 몸을 부비다 올라타선 하는 말이란 게 이런 거였으니, 아서가 만족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넌 매번 꼭 그렇게 말해야 직성이 풀리나 봐.”

아서는 신이 난 속내를 숨기고 중얼거렸다.

“그래서 싫어요?”

“…아니.”

싫냐는 말에 아서가 고개를 저었다. 생각을 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반응이었다.

얼마 전 카를로스는 아서에게 ‘왜 형님은 매번 싫다고만 하느냐’ 묻고선, 아서의 입에서 좋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밤새 혹독하게 괴롭혔다. 만일 계속해서 싫다는 말이 나올 경우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를 것이라 경고한 건 물론이었다. 아서가 아니라 황제나 황후에게 칼날이 향할 것이라고.

「하아, 형님, 좋아요?」

「아, 윽…. 좋아, 읏, 아…!」

달리 선택권이 없었다. 그날 아서는 카를로스의 좆을 받으며 기분이 좋다는 말만 수십 차례 내뱉고 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오늘 역시 아서는 순순히 입을 벌려 주어야만 했다. 카를로스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살짝 드러난 혀끝을 빨았다. 입술이 겹쳐지고 곧바로 그의 혀가 입 안으로 밀려들었다. 스치는 숨결에서 과일 향이 났다.

“으읍, 응….”

어느새 또 아서의 위로 올라탄 카를로스가 한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젖꼭지를 엄지로 짓누르고 돌리자 아서가 몸을 떨며 반응했다.

“하아, 아….”

입맞춤은 평소처럼 끈질기게 이어졌다. 아서는 어떻게든 카를로스에게 휘둘리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늘 끝에 가서는 숨이 부족해지고 말았다.

카를로스는 헐떡이는 아서를 만족스러울 만큼 취한 뒤 놓아주었다.

“기분 좋아요, 형님?”

“…….”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아서에게 카를로스가 눈짓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좋아.”

아서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답했다. 누가 들어도 거짓임이 명백한 태도에 카를로스의 한쪽 눈썹이 들썩였다.

“정말이야.”

잠시간 망설이던 아서가 어색하게나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으레 보이던 작위적인 미소였다. 카를로스를 바라보는 눈동자엔 여전히 조금의 온기도 없었다. 억지로 당겨졌던 입꼬리는 이내 다시 제자리를 찾아 내려갔다.

“나를 속여 먹을 궁리를 할 때는 잘만 웃더니…. 이젠 못 하겠습니까?”

카를로스가 못마땅한 투로 물었다. 어느 누가 이런 상황에 진심으로 미소를 지을 수 있겠냐만 그는 억지를 부려 댔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보고 싶은 얼굴은 이런 것이 아니라 좀 더 다른….

잠깐 사이 먼 과거, 아서와의 사이가 틀어지기 전을 떠올렸던 카를로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서에게 이전과 같은 마음을 강요하는 게 불가능한 일이란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겉모습을 그럴듯하게 만들어 내는 정도는 타의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고작 이 정도로 초조하게 굴어선 안 되었다.

“전처럼 웃어 봐요.”

카를로스가 검지로 아서의 입꼬리를 누르며 말했다. 일자로 다물려 있던 입술이 천천히 미소를 그렸다.

좀 전보다는 자연스러워진 웃음에 카를로스는 우선은 한발 물러났다.

“잘 웃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얌전히 구세요.”

그의 말에 아서가 기분이 상한 기색을 풍겼다가 급히 표정을 수습했다. 카를로스가 비뚜름하게 쳐다보자 아서는 내키지 않는 듯이 답했다.

“…알겠어.”

“내가 없는 동안에도 지금처럼 얌전히 계셔야 할 겁니다.”

“알겠어.”

내키지 않지만 카를로스는 조만간 저택을 비울 예정이었다. 아서를 제 반려로 들이기 전, 황후와 오를레앙가를 확실히 억눌러 두기 위함이었다. 앞으로 적어도 반년간의 기간이 소요될 것이었고 그때까지 그는 저택과 황성을 드문드문 오고 가야 했다.

카를로스가 침실 입구 쪽을 힐끗 보았다. 기사는 며칠 전과 다름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보는 눈이 있을 때의 가브리엘은 전과 같아 보이지만, 감추어진 속내는 어떠할지 의문이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기간 동안 가브리엘과 형님을 이곳에 단둘이 남겨 둘 순 없었다.

「가브리엘, 어울리지 않게 굴지 마. 언제부터 그리 남의 것을 탐내기 시작했나. 형님이 네게 의지하도록 만들라 했지, 밤 시중을 들라곤 하지 않았을 텐데.」

「실수였어.」

「…실수였다고?」

카를로스가 저택으로 귀환했던 날, 가브리엘은 제가 잘못된 판단을 한 것 같다며 눈매를 찌푸렸다.

기사는 자신이 어리석은 짓을 하였음을 인정하고 순순히 사과했다. 두 번 다시는 아서의 몸에 닿지도, 아서가 제 몸에 손을 대는 일도 없을 거라며 약속하였다.

「두 번은 없어.」

당시에는 그리 말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걸로 모든 일이 마무리된 건 아니었다.

카를로스에겐 가브리엘이 제 등에 칼을 꽂지 않으리라는 믿음은 있었지만, 그가 제 형제를 넘보지 않으리라는 확신은 없었다. 필요할 때면 기사가 그 신뢰 가는 목소리로 태연히 거짓을 늘어놓기도 한다는 걸 알았다.

카를로스는 입이 무거운 시종 한 명과 부관 마노를 저택으로 불러들였다. 가브리엘 대신 시종에게 아서의 수발을 들게 했고, 마노에겐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서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겼다.

성급하게 굴지 않아야 하는 걸 알고 있음에도 이따금씩 그는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하루빨리 모든 상황을 정리하고 아서를 제 곁에 두고 싶었다.

밤이 깊어졌으나 눈 덮인 바깥은 푸르스름하게 빛을 발했다. 시야를 흐릴 만큼 쏟아지는 눈도 황성으로 가면 씻은 듯이 사라질 터였다. 카를로스는 아서를 끌어안은 채 흰 눈으로 뒤덮인 창밖의 풍경만 한참 바라보았다.

***

잠을 자지 못한 지 며칠이 지났다. 가브리엘이 메마른 눈을 깜빡거렸다. 천장을 응시하는 황금색 눈동자는 무기질적이었고, 희미한 미소마저 사라진 얼굴은 창백했다.

꿈이란 것이 그렇다. 늘 평화롭지만은 않고 기실 불편한 이야기가 펼쳐질 때가 빈번했다.

가브리엘의 꿈 역시 그러했다.

그다지 꿈을 자주 꾸는 편이 아니었건만, 일전에 겪은 일이 뇌리 깊이 새겨진 탓이었을까. 두 형제의 정사를 지켜보았던 순간이 꿈이라는 매개를 통해 반복되었다.

온전한 재현이라기엔 왜곡된 부분들이 존재했다. 카를로스의 모습은 흐릿했으며, 몰아치는 듯한 정사가 끝난 자리엔 아서 혼자만이 남아 있었다.

‘가브리엘.’

현실에선 아서가 그날 그의 이름을 부르지도, 그를 그토록 물끄러미 바라보지도 않았다.

‘가브리엘, 너는 나를 구해 줬어야지.’

마찬가지로 그에게 어떤 원망을 건네지도 않았다.

왜 저를 구하지 않았느냐고. 그 짤막한 물음에 그는 순간적으로 목이 조이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고작 제가 만들어 낸 환영이 던진 물음에 불과할 뿐인데.

「도, 도와…….」

그때 아서는 제 도움을 필요로 했다. 무의식적으로 뱉어 낸 말이든 무엇이든, 그 자리에 아서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그 하나가 유일했으므로.

희미하게 귓가를 스쳐 지나간 소리에 의식할 것도 없이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었다.

그리고 그가 몸을 움직인 것과 동시에 카를로스의 눈동자가 그에게로 향했다. 제 형제를 몰아붙이는 와중에도 카를로스는 기사의 동요를 즉각 읽어 냈다.

서늘한 시선이 마치 형체를 가지기라도 한 양 날카로웠다. 그를 똑바로 응시하는 시선은 명백히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본래의 가브리엘이었다면 일말의 고민도 없이 뒤로 물러났을 것이다. 타인과 무엇 하나를 두고 대립할 때, 그는 늘 제 것을 내어주는 쪽에 속했던 사람이었다.

포기하는 건 언제나 쉬웠다. 오래된 습관처럼 관성적이고 익숙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한발 물러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지독히 망설여졌다.

만일 아서와 카를로스의 관계가 정상적인, 서로 간의 친애로 맺어진 것이었다면 마음이 상했을지언정 조용히 물러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니지 않나. 저 관계엔 아서의 의사가 조금도 개입되어 있지 않았다.

누군가를 제 것으로 상정할 수 있는 근거가 육신이 아니라 마음에 달려 있다면, 아서는 카를로스의 것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그의 것도 아닐 테고.

힘없이 늘어진 나신이 시야에 박히듯이 들어왔다. 늘어진 몸은 가느다란 숨소리를 제외하면 인형처럼 어떤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온갖 상념들이 고개를 들이밀었지만, 그중 기사를 가장 괴롭게 만든 건 끝이 없는 무력감이었다.

가브리엘의 눈동자가 새하얀 나신을 발끝부터 훑고 올라갔다. 그 시선이 기어이 눈물로 젖은 뺨에 내려앉았을 때,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끓어오르던 마음이 한순간 쩍 얼어붙은 듯했다.

가브리엘은 그 자리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문득 머릿속에 한 문장이 떠올랐다.

…내가 전하의 기사였다면.

한 번 그리 생각하자 도무지 그 외에 다른 생각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본래 오롯이 카를로스의 구역에 속해 있던 기사는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경계 지점에 걸쳐 있었다. 아서에게 한 발, 주군에게 속한 기사로서 지켜야 할 의무에 한 발.

언제까지나 이도 저도 아닌 곳에 발을 걸치고 있을 순 없었다. 가브리엘은 머릿속에서 찬찬히 두 가지를 저울질했다.

오래 고민하지 않아 추는 단번에 아서 쪽으로 쏠렸다. 가브리엘에게 기사로서 지켜야 할 신의는 타의에 의해 주입받은 상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던 탓이다.

그는 아서에게 간섭할 수 있는 자격을 손에 쥐고 싶었고, 그러려면 아서의 기사가 되는 게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무표정하게 가라앉았던 기사의 얼굴이 물감이 번지듯 조금씩 평소와 같은 평온한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그가 무언가 결심하게 된 순간이었다.

그날 가브리엘은 한참이나 뒤늦은 때에 카를로스를 제지하고 나섰다.

「칼, 이미 정신을 잃으셨어.」

「알아.」

「구속구를 차면 일반인보다 못한 몸이 된다는 걸 알잖아. 더 무리하면 내일까지 앓아누우실 거야.」

그리 말한 기사는 먼저 한 발 뒤로 물러나며 카를로스와 대립할 의사가 없음을 드러냈다. 설득은 여기까지 하고 나머지 결정은 카를로스에게 맡기겠단 의미였다.

가브리엘이 적정선에서 물러나니 카를로스도 경계를 조금은 거둬들였다. 카를로스가 몸을 물리자 희끄무레한 액으로 범벅된 성기가 주륵 빠져나왔다. 기사의 참견이 아니었더라도 이쯤에서 물러날 생각이었던 듯했다.

「원래부터 오지랖이 지나친 줄은 알았지만, 요즘 들어 더 심해졌어.」

카를로스가 아서에게로 시선을 둔 채 담담하게 말했다.

「시키지도 않은 쓸데없는 짓을 하질 않나…. 형님을 회유하라 명하였더니 정작 회유된 건 네 쪽인 것 같군, 가브리엘.」

「…그런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형님과 몸을 섞었나?」

「아니.」

「그 짧은 사이 형님께 마음을 주기라도 했나 봐.」

「안쓰러워 마음이 조금 쓰이는 정도야. 네가 우려할 만한 감정은 아니니 걱정 마.」

가브리엘이 부정했지만 카를로스는 믿을 생각이 없는 듯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네가 형님에게 가진 감정이 무엇이든 간에 전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기사에게 짧은 경고가 주어졌다. 오래 보아 온 사이였던 만큼 카를로스는 이미 가브리엘의 속내를 어느 정도 읽어 냈다.

카를로스가 건넨 말에 기사는 실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웃어 보였다.

「너야말로 이런 짓은 좀 관두는 게 어때. 열두 살 때 하던 행동이랑 다를 바가 없잖아.」

사실 오늘의 대화는 약과에 불과했다. 어릴 적엔 가브리엘이 카를로스에게 지금보다 더 직설적이고 심한 말을 무수히 들었다. 어쩌다 그가 아서와 한마디 인사라도 나누게 되면, 카를로스는 가브리엘을 죽일 것처럼 노려보았다. 심할 때는 대련을 하다 몸싸움으로까지 번진 적도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투기심에 유치하게 굴었던 것을 부정할 수 없었는지 카를로스가 별다른 말 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카를로스는 가면을 쓴 양 미소 짓고 있는 기사를 보곤 못 볼 걸 봤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겉으로 보기엔 선해 보이는 기사는 이따금씩 제 필요에 따라 낯짝을 갈아 끼우곤 했다. 저 얼굴을 하고 있는 가브리엘과 말을 섞느니, 벽에다 대고 혼잣말을 하는 게 나았다.

기사에게 등을 보인 카를로스는 축 늘어진 아서를 품에 안았다.

이렇게 형제를 품에 안고 있어도 도통 제 것 같지가 않아,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한계까지 몰아붙인 뒤였다. 구속구를 풀어 주면 아서가 정신을 잃는 일이 줄어들까 싶었지만 아직까지는 시기상조처럼 느껴졌다.

가느다란 속눈썹 아래 희미한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전 날 아서는 아프다고 욕지거리를 뱉으면서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그래 놓고서 정작 쾌감에는 면역이 없어 눈물을 보였다.

카를로스는 충동적으로 창백한 뺨에 입을 맞추었다. 흐트러진 백금발을 끝없이 만지작거리며, 맞닿은 살갗으로 전해지는 맥박에 귀를 기울였다. 깊어진 눈동자는 아서에게 붙박인 채 떨어지지 않았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를로스가 저택을 비웠다. 그는 당일 해가 뜨기 직전까지 아서를 괴롭히다 침실을 떠났다. 기절하듯 잠이 들었던 아서는 그날 늦은 오후 텅 빈 침대에서 깨어났다.

카를로스는 아예 떠나는 건 아니라 황성과 저택을 며칠에 한 번씩 드나든다 하였지만, 계속 붙어 있다 떨어지니 아서로선 불만이 컸다.

불만스러운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카를로스를 자주 보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화가 났는데, 가브리엘과 딴짓을 한 게 걸린 나머지 감시인으로 마노라는 짐덩이까지 옆에 따라붙었다. 거기에다 즐기던 목욕 시간을 이름 모를 시종이 맡게 되었다.

아서는 침대 위에 무기력하게 누워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다. 카를로스가 옆에 있을 땐 뒷일은 나 몰라라 하고 즐기기 바쁘다가, 그가 없어지고 나니 앞으로의 일들이 서서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대로 맥없이 시간만 보내다 황성으로 끌려가 황후가 될 수는 없었다.

열린 문틈으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침실 입구에 서서 시종과 대화하던 마노가 고개를 안으로 틀고 물었다.

“저,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네요. 사용인을 들여도 괜찮겠습니까?”

“그렇게 해.”

아서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 남자 시종이 트레이를 끌며 조심스럽게 침실로 들어왔다.

어떤 마법적 조치가 이루어졌는지 사용인은 아서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눈치껏 고위 귀족과 연관된 일이려니 추측 정도는 한 것 같았다. 움직이는 손길 하나하나가 극도로 조심스러웠다.

침실 문을 닫은 마노가 아서 쪽을 은근히 곁눈질했다. 저택에 온 이후로는 처음 보는 마노였는데, 쳐다보는 눈초리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아서는 그 적개심 가득한 시선에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마노가 카를로스의 기사인 이상 저런 눈을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하나 의문인 건 왜 저쪽의 기사, 카를로스와 가장 오래 함께였을 가브리엘은 그렇지가 않느냐는 점이었다.

아서가 마노의 옆에 선 가브리엘을 흘끗 보았다. 가브리엘은 이 저택에 오고 난 뒤로 줄곧 아서에게 호의적으로 굴었다. 아무리 카를로스가 아서의 비위를 맞추라고 명했다고 한들 기사는 단 한 번도 아서에게 적대감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가브리엘이 감정을 감추는 데에 능숙한 것일까. 아니면 참을 수 없을 만큼의 분노가 들지 않아서였을까.

마노와 가브리엘을 나란히 두고 보니 확실히 그들의 반응이 비교가 되었다. 아서는 어쩌면 그간 제가 가브리엘의 충성심을 과대평가했던 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용인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침실 입구에 선 가브리엘은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카를로스에게서 아서와 말을 섞지 말라는 명이 떨어진 것 같았다.

테이블 위엔 황성의 것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은 음식들이 준비되었다. 카를로스가 옆에 없단 사실만 빼면 여러모로 완벽한 감금 생활이었다.

“요리사가 바뀌었는데, 음식이 좀 어떠신지요. 입에는 맞으십니까?”

카를로스가 물어보고 답을 들어 오라고 한 듯, 마노가 내키지 않는 투로 물었다.

“음, 나쁘지 않네.”

딱히 전에 먹던 것과 다르지 않아 아서는 별생각 없이 답하고 고깃덩이를 잘라 입에 넣었다. 맛은 있지만 늘 먹던 것과 비슷한 맛이라 조금 질리는 감이 있었다.

아서는 입 안에 넣은 음식을 우물우물 씹으며 생각에 빠졌다. 맛을 음미하는 게 아니라 기계적으로 씹어 삼키기를 반복했다.

실은 그가 지금 한가롭게 맛 평가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단 지금 돌아가는 상황으로 봐서 그의 계획이 영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단 게 확실했기 때문이다.

아서가 처음 예상했던 바는 두 가지였다. 첫째로, 제가 황제의 핏줄이 아니라는 사실이 들통나면 카를로스가 자신을 더 멋대로 휘두를 줄 알았다. 더불어 아서의 치명적인 약점을 붙잡았으니 원활한 색사를 위해 구속구도 풀어 줄 줄 알았다.

전자는 어느 정도 기대한 대로 되었지만, 후자는 아니었다. 카를로스는 아서가 황성으로 귀환하는 날 구속구를 풀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조금 답답해도 거기까지는 그래도 어느 정도 수용 가능한 부분이었다. 문제는 그 뒤였다. 아서는 설마 카를로스가 자신을 황후로 들이려 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훗날 그는 황후가 사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영지 몇을 물려받고 한량처럼 여유롭게 살아갈 생각이었다. 작위를 받지 못해도 좋았다. 조금 무시당하며 살기야 하겠지만 작위가 없는 편이 좀 더 일신이 자유로울 터였다.

물론 계획은 어디까지나 계획일 뿐, 모든 게 예상대로만 흘러가는 건 아니니 아서는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황성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될 상황까지 각오했다.

한데 카를로스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성 형제인 아서를 황후로 들이려 할 줄은 몰랐다.

“…….”

식사를 하다 말고 절로 한숨이 나왔다. 황좌고 뭐고 전부 귀찮아서 내려놓은 마당에 황후의 자리가 탐이 날 리가 없다. 아서가 누릴 권세만큼 의무를 행해야 하는 자리였다. 황제 못지않게 일거리가 쏟아질 것이 뻔했다.

여차저차 그가 황후가 된다 해도 문제였다. 황손을 낳으려면 황비를 들여야 한다느니 온갖 헛소리를 평생 떠안아야 할 터였다.

물론 이미 카를로스의 아래엔 죽은 누이의 딸 펠리체가 입적되어 있기에, 그런 반발이야 힘으로 찍어 누르면 무방하긴 했다. 펠리체를 후계로 삼으면 겸사겸사 황제에게 복수하는 기분도 낼 수 있을 테고 말이다.

아서가 황후가 되면 펠리체의 경쟁자가 태어날 걱정이 사라진다. 황태자로서 배운 것이 많은 아서는 유능한 편이었고, 아서 개인이 지닌 무력이 강하니 굳이 고이고이 싸고돌 필요도 없다.

거기다 아서를 황후 자리에 묶어 두는 것만으로 오를레앙가를 견제하는 게 가능했다. 혹여나 불온한 세력이 아서에게 접근하려 들면 눈여겨봤다가 그때 쳐 내면 되었다.

잠깐, 이거 좀…. 고기에 이어 샐러드를 씹어 삼키던 아서는 문득 제 조건이 생각보다 괜찮단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아서가 사뭇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불세출의 천재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게 카를로스는 한 번 마음먹은 것은 곧 죽어도 해내는 비인간적인 끈기를 가졌다.

과거 밀어내는 아서를 뒤따라 다니던 것도 무려 수년 동안이나 이어졌던 일이다. 만일 그의 누이가 사고로 목숨을 잃지 않았더라면 오늘날까지도 집착이 이어졌을지 몰랐다. 그 끈질긴 성미는 당연히 오늘날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아서는 낮게 침음했다. 잘못했다가 정말로 황후위에 발목이 잡히게 되는 건 아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황후의 관을 쓴 채로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을 제 모습이 아주 생생히 그려졌다. 절로 뺨이 핼쑥해졌다.

카를로스가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서는 카를로스가 점점 더 좋아지고 있었다. 그의 마음이 지금과 같다면 몇 년이고 함께해도 좋겠단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서는 황후가 되고 싶진 않았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언제가 되었든 결국 카를로스의 마음이 식어 버리는 순간이 찾아올 텐데, 그가 다른 이와 붙어먹는 꼴을 평생 동안 옆에서 지켜보게 되느니 차라리 미리 정을 떼 버리는 편이 나았다.

기회를 봐서 튀어 버릴까 했지만 그럴 경우 도망갈 방법을 고심해야 하는 등 여러모로 일이 귀찮아졌다. 카를로스를 애태울 수 있다는 걸 제외하고는 아무런 장점이 없었다.

아서는 굳이 다른 쉬운 방법을 두고 귀찮게 도망을 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사람 마음은 생각보다 쉽게 닳아 없어졌다. 정떨어지는 짓 몇 번이면 아서를 황후로 만들겠단 생각도 금세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마노 경.”

아서는 부러 식사를 반쯤 남기곤 마노를 불러들였다. 가까이 다가온 마노에게 굳이 ‘속이 좋지 않아 조금 남겼다’며 말을 덧붙였다.

“몸 상태가 안 좋으십니까?”

마노가 테이블 위를 훑어보고선 물었다. 준비된 식사 중 절반이 손도 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가뜩이나 구속구를 채워 둬 회복력이 떨어진 몸인데 식사량까지 줄면 아픈 곳이 생길 게 당연했다.

“심하진 않아. 속이 더부룩하긴 한데 조금 걸으면 괜찮아질 것 같군.”

아서가 피로하다는 듯 목 뒤편을 주물렀다.

“아직 밖으로 나갈 만한 날씨가 아니라…. 1층 홀을 걷는 건 어떠십니까?”

“좋아.”

“그럼 사용인을 부르겠습니다. 혹 상태가 더 안 좋아지신다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재차 아서의 상태를 살핀 마노가 침상 옆의 끈을 두 차례 당겼다.

시종은 신경 써 선별해 온 자답게 여러 방면으로 능숙했다. 마노가 잠깐 시선을 피해 준 사이, 얼마 지나지 않아 가벼운 외출복 차림이 갖추어졌다.

“이만 가시지요.”

“그래.”

마노의 말에 아서가 힘없이 답하곤 몸을 일으켰다. 자세는 평소처럼 반듯했지만 내딛는 걸음엔 힘이 없었다.

아서는 오늘부로 카를로스가 찾아올 때까지 대놓고 꾀병을 부릴 계획이었다. 카를로스를 성가시게 할 방법 중 하나였는데, 그가 며칠 내로 찾아오지 않으면 더 극단적인 수단을 써서 진짜 아픈 사람이 될 생각까지 있었다.

힘없이 계단을 내려가던 아서가 갑작스레 이마를 짚으며 그 자리에 서서 비틀거렸다. 다소 뜬금없는 타이밍이었음에도 신들린 듯한 연기력이 그 빈틈을 메웠다.

아서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비틀거리다 저보다 작은 마노에게 염치없이 몸을 기댔다.

“어어, 괜찮으세요?”

휘청거리는 아서를 마노가 서둘러 부축했다. 아서가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어지러워. 미안하지만 잠깐 쉬었다 내려가야겠어.”

“더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좀 힘들 것 같군.”

“그럼 침실로 돌아가시는 건.”

“아니, 침실은 갑갑해. 차라리 이대로 앉아 있는 게 낫겠어.”

그간 햇빛을 보지 못해 창백해진 뺨은 병자의 행색을 가장하기에 적합했다. 아서가 현기증이 난 듯 이마를 짚었다.

난감해진 마노는 저를 좀 도와달라는 듯이 가브리엘에게 눈짓했다. 아파 보이는 아서를 이대로 계단에 앉혀 두기는 모양새가 좋지 않았던 탓이다.

“전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1층까지 모셔다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내내 조용히 있던 가브리엘이 입을 열었다. 키가 작은 마노가 아서를 안아 옮기면 둘 다 불편할 테니 그가 돕고자 나선 것이었다. 아서는 가브리엘을 흘끗 쳐다보곤 시선을 돌렸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서가 거절을 하지 않으면 허락한 걸로 받아들인다. 둘 사이에 암묵적으로 새겨진 규칙이었다.

“마노 경, 일 층에 있는 안락의자를 밖으로 옮겨 놔 주시겠습니까. 오른쪽 모퉁이를 돌아 가장 안쪽 방에 있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아서가 홀에 도착하기 전까지 준비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 건지 마노가 서둘러 아래층으로 향했다. 급히 뛰어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마노가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가브리엘과 아서만이 5층에 남았다. 카를로스가 돌아온 이후로는 처음으로 단둘만 마주한 상황이었다. 이전에 비해선 조금 어색한 공기가 맴돌았다.

“실례하겠습니다, 전하.”

가브리엘이 계단에 앉아 있는 아서를 조심히 안아 들었다. 그간 아서가 걷기 귀찮아할 때마다 안아 옮겨 주었던 터라 그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아서도 당연하다는 듯 기사의 가슴팍에 고개를 기댔다. 그렇게 아서의 몸이 편안하게 늘어지려던 순간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귓가를 스치는 속삭임에 아서가 눈을 깜빡였다. 가브리엘이 나직이 말했다.

“전하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더는 카를로스 전하께서 전하를 강제하지 못하도록 돕고 싶습니다.”

“…….”

아서는 아무 답을 하지 않았다. 뒤늦게 상황 파악을 마쳤는지 아서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마치 대답할 가치조차 없는 말이라는 양, 아서가 비웃음을 띠더니 고개를 돌렸다.

아서를 안아 든 채로 기사는 계단을 느린 걸음으로 내려갔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았다.

“전하.”

가브리엘이 낮게 부르자 아서의 얼굴 위로 더욱 선명한 조소가 그려졌다. 한 걸음씩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기사는 아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애처롭기까지 한 시선을 받은 아서가 마지못해 입을 뗐다.

“대체 내게서 무슨 답을 원하는 건지 모르겠군. 설마 내가 이 꼴이 되었다고 네게 매달릴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그럼 입 다물어. 무어가 됐든 내 일에 참견할 생각이라면 전부 집어치우고.”

비틀린 잇새로 비아냥이 흘러나왔다. 아서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알량한 동정심에 기대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안 그래?”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아서의 독설을 듣고도 기사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가브리엘은 더는 아서를 설득하려 들지 않고 즉시 단념했다. 만일을 위해 확인해 보았을 뿐, 아서의 성격상 한번에 그의 손을 잡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주제넘게 굴어 죄송합니다, 전하. 1층으로 곧장 모시겠습니다.”

“됐어. 내 발로 내려가겠다.”

그가 조심스럽게 사과했지만 이미 기분이 상한 아서는 가브리엘에게 저를 내려 달라고 요구했다.

“…송구하옵니다. 몸이 좋지 않으시니 이번만 도움을 받으시는 건 어떠신지요.”

아서는 끝까지 제 발로 내려가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억지로 안고 내려갔다간 아서의 분노를 살 것 같아 가브리엘은 하는 수 없이 아서를 놓아주었다.

계단 옆 창틀이 눈보라를 이기지 못하고 덜컹거렸다. 창틈으로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가 샜다. 중간중간 비틀거리면서도 아서는 끝끝내 제힘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기사가 내민 손도 코웃음과 함께 무시했다.

“어, 왜 두 분 따로 내려오세요?”

1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노가 혼자 걸어 내려오는 아서와 그 뒤를 따르는 기사를 보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사이 전하께서 몸이 괜찮아지신 모양이더군요.”

가브리엘이 평소와 같은 차분한 투로 답했다. 둔한 편인 마노는 아무 의심 않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아,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럼 전하,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마노가 계단 난간에 기대 있던 아서를 부축했다. 가브리엘을 뿌리칠 때와 달리 아서는 순순히 마노의 도움을 받고 안락의자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서 구해 왔는지 마노는 담요까지 가져와 아서의 무릎에 덮어 주었다. 아서를 싫어하지만 맡은 일에는 고지식할 만큼 성실한 게 그다웠다.

마노가 벽난로에 불을 붙이는 동안 가브리엘은 창가의 커튼을 걷었다. 돌아보니 아서는 의자에 편히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짧은 순간 가브리엘의 입가에 쓴 미소가 떠올랐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황성으로 돌아간 지 채 십 일도 지나지 않아 카를로스가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다. 아서의 몸이 좋지 않단 보고를 듣고 온 듯, 카를로스는 새벽 늦게 찾아와 아서를 이곳저곳 살피다 해가 뜨기 전 서둘러 떠났다.

아서가 인기척을 느끼고 부스스 깨어났을 때 카를로스는 다시 자라며 토닥이고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아서는 제가 잠결에 헛것을 본 줄로 알았다.

허망하게 카를로스를 보낸 아서는 그날 이후 거의 앓아누웠다. 도무지 화를 참을 수가 없어 카를로스가 올 때까지 식음을 전폐하고 대놓고 꾀병을 부렸다.

분명 처음엔 카를로스를 귀찮게 하려고 시작한 엄살이었는데, 나중에는 카를로스의 얼굴을 못 보는 게 열이 받아 드러누웠다.

아서는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이불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려 하지 않았다. 옆에서 어르고 달래야 겨우 걷는 시늉 정도만 했고, 눈앞에 잘 차린 음식이 있어도 내키지 않아 등을 돌렸다. 카를로스가 꾀병 소식을 듣고 찾아오면 그제서야 조금씩 먹는 시늉을 했다.

“왜 이렇게 식사를 거르십니까, 형님.”

“입맛이 없어.”

아서가 그렇게 막무가내로 드러누워 버리니 카를로스는 적어도 사흘에 한 번은 아서를 보러 와야만 했다.

대개 카를로스는 해가 뜨기 전 새벽에 저택을 찾았다. 그가 왔을 때는 침실의 모든 인원이 밖으로 나가 대기하거나 휴식을 취했다.

늦은 밤 카를로스가 이곳에 와서 하는 일이라곤 아서의 식사를 챙기는 게 전부였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로, 둘만 남은 침실에서 형제는 새벽부터 테이블 위의 수프 한 접시를 두고 가벼운 실랑이를 했다.

“내내 끼니를 거르지 않으셨습니까. 좀 드셔 보세요.”

카를로스는 겉보기엔 평소와 같았는데 말하는 속도가 평소보다 미묘하게 느렸다. 부족한 시간을 쥐어짜 내 황성과 저택을 왕래하다 보니 잠을 거의 자지 못한 지가 수십 일째였다. 아무리 마스터라 해도 평생 자지 않고 생활할 수 있는 건 아니라 말소리에서 피로가 드러났다.

“오늘도 입맛이 없습니까?”

“그냥. 먹을 기분이 안 들어.”

아서가 퉁명스레 답했다. 사람을 앞에 두고 저렇게 피곤해할 거면 조금 자고 가면 안 되나, 아서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흘린 카를로스가 손에 들고 있던 스푼을 내려놓았다. 아서와 실랑이를 하는 사이 기껏 차린 음식이 식어 버렸다.

“맛이 없어서 그러십니까?”

“응.”

대체 뭐가 그리 불만인지 요사이 아서는 반찬 투정을 하는 아이처럼 굴었다. 하는 행동만 봐서는 형과 동생이 뒤바뀐 것만 같았다.

“…그럼 내가 없는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나 얘기해 봐요.”

“똑같았어.”

“어떻게 똑같았는데?”

“그냥 똑같지.”

계속 말을 붙이는 카를로스와 달리 아서는 단답으로 일관했다.

“형님.”

카를로스는 두 번까지만 참고 아서를 차게 쳐다보았다. 아서가 불퉁한 얼굴로 줄줄이 제 일상을 나열했다.

“…일어나면 밥 먹고. 밥 먹고 나면 일 층 홀을 걷고. 다녀와선 책을 보거나, 낮잠을 자거나.”

“…….”

“매일이 똑같은데 무얼 들려 달라는 건지 모르겠군.”

“책은 뭘 읽으셨습니까.”

“새삼스레 묻지 마. 어차피 전부 보고 받는 거 알고 있으니까.”

아서는 시종일관 비딱한 태도를 보였다. 재차 한숨 지은 카를로스가 말했다.

“…조만간 황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형님을 내 반려로 앉힐 준비가 어느 정도 끝나고 나면 말입니다.”

카를로스는 조만간이라 했지만 실은 앞으로 몇 개월은 더 지나야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그걸 지금 회유라고 하는 건가?”

아서가 제 앞에 있던 그릇을 꼴 보기 싫다는 양 밀어냈다. 식기끼리 맞부딪히며 불쾌한 소리가 났다.

“황성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달라질 게 무어가 있다고, 꼭 선심이라도 쓰는 듯 말하는군.”

“글쎄요. 적어도 이 침실에서 벗어날 순 있겠죠.”

전부터 반려식을 언급하면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던 아서였기에, 카를로스는 익숙하게 대꾸했다.

“반려니 뭐니 말만 번지르르하지. 결국 네 밑에서 평생 다리나 벌리며 살라는 뜻 아니냐.”

“황성 지하에 갇혀 평생 다리나 벌리며 사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황후가 될 바에야 지하에 갇혀 사는 쪽이 나아.”

“형님.”

카를로스가 짧은 순간 눈빛을 바꾸고 아서를 마주 보았다.

“어차피 형님이 선택하는 게 아니라고, 내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벌써 잊어버렸나 봅니다.”

“…….”

“정신 차려요. 우리 이제 착하게 굴기로 약속하지 않았던가.”

“…이전의 나는 너를 동생으로 아낀 것이지, 반려로 본 것이 아니었으니까.”

뒤늦게 제 처지를 떠올린 아서가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한때는 아끼긴 했나 봐요.”

카를로스가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게, 형님. 아우가 이렇게나 삐뚤어지기 전에 진즉 잘하지 그랬습니까.”

그가 한 손으로 제 앞의 테이블을 밀어냈다. 둘 사이를 가르고 있던 탁상이 거친 소음을 내며 한쪽으로 밀려났다.

“이리로 와요.”

카를로스가 아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직접 아서를 붙잡고 끌어당길 수 있음에도 그리하지 않고, 아서가 제 발로 걸어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망설이던 아서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카를로스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가기 무섭게 차가운 손이 허리를 감싸 안고 아래로 끌어당겼다.

“읏, 잠깐….”

크게 휘청거린 몸이 카를로스에게로 무너졌다. 카를로스의 손이 아서의 뒷머리를 감싸 쥐었다. 흔들리는 시야를 미처 수습하기도 전에 입술이 부딪혔다.

물컹한 혀가 입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자, 아서는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다. 축축한 혀가 익숙한 듯이 진득하게 얽혔다.

아서의 숨소리가 가쁘게 달아올랐다. 요즘 카를로스는 바쁘단 이유로 아서의 식사가 끝나자마자 저택을 떠나 버렸다. 얼마 만에 카를로스와 닿은 것인지 아서는 이제 좀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잠시뿐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전이라면 아서가 먼저 지칠 때까지 끈질기게 괴롭혔을 카를로스는 깊은 입맞춤 한 번을 끝으로 아서를 놓아주었다.

카를로스가 돌아갈 시간을 가늠하듯 창밖을 바라보았다. 또다시 가야 할 때가 된 모양이었다.

침대까지 아서를 옮겨 놓은 그는 무어라 인사말도 없이 등을 돌렸다. 평소 그랬던 것처럼 아서만 두고 가 버리려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아서는 표정 관리를 하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열이 올랐다. 그가 짜증이 물씬 난 얼굴로 급히 몸을 일으켰다.

“…또 나만 두고 어딜 가려고?”

거의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카를로스에게 다가갔다. 문으로 걸어가는 카를로스의 손목을 낚아채 끌어당기자 카를로스가 조금 놀란 눈으로 아서를 내려다보았다.

아서는 손목 대신 멱살을 잡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카를로스를 침대까지 끌고 왔다. 카를로스는 멈칫하는 듯싶다가 이내 아서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끌려갔다.

“가지 마. 나는 여기다 가둬 두고, 너 혼자만 가겠다고?”

혼잣말처럼 아서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매달리는 것처럼 들리는 묘한 어조였다.

카를로스를 침대가에 앉힌 아서는 대뜸 그 위로 올라탔다. 가슴팍을 한 손으로 누르고 무게를 실으니 자연스럽게 카를로스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카를로스가 무심결에 아서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내가 사라지는 게 형님한텐 좋은 일일 텐데요.”

“좋은 일은 무슨…. 그냥 여기 있어.”

아서가 카를로스의 눈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뚜렷한 시선 속에 알 수 없는 집착과 열기가 엿보였다.

그 연유 모를 눈빛에 카를로스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분명 아서는 다른 목적이 있어 그를 붙잡은 것일 텐데, 이상하리만치 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지금 나를 붙잡아 봤자 황성으로 돌아갈 시일만 늦출 뿐입니다.”

“그게 내가 바라는 바야.”

“황후위가 지독하게도 싫으신 모양이군요.”

“맞아. 차라리 너와 이곳에 머무는 걸 택할 만큼이나.”

카를로스는 더 말씨름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아서가 황후위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낼 것을 예상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그 정도가 더 강해 보였다.

미지근한 입술이 마치 이곳에 남으라고 호소라도 하듯 그의 목덜미에 맞닿았다. 아서가 혀로 그의 살을 핥고, 입술로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카를로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서는 숫제 그를 잠자리로 끌어들이고 싶은 사람처럼 굴었다. 이런 방법을 써서라도 못 가게 붙잡아 두고 싶은 듯했다.

“…넘어가 주는 건 오늘만입니다, 형님.”

카를로스가 아서의 뒷머리를 잡아 끌어당겼다. 형제의 입술이 느리게 맞붙었다. 아서는 그를 밀어내지 않고 순순히 응했다.

결국 카를로스는 그날 이후로도 며칠 동안 저택에 발이 묶였다. 아서가 제 몸을 이용해서라도 그를 붙잡으려 들어 도무지 밀어낼 수가 없었다.

며칠 내내 아서와 침대 위를 뒹굴다가, 아서가 기절하듯 잠이 들고 나서야 그 홀로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왔다. 자다 깬 아서는 텅 빈 옆자리를 보고 이를 갈았다.

이후로는 그런 비슷한 날의 반복이었다.

일상은 약간의 변주를 제외하곤 비슷하게 반복되었다. 매일 반복된 날은 때때로 한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서는 카를로스를 붙잡고, 카를로스는 붙잡히고. 그러다 또다시 자리를 비우기를 되풀이했다.

똑같은 날들이 쌓이고 또 쌓여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이따금씩 아서는 흘러간 시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저택에 머무를 때면 종종 시간의 흐름이 멈춘 것 같았는데, 바깥 풍경만 하루하루 색을 갈아 끼웠다.

숲을 뒤덮었던 눈은 어느새 씻은 듯이 녹아내리고, 꽃이 피고 진 자리에 나뭇잎이 하나둘 떨어져 내렸다. 여름이 지나고는 버석한 잎이 바람을 타고 바닥을 굴렀다. 형제는 늘 같은 자리에 머물렀으니 달라진 건 정말로 창밖의 풍경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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