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 3장 (4/15)

기만의 밤 2권

3장

어느 나른한 오후, 백색궁으로 붉은 머리칼의 기사가 찾아왔다. 품 안에는 상반신 크기와 흡사한 꽃다발을 든 채였다.

난데없는 기사의 방문으로 조용하던 황태자궁에 작은 소요가 일었다. 아서 또래의 여성이 꽃다발을 들고 궁을 찾은, 생전 처음 일어난 상황에 시종이 어색한 얼굴로 기사를 집무실까지 안내했다.

안내를 하다 말고 시종이 힐다 로렌을 힐끔 쳐다보았다. 기사 힐다는 차갑고 정적인 분위기의 백색궁과는 불과 얼음처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격식 없는 차림새로 보아 황태자 전하와는 상극인 성격으로 보였는데, 주변을 둘러보는 모양새만큼은 이곳에 자주 들렀던 사람처럼 자신만만했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간 힐다 로렌이 아서에게 각 잡힌 인사를 건넸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어서 와, 힐다 경.”

아서는 책상 위의 서류를 한쪽으로 밀어내고 힐다를 반겨 주었다.

자리에 앉으라는 듯 손짓하던 그가 힐다의 품에 안긴 거대한 꽃다발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힐다가 백색궁을 찾은 목적을 알고 있던 아서였으나 그도 저 독특한 선물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저걸 구애의 선물이라고 고른 건가. 의식하지 않아도 시선이 저절로 거대한 꽃다발로 향했다.

“꽃이… 예쁘군.”

“예. 전하를 생각하면서 고른 꽃들입니다.”

힐다가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서를 생각하며 골랐다는 말대로 꽃은 아서가 지닌 빛깔인 노란색, 빨간색, 흰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척 봐도 공을 들여 묶은 다발은 모양이 조화롭고 훌륭했다. 그 크기가 양팔로 끌어안아야 할 만큼 컸다는 게 문제였을 뿐이다.

“마음에 드십니까?”

“음, 그대의 정성이 느껴지는군. 고마워.”

잠시 답할 말을 고르던 아서가 감사 인사를 건넸다. 힐다는 쑥스러워하며 제 볼을 긁었다.

“별말씀을요.”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칼의 기사, 힐다 로렌.

눈앞의 기사는 최근 카를로스의 약혼자로 거론되고 있는 자였다.

힐다는 ‘대외적으로는’ 로렌 가문의 후계 다툼에서 밀려난 뒤 카를로스와 약혼을 하게 되는, 소설 속에서 나름 비중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지금은 카를로스의 명을 받고 아서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중이었다.

아서가 힐다의 꽃다발을 전해 받고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물은 감사히 받지. 이리로 주겠어?”

“예, 전하.”

힐다는 격식을 차리려는 건지 한 손에 거대한 짐이 있는 상황에서도 용케 아서의 손을 끌어다 입을 맞추었다. 그 모습이 어딘가 괴상쩍어 보여서, 아서는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삼켜 내야만 했다.

“…이 꽃은 집무실에 장식해 두어야겠군.”

“영광입니다, 전하.”

“집무실이 화사해지겠어. 그대 덕분이야.”

대체 카를로스는 무슨 생각으로 힐다에게 이런 꽃다발을 전해 준 걸까. 아서가 꽃을 좋아한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백색궁의 정원이 온갖 꽃으로 가득 차 있긴 하지만, 그건 아서의 취향이라기보단 정원사가 열정을 발휘한 결과였다.

“제 덕이 아니라 전하께서 계신 모든 곳이 그렇습니다. 전하께서 꽃보다 더 아름다우시니까요.”

힐다는 늘 그랬듯 진지한 목소리로 엉뚱한 말을 늘어놓았다. 상당히 느끼하고 부담스러웠다. 아서는 속내를 숨기고 쑥스러운 척 볼을 붉혔다.

“고맙군. 헌데 꽃보다 아름답다는 건 나보단 그대에게 더 어울리는 말이야.”

아서가 그리 말하니 구석에 없는 사람처럼 박혀 있던 부관 에드윈이 기겁을 하는 게 느껴졌다.

힐다는 습관적으로 뺨을 긁적였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아니, 맞아.”

“뭐…. 전하께서 그러하다고 말씀하니, 그렇다고 치겠습니다.”

“그래. 고맙군.”

아서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어차피 진심이 아니고 피차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서도 이런 느끼한 연기쯤이야 하루 종일도 할 수 있었다.

“참, 전하. 말씀드려야 할 게 하나 있는데요.”

그때 힐다가 꽃다발을 전해 주느라 잊고 있던 또 다른 용건을 떠올렸다.

“어머니께서 안부를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전하의 초대에 응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하시더군요.”

“로렌 백작은 여전한가 보군.”

“예, 여태 다른 영지로 출타해 계십니다.”

“아쉽네. 곧 연회에서 백작과 인사를 나눌 수 있나 했더니.”

힐다가 속한 로렌가는 예로부터 의술과 약재에 조예가 깊어, 가문의 인재들이 뭇 가문의 의뢰를 받고 타 지역으로 출타 가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나 이번 대 가주는 돈독이 올라 제국 전역을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있는 듯했다.

“송구합니다. 어머니께는 차후에 직접 안부를 전해 드리겠사옵니다.”

“그리해 준다면 고맙겠어.”

아서가 짐짓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로렌가는 오래전부터 황후의 가문, 오를레앙 대공가의 휘하에 있는 가문이었다. 오를레앙 대공이 제 언니인 황후를 지지하고 있으니 지금은 자연스럽게 황태자파에 속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아서와 로렌가는 같은 세력에 몸을 담고 있단 뜻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힐다 로렌이 황태자 아서가 아닌 2황자 카를로스의 약혼자로 거론되고 있냐면… 설명하기가 좀 복잡했다.

오래전부터 로렌가는 태어난 순서에 관계없이 가장 뛰어난 자가 가주가 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그 전통에 따라 힐다는 그의 오라비를 제치고 백작위에 오를 예정이었다.

그러나 작위를 받기 직전, 불운하게도 황후의 입김에 의해 승계식이 무산되고 말았다. 힐다 로렌에게 반골 기질이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힐다는 어느 때든 특유의 건들거리는 태도를 그다지 감추지 않았고, 그 모습이 황후에겐 몹시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황후는 힐다를 밀어내고 힐다의 오라비 쪽 손을 들어 주었다.

그에 힐다는 대담하게 황후에게 거래를 제시한다. 그가 이번 일로 황후 폐하께 앙심을 품은 척 2황자파에 넘어가 첩자 역할을 하는 대신, 백작위를 승계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것이었다.

‘만약 허가해 주지 않는다면 오라비를 죽여서라도 작위를 차지할 것인데, 본인은 제 핏줄을 죽이고 싶지 않으니 부디 너그러이 봐달라’는 간청 아닌 간청은 덤이었다.

아마 힐다의 그런 당당한 모습이 황후의 심기를 또다시 건드렸을 테지만, 이하 생략하고.

결론적으로 황후는 힐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혹여 꼬리가 잡혀도 힐다를 쳐 내고 그의 오라비로 하여금 작위를 승계하게 하면 그만이었으니, 황후로서는 크게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이었다.

하나 힐다는 앙심을 품은 ‘척’ 한다고 한 것과 달리 실제로도 황후에 대해 큰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2황자파에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결과적으로 힐다 로렌은 이중 첩자가 되었다. 카를로스 측의.

어떻게 보면 황후가 힐다의 반골 기질을 제대로 알아본 셈이다.

전부터 로렌 가문은 귀족가 중에서도 이단아에 가까웠다. 그들은 뛰어난 의술을 이용해 부유한 귀족들을 등쳐 먹곤 했는데, 그런 대담한 짓을 하면서도 로렌 가문이 이때까지 건재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약재뿐만 아니라 독을 다루는 데에도 특출나게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로렌 가문의 비전으로 내려오는 ‘고요의 숨결’이 지닌 위명이 대단했다. 무색무취에다가 독살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대상자를 며칠 동안 서서히 죽음으로 이끈다 하였다. 설령 증상을 눈치챘다 하더라도 이미 중독된 이상 치유하는 게 불가능한 맹독이었다.

독에 강한 내성이 있는 마스터 역시 그 독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목숨을 곧바로 잃지는 않으나 내부를 진탕시켜 힘을 못 쓰게 만드는 것까지 가능했다.

원작의 아서는 마스터에게까지 치명적인 독, ‘고요의 숨결’을 이용해 카를로스를 암살할 계획을 꾸몄다. 카를로스에게 독을 먹인 뒤, 꿈을 이용해 카를로스를 어떤 장소로 유인하여 암살을 시도하려 들었다.

그 과정에서 로렌가의 협조가 필요했던 원작의 아서는 힐다 로렌을 황후 자리를 미끼로 유혹했다.

당연히 결과는 죄다 실패였다.

아마 힐다 로렌이 황태자 쪽의 첩자였고, 아서가 로렌가의 독을 손에 쥐는 데에 성공했다면 카를로스도 어느 정도 타격을 입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힐다는 이미 카를로스 측으로 완전히 넘어간 지 오래였다.

그리하여 원작의 아서는 카를로스에게 제대로 덜미를 잡힌다. 몽마의 혼혈이라는 사실이 들통나고, 황실을 우롱했다는 죄목에 황족을 시해하려 했다는 죄목까지 더해 사형 선고를 받는다. 뒤이어 황후와 대공가도 함께 줄줄이 엮여 들어가 모조리 효수당한다.

그때 아서는 차마 묘사조차 하기 싫은 잔혹한 형벌을 받을 예정이었으나, 가브리엘의 도움으로 고통 없이 조용히 생을 마감하게 된다.

거기까지가 원작 속 아서의 이야기였다.

“힐다 경, 종종 카를로스와 연무장을 찾는다고 들었는데.”

아서는 꽃다발을 끌어안은 채 조심스럽게 꽃잎을 만지작거렸다.

“예. 종종 2황자 전하께서 가르침을 주곤 하십니다.”

“혹 나와는 어떤가?”

“대련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저는 언제든 좋습니다.”

힐다가 흔쾌하게 동의했다.

이제 아서는 원작의 흐름을 살짝만 비틀어, 제가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가게 만들 생각이었다.

눈앞의 힐다와 가까워지는 일 또한 그 계획의 일환이다.

조만간 아서는 힐다에게 ‘고요의 숨결’의 제작을 의뢰할 것이다. 원작과 동일한 장소로 카를로스를 유인하려 시도할 테지만 원작처럼 꿈을 이용하진 않는다.

즉 꿈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은 채, 카를로스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던 것만 들킬 심산이었다.

이미 카를로스의 마음을 얻어 내는 데엔 성공했다. 아서는 매일 밤 카를로스의 꿈을 드나들면서 어느 순간부터 확신하게 되었다. 자신이 카를로스를 암살하고자 시도한다 해도, 카를로스는 그를 죽이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진실을 알게 된 카를로스는 분명 아서의 목숨이 아닌 다른 것을 취하려 들 터였다. 그거야말로 아서가 원하는 바였다.

얼마 전부터 카를로스 역시 힐다를 이용하여 아서를 시험하고 있었다. 아서는 카를로스가 깔아 둔 덫에 모르는 척 걸려들어 가기만 하면 되었다. 차후 힐다의 입을 통해 아서가 꾸민 암살 계획이 카를로스에게 전달되기만 하면, 모든 그림이 완성된다.

카를로스가 마침내 두 번째 배신을 당하고, 형제의 작태에 치를 떨며 그를 가두고 있던 최소한의 도덕마저도 깨부숴 버리는 그 순간. 아서가 고대해 마지않던 그 순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의식하지 않아도 입가에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이제는 그날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서의 맞은편에 앉은 힐다는 뭔가 골똘히 궁리하는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요, 전하. 오르코 호수에 가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들어 본 적은 있네.”

“요즈음 그곳에서 뱃놀이를 하는 게 그리 좋다고들 합니다. 함께 가 보는 건 어떠신지요?”

“물론 좋지.”

아서는 당연히 좋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날짜와 시간을 정하기까지 두 사람의 대화는 시원시원하게 이어졌다. 둘의 목적이 일치하기 때문에 가능한 흐름이었다.

각자 원하는 바를 얻어 낸 두 사람은 기분 좋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힐다 경, 조만간 로렌가로 서신을 보내겠네.”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기다리겠다는 힐다의 말에 아서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힐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눈매를 접는 게 누가 봐도 노골적인 유혹처럼 보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거짓된 구애를 하는 중이었다.

이윽고 힐다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집무실을 떠났다. 아서도 마주 웃으며 힐다를 배웅했다. 인기척이 점점 멀어져갔다.

제 자리로 돌아온 아서가 품 안의 꽃다발에 천천히 고개를 묻었다. 코끝에 부드러운 꽃잎이 닿았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농도 짙은 향기가 뇌리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어지러울 만큼 진한 꽃향기를 음미하면서, 아서는 짐승처럼 달려들던 꿈속의 카를로스를 떠올렸다.

‘아프, 칼…. 윽, 조금만 천, 천히….’

‘하아…. 형님.’

카를로스가 아서에 대한 감정을 자각했지만 세상이 뒤집힐 일은 없었다. 대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여럿이 한 방향으로 노를 젓고 있으니 모든 계획이 급물살을 타듯 흘러갔다. 머지않아 모든 게 달라질 터였다.

“전하, 꽃다발은 어찌 처리할까요? 우선은 큰 화병을 구해 와야 할 것 같습니다만….”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부관이 물었다.

“아니. 꽃은 말려서 여기로 가져다 놓도록 해. 빠짐없이 전부 다.”

“그러기엔 좀 많… 예, 전하. 그리하겠습니다.”

“조심해서 다루도록.”

“예, 전하.”

아서가 안고 있던 꽃 더미를 부관에게 건넸다. 그런 뒤 그는 창틀에 손을 짚고 바깥 정경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스며든 햇살이 손등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주변이 꽃향기로 가득했다. 짙은 향은 여운이 길어, 품에 안고 있지 않은데도 여전히 코끝에 맴돌았다. 꽃을 딱히 좋아하진 않지만 카를로스가 그를 생각하면서 손수 준비한 선물이니까 이대로 버리는 건 조금 아깝게 느껴졌다.

화병에 두었다간 금방 시들어 버릴 테고, 햇볕에 말려다 오래오래 보관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보통 때면 서류 넘기는 소리와 낮은 대화 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던 2황자의 집무실이 떠들썩했다. 말 많은 어느 기사 한 명 덕분이었다.

붉은 머리의 기사, 힐다 로렌이 집무실 내 가브리엘의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서 보고를 가장한 수다를 떨어 대고 있었다. 힐다의 바로 옆에 있던 마노는 제 귀를 틀어막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는데 물론 힐다는 전혀 개의치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카를로스 전하, 큰일 났어요.”

“…또 무엇이?”

힐다의 다급한 목소리에 카를로스는 익숙한 듯 덤덤하게 물었다.

“어쩌죠. 황태자 전하께서 진짜로 저한테 푹 빠진 것 같습니다.”

“그럼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닌가.”

“아니, 잘된 일이긴 한데 말이죠. 들어 보십시오. 오늘 전하께서 저더러 꽃보다 아름답다는 소리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분이 저한테 그런 느끼한 소리를 했다는 말입니다.”

힐다 로렌은 카를로스의 말은 들은 체도 안 하고 엄살을 떨었다.

“어떡하지…. 받아 줄 수 없는 마음이 안타깝네요. 저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좋은데 그렇다고 전하의 성별을 바꿀 수도 없고….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난감한 척 과장스럽게 찌푸린 얼굴은 큰일 났다는 사람치고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은근한 자랑처럼 들리는 엄살은 가만 내버려 두니 한도 끝도 없이 이어졌다. ‘아니 뭐 같이 있다 보면 눈은 즐겁긴 한데 역시 자기는 여자가 더 좋다’느니 떠들어 대는 것이, 말과는 달리 오히려 이 상황을 몹시 즐기고 있는 기색이었다.

한창 정보를 얻어 낼 겸 잠자코 듣고 있던 카를로스가 더는 들어 줄 필요가 없다고 판단 내린 뒤, 힐다의 말을 끊었다.

“당분간은 그대로 내버려 둬.”

“예에? 왜요? 전하, 기분 안 나쁘세요? 명색이 제가 전하의 예비 약혼자인데…!”

힐다가 과장된 어조로 물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봐도 무척 기분이 상할 만한 상황이었는데, 카를로스는 신기할 만큼 기분 나쁜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

“글쎄. 가능하다면 지금보다 더 가까워지는 게 좋겠군. 그래야 더욱 일이 쉬워질 테니.”

“예? 진심이세요? 그럼 전하의 위신이 떨어지지 않을까요?”

힐다는 새롭게 모신 주군이 꽤나 마음에 든 상태였기에 어울리지 않게 카를로스의 평판을 챙겼다. 카를로스는 쓸모없는 걱정이라며 한 귀로 흘려들었다.

“그 점은 경이 신경 쓸 부분이 아닌 것 같군.”

“그런데 두 분 말이죠.”

홀로 근심스럽다는 듯 침음한 힐다가 말했다.

“얼마 전 만찬장에선 그리 사이좋게 붙어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전하께서 황태자 전하의 옷매무새까지 만져 주며 허물없이 구시길래, 제가 뭘 잘못 본 줄 알았습니다. 역시 황족들은 겉보기로만 판단해선 안 되는군요. 저같이 결백한 사람이 어쩌다 이렇게 음모와 모해가 판을 치는 곳에 껴서…….”

“힐다, 그만.”

다시 시작된 수다에 카를로스가 힐다를 제지하고 나섰다.

“예에. 입 다물겠습니다.”

“이만 나가 봐. 황태자 측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면 곧바로 보고하고.”

“예,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이래 봬도 제가…….”

“그만. 이만하면 충분해.”

힐다가 몇 마디 더 할 기세이자 카를로스가 재차 축객령을 내렸다. 아쉬워 입맛을 다시던 힐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말 야박하시네. 그럼 조만간 또 뵙겠습니다, 전하.”

힐다 로렌은 보기와 달리 각이 잡힌 인사를 건네고 집무실을 나섰다. 그렇게 드디어 조용해지나 싶었을 때, 문 사이로 고개만 빼꼼 내민 힐다가 말했다.

“아, 전하. 꽃다발은 무사히 전해 드렸습니다. 아주 좋아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

카를로스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힐다가 다시 꾸벅 인사하곤 문을 닫았다.

집무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부관 마노가 긴 한숨을 흘렸다. 힐다에게 자리를 빼앗긴 채 구석에 앉아 있던 가브리엘도 지친 얼굴로 웃었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간 것 같았다.

“…와, 드디어 가셨네요.”

마노가 작게 중얼거렸다. 마노의 뒤를 이어 카를로스 역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황후가 힐다가 아닌 힐다의 오라비를 백작위에 올리려 했는지, 카를로스는 원치 않게 통감하는 중이었다. 저 방정맞은 성격으로 어찌 로렌가의 후계자 자리를 꿰찬 건지 보면 볼수록 놀라웠다.

인페르노 제국에선 보편적으로 첫째가 1순위 승계 서열을 가지게 되었다. 힐다 로렌처럼 손위 형제를 제치고 승계권을 차지하게 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니 기사 힐다는 저렇게 방정맞아 보여도 꽤 재능 있는 인사라 할 수 있었다.

로렌가의 첫째 알터 로렌은 신중하고 조심성 많은, 다르게 말하면 소심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두 황족 사이에서 첩자 노릇을 하는 강심장 힐다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졌다.

뒷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관점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아도 힐다와 알터는 도무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로렌가의 오누이는 제법 서로를 아끼는 듯싶었다.

반면 황가의 형제, 아서와 카를로스는 어떠한가.

아서와 카를로스는 의외로 닮은 점이 많았다.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나, 매사에 냉소적인 성품 같은 것들.

고유의 분위기 또한 흡사했다. 아서 쪽이 좀 더 까탈스럽고 예민한 느낌이었지만, 두 형제 모두 황족 특유의 분위기를 가졌다.

특히나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그들은 더욱 닮아 보였다. 아서와 카를로스를 처음 보는 이라 할지라도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을 때면 둘 사이의 관계성을 쉽사리 추측해 내곤 했다.

그러나 로렌가의 사이좋은 오누이와는 달리, 카를로스와 아서의 관계는 언제나 위태로웠다.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을 때 아서는 늘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정작 카를로스와 닿는 것은 기피했다. 다른 이들과 불가피한 접촉을 할 때는 능숙히 감정을 감추면서, 유독 그와 닿으면 불편함을 숨기지 못했다.

그 외에도 아서가 미처 감추지 못한 것은 많았다. 이따금씩 드러나는 열등감 가득한 눈동자도 종종 그의 신경을 건드리곤 했다. 지난 과거 동안 익숙히 보았던 것이기에 스치듯 지나가는 찰나의 것이라 할지라도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카를로스는 제 의심이 사실이 되지 않기를 바랐으나, 그 바람이 무색하게 모든 단서는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아서가 이전과 달라진 건 더욱 교묘히 제 감정을 숨길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뿐이다. 그 가면 뒤에 숨기고 있을 열등감과 증오심은 오히려 더 깊어졌음을 그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결과적으로 바뀌는 건 없었다.

아서가 조금은 변했듯이 그 역시 달라졌다. 어릴 적의 그는 아서가 손을 놓으면 그대로 버림받아야만 했던 것과 달리, 지금의 그는 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아서의 손을 강제로 붙잡아 둘 수 있었다.

무력하게 버려졌던 그때의 아이와 지금의 그는 달랐다. 멍청하게 매달리기만 하다 버려졌던 과거를 재현하지는 않을 것이다. 형님이 그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도망가는 뒷덜미를 낚아채서라도 돌아보게 만들면 되었다.

카를로스는 꽃다발을 안아 들었을 아서를 그려 보았다. 색색의 꽃 무리와 그보다 화려한 백금발의 사내. 보나 마나 그림처럼 잘 어울릴 게 분명했다.

아서가 그가 놓은 덫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아직까진 확신이 들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눈앞의 미끼를 낚아채거나, 혹은 함정임을 직감하고 한발 물러날 수도 있겠다.

어느 쪽이든 카를로스는 상관치 않았다. 아서가 무엇을 선택하든 그 결과는 그리 크게 달라지지 않을 터였다.

버릇처럼 그의 시선이 창 너머로 향했다. 메마른 눈동자 속에 어두워진 정원의 모습이 담겼다.

***

힐다는 한쪽 가슴에 손을 올린 채 황태자에게 묵례했다.

“존귀하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야, 힐다 경.”

힐다의 정중한 인사에 황태자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제 인사치레는 그만할 때도 됐어. 앞으로도 그대를 자주 보아야 할 텐데, 그때마다 이럴 수는 없지 않은가.”

“예, 그럼 사양 않고 편히 인사드리겠습니다.”

힐다가 냉큼 대답하자 아서가 재차 웃음을 터트렸다. 힐다는 유려하게 휘어지는 눈매를 보며 함께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웬일로 황태자가 몸소 백색궁의 입구까지 힐다를 마중 나왔다. 한동안 힐다가 어머니의 일로 바빠 얼굴을 못 비추었더니 조금 애가 탄 듯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인사라는 평가를 받던 황태자는 그와 상극일 정도로 자유분방한 힐다를 제법 마음에 들어 했다.

물론 더 정확히 말하자면 힐다가 아니라 힐다의 가문에서 만들어 낸 맹독, ‘고요의 숨결’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만.

“그동안 어찌 지냈나? 뱃놀이 이후로 얼굴을 보지 못해 섭섭했어.”

“그간 많이 바빴습니다.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오셔서 정신이 없었거든요. 어찌나 저를 부려먹으시는지.”

최근 힐다의 어머니 로렌 백작이 수도로 돌아온 일을 언급하자 황태자의 표정이 미세하게 달라졌다. 가문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매번 저런 반응을 보이니 힐다로선 그가 어디에 마음이 팔려 있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백작이 돌아왔단 소식은 들었지. 이제는 좀 여유가 생겼나?”

“아뇨, 아직입니다. 전하께서 궁으로 초대해 주신 덕분에 잠깐 도망쳐 나왔습니다.”

“저런…. 그나마 다행이로군.”

아서가 다행이라며 웃었다. 이어서 힐다와 눈이 마주치자 쑥스러운지 눈을 피했는데, 그 모습을 본 힐다는 내심 감탄사를 흘렸다. 저건 연기인 걸 알고 봐도 진짜 같았다.

미리 대강의 상황을 귀띔받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었다면 그는 여태까지 착각을 하고 있었을 테다.

백색궁의 입구에서 연무장까지는 금방이었다. 햇볕이 내려앉은 연무장은 여전히 정갈하고 깨끗했다. 힐다는 구석의 그늘에 자리를 잡고 천천히 몸을 풀었다.

“전하, 오늘도 살살 부탁드립니다.”

“경은 매번 그 소리를 하는군. 엄살이 심해.”

“마스터 앞에선 엄살을 좀 부려야 살아남지 않겠습니까.”

힐다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평소처럼 적당히 몸을 풀고, 종자에게서 대련용 검을 전해 받았다. 연무장의 중앙으로 걸으며 힐다가 자신의 몸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겉보기엔 여유로워 보였으나 실은 손동작 하나하나를 의식하는 중이었다.

오늘은 절대 긴장을 놓으면 안 되는 중요한 날이었다. 황태자가 낚이지 않고는 못 배길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던지는 날이었으며, 마침내 황후를 엿 먹일 첫걸음을 떼는 날이었다. 일말의 실수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그와 황태자와의 대련은 늘 형식적으로 치러졌다. 검술 교본에나 나올 것 같은 대련은 지루하고 또 지루했다. 그렇지만 서로에게 잘 보여야 하는 상황에서 진심으로 죽을 둥 살 둥 달려드는 건 이상하니까 참았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형식적인 대련은 늘 그랬듯 심심하게 끝이 났다. 뽀송한 이마를 괜히 스윽 닦아 낸 힐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하.”

“실례하겠습니다.”

무언가 말하려던 그때, 종자가 검을 수거하기 위해 다가왔다. 당연한 절차였는데 긴장한 나머지 그만 잊어버리고 있었다. 힐다는 고맙다며 종자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당황한 종자가 도망치듯 구석으로 사라졌다. 아서는 황당한 얼굴이었다.

“왜 어린애를 괴롭히고 그러나.”

“귀여워서요. 그보다 전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만.”

그간 힐다는 이런 식으로 2황자 측의 정보를 황태자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몇 번의 접촉 끝에 힐다가 전한 정보 대부분이 진실로 판명되자, 황태자는 마치 힐다에게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굴었다.

“중요한 사안인가?”

“듣기에 따라 중요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요.”

“그리 말하니 궁금해지는군.”

궁금하단 말과 다르게 차분한 투였다.

오랜만에 본 황태자는 조금 지쳐 보였다. 요사이 일에 치여 산다는 게 사실인지 잘생긴 낯엔 피곤한 기색이 서려 있다. 눈 밑에 어린 그림자가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기실 힐다가 황태자의 부름에 고분고분 응하는 건 저 얼굴 탓도 없지 않아 있었다. 타고난 재능도 그렇고 가장 중요한 얼굴도 그렇고, 황태자 역시 주군으로 섬기기 부족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몹시 안타깝게도 황태자는 잘난 얼굴에 비등할 만큼 큰 결점을 가졌다. 보통 때는 제법 유능한 지도자처럼 보이던 아서는 제 동생과 관련된 일에선 살짝 맛이 가버렸다.

“아무래도 주변을 물리는 게 좋겠지.”

“예, 부탁드립니다.”

아서가 가벼운 손짓으로 주변의 시종 전부를 뒤로 보냈다. 잠시 뒤, 두 사람 주위에 음성을 차단하는 투명한 막이 생겼다. 마나를 다루는 이라면 필수적으로 익히는 기술 중 하나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눌 때 써먹기 좋았다.

입 모양이 읽힐 것을 우려해 힐다는 손으로 하관을 덮은 채 말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갔다.

“2황자 측에서 병력을 모으고 있는 정황을 발견했습니다.”

생각보다 가볍지 않은 내용에 아서의 눈빛이 달라졌다. 동요한 듯 떨리던 눈동자가 차갑게 굳었다.

“병력이라. 그 규모는?”

“아직까지 그 규모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무척이나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밖에는. 저도 최근에서야 알게 된 사실입니다.”

“그렇군.”

아서가 작게 중얼거렸다.

“…설마하니, 전쟁이라도 일으킬 생각인가.”

힐다의 답을 바라기보단 혼잣말처럼 흘린 소리 같았다.

후계 다툼을 위한 전쟁. 이것이 2황자가 황태자에게 던진 미끼였다. 이후 황태자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카를로스의 행보도 달라질 터였다.

최근 황제는 건강 약화를 핑계로 황태자에게 조금씩 권한을 내려 주고 있었다. 늘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다니던 아서 역시도 이제는 황족다운 여유를 갖추게 되었다. 황태자가 서서히 지도자다운 면모를 드러내 보이기 시작하자, 중립을 지키던 귀족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서 역시 객관적으론 황제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2황자 측에서 위기감을 느끼고 움직일 법도 하다… 라는 게 힐다가 내세울 근거였다.

“기어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군.”

“…….”

“왕국과의 전쟁이 끝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았다. 승전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던가.”

“무수히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카를로스의 종속 역시도 제국의 신민이지. 나는 더 이상 애꿎은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아.”

“옳은 말씀이십니다, 전하.”

애꿎은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는 건 힐다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그러나 황태자가 힐다의 앞에서 이런 식으로 서두를 던지는 건, 쓸데없는 희생을 막고자 하는 목적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저건 제 형제이자 강력한 정적인 2황자를 암살하기 위한 명분이었다.

고작 병력을 모으고 있다는 정보를 전했을 뿐이건만, 황태자는 카를로스가 빌미를 던져 주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이를 드러냈다.

힐다를 의심하기는커녕 도리어 카를로스를 죽일 명분이 생겼음을 기꺼워하는 모습이었다. 정보의 진위 여부를 확인할 의향은 전혀 없는 듯했다. 황태자에게 중요한 건 말의 진위 여부가 아닌 카를로스를 죽일 명분 그 자체일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힐다는 속으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예상대로의 결과인데도 썩 유쾌하진 않았다.

무언가 마음이 급해졌는지 황태자는 서둘러 자리를 마무리 짓고자 했다. 평소 같으면 한참 더 인사치레를 주고받았을 것을 지금은 몇 마디 대화로 그쳤다.

“…그럼 힐다 경, 조만간 연통을 보내겠네.”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행이야. 내게 그대가 있어서.”

황태자의 눈매가 곱게 접혔다. 눈꼬리가 사르르 접히는 것이 만개한 꽃처럼 아름답다. 보석처럼 영롱한 눈동자가 신뢰와 애정을 담뿍 담아 힐다를 바라보았다. 누가 보아도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얼굴이 분명했다.

힐다는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2황자 전하 역시 인간미 없게 잘생기긴 했지만 역시 그는 백금발의 황태자 쪽이 좀 더 마음에 들었다. 만일 황태자가 여자였다면 속고 있는 줄 알면서도 지금쯤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주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남몰래 입맛을 다신 힐다가 황태자의 얼굴을 귀한 작품을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언제 봐도 눈만큼은 즐겁다. 조만간 이 얼굴을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

“황태자가 로렌가에 의뢰한 ’고요의 숨결’입니다.”

힐다가 자그마한 유리병을 들고 장난스레 흔들었다. 검지와 중지로 쥐고 달랑달랑 흔드는 모습에 카를로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 장난기는 도통 잠잠해지는 법이 없었다.

“마법적 처리가 되어 있으니 병이 깨질 우려는 안 하셔도 됩니다. 오러를 두른 검으로 내려찍어야 금이 갈 법한 강도입니다.”

로렌가의 약병이 웬만해선 깨트릴 수 없을 만큼 단단하다는 건 이미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사실 유리의 강도보다는 공과 사를 가리지 않고 날아갈 듯 가볍게 구는 힐다의 태도가 문제였지만, 카를로스는 별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행실이 어떻든 일 처리만 확실하다면 굳이 문제 삼을 생각은 없었다.

“형님에게 가기 전에 빼돌린 건가?”

“예. 제가 직접 전해 드리는 편이 안전하지 않겠냐고, 재빨리 들고 튀었습니다. 요사이 황태자와 친밀히 지내고 있는 터라 의심 살 일은 없을 겁니다.”

“음.”

“일자는 건국제 둘째 날. 장소는 황성 외곽 청림궁이라던가….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합니다만, 그날 전하를 그곳으로 불러들이려 할 것입니다.”

“…….”

청림궁. 어린 날 카를로스가 유폐되어 있던 궁이었다. 몇 년 만에 들은 그 이름에 카를로스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과연. 그곳이라면 나를 불러내기에 적절한 장소지.”

청림궁은 그가 태어난 직후부터 머무른 곳이면서, 유년 시절의 추억이 쌓여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 시절의 기억은 여전히 카를로스에게 어떤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아직까지도 카를로스는 아서와 함께 했던 나날들을 그림처럼 또렷하게 기억했다.

「칼, 햇볕이 따갑네. 이리 와.」

그때의 아서는 그늘 한 점 없이 깨끗한 미소를 짓던 소년이었다. 시들어 가는 덩굴 틈바구니에 선 백금발의 소년이 어찌나 눈이 부시던지, 그는 종종 넋이 나간 채로 그 자리에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곤 했다.

「아….」

「왜 이렇게 넋이 나갔어? 빨리 따라와. 손잡고.」

유독 기억에 선명히 남았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때의 투명한 햇살과 그들을 둘러싼 풀 내음, 희게 빛나던 소년의 뺨. 그 모든 것이 고스란히 그의 머릿속에 남겨져 있었다. 그리울 때면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도록.

만일 아서가 그때 그 시절을 언급하며 그를 청림궁으로 불러들였다면, 카를로스는 망설였을지언정 결국엔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가슴 한쪽이 서늘하게 식었다. 그들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아서에게는 카를로스를 뒤흔들 유용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 새삼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황태자에겐 ’고요의 숨결’을 희석한 독액을 전달하겠습니다. 혹여나 음독하게 되더라도 마스터에겐 큰 효능이 없을 농도입니다. 여기, 이게 진짜고. 이건 가짜입니다.”

“육안으로는 전혀 구분이 되지 않는군.”

지독한 독성을 품고 있음에도 힐다의 손에 들린 액체는 향이 없는 투명한 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예, 로렌가의 혈족이 아니라면 육안으로 분별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더군다나 보통 사람한텐 당장은 비슷한 효능을 보이기 때문에 구분이 힘들 겁니다.”

“…형님께서 좋아하시겠어. 안전하게 전해 드려.”

“예, 전하.”

힐다가 씨익 웃었다. 계획이 무사히 진행되고 있는 게 만족스러웠다.

힐다는 카를로스 역시 그럴 거라 생각하고 동의를 구하듯 쳐다보았지만, 예상과 달리 카를로스의 얼굴엔 조금의 웃음기도 없었다. 그가 머쓱한 표정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

“…를로스.”

전보다 서늘해진 바람이 검은 머리칼을 스쳤다. 정원 한편의 벤치에 앉은 카를로스는 무표정했지만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눈의 초점이 흐렸다.

십여 년간 방치되어 있던 청림궁 주변은 아서의 지시로 인해 언제 황량한 모습을 하고 있었냐는 듯 완벽하게 탈바꿈했다. 작은 궁전은 칙칙하던 색깔을 벗고, 얼마 전 카를로스가 힐다를 통해 전달한 꽃다발 속의 꽃들로 채워졌다. 카를로스는 그 화사한 꽃 무리 틈바구니에 잠겨 있었다.

“칼.”

아서가 카를로스의 눈앞에서 손등을 흔들었다. 그제야 정원을 응시하던 눈동자가 아서에게로 돌아갔다.

“…형님.”

“먼저 도착해 있었네.”

눈이 마주치자 아서의 눈매가 자연스레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아서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먼저 도착해서 준비해 두려고 했는데, 네가 더 빨랐군. 좀 더 서두를 것을 그랬나 봐.”

“아뇨, 저도 좀 전에 도착했습니다.”

“조금만 앉아 있어. 금방 준비될 거야.”

“예.”

카를로스는 아서가 시킨 대로 그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정원 한편에선 시종 둘이 테이블을 설치하고 있었다. 다른 두 명은 간단한 요깃거리가 담긴 바구니와 티 세트를 들고 옆에서 대기했다.

카를로스의 시선이 시종의 손에 들린 반투명한 물병으로 향했다. 일시는 건국제 둘째 날. 장소는 황성 외곽 청림궁.

병에서 시선을 뗀 그가 달라진 정경을 둘러보았다. 건국제까지는 아직까지 며칠의 기한이 남았다. 저것에 독을 탔을 확률은 높지 않았다.

“오랜만이지, 여기는.”

아서가 카를로스의 옆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 적색궁으로 거취를 옮기고 나선 처음이군요.”

근처를 지나가기만 해도 기분이 가라앉곤 했기에, 카를로스는 부러 청림궁의 존재를 잊고 살았다.

“나도 그랬어. 잊고 지내다 최근에서야 떠올렸지.”

“그러셨습니까.”

아서는 뒤늦게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장소인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카를로스가 익숙한 꽃들을 훑어보며 물었다.

“…여기, 정원의 꽃은 형님이 고르신 겁니까?”

“아니. 직접 고른 건,”

아서가 고개를 젓다 말고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아아, 얼마 전에 받은 꽃다발을 정원사에게 보여 주긴 했지.”

“그렇습니까.”

“어때? 너는 좀 더 점잖은 걸 좋아할 것 같긴 한데.”

“아뇨, 그게 아니라 혹시…….”

뭔가 물으려던 카를로스가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꾸며 놓으니 예전 모습이 어땠는지도 모르겠군요.”

카를로스는 시종들이 테이블을 설치하는 모습으로 눈을 돌렸다. 예전 모습을 모르겠단 말은 물론 거짓이었다. 어디를 보든 과거가 겹쳐 보여, 잠깐만 방심하면 금세 그 시절의 기억에 빠질 것만 같았다. 아마 아서도 그걸 의도하고 이곳으로 그를 불러들였을 것이다.

부산하게 움직이던 사용인들이 전부 물러났다. 완벽하게 세팅된 흰 테이블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정원 한구석에 놓였다.

형제는 나란히 테이블로 걸어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풀 소리가 났다. 그늘막을 치지 않아도 괜찮을 만큼 날이 시원했다.

“오랜만의 여유야. 너도 그렇겠지.”

의자에 기대 앉은 아서는 평소보다 나른해 보였다.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는 모습이 지쳐 보였다. 많이 피곤한지 평상시 꼿꼿하던 자세마저 흐트러져 있었다.

“일이 많은가 봐요. 힘들어 보이십니다.”

전승식 이후 한동안 여유롭게 지내나 싶던 아서는 유례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최근 들어 황제궁에서 주관하던 업무까지 백색궁으로 몰린 탓에, 제대로 된 체계가 잡히기 전까진 전처럼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이 김에 조금 쉬세요. 방해하지 않을 테니.”

“그 정도까진 아니야.”

“쉬세요. 얼굴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나직이 말한 카를로스가 아서의 이마를 쓸어 올렸다. 부스스하게 이마를 덮고 있던 금빛 고수머리가 사르륵 뒤로 넘어갔다.

천천히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데, 아서는 피곤한 얼굴로 가만히 눈만 감았다. 이제 저를 건드려 대는 손길에 조금은 익숙해진 듯 보였다.

얼마간 잠자코 기다리던 아서가 제 이마에 올려진 손을 가볍게 밀어냈다.

“이제 괜찮으니까, 너도 쉬어.”

“예.”

카를로스는 평소와 다르게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그게 의외였는지 아서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웬일로 내 말을 들어주고.”

“피곤해하니까, 더 괴롭힐 생각은 없습니다.”

“…괴롭힌단 자각은 있었네.”

아서가 중얼거리자 곧바로 타박이 뒤따랐다.

“그렇다고 눈앞에서 투덜거려도 봐준다는 건 아닙니다.”

“…….”

아서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목을 적셨다. 잠깐 사이 해가 저 너머로 떨어지고 있었다. 불그스름한 노을빛이 그들의 머리칼을 짙게 물들였다.

아서의 잔이 점점 비어가는 동안 카를로스의 것은 처음 준비된 그 모습 그대로 방치되었다. 아서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이거, 안 마셔? 네가 좋아한다는 차라고 들어 따로 구해 온 건데.”

미간을 살짝 찌푸린 아서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역시 네 입맛은 여전하군. 내 입엔 달아.”

“그런가요.”

건성인 대꾸가 돌아왔다. 카를로스가 손끝으로 찻잔의 손잡이 부분을 덧그렸다. 수상한 물건을 관찰하는 것처럼 잔을 살짝 기울였다.

담겨 있던 액체가 쏟아지기 직전까지 아슬아슬하게 기울어졌을 때, 그가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한 모금 삼키고는 잔을 테이블보 위로 내려놓았다.

“어때?”

아서가 기대에 찬 눈으로 물었다.

“나쁘진 않네요. 조금 더 달면 좋을 것 같긴 합니다만.”

“여기서 조금 더?”

아서도 단 걸 좋아하는 편이나 카를로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카를로스가 아무렇지 않게 먹는 것을 보고 따라 먹었다가 혀끝을 마비시킬 것 같은 진한 단맛에 놀란 것만 여러 번이었다.

“여전하구나. 그래서 어릴 때도 매번 사탕을 한 움큼씩 챙겨 주었지.”

“예, 뭐.”

시큰둥하게 답한 카를로스가 테이블 위에 놓인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애당초 그가 사탕을 좋아한 게 먼저가 아니고, 아서가 매번 사탕과 초콜릿을 챙겨 준 게 먼저였다. 먹다 보니 길들여져 나중에는 점점 더 단 걸 찾게 되었다.

“예전부터 그랬지. 바구니에 사탕이란 사탕은 죄다 쓸어 담고선.”

아서가 먼 과거를 회상하듯 허공을 바라보았다.

“기억나? 예전 건국제 때, 내가 네 궁으로 도망쳐 왔던 날.”

“…글쎄요. 형님께서 제 궁으로 온 게 한두 번이 아니었던지라.”

카를로스는 별 고민 없이 부정했다. 그러나 이 또한 거짓인 말이었다.

아서의 물음을 들은 즉시 그는 그날 아서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그에게 몇 개의 사탕과 젤리를 선물해 주었는지, 몇 번을 웃어 주었는지, 그를 몇 번이나 어떤 목소리로 불렀는지를 떠올렸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아서가 듣는다면 소름 끼쳐 할 만큼 카를로스는 아서의 사소한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다.

생각이 많을 때 손등을 긁는 버릇, 책상을 툭툭 두드리는 버릇, 식사를 하기 전 물을 한 모금 마시는 습관, 검을 쥐는 손 모양, 몸에 있는 점의 개수와 위치, 황태자궁에서 청림궁까지 오는 데에 드는 발걸음 수 같은 것들.

당시 그의 세상엔 아서가 전부였기에 의식하지 못한 사이 머릿속에 새겨진 것들이었다. 첫 대련 때 아서를 이길 수 있던 것도 그가 아서의 움직임을 전부 외워 버렸던 탓이 컸다.

“넌 전부 잊어버렸나 봐.”

아서는 그의 속도 모르고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땐 어렸으니까요.”

“하긴, 그렇지….”

아쉬운 듯 말끝을 흐린 아서가 이내 조금 상기된 어조로 말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해의 건국제 때를 말하는 거야. 폐하께선 내가 또래 친구를 만들길 바라셨지만, 죄다 내 눈치만 살피고 있으니 지루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귀족가의 아이들은 연회 때 보통 또래끼리 만나게 되었다. 아서는 그 자리를 잘 지키고 있다가도 한 번씩 지루함을 못 견뎌 달아나 버리곤 했다.

“바구니에다 사탕을 쓸어 담고는, 서둘러 네게로 갔던 기억이 나. 오늘 이곳으로 오는데 그때 생각이 부쩍 나더군. 물론 오늘은 사탕이 아니라 차를 가져왔지만 말이야. 아, 초콜릿도.”

초콜릿을 녹여 먹는 중인 카를로스를 보고 아서가 말을 덧붙였다. 뿌듯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정말 영락없이 진심처럼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말이야, 카를로스.”

“예.”

“이번 건국제는 단둘이서 보내는 게 어때? 여기 청림궁에서.”

가볍게 묻는 목소리였지만 눈동자 깊은 곳에선 거절을 당할지 모른다는 초조함이 엿보였다. 진실을 몰랐더라면 저 모습에 뭣도 모르고 우쭐거렸을지도 몰랐다.

카를로스는 혀를 씻어 내듯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넘겼다. 달아야 할 초콜릿에서 끈적거리고 씁쓸한 맛이 났다.

“…단둘이라.”

중얼거린 동시에 찻잔을 검지로 툭 밀어냈다. 반 이상 남은 액체가 곧 넘칠 것처럼 찰랑거렸다.

그가 눈을 들어 청림궁을 바라보았다. 군데군데 빛이 바랜 궁성이 노을빛에 눅눅히 잠겨 들고 있었다.

“뒤따르는 이들을 전부 따돌리는 게 쉽진 않을 텐데요. 형님도, 나도.”

“아무래도 그렇긴 하지. 그럼….”

“혼자 빠져나오려면 적어도 둘째 날은 돼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머뭇거리는 말을 끊고 묻자 언제 침울했냐는 듯 아서의 얼굴 위로 화색이 돌았다.

“나는 언제든지. 그럼 둘째 날, 이곳에서 보는 걸로 할까.”

“좋아요. 이러니까 꼭 옛날로 돌아간 것 같고… 나쁘지 않네요, 형님.”

“그렇지?”

근래 들어 가장 들뜬 목소리로 아서가 말했다.

어느새 노을이 지고 궁성 곳곳에 설치된 마법등에 하나둘 불이 들어왔다. 형제는 밤이 되기 전에 궁으로 돌아가자며 몸을 일으켰다.

카를로스는 풀밭에 놓여 있던 바구니에 아직 남은 초콜릿을 담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아서가 준비해 왔다던 차까지 전부 챙기고는 청림궁을 나섰다.

***

건국제 하루 전날. 축제에 대한 기대로 수도 전체가 시끌벅적하게 들뜬 와중 적색궁의 집무실만은 다른 세상인 것처럼 조용했다.

“이거로군요.”

가브리엘이 무표정한 눈으로 화병을 바라보았다.

힐다는 황태자의 암살 시도에 관해 알리며, 꽃에다 한 방울의 독을 떨어트렸다. 로렌가의 독은 고작 그것만으로도 제힘을 충분히 증명했다.

잎사귀에 투명한 물방울이 닿고도 생기 있는 모습을 유지하던 꽃은 그 줄기를 갈라 보니 안쪽이 새카맣게 녹아 있었다. 줄기를 잘라 내자마자 갓 피어나 푸릇하던 잎이 마치 사막의 열기 아래 방치된 것처럼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졌다.

해독을 위해 개발된 정화용 꽃이 이 정도이니, 일반적인 꽃이었다면 독이 닿는 순간 썩어 내릴 것이었다. 그 명성에 걸맞은 효능이었다.

이토록 지독한 독성을 품고 있음에도 힐다의 손에 들린 고요의 숨결은 아무런 향과 색이 없는 투명한 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만일 그의 눈앞에서 카를로스의 잔에 저것을 따랐더라도, 카를로스가 이것을 삼키기 전까진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을 터였다.

가브리엘의 옆에 있던 힐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위로인지 놀림인지 모를 말을 건넸다.

“너무 충격받지는 마십쇼.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거 경도 내심 예상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예. 전혀 예상을 못 했다면 거짓이겠죠.”

가브리엘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힐다는 이미 황태자의 계획을 알고 있던 것처럼 보였다.

황좌는 둘로 나눌 수 없는 것이므로 두 형제 사이의 충돌은 필연과도 같았다. 예상했던 것과 조금 다른 형태였을 뿐, 가브리엘 또한 언젠가는 이와 비슷한 상황이 오지 않을까 짐작 정도는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막상 예감만으로 그쳤던 것이 현실로 다가오자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만약 힐다가 정말로 황태자 측에 속한 이였다면,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허무하게 주군과 친우를 한날한시에 잃었을지 모른다. 구심점을 잃은 세력이 흩어지고 나선 카를로스 측근들의 생사 역시 불분명해졌을 것이다.

썩어 문드러진 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가브리엘의 옆에서, 부관 마노가 이를 갈았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요. 이때까지 그게 다 연기였다니…….”

마노 역시 황태자를 믿고 형제간의 화해를 도왔던 만큼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다.

“처음부터 믿어서는 안 됐는데, 제가 멍청했습니다.”

평소엔 차분하나 가끔 다혈질이 되는 마노는 당장 황태자의 목을 베러 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씩씩거리며 들썩이는 어깨를 힐다가 꾹 눌러 진정시켰다.

“진정해, 마노 경. 지금 뛰쳐나가선 될 것도 안 돼.”

“지금 제가 진정이 되겠어요?”

“그래도 진정해. 어차피 지금 황태자더러 한판 붙자고 해 봤자 경만 다칠걸. 참아.”

진정시키는 건지 약을 올리는 건지 모를 말에 마노가 더 분노하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다 이내 현실을 깨닫고는 씨근덕대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분하네요. 제가 십 년만 더 일찍 태어났어도….”

“아니야. 그래도 못 이겨. 내가 몇 번 붙어 보니까 십 년으로도 안 되겠더라고.”

“…….”

“보자, 한 이십 년이면 되려나? 아니다. 적어도 삼십 년은 돼야 한번 덤벼 볼 순 있겠네. 음…. 아냐. 그래도 질 것 같긴 한데. 일단 목표를 크게 잡는 건 좋은 일이긴 하니까. 힘내자, 마노 경.”

“…아, 예.”

마노가 고개를 휙 돌렸다. 힐다의 말에 반박할 방법을 못 찾은 그는 제 앞에 있는 서류를 거칠게 넘기며 애꿎은 종이에다 화풀이를 했다. 이제 마노는 황태자보다 힐다가 더 짜증 난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가브리엘이 참지 못하고 웃음 지었다. 힐다가 의도한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덕분에 울적하게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가 조금 가벼워졌다.

물론 그 또한 오래가지는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집무실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언제나 수다스럽게 굴던 힐다마저도 입을 다물고 구석에 앉아 하릴없이 서류만 들췄다.

충격 받은 기사들을 앞에 두고, 정작 가장 분노해야 할 카를로스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무어라 한마디 말을 할 법도 한데 그는 줄곧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카를로스 전하. 괜찮으십니까?”

이들 중 그나마 카를로스와 편한 사이인 가브리엘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카를로스를 위로하기가 조심스러웠던 터라 이전의 내기를 언급하며 제가 오지랖을 부렸단 걸 인정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번 내기는 제가 진 것 같군요.”

“맞아, 경이 졌어.”

퉁명스러운 말투에선 내기에서 이긴 기쁨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애초부터 이기기 위해 시작한 내기가 아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닌 척해도 카를로스가 제 형제에 대한 깊은 애착을 품고 있단 걸, 카를로스를 어릴 때부터 옆에서 지켜본 기사는 알고 있었다. 확신을 가지고 형제를 시험했다고는 하지만 그 의심이 진실로 드러났을 때에는 또 다른 괴로움에 직면하였을 테다.

카를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바깥은 이미 어두워진 지 오래였다.

낮부터 하늘이 흐리다 싶더니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며 나뭇잎을 때리는 소리도 또렷해졌다.

「이번 건국제는 단둘이서 보내는 게 어때? 여기 청림궁에서.」

카를로스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서가 그를 꺼려 하는 건 이미 수차례 확인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진실을 제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은 그를 깊은 우울에 잠기게 했다.

우스웠다. 형님이 그를 죽이고자 드는 게 새삼 놀라운 일도 아니건만, 어리석은 아우는 여태까지도 실낱같은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서에겐 불행히도, 그의 엇나간 동생은 기어이 제 형님을 손에 쥐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카를로스에게 아서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듯이, 아서에게도 카를로스가 쥐여 주는 것 외엔 어떤 선택지도 주어지지 않아야 했다.

마침내 형님이 그에게 면죄부를 안겨 주었으니 얼간이처럼 실망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를 흔쾌히 반겨 주어야 했다. 어차피 처음부터 어긋날 수밖에 없는 관계였고, 더 이상 그에게 어떤 망설임도 필요치 않았다.

“형님께로 가야겠다. 가브리엘만을 대동할 생각이니 나머지는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도록.”

검을 꺼내 든 카를로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브리엘이 복잡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황태자를 죽일 생각이십니까.”

“아니, 그럴 필요 있나. 형님의 마음만 돌리면 그만인 것을.”

“글쎄요. 그게 가능한 일인지 이제 모르겠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를로스에게 아서의 입장을 대변해 주던 가브리엘이었으나, 더 이상은 아니었다. 이제 기사는 아서가 카를로스를 죽여야 할 정적으로만 보고 있단 걸 알게 되었다.

“시일이 조금 걸릴 뿐이지 가능해. 단, 소란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경을 대동하는 것이고.”

황태자의 변화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인 가브리엘과 달리 오히려 카를로스 쪽이 더 낙관적으로 굴었다.

카를로스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가브리엘에게 넘겼다. 건네받은 물건을 확인한 기사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짙은 색을 띤 구속구는 가브리엘도 익히 보아 왔던 것이었다. 대(對) 마스터용 구속구. 제국보다 마법 문물이 발달한 오나드 왕국으로부터 강탈해 낸 마도구로, 쉽사리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큰 가치를 지닌 물건이었다.

오러 마스터를 제압하기 위한 마도구라고 한들 만능은 아니라 카를로스나 가브리엘과 같이 숙련된 마스터에겐 큰 효용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서처럼 갓 마스터가 된 기사는 충분히 제압해 낼 수 있었다.

신체 어느 부위로든 속박당하는 즉시, 마도구에 달린 마나석이 생명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마나만 남겨 둔 채 피구속자의 모든 마나를 빨아들였다. 그렇게 흡수한 마나를 매개로 구속구에 새겨진 스펠이 발동하여, 마스터의 전신에 중력 마법을 걸어 육체를 억압했다.

오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마나와, 신체가 가진 고유의 근력까지 모조리 빼앗긴 이가 할 수 있는 저항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작 이 마도구 하나로 일당천의 인간병기라고도 할 수 있는 오러 마스터를 완벽히 무력화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가브리엘이 새까만 구속구를 꺼림칙하게 바라보았다. 제 손에 들린 이것이 누구에게 사용될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 모습을 본다면 분명 검을 뽑아 들겠지. 경이 홀로 들어가서 제압해라.”

“…저를 본다 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미 황태자가 카를로스를 죽이려고 마음먹은 마당에 카를로스의 기사인 가브리엘이라고 다를까. 자신 없이 답하자 카를로스가 어쩐지 좀 전보다 묘하게 사나워진 투로 말했다.

“형님께서 전부터 너를 탐내셨으니 다를 거다. 네가 먼저 형님의 기사가 될 것처럼 운을 떼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제게 호감을 표한 것 또한 전부 기만이었더라면 어쩌실 생각입니까.”

“글쎄. 그럴 확률은 낮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네 장단에 맞춰 주겠지.”

“…예. 알겠습니다.”

기사가 손에 든 구속구를 품 안에 넣었다. 이런 방식으로 아서의 속내를 확인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혹여나 황태자가 갑자기 돌변하기라도 한다면, 그는 또다시 허탈함을 느낄 게 자명했다.

유독 그에게만 보였던 호감 어린 태도 역시 전부 계산하게 이루어진 건지, 의문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다른 이들의 손은 불쾌하지 않지만 그의 손은 괜찮다 해 주었던 것까지도.

주군을 죽이려 한 황태자이니 이제 이 의문에 대한 답이 무엇이든 중요치 않을 텐데, 가브리엘은 그 답을 밝혀내는 것에 미약한 불안감을 느꼈다.

“이만 출발하지.”

“…예, 전하.”

복잡한 생각에 잠긴 기사를 두고 카를로스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황성 전체가 고요히 잠든 한밤중, 두 주종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황태자궁으로 향했다.

황성 내부는 드문드문 야간 근무를 서고 있는 경비병들을 제외하고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카를로스는 이미 이 시간대 경비들의 위치를 모조리 파악해 둔 듯 여유롭게 움직였다.

어두운 밤중, 하필이면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터라 일반적인 기사의 감각으로는 기척을 숨긴 두 마스터를 발견해 내는 게 불가능했다. 마치 운명처럼 모든 것이 순조롭게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황태자궁과 가까워질수록 가브리엘의 머릿속에 몇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 이 늦은 시각 황태자궁을 찾아 무얼 어찌할 작정이며, 카를로스를 죽일 작정까지 한 황태자가 시간이 지난들 마음을 바꿔 먹을 수 있을 것인가.

“리엘. 내기를 잊지 않았겠지.”

기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 카를로스의 경고가 뒤따랐다.

“…잊지 않았어.”

가브리엘이 답했다. 묻고 싶은 게 있어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건 그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카를로스의 말이 맞았고 가브리엘은 내기에서 졌다.

“명령이다, 가브리엘. 오늘 일은 모두 불문에 부쳐라.”

“…그러지.”

“무슨 일이 일어나든, 무엇을 보고 듣든 간에 입을 열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야.”

“맹세해. 무슨 일이 있어도 모두 불문에 부치겠다.”

도대체 무얼 할 작정이기에 이토록 당부하는 것인지 몰라도 가브리엘 역시 진지한 얼굴로 맹세했다.

“만일 네가 단 한 번이라도 내 앞을 막아선다면, 나는 너 대신 힐다를 불러들일 생각이다. 명심해.”

“…명심하겠어.”

그가 잠시 망설이다 답했다. 황태자를 고문이라도 할 생각인지 묻고 싶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기사가 카를로스를 막아설 정도의 행동이라면 그런 것들밖에 없다. 비인륜적이고, 선을 넘어선 잔인한 고문과 같은 것.

가브리엘이 동요하는 마음을 다잡았다. 황태자는 카를로스의 정적이며 그는 카를로스의 기사였다. 카를로스가 황태자에게 어떤 짓을 하여도 그는 모르는 체 눈 감아야 했다. 그래야 마땅했다.

***

한밤중 찾아온 침입자에 검을 뽑아 들었던 황태자는 가브리엘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살기를 거두어들였다. 창으로 드는 달빛 사이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이 늦은 시간에, 경이 어쩐 일이지.”

가브리엘에게 검을 겨눈 아서는 호위가 지키고 서 있을 침실 문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대로 소리쳐 호위를 부를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침실 안에서 어떤 소리가 나도 문밖의 기사들은 달려오지 않을 테지만, 그렇게 될 경우 아서의 경계를 살 가능성이 높았다. 가브리엘은 지체 없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드러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불순한 의도로 찾아뵌 게 아니오니, 부디 검을 거둬 주십시오.”

“내가 네 무얼 믿고?”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난 아서가 차갑게 물었다. 그가 검을 쥐지 않은 손을 뻗어 침대 머리맡에 있던 마법등을 밝혔다. 은은한 불빛이 주위로 번져 나갔다.

아서는 가브리엘과 서너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둔 채로, 조금이라도 다가오면 망설임 없이 베어 낼 것처럼 그를 주시했다.

헐거운 가운 사이로 흰 속살이 적나라하게 보이는데도 추스를 생각조차 않는다. 잠깐의 빈틈이 치명적인 실수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 날카로운 기세에 가브리엘은 어쩐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서가 밤늦게 찾아온 그를 경계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는데, 그동안의 특별 취급에 익숙해져 작은 착각을 했던 모양이다.

기사가 아서에게 깊이 고개 숙여 사죄했다.

“다른 이의 눈을 피하려 부득이하게 큰 무례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전하. 부디 제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실례인 줄 알고도 반드시 드려야 할 말씀이 있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가브리엘이 바닥을 응시하며 코앞에 당면한 현실을 되새겼다. 이제 그에게 황태자는 쓰러트려야 할 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평소보다 어둡게 침전했던 기사의 금안이 이윽고 다시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래…. 놀랍게도 이게 실례인 줄 알긴 아는군. 이만 물러나. 아무리 그대라 하여도 이건 지나친 무례야.”

비딱하게 웃은 아서는 평소와 달리 빈정거리듯 말했다.

아무리 그대라 하여도…. 가브리엘은 순간 아서에게 되물을 뻔한 것을 억눌렀다. 이처럼 매번 황태자는 그가 특별한 무언가인 것처럼 말하곤 했다. 기사는 동요하는 모습을 숨기려 눈꺼풀을 깊게 내리깔았다.

“…부디, 전하. 관대히 아량을 베풀어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이후로는 다시는 이럴 일이 없을 것이라 맹세하겠습니다.”

“……”

“전하, 부디 자비를.”

가브리엘이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아서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기사는 무릎을 꿇고 있을 작정이었다. 눈을 감고 있으니 바깥의 빗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리는 듯했다.

“…고개 들어.”

이어지는 간청에 아서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가브리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서는 무표정하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늘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던 얼굴은 고작 입꼬리가 얼핏 내려오는 작은 변화로도 이전에 보이곤 했던 황태자의 예민한 낯을 재현해 냈다.

“…좋아. 나 또한 오늘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이런 무례에 응해 주지 않을 것이다. 명심해.”

“예, 전하. 명심하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말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다른 의도가 있는 걸로 알겠어.”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아서에게 온순히 감사를 표한 가브리엘이 천천히 숨을 골랐다.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는 검을 든 황태자를 아무런 소란 없이 제압할 수 없었다. 품속의 구속구를 채우려면 황태자가 적어도 그의 손이 닿을 거리까지는 자발적으로 다가와 주어야 가능했다.

“…감히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속내를 털어놓아야겠지요.”

잠시 고민하던 기사가 아서와 올곧게 시선을 마주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남은 건 입 밖으로 내뱉는 일뿐이었다.

“지난날, 전하께서 하셨던 말씀이 머릿속을 쉬이 떠나지가 않습니다.”

황태자의 흥미를 끌어야 한다는 핑계를 앞세우고 나서야 꺼내 본 그의 속내. 이제 와 그 답이 무엇이든 간에 달라질 건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어째서 그때 제 무례한 청을 들어주셨는지. 어째서 오늘의 무례한 방문 또한 눈감아 주겠다고 하시는지. 그 연유를 알고 싶습니다.”

담담한 목소리와 다르게 아서를 응시하는 눈동자는 진중했다.

“…전혀, 예상 못한 질문이로군.”

평소 가브리엘이라면 입에 담지 않았을 직설적인 물음에 아서는 당혹스러운 듯 입을 달싹였다.

가브리엘의 물음뿐만 아니라, 지금 상황 또한 아서에게 곤혹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아서가 아는 가브리엘은 이런 식으로 아닌 밤중에 그를 찾아올 만큼 충동적이지 않다. 기사는 어느 때든 항상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뜨뜻미지근한, 그 정도 온도를 유지했다.

기감을 최대로 끌어 올려 보았지만 근방엔 별다른 수상한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 아서는 더욱 의심스러웠다.

무엇이 이 충성스러운 기사로 하여금 이런 말을 하게끔 만들었을까.

이전번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가브리엘이 답지 않은 행동을 할 땐, 기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떠올려 보면 그 이유를 알아내기가 쉬워졌다. 눈앞의 기사는 아주 높은 확률로 카를로스의 명을 수행하는 중일 것이다.

슬슬 그쪽에서 반응이 올 때가 되긴 했다. 다행히도 힐다가 맡은 역할을 제대로 완수했나 보다.

상황은 아서의 계획보다 좀 더 흥미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여러 정황을 보아하니, 카를로스가 제 기사를 이용해 아서를 보다 쉽게 제압할 계획을 세운 듯했다. 믿던 가브리엘에게 발등 찍힐 아서의 감정 따윈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잔인하면서 효율적인 방법이다.

아서는 재미있는 일을 앞둔 듯한 초롱초롱한 시선은 깊숙이 숨겨 둔 채 짐짓 경계심을 내보였다. 본심을 감춘 붉은 눈이 제 눈앞의 기사를 탐욕스레 훑어 내렸다. 솔직한 말로 무릎 꿇은 가브리엘을 앞에 두고 아서가 떠올린 생각을 아주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이게 웬 떡이야, 정도로 말할 수 있겠다.

본래 아서는 가브리엘을 계획의 일부로 포함할 생각이 없었지만 본인이 먼저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상황에서까지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상당량의 심술과 약간의 사심을 담아 가브리엘이 아서의 각본 안에서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았다.

사람이라면 다 싫어하는 황태자가 유일하게 집착하다시피 하는 선한 성품의 기사.

아서는 기한이 정해진 변덕스러운 애정보다 끝없는 집착, 질투, 소유욕, 뒤엉킨 애증의 힘 따위를 더욱 신뢰했다. 분명 가브리엘은 카를로스의 남다른 집착을 촉진시킬 자극제가 될 것이었다. 그동안도 알게 모르게 기사가 제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 듯했으나, 아서가 전보다 태도를 확고히 한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반응이 돌아올 터였다.

“가브리엘 경.”

사소한 가지가 달라졌을 뿐 계획의 큰 틀은 어긋나지 않았다. 아서는 쓸모없는 잡생각은 머릿속 한편에 쑤셔 박아 두고 다시금 연극의 막을 올렸다.

둘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동안 가브리엘의 시선은 한순간도 아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흐릿한 빛 아래에서도 기사의 수려한 외양은 감추어지지 않았다. 늑대의 눈이라 불리는 황금안은 어둠 속에서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냈으며, 이마 위를 가볍게 덮은 은발 역시 마찬가지다.

올곧은 기사의 시선이 불편한 척 아서가 결국 먼저 시선을 회피했다. 한밤중 그의 침실을 찾은 무례한 침입자에게서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 순간적으로 감정의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들리는 소리라곤 떨어지는 빗소리만이 전부인 늦은 밤. 침실 위로 깔린 어두운 장막은 아서의 동요를 감추어 주는 베일이 되어 줄 것이었다. 마주한 상대가 제국 내에서 손꼽힐 정도로 뛰어난 기사, 가브리엘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고작 그 이유를 묻고자 이 밤중에 황족의 침실을 찾는 무례를 저지른 것인가?”

“…송구스럽지만 그러합니다.”

동요하는 적안이 기사의 시야에 선명히 들어왔다. 흔들리는 눈동자와는 대조적으로 황태자의 목소리는 마치 부러 자신의 속내를 감추기 위해 날을 세운 듯 냉랭했다.

“…그게 그렇게나 궁금했다고 하니 말해 주지. 답은 간단해.”

그러나 아서의 동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금세 평상시와 같은 얼굴을 되찾은 아서가 침상 끄트머리에 편히 자리를 잡았다. 당장 가브리엘을 베어 낼 것처럼 쥐고 있던 검도 침구 위로 올려 두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대의 손은 불쾌하지 않았다고.”

“예. 전하께서 제게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가브리엘은 그러니 그 연유를 알려 달라는 사족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한 번 더 묻지 않아도 황태자는 이미 제 질문의 논점을 파악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 분명 내가 그리 말했지….”

늘 갖춰 입던 딱딱한 정복 차림을 벗어나 침상 위에 느슨히 풀어져 있는 미남자는 마치 주색잡기에 빠진 한량과 같아 보였다. 옷차림 하나로 이토록 분위기가 돌변하니 어째서 황태자가 그토록 결벽적으로 완벽한 차림새를 고수했는지 이해되었다.

얇은 침의를 걸친 채 다리를 꼬고 앉은 아서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는데, 거만하기보단 보는 이로 하여금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지 고민케 할 만큼 어딘가 아슬아슬해 보였다.

가브리엘이 미묘한 기분으로 침묵하고 있자 아서가 담담하게 말했다.

“어쩌면 그대가 내 생명을 구한 그때부터일지도 모르겠군.”

“…….”

“그때… 그대의 손을 잡던 순간 생각했지. 제 주군의 적수를 살려 두는 기사라니,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기실 나는 그대가 모르는 체 가 버릴 것이라 체념하고 있었던 터라. 그대의 손이 내겐 마치 구원과 같았지.”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그럴 수밖에. 경이 묻지 않았다면 영영 말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가브리엘이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들었더라면 기쁘게 받아들였을 이야기였다.

“아마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군. 그대를 내 기사로 만들고 싶어 떼를 썼던 것은.”

“…….”

“이 정도면 충분한 답변이 되었나?”

“예. 충분합니다. 제게는 과분할 정도로.”

그토록 오래 모두를 기만하던 이가 하필 이 순간 가브리엘에게 숨겨 오던 속내를 드러냈다. 기사는 소리 없이 탄식했다. 그는 이 물음의 답을 듣지 말았어야 했다.

‘그대의 손이 내겐 마치 구원과 같았지.’

황태자의 말은 이후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영향을 줄 것이 분명했다.

“…저 역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전하.”

“말해.”

기사는 혀끝이 메마르는 듯했다. 거짓 맹세를 입 밖으로 꺼내고자 마음먹은 순간 듣게 된 아서의 진심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가라앉혔다.

하지만 기사는 차후 황태자가 느낄 감정을 짐작하면서도, 결국 입을 뗄 수밖에 없었다.

“…이전 날 하신 말씀이 아직까지 유효하다면…. 이제라도 제가 감히, 전하의 기사가 되고자 청을 드리고 싶습니다.”

“……뭐?”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순간적으로 아서의 얼굴이 맥이 풀린 것처럼 멍해졌다.

“혹 전하께선 제가 아직 2황자 전하께 맹세를 바치지 않았단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요.”

“알아. 그래서 내가…….”

무언가 말하려던 아서가 입을 다물고 마저 설명하라는 듯 가브리엘을 바라보았다.

“2황자 전하께선 제게는 주군보다는 친우에 더 가까운 분입니다. 저는 여태 맹세를 바칠 주인을 찾지 못했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기사는 이런 어설픈 변명을 아서가 믿어 줄지 의문스러웠지만, 그렇다 하여 이미 뱉은 말을 삼킬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 태자 전하의 달라진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어느 날부터 전하를 곁에서 모시고 싶단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

“늦은 시간 전하를 찾아뵌 건 다시금 사죄드리고 싶습니다. 지극히 충동적인 방문이었으니까요. 허나, 전하의 기사가 되고 싶단 말만큼은 진심입니다.”

“그런….”

아서의 표정이 감출 겨를 없이 크게 흔들렸다. 황태자가 손을 들어 제 눈을 가렸다.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정말… 놀랍군.”

“놀라셨을 게 당연합니다.”

“…가브리엘.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예.”

“이제 와서?”

“송구스럽지만, …예. 그렇습니다.”

“감히 내게 농을 던진 건 아니겠지.”

“농이 아닙니다.”

들은 말의 사실 유무를 확인해 보려는 것처럼 아서가 가브리엘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도 잠시, 저를 올곧게 바라보는 금안을 확인하고는 놀란 얼굴 위로 서서히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대, 진심이군.”

으레 보이던 부드럽지만 속내를 짐작하기 어렵던 위정자의 웃음이 아닌, 마치 가지고 싶었던 장난감을 조르고 졸라 얻어 낸 아이의 그것처럼 순수하게 기쁨에 가득 찬 미소였다.

“경이 먼저 꺼낸 말이야. 쉬이 무를 수 없다는 건 알겠지.”

기사의 말 몇 마디에 마침내 황태자의 가면이 한 꺼풀 벗겨졌다.

눈꼬리가 가늘게 휘어지고 입꼬리 끝에 작은 동굴이 생길 정도로 환하게 미소 지은 얼굴은, 단언컨대 황성의 그 누구도 보지 못한 모습이리라.

놀랍게도 그 순간 가브리엘의 뱃속 가득 이유 모를 충족감이 차올랐다. 자신의 주군을 죽이려고 든 황태자가 그를 원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리고 제가 그런 황태자를 기만하고 있는 때에 말이다.

대체 저는 무얼 만족스러워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가브리엘은 제 안에 이런 저열한 면모가 존재하였음을 깨닫고 곧바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이런 무례라면 기꺼이 용서하지. 일어나게, 리엘 경.”

이제 황태자는 완전히 경계심을 내려놓고서 기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전히 기분 좋게 미소 지은 얼굴이었다.

가브리엘은 미미하게 굳은 낯으로 아서의 손을 맞잡았고.

“…감사합니다, 전하.”

철컥, 쇳소리가 났다. 황태자의 손목에 구속구가 채워짐과 동시에, 두 사람의 위치가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가브리엘이 황태자의 등 위로 올라앉아 구속구가 채워진 쪽의 팔을 뒤로 꺾었다. 단련된 근육으로 이루어진 팔이 맥없이 뒤로 꺾였다.

황태자는 순간적으로 몸을 굴려 벗어나려 했지만 그 저항이 마스터의 것이라기엔 너무나 미약했다. 마도구는 만들어진 용도대로 구속된 대상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몸의 이상을 인지한 황태자는 반항을 멈추고 상체를 꺾어 제 손목에 채워진 구속구를 확인하였다.

“가브리엘, 왜….”

“송구합니다. 전하.”

가브리엘이 허울뿐인 사과를 건넨 뒤 하나 남은 팔까지 뒤로 꺾어 구속구를 채웠다.

“그대가, 분명…….”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자 아서가 가늘게 떨리는 숨을 뱉어 냈다. 멍한 눈을 한 아서는 곧바로 무의미한 반항을 관두었다. 가브리엘의 아래에 깔린 몸이 힘없이 늘어졌다.

체념이 이토록 빠른 것은 구속구 탓일 가능성이 컸다. 한순간에 모든 힘을 빼앗긴 몸이 마치 무기력증에 걸린 것마냥 아래로 축 처질 터였다.

잠깐 사이 이미 일련의 상황을 모두 파악한 듯, 꾹 다문 입 틈새로는 무어라 탓하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메마른 얼굴은 자조에 가까웠다.

가브리엘은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멈춘 채로 아서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황태자는 아마, 두 번 다시는 그에게 좀 전과 같은 얼굴을 보여 주지 않을 것이다….

몸 위로 올라타 제압한 탓일까. 황태자로부터 새어 나오는 낯선 체향이 코끝을 스쳤다. 이토록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면 인지하지 못했을 정도로 희미한 향이었다.

죄책감인지 뭔지 모를 감정에 심장이 욱신거렸다. 어째서인지 조금씩 목이 타는 갈증이 일었다.

구속구에 제압된 채 무방비하게 늘어진 몸을 내려다보며, 기사는 저도 모르게 혀끝으로 메마른 입술을 적셨다.

***

그대의 손이 내겐 마치 구원과 같았지. 그 말을 들었을 때 카를로스는 지금의 그가 살의에 가까운 갈증을 느낄 만큼 아서를 원하고 있는 것인지, 살의가 치밀어 오를 정도로 아서를 죽이고 싶은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불쾌해졌다.

카를로스를 죽이려 고요의 숨결이라 불리는, 부르는 게 그대로 값이 될 만큼 희귀한 맹독을 구하던 형제가 정작 그의 기사인 가브리엘에게는 쉽사리 구원이라 일컬었다. 그저 우연이었던 구명으로 저토록 호의적인 감정을 드러낼 만큼 허술한 주제에 카를로스는 죽이려 들었다.

친애, 사랑, 귀애와 같은 것들. 애초에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지도 못했던 감정이었다. 그러나 그가 결코 가지지 못하리라 여겼던 것이 다른 이에겐 쉬이 주어지는 것을 확인하자, 몸속 어딘가로부터 추한 살의가 치밀어 올랐다. 아서가 그를 죽이려 한단 걸 알게 된 순간조차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질투라는 것이 이토록 우스웠다.

대체 그를 죽이려 드는 형제에게 더 이상 무얼 바라고 이런 보잘것없는 일에 투기를 하는가 싶었지만, 질투라는 감정은 늘 그랬듯 이성과는 별개로 움직였다.

가브리엘이 아무런 잡음 없이 아서에게 구속구를 채우는 데에 성공했음에도 카를로스의 불쾌감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미간 사이로 가느다랗게 그어진 한 줄기의 선이 그의 불편한 심기를 대변했다.

침실 입구로 다가서는 걸음에는 투기로부터 비롯된 초조함이 묻어났다.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문 앞에 서 있던 아서의 호위기사들이 카를로스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들어가십시오, 전하. 새벽까지는 아무런 우려할 일이 없으리라 사료되옵니다.”

“…수고 많았군. 경들의 공은 후에 치하하겠다.”

이미 오래전부터 아서의 주변은 카를로스의 기사들로 채워져 있었다. 만일 형님을 죽이고자 했다면 카를로스 혼자서도 충분했을 테다.

하지만 카를로스가 바라는 건 아서의 죽음이 아니라 아서 자체였다. 그를 위해선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기에 괜한 소요를 일으키지 않는 편이 나았다.

애초에 힐다와 동행하는 게 옳았을지 모른다. 힐다 특유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미를 변수라 생각하여 가브리엘을 데려왔건만, 실지 이 상황에서 가장 큰 변수는 카를로스 저 자신이었다.

어지러운 머릿속으로 온갖 질 낮은 충동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구원이라 일컬었던 기사를 형님의 손이 닿는 거리에 세워 두고 형님을 발가벗긴 채로…….

그가 짧은 숨을 뱉어 냈다. 이어지던 상념이 뚝 끊겼다.

이미 고리가 풀려 있던 문은 살짝 밀어내는 것만으로도 쉽게 열렸다. 카를로스는 거침없이 침실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침실 내부는 통로와 마찬가지로 어두운 편이었다.

침실 문이 바깥과 단절되듯 굳게 닫혔다. 카를로스의 눈동자가 아서에게로 향했다.

“…형님.”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핏줄을 이은 이가 바닥을 기는 꼴은 생각보다 우스워 보이지 않았다. 구속구에 가진 힘을 빼앗기고 제압당한 모습이 분명 초라해야 마땅할 텐데, 이런 상황에서조차도 알량한 자존심을 꺾지 않은 싸늘한 눈은 되레 그를 조롱하는 듯했다.

몸을 숙여 형님과 좀 더 가까이 시선을 마주했다. 카를로스의 신뢰를 얻고자 늘 부드럽게 풀어져 있던 눈매는 언제 그랬냐는 양 증오로 일그러져 있었다.

새빨간 눈동자 속에 열등감과 증오가 일렁였다. 가능만 했다면 이미 카를로스를 수백 수천 번은 베어 넘겼을 법한 시선이다.

카를로스는 갓 식사를 끝마친 사람처럼 배부르게 미소 지었다. 지저분하게 뒤엉킨 악의 속엔 다른 이를 향한 사소한 호의가 파고들 틈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증오에 찬 시선이 무척이나 기꺼웠다. 빗장뼈가 욱신거릴 만큼 차올랐던 질투는 형님과 시선을 마주한 즉시, 본디 대수롭지 않은 치기였던 것마냥 사라졌다.

“처량해 보이십니다, 형님.”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침묵을 깨트린 쪽은 카를로스였다. 오기로 치뜨고 있던 아서의 눈 위로 서서히 체념이 내려앉았다.

“…죽여라. 그럴 요량으로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냐.”

“서운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카를로스가 냉소를 지었다. 다른 때는 제법 유능한 인사처럼 보이던 형님이 그와 관련된 일에만 유독 멍청해지는 것도 기꺼웠다.

“지금 당장 죽일 생각이었다면 이토록 번거로운 일을 벌일 필요도 없었겠지요. 귀한 마도구를 고작 형님을 제압하고자 채워둘 필요도 없었을 테고…. 안 그러합니까?”

그가 바닥에 늘어진 아서를 들어 올렸다. 그리 가볍지만은 않은 육신이 간단히 침상 위로 옮겨졌다.

꿈틀대는 몸 위로 올라타 가만히 내려다보자, 날카롭게 벼려진 살기가 살갗을 찔렀다. 역시나 꿈속 아서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다. 지금 이것이 아서의 진실된 모습이었다.

카를로스는 평상시 그랬던 것처럼 손을 뻗어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었다.

“치워.”

돌아오는 반응은 평소와 달랐다. 애완동물을 다루듯 쓰다듬는 손길이 불쾌했는지 아서가 고개를 돌려 그의 손을 피했다. 카를로스는 더 강제하지 않고 이번엔 붉게 달아오른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입을 맞추고 싶다.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아서의 호흡이 점점 평온을 잃고 거칠어졌다.

“죽이는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굴욕을 줄 생각이었나.”

“…굴욕이라.”

어찌 보면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한데. 카를로스는 아서의 턱을 움켜쥐고 그를 바라보게 하였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몸을 숙여 곧장 입을 맞추자 코앞에 자리한 눈이 크게 홉떠졌다.

열기를 띤 붉은 입술은 생각보다 부드러웠고 말랑거렸다. 메마르고 거친 느낌이 들 것이라 짐작하였지만 정반대였다. 첫 입맞춤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기분 좋은 감각을 선사했다.

두 번째엔 살갗끼리 맞닿는 소리가 나도록 진득하게 입을 맞추었다. 가느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아서는 카를로스가 제게 무슨 짓을 한 건지 뒤늦게 인지한 듯했다.

잇새로 터진 숨결이 뒤섞인 순간 카를로스가 아서의 아랫입술을 머금었다 놓아주었다. 놀라 굳어 있던 아서가 뒤늦게 고개를 돌려 피했다.

“무례하군요. 입맞춤 도중에 시선을 피하시면 안 되죠, 형님.”

카를로스가 아서의 턱을 잡고 돌려 그와 눈을 마주하도록 강제했다. 아서는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붙잡힌 턱과 입술이 덜덜 떨렸다.

“대체 뭐 하자는…. 읏,”

그가 경악에 차 달싹이는 입술을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하악골을 움켜쥐어 입을 벌리게 한 뒤 혀를 밀어 넣었다.

“…너, …읍…!”

이어지는 입맞춤에 자연히 고개가 왼편으로 기울었다. 입 안 깊숙이 침범한 혀가 입천장을 긁고, 도망가는 것을 뒤따라가 양껏 휘감으며 빨아들였다.

이내 무언가를 끈적히 빨아들이는, 점막끼리 접촉하는 적나라한 소리가 노골적으로 새어 나왔다. 뜨겁게 달아오른 점막이 낯선 침입자를 경계하는 것처럼 움칠 튀었다.

한 팔로 아서의 허리를 휘어 감은 카를로스는 이미 더 물러날 곳도 없는 형제를 깊이 몰아붙였다.

“응, 읏……!”

놀라 뻣뻣해진 몸이 이불 깊숙이 파묻혀 들어갔다.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것을 찍어 누르고 그저 내키는 대로 입 안을 탐했다. 쉴 틈 없이 몰아붙이는 입맞춤엔 숨 쉴 틈조차 없어 중간중간 헐떡이는 숨소리가 뒤따랐다.

“하… 하아….”

아서가 흐릿해진 눈을 깜빡이며 힘겹게 숨을 들이쉬었다.

형제와 입맞춤을 하고 있다는 충격도 잠시, 숨이 부족해진 몸뚱어리는 머릿속을 텅 비우고 오직 숨을 들이켜기에만 급급했다.

“그, 만…….”

부족한 숨을 채우느라 벌어진 입 틈새로 다시금 뜨거운 혀가 파고들어 왔다. 배려 없이 점막을 긁어내리는 자극에 아서의 허리가 튀어 올랐다.

“아.”

경악에 차 있던 붉은 눈이 서서히 차오르는 습기로 흐려졌다. 삼키지 못한 침이 입가로 흘러내리는데 미처 의식할 여유가 없었다.

“하아, 형님.”

흐트러진 가운 틈으로 파고든 손이 탄력 있는 살갗을 탐욕스레 더듬었다.

허술히 침의를 여미고 있던 허리끈은 한 번의 손길로도 쉽사리 풀어졌다. 양옆으로 흘러내린 침의 사이로 맨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카를로스는 버릇처럼 아서의 오금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리를 양옆으로 벌리려던 찰나였다.

“…카를로스 전하.”

불청객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때 이른 방해에 카를로스의 고개가 느릿하게 돌아갔다.

“방해하지 마, 가브리엘. 아직이야.”

검붉은 눈에 일렁이는 정욕이 선연했다. 숨 쉴 틈 없이 몰아붙여진 아서보다 도리어 카를로스 쪽이 이성을 잃은 듯이 보였다.

방해를 받은 것이 탐탁지 않았는지 기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제 품속의 형제에 대한 소유욕을 선연히 드러냈다.

가브리엘은 제 형제 위로 올라탄 주군을 보고 낮은 침음을 흘렸다. 그동안 카를로스가 황태자에게 보였던 묘한 집착을 알고 있었지만, 그게 이런 방식으로 표출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전하.”

신중히 할 말을 고른 기사가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를 설득하고자 하셨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지금, 이건….”

설득이 아니라 겁간에 가까워 보입니다만. 가브리엘이 뒤따라오는 말을 삼켜 냈다. 이 때문에 카를로스가 제게 미리 당부를 한 것이란 걸 한발 늦게 깨달았다.

가브리엘은 전쟁을 겪었고, 포로를 굴복시키려 할 때 경우에 따라 고문보다 이런 수단이 더 효율적일 수 있음을 알았다.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이해하였다.

그럼에도 정신을 차려보니 카를로스를 막아서고 있었다. 어째서 자신이 카를로스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입을 연 건지 알 수 없었다. 기사는 이미 일을 저지르고 난 후에야 제 행동을 납득시킬 만한 근거를 찾아내려 고심했다.

카를로스는 소란을 일으키지 않으려 가브리엘까지 동행하였고, 본디 카를로스 자체가 이런 식으로 충동적으로 구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 상황 역시도 카를로스가 의도했던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 결론 내리자 당혹스러움이 조금이나마 가시는 듯했다.

“지금 네가 주제넘게 나서고 있다는 건 알겠지, 리엘.”

카를로스가 아서의 뺨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그의 아래에 있는 게 양손이 뒤로 구속당한 황태자가 아니었더라면 마치 연인끼리 밀회를 나누는 듯한 모습 같기도 했다.

“지금 이 상황 또한 전하의 계획 중 일부인 겁니까? 그렇다면 저도 납득하고 물러나겠습니다.”

“…….”

그가 묻자 카를로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카를로스는 짜증 섞인 숨을 내뱉었다. 확신하고 묻는 듯한 기사의 태도가 거슬렸지만 저 물음에 대한 답은 당연히 ‘아니다’였다. 이런 충동적인 입맞춤이 계획의 일부였을 리가 없었다.

점잖게 대화부터 시작하려 했건만 고작 입맞춤 한 번에 이렇게 될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그는 못마땅함에 내심 혀를 찼다. 늘 꿈으로만 겪던 것을 현실에서 맞닥뜨렸더니 멍청하게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

본래라면 카를로스는 아서에게 선택권을 줄 생각이었다.

그를 죽이기 위해 형님이 구해 온 독을 스스로 들이켤지, 혹은 아우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서라도 살아남기를 택할지.

카를로스는 한발 늦게나마 서서히 흥분을 가라앉혔다. 정욕으로 짙어졌던 눈동자가 차차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검푸른 기운이 비치는 걸 보니 곧 여명이 찾아들 것 같았다. 카를로스는 조심스럽게 아서를 안아 들었다.

“…시간이 늦었어. 형님과의 대화는 다음번으로 미뤄야겠군.”

“…….”

대화를 할 생각이 있긴 있었구나, 하는 눈으로 기사가 카를로스를 바라보았다.

카를로스는 제 품 안에서 꾸벅꾸벅 조는 아서를 지켜봤다.

이미 침실 내부엔 수면 향이 가득했는데 아서는 구속구를 찬 몸으로 놀라울 만큼 오래 버텨 냈다. 황족으로서 쌓아 온 독에 대한 내성과 마스터의 신체가 가진 저항력이 결합된 결과물일 것이라고 짐작되었다.

하지만 버텨 내는 것도 한계가 온 듯, 어느 순간 아서의 몸이 의식을 잃고 축 늘어졌다.

“이만 가지.”

카를로스가 아서를 들어 올린 채 품 안의 이동 스크롤을 가브리엘에게 건넸다.

“테르단 저택으로 간다.”

“예, 전하.”

짧게 답한 기사가 손안의 스크롤을 찢었다.

찰나 섬광이 터지고 세 사람의 인영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빛이 가라앉고 어두워진 침실에 남은 흔적이라곤 흐트러진 이부자리가 전부였다.

잠시 후, 텅 빈 침실에 아서와 똑같이 생긴 인물이 조용히 들어왔다. 침실 앞 호위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양 침묵을 지켰다.

남자는 침상 위에 구겨져있던 침의를 들어 걸치고는, 아서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자리에 몸을 눕혔다. 황태자가 자리를 비울 동안 그 빈자리를 채울 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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