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1)
종일 축축한 눈이 내리던 국경 부근과는 반대로 황도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좋은 날씨가 무색하게 주군의 갑작스러운 명으로 며칠간 쉼 없이 달려온 기사들의 만면엔 피곤함만이 그득했다.
짧은 휴식조차 반납하고 미친 듯이 달려온 결과, 그들은 중간에 한 번 경로를 틀었음에도 고작 9일 만에 황도에 도달하였다. 국경에서 황도로 귀환하기까지 10일을 잡은 것도 소수 정예로 이루어진 호위단이 무리를 해야 가능한 일정이었건만 말이다.
제 휘하의 기사들을 밤낮없이 쥐어짠 장본인인 카를로스는 황도에 도착하고 나서도 아직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듯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주군이 답지 않게 발걸음을 재촉하니 뒤따르는 이들 역시 덩달아 긴장하여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황성 중앙 홀로 들어서자 평상시에 비하면 소박한 차림새를 한 황태자가 카를로스를 맞이했다.
“카를로스, 몸 성히 돌아와 다행이구나. 수고가 많았다.”
황태자의 뒤로는 관리 몇과 시종, 소수의 기사가 시립해 있었다. 황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요사이 황제는 황태자에게 실권을 넘기기 위해 건강을 핑계로 대외적인 활동을 줄여 가는 중이었다.
카를로스를 따르는 기사들이 초라한 마중 행렬을 보고 속으로 분통을 터트렸다. 전하께서 세운 공이 얼마인데 이런 식으로 대우하느냐고 내심 이를 갈았다.
부드러운 미소를 띤 황태자는 뻔뻔하게 최소한의 인사치레만 치렀다.
“카를로스. 바쁜 것을 알지만 잠깐 시간을 내주겠느냐?”
“예, 형님.”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몇 마디 실속 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회포를 풀겠다는 핑계로 카를로스와 함께 자리를 떴다. 주변의 싸늘하게 식은 눈초리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기사들을 뒤로한 형제는 말 한마디 섞지 않고 나란히 궁성 복도를 통과했다.
느긋하던 황태자의 걸음은 조금씩 빨라지다가, 나중엔 조금 서두르는 기색까지 드러났다. 말없이 빠르게 걷기만 하는 형제를 지나가는 시종들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걸어가던 황태자, 즉 황태자의 모습을 하고 있던 마법사 하이브는 태자궁 응접실의 문을 잠그기 무섭게 미소를 지웠다.
그는 제가 앉아야 할 상석을 카를로스에게 내어주고 이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겠다는 듯 마른 손수건으로 송골송골 땀이 맺힌 이마를 훔쳤다.
“전하. 무사히 귀환하셔서 다행입니다. 전하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 어찌나 가슴이 떨리던지요….”
하이브가 떨리는 손으로 손수건을 제 가슴팍에 고이 집어넣었다. 양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주먹이 부들거렸다.
전쟁 중 카를로스에게 목숨을 구명받고, 그의 신하가 된 하이브는 사실 오나드 왕국에서도 한 손안에 꼽히는 수준의 마법사였다. 제국은 하이브가 속해 있던 오나드 왕국에 비해 마법사들의 수준이 떨어지는 편이었기에 이곳에서 그의 마법을 꿰뚫어 볼 이는 전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군이 자리를 비운 동안 홀로 황궁을 지켰던 임무는 다소 심약한 편인 하이브에겐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힘이 들었다.
드디어 무사히 귀환한 주군을 마주하자 얼어붙었던 하이브의 신경 줄이 스르륵 풀어졌다.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나 보군, 하이브 공.”
카를로스는 식은땀을 흘리는 하이브를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그가 하이브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렸다.
“만일 그대가 없었더라면 쉬이 자리를 비우지 못했을 거야. 그대의 공이 커.”
“황송하옵니다….”
쑥스러워진 하이브가 제 주군을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 카를로스의 격려 덕분에 황태자를 흉내 내어 곧게 세워져 있던 허리가 긴장이 풀려 슬쩍 굽어졌다. 마법사는 멋쩍은 듯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사실 저보다는 힐다 경이 많이 고생하셨습니다. 저는 옆에서 따라다니기만 했죠….”
하이브는 온종일 제 옆에서 함께 서류 처리를 도맡아 주었던 붉은 머리의 기사를 떠올렸다.
마법사인 하이브는 특출난 두뇌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관심사가 오로지 마법에만 치중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황태자의 업무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고, 그럴 때 그의 옆에서 같이 머리를 싸매고 도와준 것이 힐다였다.
「황태자는 매일 이 짓거리를 하면서 살았단 말이지…. 보기보다 유능한 사람이었네. 아무리 권력이 최고라지만, 평생 이러고 살 거면 더러워서 황제 안 하고 말아. 하이브 공, 공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하…. 예, 그런 것 같습니다….」
하이브가 과거의 정신없던 나날들을 잠시 아련하게 되새겼다.
힐다 경은 다 좋은데 말이 좀 많은 게 흠이었다. 거기다 하는 말들이 어찌나 거침없던지 제가 더 진땀을 흘리며 방음 마법을 덧씌우곤 했다.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다른 일은 없었는가?”
급작스레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하이브에게 카를로스는 익숙하다는 듯 먼저 물었다. 본래라면 굳이 보는 눈이 있는 데서 그를 황태자궁까지 데려올 하이브가 아니었으니, 무언가 전할 말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아차. 보고부터 드려야 하는 것을.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여기까지 모셨습니다. 바쁘신 것을 아는데 송구하옵니다.”
화들짝 정신을 차린 하이브가 카를로스에게 사죄했다. 고민하다 카를로스 전하를 여기까지 불러들여 놓고 정작 본론을 전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무언가 문제가 생겼나?”
“이걸 문제라고 해야 할지…. 그저 제 노파심일 수도 있으니 전하께서 듣고 판단하여 주십사 하는 바람입니다. 황제에 관한 것입니다.”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는 보통 사람에 비해 육감이 발달한 편이었다. 가벼운 노파심일 수도 있겠으나 하이브는 제가 느낀 미묘한 위화감을 카를로스에게 곧바로 전하는 쪽을 택했다.
“말해 보게.”
“예, 전하. 대외적으로는 황제가 황태자를 끔찍이 아낀다고 알려져 있지 않사옵니까. 황제의 행보로 보아 분명 황태자를 강경히 지지하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만…. 헌데 제가 겪어 본바, 조금 꺼림칙한 면이 있었습니다.”
“꺼림칙한 면이라.”
늘 의뭉스럽게 구는 황제이니 꺼림칙해 보일 만한 점은 많았다. 카를로스는 버릇처럼 탁상 위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신이 아무리 황태자의 모습으로 완벽히 위장하고 있다 할지라도 부자연스러운 모습이 없지 않을진대, 황제는 그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음.”
“티가 날 만큼 극히 말을 아꼈음에도 염려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을뿐더러…. 태자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하며 도리어 기뻐하였던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혹시 황제가 무언가 눈치채고 떠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려되옵니다.”
“그렇군.”
카를로스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무언가 눈치채고 하이브를 떠보았을 가능성은 낮았지만, 설령 황제가 무언가 의심하고 있더라도 이제 와서 바꿀 수 있는 건 없었다. 이미 형님은 그의 통제 아래에 있고, 머지않아 그에 의해 목줄이 매이게 될 처지이기도 하였다.
“황태자의 평판을 떨어트리는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황태자가 저주를 받아 목소리를 잃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고, 아우의 약혼자를 탐내고 있다는 소문 역시 암암리에 퍼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식으로 황태자의 위상을 추락시킨다 하여도 황태자를 실각시키기엔 무리가 있사옵니다. 후계에 대한 황제의 의사가 너무나 확고하고, 황태자에게 황위에 오르지 못할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것도 아닌지라….”
“그에 관해선 우려할 것 없다.”
치명적인 결함을 증명할 것이 그의 손에 들려 있으니 말이다. 카를로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이전 날엔 최악의 경우 아서의 죽음을 위장하고 제 곁에 묶어 둘 생각까지 하였으나,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딘리 백작은 오직 눈앞의 이득만을 좇는 작자였다. 반역이라는 죄목까지 들먹이며 거짓을 고할 만한 인사가 아니었고, 그자의 말이 진실일 확률은 높았다.
백작은 추구하는 것이 명백하여 여러모로 이용하기 좋은 자였다. 만일 형님의 목이 걸린 사항이 아니었다면 굳이 입막음을 위해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그자도 그럴 줄 알고 황후를 배신하며 그에게 접근을 하였을 텐데, 운이 나빴다고밖에는 할 수 없다.
반대로 카를로스는 운이 좋았다. 아서뿐만 아니라 황후의 목숨, 그리고 오를레앙 가문의 존망까지 쉽사리 손에 쥐게 되었다.
아서를 완전히 옭아맬 패가 제 손에 들려 있는 상황이다. 카를로스는 무수히 많아진 선택지 중에서 가장 내키는 것을 고르면 되었다.
어느새 입가의 웃음기를 지워 낸 카를로스가 말했다.
“역대 황제 중에 형제를 반려로 맞이한 경우가 없지 않은 걸로 알아.”
“예, 그렇습… 예?”
“어디로 튈지 모르는 변수는 놓아주기보단 옆에 두고 지켜보는 것이 나을 테지. 나는 형님을 반려의 자리에 앉히려 한다.”
“그…, 전하. 혹시 제게 농담을 하는 건 아니… 신 걸로 보이는군요.”
처음엔 농담이겠거니 묻던 하이브가 카를로스의 눈빛을 보고 즉각 말을 바꿨다.
그가 알기로 카를로스 전하는 비효율적인 것을 혐오했으며, 누군가를 살려 두기보단 목을 베어 깔끔히 처리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가 이대로 황태자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죽은 척 위장하는 게 가장 간편한 방법일 것임을 모르진 않으나, 하이브는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는 제 주군에게 무언가 다른 생각이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역대 황제 중에 근친혼을 맺었던 경우가 없던 것은 아닙니다만…. 동성의 형제를 반려로 맞이한 경우는 전무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번이 최초 사례가 되겠군.”
“예, 그렇사옵니다.”
사실상 근친혼은 고위 귀족들이 제 권력을 공고히 유지하기 위해 고수하던 수단 중 하나였다. 그러니 황태자를 반려로 맞이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굳이 여러 구설수가 따라올 성가신 방법을 택한다는 게 전하답지 않은….
카를로스의 선택을 의아하게 여기던 하이브가 소리 없이 고개를 저었다. 쓸모없는 호기심을 충족하려 주군의 심기를 예측하려 들어선 안됐다.
모든 대화를 끝마친 듯싶자 카를로스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조만간 형님께서 황궁으로 귀환할 것이다. 그리 알고 준비를 갖춰 두도록.”
“예, 전하.”
하이브가 카를로스를 따라 일어섰다. 그는 조금 혼란스러워하는 얼굴로 머뭇머뭇 주군을 따라나섰다.
황태자의 귀환.
어찌 된 영문인진 몰라도 드디어 이 적성에 안 맞는 가면극이 끝을 보인다는 의미이긴 하였다. 하이브는 쓸데없는 궁금증은 잠시 제쳐 두고, 끝없이 쌓이는 서류와의 사투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에나 맘껏 기뻐하기로 했다.
***
쌍둥이를 책임자에게 인계하는 등 황성에서의 볼일을 마친 카를로스는 곧바로 워프 스크롤을 찢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하이브가 귀한 스크롤을 낭비할 것 없이 저택과 연결된 게이트를 이용하면 되지 않나 소심하게 중얼거렸으나, 이미 카를로스는 그 자리에서 사라진 뒤였다.
한편 그 시각. 카를로스가 밤낮없이 달려 하루빨리 도착한 줄 모르는 아서는 태평히 정원의 굵직한 나무 밑동 근처에서 기사의 다리를 베고 늘어져 있었다.
이젠 한낮에도 바람이 차가워 보온 마법이 걸린 담요를 덮었다. 햇볕을 만끽하며 여유로이 책을 읽던 것도 잠시, 슬슬 눈이 감겨 왔다.
두툼한 담요의 무게를 느끼며 아서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카를로스가 돌아올 날이 가까워질수록 기다리는 게 더 힘이 들었다.
대체 카를로스는 언제쯤 귀환하려나.
하루하루가 이렇게까지 길게 늘어날 수 있는 건지 아서는 이번 기회로 처음 깨달았다. 제가 기다린 만큼 카를로스도 애가 타서 돌아온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라고 카를로스의 꿈도 찾지 않았다.
천만다행으로 이젠 더도 말고 딱 하루만 기다리면 카를로스가 돌아올 날이었다. 벌써부터 아서는 카를로스를 긁고 반응을 확인할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부러 보란 듯이 가브리엘의 몸에 자국을 남겨 둔 터라 곱게 넘어갈 일은 없을 게 분명했다.
분노할 카를로스를 생각하니 웃음이 슬금슬금 새어 나왔다. 오늘이 마지막 평화로운 시간인가 싶어 느른히 늘어져 청명한 하늘이나 실컷 감상했다.
아서는 햇살 틈새로 둥둥 떠다니는 먼지마냥 멍하게 시간을 때웠다.
어느 순간 고요한 정원 한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서가 힐끗 가브리엘 쪽을 살폈다. 그보다 먼저 기척을 느꼈을 가브리엘이 별 반응 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아서도 달리 경계하지 않았다.
파스스, 풀잎 스치는 소리 위로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겹쳐졌다. 다가오는 이는 제 기척을 감출 의사가 없는 듯했다.
가까워진 인영이 곧이어 모습을 드러냈다. 익숙한 발걸음 소리의 주인공은 역시나 카를로스였다.
멍하니 있던 아서는 오랜만에 본 카를로스를 보고 내심 감탄했다.
급히 달려왔는지 새까만 머리칼이 이마 위로 부스스 흐트러져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 끝에 미미한 피곤이 드러나 평소와 조금 다른 분위기가 흘렀다. 전체적으로 흐트러진 차림새였으나 눈빛만은 선명했다.
그러고 보니 카를로스를 이 저택의 정원에서 마주한 건 처음이다. 카를로스는 꽃이나 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냉랭한 인상을 지녔는데, 막상 정원 한가운데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이보다 조화로울 수가 없었다.
귀에다 붉은 꽃을 하나 꽂아 주어도 완벽하게 소화해 낼 게 분명했다. 물론 카를로스의 성미상 제 귀에 꽃이 닿자마자 바닥으로 버려 버릴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기다리던 카를로스를 예정보다 하루 일찍 보게 되자, 아서는 멀리 떠나 있던 주인을 오랜만에 만난 강아지마냥 신이 났다. 물론 그 기쁨을 카를로스에게 드러내진 않았다. 겉으론 반가워 날뛰는 속내를 숨기고 긴장한 얼굴을 만들었다.
엉덩이걸음으로 주춤 물러난 아서가 가브리엘에게 몸을 붙었다.
“오셨습니까, 전하.”
긴장으로 굳어 있는 아서 대신 가브리엘이 먼저 카를로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루 일찍 도착하셨군요. 소식이 전해지지 않아 미처 맞이할 준비를 못 했습니다. 송구합니다.”
“그래. 척 봐도 그래 보이는군.”
기사가 건넨 인사에 카를로스는 삐딱하게 선 채로 답했다.
짤막한 인사를 나눈 것도 잠시, 아서와 가브리엘을 훑어 내리던 검붉은 눈 위로 서서히 못마땅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가 가브리엘에게 등을 기댄 아서를 빤히 쳐다보았다. 모르는 체하기 어려울 만큼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가브리엘은 아서와 떨어지는 대신 눈썹을 살짝 까닥거리고 말았다. 카를로스와 신경전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제게 의지하는 듯한 아서를 밀어내기가 힘이 들었다.
“…가관이군.”
카를로스가 낮게 뇌까렸다.
그가 눈앞에 나타나자 자연스레 기사에게 등을 기대는, 기사와 몸이 닿고도 어떤 거부감도 느끼지 않는 아서. 짧은 장면만으로도 그간의 일들이 추측되었다.
어지간히도 잘해 주었나 보지. 아서를 어떻게든 길들여 놓으라 명했던 것이 자신이었음에도 다정한 연인처럼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순식간에 뱃속이 뒤틀렸다.
이전 날 기사에게 건넨 명은 저택으로 귀환한 즉시 철회할 생각이었다. 아서를 완벽히 붙잡아 두겠단 맘에 성급하게 내린 것이었고, 다른 단단한 목줄이 생겼으니 더는 가브리엘을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모습으로 봐선 그가 명령을 철회한다 한들 이미 한발 늦은 대응일 듯했다.
“가브리엘, 설명해.”
카를로스는 차오른 짜증을 숨길 생각도 않고 말했다.
“보아하니… 형님께서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몹시 편히 지내신 모양인데.”
카를로스가 턱짓으로 아서를 가리켰다. 구속구가 사라진 매끈한 손목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구속구를 풀어준 것은 둘째 치고, 구속구조차 떼어 놓은 상황에서 어째서 형님이 저토록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지부터 묻고 싶었다.
아서를 보자마자 품에 안을 요량이었건만 눈앞의 꼴을 마주하고 있으니 카를로스는 발밑이 얼어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그가 저들 사이에 끼어든 불청객이 된 듯한 더러운 기분이 들었다.
“태자 전하께서 가능한 한 편히 계실 수 있도록 배려했을 뿐입니다. 명하신 대로.”
가브리엘이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구속구를 풀어낸 것은 가브리엘 자신이 허가 없이 독단적으로 결정한 일이었다. 뒤늦게 알게 된 카를로스의 입장에선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결국엔 카를로스가 납득하게 되리라 생각했다. 평소 목적을 위해 어떤 수단을 쓰든 나무라지 않는 카를로스였기에, 저렇게 화를 내는 성싶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냉정을 되찾을 것을 알았다.
한데 그때 하필 아서가 카를로스를 노려보며 몸을 일으켰다.
“…가브리엘을 탓하지 마. 내가 원했던 일이다.”
아서가 입을 떼자 카를로스의 눈에 노골적으로 불쾌함이 실렸다. 아서는 아랑곳 않고 빳빳하게 허리를 세웠다.
“내가 도망가지 않겠다 약조하고 구속구를 풀어 달라 하였다. 가브리엘은 나의 청을 들어준 것뿐이니 그를 탓하지 마라.”
“형님께 물은 것이…. 아니, 됐다. 굳이 듣지 않아도 어떤 상황인지 알겠군.”
아서에게서 시선을 떼어 낸 카를로스는 치미는 짜증을 가라앉히고자 잠시간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말하는 어투, 노려보는 시선, 가브리엘을 감싸는 듯한 태도. 어느 하나 거슬리지 않는 게 없었다.
아서의 적개심 가득한 눈이 날카롭게 그의 뺨을 찔렀다. 우습게도 그 순간 질투를 넘어서, 정말 상처라도 받은 양 가슴께가 욱신거렸다.
미간을 구겼다 푼 카를로스가 기사에게 눈짓했다.
“가브리엘. 이쯤하고 뒤로 물러나.”
“예, 전하.”
기사의 얼굴빛이 어두워졌으나, 이내 그는 명을 받은 대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카를로스는 혼자 남은 아서에게로 다가가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윽…!”
카를로스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주춤 물러났던 아서는 곧바로 바닥에 처박혔다. 구속구가 없으니 저항할 만도 했지만 별다른 반항조차 못 한 채 카를로스의 손 아래 떨어졌다.
반항한다 해도 어차피 저보다 어린 형제를 이기지 못할 거라는, 뼛속 깊이 새겨진 무력감이 아서를 한순간 얼어붙게 만들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모로 돌려 안면이 바닥에 처박히는 것만 겨우 모면했을 뿐이다.
“형님께서 답지 않게 얌전히 구시는군요. 마침 구속구도 없는데, 왜 더 반항하지 않고.”
“…….”
“이제야 주제 파악을 제대로 하셨나 봅니다.”
아서는 잠시 동안 상황 파악을 못 한 채 멍하니 굳어 있었다. 카를로스의 조롱을 듣고 나서야 늘어졌던 눈꺼풀에 조금씩 힘이 실렸다. 한발 늦게 정신이 돌아왔는지 가늘게 떨리던 눈동자 위로 서서히 불꽃이 일었다.
이윽고 무언가 결심한 아서가 이를 악물고 상체를 틀었다. 카를로스와 시선이 마주친 동시에 보란 듯이 주먹을 휘둘렀다. 묵직한 바람 가르는 소리가 일었다.
카를로스는 몸을 뒤로 살짝 빼는 것으로 가볍게 피했다.
“…형님께서 갑자기 왜 마음을 바꿔 먹으셨을까.”
그가 의아하게 말했다.
아서는 카를로스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고 재차 팔을 휘둘렀다. 물론 아서도 이런 허술한 공격이 단번에 카를로스에게 먹힐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이건 쥐새끼처럼 겁먹은 채 굳어 있던 자신을 부정하기 위한 발악과 비슷했다.
아서는 이어서 허리를 틀어 그대로 카를로스의 정강이를 돌려 찼다. 일반인의 눈으로 보기엔 매서운 일격이었으나 그보다 강한 이를 상대로 하기엔 지나치게 정직한 공격이었다. 이번에도 카를로스는 여유롭게 피하고자 했다.
그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려던 순간이었다.
그때 아서가 반대쪽 발로 바닥을 박차 카를로스에게 온몸으로 달려들었다. 처음부터 아서가 목적했던 건 이쪽이었다.
두 형제가 뒤엉킨 채 나무 밑동으로 날아갔다. 무식한 몸통 박치기였다.
쿠웅, 요란한 소리가 일었다. 근방의 새들이 놀라 푸드득 하늘로 치솟고, 온갖 부스러기와 이파리, 나뭇가지 따위가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형제와 충돌한 나무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무너져내렸다. 아서가 그 자리를 굴러 벗어나기가 무섭게 나무 한 그루가 쿵, 그 자리에 쓰러졌다.
시야가 뿌예질 만큼 희끄무레한 먼지바람이 일었다.
좀 전의 평화로웠던 정경이 꿈이었던 것마냥, 정원 한구석이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엉망이 되었다.
한 차례 바닥을 뒹굴고 먼지투성이가 된 아서는 이제 좀 속이 시원해졌다는 듯 제 몸이 더럽혀진 것도 상관 않고 코웃음을 쳤다.
그 잠깐 사이 살갗 여기저기가 긁히고 가브리엘이 곱게 빗어 준 고수머리도 마구 뒤엉켜 있었다. 당연히 카를로스도 피차 그와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에서 도망치지 못할 테니 아서는 카를로스의 오만한 낯짝에 조금이라도 흠집을 남기고 싶었다.
“형님께서,”
아서 못지않게 먼지를 뒤집어쓴 카를로스는 조금 짜증이 난 얼굴이었다. 깨끗하던 뺨엔 자잘하게 긁힌 자국이 보였다.
“어쩐지, 얌전히 군다 싶더니….”
한숨을 내쉰 카를로스가 몸을 움직였다. 그 자리에서 푹 꺼지듯 인영이 사라졌다. 그가 아서의 뒤를 점하고 허리를 끌어안았다. 다급히 돌아보던 아서가 몸을 굳혔다.
카를로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아서의 발목을 걷어차 넘어뜨렸다. 위협을 느낀 아서가 반사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카를로스가 아서의 위에 올라타자마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의 고개가 돌아갔다.
“…….”
아서는 제가 주먹을 휘둘러 놓고도 맞을 줄 몰랐는지 놀란 눈을 했다. 그러다 곧 카를로스에게 깔려 제압된 사실을 깨닫고 몸을 들썩였다.
“이거, 놔…!”
“원하는 대로 한 번은 맞아 드렸으니, 얌전히 계시죠.”
카를로스가 핏물 섞인 침을 뱉어 냈다. 혀끝에 비릿한 맛이 났다. 순간적으로 힘을 흘려 보냈으나 상대적으로 약한 편인 입술이 터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브리엘, 형님께 구속구를 채워라.”
“예, 전하.”
내내 형제가 치고받는 것을 방관하던 가브리엘이 그제서야 몸을 움직였다.
손목에 채워진 구속구를 확인한 아서의 눈 위로 미약한 배신감이 떠올랐다. 기사가 멈칫 손끝을 움츠러뜨렸다.
구속구가 채워진 즉시 아서의 몸이 급격히 힘을 잃고 아래로 처졌다. 붉은 눈이 카를로스를 사납게 노려보던 것도 잠시뿐이었다. 호흡이 부족한지 헐떡이는 숨소리가 불규칙적으로 이어졌다.
가브리엘은 그 모습을 가만 내려다보다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가 미처 그 자리에서 멀어지기 전, 카를로스의 손이 다가와 단정하게 접혀 있던 목깃을 비틀었다.
옷깃을 들추자 가려져 있던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를 세워 씹어 놓은 것처럼 보이는 붉은 자국이 살갗 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카를로스가 무표정한 눈으로 기사의 목덜미를 살폈다. 울긋불긋한 색을 띤 그것은 누가 보아도 고의로 남긴 흔적처럼 보였다. 가브리엘이 아서를 두고 저택을 벗어났을 리가 없으니, 이 흔적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명백했다.
“…하.”
카를로스가 웃음을 흘렸다. 형님이 어떤 의도로 기사에게 이런 흔적을 남겨 둔 건지는 알 만했다. 그가 발견할 것을 예상하고, 그러길 바라며 남겨 둔 흔적일 것이었다.
좀 전부터 욱신거리던 속이 이제는 누군가 뱃가죽에 대고 칼질을 하는 것마냥 홧홧하게 끓어올랐다.
“…시중을 들라 하였더니, 잠자리 시중을 들었나 보군.”
그에겐 수년간 가시를 세워 대던 아서였다. 비단 카를로스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과의 접촉을 기피하던 이였다. 그랬던 아서가 고작 이십 일도 안 되어서 제 기사에게 쉬이 마음을 열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카를로스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가라앉은 눈동자 위로 자조적인 웃음이 스쳤다.
좀 전부터 카를로스를 빤히 올려다보던 아서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비아냥거렸다.
“…왜 몰랐던 것처럼 굴지? 네 기사라면, 처음부터 그런 용도로 쓰라고 두고 간 줄로만 알았는데.”
창백한 얼굴엔 그간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미소까지 떠올랐다.
“본래 시종이란 주인의 욕구까지 해소해 주어야 하는 법이지 않나. 시종을 제 용도대로 쓴 것뿐이거늘, 이렇게나 질투가 많아서야….”
마주한 카를로스의 눈동자에 어두운 빛이 일렁이는데도 아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빈정거렸다.
“그간 내가 유별났던 거지. 네 덕에, 색사란 게 얼마나 중독되기 쉬운 건지 깨달았거든.”
“…….”
“덕분에 유용하게 잘 썼어. 네 기사.”
“…….”
“앞으로도 종종 부탁하지.”
아서가 수 마디를 내뱉는 동안 카를로스는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아서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얼어붙은 듯 싸늘한 공기가 정원을 뒤덮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눈을 깜빡이는 소리마저 들릴 법한 적요였다. 일분일초가 숨 막힐 만큼 한 걸음 한 걸음 더디게 흘러갔다.
“……형님께서….”
간신히 적막이 깨지고 흘러나온 음성은 음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카를로스가 아서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잡았다. 단단한 골격을 갖춘 손이 손등을 간지럽히다, 느리게 타고 올라가 손목을 감싸 쥐었다.
펄펄 끓어오르는 투기에 순간 눈앞이 어질거렸다. 그럼에도 카를로스는 버겁게 차오른 감정을 가까스로 삼켜 냈다. 그가 이 자리에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추하게 날뛰는 것이야말로 아서가 바라 마지않은 것일 터였다.
“…내 기사를 이렇게나 좋아해 주실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군요.”
한 자 한 자 짓씹듯이 뱉어 냈다. 자꾸만 유치하고 난폭한 충동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간 있었을 일들을 짐작하기만 해도 감당하기 버거운 투기가 치밀어, 카를로스는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장면들을 애써 떨쳐 내야만 했다.
“가브리엘.”
“…예, 전하.”
카를로스는 아서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을 이었다.
“그대로 자리를 지켜라.”
“…예.”
“형님께서 너를 이토록 마음에 들어 하시니, 나도 성의를 보여야 마땅하지 않겠나.”
“…….”
“형님의 잠자리 시중을 들려면 형님께서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도는 알아 두어야겠지….”
가브리엘의 성정상 몸까지 섞진 않았을 것이다. 그의 명을 어기지 않는 한도 내에서, 어떤 식으로든 둘 사이에 성적인 행위가 오갔을 테다.
카를로스가 아서의 셔츠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단정히 잠겨 있던 단추들이 하나둘 뜯어졌다.
“…이미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형님께서는 가슴을 주물러 주는 걸 좋아하시지.”
“무슨, 헛소리하지, 읏…!”
맨가슴 위로 손이 올라가자 아서가 발버둥을 쳤다. 가슴을 쥔 손이 원을 그리며 가슴살을 둥글리듯 주물렀다. 거친 손아귀 안에서 흰 살결이 뭉개졌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희롱하는 듯한 손길은 아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지만 그래서 카를로스는 이 방식을 더 선호했다.
“특히나 젖꼭지를 깨물어 주는 걸 유난히 좋아해.”
“윽, 아, 니야….”
“조금만 빨아 줘도 금방 좆을 세우고 물을 줄줄 흘려 대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카를로스가 저택을 비운 사이 울긋불긋하던 살갗은 상처 하나 남지 않고 말끔히 치료되어 있었다. 사라진 것들을 다시 새겨 넣으려 카를로스는 바로 아서의 몸에 입을 댔다.
“예민하고, 길들이기 쉬운 몸이야.”
“…아, 으…!”
깨끗해진 살갗에 다시 제 흔적을 남기고, 가슴까지 내려가면서 잘근잘근 거죽을 씹어 댔다.
다시금 자국들이 하나둘 생겨났지만 그는 여전히 무언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며칠이면 사라질 상처 따위가 아닌, 죽어 나자빠진 시체에서도 사라지지 않을 낙인을 찍어 두고 싶었다.
유륜을 머금고 혀끝으로 돌기를 핥아 올리자 아서가 허리를 튕겼다. 카를로스는 아서의 성기를 은근히 지분거리며 성감을 느끼도록 강제했다.
“아, 싫, 읏….”
아서에게서 조금씩 희미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첫날보다 수배는 예민해진 몸이었다.
“물론, 형님이 이토록 헤픈 건 너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고개를 기울인 카를로스가 입을 대지 않은 쪽 젖꼭지를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제가 아서의 흥분을 유도하여 놓고선 대놓고 아서를 조롱했다.
“이렇게 가슴만 빨아 주면 상대가 누구든 간에 그저 좋다고 헐떡대고.”
“…그런 건, 너나 그렇겠지. 이, 발정 난….”
발끈한 듯한 아서의 말에 카를로스는 웃으며 순순히 답했다.
“발정…, 예. 옳은 말씀입니다. 형님만 보면 이렇게 개새끼처럼 좆을 세워 대니 말입니다.”
카를로스가 아서의 손을 끌어다 발기한 제 성기에 가져다 댔다. 새하얗게 질린 아서의 얼굴 위로 좀 전 목격하였던 평온한 낯을 겹쳐 보고, 그가 조소를 지었다. 그런 그의 표정에서 무얼 느꼈는지 아래에 깔린 몸이 동요하며 가늘게 경련했다.
아무리 아서가 자존심을 뻣뻣이 세운다 한들 동생에게 강제로 휘둘려야 하는 상황이 전혀 두렵지 않은 건 아닐 테다. 그가 행한 짓이 아서의 견고한 자존심에 금을 내다 못해 무의식 깊숙한 곳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건 퍽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어차피 이제 와 저지른 일을 돌이키기엔 늦었다. 아서는 그를 죽이려 들었고, 카를로스는 그런 아서를 겁간하고 감금하였다.
시간을 되감을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이제 와선 그 무엇도 돌이킬 수 없다. 제 입으로 필요 없다 하였던 것을 다시 탐내어 봤자 이미 늦은 때였다.
카를로스는 형제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십여 일 만에 마주한 체향을 들이켜며 흰 살갗에 입술을 붙였다. 이렇게 몸을 붙이고 있으면 이유 없이 들끓는 갈급증도 조금이나마 잦아드는 듯했다.
익숙한 체향을 들이켜자 점차 시야가 붕 뜨는 듯한 고무감이 일었다. 형님과 함께 있을수록 그는 번번이 제 자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예감에 휩싸였다. 그 감각은 불쾌하였으나 그래서 더 유혹적이기도 하였다.
카를로스는 아서의 양 손목을 등 뒤로 모아 구속하곤, 당연한 순서인 것처럼 입을 맞추었다.
입가에 와 닿는 익숙한 감촉에 아서가 입술을 깨물었다. 거부해 봤자 큰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오기로 고개를 돌려 피했다. 당연한 수순으로 턱이 붙잡혀 강제로 고개가 돌아갔다.
“저리, 읍…!”
물컹한 혀가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비릿한 혈향과 마른 흙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입 안 깊숙이 파고든 것이 멋대로 여린 점막을 헤집었다.
난폭한 침입을 피해 물러나면 카를로스는 더 빈틈없이 아서를 강압하려 들었다. 사람이 아닌 흙투성이 짐승과 혀를 섞는 것 같았다.
뱀처럼 물컹한 혀가 여린 점막을 탐하는 동안, 두꺼운 좆이 아서의 하반신에 느릿하게 비벼졌다. 팽팽하게 발기한 성기가 아서의 고간 위로 꾹 겹쳐졌다.
아서가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리자 카를로스 역시 밭은 숨을 뱉었다. 그가 보다 거칠어진 몸짓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하아, 흐으….”
집요한 입맞춤이 멈춘 건 늘 그랬듯 숨이 부족해 눈앞이 흐려질 즈음이었다.
잠시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아서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흐릿한 눈으로 제 측면에 있는 기사를 흘끗 바라보았다. 아서는 실수를 가장하여 스치듯이 기사와 눈을 마주쳤다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재밌네….”
두 사람 간의 눈 맞춤을 목격한 카를로스는 재밌는 광경을 본 듯 웃어 보였다.
“이러니 마치 내가 연인 둘을 억지로 갈라놓은 것 같지 않습니까.”
말려 올라간 입꼬리와 달리 흘러나온 소리엔 고저가 없었다. 카를로스는 아서의 귓바퀴를 씹어 대다 목선을 따라 점점이 입을 맞추었다.
“형님께선 어찌나 여유만만하신지, 이렇게 한눈팔 시간까지 있고.”
“그건 네가 가브, 리엘을, 아…!”
아서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카를로스가 목덜미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그가 헐겁던 하의를 한 번에 무릎까지 주륵 끌어 내렸다. 속옷 역시 덩달아 벗겨져 이미 단단해져 있던 아서의 것이 튕기듯이 드러났다.
“잠깐, 뭐 하는…!”
아서가 눈을 크게 뜨고 경악했다. 침실도 아닌 정원에서 무슨 짓을 하느냐 따졌지만, 카를로스는 오히려 아서를 멍청한 사람 취급했다.
“왜 놀라. 발정이니 뭐니 떠들어 놓고, 이럴 줄은 몰랐습니까?”
담담히 웃은 카를로스가 아서의 허리를 반 접을 것처럼 밀어붙였다. 회음부 아래 숨어 있던 부위가 햇빛 아래 훤히 모습을 드러냈다. 연한 색을 띤 밀부는 몸 주인의 신경질적인 면모와 달리 몹시 순하디순해 보였다.
햇볕이 닿자 거의 보이지 않던 가느다란 솜털마저 희게 드러났다. 예쁘네, 하고 카를로스가 혼잣말을 했다.
“내가 없는 동안 뒷구멍 간수는 잘했습니까?”
검지와 중지를 입에 넣고 몇 차례 빨아낸 그가 입 안에 남은 모래를 뱉어 냈다.
“…무슨….”
“가슴만 빨아 줘도 이렇게 좋아 죽는데, 뒷구멍은 오죽할까 싶어서요.”
아서가 이를 악물고 카를로스를 노려봤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카를로스만큼는 아서를 이런 식으로 조롱할 자격이 없었다.
“이건 전부 네가, 나를….”
“나를?”
“…….”
카를로스가 되묻자 아서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전부 다, 네가….”
카를로스만 아니었다면 아서는 일평생 가슴 같은 것이 제 성감대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아서는 씹어 내듯 욕설을 내뱉고, 밀려오는 모멸감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수치심과 분노로 일그러진 눈을 빤히 보던 카를로스가 아서의 둔부를 넓게 벌렸다. 엉덩이를 제멋대로 주물럭거리다 손끝이 입구를 조금씩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건드리지 마, 읏…!”
검지와 중지가 아래를 단번에 꿰뚫고 들어왔다. 아서는 몸을 비틀었으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타액이 묻어 있을 뿐, 다른 윤활제 없이 비집고 들어온 탓에 고작 검지와 중지를 밀어 넣은 것뿐인데 버거운 감각이 들었다.
카를로스는 손을 앞뒤로 몇 번 움직이다 곧바로 하나를 더 밀어 넣었다. 보통 사람의 것보다 마디가 굵고 긴 손가락이 꾸역꾸역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반복적으로 아서의 아래를 쑤시던 그가 기사 쪽을 짧게 쳐다보았다.
“말해 봐, 가브리엘.”
“…….”
“형님의 뒷구멍까지 쑤셔 주었나?”
“…아닙니다.”
두 주종의 대화에 아서의 어깨가 수치심으로 파르르 떨렸다. 카를로스는 아서에게 다른 생각을 할 여유를 주지 않겠다는 듯 아래를 더 거칠게 자극했다.
고통과 수치가 뒤섞인 얼굴로 아서가 몸을 비틀었다. 아래를 억지로 들쑤시는 감각에 참으려 해도 미세한 신음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아, 으… 윽….”
“아프십니까, 형님?”
아프냐는 물음이 따라왔지만 정말 궁금하여 묻는 것은 아닐 터였다. 아서는 답을 하지 않고 카를로스를 노려봤다. 이렇게 아래를 쑤셔 대면서 아서가 아파할 걸 몰랐을 리가 없다. 분명 그가 아파할 걸 알면서 고의로 밀어 넣은 것이었다.
아서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카를로스가 못마땅한 듯 쯧, 혀를 찼다.
“이렇게 조여 대니 아플 수밖에 없지.”
철썩, 돌연 그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아서의 볼기를 내려쳤다.
“…윽, 뭐 한,”
순간 상황파악이 되지 않아 아서가 멍청하게 입만 뻐끔거렸다.
그때, 무어라 반응할 새도 없이 다시 한번 더 카를로스의 손이 엉덩이를 내려쳤다. 이번엔 밀부와 좀 더 가까운 위치였다.
아픔은 뒤늦게 찾아왔다. 살갗이 화끈 달아오르고, 얻어맞은 충격으로 내벽이 징 울렸다.
그제서야 제 둔부를 내려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아서가 화끈 얼굴을 붉혔다.
“너, 네가, 지금…, 감히…….”
수없이 깨물어 새빨갛다 못해 검붉어진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어찌나 당황하였는지 말까지 더듬거렸다.
크게 경악한 아서와 달리 카를로스는 태연했다. 그는 한 손으로 둔부를 주물럭거리면서 아서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씹질까지 한 마당에 고작 이 정도로 부끄러워하시는 게 참….”
형님답다고 해야 할지. 카를로스의 입매가 조소를 그렸다. 그는 뻑뻑한 아래를 쑤시며 눈매를 찌푸렸다.
“힘 푸세요, 형님. 아예 힘도 안 들어갈 정도로 맞고 싶습니까?”
카를로스는 옅게 손자국이 남은 둔부를 짝, 가볍게 쳤다. 고작 두어 번 힘을 실어 내려쳤을 뿐인데 흰 살덩이는 제법 보기 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러나 뻣뻣하게 굳은 내벽은 그대로였다. 힘을 풀라는 그의 말에 반발이라도 하는 것처럼, 오히려 아래에 더 힘을 주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카를로스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일부러 저를 도발하려 드는 건지 묻고 싶을 정도로 보이는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렸다.
“곱게 말하면, 곧 죽어도 안 들어 먹지.”
그는 아서의 뒤를 쑤시고 있던 손을 빼냈다. 그리고 아예 아서를 제 무릎 위에 올려놓고, 붉게 달아오른 엉덩이 살을 재차 후려쳤다.
“뭐 하는 짓, 읏…!”
아서가 무어라 말을 하기 전에 큼지막한 손이 한 번 더 붉게 달아오른 둔부를 세게 내려쳤다.
“아, 윽, 내려놔…!”
자신보다 어린 형제가 저를 무릎에 올리고 아이 혼내듯 볼기를 때리고 있었다. 심지어 이 광경을 제삼자인 가브리엘이 지켜보는 상황이었다. 일평생 꿈에서라도 겪어 본 적 없는 치욕에 아서가 발버둥을 쳤다.
“읏, 아…. 하지…!”
반항은 큰 소용이 없었다. 몸을 비틀며 벗어나려 해도 카를로스에게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뒤로 구속당한 손목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바둥거리던 다리는 힘을 잃고 덜덜 떨렸다. 아서로선 그저 주어지는 치욕과 고통을 이 악물고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흐읍…!”
카를로스에게 시달리던 매일 밤보다 지금 이 순간이 아서에겐 더 끔찍하게 느껴졌다. 분함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눈자위마저 붉게 달아올랐다.
아서는 고개를 내렸다. 이 자리에서 도망치지 못하니 차라리 아무것도 보지 않는 쪽을 택했다.
형제는 짠 것처럼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아무런 대화 없이 오로지 살을 때리는 소리만이 반복적으로 정원을 울렸다. 사이사이 헐떡이는 숨소리만이 허공으로 맥없이 흩어졌다.
“아, 흐윽….”
그러나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카를로스가 적당히 봐주고 있다 해도 처음부터 아서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아서에게서 조금씩 고통 섞인 신음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오직 한 군데만을 집요하게 때린 탓에 오른쪽 둔부만 시퍼렇게 달아올라 있었다. 카를로스가 퉁퉁 부은 살갗을 터트릴 것처럼 꽉 움켜쥐자 아서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악…! 흐, 아파….”
“이제 좀 아프십니까?”
아프냐 물으며 카를로스는 손 틈새로 살이 삐져나올 만큼 엉덩이를 꾸욱 움켜쥐었다. 그의 무릎에 얹힌 몸이 경련하듯 파드득 떨렸다.
“아윽…!”
“이제야 조금 아픈가 보네, 우리 형님께서.”
발갛게 달아오른 뒷덜미를 눈으로 핥아 내리던 카를로스가 짐짓 다정히 말했다. 아서가 언제까지 뻣뻣하게 자존심을 세울까 싶어 그도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토록 자극과 고통에 취약한 몸으로 이 지경이 되어서야 아프다는 소리를 할 정도라니, 어떤 면에선 대단한 자존심이었다.
아마 대상이 가브리엘이었다면 아서가 이토록 오래 참지도 않았을 테다. 오직 그 앞에서만 꼿꼿이 내세우는 오기에 가까운 자존심이다.
카를로스는 손끝으로 둔부 사이를 더듬었다. 아래를 조이던 힘이 좀 전보다 한결 약해져 있었다. 통증에 모든 신경이 다 쏠려 있는 탓인지 아서에게선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카를로스가 내벽 한 지점을 꾹꾹 눌렀다.
잠시간 넋을 놓고 있던 아서는 뒤늦게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몸을 움찔거렸다.
“싫…, 그만해, 다, 보고 있잖아…! 대체 언제까지…, 읏….”
“왜, 이렇게 쑤셔 주는 거 좋아하잖습니까.”
아서 본인은 부정할 테지만, 처음에야 뒤로 못 느꼈던 아서는 이제 뒤를 조금만 건드려도 좆물을 줄줄 흘려 댔다. 좀 전 가브리엘에게 말했던 대로 예민하고 길들이기 쉬운 몸이었다.
“하윽, 아, 아….”
진이 빠지게 몰아붙이고 나면, 앞을 세운 채로 늘어져서 힘없이 신음을 흘려 댔다. 꼭 지금 같은 모습으로.
카를로스는 한 팔로 아서의 허리를 끌어안아 고정했다. 하의와 셔츠가 찢기다시피 벗겨져 아서 홀로 벽 하나 없는 정원 한가운데서 벌거벗은 몸을 드러냈다.
쯔걱, 쯔걱, 아서의 기분과 상관없이 아래를 들쑤시는 손길은 조금씩 빨라졌다. 수치심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안 돼, 읏… 흐, 아, 아….”
“또 섰네. 그렇게 좋아요, 형님?”
어느 순간부턴 손바닥이 고간에 닿으며 둔탁한 것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뒤에서 거세게 몰아붙일 때마다 앞뒤로 자극이 주어졌다.
눈을 질끈 감은 아서가 힘없이 앞뒤로 흔들렸다. 발기한 성기가 카를로스의 허벅지에 꾹 짓눌렸다. 수치심으로 달아올라 있던 뺨이 이젠 다른 이유로 열꽃을 피우고 있었다.
“읏, 아파, 흐으, 아파….”
아서는 제가 느끼는 감각을 부정하듯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아래를 들쑤시던 손이 상처에 닿으면 아프다가, 손끝이 어딘가를 꾹 누르면 다시 눈앞이 멍해졌다. 고통과 쾌락이 마구 뒤섞여 아서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어느 순간 선단에서 액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아서는 눈을 질끈 감고 숨을 몰아쉬었다.
“흐, 싫어…, 아….”
허리가 휘고 발끝이 움찔움찔 곱아 들었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흙바닥으로 뚝, 뚝, 떨어져 내렸다.
밀려오는 절정을 견뎌 내려 벌벌 떠는 동안에도 뒤를 들쑤시는 손은 조금의 배려도 없이 움직였다. 아서의 성기와 맞닿은 허벅지 부근이 끈적한 액체로 축축이 젖어 들었다.
“…좋아 죽네. 그동안 뒷구멍을 쑤셔 줄 사람이 없어서 허전했겠어요.”
“아냐, 흐….”
카를로스가 어두워지는 하늘을 힐끗 바라보았다. 살을 스치는 바람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우리 더 좋은 건 침실로 가서 마저 할까요, 형님.”
두꺼운 팔이 떨리던 아랫배를 휘어 감았다. 미처 절정의 여운을 떨쳐 낼 새도 없이 축 늘어져 있던 몸이 붕 떴다.
“읏, 하지….”
카를로스의 품에 갇힌 아서는 바둥거리다 더 반항할 기력조차 남지 않아 몸을 늘어뜨렸다.
“이제 좀 힘이 빠지셨나 보군요. 처음부터 이랬으면 오죽 좋았을까.”
작게 웃은 카를로스가 아서를 안아 들고 저택으로 걸음을 옮겼다.
몸이 공중으로 뜨자 아서의 나신이 훤하게 드러났다. 전라를 내보이는 데에 익숙한 아서도 이런 상황까진 견딜 수 없었는지 고개를 움츠려 제 얼굴을 감추었다.
그건 단지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나온 행동에 불과했는데, 그게 꼭 그의 품으로 파고드는 모양처럼 보여 카를로스는 더욱 강하게 아서를 끌어안았다.
***
다음 날이었다. 아니, 다음 날이 맞긴 한가? 아서는 측면으로 누워 있던 몸을 콩처럼 웅크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정신은 들었으나 눈꺼풀을 들어 올릴 힘은 없었다. 이러다 까딱 잘못하면 체력이 달려 복상사로 죽을 것 같았다.
전날 아서는 침실로 돌아가 몸을 씻고, 기운이 난 김에 다시 신이 나서 카를로스를 도발했다.
침실로 가서 마저 하자는 말과 달리 카를로스는 아서를 끌어안고 잠만 잘 것처럼 굴었지만, 당연히 그 꼴을 두고 볼 아서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본 카를로스를 잠이나 자게 내버려 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아서의 도발은 아주 잘 먹혔다. 카를로스는 아서보다 한술 더 떠 가브리엘을 침실 밖이 아닌 안에 세워 뒀고, 아서는 수치스러운 척 그 상황을 즐겼다. 언제까지 기사를 세워 둘 생각인지는 몰라도 그 덕에 아서가 한층 더 행복해지기는 했다.
다만 한가지 거슬리는 게 있다면 역시나 구속구였다. 아서 같은 경우 의욕은 항상 과다했는데, 나중에 가선 카를로스를 도발한 걸 후회할 정도로 시달렸다.
전날 역시 버티고 버티다 결국 몸을 버려두고 탈출했다. 한참 아서를 물고 빨고 하던 카를로스는 아침이 되고 나서야 늘어진 몸을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아서는 한쪽으로 누워 눈만 깜빡거렸다. 피곤하다며 속으로 끙끙 앓고 있는 사이, 뒤편에서 무거운 돌덩이 같은 게 몸 위로 올려졌다. 카를로스의 팔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형님.”
카를로스도 갓 잠에서 깨어난 듯 평소보다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아서를 뒤에서 끌어안은 그가 곳곳에 입술을 문질렀다. 귓바퀴를 잘근 씹어 대다가 목 뒤에 고개를 묻고, 연신 짧은 입맞춤을 했다.
카를로스는 냉하게 생긴 겉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의외로 자잘한 스킨십이 잦은 편이었다. 그게 너무 좋다가도 어떨 땐 받아 주기가 체력적으로 버거웠다.
“…무거워.”
제게 치대는 형제를 어찌할까 싶던 아서가 조용하게 말했다. 목이 완전히 갈라져 제대로 된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말소리라기보단 바람 새는 소리에 더 가까웠다.
당연하지만 아서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카를로스는 조금 더 빈틈없이 아서에게 달라붙었다.
그래도 무겁다는 말을 듣기는 한 건지 묵직하게 누르던 무게가 조금이나마 덜어진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서로선 그 배려 아닌 배려가 조금은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아서가 도무지 참다 참다 못해 육신에서 빠져나온 뒤에도 카를로스가 한참 동안 제 몸을 물고 빨았던 걸 똑똑히 지켜보았다. 아직까지도 하반신이 저릿했다.
“더 누워 계실 생각이십니까?”
웬일로 오늘은 카를로스가 아서의 의향을 물었다. 이전엔 그런 것도 없이 다짜고짜 몸부터 붙이더니 갑자기 배려해 주는 척을 했다.
아서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구속구를 풀어 준다면 모를까, 움직일 만큼 체력이 회복되려면 조금은 더 이러고 있어야 했다.
“그럼 이대로 듣고 계세요.”
카를로스의 말에 아서는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자 카를로스가 아서를 끌어안고 가까이 붙었다. 자연스레 엉덩이 골에 징그러울 만큼 두꺼운 성기가 비벼졌다.
잠깐 움찔했던 몸이 이내 다시 축 늘어졌다. 아직 아서는 반응할 기력이 없었다. 그가 섹스에 학을 뗄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정말이지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아서가 제 품에 얌전히 있는 게 만족스러웠는지 카를로스는 평소보다 유순한 어조로 이야기를 꺼냈다.
“얼마 전 재미있는 소문 하나를 들었는데…. 형님께서도 들어 본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군요.”
재미있는 소문이라는 둥 별거 아닌 척 대수롭지 않게 시작된 말이지만, 아서는 카를로스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 드는지 곧바로 깨달았다.
딘리 백작이 드디어 제 역할을 했나 보군. 그리 생각한 아서가 남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의 꿈에서 칼까지 맞아 가며 열연을 펼친 보람이 있었다.
“…이 제국의 황태자가 실은 황실의 핏줄을 이은 자가 아니더라는, 그런 얘기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귓가에 와 닿는 목소리가 차분했다. 이어지는 말은 아서가 짐작했던 대로였다.
아서는 마른 입술을 혀로 훔치곤 태연한 척 굴었다.
“뭣 모르는 것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들이 그렇지. 고작 머리색 하나 가지고 정통성을 운운하는 꼴들을 한두 번 보았나.”
조금 갈라진 목소리엔 당황한 기색이 엿보이지 않았다. 아서의 본래 성격대로라면 길길이 날뛰어야 했을 것을,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차분한 음성이었다.
아서의 표정 변화를 뚫어져라 관찰하던 카를로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소문이 사실이라면 꽤나 흥미로운 일이지 않겠습니까.”
“…헛소리. 애초에 황후께서 그런 터무니없는 소문이 돌도록 내버려 두었을 리도 없다.”
“그 소문의 출처가 딘리 백작이라면 조금 말이 달라지겠지요.”
“딘리 백작은 제 부귀영화를 위해서라면 없는 얘기도 지어낼 놈이지.”
“제 부귀영화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황후를 배신할 자이기도 하죠.”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설전이 오고 갔다. 썩 유의미한 대화는 아니었다.
아서가 의식을 잃은 사이 카를로스는 이미 모든 확인을 끝마쳤다. 마법사 하이브에게서 마도구의 진위 여부를 판명받았고, 두 사람의 핏방울이 섞였을 때 마도구가 푸른빛을 내는 것까지 육안으로 확인했다.
이미 어느 정도 확신을 품고 있었음에도 카를로스는 눈앞에 들이밀어진 진실이 자못 유쾌하지만은 많았다.
그 순간 밀려들었던 감정은 기쁨도, 놀라움도 아닌 미묘한 상실감이었다. 아서와 그를 잇고 있던 무언가가 끊어진 듯한 불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네놈과 말을 섞느니 차라리 내 입을 꿰매는 게 낫겠군. 누가 뭐래도 나는 황후 폐하와 황제 폐하 두 분의 핏줄을 이은 정통 후계자다.”
“글쎄요. 그야 확인해 보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아서를 제 소유 인형처럼 끌어안은 카를로스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우연찮게 오나드 왕국의 마도구가 제 손에 들어온 터라.”
대륙에 몇 없는 귀한 물건이지요. 카를로스가 이어 말했다.
품속의 아서는 얼핏 보기엔 태연한 낯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사실상 큰 효용은 없었다. 길길이 날뛰어야 할 말에 이토록 차분히 반응한 것만으로도, 아서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알려 주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브리엘. 마도구를 가져와.”
“예.”
침실 출입문 앞. 기척 없이 서 있던 가브리엘이 답했다. 그가 아직까지 있을 줄 몰랐던 아서는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단정한 눈가에 옅은 그림자가 져 있었다. 밤새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듯 무표정한 낯은 평소보다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투명한 색을 띤 마도구는 가브리엘과 카를로스의 손을 거쳐 아서에게 전달되었다. 아서는 제 손에 들린 마도구를 빤히 바라보았다.
뒤이어 카를로스가 조곤조곤 무언가 이야기를 덧붙였다. 죄다 무어라 반박할 수조차 없는 사실들이라 아서는 미간을 구긴 채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일단 여기까진 그의 계획대로 된 것 같았다.
이제 아서가 확인해야 할 건 딘리 백작의 생사였다. 그다음으론 이 성가신 구속구를 떼어 내는 것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서가 입을 열었다.
“…딘리 백작은 어찌 되었나.”
“딘리 백작은 여러모로 써먹기에 좋은 인물이지요. 그런 자를 고작 형님 하나 때문에 잃어야 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백작을 죽였나?”
“예. 변수는 적을수록 좋은 법이니까요.”
카를로스가 덤덤히 답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딘리 백작가에선 백작의 죽음을 반기는 자가 대다수였다. 진상을 밝히려 들기는커녕 주인이 사라진 가문을 차지하려 저들끼리 치열하게 암투를 벌였다.
아마 가문의 주인이 낙점되고 난 후에는 죽음의 진상을 밝히려 들 테지만, 그조차도 제 정적에게 누명을 씌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확률이 높았다.
“아무리 황제가 형님을 애지중지한다 하여도, 제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도 형님을 감싸진 못할 테고.”
카를로스가 황제를 언급했다. 아서에게 실권을 안겨 주려 멀쩡한 몸으로 앓아누운 체하고 있는 제 친부를.
“…카를로스.”
황제를 언급하기 무섭게, 아서가 다급히 몸을 돌려 카를로스를 마주 보았다. 초조하게 그를 마주 본 눈동자엔 짙은 체념이 서려 있었다.
“폐하께만큼은, 절대로….”
“고하지 말아 달라?”
빈정대는 물음에도 아서는 무겁게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반역이라는 말이 가진 무게는 무거웠다. 아서 역시 그 무게를 알고 있을 테니 그에게 자존심을 접고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형님께서 얌전히 계신다면 황제에게 고할 생각은 없습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말입니다.”
‘지금 당장은’이라는 말은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의미였다. 아서가 어떻게 하느냐에 카를로스의 행동이 달라지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대체 너는….”
아서의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헤맸다. 카를로스를 바라보는 시선에 분노가 차올랐다가 이내 힘없이 사그라들었다.
“내게 무얼 바라고 이러는 것이냐.”
아서가 물었다. 카를로스의 팔을 붙잡은, 긴장한 손끝이 가느다랗게 경련했다. 체념하듯 내리깔리던 눈이 이윽고 다시 카를로스를 바라보았다.
“이미 짐작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무엇을?”
되묻는 아서는 혼란스러운 나머지 어떤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 보이는 동시에, 한편으론 이미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으나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서를 바라보던 카를로스가 손을 뻗어 아서의 뒷머리를 감싸 안았다. 마주한 눈동자가 동요했다.
카를로스는 그대로 아서를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밀어내는 손길은 없었다. 그의 팔을 꽉 움켜쥔 채로 형님은 가만히 멈춰 있었다.
입술이 맞닿은 동안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눈을 감지 않았다. 이토록 뚜렷하게 시선을 주고받고 있는데, 아서는 그를 밀어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카를로스의 눈매가 만족스러움을 담고 가늘게 휘어졌다.
“형님을 죽일 수도, 놓아줄 수도 없으니….”
“…….”
“그러니 나는 형님을 내 반려로 맞이할 생각입니다.”
“…반려?”
“형님께서 황후의 자리에 오르세요.”
“……뭐? 대체… 너는, 무슨 소리를.”
이것만큼은 전혀 예상치 못한 얘기였는지 아서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통보를 한 번에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듯했다.
“내 말이 이해가 되지 않나 보군요.”
“당연히,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멍하게 넋이 나간 아서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내가 황제가 되어야…. 속삭이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희미했다
그러나 그건 그저 타성적으로 되새기는 말에 불과했다. 본인도 그것이 얼마나 가망 없는 말인 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잠시간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꺼질 것처럼 위태로운 시선이었다.
“형님.”
카를로스는 그런 아서를 다독여 줄 생각이 없었다.
“보다 강한 자가, 보다 뛰어난 자가 황위에 오르는 건 당연한 인과입니다.”
“…….”
“설령 형님과 나의 처지가 뒤바뀌었을지라도, 나에게 황족의 피가 섞여 있지 않았더라도….”
그의 말은 차분한 어조로 이어졌으나 그 안에 든 의미는 신랄했다.
“황좌에 앉는 건 형님이 아닌, 내가 되었을 겁니다.”
카를로스는 당연한 사실을 알려 주듯 말을 전했다. 제 이런 태도가 아서의 열등감을 부추긴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비틀린 소유욕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그가 아서에게 오랜 시간 묶여 있던 것처럼 아서 또한 언제까지나 그의 그늘 아래 존재하길 원했다. 형제를 향한 증오와 열등감에 휩쓸려 다른 이에게 눈길을 돌릴 여유조차 가지지 못하기를 바랐다.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던 아서가 카를로스를 노려보았다.
“…너와 나는, 형제가 아니더냐.”
“그러니 더 완벽한 한 쌍이지 않습니까. 물론 조금 아쉽긴 하군요. 우리가 한 핏줄을 타고났다면 보다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미쳤구나. 네놈이 제정신이 아닌 줄은 알고 있었지만….”
아서의 얼굴이 혐오스러운 것을 보는 것처럼 찌푸려졌다. 그와 반대로 카를로스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형님, 무언가 착각하나 본데.”
“…….”
“이건 권유가 아닙니다. 통보지.”
설핏 웃어 보인 카를로스가 아서의 손을 끌어 제 뺨에 가져다 댔다. 그는 제 뺨에 전해지는 온기를 음미하면서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형님께선 무척 운이 좋으신 편입니다.”
아서의 죄목은 반역이었다. 만일 그가 눈감아 주리라 결정 내리지 않았더라면 수천 명의 목이 잘릴 법한 사안이었다.
“이 정도 죄를 고작 단 한 명의 희생으로 무마할 수 있다는 게 말입니다.”
그 한 명이 아서가 될 거라는 사실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카를로스는 아서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의 것과는 조금 다른,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새빨간 눈동자 속에 제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제 형님께서 무얼 해야 하실지 아시겠지요.”
“내가…….”
아서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마 금방 적응하실 겁니다. 이미 한 번 해 보았던 일이니까.”
아직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아서를 위해 카를로스는 아주 쉬운 것부터 구체적으로 알려 주기로 하였다.
“…먼저 이리 와서, 내게 입 맞춰 주십시오.”
꼭 연인에게 사랑의 밀어라도 속삭이는 듯한, 이 비상식적인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카를로스는 아서의 손을 끌어와 제 뺨에 붙였다. 오직 아서만이 그의 변한 태도에 적응을 못 하고 손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멍청하게 굳어 있을 뿐이다.
카를로스가 먼저 아서를 끌어다 입을 맞추자, 아서가 그에 호응하는 것처럼 미약하게 입술을 맞대었다.
“예, 그렇게 하는 겁니다. 금방 배우시는군요.”
카를로스가 그런 아서에게 상을 주듯 맞닿은 입술을 가볍게 붙였다 떼었다.
“형님께서 과거에 그러하였듯…. 다정히 웃어 보이고, 나를 아껴 주시면 되는 겁니다. 그리하실 수 있겠지요?”
아서는 멍하니 넋이 나가 아무 말도 못 했다. 카를로스의 얼굴에 드물게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창밖은 서서히 어두워지는 중이었다. 쇠창살 틈으로 끝을 모르고 펼쳐진 광활한 숲이 보였다. 어두운 수풀 사이사이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3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