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장 (6/15)

5장

시간은 꾸역꾸역 며칠이고 흘러갔다.

통신구를 이용해 업무를 지시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고, 카를로스가 자리를 비워야 할 날이 마침내 도래했다. 지금처럼 어수선한 시기에 오랫동안 황성을 비워 둔 것부터 무리한 선택이었던 터라 미루는 데에도 한계가 찾아왔다.

오랜 대화 끝에 오나드 왕국과의 협상이 드디어 끝을 보이고 있었다. 왕세자를 대신할 왕족 셋을 요구하는 제국과, 영토까지 떼어다 바치지 않았느냐 버티는 왕국과의 밀고 당기기 싸움이었다.

물론 제아무리 왕국이 버틴다 해도 그들이 패전국인 이상 결국은 그쪽에서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왕세자를 송환해 주는 대신 왕족 둘을 볼모로 데려오기로 결론이 났다.

카를로스의 임무는 간단했다. 왕세자를 국경까지 호위하고, 그와 교환한 왕족 둘을 황성까지 온전히 데려다 놓는 것.

그 과정에서 온갖 세력이 갖가지 목적을 가지고 훼방을 놓을 것이 분명했다. 잘못되었다간 또다시 국가 간 충돌이 생길 수 있어 카를로스가 직접 움직여야 하는 일이었다. 워프 게이트를 이용할 테니 오래 걸리진 않을 테지만, 단 며칠이라도 가브리엘과 아서를 단둘이 붙여 두는 것이 카를로스는 썩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못마땅한 티를 내면서도 저택을 떠나는 날까지 끝끝내 기사에게 건넨 명을 철회하지는 않았다. 대신 가브리엘의 앞에서 보란 듯이 아서에게 입을 맞추고 침실을 떠났을 뿐이다. 주군의 유치한 질투를 목격한 기사는 남몰래 혀를 찼다.

“그대는 감시역으로 남았나?”

짜증 섞인 얼굴로 카를로스의 입맞춤을 받아 낸 황태자는 침실 한편에 자리 잡은 가브리엘 역시 곱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송구합니다. 전하께서 편히 지낼 수 있도록 보좌하겠습니다.”

“요샌 감시를 보좌라고 일컫던가.”

밤중 가브리엘이 황태자를 속여 제압한 뒤로 처음 이루어지는 대화다운 대화였다. 황태자에게서 고운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전하,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부디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가브리엘이 황태자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침상 옆에 무릎 꿇고 답을 기다리고 있자 붉은 눈이 도르륵 굴러와 그에게로 꽂혔다.

기사는 습관처럼 눈매를 가볍게 휘었다. 다른 불순한 의도는 없었다. 이런 식으로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경계심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이들도 그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아 주곤 했다. 아서 또한 그러길 바랐다.

잠시간 침묵하던 황태자가 메마른 입술을 혀로 쓸었다. 기사의 시선이 피딱지가 내려앉은 입술로 향했다. 잠깐 모습을 드러냈던 붉은 혀는 안으로 쏙 들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해를 보지 못한 아서의 얼굴은 혈색이 없이 창백했으나, 한편으론 곳곳에 붉은 꽃이 피어 있었다.

아서는 눈도 입술도, 혀도 모두 붉다. 카를로스의 흔적이 남은 살갗이나 목덜미에서 은은히 새어 나오는 체향마저도 전부 그러했다. 손끝을 가져다 대면 붉은 물이 들 것만 같았다. 기사답게 단련된 몸을 가졌는데도 그 때문인지 묘하게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풍겼다.

“전하, 식사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식사는 됐어.”

“무얼 드셔야 기력을 회복할 수 있을 텐데요.”

“…그보다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해를 못 본 게 얼마나 되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군.”

가브리엘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산책을 시키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그의 재량 내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구속구를 풀어 달라거나, 도망치게 도와달라는 요구를 제외하고는 웬만해선 아서의 청을 전부 들어줄 생각이었다. 조금 무리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좋습니다. 대신 식사를 먼저 하고, 가볍게 걷는 건 어떠십니까?”

며칠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으니 걸을 기운도 없을 게 분명했다. 팔목에 걸린 마도구를 풀면 곧바로 힘을 되찾을 테지만, 그럴 수 없어 차선책으로 건넨 제안이었다.

“…좋아.”

황태자는 달리 고집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로스에게 신랄한 독설을 내뱉던 이와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얌전한 태도였다.

식사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스푼을 든 아서의 손이 힘없이 떨리는 것을 보고 가브리엘이 시중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수프를 한 입씩 떠먹여 주는 것은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덜 식힌 채로 주면 뜨거운지 아서가 물을 들이켜곤 했기에, 가브리엘은 한술을 뜰 때마다 조심스레 입으로 후 불어 가며 뜨거운 수프를 식혔다.

“기사가 아니라 숫제 시종이나 다름없군.”

아서는 끝까지 얌전히 받아먹고도 무언가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가브리엘은 아서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기곤 몸을 일으켰다.

벌써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금세 해가 질 터였다.

기사는 황태자의 몸에 가벼운 셔츠 먼저 걸쳐 입히고 단추를 꼼꼼히 여몄다. 해가 질 때 즈음엔 바람이 쌀쌀하다 못해 칼날 같았다. 보온 마법이 걸린 로브를 입히고 털목도리를 바람 들 곳 없이 꽁꽁 싸맨 뒤, 아서의 손을 잡고 침실을 나섰다.

아무래도 황태자는 그와의 접촉을 꺼려 하는 눈치였으나 손을 놓아줄 수는 없었다. 어느 한 군데를 붙들고는 있어야 할 텐데 팔목과 팔뚝 같은 부위를 잡고 다니는 건 산책이 아니라 그에게 끌려다니는 기분이 들 것이다.

그 외에 구속구에 사슬을 연결하는 방법도 떠올렸다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역시 손을 잡고 있는 편이 무난했다.

기사는 손안에 잡힌 온기를 느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바깥은 이미 서서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침실을 나온 아서는 머뭇거리며 계단을 내려왔다. 사이사이 다리 힘이 풀려 휘청거리면서도, 부축해 드리겠다는 가브리엘을 필요 없다며 냉랭하게 밀어냈다.

저택 일 층의 문을 열고 나서자 찬바람이 뺨을 할퀴듯 지나갔다. 아서는 바람을 헤치고 천천히 정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창을 통해서만 가끔 봤던 풍경이 눈앞으로 넓게 펼쳐졌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즈음의 정경은 봄의 것과는 또 다른 운치를 풍겼다. 정원은 사용인이 한 명도 없단 사실이 놀라울 정도로 관리가 잘 되어 있었는데, 정원 곳곳에 박힌 값비싼 마정석이 여러 사람 몫을 한 듯했다.

두 사람은 적막한 정원을 말없이 거닐었다. 노을 진 정원을 거니는 그들은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

걸음걸음마다 나는 바스락 소리, 바람에 파스스 흔들리는 잎사귀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지친 뺨 위로 내려앉은 노을이 노곤했다. 아서의 현 처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나쁘지 않은 평온함이었다. 만일 아서가 강제로 감금되어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빈틈없이 겹쳐진 손을 아서가 힐끗 바라보았다. 가브리엘의 손이 족쇄처럼 아서의 손을 휘어 감고 있었다. 멀리서 본다면 그저 다정한 연인이 정원을 거니는 모습으로만 보였을 테다.

“…손은 계속 붙잡고 있을 건가 보지. 그리 유난 떨지 않아도 이미 구속구가 채워져 있지 않나.”

아서가 짜증 섞인 말투로 기사에게 물었다.

앞뒤 사정이 어떻든 일단 겉보기엔 아서가 기사의 거짓 맹세에 속아 뒤통수를 맞은 상황이었으니, 아서는 가브리엘을 그냥 편안히 내버려 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송구합니다, 전하. 손을 놓아드리진 못합니다.”

잠시 고민하던 가브리엘이 거절을 입에 담았다. 아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래. 차라리 대놓고 이러는 편이 낫지….”

곤란해 보이는 듯한 반반한 낯에다 대고 아서가 다짜고짜 물었다.

“…대체, 그날은 나한테 왜 그랬나?”

많은 게 생략된 질문이었으나 무엇을 묻는지는 명백했다.

“몇 마디 말에 좋아서 헤벌쭉대던 꼴이 어떠하던가.”

“…….”

“네 눈엔 내가 그저 우스워 보였겠지. 카를로스의 기사가 던진 말에 그리 쉽게 속아 넘어간 꼴이 말이야.”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너는…, 아니. 그만하지. 더는 달라질 것도 없을 텐데.”

몇 마디 대화로 둘 사이에 흐르던 평온한 침묵이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서는 손목을 털어 가브리엘의 손을 떨쳐 내려 했지만 역시나 어림도 없었다. 무엇이든 들어줄 것처럼 굴던 가브리엘은 손을 놓아달라는 간단한 요구조차 들어주지 않았다.

사실 아서는 저만 두고 가 버린 카를로스 때문에 조금 짜증이 나 있는 상태였다. 그 탓인지 이 상황에 몰입할 의욕이 떨어졌다. 가브리엘이 저를 달래듯 굴지 않았더라면 몸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을지도 몰랐다.

전생을 떠올리기 전과 후의 아서는 비슷하면서도 어느 부분에선 극명하게 달랐다. 이전의 아서는 전형적인 외강내유형의 인간으로 겉으로만 사나웠지, 그 속은 푸딩처럼 말랑거렸다.

마음을 준 사람에겐 무언가 받는 것보다 주는 걸 선호했고, 상대방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자 불쌍할 만큼 애를 썼다. 집착이 심해도 자기 자신의 모자란 점을 되새기며 스스로를 갉아먹었을 뿐 그것이 상대를 해치는 방향으로 나아가진 않았다.

황제와 황후에게 일평생 휘둘렸던 것도 그의 연장선이었다. 물론 제 영역 바깥의 사람에겐 가차 없이 굴었으니 결코 선한 편은 아니었다.

과거의 아서 기준에서 지금의 가브리엘은 조금 애매한 위치에 속해 있었다.

아서를 속여 넘긴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목숨을 구명해 준 게 아예 없었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만일 이전 아서였다면 가브리엘을 무시해 버리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다만 현재의 아서는 다르다. 그는 이제 당한 건 몇 배로 돌려주어야 만족하는 좀생이 같은 인간으로 탈바꿈했다.

가브리엘이 이토록 티가 날 정도로 다정하게 구는 것이 전부 카를로스의 명 때문임을 알았다. 카를로스가 질투할 것이 뻔한데도 지나치게 배려해 주는 것이 의심스러워, 틈틈이 이능을 이용해 알아낸 사실이었다.

“전하. 날이 춥습니다.”

“…….”

눈에 짜증을 담은 아서가 기사를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한 번 뒤통수를 친 걸로도 모자라서 이젠 아예 저를 가지고 놀겠다 이거지. 아주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으시니 염려되옵니다.”

가브리엘이 걱정으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트집을 잡으려 샅샅이 훑어봐도 모난 데라곤 없는 수려한 낯이다.

기사의 그린 듯한 눈매에 노을이 내려앉았다. 빛이 내려앉은 눈동자가 사라질 것처럼 투명했다. 바람에 잎사귀들이 부서지는 소리와 정원을 물들인 노을이 어우러지니 한순간 현실과 괴리된 감각마저 들었다.

가브리엘은 지닌 색이 옅다. 그 때문인지 그를 둘러싼 빛에 따라 흐르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지곤 했다. 정원 한가운데 서 있는 은발의 기사는 잘 그려진 한 폭의 명화와 같았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정중히 말한 가브리엘이 아서를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살짝 풀었다. 그러고는 붙잡고 있던 손 위로 제 엄지를 은근히 문지르며 아서를 달랬다.

아서는 기가 막히다는 듯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봐도 가브리엘은 제가 얼굴을 들이밀고 요구하면 거부할 이가 몇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기사가 써먹은 방법은 실제로도 유효했다. 그의 외양은 머리끝까지 치민 짜증도 잠시간 가라앉히는 강력한 힘을 지녔다.

입을 꾹 다문 아서가 저택의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걸으며 머리로는 어찌해야 가브리엘을 흔들어 볼 수 있을 것인지 궁리했다.

가브리엘은 척 봐도 사랑보다는 충성심을 택할 인물이다. 제아무리 아서가 공을 들여 놔도 명이 떨어진다면 지체 없이 아서의 목을 벨 인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기사를 뒤흔들기 위해선 사랑도 사랑이지만, 그를 뛰어넘는 어떠한 죄책감이나 책임감, 소유욕 따위를 심어 주어야 했다.

아서의 형제 카를로스는 욕망에 무척이나 솔직했다. 평상시는 심드렁한 듯 보여도 한 번 원하는 것이 생기면 무슨 수를 써서든 제 손에 쥐려 들었다. 반면 가브리엘은 제 감정을 알고도 뒷걸음질을 치는 사내였다. 어떤 면에선 카를로스보다 더 까다로운 유형이었다.

“목욕 시중을 들겠습니다.”

침실로 들어간 아서가 우두커니 서 있으니 가브리엘이 자연스레 외출복을 벗겨 냈다. 아서는 그가 제 옷을 전부 벗길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었다.

“혹 준비된 연고가 있나?”

“예, 상비약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혹 어디 불편한 곳이 있으십니까?”

“살갗이 쓰라려. 옷감이 닿으니 더욱 그렇군.”

아서는 검지로 카를로스가 집요하게 씹어놓은 부위를 가리켰다. 너덜너덜한 목덜미 외에 가슴이나 허벅지 안쪽도 사정은 비슷했다.

그가 눈을 내려 이것 좀 보라는 듯 몸을 훑자 가브리엘이 자연스레 아서의 시선을 따라 같은 곳을 쳐다보았다. 아서를 바라보던 황금안이 짧게 동요했다. 역시나 가브리엘이 아서의 몸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닌 듯했다.

“씻고 나오면 연고부터 발라 줘.”

“예, 그리하겠습니다.”

아서는 맨몸으로 당당히 욕실로 향했다. 몸에 걸친 거라곤 한쪽 팔목에 걸린 구속구가 전부였으나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하도 벗고 있어서 그런지 이젠 옷을 안 입은 게 더 익숙하게 느껴졌다.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물이 차오르고 있는 욕조에 몸을 담갔다. 옆에서 마법석을 조작 중인 가브리엘은 반쯤 걷은 소매를 제외하곤 단정한 차림새 그대로였다.

금세 욕실 내부가 뿌연 수증기로 가득 찼다. 다가온 가브리엘이 물기 묻은 손으로 지저분하게 흐트러진 아서의 앞머리를 말끔히 넘겨 주었다.

“불편한 점이 있다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부드러운 해면에 거품을 묻혀 아서의 팔을 쓸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에 몸속이 간질간질해졌다. 그러나 그 나른한 감각은 얼마 가지 못했다. 가브리엘의 손길이 쓰라린 살갗에 닿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파.”

“…송구합니다, 전하. 이 정도는 어떠신지요?”

전신이 물고 빤 자국투성이라 기사가 조심한다고 한들 상처를 아예 안 건드릴 수는 없었다. 아서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가브리엘을 타박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제 눈치 볼 카를로스도 없겠다, “간지러운데.” “손이 거칠군.” “어설퍼.” 등 몸을 씻는 내내 퉁명스럽게 이것저것 요구해 댔다. 이쯤 되면 슬슬 짜증을 낼 만도 한데 기사는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아서의 시중을 들었다.

카를로스가 내린 명령의 영향도 있겠지만, 가브리엘은 본래부터 사람이든 동물이든 관계없이 약하고 손이 많이 가는 것에 유해지는 편이었다. 아서도 이제는 그 약하고 손이 많이 가는 무언가에 포함이 된 듯했다.

까탈스럽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운 아서였으니 일단 손이 많이 가긴 했고, 구속구 덕에 일시적이지만 신체적인 연약함도 얻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아서는 투정을 부리다 지친 나머지, 중간 즈음부턴 조용히 있다가 마지막에 몇 마디 말을 더했다.

“대체 왜 사용인을 불러들이지 않는 건지 모르겠군. 그대는 기사이지 않은가?”

“죄송합니다. 사용인을 들이는 것은 좀 더 고려해 보겠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기는.”

가브리엘의 손에 있던 수건을 낚아챈 아서가 물기를 대강 털어 내고 욕실을 나섰다. 사실 가브리엘은 기사치고는 시중드는 솜씨가 나쁘지 않긴 했으나 그에 대해 칭찬을 할 생각은 없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전하.”

뒤따라온 가브리엘이 아서의 발목에 쇠사슬을 채웠다. 아서는 침대에 늘어져라 누워 있다 졸지에 또 애완견처럼 묶인 처지가 되었다.

“연고를 준비해 올 동안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묵직한 구속구와 침대 기둥에 달린 사슬이 견고하게 연결되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다른 일이 생기는 걸 방지하려는 것 같았다.

만일 이전의 아서였다면 몸을 씻는 동안 마음이 조금 풀렸다가, 구속구를 채워 두고 간 것에 재차 기분이 상했을 테다.

문을 닫고 나가는 기사를 빤히 지켜보던 아서가 화가 난 척 이불 속으로 고개를 묻었다. 아직까지도 곳곳에 카를로스의 체취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익숙한 향을 맡은 탓인지 절로 아랫배가 지끈거렸다. 원래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난다고, 늘 치근대던 카를로스가 없으니 허전했다.

기사는 채 몇 분 지나지도 않아 빠르게 돌아왔다. 아서의 눈동자가 그의 움직임을 뒤쫓다 이내 제 발목에 걸린 쇠사슬로 향했다.

다가온 가브리엘이 조심스럽게 이불 가장자리를 들췄다. 발목에 걸려 있던 구속구부터 곧장 풀어 주는 걸 보고 아서는 내심 헛웃음을 흘렸다. 철저하면서도 다정한 기사였다.

“전하. 침구가 닿는 건 쓰라리지 않으십니까?”

“…….”

기사의 물음에 아서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팔꿈치로 상체를 반쯤 세운 채 구속구가 채워져 있던 발목만을 빤히 노려봤다. 기분이 상했다는 티를 내는 것이었다.

그때 등 뒤로 푹신한 쿠션이 놓여졌다. 단단한 손이 아서의 상체를 살짝 밀어 쿠션에 등을 기대도록 유도했다.

부드러운 손길에 몸을 맡기니 절로 팔꿈치에 힘이 풀리고 순식간에 편안한 자세가 만들어졌다. 몸이 편해지자 자연히 사납던 눈매가 스리슬쩍 풀어졌다.

“연고를 발라 드리겠습니다.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가브리엘의 손은 보드랍진 않았으나 타고난 골격이 우아했다. 크고 잘빠진 손이 울긋불긋한 목덜미 위로 연고를 살살 펴 발랐다. 연고가 스며들도록 톡톡 두드리는 손끝이 아서의 살결을 간지럽혔다.

쿠션에 기대 있던 몸이 어느새 느슨히 늘어졌다. 모든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가브리엘은 기사가 아니라 집사를 했어도 무척 잘 어울렸을 터였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아서는 살짝 몸이 달아올랐다. 머릿속으론 별의별 생각이 떠올랐는데 안타깝게도 현재로선 전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답답하군.”

아서가 손을 뻗어 가브리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미리 계획한 바는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확실치 않은 터라, 우선 살짝만 건드려 볼 생각이었다.

“종일 약만 바르고 있을 생각인가? 이리 내.”

그리 말하곤 기사의 손에 들려 있던 연고를 낚아채 몸에 주욱 짰다. 불그죽죽한 가슴 위와 골반, 허벅지 안쪽에 반투명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살 위로 흘러내리는 것을 아서는 대강 쓸어 올려 펴 발랐다. 부어오른 유륜 부근을 건드릴 땐 상처가 쓰라려 몸이 움츠러들었다.

“…….”

그러다 문뜩 뺨을 찌르는 시선이 느껴져 위를 올려다보았다. 가브리엘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아서를 내려다보고 있다.

꼭 아끼는 장난감이라도 빼앗긴 것 같은 얼굴이다. 온종일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도 웃어넘기던 이가, 고작 이런 일에 마음이 상한 티를 내고 있었다.

아서는 내심 웃음을 지었다. 그에게서 이런 반응이 돌아올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했고 그러기를 바라고 있었다.

요 며칠간 지켜본바, 가브리엘은 아서에게 하나하나 모든 걸 다 맞춰 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섬세하고 정성이 깃든 배려이긴 했다.

다만 그 정도가 지나쳤다.

가브리엘은 마치 아서를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인간으로 길들이려는 것처럼 굴었다. 이런 건 주로 통제 성향을 가진 이들이나 하는 짓거리였다.

결핍된 이들에게 다정함은 벗어날 수 없는 목줄과 같았다. 얼핏 보기엔 보드라운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으나, 그 안은 억세고 질긴 쇠사슬로 엮여 있었다. 다정에 속아 몸을 기대는 순간 그것이 전부 자신을 옥죄는 사슬이 되어 돌아온다.

특히나 가진 게 없는 자들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옥죄곤 했다. 누군가의 다정에 길들여진 순간부터 머릿속이 설탕물로 흠뻑 절여진 양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제 살을 갉아먹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얄팍한 한 줌의 온기를 얻어 내고자 발버둥을 쳤다. 자신을 통째로 들어다 바치고도 늘 불안에 떠는 게 그들의 최후였다.

과거의 아서가 그러했고, 어쩌면 어린 날의 카를로스도 그러했을지 모른다.

물론 가브리엘 본인이 의도한 바는 아닐 터였다.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자각조차 못 한 상태처럼 보였다.

특이하게도 가브리엘의 통제하고자 하는 성향은 타인보다는 주로 자기 자신을 향해 있었다. 지금처럼 한 사람을 고립시켜 놓고 온전히 정성을 쏟아 본 적 또한 처음인 듯싶었다. 아마 본래 원작의 흐름대로 갔다면 그의 성향이 바깥으로 드러날 일이 없었을지도 몰랐다.

“앞은 다 했으니, 남은 건 등이군.”

아서는 보이는 곳에 대강 약을 펴 바르고 엎드렸다. 가브리엘의 시선은 부러 무시했다.

제 손이 닿는 곳은 직접 해결했으니 남은 건 그를 제외한 나머지 부위였다. 보나 마나 등 전체가 잇자국으로 엉망일 게 분명했다.

양쪽 팔에 고개를 묻은 채로 아서는 생각을 정리했다. 가브리엘이 상대방의 어떤 모습에 마음이 끌릴지 대강 그림이 그려졌다.

다른 이에겐 벽을 세우면서, 오로지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통제 아래에서만 유순히 구는 모습. 너무 순순히 굴면 지루할 테니 가끔은 긁어 줘야 했다.

상대가 원하는 모습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데에 시간이 소요될 뿐, 그걸 연기하는 거야 숨 쉬는 것보다 쉬웠다.

“…….”

잠시간 기다려도 등에 와 닿는 손길이 없었다. 아서가 상체를 틀어 뒤돌아보았다.

가브리엘이 제 손에 들린 연고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가 한쪽으로 살짝 기울어 있는 게 무언가 곰곰이 고민에 빠진 눈치다. 아서의 행동에 기분이 상한 자신을 인지했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생경했다. 희미한 미소조차 사라진 얼굴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고압적으로 보였다. 절로 아랫배가 욱신 달아올랐다.

“가브리엘. 무얼 하고 있나.”

아서는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치켜올리며 말했다.

“…아, 송구합니다. 잠시 딴생각을.”

말을 붙이자 뒤늦게 기사의 눈매가 풀어졌다. 손에 연고를 조금 짜낸 그가 아서의 등에 천천히 펴 발랐다.

가브리엘은 답답하다는 아서의 말은 들은 적도 없다는 것처럼 느긋하고 조심스럽게 굴었다. 아서가 간지럽다고 타박해도 꼬박꼬박 “예, 주의하겠습니다.”라는 대답만 돌아올 뿐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팔뚝에 고개를 묻고 아서는 남몰래 웃었다. 자기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하는 짓엔 묘하게 일관성이 있었다.

가브리엘은 금욕적이란 수식어와 잘 어울리는 사내였다. 그는 제 욕망을 직시하는 법을 모른다. 특히나 어느 부분에선 고지식한 면모도 없지 않아 있으니, 이대로 두었다간 제 성향을 깨닫는 것조차 요원할지 몰랐다.

어쩌다 운 좋게 깨닫게 되더라도 욕정 따위는 그가 정해 놓은 우선순위에서 가차 없이 밀려날 게 분명했다. 아서도 고작 이 정도 찔러 보는 걸로 그가 흔들릴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아서가 기대하고, 궁금해하는 건 다른 쪽이었다.

과연 저 차분한 태도가 꿈속에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제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그려 낼 수 있게 되고, 그것이 현실에서 그의 코앞까지 들이밀어졌을 때도 아무렇지 않게 외면할 수 있을까.

굳이 답을 예측해 보려 머리를 쥐어짤 필요는 없었다. 앞으로 시간을 들여 확인해 보면 될 일이었다.

아서는 기대감에 휘어지는 눈가를 슬며시 감추었다. 유난히 늦은 새벽이 기다려지는 날이었다.

***

기사는 늦은 밤까지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근처에 그의 방이 따로 있었지만 카를로스에게 지시받은 바가 있는 듯 침실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서가 침상 위에 누워 이불을 돌돌 말아 끌어안고 있는 동안, 가브리엘은 두꺼운 서류 더미를 제 옆에 쌓아두고 꼼꼼히 살폈다. 긴 시간 동안 자세 한 번 흐트러지지 않는 것이 꼭 잘 빚어 놓은 조각상 같았다.

심심해진 아서가 그쪽을 구경하고 있으니 기사가 먼저 물었다.

“전하, 뭔가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딱히 없어.”

아서는 괜히 차갑게 답하곤 고개를 돌렸다.

얇은 서류가 팔랑대며 넘어가는 소리, 사각사각 무언가 쓰는 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평상시엔 살덩이 부딪히는 소리나, 무언가 빨아들이는 소리로만 가득 찼던 침실이 갑작스럽게 건전한 장소로 탈바꿈되고 있었다. 한없이 여유로운 밤이었다.

별 의미 없이 커튼에 새겨진 문양을 하나하나 세던 아서가 천장으로 눈을 돌렸다.

쓸데없이 드높은 천장엔 화려한 색으로 뒤덮인 천장화가 그려져 있었다. 걸음걸음마다 빛나는 잔상을 남기며 백금발의 소년이 꽃밭에서 해사한 얼굴로 뛰어놀고 있다. 곳곳에 피어난 빛바랜 듯한 붉은 장미가 인상 깊었다.

저런 동화 같은 천장화를 달아 놓고 그 아래에서 그렇게 뒹굴었단 말이지. 보통 귀족들은 이런 위엄 없는 천장화를 선호하지 않을 텐데, 카를로스가 성인이 되기 전 상속받은 저택이겠거니 싶었다.

하필 또 천장화 속 소년의 생김새가 아서의 어릴 적 외양과 몹시 흡사해서 기분이 묘했다. 한편 조금 놀랍기도 했다. 어린 시절 아서를 빼다 박은 그림이 있는 방에 아서 본인을 가둬 두다니, 새삼 카를로스의 집착이 느껴졌다.

사실 어릴 때 아서는 카를로스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자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카를로스는 아서의 콩깍지 때문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귀여운 편이었다. 제 뒤만 졸졸 따라다니다 몇 마디 좀 했다고 풀이 죽어선 불쌍하게 바라보질 않나. 다 자라지 못한 뼈대가 제 눈엔 어찌나 연약해 보이던지 바람 불면 넘어질까 손을 꼭꼭 잡고 다녔었다. 현재의 카를로스를 생각하면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과거사였다.

아서는 천장화에 시선을 둔 채로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잡생각이 길어질수록 눈꺼풀이 물먹은 솜처럼 점점 무거워졌다.

별 의미도 목적도 없는 생각은 끝없이 이어졌고, 점점 시야가 가물가물하게 좁아 들었다. 아서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고 나서 눈을 뜨니 주변이 깜깜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았는데 벌써 날이 어두웠다. 방 안을 밝히던 마법구도 소리 없이 꺼져 있었다.

창밖을 살펴보니 해가 사라져 저 너머가 온통 시커먼 색으로만 가득했다. 해가 뜨려면 한참 남은 것처럼 보였다. 천만다행이었다. 잠깐 눈을 감았던 사이 해가 뜨고 있었으면 허탈했을 것이다.

아서는 눈을 깜빡거리며 빠르게 어둠에 적응했다. 가브리엘은 방 한편의 카우치에 몸을 뉘고 있었다.

몸을 뒤척이다 아서가 멈칫했다. 어째 또 발목이 무거워 시선을 내리자 익숙한 구속구가 시야에 걸렸다. 가브리엘이 잠이 든 제 몸에다가 저걸 채워 둔 것 같았다. 이걸 기가 차다 해야 할지 기특하다 해야 할지 모르겠다.

조용히 웃음을 흘린 아서가 이윽고 정신을 집중해 몸과 혼을 분리했다. 의식이 사라진 몸뚱이가 곧바로 힘없이 늘어졌다. 겉으로 보기엔 영락없이 곤히 잠든 모습이다.

늘어진 육신을 내버려 둔 채 아서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기사에게 다가갔다.

가만 보니 카우치 바깥으로 발이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안 불편한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기사를 내려다보았다.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곤히 잠든 모습에 손이 근질거렸다.

단정히 뻗은 눈썹, 높고 반듯한 콧대, 민들레 홀씨처럼 한 올 한 올 가늘게 수놓아진 속눈썹, 차분히 다물린 입매와 단단한 턱선. 아서는 손끝으로 기사의 얼굴선을 찬찬히 더듬다 감탄사를 뱉어 냈다. 가브리엘을 이렇게 가까이서 관찰해 본 적은 또 처음이었다.

잠깐 넋을 놓고 감상하던 아서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혹여나 재수 없게 가브리엘이 일찍 눈을 뜨기라도 하면 다음 날 새벽까지 기다려야 했다.

정신을 집중한 아서는 곧바로 가브리엘의 꿈속으로 스며들었다.

그가 생각한 꿈속 배경은 이곳 저택의 침실이었다. 잠깐이나마 현실과 혼동을 하도록 유도한다면 가브리엘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가 더 쉬울 터였다.

저택의 침실이 꿈속에서 고스란히 재현되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브리엘은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는 상태였고, 아서는 늘 그랬듯 팔목에 구속구 하나만 걸친 맨몸이었다. 굳이 완벽을 기할 필요는 없기에 발목에 감겨 있던 구속구는 만들어 내지 않았다.

슬슬 시작해 볼까. 가브리엘의 몸 위로 훌쩍 올라탄 아서가 그의 하의를 살살 끌어 내렸다.

드러난 골반을 아서가 희롱하듯 손끝으로 훑었다. 뒤이어 속옷 틈새로 손을 쑥 밀어 넣고, 물컹한 살 기둥을 대담하게 끄집어냈다.

아서의 눈동자가 흥미로 반짝거렸다. 한 손에 잡히지도 않는 크기에 자연히 탄성이 흘러나왔다. 저리 금욕적인 얼굴을 하고서 밑에 달고 있는 건 그와 정반대로 생겼다.

두꺼운 기둥에 뺨을 문지른 아서가 표피 위로 쪽, 입을 맞추었다. 잠이 든 가브리엘을 상대로 이러고 있으니 꼭 몹쓸 짓을 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물론 누가 봐도 아서가 몹쓸 짓을 하는 중인 게 맞다. 가브리엘이 얼른 일어나서 화를 내든 뭐든 해 줬으면 좋겠는데. 기사가 보일 반응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허리 아래가 지끈 달아올랐다.

혀끝으로 두꺼운 성기 끝을 살짝 핥았다. 꿈이라 그런지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하아….’

입을 벌려 선단을 담았다. 양껏 밀어 넣자 금세 입 안이 가득 차 힘겨워졌다.

제아무리 목구멍을 벌린다 해도 끝까지 삼키는 건 불가능한 크기였다. 어차피 미숙하게 굴어야 진짜와 비슷해 보일 테니 그렇게까지 애쓸 필요도 없었다.

아서는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여 가며 기둥을 빨아들였다. 성기를 입에 넣은 채 귀두 끄트머리의 갈라진 틈에 혀를 넣고 살살 굴렸다.

‘…으음.’

가브리엘이 목울대를 울리며 낮게 신음했다. 그 나지막한 신음에 이미 달아올라 있던 아서의 성기가 흥분감을 못 이기고 끄덕거렸다.

부드러운 표피 속 심지가 점점 단단해지는 게 느껴졌다. 입에 쑤셔 넣은 살 기둥이 힘을 받을수록 도리어 아서가 조금씩 헐떡거렸다. 손 한 번 댄 적 없는 아서의 성기에서 액이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가브리엘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려 아서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슬슬 잠에서 깨어날 때가 된 듯했다.

점차 정신이 돌아오고 있는지 기사의 단정한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아서는 가브리엘이 깨어나는 순간을 히 지켜보았다. 떨리던 눈꺼풀이 느릿하게 들리고, 뒤이어 흐릿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

그와 눈이 마주쳤다. 달싹거리던 입술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하?’

갓 깨어나 가라앉은 음성이 귓가를 울렸다. 재빨리 고개를 숙인 아서가 들은 체도 않고 혀를 길게 내밀어 기둥을 핥아 올렸다. 눈동자만 슬쩍 굴려 위를 바라보니 가브리엘이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전하, 이게 무슨….’

아직 완전히 잠기운을 떨쳐 내지 못한 눈동자 위로 당혹스러움이 휘몰아쳤다.

‘드디어 일어났네, 리엘. 기다리고 있었어.’

아서가 눈을 접으며 웃는데 그와 동시에 가브리엘이 단호한 손길로 아서를 밀어낸다.

‘당장, 그만두십시오.’

뒤로 몸을 물린 가브리엘이 꺼덕거리는 성기를 곧장 속옷 속으로 욱여넣었다. 그는 아직 이 모든 상황이 꿈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왜 그래? 하기 싫어?’

뒤로 밀려난 아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대가 전부터 원해 왔던 일이잖아. 그동안 이런 게 하고 싶어서 나에게 그리 잘해 주었던 것 아니었어?’

‘그런, 저는 결코….’

‘이걸 봐.’

기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서가 턱 끝으로 그의 샅을 가리켰다.

‘네 좆은 그렇다고 하는데.’

섬세한 눈가에 웃음기가 넘실거렸다.

아서는 실제의 아서라면 절대 하지 않을 법한 말을 흘렸다. 그러자 뒤로 몸을 물리고 있던 가브리엘이 한쪽 눈썹을 끌어 올린다.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챈 듯, 그가 주변 상황을 찬찬히 살폈다. 침실을 한 바퀴 둘러본 눈동자가 아서에게로 되돌아왔다.

가브리엘은 구속구가 채워져 있지 않은 매끈한 발목을 발견하고 하, 나지막한 한숨을 뱉어 냈다. 미세하게 일그러져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니까 전하께서는, 제가 진정으로 이런 걸 원했다고 믿고 계시는 거군요.’

‘으응. 진실이 무엇인지는 그대가 가장 잘 알겠지.’

당연히 가브리엘이 잠자다가 아서에게 좆을 빨리는 상황을 원했을 리가 없지만, 아서는 무작정 그렇게 우겼다. 꿈에서는 어떤 헛소리를 해도 뒷감당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얌전 떨지 말아, 가브리엘. 어찌 됐건 기분만 좋으면 그만 아닌가.’

아서가 해맑아 보일 정도로 입꼬리를 시원하게 끌어 올렸다. 언젠가 밤중 그의 침실을 찾은 가브리엘에게 보여 준 적이 있었던 얼굴이었다.

아서는 굳어 있는 사내에게 다가가 그의 손목을 움켜쥐고 핏줄이 불거진 부위를 빨아들였다. 이까지 세워 잘근잘근 씹으니 붉은 흔적이 적나라하게 자리 잡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기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는 한결 차분해진 눈동자로 아서를 가만히 응시했다.

‘…글쎄요. 기분만 좋으면 그만이다, 그것도 어느 정도 맞는 말씀이긴 합니다만.’

‘…….’

‘제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게 문제이겠지요.’

‘거짓…! 읏.’

커다란 손이 아서의 뒷머리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가차 없이 당겨지는 머리칼에 아서가 외마디 신음을 흘렸다. 실제였다면 당혹스러운 얼굴로 용서를 구했을 기사는 무심하게 침묵을 지켰다.

‘으, 리엘, 아파…….’

머리칼을 쥔 손아귀에 더욱 힘이 실렸다. 뒷머리를 따라 강제로 젖혀진 목덜미가 아프게 늘어났다. 자연히 눈시울이 시큰 달아올랐다.

무표정한 눈이 가느다란 솜털마저 샅샅이 읽어 내릴 것처럼 느긋하게 움직였다. 그 소름 돋을 정도로 집요한 시선에 아서의 등 뒤로 선득한 흥분감이 스쳐 지나갔다.

‘전하. 제가 바란 적 없는 일로 심기를 어지럽히지 마십시오.’

‘알, 겠어. 알겠으니까….’

아서가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답하자 가브리엘이 평소처럼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머리채를 움켜쥔 손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아파, 리엘….’

붙들린 고개가 아파 앓는 소리를 냈다. 아슬아슬하게 맺혀 있던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무런 흥분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는 태연한 손길에 아서만 끙끙 앓았다.

아… 기분 좋아. 어느새 아서의 좆이 사정 직전까지 부풀어 올랐다.

평소에도 이렇게만 대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기사가 제 머리채를 끌어다 강제로 좆을 물려도 아서는 싫어하는 척 빨아 줄 의향이 있었다.

‘전하께서 꿈속에서는 꽤 얌전하시군요.’

‘…….’

‘늘 이렇게 착하게만 굴어 주신다면, 저도 더 예뻐해 드릴 텐….’

아. 평소와 다름없이 이어지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자각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무의식중에 뱉어 낸 소리인 것 같았다.

본인조차 자각 못 한, 무의식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욕구를 끄집어내는 것. 그게 바로 몽마의 꿈이 지닌 힘이었다.

아서는 가브리엘이 복잡한 고민에 빠지기 전에 먼저 끼어들어 흐름을 끊어 냈다.

‘착하게 있을게. 이거만 놔주면.’

예뻐해 주고 싶으면 그러면 될 거 아닌가. 뭐 하러 고민을 하는지. 물기 어린 눈이 애처로운 모양새를 띠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기사가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아서는 이때다 싶어 가브리엘의 발 아래에 무릎 꿇었다.

‘그런데, 리엘.’

‘예.’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아서가 검지로 아직 가라앉지 않은 기사의 고간을 두드렸다. 유순한 눈으로 허락을 구하듯 슬쩍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거, 마저 빨게 해 주면 안 될까….’

카우치에 걸쳐져 있던 가브리엘의 손을 끌어다 제 머리 위에 올려놓자, 기사가 손끝에 걸리는 머리칼을 자연스럽게 쓰다듬었다.

‘안 됩니다.’

두피를 살살 긁으며 간지럽히는 손길은 이토록 부드러운데 돌아오는 대답은 가차 없다.

손으로 건드리는 것까진 내버려 두는 것 같아 아서가 옷감 위로 살살 원을 그리며 감추어져 있는 성기를 자극했다.

‘그만.’

잠깐 동안 아서의 손장난을 눈감아 주던 기사는 결국 단호히 아서를 밀어냈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이토록 선명하건만 끝까지 허락의 말은 떨어지지 않았다. 좆을 이렇게 팽팽하게 세우고 있으면서 저런 차분한 태도를 끝까지 유지한다니, 여러모로 놀라운 자제력이었다.

아서는 아쉬움을 감춘 채 단단한 허벅지에 뺨을 비볐다. 오늘은 이대로 꿈을 마무리 지어야 하나 싶었다.

그러나 그때 맞닿은 몸이 조금 들썩이더니 머리 위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자 가브리엘이 눈가에 옅은 웃음기를 달고 있다. 그리 단호하게 밀어내 놓고 정작 이렇게 치대는 건 마음에 들었나 보다.

가브리엘은 꽤 기분 좋은 듯한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전하께서 이런 예쁜 짓도 하시고.’

‘…….’

‘악몽치고는 썩 나쁘지 않은 꿈이군요.’

악몽이라는 말에 아서가 뜨끔했다.

다가온 손이 아서의 턱을 간질였다. 살살 턱 끝을 간지럽히는 손길에 고개가 절로 들렸다. 야릇한 감각이 아서의 등허리를 타고 올랐다.

흡사 애완동물에게나 할 법한 손장난이었으나 아서는 개의치 않고 기분 좋게 앓는 소리를 냈다. 어떤 취급을 당해도 상관없다는 듯 웃으며 순종적인 모습을 보였다.

선명한 황금안과 아서의 시선이 맞물렸다. 마주한 가브리엘의 눈동자 위로 전에 본 바 없던 묘한 빛깔이 덧씌워졌다.

***

“어리군.”

카를로스가 눈앞의 어린아이 둘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나드 왕국의 왕세자를 대신하여 볼모로 바쳐진 왕족 둘은 카를로스의 예상보다 어린 나이로 보였다. 여자아이 하나, 남자아이 하나라고 했던가. 서로 거울을 마주 보고 있는 것처럼 닮은 쌍둥이였다.

어두운 옷감을 걸쳐 가능한 한 성숙해 보이도록 애를 쓴 듯했는데, 보송한 뺨에서 느껴지는 앳된 티는 감춰지지 않았다. 척 보기에도 성인이 되기에 한참 이른 나이대 같았다.

쌍둥이는 얼핏 검은색으로 보일 만큼 짙푸른 머리카락과 오나드 왕족 특유의 새파란 보석안을 지녔다. 쌍둥이의 보석안을 확인차 바라보던 이들 중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색이라면 모를까, 보석안만큼은 마법으로도 만들어 낼 수 없어 반드시 오나드 왕족의 핏줄이 섞여야만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쌍둥이와 짧게나마 인사를 나누어도 되겠습니까?”

여정 내내 카를로스의 심기를 신중히 살피던 왕세자가 물었다. 본래라면 무시하고 말 것을, 쌍둥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 보였던 탓에 카를로스도 잠시나마 시간을 주었다.

왕세자가 쌍둥이에게 다가가 그들의 희생을 치하하듯 어깨를 두드렸다. 누구 하나 제대로 된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재회이자 결별은 한 편의 무미건조한 연극과 같았다.

두 아이는 감정이란 게 없는 인형처럼 죽어 있었다. 왕세자를 대신하여 볼모로 팔려 오는 것과 다름없는 처지였으니, 저토록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도 이상치 않았다.

“마노 경, 쌍둥이는 경에게 맡기도록 하지.”

“예. 책임지고 모시겠습니다.”

짧은 여정 동안 쌍둥이는 마노에게 맡겨졌다. 카를로스의 고압적인 분위기가 어린아이를 상대하기엔 부적절했던 탓이다.

쌍둥이는 한눈에 이 집단의 우두머리가 누구인지 파악한 듯 안쓰러울 정도로 카를로스의 눈치를 봤다.

왕족이랍시고 가당치도 않은 대접을 받으려 하는 것보다야 차라리 기가 죽어 있는 편이 나았기에 딱히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카를로스의 묵인하에 두 쌍의 보석안이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듯 좇았다.

다행히 여정은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완만하게 흘러갔다. 국경까지 오는 데에 10일이 걸렸으니 귀환까지도 비슷한 시간이 걸릴 터였다.

차출된 인원이 많지 않아 경로에 있는 영지에 들러 숙식을 해결했다. 자잘한 암살 시도야 성가시긴 해도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카를로스의 신경을 건드릴 만한 것은 오직 제 형제와 관련된 일밖에 없었다.

밤이 깊어 카를로스와 기사들은 근처 영주성을 찾았다. 늦은 시간이라 식사를 사양하고 영주가 내어준 방에서 몸을 씻었다.

홀로 남은 카를로스는 창가 근처 탁상에 앉아 통신구를 꺼냈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기사는 지체 없이 연락에 응답했다.

마석을 깎아 내 만든 통신구에 기사의 모습이 비쳤다.

[칼, 별다른 일은 없을 테지?]

“그쪽은.”

[이쪽은 잘 지내고 있어. 전하와의 관계도 제법 원만해졌고.]

카를로스가 비딱하게 턱을 괸 채 통신구 속 기사의 얼굴을 살폈다. 은은히 올라간 입꼬리를 보아하니 아서와 단둘이 지내는 시간이 꽤나 즐거운 모양이었다. 전부터 곧잘 경계심 많은 동물을 길들이길 즐겼던 가브리엘이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잘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주 웃어 줄 기분은 들지 않았다. 아서가 그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그의 기사에게라도 발목이 잡히길 바라는 마음과, 그가 아닌 타인에게 마음을 주는 아서를 용납할 수 없다는 마음이 공존했다.

전부터 아서는 유독 그의 기사 가브리엘에게 호감을 드러냈다. 제 입으로 구원이니 뭐니 지껄인 걸 봐선 답지 않게 꽤 깊은 감정을 품었으리라 짐작되었다. 가브리엘이 시간을 두고 꾸준히 다가간다면 아서는 분명 머지않아 다시 마음을 주게 될 것이었다.

“손끝 하나 대지 말라 했던 걸 잊진 않았겠지.”

카를로스는 이런 제 태도가 모순적으로 보이리란 걸 알면서 기어코 유치한 경고를 내뱉었다.

전부터 자신이 형님과 관련된 일에 유독 애처럼 굴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런 그를 가브리엘이 내심 황당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다만 그럼에도 자제가 되지 않는 것뿐이었다.

“시중만 들어. 그 외의 다른 엉뚱한 짓을 할 생각은 말고.”

[…그래.]

잠시간 침묵하던 가브리엘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잠깐의 침묵이 거슬렸으나 카를로스는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이내 통신이 종료되고, 빛을 내던 통신구가 새카맣게 변했다.

값비싼 최상급 통신구가 침상 위로 아무렇지 않게 내팽개쳐졌다. 그 옆에 자리 잡은 카를로스는 희미한 바람 소리에 맞춰 손끝으로 통신구를 톡톡 두드렸다.

열린 창문 틈으로 스며든 새벽 공기가 그의 머릿속을 씻어 냈다. 바깥에서 눈이 흩날리고 있었지만 창을 닫지 않고 두었다.

늦은 새벽, 그의 형님은 이미 곤히 잠이 들어 있었다. 통신구를 통해 얼핏 살펴본 아서는 평온해 보였다. 그가 자리를 비운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초췌하던 뺨에 생기가 돌았다.

통신구를 두드리던 카를로스의 손끝이 한 지점을 끊임없이 만지작거렸다.

그리 길지 않은 여정인데도 하루하루가 짜증이 날 정도로 느리게 흘러갔다. 이전엔 바라지 않아도 그의 밤을 차지하곤 했던 꿈속의 아서는 여정 내내 단 한 번도 그의 꿈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꿈을 꾸지 않고 지나가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낮이나 밤이나 하나같이 지겹기 짝이 없었다.

***

연일 쌀쌀한 날씨가 이어졌다. 반쯤 열어 둔 창으로 냉기를 품은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아서가 감금된 저택은 당초부터 어느 귀족의 은신처로 쓰일 용도로 지어진 듯 울창한 숲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바깥과 통하는 통로라고는 저택 깊숙한 곳에 자리한 워프 게이트 정도가 전부인 곳이었다. 그를 귀찮게 하던 것들로부터 모조리 벗어난, 완벽한 고립이란 바로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생각 같아선 창문턱에 기대앉아 느긋하게 이 여유를 즐기고 싶었지만, 발목에 걸린 사슬 때문에 창가로 다가가진 못했다. 아서는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의 비현실적인 풍경을 조망했다.

하루하루가 비슷한 일상의 반복인 이곳 저택에서는 바깥보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아서가 가브리엘의 꿈속을 찾은 것도 벌써 십 일이나 된 일이었다.

늘 그랬듯이 한 번의 꿈으로 눈앞의 현실이 손바닥 뒤집듯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며칠 동안 별다를 거 없는 하루가 반복되었다.

이어서 목격한 변화는 미미했다. 그날 꿈에서 깨어난 가브리엘이 아서가 흔적을 남겼던 제 손목을 가만히 들여다본 것이나, 기회가 날 때마다 아서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게 된 정도가 전부였다.

기사는 엉킨 머리칼을 정리해 준다는 핑계로 잠이 든 아서의 머리칼을 쓰다듬곤 했다. 성적인 의도가 담겨 있다기보단 촉감이 좋은 담요를 무의식적으로 만지작거리는 것과 비슷했다.

처음 가브리엘의 손이 닿았을 땐 당황한 척 몸을 굳혔던 아서는 이제 가브리엘이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고 있어도 의식하지 않고 태연히 하던 일을 이어 갔다.

손끝으로 두피를 살살 긁어 주는 손길은 아서에게 나른한 감각을 선사해 주었다. 그때만큼은 두 사람 사이에 은근히 흐르던 긴장감도 느슨하게 풀어지곤 했다.

그러나 그렇게 십 일 정도가 지나자 슬슬 아서는 몸이 근질근질해지기 시작했다.

아서의 취미는 딱 두 가지였다. 독서 혹은 섹스. 독서는 실컷 했으니 이젠 다른 것이 필요한 시기가 찾아왔다.

항시 옆에 붙어 있는 가브리엘 덕에 졸지에 아서는 자위 한 번 못 하고 십 일간 강제로 금욕적인 생활을 이어 나갔다. 식사를 하다 말고 아서가 가브리엘을 불만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가브리엘.”

“예, 전하.”

가브리엘은 아서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답했다. 그는 부르는 말에 답을 하는 동시에, 아서의 입에 먹을 것을 넣어 주는 것을 이어 갔다.

아서는 주는 대로 잠자코 받아먹으면서 힐끗 가브리엘을 바라봤다. 이렇게 그의 안위를 살피는 눈과, 그의 뒷머리를 움켜쥔 채 고압적으로 내려보던 눈이 동일 인물의 것이라는 게 생각할수록 흥미로웠다.

“카를로스는 어디쯤이라 하였지?”

입 안에 있던 걸 완전히 씹어 삼킨 뒤 아서가 물었다. 혹여나 카를로스의 안부를 묻는 것처럼 들릴까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카를로스 전하께선 이제 국경 부근에 내도하셨습니다. 10일 뒤에 귀환하실 예정입니다.”

“그렇군.”

아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로스가 돌아오면 지금처럼 둘만 마주할 일도 줄어들겠어.”

“예, 그렇겠지요.”

아서의 말에 가브리엘이 어딘가 조금 아쉬운 투로 동의했다. 아무래도 그는 지금의 생활이 꽤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경에겐 다행인 일일 텐데. 귀찮지 않나,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구는 것 말이야.”

“지극정성….”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듯 아서의 말을 되씹던 기사가 단호하게 답했다.

“아뇨, 전혀 귀찮지 않습니다. 이후로도 전하를 지금처럼 보필하고 싶습니다만….”

“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아서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그간 아서의 비아냥에 익숙해진 듯 가브리엘은 아서가 무슨 반응을 보이든 개의치 않고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작게 썰어 낸 고기 한 점이 아서의 입 안으로 쏘옥 들어왔다. 아서는 인상을 찌푸렸다가 결국 얌전히 받아먹었다.

며칠 사이 아서와 가브리엘 사이에 흐르던 불편한 공기는 서서히 옅어졌다.

십 일은 제법 긴 시간이었다. 특히나 텅 빈 저택에 오롯이 단둘만이 있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눈을 뜨고 나서부터 잠이 들기 직전까지 기사가 아서의 곁을 지켰다. 그러니 서로에게 익숙해지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물론 갈등의 축은 보이지 않는 곳에 묻어 둔, 겉으로 보기에만 고요한 평화였다. 아서는 아직도 이따금씩 손목의 구속구와 가브리엘을 불만스레 바라보곤 했다.

“그간 내가 경을 잘못 판단하고 있던 것 같군. 마음에 없는 말은 못 하는 줄 알았건만 정반대였어.”

“…송구합니다.”

가브리엘이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사죄했다. 과거의 일을 언급하는 듯한 아서에게 가브리엘이 할 수 있는 일은 용서를 구하는 것밖에 없었다.

“항상 사죄만큼은 빨라.”

“…송구하옵니다. 제가 어떤 감언이설을 덧붙인다 해도, 전하께선 섣불리 믿기 어려우시겠지요. 그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래. 알긴 아니 다행이군.”

빈정거리는 아서의 말에 기사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여도 아서는 전부 거짓으로 치부할 테지만, 이후로도 아서를 보필하고 싶다는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는 제가 옆에 있는 동안 아서의 마음이 편안하기만을 바랐다.

이루어지기 쉬운 바람은 아니었다. 며칠 사이 분위기가 적잖이 유해졌다 싶다가도, 그 변화가 무색하게 한순간 다시 상황이 원래대로 돌아가고 말았다. 내내 얌전히 굴던 아서는 이따금씩 치미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는지 종종 그에게 날이 선 말을 건네곤 했다. 그때마다 가브리엘은 사죄를 건네곤 했는데, 의아한 건 그러면서도 아서가 그의 손길을 강하게 거부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늘 역시 아서는 하는 말과는 달리 그가 먹여 주는 것들은 하나씩 받아먹었다.

잠시간 아서의 기분을 살피던 가브리엘이 천천히 스푼을 들어 수프를 떴다. 아서는 그 모습을 불만스레 보는가 싶더니 또 말없이 받아먹었다.

그에 가브리엘의 눈매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자연스럽게 나온 미소였다.

기실 작금의 고립된 상황이 가브리엘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당장 아서에게 의지할 곳이 그밖에 없다는 사실은 도리어 썩 만족스럽기까지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서가 그의 손길에 익숙해지고, 얌전히 앉아 시중을 기다리게 된 것 역시 기꺼운 변화였다.

다만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껄끄러운 악몽으로부터 비롯된 한 가지 실수가 여전히 그의 마음을 갉아먹듯 불편하게 만들었다.

며칠 전 일이었다.

‘착하게 있을게. 이거만 놔주면.’

‘그런데, 리엘.’

‘이거, 마저 빨게 해 주면 안 될까.’

그의 발치에 꿇어앉아 유순한 눈을 하고 있던 꿈속의 아서와, 얌전히 자리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의 아서. 저도 모르게 눈앞의 아서와 꿈속에서 보았던 아서를 겹쳐 보았던 순간이 있었다.

꿈에서의 내밀한 감각이 현실로까지 옮겨온 양 등허리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그 사이에 섞인 희미한 성감을 자각하자, 순식간에 온몸의 피가 차게 식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황태자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제 머리를 내려치고 싶었다.

‘…왜 그래? 하기 싫어?’

‘그대가 전부터 원해 왔던 일이잖아.’

‘이걸 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정녕 자신이 ‘그런’ 걸 원하지 않았던 게 맞긴 한지. 무의식중이든 뭐든 황태자를 그런 눈으로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건지.

그제서야 기사는 황태자에 대한 제 감정을 찬찬히 들춰 보았다. 단지 하룻밤의 악몽으로 잊혀졌다면 모를까, 그것을 꿈 밖의 아서에게 겹쳐 본 이상 실재하는 현실을 뒤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죄책감과 책임감, 미약한 호감이 전부일 거라 생각했던 감정 속엔 명백히 성애적인 감정이 섞여 있었다. 꿈을 꾸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자각조차 못 했을 감정이.

대체 언제부터였나.

떠오르는 순간이야 제법 많았다. 그의 손이라면 불쾌하지 않다는 소리를 듣고 황태자의 목덜미에 손 한번 대지 못하고 물러났던 순간이나, 오직 저에게만 보여 주었을 미소에 충족감을 느꼈던 순간. 아서의 작은 신음에도 당황하여 몸을 굳혔던 순간 역시.

몽정과 유사한 꿈을 꾸고 나서야 제 감정을 깨달은 것은 황태자가 그와 같은 성별이었기 때문이다. 그간 느꼈던 여러 감정을 당혹스러움으로 뭉뚱그려 둘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동성 간의 관계가 예전만큼 터부시되는 건 아니었지만, 태어나 처음 호감을 가지게 된 이가 남자.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아서가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차라리 자각하지 못하는 게 나았을 법한 감정이었다.

만일 아서가 그와 적대적인 위치에 있는 인물이 아니었더라면, 상황은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나… 그건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했다.

황태자는 제 주군의 형제이자, 그와는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며, 하물며 현재 카를로스의 강압으로 감금당한 처지이기도 했다. 카를로스의 기사인 그가 이런 불순한 감정을 품고 있는 것 자체가 황태자에 대한 우롱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이전 날 제 감정을 당혹스러움으로 뭉뚱그려 놓았듯이, 지금의 감정은 ‘실수’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져야 마땅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하여 그 같은 실수가 두 번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말이다.

설령 그가 그런 불순한 마음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황태자에게 주제넘게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해를 끼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그만.’

불쑥 차오른 상념을 끊어 낸 기사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테이블 위의 접시를 트레이로 옮기며 물었다.

“전하, 오늘 식사는 입에 좀 맞으셨는지요.”

구태여 서두를 필요가 없음에도 가브리엘은 테이블 위의 식기를 차곡차곡 정리해 나갔다. 머릿속을 점령한 불순한 생각을 지워 내기 위함이었다.

“나쁘지 않았어. 아니, 꽤 훌륭한 편이었지.”

“다행이군요. 그럼 앞으로도 이대로 드려도 괜찮으십니까?”

“…이대로라니?”

이대로 준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아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식사는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마저 설명해 보라며 기사를 바라보자 가브리엘이 조금 수줍어 보일 만치 옅게 미소 지었다. 꼭 사랑 고백이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오늘 식사는 제가 직접 만들어 온 것이라.”

“…그대가 직접?”

아서의 눈동자 위로 놀라움이 떠올랐다. 기사의 요리와 주방장의 것이 차이가 나야 마땅할 텐데 아서는 식사 내내 전혀 위화감을 못 느꼈다.

“많이 부족합니다만, 전하께서만 괜찮으시다면 앞으로도 직접 조리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 정 원한다면 그렇게 해.”

아서가 떨떠름하게 답했다. 가브리엘이 식사 내내 먹을 것을 하나하나 잘라 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젠 요리까지 하겠다고 자처하니, 딱히 말리진 않지만 이해가 되지도 않는다는 기색을 드러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본인 일거리가 늘어났는데도 기사는 오히려 좀 전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러다 나중엔 숨 쉬는 것 빼고는 손발 하나 까딱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건 아닐지 아서가 내심 의구심을 품었다.

“식사가 끝났으니 산책을 나가시겠습니까?”

“좋아.”

최근 들어 가브리엘은 아서를 돌보는 일에 완전히 재미를 붙인 것 같았다.

정성 들인 식사를 먹이고, 해가 떴을 때 산책을 시키고, 들어와선 몸을 씻겼다. 마치 아끼는 애완동물을 다루는 듯한 행태였지만 아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얇은 가운이 벗겨지고 벌거벗은 몸 위에 여느 날처럼 옷가지가 걸쳐졌다. 가브리엘이 하의를 입히려 몸을 숙였을 때 아서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이리 줘. 이건 내가 직접 입는 게 낫겠군.”

그리 말하며 가브리엘의 손에 들려 있던 하의를 낚아챘다.

요사이 아서는 의도적으로 가브리엘의 손길을 조금씩 피하고 있었다. 온종일 얌전히 굴다가 특정 상황에서만 훼방을 놓는 식이었다.

여기서 특정 상황이란, 가브리엘의 손길이 아서에게 불편한 자극으로 느껴지는 때를 뜻했다. 하루에도 여러 번씩 발생하는 괴로운 순간들이었다.

사실 하의나 속옷을 입힐 때는 어쩔 수 없이 가브리엘의 손이 예민한 부위에 닿곤 했다. 목욕 시중을 들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제 몸을 건드리는 손길이 자극이 되는가 싶으면 아서는 가차 없이 가브리엘을 밀어냈다.

본디 성욕도 관성적인 것이라고, 몇 날 며칠을 카를로스에게 성적으로 시달렸으니 지금쯤이면 슬슬 아서의 몸이 달아오를 때도 되었다. 십 일이면 참을성 없는 아서치고는 꽤 많이 참은 편이 아닌가 싶었다.

어떤 합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도출된 결론은 아니었다. 단지 가브리엘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유도하려 드는 것뿐이었다.

“어서 가자.”

일을 치르기 전에 예정된 산책부터 해치우고 와야겠다 싶었던 아서는 기사를 붙잡고 침실 밖으로 빠르게 걸어 나갔다.

그러고 나선 날이 춥다는 핑계로 아서는 평소보다 산책을 이르게 끝마쳤다. 제가 먼저 적극적으로 가브리엘을 끌고 나가 놓고 갑자기 들어가겠다며 변덕을 부렸으나, 이미 그런 아서의 행동에 익숙했던 가브리엘은 그러려니 했다.

걷는 둥 마는 둥 하다 침실로 돌아오자 가브리엘이 평소 그랬던 것처럼 아서를 욕실로 이끌었다. 그가 마법석을 조작하는 동안 아서는 물이 차오르는 욕조에 자연스레 몸을 담갔다.

“목욕 시중을 들겠습니다, 전하.”

다가온 가브리엘이 물속에 입욕제를 풀었다. 아서는 욕조에 등을 기댄 채 전보다 한결 능수능란해 보이는 기사를 힐끔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기사가 아서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몸은 좀 어떠하신지요. 피로하시진 않으십니까?”

“딱히….”

“다행이군요. 이제는 식사도 꼬박꼬박 잘 챙겨 드시니, 걱정을 덜었습니다.”

가브리엘이 아서의 머리칼을 손으로 살살 빗질했다. 기사는 아서를 마치 만지면 부서질 것처럼 조심스럽게 다루곤 했는데, 그런 기사의 태도는 때때로 아서에게 어떤 충족감을 안겨 주곤 했다.

두피를 스치는 기분 좋은 손길에 아서가 노곤히 늘어졌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건전한 목욕 시간이었다. 이대로 아서가 얌전히 몸을 맡기고 있는다면 산책이 어제와 같은 루트로 이루어졌듯 목욕 시중 역시 평소처럼 진행될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아서는 가브리엘이 건전하게 시중만 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평상시 기사는 아서의 머리를 감겨 준 뒤에 몸을 씻기곤 했다. 대부분은 팔부터 시작해 아래로 거품을 묻혀 주었는데, 아서는 그 타이밍을 이용해 가브리엘을 건드려 보고자 마음먹었다.

노곤노곤한 감각을 즐기며 그는 적절한 기회가 오기만을 바랐다. 언제가 됐든 가브리엘이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긴 할 테니, 조급하게 굴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예상대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적절한 타이밍이 찾아왔다. 가브리엘의 손길이 아서의 어깨를 지나 가슴팍으로 옮겨간 순간이었다.

“…아.”

거품을 묻혀 낸 부드러운 솔이 젖꼭지를 스쳐 지나간 찰나, 아서가 보란 듯이 몸을 움츠렸다. 그걸로 끝내지 않고 대놓고 눈살도 꾸깃 접었다.

기사가 곧바로 행동을 멈추고 아서의 표정을 살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뭔가 불편한 점이 있으십니까?”

“…없어.”

말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여전히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아서를 보고, 가브리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 달리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으면 편히 말씀해 주셔도 괜찮습니다.”

본래였으면 아서를 불편하지 않게 하기 위해 한 번만 묻고 말았을 기사는 이번만큼은 답을 종용하듯 말을 덧붙였다. 요즘 들어 아서가 이런 식으로 종종 거북한 티를 내곤 했기에 그는 평소보다 신중히 아서의 반응을 살폈다.

얼마 전부터 아서가 목욕 시중을 받는 중간중간 그의 손길을 피하곤 했는데, 무엇 때문인지 그 이유를 알려 주지 않았다. 무언가 불편한 점이 있냐 물어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로 넘어가려 들어 가브리엘로선 차마 그 이유를 캐묻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충돌이 일어난 건 아니었지만, 며칠 사이 미묘하게 불편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아서를 돌보는 일에 만족감을 느끼고 있던 가브리엘에게 그것은 명백히 좋지 않은 신호로 느껴졌다.

기실 그는 조금 오만하게도 더 이상은 아서가 그에게 무언가를 보여 주길 꺼려 할 거라 생각지 못했다. 형제와의 정사, 그 정사의 뒤처리까지. 이미 일반적인 범주를 벗어난 모습을 다 보고 난 후였던 탓이었다.

“…….”

그러나 아서는 오늘도 그의 물음에 답을 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평상시 아서는 가브리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편이었고 쉽사리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다만 드물게 어떤 이유로든 심기가 불편해지면 그의 시선을 피하곤 했다. 딱 지금처럼.

물기를 머금은 속눈썹이 뒤엉킨 채 붉은 눈을 촘촘히 덮어 내렸다. 마치 그에게 이 속에 있는 것을 읽어 낼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듯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황금안에 한순간 냉기가 서렸다.

가브리엘은 굳이 아서를 더 재촉하려 들지 않았다. 아서가 그에게 답을 알려 주지 않으려 든다면, 직접 확인해 보면 될 일이었다.

거품을 묻힌 솔이 기다란 목덜미를 타고 내려왔다. 기사의 손길을 따라 거품 터지는 소리가 났다. 가브리엘은 좀 전 흉곽을 건드렸을 때 아서의 반응을 잊은 양 다시 덤덤하게 흰 살갗 위로 원을 그리며 훑고 지나갔다.

부드러운 솔이 조그마하게 튀어나온 돌기를 스치자, 다시금 아서의 몸이 움찔 튀었다. 이번엔 신음이 새어 나오지 않았지만 곧은 어깨가 경련하며 동요를 드러냈다.

그를 확인한 기사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전하. 불편해하는 이유를 말씀해 주지 않으시면, 이와 같은 상황이 반복될 것입니다.”

“…….”

“여길 건드리는 게 불편하신 겁니까?”

가브리엘의 손에 들려 있던 솔이 명백한 의도를 담고 움직였다. 가느다란 솔이 부러 달아오른 아서의 젖꼭지를 눌렀다.

하반신을 관통하는 저릿한 감각에 아서가 몸을 들썩였다. 욕조의 물이 크게 출렁거렸다. 당혹스러움을 드러낸 눈이 즉시 가브리엘에게로 향했다.

기사는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좀 전 가슴을 일부러 자극하던 손길이 착각처럼 느껴질 만큼 태연했다. 붉은 눈이 그를 꿰뚫어 볼 것처럼 바라보아도,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듯 평소처럼 웃어 보였다.

그는 아서에게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황태자가 불편함을 느끼는 까닭을 알아내려는 것일 따름이었다.

아서가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굳이, 내가 직접 말하지 않아도 그대는 이미 알아낸 것 같은데.”

시선을 내리깐 채로 아서가 중얼거렸다. 가브리엘이 아서의 몸을 건드릴 때마다 드는 감각은 불편함 따위로 치환하기 힘든 선명한 성감이었다.

카를로스의 섹스는 집요했고, 아서로 하여금 그전까지 전혀 의식조차 못 했던 신체 부위를 성감대로 인식하도록 강제했다. 이제 그는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가슴으로도 자극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 부위에 솔이 닿는 게 불편하십니까?”

“……그래. 그래서, 내가….”

“예, 말씀하십시오.”

일부 귀족은 시종을 그들의 성욕 처리를 위해 이용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사용인은 편리한 물건과 같았으므로 몸까지 섞는 경우는 드물어도 손을 빌리는 것 정도야 흔했다.

다만 아서의 경우는 예외였다. 그는 단 한 번도 시종을 그런 용도로 부려 본 없었다.

하물며 가브리엘은 아서의 시종도 아닌 카를로스의 기사였으니, 아무리 부끄러움을 모르는 아서라 해도 제 치부를 아무렇지 않게 털어놓기가 망설여졌다.

잠시간 머뭇거리던 아서가 결국 입을 열었다.

“…카를로스에게 알리지 않겠다고 맹세한다면 말하겠다.”

“예, 맹세하겠습니다. 카를로스 전하께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가브리엘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맹세했다.

“딱히 큰 믿음이 가진 않지만.”

아서는 조금 짜증 어린 눈으로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대가 몸을 건드리면, 기분이 이상해져.”

“…그건 제 손길이 불편하단 말씀이십니까?”

“그런 거랑은 조금 달라. 정확히는, 그대의 손길이 성적인 자극으로 느껴진다는 뜻이야.”

“…….”

예상치도 못한 직설적인 표현에 가브리엘이 침묵했다. 그는 잠시 할 말을 고르다 그저 되묻고 말았다.

“성적인 자극 말입니까.”

되묻는 말은 듣기에 따라 무미건조한 것 같기도, 혹은 화를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아서가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내 탓이 아니야. 전부 카를로스 때문이다.”

“…….”

“몸이 지나치게 예민해졌어.”

제 주군을 언급하자 기사는 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니 그대도 그렇게 알고, 나와 거리를 둬 줬으면 좋겠는데.”

“……그렇군요. 전하와 거리를….”

가브리엘이 말끝을 흐렸다. 속이 이상하리만큼 울렁거렸다.

이 생경한 감정을 그는 무어라 칭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감추어져 있던 아서의 눈이 이제 그를 똑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흉한 꼴을 보여 봤자 피차 난처해질 테지.”

“…….”

“하물며 그대는 내 시종도 아니지 않은가.”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가브리엘은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켜 냈다.

평소 황태자가 무엇을 원하든 전부 들어주고 싶었던 마음이 전부 거짓이었던 것처럼, 선명한 거부감이 차올랐다. 머리로는 황태자의 청을 받아들인 지 오래이거늘 정작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보다 더한 명을 받아도 잠자코 수용했던 기사였기에, 고작 ‘거리를 두어 달라’는 말에 머뭇거리는 스스로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조금은 놀랍기도 하였다.

본래 가브리엘은 일반적인 사람에 비해 감정의 높낮이가 낮은 편이었다. 타고나길 그러하였다.

누군가 가슴을 치며 오열하는 상황에도 어릴 적엔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곤 했다.

「리엘. 저들이 왜 눈물을 보이고 있는지 알겠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소중한 걸 잃은 자들은 일반적으로 저런 반응을 보이지. 이해가 가지 않느냐?」

「네.」

「그래…. 그렇구나. 괜찮다. 모르면 앞으로 차차 배워 가면 되는 것을.」

가문의 가주였던 가브리엘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비상식적일 정도로 메마른 성정을 한눈에 꿰뚫어 봤다.

그의 모친은 제 자식이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있을 때까지 철저하게 교육하였다. 타인의 고통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외워서라도 받아들이라는 식이었다.

우습게도 그 주입식 교육은 제법 효과를 발휘했다. 기쁨, 슬픔, 동정, 안타까움, 곤란함, 놀라움, 죄책감…. 성장하고 사회화를 겪으며, 가브리엘 역시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을 어느 정도 흡사하게 느끼게 되었다.

이제 겉으로 보기엔 그도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기뻐하고, 슬퍼하고, 아쉬워하고, 누군가를 동정할 줄도 알았다.

그렇지만 열정, 욕망, 탐욕 따위의 큰 해일과 같은 감정은 아직까지도 그에겐 불가해의 영역이었다.

「리엘. 가주의 자리가 탐이 나진 않느냐?」

「예, 어머니. 저는 가문을 나가 황실 기사가 되고자 합니다. 2황자 전하의.」

「그래. 혈육끼리 다툴 바에야 한 녀석이 양보하는 게 나을 테지…. 욕심 많은 네 누이에겐 반가운 소식이겠구나.」

「그렇습니까.」

그는 타인을 시기해 본 적도, 누군가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거나 애타게 갈구해 본 적도 없다. 소중한 것을 가져 본 적도 없고 빼앗겨 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무엇이든 쉽게 손에서 놓아 버렸다. 귀히 여기는 것이 없으니 다른 이에게 제 것을 내어주길 망설이지 않았다. 타인의 소유물을 탐내지도 않았다.

가브리엘이 불특정 다수에게 베푸는 선의는 실지 반사적으로 나오는 반응에 더 가까웠다. 객관적으로 옳지 않은 방향으로 가려 하면 스스로 제동을 거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는 그런 기사를 보고 이타적이고 훌륭한 기사의 표본이라 일컬었다. 하지만 타인에게 제 것을 떼어다 바치고도 개의치 않았던 건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가 진실로 선한 사람이었다면 애당초 카를로스의 옆에서 이토록 오랫동안 버텨 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꽤 어릴 적부터 가브리엘을 지켜본 카를로스는 때때로 그를 위선자라고 일컬었고, 가브리엘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악한은 아니지만 타고난 성품이 선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어느 때든 옳은 쪽을 선택하도록 철저히 주입받은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교육받은 대로라면 여기서 정답은 ‘황태자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조용히 물러난다’겠지만.

…어쩐지 황태자가 원하는 대로 따라 주고 싶지 않았다.

가브리엘은 짧게나마 곰곰이 생각했다. 하나 아무리 생각하고 또 고민해도 결론은 그대로였다.

아서에게 해를 끼치고 싶지 않고, 원하는 건 무리를 해서라도 들어줄 생각인데도 아서가 요구한 대로 그와 거리를 두고 싶지는 않았다.

산책 후 나른히 늘어진 아서를 씻겨 주는 것과, 적당한 착장을 골라 아서에게 입히고 벗기는 것. 제가 주는 음식을 얌전히 받아먹는 아서를 보는 것. 부드러운 백금발을 마음껏 쓰다듬는 것들은 기사가 일평생 겪은 경험 중 손에 꼽힐 만큼 즐거운 일에 속했다.

사소한 일에 트집을 잡고 짜증을 내면서, 정작 제가 주는 것은 거부하지 않고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아서를 보면 저도 모르게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졌다.

처음이었다. 어느 한 사람에게 애착이 생긴 건.

이전 날 불순한 꿈을 꾸고 아서를 그런 눈으로 보았던 것은 그의 실수였다. 좀 더 귀하게 대해 주고 싶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가브리엘은 기어코 요령껏 납득이 갈 만한 변명거리를 만들어 냈다. 제 손길이 불쾌하여 밀어내는 게 아니니, 곤란함을 해소하도록 돕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고.

“전하.”

그가 아서의 손목을 가볍게 끌어당겼다. 붉은 눈과 시선을 마주치고 의도적으로 조금 슬퍼 보일 법한 얼굴을 만들어 냈다. 황태자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곤 했다. 제 얼굴이 보기 싫었다면 그렇게 뚫어져라 바라보진 않았을 것이다.

“저는 전하께서 저를 불편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뜬금없다면 뜬금없는 말에 아서의 고개가 갸우뚱했다.

“불편해하지 말라고…? 제아무리 같은 사내라 하여도, 그런 꼴은 보기 싫을 것 아닌가.”

“싫지 않습니다.”

“…뭐?”

“싫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가브리엘이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는 이미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결론을 내린 후였다.

기사의 손이 아서의 흉곽, 그리고 명치를 타고 내려가 한 부근에 도달했다.

“잠깐….”

그제서야 가브리엘의 의도를 알아챈 아서가 그를 밀어내려 했으나, 가브리엘이 아서의 성기를 쥐는 것이 더 빨랐다.

옅은 색을 지닌 성기는 그의 것에 비해 깨끗했고 감촉 역시 부드러웠다. 혹여 남자의 성기를 만지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면 어쩌나 우려하였던 것이 무색하게 일말의 거부감조차 들지 않았다.

다행히 그도 성기의 어디를 어떻게 만져야 기분이 좋아지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황태자와 같은 성별인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손에 잡힌 살 기둥을 천천히 훑어 내리자 놀란 아서가 가브리엘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잡았다.

“리엘, 잠깐, 굳이 이럴 필요까진….”

“괜찮습니다. 며칠 전부터 참으신 것이 아니십니까?”

“…그냥, 읏, 혼자 해도…!”

예민한 곳을 건드리는 손길에 아서가 몸을 웅크렸다. 구속구에 힘을 빼앗긴 상태로는 가브리엘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 물론 밀어낼 마음도 없었다.

가브리엘은 아서의 수음을 도우며 돌아오는 반응을 하나하나 살폈다. 한 손으로 성기를 훑고, 다른 손으론 허리 부근을 만지작거렸다.

잠깐 흉곽 부근을 어색하게 쓰다듬던 손이 아서의 유륜을 건드렸다. 아서의 어깨가 흠칫 튕겼다.

아, 하고 무언가 깨달은 기색이던 가브리엘이 손끝으로 젖꼭지를 살살 건드렸다. 간지러울 만큼 조심스러운 손길에서 다른 사람의 몸을 성적인 의도로 만져 본 적이 없는 게 티가 났다.

“아….”

그 간지러운 자극을 견디고 있는 아서로선 애가 타 죽을 지경이었다. 어찌나 안달이 나게 건드리던지, 그대로 가브리엘의 멱살을 끌어당겨 덮치고 싶은 것을 참아 내야 했다.

의외로 성기를 어루만지는 손길은 능숙했다. 성욕이랄 게 없어 보이던 그 가브리엘도 자위는 하는 모양이었다.

기사가 자위할 때 자기 것을 이런 식으로 만지겠구나 싶으면서, 자연히 아서의 머릿속에 가브리엘이 수음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카우치에 기대앉아 성기를 꺼내 든 가브리엘. 흐트러진 차림을 한 기사가 핏줄이 두드러진 살 기둥을 훑는다. 성감이 차오를수록 금욕적인 눈매가 느슨히 풀린다. 핏줄이 선 자지가 단단해지고, 잘 짜인 복근도 서서히 조여들었다. 목덜미에 푸른 핏줄이 솟아오르고 살짝 벌어진 입에선 나지막한 한숨이….

“읏…….”

상상의 나래를 펼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서는 가브리엘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채로 파정했다. 긴장이 풀린 어깨가 간헐적으로 떨렸다.

고작 가볍게 손장난을 친 정도인데 오랜만의 사정이라 그런지 쾌감의 여운이 길게 남았다.

급작스럽게 달아오른 몸을 식히려 숨을 헐떡이고 있으니, 가브리엘이 우는 아이 달래듯 아서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아서를 끌어안은 기사는 진작에 이렇게 하였어야 했다고 지나간 날을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쾌감에 젖어 흐트러진 아서는 평소와는 또 다른 방향으로 어여뻤다.

서재에 색사와 관련한 서적이 있으면 좋겠는데. 경험이 없어 더 잘해 드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전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런 쪽으로는 미처 생각을 못 했던 터라….”

“…….”

“이후로는 좀 더 세심히 보필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사의 손에 파정한 후로 아서는 꾹 다문 입을 열 생각을 안 했다. 눈꺼풀을 반쯤 내리깐 채 기사의 가슴팍에 기대 숨을 고르고만 있었다.

가브리엘은 어딘가 넋이 나가 보이는 듯한 아서를 끌어안고, 제 손안의 백금발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

사정 후의 나른함에 늘어진 아서가 침대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췄다. 좀 전의 상황을 되감아 볼수록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사실 아서는 가브리엘이 그렇게 대담하게 굴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세상에 어떤 기사가 시중이라는 명목으로 수음까지 도와주겠냐만, 가브리엘이 아서를 성적인 대상이라기보단 돌봐 주어야 할 존재로 보고 있는 덕분에 일이 쉽게 풀렸다.

적어도 하루 정도는 고민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하루는 무슨.

가브리엘은 평소엔 상식적으로 군다 싶다가도 가끔 신기할 정도로 대범하게 굴었다.

아서와 카를로스 간의 정사에 생각보다 크게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았고, 아서의 아래에 손을 넣어 정액을 빼내는 데에도 마찬가지로 딱히 역겨워하지 않았다. 아서의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아서는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가브리엘을 바라보았다. 겉모습만 봐선 기사는 여전히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좀 전 아서의 성기를 쥐고 그런 짓을 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평소와 달라 보이는 점이라곤 부드럽게 풀려 있는 표정 정도가 유일했다. 아무래도 그는 기분이 꽤 좋은 듯했다. 좀 전 아서의 성기를 수음해 줄 때도 딱 저런 얼굴이었다.

기분 좋아 보이는 낯을 훑어보기가 무섭게 가브리엘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기사는 아서가 그를 감상하고 있으면 늘 눈을 마주 바라보며 ‘무언가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한 번도 빠짐없이 늘 그랬다.

“가브리엘.”

“예, 전하.”

이번엔 가브리엘이 말을 걸어오기 전에 아서가 먼저 운을 뗐다. 아무리 기분이 좋아도 제 대외적인 성격상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것은 이상했다.

“…그대는 기사로서 자존심도 없나 보지.”

비꼬는 말을 뱉어 내며 아서가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요새 아서가 어울리지 않게 너무 얌전히 지냈던 것 같으니 이쯤에서 한 번 찬물을 끼얹는 게 맞았다.

그리고 솔직한 말로, 그를 수음해 주면서 가브리엘은 전혀 발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금은 거슬렸다. 물론 그 차분한 태도에 좀 더 흥분되긴 했는데 막상 잠잠한 아랫도리를 확인하자 살짝 어이가 없었고, 재미있기도 하고, 오기도 생겼다.

아서가 대놓고 시비를 걸자 가브리엘이 곤란한 듯 웃어 보였다. 아서는 그가 곤란해 하든 말든 개의치 않고 따지듯 물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지?”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혔다면 죄송합니다.”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아서는 그의 사과에 오히려 더 불쾌한 투로 말했다.

“나의 기사가 되어 달란 말은 그리 단호하게 거절하고, 또 한 번은 나를 기만하더니 이제 와 이런 일까지 자처하는 이유가 뭔가? 정말 내 시종이라도 되겠단 말인가.”

“…….”

“아니면, 지금도 그저 나를 가지고 노는 것뿐인가.”

“전하. 그런 게 아닙니다, 전 그저….”

“지금처럼 뭐든 들어줄 것처럼 굴다가도, 카를로스의 말 한마디면 곧바로 돌아설 것을 모르지 않아.”

“…….”

무언가 변명을 하려던 기사가 침묵했다. 그는 아서의 비아냥대는 말을 차마 부정하지 못했다.

어떤 면에서 아서는 정확히 핵심을 꿰뚫어 보았다. 그가 황태자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이 십 년 넘게 이어온 카를로스와의 연을 끊어 낼 만큼이냐 묻는다면 ‘아직은 아니다’에 가까웠다.

한참을 망설이던 가브리엘이 결국 입을 열었다.

“…예. 전하께서 하신 말씀이 맞습니다.”

그가 진실을 입에 담자 침대보를 움켜쥐고 있던 아서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차라리 처음부터 끝까지 모질게 구는 게 낫지. 이딴 식으로 사람을 꾀어내는 게 아니라….”

입술을 잘근대던 아서가 낮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또 그러시면, 전하…. 입술을 다치십니다.”

손안의 서류를 내려놓은 가브리엘이 곧장 아서에게로 다가갔다. 다가가는 발걸음에 보기 드물게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그대가 알 반가. 내가 다치든, 말든.”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어떤 심정일지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천을 꽉 움켜쥔 손 위로 기사의 손이 내려앉았다. 가브리엘은 조금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아서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다 제 손으로 감싸 쥐었다.

“어찌해야 전하께서 마음을 풀어 주실지 모르겠습니다.”

“…….”

“전하를 우롱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부디, 제가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주십시오.”

그에 아서가 가브리엘에게 붙들린 제 손을 들어 보였다. 구속구가 걸린 손목이 기사의 눈앞까지 다가왔다.

“그럼 이걸 풀어 보든지.”

“…그건.”

“왜, 못 하겠나?”

핏기가 비치는 입술이 달싹이며 빈정거리듯 물었다. 기사는 이 순간 제가 한 기로에 서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뇨, 아닙니다.”

짧은 망설임 끝에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서 이곳을 벗어나지 않겠다고 맹세해 주신다면, 풀어 드리겠습니다.”

“좋아. 맹세하지.”

아서는 눈 한 번 깜빡 않고 맹세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 당연히 약속을 지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구속구가 풀린다면 기회를 보다 이곳에서 달아날 생각이었다.

아서를 가만히 바라보던 가브리엘이 제 목에 걸려 있던 것을 꺼내 들었다. 얇은 체인으로 이루어진 목걸이에 새까만 열쇠가 걸려 있었다. 기사의 차분한 얼굴엔 믿음 혹은 불신, 그 어떤 것도 엿보이지 않았다.

달칵. 구속구에 꽂힌 열쇠가 돌아가고, 영영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이던 것이 마침내 벗겨졌다. 이리도 쉽게.

강탈당해 있던 것들이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눈을 감은 아서가 마나를 활성화시키자, 감각이 확 트이고 전신 가득 활력이 차올랐다. 당장 어디로든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치솟았다.

아서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한동안 사용하지 못했던 근육이 저를 써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듯했다. 절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전하, 기분은 조금 풀리셨습니까?”

그러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가브리엘과 시선이 마주쳤다.

“…응.”

아서가 떨떠름하게 답했다.

구속구를 풀어 달라 요구한 건 자신이었으나 이렇게 쉽사리 풀어 줄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입에 발린 말이나 잔뜩 늘어놓으며 거절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기분이 풀리셨다니 다행입니다. 이제 잠자리에 드시겠습니까?”

“그래, …경은?”

“저는 좀 더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브리엘이 잠금이 풀린 구속구를 품 안에 넣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곧바로 자리로 돌아갈 것처럼 굴던 그는 무언가 미련이 남은 사람처럼 한동안 그 자리에서 미적거렸다.

“왜?”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서가 묻자 기사는 어딘가 아쉬운 얼굴로 물러났다. 이제는 다시 리엘이라고 불러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는데, 욕실에서 그를 애칭으로 불렀던 건 당황하여 그랬던 모양이다.

가브리엘이 서류가 쌓여 있는 테이블로 몸을 옮겼다. 아서는 어딘가 시무룩해 보이는 가브리엘의 모습을 보지 못한 척 시선을 피했다. 이제 막 구속구에서 풀려난 입장이라면 해방감에 휩싸여 다른 이를 살필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었다.

활력으로 가득 찬 몸이 당장이라도 이곳을 박차고 나갈 것처럼 들썩였다. 드디어 이곳을 벗어날 기회가 생겼다.

섣불리 움직여선 쓸데없이 경계심만 불러일으킬 테니, 당분간은 쥐죽은 듯이 지내는 것이 맞다. 며칠만 참다가 이 저택을 벗어나 도망치는 거다.

그러고 나선 다시 잡혀 와야지.

가브리엘이 보일 반응이 궁금했다. 화를 낼까, 또는 그럴 줄 알았다고 웃어넘길까.

맞은편의 기사는 단정히 앉아 서류를 살피고 있다. 아서를 경계하고 있는 게 아닌데도 조금의 빈틈조차 엿보이지 않았다. 가벼운 흥분감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

경박해 보일 만큼 온갖 귀중품으로 휘황찬란하게 장식된 침실이었다. 중년의 남자가 환희에 찬 미소를 짓고 있다.

“흐흐….”

남자의 입꼬리가 주욱 찢어져 올라가자, 크게 벌어진 입 가운데 뻘건 혓바닥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앞이 제대로 보일까 싶은 가느다란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늙은 남자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끝없이 황홀하기만 했던 꿈을 되새겼다.

그곳에서 남자는 제 손으로 황태자를 베어 넘겼다. 2황자의 최측근이 되어 신임을 얻고 승승장구하다, 마침내 꿈에 그리던 공작위에 올랐다. 걸음걸음마다 그를 칭송하는 찬사가 따라붙었고 번쩍이는 금은보화를 실은 육두마차가 그의 영지로 줄지어 들어왔다.

어찌나 황홀한 꿈이던지, 그는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아쉬워 탄식을 흘렸다. 남자는 자신이 제가 그 말로만 들었던 예지몽을 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제가 추구해야 할 청사진이 그려진 순간이었다.

흥분에 휩싸인 남자가 손을 뻗어 침상 한편에 있는 끈을 거칠게 당겼다.

눈을 몇 번 깜빡일 시간도 지나지 않아 문밖에서 대기 중이던 하인이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백작님, 부르셨습니까.”

고개를 숙인 하인이 벌벌 떨리는 양손을 공손히 마주 잡았다. 얼마 전 그와 같은 방을 쓰던 하인 하나가 백작의 부름에 즉각 달려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손목이 잘린 채 영주성에서 추방당했다.

겁에 질린 하인을 보고 늙은 백작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아랫것들은 한 번씩 본보기를 보여 주어야 기어오르지 않았다.

“샤르디를 불러와라. 당장.”

“예, 백작님.”

하인이 뒷걸음질로 백작의 침실을 벗어났다. 침실 문을 닫자마자 하인은 거의 뛰다시피 딘리 백작가의 사생아, 샤르디의 방을 찾았다.

하인의 초조한 얼굴을 본 샤르디는 하인을 앞질러 먼저 백작의 침실에 도착했다.

“백작님, 샤르디입니다.”

샤르디가 침실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백작의 목소리를 들은 즉시 안으로 바삐 걸어 들어갔다.

“급히 찾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샤르디. 네게 급히 맡길 일이 있다.”

백작이 제 손에 들려 있던 얇은 서신을 샤르디에게 넘겼다.

“이 서신을 2황자에게 전해라.”

서신을 전해 받은 샤르디가 둘뿐인 방 안임에도 주변을 살피듯 눈을 굴렸다. 백작을 따라 물밑에서 온갖 더러운 일을 저질러 왔지만 황실과 관련된 일은 그도 처음이었던 탓이다.

긴장감에 굳은 진갈색 눈동자가 방 안을 훑었다. 데굴 굴러가는 야비한 눈은 백작의 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닮아 있었다.

샤르디는 어디에도 듣는 귀가 없다고 확신하고 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이제 완전히 마음을 먹으신 것입니까?”

“보면 모르겠느냐, 멍청한 것. 막 예지몽을 꾸고 눈을 뜬 참이다. 예감이 좋아.”

다시금 황홀했던 꿈을 상기해 낸 백작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떤 이능도 없는 백작이 무슨 수로 예지몽을 꾸었겠냐만 백작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샤르디도 덩달아 웃음을 터트렸다.

지치지도 않고 한참을 웃어 대던 백작이 이내 음험한 미소를 띠었다.

“듣자 하니, 황태자가 저주를 받아 목소리를 잃었다는 소문이 떠돈다지?”

“안타깝게도 그건 헛소문으로 판명이 났다고 하옵니다. 단지 말수가 현저히 줄었을 뿐이라 합니다.”

“그래, 그랬군. 그거야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황도 내에 그러한 소문이 널리 퍼졌을 정도로 황태자의 위상이 떨어졌단 사실이다.”

“오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역시 백작님…!”

샤르디의 작위적인 찬사에도 백작은 거만하게 콧대를 세웠다.

백작의 기분이 좋아진 것을 확인한 샤르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헌데 백작님. 황후와 등을 돌리기엔, 황태자의 뒤에 있는 오를레앙 가문이 여전히 건재하지 않사옵니까?”

“오를레앙? 그걸 내가 몰라서 이러는 것이겠느냐? 걱정할 것 없다. 두고 보거라. 조만간 황후와 오를레앙가, 황태자까지 모조리 목이 잘려 나갈 테니.”

꿈에서 자신이 얼마나 용맹하게 황태자를 베어 넘겼는지를 떠올리며, 백작이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전 날 황태자의 비위를 맞추려 비굴하게 손을 비벼 댔던 과거 제 모습은 잊은 지 오래였다. 꿈속에서 백작은 제국을 구해 낸 영웅이었다.

감히 황족도 아닌 자가 황위를 차지하려 들다니, 내 그 꼴을 절대 관망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오로지 제 부귀영화를 위해 황후의 부정을 모르는 체했고, 그 뒤처리를 자진하여 떠맡았으며, 이제는 또 제 영달을 위해 황후를 배반하려 하는 것을 망각한 것마냥 백작은 갑작스레 정의감을 앞세우며 분노했다.

서신을 하루빨리 전달하고자 백작은 제가 아끼던 명마까지 샤르디에게 내주었다. 발이 빠른 샤르디는 2황자가 백작의 영지를 지나쳐 가기 전에 서신을 전달하는 데에 성공했다.

백작의 계획은 순풍에 돛을 단 듯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늦은 밤중, 상념에 잠긴 손끝이 탁상을 두드리고 있었다. 툭, 툭, 원목을 두드리는 희미한 소리가 끊어질 듯 말 듯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카를로스가 제 손에 들린 서신을 펼쳐 보았다.

[작은 태양에 관하여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수일 내로 2황자 전하를 뵈었으면 하오니…….]

짤막한 용건만 적힌 서신은 카를로스의 확인을 거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주로 기밀을 요하는 일에 쓰이는 마법이었다. 대상자가 확인을 한 후엔 얼마 뒤 사라지고, 잘못된 대상이 봉인을 풀면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러니 이것이 제대로 도달한 서신은 맞는 듯한데.

탁상을 두드리던 손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카를로스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곤 말했다.

“마노. 황도로 가는 경로를 변경한다.”

“예, 전하.”

고민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카를로스를 위시한 기사들이 백작령 부근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본래라면 볼모를 수도까지 호위하는 데에 우선순위를 두었을 테지만, 작은 태양이라는 네 글자가 카를로스의 발목을 붙잡았다.

카를로스는 거추장스러운 쌍둥이를 마노에게 맡기고 홀로 백작령으로 향했다. 딘리 백작이라면 황후의 최측근인 자였으니 함정일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적진에 단신으로 잠입하여 지휘관을 암살하는 건 카를로스가 애용하는 방식이었다. 적장의 막사도 아닌, 일개 백작의 침실 정도야 손쉬운 편이었다.

카를로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태평히 늘어져 코를 골고 있는 백작을 찾아냈다.

검집으로 자고 있는 것을 툭 건드리자, 백작이 번쩍 눈을 떴다.

“……허억…!”

한밤중 침상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인영을 발견한 딘리 백작이 뒤로 넘어갈 것처럼 숨을 들이켰다.

“사, 살려…!”

허겁지겁 침대 옆의 줄을 당기려는 손을 검집으로 내려쳐 제지했다. 그것만으로도 백작은 죽는다며 앓는 소리를 냈다.

“서신을 보냈더군, 백작.”

어딘가 귀에 익은 목소리에 딘리 백작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둠 속에 자리 잡은 붉은 홍채를 마주한 백작이 재차 숨을 크게 들이켰다.

새까만 머리칼에, 검붉은 눈. 틀림없이 2황자였다.

“화, 황자 전하…!”

백작은 두려움을 떨쳐 내려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어 냈다. 젠장할, 제가 황족이면 단가. 다른 멀쩡한 방법을 내버려 두고 이따위로 남의 침실까지 쳐들어오는 게 어디 있냔 말이다. 그는 볼품없이 떨리는 몸뚱이를 추스르며 오늘 밤 침실 호위들의 목을 죄다 잘라 버릴 계획을 세웠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듯도 했다.

“2황자 전하를 뵙사옵니다…. 뒤늦게 모습을 알아봐 송구합니다.”

놀란 마음을 가다듬은 백작이 간신히 인사를 건넸다.

“적잖게 놀란 모양인데, 이렇게 밤중 갑작스레 찾아든 건 사과하지.”

“아니옵니다, 전하. 경황이 없어 모자란 꼴을 보였습니다. 송구하옵니다.”

“그래…. 진정이 되었다면 이젠 거기서 좀 일어나겠나? 인사를 마치고도 거기 계속 누워 있을 작정은 아니겠지.”

2황자의 요구에 백작은 다시 여유를 잃고 허겁지겁 침상에서 벗어났다. 백작이 몸을 일으키자마자 카를로스가 본디 제 자리였던 것마냥 침대 위에 편히 자리 잡았다.

“말해라, 백작. 나를 여기까지 불러낸 연유가 무엇인가.”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카를로스의 작태에 비위가 상한 백작이었지만, 그는 주름진 손을 맞잡으며 연신 비굴한 웃음을 흘렸다.

“예, 전하. 그것이 다름이 아니오라… 흠흠….”

잃어버린 체면을 회복하기엔 이미 늦었음에도, 백작은 뒤늦게나마 의미심장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말끝을 흐렸다. 카를로스의 입매가 비딱한 곡선을 그렸다.

“백작. 내가 여기까지 와서 그대의 장난질을 보고 있어야 하나?”

“그, 그런… 아뇨, 아닙니다.”

지루한 얼굴로 검집을 어루만지는 2황자를 확인한 백작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백작은 어딘가 제가 상상한 것과 상황이 다르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한데 생각해 보면 당연한 상황이었다. 그는 아직까지 황후의 최측근으로 알려져 있으니, 2황자가 그를 죽이려 들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딘가 싶었다.

“황공하옵니다. 전하께서 여기까지 친히 발걸음 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읍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리겠사옵니다.”

백작에겐 확신이 있었다. 지금만 2황자가 저런 태도를 보일 뿐, 황태자의 출생에 관한 진실을 밝힌다면 상황이 다시 예상했던 궤도로 돌아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변덕스러운 황제와 달리 2황자는 철저히 효율을 추구하는 인사였다. 저에게 도움이 될 법한 자를 쉬이 내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큰 공을 인정받을 것이고, 2황자의 최측근이 될 것이다.

큼큼 목을 가다듬은 백작이 입을 열었다. 몇 번이고 되새겼던 것이라 긴장한 상황에서도 바로 말이 튀어나왔다.

“전하. 현 황태자는 황실을 우롱하고 있사옵니다. 그자는 오직 황후, 오를레앙 대공가의 핏줄만을 타고났을 뿐, 황실의 혈통이 아닙니다….”

“…흠.”

카를로스가 마저 말해 보라는 듯 턱짓했다.

“황태자는 황족의 피가 섞이지 않은 몸으로 황위에 오르려 하고 있습니다. 황태자, 황후, 오를레앙 가문이 전부 한패가 되어 반역을 도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은 한때 황후를 따랐사옵니다만…. 제국에 속한 몸으로서 차마 그들의 그런 만행을 내버려 둘 수 없어, 위험을 무릅쓰고 전하께 사실을 알리고자 하였습니다. 이제라도 전하께 진실을 말씀드릴 수 있게 되어 그저 안도하는 마음뿐이옵니다.”

백작이 넙죽 몸을 엎드렸다.

반역이라는 말을 꺼냈으니, 혹여나 황후와 함께 얽힐 경우 그의 목숨 역시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이것은 백작의 모든 것을 건 도박이었다. 만일 제 앞날에 관한 길몽을 꾸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뒤로 미루어졌을지도 모를.

“반역이라. 그대는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겠는가.”

다행으로 내내 심드렁해 보이던 2황자는 반역이라는 말이 나오자 서서히 흥미를 드러냈다.

“예, 전하.”

안심한 백작이 침실 깊숙한 곳에 숨겨 둔 금고를 열어, 새까만 상자 하나를 꺼냈다.

“혈통을 확인할 수 있는 마도구입니다. 오나드 왕실 내에서만 은밀히 이용되는 물건이옵니다만, 왕실 소속 마법사를 통해 어렵게 구해 냈습니다.”

정확히는 마법사의 가족을 납치해 얻어 낸 마도구였다. 마도구를 얻어 낸 뒤론 증거 인멸을 위해 관련인을 모두 죽였다.

“이것에 전하의 피를 한 방울 떨어트리고, 황태자의 것을 떨어트렸을 때 푸른색이 나온다면 제 말이 진실임을 알게 되실 겁니다.”

“준비를 철저하게 해 두었군.”

“예, 전하. 황후의 부정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황태자의 목이 잘려 나갈 것도 시간문제에 불과하지 않겠사옵니까. 신이 철저히 준비를 해 두었습니다.”

“반역은 그리 철저히 다루어져야 할 사안이지. 만일 그대의 말이 사실로 판명된다면, 그 공은 크게 치하하도록 하겠다.”

“황송하옵니다.”

늙은 백작의 얼굴 위로 화색이 돌았다. 백작이 다시 넙죽 몸을 엎드렸다. 그가 황태자의 실각을 언급하자 역시나 2황자에게서 곧바로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황태자와 2황자가 오래도록 대립해 왔다는 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널리 퍼진 사실이었다. 최근 들어 관계가 나아졌다 하지만, 그간 쌓여 있던 앙금이 전부 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카를로스가 검은 상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이 사실을 아는 자는 그대가 유일한가?”

“예, 지금으로선 제가 유일합니다.”

“내게 서신을 전달한 자는? 평민으로 보이진 않았다더군.”

“샤르디를 말씀하시옵니까. 그 녀석은 귀족 명부에도 오르지 못한 가문의 사생아입니다. 전하께서 관심을 주실 만한 것이 아니옵니다.”

“적은 공도 허투루 넘겨선 안 되는 법이지. 그자가 무사히 서신을 전하여 내가 친히 발걸음을 하지 않았나.”

“아이쿠, 그도 맞는 말씀이십니다.”

카를로스의 배포를 찬양하던 백작이 이내 제 사생아에 대해서 주절주절 쓸모없는 정보들을 털어놓았다. 속으로는 샤르디에게 갈 공까지 강탈할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살이 베일 것처럼 날카롭던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게 풀렸다. 한동안 평탄한 대화가 이어졌다.

잠시간의 대화 끝에 원하는 정보를 얻어 낸 카를로스가 빙긋 웃었다.

“다행이군. 백작이 제법 처신을 잘하였어.”

“하하. 과찬이십니다. 무거운 입은 모든 신하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 아니겠사옵니까.”

이제 완전히 여유를 찾은 백작이 싱글벙글 웃었다. 카를로스 역시 백작의 눈을 마주 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래, 쓸데없이 죽여야 할 자가 늘지 않아 다행이지.”

“하하…. 예, 그렇습니다.”

죽여야 할 자가 제 자신이라고는 전혀 생각 못 한 백작이 여유롭게 웃었다. 그가 너털웃음을 지은 순간이었다.

카를로스의 검이 검집째로 단숨에 백작의 심장을 꿰뚫고 지나갔다. 대뜸 들이닥친 비현실적인 광경에 백작은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가슴께가 타오르는 듯한 고통이 한발 늦게 따라붙었다.

“어…….”

백작의 시선이 제 가슴을 관통한 검으로 향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오러로 감싸인 검집이 흉곽을 완전히 가르고 들어갔다.

욕심으로 번들거리던 갈색 눈이 초점을 잃고 굳어졌다. 얼굴 위론 여전히 비굴한 웃음이 남아 있었다.

이윽고 생기를 잃은 초라한 몸뚱이가 힘없이 무너졌다.

백작은 외마디 비명조차 흘리지 못한 채 절명했다. 평생에 걸쳐 수많은 악업을 저질러 온 자의 최후라기엔 허무할 만큼 조용한 죽음이었다.

카를로스는 검집에 묻은 피를 무성의하게 털어 냈다. 피 묻은 검은 침대보에 닦았다. 원한을 산 곳이 셀 수 없이 많은 자이니 굳이 말끔히 흔적을 지워 낼 필요는 없을 터였다.

좀 전까지 대화를 나누던 이를 살해하고도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한 듯, 카를로스는 퍽 무심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다음 목적지는 아래층에 있을 백작의 사생아였다. 서신을 전하였던 끄나풀까지 처리하고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카를로스의 인영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기척을 숨긴 검은 그림자가 소리 없이 침실을 빠져나갔다. 바깥은 서서히 푸르스름한 새벽이 밀려오고 있는데, 내딛는 발걸음은 여유롭기만 했다.

***

아서는 가브리엘이 구속구를 풀어 준 뒤 며칠간은 맹세한 대로 얌전히 자리를 지켰다.

하루 한 번씩 산책을 나갈 때 손을 잡고 있는 것도 거부하지 않았고, 어디를 가든 가브리엘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 얌전한 모습을 지켜보던 가브리엘은 구속구를 풀어 주기를 잘하였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

그렇지만 둘만의 평화로웠던 시간은 고작 며칠뿐으로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한 날을 기점으로 아서가 탈출을 꾀하기 시작했던 탓이다.

기사의 감시망을 뚫고 도망가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서는 끝없이 탈출을 시도했다. 아서가 그렇게 나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라, 가브리엘은 잡혀 온 아서를 탓하지 않고 평소처럼 대했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넘어가려 했던 것이 잘못이었던 걸까. 아서는 수차례에 걸쳐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했고, 늘 얼마 가지 못해 가브리엘에게 붙잡혀 되돌아왔다.

그동안은 단지 그의 방심을 유도하려던 것인 양 평화로웠던 며칠 이후론 조용히 지나가는 날이 오히려 드물었다.

아서의 그러한 태도는 마치 가브리엘에게 이 불합리한 상황을 주지시키려는 것처럼, 혹은 그의 신경 줄을 잡아당겨 어디까지 버틸 수 있나 시험해 보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 한 번은 염치없이 아서의 맹세를 언급하였다가, 도리어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 했다.

「맹세라는 것이 참 가벼워. 이전 날 그대가 나를 속였던 것처럼 말이야.」

「…….」

「가브리엘. 그런 가벼운 맹세를 정말로 믿었다고 하진 않겠지.」

물론 기사는 아서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 그가 아서의 구속구를 풀어 준 건, 구속구가 없더라도 아서를 통제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러하였고.

카를로스가 귀환하기까지 십 일. 그 기간 동안 기사는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을 계획이었다. 기감을 저택 전체로 넓히고 쉼 없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은 정신적으로 상당히 피로한 일이었지만, 그 모든 걸 감수하고 아서의 구속구를 풀어 주기로 결정한 건 그 자신이었다.

가브리엘은 그에 대해 불만을 토로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전보다 훨씬 기운 넘쳐 보이는 아서를 보고 있으면 그 정도야 감수할 만하다 여겼다.

다만 문제는 늘 그렇듯, 항상 예기치 못한 순간 찾아오곤 했다.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 찰나의 순간. 며칠간 연이어 정신력을 소모한 것으로부터 촉발된 사고였다.

총 다섯 번에 걸친 탈출 시도가 불발에 그치고, 정원 한가운데서 아서가 그의 손을 거세게 뿌리쳤던 날이었다.

아서의 체향은 특정 향을 품고 있다기보단 바람처럼 희미한 존재감을 지녔는데, 가느다랗고 보잘것없는 향이 주변을 가득 채운 풀 냄새를 뒤덮어 버린 놀라운 순간이 있었다.

기감을 최대치까지 끌어 올렸던 탓이었나. 이미 수없이 겪어 익숙한 향이 그날따라 유난히 손에 잡힐 만큼 선명히 그려졌다.

기사는 그 찰나를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 채, 무엇인지도 모를 감정에 휩쓸려 간 적은 단연코 그때가 처음이었으므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의 안에 잠재되어 있던 것을 끄집어내 속살을 드러내도록 강제하였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는 아서의 위에 올라타 있었다.

「……이거, 읏, 놔….」

이성을 잃었던 것이 무색하게 그때의 기억만은 또렷했다. 아서는 그에게서 달아나고자 했고, 그는 그런 아서를 무도하게 제압했다.

아서가 차라리 어설프게 검을 배우다 만 수준이었다면 상황은 보다 온건히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서는 실전 경험이 부족한 편이라 하여도 갓 오러 마스터에 이른 수준의 기사였다. 그런 이의 필사적인 저항은 다소 위협적이고 성가신 면이 있었다.

정원 한구석이 엉망이 되고 나서야 기사는 아서를 상처 없이 제압하는 데에 성공했다. 물론 그건 일시적인 통제에 불과했다. 이대로 아서를 침실로 데려가 봤자,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같은 상황이 반복될 터였다.

하여 짧은 고민 끝에, 가브리엘은 품속의 구속구를 채우는 대신 아서의 발목을 부러뜨리기로 결론 지었다. 전하께서 구속구를 차는 걸 아주 싫어하시니 차라리 다리 한쪽을 못 쓰게 되는 편이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 마냥 흥분에 겨워 내린 결단은 아니었다.

발목을 부러뜨리면 아무래도 크게 화를 내시겠지. 그러면 기분이 풀릴 때까지 옆에서 다독여 드려야겠다. 불그스레한 복사뼈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어떤 식으로든 손안에 잡힌 아서를 놓아준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제 손 아래 있는 건 이미 지쳐 쓰러져 제압된 육체였다. 무방비하게 드러난 발목을 손아귀에 쥐는 건 간단했다.

손쉽게 발목을 움켜쥐자, 흙바닥에 뺨을 붙인 아서가 작게 발버둥을 쳤다. 놀란 아서를 달래듯 부드러운 다독임이 이어졌다.

「괜찮습니다, 전하. 크게 아프지 않으실 겁니다.」

가브리엘이 쥐고 있던 발목을 가볍게 토닥였다. 그 가벼운 다독임에 아서의 낯이 서서히 새파랗게 질렸다.

「…잠깐, 대체, 무슨 소릴….」

「금방 끝내 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전하께선 장애가 남지 않는 편을 선호하실 테다. 후에 탈이 나지 않으려면 강한 힘으로 깔끔하게 부러뜨려야 했다.

어느 정도 힘을 실어야 할지, 어떻게 해야 고통이 적을지 따위를 계산을 마친 가브리엘이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기어이 아서의 발목을 부러뜨리려 하던 때였다.

아서가 애원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고, 놀랍게도 그 순간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 눈이 뜨였다.

「…….」

그러고 나서 가브리엘은 갓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가만히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지 않아 눈앞의 광경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전하.」

기사는 뒤늦게서야 제가 무슨 짓을 저지르려 했는지 깨닫고 짧은 탄식을 흘렸다. 곧바로 손아귀의 힘을 풀었지만, 창백한 발목엔 이미 서서히 푸른 손자국이 올라오고 있었다.

***

이성이 돌아오고 나선 흙투성이가 된 아서를 안아 들고 옮겨 다시 깨끗하게 씻겼다. 스스로 지은 죄를 알고 있으니 내내 쩔쩔매며 아서의 기분을 풀어 주려 애를 썼음은 당연한 일이다.

아서를 수음해 주는 것 역시 그것의 연장이었다.

“상처가 난 곳이 쓰라리진 않으십니까?”

“…됐어. 어서 움직이기나 해.”

가브리엘이 한 번 ‘그런’ 시중들기를 자처한 뒤로 아서는 아예 노골적으로 그의 손을 자위 도구로 이용했다.

도망을 시도하다 붙잡혀 오면 화풀이처럼 그의 몸에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정작 황태자의 본래 의도와는 달리 당하는 가브리엘은 그 화풀이 과정을 은근히 만족스러워하고 있었지만….

“아, 조금만 더….”

아서가 몸을 들썩이며 재촉하자 그의 성기를 수음하던 가브리엘이 손에 보다 힘을 실었다.

아서의 머리칼 끄트머리에 아슬하게 맺혀 있던 물방울 하나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살짝 기울어져 있던 고개 탓에 벌어진 입 틈새로 물방울이 굴러들어 간다.

멀쩡한 욕조를 내버려 두고 욕실 바닥에 앉아 있음에도 맞닿은 살갗 때문인지 달아오른 몸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축축한 마찰음이 욕실을 채웠다. 아서는 가브리엘의 팔을 꽉 쥐고 헐떡였다. 자극이 겹겹이 쌓여 갈수록 팔뚝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젠 구속구가 없어 손아귀의 힘이 가볍지 않음에도, 가브리엘은 배려 없는 손길마저 기껍게 받아들였다. 그 탓에 기사의 몸엔 울긋불긋한 멍 자국이 가실 날이 없었다.

기실 멍이 들도록 살을 움켜쥐는 것 정도야 아무렇지 않다. 기사를 곤란하게 하는 건 정작 다른 곳에 있었다. 가브리엘이 아서에게 붙잡힌 채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

“하아, 왜.”

이미 아서의 눈매는 느슨히 풀려 있다. 동공이 뚜렷하던 눈은 물을 탄 것처럼 흐렸고, 뺨과 목덜미, 귓바퀴는 불그스레하게 달아올랐다.

평소의 예민해 보일 만큼 섬세한 눈매는 온데간데없었다. 미간만이 미세하게 찌푸려진, 독한 약에 취한 것처럼 몽롱해 보이는 낯이었다.

이런 때 황태자는 이제 갓 성에 눈을 뜬 아이 같았다.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이 거세된 듯 당혹스러울 정도로 본능에 충실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변덕스럽기 그지없었다. 더 해 달라 요구하다가도 제 볼일이 끝나면 그의 손을 쳐 내고, 본래의 냉한 모습으로 돌아가 버렸다. 언제 그의 손길을 필요로 했냐는 듯이.

“…….”

기사의 눈동자 위로 곤란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부르는 말에만 짤막하게 대답하였을 뿐, 아서의 신경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는 듯했다.

물에 젖은 백금발이 가브리엘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앞서 붉은 자국이 남아 있던 목 위로 다시 잇자국이 새겨졌다. 멍이 든 팔뚝과 비슷하게 기사의 목덜미 역시 아서에 의해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였다.

황태자는 흥분할 적마다 그의 목에 이를 세웠다. 근육 표면을 덮은 얇은 살가죽을 잘근잘근 깨물고 잇자국이 남을 정도로 아프게 깨물었다.

절정이 다가오면 몸을 밀착한 채 그의 손아귀 안에다 허리 짓을 했다. 카를로스가 하던 짓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흥분에 휩싸여 반쯤 본능적으로 하는 행위일 것이라 이해는 하였지만, 그것이 그에게도 미묘한 자극으로 다가오니 마냥 내버려 두어도 괜찮을지 망설여졌다.

쾌감에 면역이 없고 자제심이랄 것도 없는 이에게 그가 덩달아 휩쓸려 가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되었다. 점차 농도가 깊어지는 행위는 가브리엘의 일방적인 봉사라기보단, 두 사람의 숨결이 섞이는 색사와 더 닮아 가고 있었다.

그에 점차 곤란함을 느끼는 기사와 달리 아서 쪽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정말로 아서는 이 모든 행위를 시중의 일환으로만 여겼다.

제 기사와 형제가 이러고 있는 것을 알게 될 카를로스가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는 불 보듯 뻔했다. 아서가 이 모든 걸 시중으로 치부하니 카를로스의 명을 완전히 어긴 상황은 아니나, 분명 두 사람은 카를로스가 예상한 행위 이상의 것을 하고 있었다.

“무엇하나, 움직이지 않고….”

가브리엘이 성기를 수음하던 것을 멈추자 아서가 다시 그를 재촉했다. 목덜미에 핏기가 비치고 멍이 들 정도로 깨물어 대던 아서가 불쑥 물었다.

“아파서 그래?”

“…아뇨, 그렇진 않습니다.”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서가 그의 몸에 도장을 찍듯 자국을 새겨 두려 하는 건 오히려 기꺼운 일에 속했다. 그의 몸에 흔적을 남겨 두는 것이 마치 그를 향해 어떤 소유욕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물론 정작 아서는 그런 의도로 흔적을 남기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실제로는 화풀이에 가까운 행위였다.

“아프면 아프다고 해. 그러라고 하는 거니까.”

살갗 위로 이를 세워 잘근대던 아서가 중얼거렸다. 오늘 있었던 사고를 떠올린 듯 조금은 자존심이 상한 어조였다.

오래 카를로스와 비교를 당했기 때문인지, 황태자는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도 자존심을 건드리면 꼬리 밟힌 고양이처럼 이를 드러내었다.

고백하자면 그 점이 귀엽게 느껴져 괴롭혀 보고 싶다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딱히 자신이 누군가를 괴롭히는 것을 즐기는 편이라 생각하진 않았는데.

심술궂은 말을 내뱉다가도, 어느 선을 넘는다 싶으면 은근히 그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귀엽기만 했다.

배알도 없냐 비꼬는 말에도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만일 그랬다간 아서가 더 짜증을 낼 것 같아 그저 웃고 말았지만 말이다.

목덜미에 와 닿는 숨결이 간지러웠다. 가브리엘은 저도 모르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조금 아프네요.”

“조금?”

“많이 아픈 것도 같습니다.”

그의 말에 아서는 도리어 인상을 찌푸렸다. 엄살처럼 들리는 답변이 불만인 것 같았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가브리엘은 아프지 않은 게 아니라, 굳이 몸의 통증을 표정으로 과장되게 드러낼 필요를 못 느끼는 것뿐이었다.

“가브리엘.”

그때 딴 곳을 쳐다보던 아서가 입을 열었다. 그가 잠시 머뭇거리나 싶더니 이어 말했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예, 전하. 말씀하십시오.”

“분명 좀 전에, 내 발목을 부러뜨리려고 했지?”

단순히 사실을 확인하는 듯한 태도였음에도 가브리엘은 잠시간 답하기를 망설였다. 아서의 물음에 사실대로 답해 주어야 할지, 거짓이라도 아니라고 답하여야 할지 고민되었다.

“…글쎄요.”

잠시 망설이다 뱉은 말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무어라고 답을 해야 아서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을지 알 수 없었다.

만일 마지막에 아서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더라면, 그때 이성이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발목을 부러뜨렸을 것임은 분명했다.

“내 발목을 쥐고선 아프지 않을 거라고 했잖나. 네가 아픈 걸 못 느끼니 남도 그럴 거라 생각했나 봐?”

생각할수록 점점 화가 나는지 아서는 그가 했던 말을 언급하며 씨근거리고 있었다. 오늘 있었던 일이 상당히 분했던 모양이었다. 아서의 머리칼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던 가브리엘이 짧은 고민 끝에 해야 할 말을 골라냈다.

“…무언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감히 전하의 옥체를 상하게 할 수 있을 리가요.”

“오해는 무슨, 웃기지도 않, 읏….”

가브리엘이 아서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고자 몸을 숙여 연한 색의 돌기를 입에 담았다.

젖꼭지를 입 안에 넣어 굴리는 것보다 조금 아프게 깨무는 걸 더 좋아하는 아서였다. 간지럽다고 투덜거리는 말에 고민하다 이를 세웠더니 아서는 오히려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너, 하아, 이런 식으로 대강 넘어가려고….”

불만스레 가브리엘을 내려보던 아서가 얄미우리만큼 고와 보이는 은발을 손에 쥐었다.

힘을 실어 두피가 당길 만큼 머리칼을 움켜쥐어도 기사는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도리어 보란 듯이 혀를 내밀어 젖꼭지를 길게 쓸어 올렸다.

아서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가브리엘이 한 손으로 질척해진 성기를 쓸어 올리다, 몽글몽글 액이 새어 나오는 입구를 엄지로 비볐다.

며칠 사이 기사가 전보다 훨씬 능숙해진 터라 아서에게서 돌아오는 반응도 사뭇 달라졌다.

“아….”

뭉근히 번지는 쾌감에 아서가 가브리엘을 추궁하고 있던 것도 잊고 몸을 들썩거렸다. 기사는 고개를 기울여 아서의 반응을 살폈다. 밭은 숨을 내쉬는 아서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나 어쩌다 시선이 닿은 곳에 가브리엘 자신이 있었을 뿐 그를 보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흐트러진 낯이 참으로 미려했다. 이지를 잃고 흐려진 붉은 눈이 어찌나 달아 보이던지, 입 안에 넣고 굴리면 단맛이 날 것 같았다.

아서는 그의 손길만은 불쾌하지 않다고 하였다. 아마 지금으로선 황태자에게 그런 과분한 이야기를 들은 이는 가브리엘 자신이 유일하리라 짐작했다. 사람과 닿는 것을 싫어하는 분이니 어쩌면 이후로도 쭉 그러하지 않을까, 그런 유치한 생각도 잠깐 들었다.

멍이 든 발목이 문득 시야에 들어왔다. 푸르스름한 손자국. 기사는 단 것에 이끌린 벌레처럼 홀린 듯이 그것을 눈에 담았다.

스스로를 묶어 두고 있던 틀에서 한 발짝 벗어났던 순간은, 여전히 그의 뇌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가슴께를 중심으로 번지던 만족감 역시도.

제 아래에 깔려 무력하게 헐떡이는 몸을 보고 느낀 희열은 섬뜩할 만큼 선명했다. 그의 통제 아래에 들어온 아서를 보고 느낀 감정은 명백한 포만감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래서 인간이 보잘것없는 감정에 초라하게 휘둘리고,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구나.

“읏, 하아….”

이어지는 자극을 견디다 못해 아서가 파정했다. 숨을 몰아쉬느라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가브리엘은 아서가 진정할 수 있도록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가브리엘….”

“예, 전하.”

가브리엘. 몇 차례 더 반복된 부름에도 기사는 귀찮은 내색 없이 답을 했다. 기사의 그런 태도가 만족스러웠는지 아서는 몇 번 더 장난처럼 가브리엘을 불렀다.

상처가 남은 기사의 목덜미 위로 아서가 입술을 붙였다. 이를 세워 깨문 것이 언제였냐는 듯 아프지 않게 입술로 상처를 빨아들인다.

귀 끝이 간지러워지는 묘한 자극에 가브리엘이 아서의 뒷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는 제가 통제하지 못하는 감각들, 이를테면 성감과 같은 것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아서가 주는 것이기에 기껍게 받아들이려 하는 것뿐이었다.

「그래, 그거. 불쌍하고 갈 데 없는 것들 돌봐 주고, 너 없이 못 살겠다 매달리게 만드는 것 말이다. 그리해서 형님이 달아나고 싶은 순간에도 네 손을 붙잡게 만들어라.」

「어려운 명도 아닐 테지. 원래 네가 곧잘 하던 짓이지 않나.」

제 주군이 그리 말하였을 땐 단순히 비꼬는 말이겠거니 흘려들었건만…. 어쩌면 카를로스가 가브리엘 자신보다 그의 본성을 잘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이제 그는 황태자가 그의 도움 없이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 되어도 안타깝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쩌면 조금은 그 사실을 반길지도 몰랐다.

드러내어선 좋을 것이 없는, 썩 꺼림칙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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