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새벽이었다. 아서는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며 눈을 깜빡였다. 커튼 틈으로는 어슴푸레한 빛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간의 정적 뒤,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침실 문이 열렸다. 복도의 마법등 불빛이 스며들어 오자 방 안이 조금 밝아졌다.
“태자 전하, 기침하실 시간이옵니다.”
침실 입구에 선 부관 에드윈이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전하….”
본래 아서를 깨우는 건 시종의 일이었는데, 몇 차례 시종을 물렸더니 결국 부관이 침실로 찾아왔다. 아서가 제 몸에 손대는 걸 얼마나 질색하는지 아는 에드윈이 침실 입구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이른 새벽. 본래 아서라면 지금쯤 이미 정복을 다 갖추고 방을 나섰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달라진 아서는 누가 오든지 말든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는 저를 깨우는 소리를 한 귀로 흘렸다.
“날이 밝으면 그때 다시 와.”
아서가 이불 위로 눈만 살짝 드러내 부관을 쳐다봤다.
“예, 전하….”
사실 이른 기상이 익은 몸은 이미 잠이 달아난 지 오래였으나, 아서는 애써 뭉그적거리며 시간을 끌고 있는 중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카를로스도 돌아온 마당에 더 이상 일에 매달릴 필요가 없었으니까.
황태자는 한시도 쉴 틈이라곤 없는 자리였다. 매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잠자리에 들기 직전까지 숨 가쁘게 모든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아침 정무를 마치고 좀 쉴 수 있으려나 싶으면 부관이 슬금슬금 다가와 결재가 필요한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를 검토한 뒤엔 태자궁의 연무장에서 단련을 했다. 그렇게 몸을 좀 풀고 나면 다시 늦은 시간까지 끝없는 서류 더미에 파묻힌다. 여기서 끝인 것 같지만 아니다. 잠자리에 들기 직전까지도 부관이 옆에서 무어라 떠드는 말에 답을 해 주어야만 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귀족 회의에 참석해 황제의 마음에 차는 모습을 보여 주는 건 물론이다. 말이 쉽지, 황제의 높디높은 기준에 맞추기란 쉽지 않았다. 혹여나 흠이 잡힐까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고, 끝나고 난 뒤엔 격한 대련을 치른 것처럼 온몸에 진이 다 빠졌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 황태자 아서의 하루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전부가 빡빡한 일정으로 채워져 있단 소리였다.
당연히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아서는 매일 이른 새벽 어둑한 바깥 정경을 바라보며 침실을 벗어나야 했다.
보통 귀족들은 이렇게까지 몸을 혹사시키지 않았다. 일반적으론 가신에게 업무를 분담하여 핵심적인 사항만을 보고받는다. 한데 인간불신이 걸린 아서만이 과한 업무를 혼자 부담하고 있었다.
전생을 떠올리기 전까진 이 숨 막히는 일정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카를로스에 비해 부족한 점을 메우고자 밤낮없이 제 몸을 혹사시켰던 아서였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그가 아무리 죽을힘을 다해 발버둥을 쳐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이쯤 되니 아서도 그를 짓누르던 압박감에서 벗어나 편안해지고 싶었다. 평생을 숨 가쁘게 달려왔으니 내려놓을 때도 되었다.
이제 아서는 전과는 반대로 적당히 안온하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황제와 황후를 제외하곤 그를 강제할 자가 없으니 결심을 실천하는 건 쉬웠다.
그리 결심한 뒤로는 날이 밝고 난 뒤에야 침실을 벗어났다. 부관이 과도한 양의 서류를 가져오면 손을 저어 물렸으며, 유일하게 즐기는 단련 시간은 꼬박꼬박 챙겼다. 땀을 뺀 다음엔 몸을 씻고 집무실 한편의 카우치에 늘어져 실컷 낮잠을 잤다. 귀족 회의 때는 꼭 나서야 할 상황이 아니라면 입을 다물고 듣기만 했다.
그렇게 한 일주일 정도 늘어진 채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이제야 겨우 살 만해졌다 싶었건만….
“태자 전하. 황제 폐하께옵서 오늘 만찬에 들라 전하셨습니다.”
“…….”
아니나 다를까, 화가 난 황제의 부름을 받았다.
***
황제궁은 아서가 머무는 백색궁에 비해 규모가 컸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힌 정원이 궁성 주변을 둘러쌌고, 굴러다녀도 괜찮을 너비의 복도 양옆엔 굵은 기둥이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져 있다.
아서는 통로를 빠르게 지나 만찬장으로 향했다. 사방에서 조용한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그의 걸음걸이, 표정, 눈빛, 모든 게 관찰당하고 있단 게 느껴졌다.
감시를 당하는 게 익숙하다 하여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서는 귀찮게 들러붙는 눈알들을 떨쳐 내며 만찬장의 문을 열어젖혔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풍겨 들었다. 두 명분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많은 음식들이 완벽한 차림새로 준비되어 있었다.
기다란 만찬 테이블 끝에 편안한 차림을 한 황제가 보였다. 아서는 입구에서 짧은 묵례를 한 뒤, 주저 않고 걸어 들어가 황제의 앞에 섰다.
“지고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공손하게 예를 갖춰 인사하자 황제가 인자한 미소로 아서를 반겼다. 날카롭던 황제의 눈매가 휘며 눈꼬리 끝에 가느다란 주름이 만들어졌다.
“왔느냐, 태자.”
비공식적인 자리였기에 만찬장엔 최소한의 인원만 자리했다. 머지않아 저 몇 없는 이들도 조금 뒤엔 밖으로 쫓겨나게 될 터였다.
“어서 앉거라.”
“예, 아바마마.”
안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간 아서가 황제의 측면에 엉덩이를 붙였다. 주방장이 공을 들여 조리한 만찬이 긴 테이블 위로 차려져 있다.
“며칠 사이 뺨이 마른 것 같구나, 태자. 입맛이 없어도 끼니를 거르지는 말거라.”
“송구합니다. 심려 끼쳐드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어서 들거라.”
식기를 들기 전 부자는 틀에 맞춘 것 같은 안부 인사를 주고받았다. 아서는 적혀 있는 대본을 읽듯 기계적으로 답을 했다.
처음부터 좋은 목적으로 이 자리를 만든 게 아니었기에, 짧은 대화 뒤로는 자연스레 침묵만이 가득한 식사가 이어졌다.
아서는 예법에 어긋나지 않도록 신경 쓰며 눈앞의 음식을 먹어 치웠다. 불편한 자리인 것과는 별개로 식사는 입에 잘 맞았다. 어차피 본론은 식사의 막바지가 되어서야 꺼낼 테니 맘 편히 배를 채웠다.
그러다 슬슬 배가 차고, 씹는 속도가 하염없이 느려질 즈음이었다.
“태자. 요사이 좋지 않은 소문이 들리더구나.”
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서의 손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태자가 부쩍 게으름을 부리고 있다고.”
“…….”
지금쯤 딱 저 말을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예상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은 시작이었다. 아서는 갓 반항기에 접어든 사춘기 소년처럼 속으로 삐딱한 미소를 지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명목상의 아버지, 황제가 정찬을 핑계로 아들을 불러들여 하는 소리는 늘 이런 식이었다. 그동안의 노고는 언제나 그랬듯 무시하고 곧바로 쓴소리부터 건네는 것.
“송구하옵니다.”
입 안에 있던 음식을 천천히 삼킨 아서가 황제 쪽을 바라보지도 않고서 답했다. 이런 자신의 태도가 황제에게 건방져 보일 거란 걸 알았다.
그러나 황제가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든 말든, 더 이상 아서는 황제와 황후의 인정을 받기 위해 제 한 몸 불사를 생각이 없었다.
전생을 떠올림과 동시에 그는 자신이 평생을 학대받으며 자라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히나 정신적으로 지독하게 말이다.
아서가 이토록 삐뚤어진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은 타고난 기질 탓도 있겠으나, 하나부터 열까지 사사건건 카를로스와 비교를 해 대며 그를 깎아내리던 이들의 영향도 컸다. 항시 황제와 황후는 아서에게 하자가 있다는 것처럼 지껄였지만 그 두 사람의 문제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래, 태자. 네 아우가 그만한 공을 세우고 돌아왔으니 기운이 없을 만도 하지.”
황제가 아서의 맘을 이해한다는 듯 자상하게 말했다. 끓고 있을 속과 달리 겉은 온화하기 짝이 없다.
식사에만 전념하고 있던 아서는 그제서야 황제와 시선을 마주했다.
황제는 카를로스의 얼굴을 그대로 붙여 넣은 것처럼 똑 닮은 중년의 미남자였다. 차이점은 아버지인 황제 쪽이 좀 더 체격이 작고 부드러운 인상을 지녔다는 것 정도다.
주름진 눈가를 접으며 인자하게 웃는 황제가 이상적인 아버지처럼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하나 저 모습은 그럴듯하게 꾸며 낸 껍데기에 불과했다.
아서는 황제의 온화한 미소가 얼마나 차갑게 변모할 수 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전 날, 온화한 얼굴 위로 악귀 같던 표정이 덧씌워지던 모습이 아직까지도 선연했다.
아서가 카를로스와의 대련에서 패배한 날. 황제는 그때 처음으로 아서에게 본색을 드러냈다.
「믿을 수가 없군,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대련의 결과를 보고 받은 황제는 노한 얼굴로 아서를 불러들였다.
황제와 그의 기사, 그리고 아서만이 남은 침소였다. 노기를 담은 눈이 제 자식을 응시했다. 잠시 동안 화를 억누르듯 숨을 고르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딴 버러지랑 어울려 다니다 못해, 대련에서 패하기까지 해.」
「잘못했습니다. 아바마마, 저는 그러려던 게…….」
아서는 난생 처음 본 황제의 본모습에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황제는 변명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입 다물거라.」
사그라들 줄 모르고 타오르던 황제의 분노가 어디로 향했을지는 뻔했다. 그날 황제는 훈육을 핑계로 아서에게 손을 들었다. 악몽과 같았던 시간이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창백한 낯을 숨길 수 있는 시간이 되고 나서야 어린 아서는 몸 곳곳에 남은 검붉은 멍을 의복 아래 숨긴 채 황제궁을 나설 수 있었다.
아서의 뒤로는 이름 모를 기사 둘이 태자궁 침실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아서가 황후에게로 달려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오늘 이 자리 또한 그때처럼 황제의 분노를 풀기 위해 만든 자리일 터였다. 만찬장에 황후가 자리하고 있지 않은 걸 봐선 아서를 고이 돌려보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황후는 아서를 자신의 또 다른 분신처럼 여겼고, 아서가 받는 모욕을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다. 때문에 아서가 황제에게 물리적인 학대를 당했다는 사실을 아는 건 황제와 황제의 기사 필립이 전부였다.
황제는 아서의 뺨을 내려친 다음엔 늘 자상한 얼굴로 ‘못난 것, 서운해 말거라. 이게 다 너를 아끼는 맘이 지나쳐 그런 탓이다.’ 따위의 헛소리를 해 댔다.
전생을 떠올리기 전까지는 진실로 황제가 그를 아끼는 줄로 착각하고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게 단지 화풀이에 불과하단 걸 알았다.
차라리 아서는 얼른 뺨이나 맞고 이 지루한 만찬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몇 대 맞아 주는 대가로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았다.
“필립 경을 제외하고는 모두 물러나라.”
만찬이 끝나갈 때 즈음, 마침내 황제가 기사 필립을 제외하고는 모두를 밖으로 물렸다.
“태자. 이리 가까이 오거라.”
“예, 아바마마.”
황제가 아서를 가까이 불러들였다. 만찬 시작부터 아서가 황제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으니 이 정도면 황제로선 꽤 오래 참은 셈이다.
딱히 황제가 다른 소리를 덧붙이지 않았음에도 아서는 자연스럽게 황제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오랜 학습의 결과였다.
“요사이 짐의 마음이 좋지 않아.”
“송구하옵니다.”
“그 연유가 무엇 때문이겠는가.”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머리가 제대로 달려 있다면 잘못한 걸 알아야지.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 하고.”
황제는 아서의 머리채를 쥔 채 한 손을 들어 올렸다.
허공을 가르고 내려온 손바닥이 망설임 없이 아서의 뺨을 내려쳤다. 매서운 소음이 터졌다.
“…….”
아서는 작은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한 번으로 만족하지 못했다는 듯 황제의 손이 다시금 허공을 가로질렀다.
재차 짜악, 살갗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만찬장을 울렸다. 아서를 내려다보는 눈은 여전히 온화하기만 했다.
굴욕적으로 느껴질 만한 상황에서도 아서는 순종적으로 그 자리를 지켰다. 평상시 모든 이들에게 오만하게 굴던 아서를 보아 온 이들이라면 눈을 휘둥그렇게 뜰 장면이었으나, 제 아들의 뺨을 내려친 황제, 황제의 아래 무릎 꿇은 아서, 황제의 뒤를 지키고 선 기사에겐 이미 오래전부터 반복되어 온 일에 불과했다.
황제가 아서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황제는 아서에게 폭력을 가하면서도 보이는 곳에 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드물게 뼈나 근육이 상했을 땐 신관을 불러들이기도 했는데, 지금에 와선 그만한 정도의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다. 머리가 커진 아서가 반발심을 품을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카를로스와의 대련에서 패배했을 때 역시 아서의 겉모습만큼은 흠 하나 없이 번듯했다. 엉망이 된 속살은 어두운 옷감으로 감추었고, 그 누구도 황제궁에서 일어난 일을 짐작하지 못했다.
“태자. 요즘 들어 왜 이리 아비의 맘을 몰라주느냐?”
“…송구하옵니다.”
황제가 병 주고 약 주듯 아서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아끼는 강아지를 쓰다듬는 듯한 손길이었다.
사실 아서는 누군가에게 뺨을 맞는 것도, 이렇게 개 취급을 당하는 것도 좋아했지만 지금은 딱히 그렇지만은 않았다. 아무리 아서라고 해도 평생 그를 학대해 온 황제에게까지 그런 마음이 들진 않았다.
쓰다듬는 손에 뺨을 비비며 아서가 슬쩍 어리광을 피웠다. 대강 황제의 비위를 맞추고 이 자리를 벗어나고자 했다.
“쯧, 어리광은.”
황제의 목소리가 한층 너그러워진 게 느껴졌다.
“어리광을 부린다고 눈감아 줄 만한 일이 아니야. 네 동생이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왔다. 이 시기에 태자가 게으름을 부려서 되겠느냐.”
“송구하옵니다, 아바마마. …제가 처신을 잘못했습니다.”
황제의 말에 아서는 분한 척 눈을 내리깔았다. 성질 나쁜 황제는 늘 은근히 아서의 열등감을 자극하곤 했다. 아서가 카를로스를 증오해 못 견디겠다는 얼굴을 하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짐의 귀에 또다시 이런 헛소문이 들린다면, 몹시 마음이 아플 것 같구나.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거라.”
“예, 명심하겠사옵니다.”
“그래. 충분히 알아들었으면 되었다.”
황제가 아서의 뺨을 쓰다듬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아서에게 폭력을 가한 뒤 언제 그랬냐는 양 다시 애정 어린 손길을 건네는 황제였다.
“이만 물러가도 좋다.”
“황송하옵니다.”
아서가 순종적인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사실 그간 아서에게 황제의 폭력을 거부할 힘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여태까지 황제로부터 벗어날 생각을 못 했던 까닭은, 너무 오랫동안 애정을 가장한 폭력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랜 학대의 부작용은 여러 측면에서 나타났다.
아서는 제 일거수일투족이 전부 황제에게 보고되고 있음을 깨닫고, 주변 모든 이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을 강박적으로 두려워하여 언제 어느 때든 완벽한 차림새를 고수했다.
또한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면서 누군가와 닿는 행위를 끔찍하게 여겼다. 사람의 미지근한 체온이 징그럽고 역겹게 느껴졌다. 황제나 황후의 손길은 겨우 참아 냈지만 그 외 다른 이들의 손이 닿는 것은 신경질적으로 뿌리치곤 했다. 거부감이 심하게 들 땐 헛구역질까지 나왔다.
아서는 빠른 걸음으로 황제궁을 벗어났다. 목적지는 침실이었다.
집무실엔 에드윈이 있고, 궁성 곳곳엔 황제의 끄나풀이, 연무장엔 누구의 종속일지 모를 기사들이 있다. 침실만이 유일하게 아서가 홀로 있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침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기사 둘이 아서를 보고선 묵례했다.
“내일 아침까지 쉬겠다. 방해하지 마.”
아서는 침실 안으로 뒤따라 들어오려는 시종을 손짓으로 물렸다. 침실 문이 조용히 닫혔다.
그제야 혼자 남은 아서가 노곤하게 기지개를 켰다. 지금 이 상황 또한 황제에게 곧바로 보고가 들어갈 터였다. 그러든 말든 달리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전생을 떠올리고 나서야 아서는 황제와 황후가 그에게 베푼 것이 애정의 탈을 쓴 학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더는 그들을 예전처럼 따를 수 없게 되었다.
물리적인 보복을 가할 생각은 없었다. 그들을 죽이고 싶은 것까진 아니었으니까. 황제와 황후에 대한 보복으로는 아서가 황위에 오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원작까지 떠올린 마당에 아서가 황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전무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서는 더 이상 황위가 탐나지 않았다. 황좌는 보기에만 번지르르할 뿐 뒤따르는 부와 권력만큼 대가를 치러야 하는 피곤한 자리였다.
황제의 관을 쓰는 건 아서가 아닌 카를로스가 될 것이었다. 아서는 작위에 얽매이지 않는 여유롭고 한가로운 삶을 영위할 작정이다.
아서의 차후 계획은 단순했다. 한동안은 카를로스의 옆에서 제 방식대로 즐길 만큼 즐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버림당한다.
아마 그 과정이 카를로스에겐 썩 즐겁지 않을 수도 있겠다. 아서와 엮인 이들은 대개 서너 달 정도면 나가떨어지곤 했으니 카를로스도 비슷할 거라 치고, 길게 잡아 일 년 뒤 그때쯤 버림을 당하면 된다.
버림받기 전 카를로스에게 출생의 비밀을 들키는 것 역시 중요한 사항이었다. 약점이 붙잡힌 순간부터 아서는 카를로스에게 아무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러고 나면 카를로스의 성격상 아서가 황성을 나가 한량처럼 사는 것도 적당히 눈감아 줄 터였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아서가 카를로스를 한시적이나마 손에 넣는다는 전제하에 꿈꿀 수 있는 미래다.
혹여 카를로스와 미운 정마저 쌓지 못한 상태로 황성에서 쫓겨난다면, 차순위 황위 계승권을 가진 아서는 죽는 날까지 불안에 떨며 살아야 했다.
하물며 지금 이 시점에서 황족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들통난다면? 그날로 바로 아서의 모가지가 날아갈 게 분명했다.
황제를 만나고 온 탓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아서는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경박하게 다리를 떨어 대며 얻어맞았던 뺨을 주물럭거렸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상한 기분을 조금씩 풀어 주었다.
“…카를로스. 칼.”
어떤 수를 써야 잠시나마 카를로스를 제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머릿속에 온통 그 생각밖에 없었다. 본래 무언가에 몰두하면 집착이 심한 편이긴 했으나 그게 카를로스를 대상으로도 유효할 줄은 몰랐다.
어쩌면 이러한 소유욕 또한 제 열등감의 발로일지 모르겠다. 아서가 결코 가질 수 없는 걸 카를로스는 가지게 될 테니, 카를로스 자체를 가지고 싶은 것인지도.
아서는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니라 결과였다. 어차피 재미로 하는 짓이든, 남의 것이 탐이 나 그런 것이든 결과는 같았다.
매일 밤 아서는 카를로스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곤 했다. 동생이 죽었으면 좋겠다. 카를로스만 사라진다면, 아서의 세계는 완벽해질 텐데.
그렇지만 이제 카를로스는 죽으면 안 된다.
애초에 이 세계의 주인공을 무슨 수로 죽이겠냐만, 아서가 그를 가져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무조건 살아 있어야만 했다.
묘한 기분 들었다. 십여 년간 품고 있던 질투, 열등감 따위가 이제는 또 다른 무언가로 탈바꿈한 것만 같다.
꺾어야 할 정적이었을 땐 넘어설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던 카를로스가 이제는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아서는 이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
***
이불을 온몸에 칭칭 감은 아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요즘 아서는 매일매일 카를로스에게 무시당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부터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카를로스에겐 아서에 대한 믿음이 티끌만큼도 없었다. 아서를 툭툭 건드리며 속을 캐 보려고만 하지, 아서가 진심일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물론 카를로스의 예상대로 진심이 아니긴 했다.
저쪽에서 아서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어야 뒤통수를 치든 뭐든 할 수 있을 텐데, 어지간히도 의심을 내려놓지 않는 카를로스였다.
그래도 아서는 크게 조급해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 그렇게 아서의 애정을 갈구했던 카를로스였으니, 꾸준히 다가가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흔들릴 거라 믿었다.
생각보다 진척이 느리긴 했다. 그럼에도 나중의 결과를 생각하면 이 더딘 진전조차 기꺼웠다. 원래 저렇게 남을 쉽게 믿지 않는 이들이 뒤통수를 맞았을 때 더 크게 돌아 버리는 법이었다.
어느 날은 한 번 마음먹고 카를로스에게 절절한 연기를 선보였다. 아서를 막아선 가브리엘을 지나쳐, 카를로스의 집무실에 기어코 들어갔던 날이었다.
그날도 아서와 카를로스의 대화는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았다.
아서가 무슨 말을 하든 카를로스는 한 귀로 흘려들으며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서는 마치 벽에다 대고 말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카를로스.”
“예.”
“내 말을 듣고 있긴 한 건지 모르겠는데.”
“예. 듣고 있으니 말씀하세요.”
듣고 있기는 무슨. 입술을 사리문 아서가 이내 결심한 듯 말했다.
“…나라고 네게 이렇게 다가가는 게 쉽진 않아.”
“그렇습니까. 몰랐던 사실이군요.”
아서가 진지한 얘기를 꺼낼 것처럼 굴어도 카를로스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서 역시 카를로스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간에 제 할 말만 하기로 했다.
“…물론 그건 내 입장일 뿐이고, 네 쪽에선 내게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게 당연해.”
“딱히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습니다만.”
“그냥 난….”
아서가 머뭇거렸다.
“…우리의 관계가 잘못되고 있음을 깨달았으니, 이제라도 조금이나마 풀어 보고자 하는 거야.”
아서는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호소하는 쪽을 택했다. 그 편이 카를로스에게 더 잘 먹힌다는 걸 몇 차례 시험으로 확인한 뒤였다.
“그래서, 정확히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그제야 카를로스가 들고 있던 깃펜을 내려놓았다. 팔짱을 끼고선 어디 한 번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 아서를 비뚜름하게 쳐다본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고민되지만, 처음 시작점부터 말하는 게 좋겠지. 네가 변방으로 떠나고 난 뒤부터 종종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하더군.”
“그렇습니까. 여태 형님께 들은 것 중 가장 놀라운 얘기네요.”
“……머릿속이 복잡했어. 이대로 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면?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 건가. 다시는 너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네게 보여 준 마지막 모습이 그런… 못난 모습이라니.”
아마 카를로스를 전쟁터로 쫓아낸 그날이 아서가 몇 년 만에 편히 두 다리 뻗고 잔 날이었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못난 모습은 맞다.
그동안 노력했던 게 헛고생은 아니었는지 웬일로 카를로스가 아서의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아서는 신이 나서 열연을 펼쳤다.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되었을까, 밤새 고민을 거듭했어. 그래, 내가 모든 걸 다 망쳤지. 그때 난 너무 어렸고, 생각이 짧았고, 너를 시기했다. 난 너를 많이 아꼈지만, 동생에게 뒤처지고 있단 사실을 인정하는 게 죽을 만큼 괴로웠어. 솔직히 고백하지. 아직까지도 조금 버거워. 여전히 너에 대한 열등감을 완전히 떨쳐 내지 못했으니까.”
지금은 열등감이 사라진 자리에 괴이한 집착 같은 게 자리 잡았다. 세분화하자면 욕정, 피학성, 가학성, 소유욕 따위로 나눌 수 있겠다.
“이제 와 애써도 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가는 게 불가능하단 걸 알아. 단지 노력이나마 해 보려는 거야. …카를로스 네게 이 말만은 꼭 전하고 싶었어. 무척이나 후회하고 있다고.”
아서는 괴로운 목소리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자신의 과오를 떠올리는 얼굴은 부끄러움과 괴로움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대신 중간중간 울컥 올라오는 무언가를 삼켜 내며 진심을 다해 자신의 마음을 얘기했다. 과거의 일을 그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다고.
은근히 마음 약한 가브리엘은 이미 넘어온 지 오래였고, 그 옆에 있던 다른 부관 마노 역시 아서의 진심 어린 후회에 거의 속아 넘어간 것 같았다. 심지어 그렇게 의심 많은 카를로스조차 조금 긴가민가하는 기색을 보였다.
“…물론 이 또한 네게는 전부 거짓으로 들리겠지.”
말을 끝마친 아서가 씁쓸한 얼굴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할 말을 모두 마쳤으니 이만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당연히 카를로스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잠시 동안 불편한 침묵이 주변을 뒤덮었다. 집무실의 어느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카를로스는 얼굴을 찌푸린 채 아서를 빤히 쳐다만 보았고, 다른 이들은 형제간의 대화에 끼어들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아서가 호소하듯 카를로스를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카를로스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구석에 있던 부관 마노가 숨 막히는 정적을 못 견디고 마른침을 삼켰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서의 눈동자 위로 체념이 내려앉았다. 아서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결국 조용히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태자 전하.”
가브리엘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서는 그 부름을 듣고도 차마 뒤돌지 못해 굳어 있었다.
“전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차를 한 잔 내드려도 될까요.”
가만히 서 있는 아서를 달래듯 부드러운 권유가 뒤따랐다. 상황을 지켜보던 카를로스는 ‘또 오지랖을 부리고 있군.’이란 표정을 지었지만 딱히 가브리엘을 질책하지는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아서가 가브리엘의 권유를 마지못해 승낙했다. 갈 것처럼 굴어 놓고 다시 돌아선 게 조금 창피한 듯 머뭇거리다가, 느릿느릿 자리로 돌아갔다.
부관 마노가 테이블 위로 정신없이 펼쳐져 있던 서류를 한구석으로 밀어냈다. 그 자리에 가브리엘이 들고 온 자그마한 찻잔이 놓였다.
“…고맙군, 가브리엘.”
아서가 조심스럽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좀 전과는 다른 조금은 간지러운 침묵이 맴돌았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에게 다행히도, 숨이 막히도록 어색했던 티타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서는 집무실에 있는 내내 차를 마시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결국 조금 창피해하며 자리를 떴다.
난생처음 보는 황태자의 무른 모습에 다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도망치듯 떠나는 뒷모습만 망연히 지켜봤다.
아서야 속으로 희희낙락했다. 남들에 비해 양심이란 게 희박한 아서는 타인을 속이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원작의 아서가 죽기 직전 즈음이었던가, 카를로스가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이 나왔었다. 아서와 달리 카를로스는 끝끝내 아서가 그의 손을 잡아 주었던 순간을 잊지 못했다.
반면 아서는 그들의 과거를 잊고 있었다. 떠올려 봤자 하등 좋을 게 없어 의식적으로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었다.
어릴 때 형제간 사이가 좋았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카를로스와의 대련에서 패한 뒤, 아서 쪽에서 일방적으로 제 동생을 조금씩 밀어내기 시작했다.
아서는 자신의 궁에 찾아온 카를로스를 무정한 말로 밀어냈다. 일 년 정도를 그리 매정하게 굴자 카를로스는 더 이상 아서에게 쉽사리 말을 붙이지 못했다. 그 후로도 카를로스는 아서를 마주칠 때마다 간절한 얼굴로 소리 없이 매달렸다. 아서는 맹목적이다시피 따라붙는 시선 또한 차갑게 외면했다.
가끔 어린아이를 괴롭히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 때도 있었지만, 잘하고 있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어머니의 손길에 금방 잊어버렸다.
아서가 카를로스에게 베풀었던 건 딱 그 정도의 얄팍한 애정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들의 과거가 카를로스에게 큰 의미일 거라 생각지 않았다. 이미 어긋날 대로 어긋난 관계에서 무슨 의의를 찾겠냐며 회의적으로 단정 지었다.
그러다 연회장에서 카를로스의 반응을 보고 뒤늦게 깨달았다. 카를로스는 여태까지 그 시절을 잊지 못했다. 어이없게 그때서야 원작의 카를로스가 과거를 회상했던 장면이 번뜩 떠올랐다.
그 이후로 아서는 과거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적당히 다정하게 카를로스에게 다가갔다. 전처럼 이것저것 선물을 보내고 카를로스의 안부를 물었다.
결과는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내키지 않을지언정 자주 보다 보면 정이 붙기 마련이라, 시간이 지날수록 카를로스를 포함한 주변인들 모두 달라진 아서의 모습에 점차 익숙해지고 있었다. 개중에 마음이 약한 편인 가브리엘과 부관 마노는 오늘부로 아서에게 완전히 넘어온 것처럼 보였다.
아마 아서가 이대로 꾸준히 카를로스에게 다가간다면, 카를로스 또한 아서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게 될지 몰랐다.
하지만 그래서는 좀 곤란했다.
아서가 원하는 건 평범한 형제 놀음이 아니었다. 이렇게 공들여서 탑을 쌓고 있는 건, 카를로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들여 쌓은 탑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카를로스가 다시금 제 형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다가 마침내 두 번째 배신을 당하고, 지긋지긋한 형제의 작태에 치를 떨며 그를 가두고 있던 최소한의 도덕마저도 깨부숴 버리는 그 순간.
오직 그 순간만을 위해 이렇게 공을 들이고 있는 거였다. 그날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서는 가슴이 저릿해졌다.
쉬운 목표는 아니었다.
만약 카를로스가 아서에게 일말의 애정조차 품지 못한다면 속았음을 깨닫는 순간 아서를 내칠 것이었고, 혹 아서를 자신의 형제로 받아들여 버려도 동정심 때문에 아서에게 모질게 대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서는 그 중간 어디 즈음에 위치하고 있어야 했다. 카를로스가 어느 정도는 아서에게 마음을 내주고도, 한편으로는 어딘가 미심쩍은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도록.
그를 위해 아서는 다정한 형님 행세를 하면서 동시에 이따금씩 카를로스에게 단서 아닌 단서를 드러냈다. 은근하지만 명확하게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나는 여전히 너를 싫어하며, 단지 다른 목적을 위해 참고 견디는 중일 뿐이라고.
그리고 당연하게도, 눈치 빠른 카를로스는 아서가 오랜 시간에 걸쳐 흘린 메시지를 서서히 알아차렸다.
***
제국 중앙부는 한 해 중 서너 달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맑은 날씨를 유지했다.
황도와 그 주변부는 지나치게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전해 내려오는 말로는 제국의 건국 시조라는 블랙 드래곤이 내려 준 축복 덕분이라고 한다.
제국 외곽으로 갈수록 숨 막히는 더위와 발광하듯 쏟아지는 눈발에 시달렸다. 아서는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겪은 적은 없었다. 황도 근처를 벗어날 일이 크게 없던 아서에겐 지금의 어중간한 날씨가 익숙했다.
어느덧 날이 서서히 따뜻해지고 있었다. 청량하던 바람이 이제는 미지근하게 옷깃을 스쳤다.
마치 낮잠이나 자라고 부추기는 듯한 햇살 아래에서, 아서와 카를로스는 연무장을 찾았다.
카를로스가 수도로 귀환한 게 벌써 반년 전 일이었다.
전보다 부쩍 가까워진 형제는 이따금씩 적색궁의 연무장에서 가벼운 대련을 치렀다. 그간 일어난 몇 가지 변화 중 하나였다.
처음 두 사람에게 가벼운 대련을 해 보는 건 어떠냐 제안한 건 가브리엘이었는데, 첫 대련은 지금 생각하여도 도망치고 싶을 만큼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하아,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수고하셨습니다, 형님.”
“응, 너도.”
다행히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다. 이젠 이처럼 대련 전후로 짧은 대화도 나눌 만큼 어색한 기운이 가셨다.
아서는 땀으로 축축해진 눈가를 닦아 내며 검을 집어넣었다. 열이 오른 목덜미를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두 사람의 실력 차이가 있다 보니 그들의 대련은 사실상 일방적으로 흘러갈 때가 많았다. 대련이 끝나고 나면 이처럼 아서 홀로 버거워 숨을 헐떡였다.
아서가 숨을 고르는 동안 카를로스는 가만히 그 자리를 지켰다. 검을 맞부딪히는 시늉만 하다 쌩하니 가 버린 첫날 대련에 비하면 놀라운 변화였다.
“실례하겠습니다, 전하.”
대련이 끝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종자 둘이 곧바로 그들에게 달려왔다. 종자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보호구를 해제했다. 왼 가슴 보호구를 떼어 내자 그 부위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아서는 종자가 건넨 부드러운 천으로 이마의 땀을 훔쳐 냈다. 며칠 전에 비해 기온이 많이 오른 것 같았다.
“벌써 날이 꽤 더워졌어.”
한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카를로스 쪽을 힐끗 쳐다보니, 그는 방금까지 검을 휘두른 사람답지 않게 멀끔했다.
“아직 선선한 편인 것 같습니다만. 이렇게 포근한 날씨는 또 오랜만이군요.”
“아…. 그렇지. 너는 변방에서 오래 지냈으니까.”
카를로스의 말에 아서가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변방의 날씨에 익숙해진 카를로스에게 이만한 기온은 더운 축에도 끼지 못할 것이다.
“예, 이맘때쯤 그곳은 한 발짝 걸을 때마다 숨이 막히더군요. 물론 그건 겨울에도 마찬가지였고.”
카를로스의 시선이 먼 곳으로 향했다. 수도를 떠나 있던 시절을 떠올리는 듯했다.
“…그간 고생이 많았겠어.”
“형님이었더라면 분명 얼마 못 버티고 수도로 돌아왔겠죠. 내가 간 게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카를로스를 변방으로 보낸 장본인인 아서로선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지레 찔려 시선을 피하고 있으니 카를로스가 삐딱하게 웃었다.
“바로 궁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그래야겠어. 땀 때문에 찝찝해.”
“예, 그러세요.”
아서는 땀 핑계를 댔지만 사실 땀보다 다른 게 더 불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대련용 검을 종자에게 건넨 아서가 연무장을 가로질러 걸어 나갔다.
카를로스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이내 아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딱히 아서를 따라가야 할 이유가 없음에도 그는 당연하다는 듯 아서의 뒤를 쫓았다. 조금 더 빨리 걷는다면 옆에서 걸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까진 하지 않았다.
“…….”
어릴 적부터 아서의 뒤를 쫓는 게 익숙했던 탓이었을까. 아서와 팔 하나 정도의 거리를 두고 뒤따라가던 카를로스는 문득 선명한 기시감을 느꼈다.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부드러운 햇살과 뺨을 스치는 잔잔한 바람, 그가 보는 풍경 속의 아서. 이러고 있으니 꼭 어렸을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는 아서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카를로스는 저도 모르게 아서에게로 손을 뻗었다.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건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핑계를 찾지 못한 손끝은 아서의 목덜미에 내려앉아 있던 잎사귀로 홀린 듯 향했다.
“형님 여기-.”
그러나 그 순간, 다가가던 카를로스의 손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살끼리 부딪힌 것 같지 않은 둔탁한 소리가 터지며 형제의 짧은 평화를 깨트렸다.
“…나뭇잎이.”
뒤늦게 나온 목소리는 아무 의미 없이 허공에 흩어졌다. 카를로스의 손길은 미처 아서에게 제대로 닿지도 못했다.
놀란 아서가 뒤를 돌았다. 형제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찰나 아서의 눈동자에 짙은 당혹이 스쳐 지나갔다.
“…….”
“…….”
잠시간 형제 사이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서는 어딘가 허가 찔린 사람처럼 입을 달싹였다. 반면 카를로스는 좀 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미안. 나도 모르게.”
아서가 한발 늦게 사과했다.
하지만 때늦은 사과로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되돌릴 수 없었다.
카를로스는 가만히 아서를 들여다보다, 뒤늦게서야 욱신거리는 손을 의식하고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꽤 힘을 실어 쳐 냈는지 통증이 살을 타고 번졌다. 아서가 그의 눈치를 살폈다.
“…괜찮아?”
“예. 괜찮습니다.”
부딪힌 부위를 중심으로 서서히 붉은 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카를로스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아서의 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미지근한 손끝이 피부에 닿자 아서의 등허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는 개의치 않고 목에 붙어 있던 잎사귀를 천천히 떼어 냈다.
축축한 살에서 열감이 느껴졌다. 땀에 젖은 목덜미가 빛을 받아 반들거렸다. 그는 잎이 붙어 있던 자리를 검지로 보란 듯이 쓸어내렸다.
“아, 왜….”
“이게 붙어 있길래.”
카를로스가 손끝에 잡힌 작은 잎사귀를 들어 보였다. 그 모든 일련의 과정 동안 아서는 눈에 띄게 뻣뻣이 굳어 있었다.
“…아아, 고마워.”
감사를 표하는 목소리에선 숨길 수 없는 불쾌감이 묻어났다. 당장이라도 카를로스의 손이 닿은 부위를 털어 내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놀라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잎을 떼어 내려고 했던 것뿐인데.”
“…아냐. 내가 과민하게 반응했어. 미안.”
“사과할 것까지야. 이만 들어가 보시죠, 형님.”
“…그래, 수고했어. 또 봐.”
“그래요.”
아서가 애써 웃었다. 평소와 같았으나 묘하게 경직된 미소였다. 카를로스는 그 미묘한 차이를 곧바로 인지했다.
“그럼 먼저 가 볼게.”
멀어지는 뒷모습엔 작은 주저함도 없었다.
이번에 카를로스는 아서를 뒤따라가지 않았다. 가만히 서서 점점 작아지는 뒷모습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서 특유의 옅은 백금발은 멀리서도 그의 시선을 끌었다. 멀어지는 아서를 보고 있자니 불현듯 미미한 짜증이 일었다.
제가 먼저 이틀 걸러 하루씩 얼굴을 들이밀어 놓고선, 고작 손끝 한 번 닿았다고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는 게 카를로스 입장에선 이해가 되지 않을 따름이었다.
저절로 눈매가 찌푸려졌다. 어차피 아서가 그의 손길을 피할 거라고 예상하긴 하였으나, 그렇다 하여 손이 내쳐진 게 유쾌하진 않았다.
문득 목 뒤로 열감이 느껴졌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그의 목덜미를 식혀 주었다.
덥다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어느샌가 알 수 없는 열기에 몸이 데워져 있었다. 아서에게서 열이 옮겨져 온 것 같았다.
형님의 저러한 결벽적인 성미는 이전부터 공공연히 알려져 있던 사실이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카를로스도 알지 못했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아서는 누군가 제 몸을 건드리기만 해도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황제와 황후와의 접촉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차마 다른 이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쳐 내진 못했을 뿐 은근히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아서가 제 양친을 얼마나 따르는지를 떠올려 본다면, 그 증세가 얼마나 심한 수준인지 알 만했다.
심한 결벽증 탓에 아서는 성년이 한참 지난 지금까지 혼인을 하지 못했다. 황실에서 정식으로 혼인 절차를 거치려면 입회인을 셋 이상 둔 채로 첫날밤을 치러야 했는데,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던 탓이다.
떠도는 소문이야 무성하게 많았다. 황태자의 지랄맞은 성미에 상대가 못 견디고 떨어져 나갔다, 황태자가 침실에서 검을 들고 난동을 피웠다, 교접을 시도하다 상대의 얼굴에 토악질을 했다는 둥.
몇 차례 시도 끝에 한계에 다다른 아서는 후계가 필요하다면 차라리 황제의 숨겨 둔 자식 중 하나를 제 밑으로 데려오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 카를로스 또한 죽은 누이의 딸을 제 아래에 입적시켜 놓은 터라 더 거리낌이 없었다.
비록 미수에 그쳤으나, 아서는 실제로 황제의 어린 자식 중 하나를 데려와 자신의 아들로 입적시키려 시도했다. 사람과 살을 섞기 싫다는 이유로 미혼부가 되는 것도 감수하려 들 정도였으니, 결국 황제도 아서의 혼인에 한하여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물론 오를레앙 대공가가 아서의 뒤를 봐주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본인이 거부해도 강제로 혼인이 성사되었을 것이다. 굳이 결혼 동맹이 아니더라도 아서의 뒤에서 오를레앙 대공이 굳건히 받쳐 주고 있었고, 역대 황제 중에 미혼인 경우가 없던 것도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카를로스는 이 모든 과정을 바로 옆에서 빠짐없이 지켜본 사람이었다. 아서의 결벽증 증세가 얼마나 심한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건 그가 변방에서 돌아오기 전의 이야기였다. 떨어져 있던 기간이 짧지 않은 만큼 아서에게도 새로운 변화가 생겼을 테다. 그는 예전처럼 아서를 속속들이 알지 못했다.
이제 아서는 연회장에서 파트너의 손을 잡을 수 있었고, 타인과의 접촉을 과하게 기피하진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카를로스의 손을 쳐 낸 것이 단지 타인의 손이 닿는 게 싫어서였는지, 아니면 그의 손이었기 때문인지 명백히 단정 지을 수 없었다.
***
카를로스는 가라앉는 의식 속에서 눈을 떴다. 이상하리만치 몸이 무거웠다. 흐릿한 시야에 아서의 모습이 보였다.
미처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그의 뺨 위로 다정한 버드 키스가 내려앉았다. 눈꺼풀과 코끝, 볼 곳곳에 입술로 도장 찍는 소리를 내며 아서가 애정을 쏟아 냈다.
‘칼, 형아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화 풀어, 응?’
눈을 뜨자마자 당장 제 옆의 형제를 걷어찰 심산이었던 카를로스는 무겁게 축 가라앉아 있는 몸을 자각했다.
몸 상태가 이상했고, 눈앞의 아서 또한 현재에 비해 턱없이 어려 보였다.
오래간만의 꿈이었다.
순간적으로 꿈과 현실을 혼동할 뻔했다. 잠결에나 할 법한 멍청한 착각이었다. 현실의 아서 역시 근래 들어 그에게 다정한 척 굴었던 건 사실이나, 이런 허물없는 스킨십을 건넨 적은 없었다.
그동안의 일들을 되짚어 보니 그러했다. 그가 수도로 귀환하고 반년이 흐른 동안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친근한 접촉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놀랍게도 둘은 흔하디흔한 포옹이나 악수조차 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서가 그를 끌어안으려 했더라도 뿌리쳤을 테지만, 꿈속의 아서를 보고 있으니 어쩐지 속았다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팠는데 형이 없어서 서운했구나. 맞지?’
이건 카를로스의 기억 조각이었다. 어린 카를로스가 몹시 아팠던 날이자 태어나 처음으로 아프다며 어리광이란 걸 부려 봤던 날. 어렸던 카를로스에겐 벅찰 정도로 행복했던, 그러나 아서에겐 그저 보통날 중 하나로 잊혀졌을 게 분명한 기억이다.
카를로스는 무표정한 눈으로 아서를 올려다봤다. 얼굴 가득 미안함을 가득 담은 채 내려 보는 저것이, 현실의 아서가 흉내 낼 수 없는 진짜 애정이었다.
‘왜 그렇게 뾰로통한 얼굴이야. 오늘은 형아랑 같이 자자. 이리 와.’
금빛 고수머리의 아서는 인형처럼 예쁘장했다.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통통한 볼엔 발그레 홍조가 올라와 있었다.
당시의 카를로스에겐 한없이 어른처럼 보였던 아서는 이제 보니 그저 다 자라지 못한 소년에 불과했다. 저 덜 자란 몸으로 어떻게든 형 노릇을 하려 애쓰는 걸 보고 있으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서가 카를로스의 손을 끌어 말랑한 손끝에 쪽쪽 입을 맞추었다. 한 줌만 한 손을 퍽이나 귀여워하는 눈치였다.
저 나이에 오 년이면 꽤 큰 차이였다. 아서의 눈에 제 어린 동생이 귀여워 보일 만도 했다. 물론 그 귀엽던 아우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기 시작한다면 그때부터 말이 달라질 테지만 말이다.
‘약도 먹었겠다, 얼른 자자.’
카를로스를 걱정스레 내려다보던 아서가 슬금슬금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덜 자란 소년의 몸이어도 그보다 다섯 살 어린 카를로스가 품에 쏙 안길 만큼은 되었다.
맞닿은 살갗은 딱 알맞은 정도로 시원했다. 열이 오른 몸에 서늘한 살이 와 닿았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축 처져 있는 몸과 열에 들뜬 듯 지끈거리는 머리 때문인지 카를로스는 아서와의 접촉을 밀어낼 의욕조차 생기지 않았다.
어색한 자장가와 함께 아서의 손이 카를로스의 등을 살살 쓸어내렸다. 어릴 적 아서는 카를로스가 잠이 들 때까지 인내심 있게 등을 쓸어내려 주곤 했다. 그 손길을 계속 느끼고 싶었던 아이가 애써 쏟아지는 잠을 밀어내고 있던 건 알지 못했을 테다.
무의식적으로 떠올린 기억에 희미한 짜증이 일었다. 카를로스는 어깨를 비틀어 아서의 팔을 밀어냈다. 고개는 여전히 아서의 품에 묻은 상태였다.
모순적인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 도무지 아서를 밀어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과거 자신의 나약했던 모습이 낱낱이 까발려지는 감각이 불쾌했다.
그의 미약한 거부에 등을 쓰다듬던 손길은 곧바로 멈추었다. 아픈데 자꾸 건드려서 싫었나 보네. 다정한 목소리가 듣기에 거슬렸다.
카를로스는 고개를 들어 아서를 올려다보았다. 이젠 형제를 내려다보는 게 더 익숙해진 줄 알았으나, 이제 보니 딱히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한참 아서의 눈을 마주 보던 시선이 서서히 소년의 목덜미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꿈속 아서는 다 자란 아서와 달리 좀 더 가느다란 선을 가지고 있었다.
메마른 나뭇잎이 붙어 있던 자리…. 카를로스는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귀와 맞닿는 부분부터 어깻죽지와 이어져 있는 승모근까지 검지로 선을 이었다. 아서는 간지러운지 킥킥거리며 몸을 비틀었지만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카를로스는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내친김에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 뚜렷한 쇄골 위를 따라가며 보이지 않는 그림을 느릿하게 그렸다.
그가 저 내키는 대로 이곳저곳을 만져 대고 있어도, 그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엔 어떤 불쾌감도 엿보이지 않았다.
‘오늘따라 내 동생이 왜 이렇게 귀엽게 굴까.’
아서가 카를로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현실의 아서는 손끝만 스친 걸로도 제 손을 뿌리치는데, 이쪽은 귀엽다며 끌어안기까지 한다.
아서가 그를 꽉 끌어안은 탓에 코끝에 아서의 목덜미가 닿았다. 느껴질 듯 말 듯 한 봄바람 같은 향기가 느껴졌다. 카를로스는 무심코 부드러운 살에 고개를 묻고 숨을 들이쉬었다. 기분 좋은 향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보드라운 살갗에 조용히 입을 맞대었다. 아무리 어리다 해도 형제간에 이루어지기엔 조금 묘한 행동이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 모든 건 꿈이니까. 그저 내키는 대로 행동할 뿐이었다.
가만히 살갗의 감촉을 느끼다 입술로 천천히 빨아들였다. 당황한 아서가 몸을 움츠려도 카를로스는 제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향이 카를로스를 부추겼고, 그는 굳이 제 충동을 억누르지 않았다. 그가 만들어 낸 꿈이었으니 꿈속의 아서 또한 그의 것임이 당연했다.
***
“황자님, 포로 문……. 사절….”
연회장 구석에서 부관의 보고를 받다 말고 카를로스가 고개를 돌렸다. 어딘가에서 청량한 향기가 느껴졌다. 그는 온갖 냄새에 뒤섞여 희미하게 사라지는 것을 뒤쫓아 시선을 옮겼다. 익숙한 향의 끝엔 그의 형제, 아서가 서 있었다.
카를로스는 미미하게 찌푸린 눈으로 아서를 훑어 내렸다. 맞은편의 파트너를 보며 웃고 있는 아서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미소 짓는 얼굴은 꿈속 아서의 것과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이제 보니 그간 헷갈렸던 게 우스울 정도로 과거와 턱도 없이 달랐다.
파트너의 허리를 감고 있는 손이 시야에 걸렸다. 그의 손이 닿은 곳을 털어 내고 싶어 하던 얼굴을 했던 이가, 다른 이의 몸은 아무런 불쾌한 내색 없이 감싸 안고 있었다.
아서와 그의 파트너가 무어가 그리 즐거운지 서로를 마주 보고 웃었다. 카를로스는 그 광경을 불쾌하게 지켜보았다.
요사이 아서는 명실공히 사교계의 꽃이나 다름없었다. 이전엔 손 한 번 스치기 힘들 정도로 까탈스럽게 굴던 황태자가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어 주니, 다들 몸이 달아서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권력자의 눈에 들어 보려 애썼다.
황태자가 이때까지 어느 누구와도 만남을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그 평판을 드높이는 요인 중 하나였다. 오직 단 한 사람만을 위해 아껴온 마음이라, 그럴듯한 수식어이긴 했다.
아서는 다른 이와 몸이 닿기 싫다는 이유로 혼인까지 거부한 사람이다. 능숙해 보이는 외관과 다르게 아무런 성 경험이 없거나, 시도를 했더라도 미수에 그쳤을 것이 분명했다. 감히 황태자의 성 경험 유무를 대놓고 떠들지는 못했으나 대부분의 귀족들은 그렇게 추측하고 있었다.
카를로스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맞은편의 파트너가 은근히 성적 뉘앙스가 담긴 제스처를 건네는데도 아무것도 모르는 듯 태평한 얼굴을 보며 추측은 곧 확신으로 굳어졌다. 저 멍청한….
아서처럼 강박적으로 사람을 피하지 않고서야, 보통 저 나이대쯤 되면 다른 목적을 품고 다가오는 자를 구분할 줄은 알았다.
카를로스는 꿈속 아서의 어설프던 자위를 떠올렸다. 그가 아는 아서라면 자위조차도 더럽다는 이유로 기피했을 게 분명했다. 설령 이제 와서 누군가를 만난다 해도 좆을 쓰는 법이나 제대로 알긴 할까 의문이었다.
“…저, 황자 전하?”
보고를 듣다 말고 다른 곳만 보는 카를로스의 모습에, 부관이 당황하여 그를 불렀다.
“듣고 있으니 계속 말해.”
카를로스는 아무렇지 않게 보고서로 눈을 돌렸다. 여전히 온 신경은 아서에게로 쏠려 있었다. 중간중간 아서의 웃음소리가 들리면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이쯤 되니 그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아서는 목덜미가 홧홧하게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샹들리에 불빛이 연회장 홀을 비추었다. 보석 가루처럼 펼쳐진 불빛 아래에서 아서는 파트너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몸에 익은 버릇대로 발을 움직이며 머리로는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파트너와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노골적인 시선이 꽂혀 들었다. 카를로스는 굳이 제가 쳐다보고 있단 사실을 아서에게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어젯밤 꿈에서도 카를로스는 아서를 저런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서는 파트너의 손을 잡고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전날의 꿈을 회상하니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드디어라고 해야 할지. 전날 밤 카를로스가 이때까지 보이지 않던 행동을 했다. 비록 그 과정에서 페로몬의 개입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첫 꿈에서 아서의 좆을 밟아 터트리려 했던 카를로스가 아서의 목에 입을 맞춘 건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반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기실 전날 꿈은 현재의 아서와 과거의 아서를 비교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낸 꿈에 불과했는데, 그것이 예상외로 형제의 관계에 큰 전환점이 되어 주었다. 아서의 입꼬리가 재차 실룩거렸다.
반쯤 몽마의 피가 섞인 아서는 상대를 끌어당기는 페로몬을 흘려 낼 수 있었다. 성욕이든 소유욕이든 무엇이든 간에 상관없이, 오직 아서에게 어떤 욕망을 품고 있는 이들에게만 효능이 있는 페로몬이었다.
반쪽짜리 페로몬은 그 향이 무척이나 희미했다. 카를로스처럼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면 흐릿한 향을 감지해 내는 것조차 불가능할 터였다.
이런 경우에는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장점이 되었다. 향이 옅기 때문에 순수한 살 내음으로 착각하기에 적합했다. 만약 순혈의 것처럼 뚜렷한 향을 품고 있었다면 카를로스는 분명 페로몬의 존재를 의심했을 것이다.
아서는 자꾸만 들뜨려 하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생각 같아선 당장이라도 카를로스를 부추겨 침실로 향하고 싶었지만, 아직까진 판이 완전히 무르익지 않았다. 운이 좋다면 하룻밤 정도는 성사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게 지속적인 관계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몰랐다. 아서는 하룻밤 상대 이상으로 카를로스가 욕심이 났다.
카를로스에게 보여 주기 위한 춤은 이제 막바지 단계였다. 아서는 미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파트너의 손길을 모르는 척 흘려 보냈다. 성적으로 무지한 황태자라는 타이틀은 이런 때 써먹기가 용이했다.
“남은 연회도 편히 즐기길.”
“예. 전하께서도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라요.”
아서는 파트너와 짤막한 인사를 주고받은 뒤 연회 홀을 빠져나왔다. 여유로운 걸음걸이와 달리 머릿속은 바삐 돌아갔다.
카를로스가 이토록 열렬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되었다. 분명 이전번 손을 쳐 낸 일로 카를로스의 안에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을 테다. 아서는 그러한 그의 생각에 확신을 심어 줄 생각이었다. 그를 위해서는 가브리엘의 작은 도움이 필요했다.
아서는 큰 고민 없이 가브리엘에게 다가갔다. 기사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었다. 그는 이 많은 군상들 사이에서도 정말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 남자였다.
가브리엘은 얼마 전까지 전쟁터를 구르다 온 사람답지 않게 기품이 흘렀다. 실제로 공작가의 둘째였으니 귀한 핏줄이 맞긴 하다. 그는 가문에 분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제 누이의 지위를 견고히 하기 위해 가문을 나와 황실 기사가 된 인물이었다. 물욕이라곤 전혀 없는 청렴한 기사의 표본이라 할 수 있겠다.
아서를 발견한 가브리엘이 가슴에 손을 올려 정중히 예를 표했다.
“가브리엘 이안 폰 우드힐,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또 보는군, 가브리엘.”
“예, 전하. 요즘 들어 부쩍 자주 뵙는군요.”
아서를 바라보는 가브리엘의 시선은 전보다 한결 부드러웠다. 온기가 서린 황금색 눈동자는 연인을 보는 것 같기도, 또는 귀여운 동물 같은 걸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여튼 저 눈이 문제였다. 전부터 기사의 무의미한 다정함이 여러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저토록 쓸데없이 다정하게 쳐다보니 마주한 사람으로 하여금 이상한 착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과거의 아서도 저 눈에 속아 넘어간 얼간이 중 하나였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아서가 착각을 했던 데엔 나름 근거가 있었다.
가브리엘이 그의 목숨도 구명해 준 데다가, 듣자 하니 카를로스에게 아직 기사의 맹세도 바치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저런 눈으로 그를 쳐다보기까지…. 나의 기사가 되어라 하면 못 이긴 척 수락할 줄로 알았다.
「송구하옵니다, 태자 전하. 저는 이미 2황자 전하를 모시는 몸입니다.」
결과적으로는 크나큰 착각이었다. 가브리엘은 아서가 무슨 짓을 해도 일관된 태도로 아서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수락하는 게 더 말이 안 되었다. 가브리엘은 오래전부터 카를로스의 진영에 속한 기사였다. 가브리엘이 카를로스에게 맹세를 바치지 못한 건 순전히 카를로스 쪽에서 거부하여 미뤄진 것에 불과했다.
아서가 볼 때 가브리엘은 모순적인 면이 있는 남자였다. 무엇이든 들어줄 듯 온화하게 바라보면서도 필요하다면 어느 때든 무심해질 수 있었다. 아마 가브리엘에게 그 자신의 사적인 감정은 그다지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을 터였다.
기사에게 가장 중요한 일순위는 주군에 대한 신의였다. 가브리엘이 아서를 몰래 돕는 것도, 아서와 카를로스의 사이가 좋아지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카를로스에게 이로울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아서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경에겐 매번 고맙군. 덕분에 카를로스랑도 전보다 훨씬 가까워졌어. 이전에 대련을 권유해 준 것도 고맙게 생각해.”
“다행입니다. 혹여나 전하께서 대련을 불편해하진 않으실까 우려했던 터라.”
“대련이 마냥 편하진 않았다만…. 그 또한 필요한 과정이니 감수해야겠지. 걱정 말아.”
그리 말하고 아서가 씩 웃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요즘 경은 어찌 지내는가? 여유가 있다면 다음번엔 경이 나와 대련해 주는 건 어때.”
짧은 감사로 대화의 물꼬를 튼 아서는 본격적으로 가브리엘에게 친근한 척 굴었다.
“저는 언제든 좋습니다, 전하. 편하신 때에 불러 주십시오.”
“그래? 언제든이란 건 내일 당장도 된다는 건가?”
아서가 가브리엘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두드렸다.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카를로스를 의식한 행동이었다. 카를로스 정도면 뒤통수에도 눈이 달려 있는 수준이니 분명 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을 터였다.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가브리엘이 미묘한 얼굴을 했다.
“…예. 전하께서 괜찮으시다면 그리하십시오.”
“그럼, 정말로 그렇게 할까.”
“예. 좋습니다.”
요사이 아서는 반백수처럼 지내느라 시간이 넘쳐 났다. 하루하루 한가하게 보내다가 황제궁으로 끌려가면 진심 아닌 사죄를 늘어놓으며 꿋꿋이 버텼다. 황제에게 쓴소리를 듣고 나선 며칠 정신을 차린 척하다가 다시 흐트러지길 반복했다.
이따금씩 황제에게 얻어맞는 걸 제외하곤 달리 문제될 건 없었다. 아서의 빈자리는 황제나 황후의 측근인 부관들로 채우고 있었다. 아서가 할 일은 최종 서류에 서명을 하는 것뿐이었다. 아서는 여유로웠고 종종 심심했다.
계획에 없던 약속은 정오를 지나 가브리엘이 백색궁으로 찾아오는 걸로 결론이 났다.
“오랜만의 연회인데,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아 둔 게 아닌지 모르겠군.”
“아뇨.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목적한 바를 이룬 아서는 가브리엘을 보내 주려 했다.
이미 하고자 했던 건 전부 달성했다. 아서가 먼저 가브리엘의 몸을 건드린 데다가, 그 광경을 카를로스에게 보여 줬고, 친한 척 굴며 덤으로 대련 약속까지 잡아 냈다. 하여 슬슬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 할 때였다.
웬일로 가브리엘 쪽에서 대화를 좀 더 이어 가고 싶은 기미를 풍겼다. 무슨 용건이 있는 건지 그는 조금 곤란한 듯이 아서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서가 웃는 눈으로 가브리엘을 보았다.
“아무래도 내게 다른 용무가 있나 보지.”
“…예, 그렇사옵니다.”
“편히 말해 보게.”
“다름이 아니라, 전하와 개인적으로 얘기를 좀 더 나누고 싶습니다만….”
저 눈빛, 망설이는 듯한 말투. 다른 이가 저 모습을 봤다면 가브리엘이 아서를 남몰래 짝사랑이라도 하는 줄로 알 것이다. 아서는 그 점을 지적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기실 오늘따라 가브리엘이 조금 수상쩍은 데가 있었다.
그의 착각일지도 모르나, 가브리엘의 시선이 벌써 두 차례나 목덜미 부근을 스치고 지나갔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알아차리지 못하였을 정도의 시선이었다.
혹시나 해서 페로몬을 풀어 보았는데도 가브리엘에게서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기사는 아서에게 어떤 욕구도 품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그의 목덜미에 시선을 주고, 특별한 용건이 없으면서 아서를 붙잡아 두려 하는 걸까.
짐짓 의심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아서는 겉으론 아무것도 모르는 양 태연하게 연회장을 둘러봤다. 그리고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깨달음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가브리엘을 움직일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하면 쉽게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역시 카를로스는 가만 앉아 누가 떠먹여 주기만을 기다릴 인간이 아니었다. 아서가 알아서 단서를 흘리려 했으나 애초에 그럴 필요도 없었던 거다. 가브리엘의 행동에도 아서가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인지, 카를로스 쪽에서 먼저 제 기사를 통해 확인하고자 나섰다.
아서는 내심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눌러 삼켰다. 주군의 명을 받은 몸으로 어떻게든 아서에게 손은 대야겠고, 하지만 그럴 틈은 안 나고. 눈앞의 기사가 얼마나 난처해하고 있을지 훤하게 보였다.
카를로스는 지금쯤, 그러니까 아서가 가브리엘의 몸에 손을 댄 시점에서 이미 제 생각에 결론을 내렸을 테지만, 충성스러운 기사는 끝까지 제가 받은 임무를 완수하려 드는 듯했다.
재미있는 상황이었다. 가브리엘처럼 고지식한 기사가 다른 것도 아니고 아서의 몸에 손을 대기 위한 방법을 궁리하고 있다 생각하니 절로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이곳에선 말 못 할 이야기인가 보군. 경, 괜찮다면 함께 발코니로 가는 건 어떤가.”
아서는 기사의 임무 완수에 기꺼이 협조해 주기로 했다. 가브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좋습니다.”
아서가 앞장서 가자 기사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의 뒤를 쫓던 호기심 어린 시선들은 발코니 문이 닫히며 끊어졌다. 발코니 입구에 서 있던 시종이 눈치 빠르게 커튼을 치는 게 보였다.
바깥은 낮에 비해 선선했다. 아서는 테이블 의자에 등을 기대앉았다. 바람에 섞여 든 풀 냄새가 주변을 맴돌았다.
사실 아서가 마스터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건 장점이면서 단점이기도 했다. 극소량의 마나로 온몸의 근육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된 것, 예민한 감각을 가지게 된 것 등은 큰 장점인 반면 누군가에게 빈틈을 드러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다. ‘앗, 실수….’라고 말하며 옷에 와인을 흘리는 오러 마스터라니. 황당하기 짝이 없다. 수십 년의 수련 끝에 정상의 경지에 도달한 기사가 저지르기엔 너무나 터무니없는 실수다.
마스터라면 무릇 흔들리는 와인 잔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붙들 수 있어야 하며, 누군가 몸을 부딪혀 오는 것 또한 자연스럽게 피해 내야 했다. 날아오는 화살도 붙잡을 수 있는 반사 신경을 가졌는데 실수로 와인을 흘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결국 그 말인즉슨, 아서 또한 실수를 가장하여 빈틈을 보여선 안 된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건 가브리엘에게 그의 몸에 손을 댈 명분을 만들어 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는 말과 동일했다. 아무리 자연스럽게 연기를 해도 아서가 마스터라는 사실을 아는 가브리엘이라면 분명히 의구심을 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서는 정면 돌파를 하기로 했다.
“가브리엘 경.”
“예, 전하.”
“이제 그만 좀 힐끗거렸으면 좋겠는데.”
가브리엘의 손등이 움찔 튀었다. 기사는 이미 확신한 듯한 아서의 모습을 보고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체념한 투로 물었다.
“…티가 났습니까.”
“설마 내가 모르리라 생각했던 건가.”
“…….”
아서 역시 높은 경지에 오른 기사였다. 아무리 스치듯이 지나가는 시선이라 해도 이렇게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까지 눈치를 못 챌 수는 없었다.
“내 목에 뭐가 묻어 있기라도 한가 봐?”
“그렇진 않습니다만.”
곧바로 튀어나온 기사의 부정에 아서는 순간 헛웃음을 흘릴 뻔했다. 이럴 땐 그렇다고 대답한 다음에 만져 봐야 할 거 아닌가. 이렇게 판을 깔아 줘도 제 발로 걷어차는 고지식함이라니.
잠깐 고민하는 기색이던 가브리엘은 이내 무언가 결정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다만 실례가 안 된다면, 전하의 목을 한 번 만져 보아도 되겠습니까.”
아서는 재차 어이가 없어 웃었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물어보는 것도 나쁜 방법은 아니었다.
아마 가브리엘은 아서에게 거절당하기 위해 이런 식으로 대놓고 물어봤을 것이다. 그래야만 카를로스의 의심이 틀렸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을 테니까.
다만 아서는 굳이 거절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가브리엘 스스로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서가 보기에 그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얼굴을 아주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었다.
연회장보다 어두운 조명이 깔린 발코니에서의 가브리엘은 평소와 달랐다. 커튼 틈으로 새어 나온 불빛 탓인지 조각 같은 얼굴 위로 묘하게 농염한 분위기가 흘렀다.
저런 얼굴로 단둘뿐인 발코니에서 저런 대사를 던지는데, 솔깃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물론 아서는 그가 아무런 사심 없이 건넨 말이라는 걸 알았다. 가브리엘은 원작에서도 원래 별 사심 없이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인물이었다.
아서가 고민하는 척 테이블 위를 검지로 두드렸다.
“경. 아주 신선하긴 하나, 무척이나 실례되는 말이기도 하군.”
“송구하옵니다. 제가 무례했습니다.”
가브리엘이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사과했다. 지적을 받고도 그는 오히려 안도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아서는 그의 안심한 얼굴에다 대고 기어이 찬물을 끼얹었다.
“그렇지만 경의 손이라면 불쾌하지 않으니, 허락해 주겠네. 단,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
가브리엘의 눈동자 위로 당혹스러운 빛이 흘렀다. 아서는 쑥스러운 척 발코니 밖 정원으로 시선을 옮겼다.
순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된 기사가 입을 달싹였다.
***
“……라고 하셨지.”
“그래서, 만지게 허락해 주었다.”
“아주 잠깐만.”
“그렇군.”
가브리엘이 카를로스의 표정을 살폈다. 서류를 훑는 검붉은 눈동자는 시큰둥했다. 엉뚱한 임무로 가브리엘을 곤란하게 한 카를로스는 정작 그 결과에는 영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기사는 카를로스가 왜 그의 보고에 시큰둥한지 손쉽게 유추했다. 이미 저 홀로 모든 판단을 내린 뒤였기에 보고의 내용이 중요치 않은 것이었다. 기사가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물론 만지진 않았어.”
“왜?”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랬군.”
더 대화를 이어 갈 생각이 없는 듯 카를로스는 짤막한 단답만을 뱉었다.
기사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의 주군인 2황자에겐 안 좋은 버릇이 몇 가지 있었는데, 개중 그가 생각하는 가장 최악인 버릇은 ‘수많은 가능성 중에 항상 최악의 경우를 확신한다’는 점이었다. 지금 역시 카를로스는 분명하지 않은 단서만을 쥐고 결과를 단정 지었다.
카를로스와 가브리엘, 두 사람은 같은 검술 스승 아래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동기이자 친우였다. 주군과 기사이기 이전에 친우로서 두터운 신뢰를 주고받은 관계라 할 수 있었다.
오래된 친우인 만큼 이제 두 사람은 어느 정도까진 서로의 의중을 쉽게 파악해 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따금 두 사람 사이에 마찰이 발생하기도 했다. 대개 사고방식의 차이에서 일어나는 충돌이었다.
특히 하나의 목표를 좇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카를로스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어떤 비도덕적인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반면, 가브리엘은 그에 비해서는 최소한의 인간성은 지키는, 조금 더 올곧은 방법을 고집했다.
이번에도 역시 기사는 카를로스의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카를로스. 꼭 이런 식으로 전하를 시험해 봐야 족하겠어?”
한숨을 쉰 기사가 카를로스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이러는 편이 간단해. 알지 않나.”
“전하께서 알게 되면 불쾌해하실 거야. 어쩌면 지금쯤 대강의 사정을 눈치채셨을지도 모르고.”
“안타깝지만 그러한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
카를로스의 말에 가브리엘이 순간 말문이 막힌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둘의 사고방식 차이에서 생기는 몰이해는 익숙한 것이었지만 이번 일은 특히나 더 그랬다. 황태자를 건드려 보고 그 반응을 관찰해 오라니, 카를로스가 무슨 의중으로 그런 명을 건넨 건지 가브리엘로서는 공감할 수 없었다.
황태자는 예전부터 심한 결벽증을 앓고 있었고, 카를로스 역시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손을 한 번 뿌리친 걸로 이렇게까지 의심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에겐 언제쯤 두 황자가 보통의 형제 같은 사이가 될 수 있을는지 요원하게만 보였다.
「아주 신선하긴 하나, 무척이나 실례되는 말이기도 하군.」
「그렇지만 경의 손이라면 불쾌하지 않으니, 허락해 주겠네.」
카를로스의 불신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라도, 가브리엘은 부디 황태자가 그의 요청을 거부하길 바랐다. 대놓고 무례한 청을 건넨 건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한데 그의 바람과 달리 허락이 떨어졌다.
고개를 측면으로 돌린 채로 자신의 목덜미를 드러낸 아서는 가브리엘에게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거절당해야 마땅한 물음에 승낙이 떨어졌으니 그 또한 당혹스러웠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와 돌이켜 보면 그를 가장 동요하게 한 건 아서의 대답이 아니었다. 분명 줄곧 맞은편에 앉아 있던 황태자였는데, 어째서인지 한순간 그의 눈에 맞은편의 상대가 전혀 다른 인물처럼 보였을 만큼 분위기가 돌변했던 것이다.
황태자가 눈에 띄게 수려한 외모의 소유자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날은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황태자는 시선을 내리깐 채 얌전히 그의 손길을 기다렸을 뿐이다. 단지 그뿐이었는데 가브리엘은 황태자에게 선뜻 손을 내밀 수 없었다. 그전까지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던 목덜미가 손을 대기 망설여질 만큼 관능적인 부위로 인식되고 만 순간이었다.
단 한 번도 타인에게 이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던 기사로선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결국 그는 제가 했던 요구를 스스로 철회했다.
“그 외에 별다른 건 없었나.”
“…없었어.”
기사는 담담하게 답했다. 카를로스에게 그의 개인적인 감정까지 보고할 필요는 없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데면데면한 사이였다고 하지만, 제 형제를 보고 그런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는 걸 들으면 카를로스도 썩 유쾌하진 않을 터였다.
카를로스가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대앉았다.
“전부터 형님께서 너를 참 많이 아끼셨지.”
“…글쎄. 그렇게까진 아닐 텐데.”
“보아하니 형님께서 많이 달라졌어도 그거 하나는 변하지 않았나 보군.”
또 시작이었다. 요즈음 기사는 아서가 그에게 말을 붙인 날마다 이런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이제는 농담처럼 흘려들을 수조차 없었다. 형제의 관계가 개선될수록 점차 카를로스의 말에 뼈가 있는 게 느껴졌던 탓이다.
가브리엘이 밀려오는 한숨을 삼키는 사이, 카를로스가 또 한 번 빈정거렸다.
“아니지. 변하지 않은 게 하나 더 있군. 제 동생을 싫어하는 것 또한 말이야.”
“전하께선 달라지셨어.”
“글쎄.”
“이제 너를 많이 아끼시잖아.”
“리엘,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 건 아니겠지? 순진하긴.”
“네가 그렇게 빈정거려도 전하께서 매번 먼저 다가와 주시지. 반년간 지켜본 바에 의하면 말이야.”
순간 카를로스의 손에 들려 있던 서류가 미세하게 구겨졌다. 카를로스가 고저 없이 말했다.
“정 그렇게 확신한다면, 내기라도 하든지….”
“…….”
“내 생각이 맞다면 이후로 내 명에 토 달지 않고, 그 성가신 오지랖도 부리지 않기로 해.”
“…네 생각이란 게 뭐길래.”
기사가 묻자, 잠깐의 침묵 뒤 카를로스에게서 답이 돌아왔다.
“여전해.”
“무엇이?”
모호한 표현에 기사는 한 번 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여전하다고, 형님은. 성격이 나쁜 것도 여전하고, 너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도….”
“…….”
“마찬가지로 나를 꺼려 하는 것도.”
손만 닿아도 질색을 하는 성질머리로 용케 반년간 애썼군. 뒤이은 혼잣말이 어딘가 씁쓸하게 들렸다.
“형님이 전에 비하면 양호해진 건 사실이야. 최소한 속내를 감추려고 노력이나마 하고 있으니까.”
“…카를로스. 그분이 너를 꺼려 하는데 반년 동안 매일같이 찾아오셨겠어?”
“다른 목적이 있던 거겠지.”
“설령 그렇다 한들, 세상에 아무런 목적 없이 맺어진 관계가 몇이나 될까. 다른 이유가 있다 해도 결과적으로 네게 해가 되는 일을 한 적은 없으셔.”
“글쎄, 과연 앞으로도 쭉 그러할지는 모르는 일이지.”
기사가 어떤 말을 해도 카를로스는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작게 앓는 소리를 낸 가브리엘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하자, 내기. 내가 이기면 매사 부정적으로 구는 태도부터 고치는 걸로 해.”
“부정적? 현실적인 거겠지.”
“…….”
기사는 아무 답을 하지 않았다. 네 말에 동의하지 않는단 표시였다. 카를로스도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입을 다물자 집무실은 곧바로 정적에 잠겼다. 열린 창으로 불어 들어온 바람에 커튼만이 제멋대로 나부꼈다.
애당초 평상시 카를로스였으면 굳이 여기까지 대화를 끌어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오늘따라 무의미한 말다툼을 이어 간 건 그가 평소보다 짜증이 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손안에 든 서류를 읽어 내리려 했지만 카를로스의 시선은 여전히 제자리에 맴돌았다.
세상에 목적 없이 맺어진 관계가 몇이나 있겠냐는 기사의 말. 그 말에는 카를로스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아팠는데 형이 없어서 서운했구나. 오늘은 형아랑 같이 자자. 이리 와, 칼.」
그런데도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 걸까.
결국 카를로스는 읽히지 않는 서류를 탁상 위로 내려놓았다. 바람에 날아갈 듯 말 듯 하는 종이를 내버려 둔 채 버릇처럼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아서가 무슨 목적으로 그에게 접근했든 간에 기사의 말대로 당장은 아서를 쳐 낼 이유가 없었다. 이때까지의 모습으로 봐선 아서가 순순히 떨어져 나갈 것 같지 않았고, 설령 아서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더라도 지금처럼 지내는 게 뒤를 캐내기 좋았다.
분명, 다른 자를 상대로는 가브리엘이 말을 보태지 않아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서를 대할 때는 다른 이들에게 하듯 심적 거리를 두는 게 쉽지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는 여태까지 아서와의 관계에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버린 줄 알았으나 전부 제 착각이었다.
그의 마음 한편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 흉터처럼 새겨져 있다. 깊숙이 묻어 두고 잊어버렸다 생각하였던 그것은 막상 들춰 보자, 아서가 손만 뻗으면 쥘 수 있는 야트막한 곳에 놓여 있었을 뿐이었다.
주인은 개를 버려도 개는 주인을 잊지 못한다더니. 제가 딱 그 꼴이었다.
「이제 와 애써도 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가는 게 불가능하단 걸 알아. 단지 노력이나마 해 보려는 거야.」
아서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치듯 울렸다.
「카를로스 네게 이 말만은 꼭 전하고 싶었어. 무척이나 후회하고 있다고.」
분명 아서는 제 입으로 후회한다고 말하였다. 진심으로 형제가 전과 같은 사이로 돌아가길 원한다면 그와의 접촉 역시 기껍게 받아들여야 옳았다. 고작 목덜미에 붙은 나뭇잎 하나 건드리는 걸로 그리 소스라치게 놀랄 건 뭐란 말인가.
입으로는 예전 같은 사이를 운운해 놓고 저 좋을 대로 선을 긋는다. 그의 기사에겐 손길을 허락해 놓고 정작 그의 손은 뿌리친다. 생각할수록 기분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단지 노력이나마 해 보려는 거야.」
아서의 본래 성격을 알고 있으니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 짐작이야 갔다. 하지만 그에겐 지금 이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아서는 카를로스와의 접촉을 기피하면서 그 사실을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와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 가길 원한다는 뜻일 테다.
그렇다면 아서는 더 노력해야만 했다.
아서에게 대단한 우애 따위를 기대하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그의 손이 닿아도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을 만큼은. 그 정도는 되어야 그도 아서의 장단에 맞춰 줄 의향이 있었다.
***
정오의 도서관은 인기척 없이 고요했다. 이따금씩 들리던 책장 넘기는 소리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서는 원목 책상에 엎드린 채 눈을 끔뻑거렸다. 커다란 아치형 창으로 드는 햇살이 그의 몸을 노곤하게 적셨다. 반쯤 읽어 내렸던 책은 그의 베개가 된 지 오래였다.
이 시간대의 황실 도서관은 아서가 가장 좋아하는 낮잠 장소 중 하나였다. 책장과 책장 사이 놓인 원목 테이블 가장자리, 햇빛이 담뿍 드는 이 자리는 그의 지정석이었다.
옆에서 서류를 들고 기웃거리던 부관은 아서가 졸기 시작할 때 즈음 눈치 빠르게 사라졌다. 수십 일 전만 해도 극심히 아서의 눈치를 살피던 사서도 이젠 제 업무에만 집중했다. 덕분에 아서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수를 즐길 수 있었다.
둥실 떠다니는 먼지를 구경하던 그가 눈을 감았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잊고 나른한 기운에 녹아들어 갔다.
멍한 머리로 여기다 안락의자를 하나 가져다 둘까, 그런 시답잖은 고민을 진지하게 하고 있던 참이었다. 저 멀리서 정적을 깨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서의 귀가 쫑긋거렸다. 보통 도서관을 찾은 이들은 원하는 책을 찾느라 느릿느릿 걷기 마련이건만, 발걸음 소리의 주인은 주저하는 법 없이 한곳을 향해 쭉 걸어 들어왔다. 일정하게 이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눈앞에 정갈한 걸음걸이가 그려지는 듯했다.
도서관을 찾은 불청객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서는 졸린 얼굴로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형님.”
책장 서너 개가 연결된 통로 끝에서 검은 머리칼의 사내, 카를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서관이라는 사실을 의식한 듯 낮은 부름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가 큰 보폭으로 단숨에 아서에게로 다가왔다. 방금 전까지 느긋하게 허공을 떠다니던 먼지들이 이리저리 흩날리는 게 보였다.
“쉬고 계셨습니까?”
“그냥, 잠깐.”
차마 자고 있었다고 말하지 못해 아서가 답을 얼버무렸다.
“자고 있었나 보군요.”
이곳이 아서의 낮잠 장소라는 건 극소수만이 아는 사실이었는데, 카를로스는 그 소수 안에 포함되었다.
카를로스가 아서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서 본인은 모르는 눈치였으나 유독 한쪽 뺨만 붉은 기가 도는 것이 어딜 봐도 갓 낮잠에서 깨어난 사람 같았다. 카를로스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걸렸다.
“내가 쉬는 걸 방해했나 봅니다.”
“아니, 막 일어나려던 참이야.”
“그렇습니까.”
“응. 넌 여기까진 웬일로, 아.”
아서는 말을 하던 도중 의자를 뒤로 밀어내고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반쯤 일어난 순간, 어깨를 누르는 힘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왜?”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카를로스가 그의 뒤에 붙어 있었다. 아서에겐 익숙지 않은 거리감이었다.
카를로스는 대답 대신 손을 뻗었다. 아서의 어깨를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잔뜩 경계하고 있던 아서는 제 어깨 위로 손이 넘어온 순간 하마터면 카를로스를 밀쳐 낼 뻔했다. 이상할 정도로 서로의 얼굴이 가까웠다.
테이블 위, 아서가 읽고 있던 책이 카를로스의 손에 들렸다.
“<마법의 기원>. 형님께서 마법에 관심이 있으신 줄은 몰랐군요.”
처음부터 책이 목적이었던 건지 카를로스의 시선은 양장본의 표지에만 꽂혀 있었다. 아서는 저 혼자만 상대를 의식하고 있었단 사실을 깨닫고 뺨을 붉혔다. 물론 정확히는 그런 척을 한 것이었다.
“…뭐든 알아 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아서는 부러 딱딱한 어조로 답을 했다.
“그렇기는 하죠.”
책을 도로 내려놓고 카를로스가 뒤로 물러났다. 몸을 물리는 것과 동시에 그가 아서의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평소와 다른 카를로스의 행동에 아서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마법에 관해 궁금한 게 있으면 찾아오세요.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제국에서 수준 있는 마법사는 극히 드물었는데, 그중 한 명이 카를로스의 휘하에 속해 있었다. 아마 카를로스는 그자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 듯했다.
마법사를 만나러 갈 만큼 깊은 관심이 있던 건 아니라 아서는 대강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갔다.
“고마워. 궁금한 게 있으면 그렇게 하지.”
“예, 후에 말씀해 주십시오.”
쑥스러운 듯 책의 표지를 만지작거리던 아서가 카를로스 쪽으로 몸을 틀었다.
“…헌데, 용건이 그 얘기는 아니었을 테고. 도서관에 다른 볼일이 있는 건가?”
“예. 딱히 중요한 볼일은 아닙니다만.”
아서의 물음에 카를로스는 그렇다며 선선히 답했다. 다만 볼일이 무엇인지는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서도 더 캐묻지 않았다. 카를로스가 이 시간에 도서관을 찾을 만한 이유가 몇이나 되겠나 싶었다. 높은 확률로, 좀 전처럼 아서를 건드려 보고 반응을 살피는 게 주된 용건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래. 그럼 마저 볼일 봐.”
고개를 끄덕인 아서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를로스의 접촉에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이상할 테고, 이 자리를 급히 떠나려 드는 정도면 무난할 것 같았다.
“지금 그 얼굴로 가시려는 겁니까?”
카를로스가 떠나려는 아서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서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은근한 웃음기가 비쳤다.
“…얼굴?”
“뺨에 검은 가루가 붙어 있습니다만.”
“아….”
머쓱해진 아서가 손등으로 뺨을 쓸었다.
“아뇨, 거기 말고.”
엉뚱한 부위만 닦아 내고 있으니 카를로스의 손이 가까이 다가왔다. 카를로스는 손끝으로 아서의 뺨을 살짝 꼬집듯 묻은 걸 떼어 냈다.
“…굳이 직접 떼 줄 건 없는데. 고마워.”
난데없이 볼을 꼬집힌 아서가 어색한 표정으로 감사 인사를 했다. 카를로스의 손이 닿은 부분이 간질거렸다.
“이젠 이런 정도야 스스럼없을 때도 됐으니까요.”
“…….”
“아닌가요?”
카를로스는 묻고 있었으나 사실상 강요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진 눈동자가 코앞에 있었다. 아서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그렇기야 하지.”
“오늘도 연무장으로 가실 겁니까?”
“응.”
묻길래 고개를 끄덕이자, 기다렸던 답이었던 듯 카를로스의 표정이 풀어졌다.
“같이 가요, 그럼.”
카를로스가 아서에게 함께 가자며 눈짓했다.
“…연무장에? 오늘은 가브리엘이 내 궁으로 오기로 하지 않았나.”
“나도 그쪽에 볼일이 있어서요.”
“가브리엘한테?”
“예.”
내내 집무실에 같이 있었을 기사한테 무슨 볼일이 있다는 건지, 아서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본인이 그렇다는데 굳이 따지기도 뭐해 나란히 복도를 걸어 나갔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점심은?”
도서관 입구 문을 닫으며 아서가 먼저 카를로스에게 말을 붙였다. 도서관을 나와선 목소리도 평소의 톤을 되찾았다. 카를로스가 짤막하게 답했다.
“진즉 먹었습니다.”
“…일찍 먹었네.”
“예.”
카를로스는 제가 먼저 아서를 찾아와 놓고선 정작 아서 쪽을 잘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늘 저런 식이었다.
황당한 건 저는 딴 데를 쳐다보고 있으면서 아서가 한눈을 파는 건 용납하지 않는단 점이었다. 아서가 잠깐만 다른 곳에 관심을 주면 어딜 보냐고 곧바로 따지고 들었다.
“바쁘지 않으면 내 궁에서 차라도 한잔할까.”
“바쁩니다.”
“…그래? 아쉽네.”
카를로스의 냉담한 반응에 아서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다른 데를 보는 중에도 대답은 또 어찌나 또박또박 잘하는지 모르겠다.
백색궁으로 가는 동안 아서는 카를로스에게 쉼 없이 이런저런 말을 붙였다. 지난 반년간 반복되어 온 일상이었다. 덕분에 이젠 잠깐 대화가 멈춰도 어색하거나 하지 않았다.
“카를로스, 오늘이 바쁘면 내일은 어때. 내일도 바쁠 예정인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아서가 재차 묻자, 업무가 바쁘지 않다면 그러라며 조건부 수락을 받았다. 아서는 그 답을 멋대로 해석하여 물었다.
“그럼 내일 저녁에 가면 된다는 거군.”
“그러고 싶으면 그러시든지요.”
카를로스는 도서관을 나설 때만 해도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입매가 느슨히 풀렸다.
앞만 보고 걸어가던 걸음도 어느 순간부터 점점 느려졌다. 아무리 입으로 못된 말을 한들 이미 표정부터가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덩달아 아서의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입가엔 내내 미소가 머물렀다. 반년이란 비교적 짧은 기간 만에 이만큼이나 관계가 회복되었다.
아마 지금 얻어 낸 카를로스의 마음은 한 번 깨트리고 나면 두 번 다시는 온전한 형태로 회복되기 어려울 터였다. 그래서 그걸 무너뜨릴 순간이 더욱더 기대가 되었다.
분노로 일그러질 카를로스의 얼굴을 상상하기만 해도 간질거리는 설렘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서는 카를로스와 나란히 걸으며, 백색궁으로 도착하는 순간까지 기분 좋은 상상을 이어 갔다.
***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자 불어오는 바람도 선선해졌다. 카를로스는 집무실 책상 위에 턱을 괸 채로 창밖을 살폈다.
창밖을 살피는 그의 시선이 백색궁과 적색궁을 잇는 길목을 맴돌았다. 곧 저 끄트머리에서 아서가 모습을 드러낼 시간이었다.
적색궁 어디에서든 이렇게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면 시선을 느낀 아서가 위를 올려다보곤 했다. 카를로스가 그러하듯 아서 역시 먼 거리에서도 곧잘 그를 발견해 냈다.
그와 눈이 마주치면 아서는 어찌할까 고민하는 것처럼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눈매를 접으며 카를로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물론 그가 아서의 눈인사를 받아 주는 경우는 없었다.
아서는 그렇게 먼 거리에선 친한 체를 했다. 반대로 그와 조금만 가까워지면 늘 일정한 거리를 뒀다.
한 번 정도는 실수로라도 몸이 닿을 만한데 대련할 때를 제외하곤 카를로스와 어깨 한 번 스치지 않았다. 아서가 그와 함께 있는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단 방증이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손을 내밀지 않는 대신, 카를로스가 건드리는 걸 전처럼 뿌리치지도 않았다. 이전에 그의 손을 쳐 낸 걸 의식한 건지 전과 같은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저 너머로 아서의 모습이 보였다. 천천히 걸어오던 아서가 고개를 들어 그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웃어 보이는 얼굴을 확인한 뒤, 카를로스는 몸을 돌렸다. 아서가 굳이 그의 집무실까지 올 필요가 없도록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는 연무장 한구석에 자리한 벤치에 앉아 아서가 오는 방향을 지켜보았다. 그가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단 걸 알았는지 아서는 조금 서두르는 듯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시원한 바람이 연무장을 한 바퀴 휘감고 지나갔다. 바람에 날려 온 잎사귀가 바닥을 굴렀다. 몸을 움직이기에 나쁘지 않은 날이었다.
“점점 해가 길어지나 보네. 항상 이 시간대에 오는데 오늘은 조금 더워.”
대련을 치르기 전부터 아서는 옷의 목깃 부분을 잡고 펄럭거렸다.
카를로스가 선선하다고 생각했던 날씨에 아서는 덥다며 소매를 접어 올렸다. 곱게 자란 황족이 아니랄까 봐 작은 온도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마나를 운용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 정도까진 아니야. 그냥 조금 답답한 거지.”
답답하다면서 목 끝까지 걸어 잠근 단추는 여전하다. 저 꼴을 보고 있으니 카를로스는 제 목이 죄어 오는 기분이었다.
“그럼 단추라도 풀어 두시죠.”
그는 아서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손부터 뻗었다. 만일 아서가 쳐 내면 강제로라도 단추를 풀어내리라 생각했건만 아서는 놀라는 기색만 잠깐 내비쳤을 뿐이었다. 손을 쳐 내지 못하고 가만히 굳어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건드릴 때마다 이렇게 싫어하는 게 훤히 보이는데도 아서는 그를 뿌리치지 못했다.
그러나 긴장한 아서가 안쓰럽게 느껴졌냐면 그렇지는 않았다.
아서의 반응은 도리어 카를로스의 흥미를 돋우기만 하였다. 과연 형님이 어디까지 인내할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건드려도 참아 낼까. 그가 충동적으로 손을 뻗는 횟수만 늘릴 따름 이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서는 점점 그와의 접촉에 적응을 해 가는 것 같았다. 얼마 전 귀를 건드렸을 땐 그의 팔을 붙잡으려 했는데, 이제는 같은 곳을 만져도 얌전히 기다렸다.
건드릴 때마다 미세하게 동요하는 눈매라든가 경직된 몸은 여전히 신경에 거슬리긴 했다. 하지만 그거야 앞으로 차차 강제로 적응을 시키다 보면 조금씩 나아질 터였다.
“요즘따라 왜 이렇게 뭘 묻히고 다니시는지 모르겠군요. 볼 때마다 눈에 거슬려서….”
카를로스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요사이 그는 아서가 그의 손길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시도 때도 없이 건드려 대는 중이었다. 도서관에서의 은근한 접촉은 시작에 불과했다.
좀 전처럼 목울대를 지분거린 건 물론이고, 이번엔 머리카락이 붙어 있다는 핑계로 곧은 목선을 쓸어내렸다.
아서의 목 뒤편이 금세 달아올랐다. 창백해 보일 만큼 흰 살갗은 주인의 감정 변화에 무척이나 예민하게 반응했다. 특히 목이나 귀를 건드렸을 때는 돌아오는 반응이 더 즉각적이었다.
혐오인지 짜증인지 모를 것들로 달아오른 살결이 그의 눈엔 썩 보기 좋았다. 이토록 예민한 몸을 가졌다면 그동안 다른 이들의 손길에 그토록 신경질적으로 굴었던 것도 조금은 이해가 갔다.
아서는 무엇에든 금방 열이 올랐다가 또 금세 식었다. 그 탓인지 곁에 있던 카를로스 역시 그에 휩쓸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아서와 함께 있을 때마다 조금은 답답한 열감을 느꼈다.
“…오늘도 뭐가 묻어 있었나 봐?”
부쩍 잦아진 불편한 접촉에 아서도 어느 순간부터 카를로스가 고의적으로 이러고 있다는 걸 눈치를 챈 듯했다. 뺨에 속눈썹이 붙어 있다든가, 목덜미에 실밥이 있다는 등의 사소한 핑계로 손을 댄지 며칠이 지나고 난 뒤였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곧바로 눈치챌 법한 것을. 사람 간의 접촉에 면역이 없는 형님은 한발 늦게 카를로스의 심술을 알아차렸다. 예민한 것 같으면서 이런 방면에는 둔했다. 하기야 카를로스가 아니고서는 누가 아서를 이런 식으로 희롱할 수 있을까 싶었다.
전날도 카를로스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먼지를 핑계로 아서의 귓바퀴를 쓸어내리고, 대련 후 땀으로 젖은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실상 형제간의 허물없는 스킨십이라기보단 은근히 성적 뉘앙스가 담긴 접촉이었으나 아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카를로스야 아서의 반응을 보는 데에 재미를 붙여 스킨십의 강도가 점점 진해지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요즘 들어 정도가 조금 심해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틈이 날 때마다 아서를 건드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놀랍게도 아서는 카를로스가 처음 예상했던 시일보다 훨씬 오래 참았다. 그가 멋대로 건드려 대도 얌전히 견뎠으며 어떻게든 불쾌한 내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카를로스.”
그러나 드디어 오늘, 참다못해 아서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아서가 카를로스 쪽을 돌아보았다. 그를 노려보는 눈빛이 사나웠다.
“요새 왜 이렇게 매번 나를….”
“형님.”
아서가 미처 말을 잇기 전에 카를로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꼭 드려야 할 말씀이 있었는데…. 그만 깜빡 잊고 있었네요. 급한 용무가 아니라면 제가 먼저 말씀드려도 될까요.”
화가 난 아서를 바라보는 시선이 태연했다. 이미 카를로스는 아서가 슬슬 터질 때가 되었으리라 짐작하고, 어찌 대응할지 생각을 해둔 참이었다.
“…그래. 그럼 네가 먼저 말하든지 해.”
아서가 화를 꾹꾹 참는 목소리로 답했다.
“다름이 아니라, 이제는 나를 그렇게 말고 다르게 불러 주시는 게 어떠한가 싶어서요.”
“뭐?”
아서는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짜증스레 물었다. 카를로스가 연이어 말했다.
“이젠 형님께서 나를 카를로스가 아니라 ‘칼’이라고 불러 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갑자기 무슨….”
카를로스의 말에 아서가 미간을 구겼다. 영문을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잠자코 아서를 내려다보던 카를로스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아서를 내리깔아 보던 검붉은 눈이 근래의 아서로선 본 적 없는 자연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항상 보여 주던 조소와는 다른 평범한 웃음이었다.
“갑자기라니요….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아서가 카를로스의 미소를 보고 놀란 듯 눈을 깜빡거렸다.
“예전엔 늘 그렇게 불러 주지 않으셨습니까. 칼이라고.”
카를로스가 친근한 어조로 물었다.
“그야 그러긴 했지만….”
카를로스의 물음에 아서가 짐짓 머뭇거렸다. 근 십 년 만에 처음 보는 형제의 비웃음이 아닌 미소에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마치 수십 일간 카를로스의 심술을 참아 낸 것에 대한 보상처럼 주어진 미소였다.
아서는 그제서야 카를로스의 의도를 깨달았다. 그가 어떤 이유로 제게 애칭을 허락하고, 저렇게 웃어 보이는 건지 이해가 되었다.
무례한 손길을 참아내면 애칭을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해 주겠다는 제안. 오래간 카를로스와 가까워지려 노력하던 아서로서는 차마 거부할 수 없는 거래였다.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열렸다.
“…그래. 네 말이 뭔지 이해했어.”
아서의 시선이 카를로스의 가슴팍 쪽으로 떨어졌다.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진 않는 표정이었다.
카를로스는 속눈썹에 반쯤 가려진 눈을 쳐다보았다. 입을 다물고 있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그가 보낸 신호를 제대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에게서 하나를 받아 가려면 아서도 하나를 양보해야 한다. 카를로스가 아서에게 제 곁을 좀 더 내어주는 대신, 아서도 카를로스와 몸이 닿는 불편을 감내해야만 했다.
“…칼.”
잠깐 머뭇거리던 아서가 입을 달싹였다.
혀의 움직임이 낯설었다. 10년 만에 본 카를로스의 웃는 얼굴만큼이나 입에 붙지 않는 단어였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 둘 다에게 익숙하지 않은 울림이었다.
카를로스 역시 미묘한 표정으로 아서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자발적으로 아서에게 애칭을 허락하고, 아서가 그를 다시 애칭으로 부르는 날이 올 줄이야.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생경하면서 또 조금은 웃음이 나왔다. 무엇보다 개중에 가장 기이했던 건, 아서의 입에서 나온 그의 애칭이 생각보다 듣기 거슬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잇새로 짧은 웃음소리가 샜다. 이대로 시간이 지난다면 정말로 아서와 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우습게도 순간 그런 생각이 카를로스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칼.”
몇 차례 혀를 굴려 그의 이름을 발음해 보던 아서가 이번엔 카를로스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예, 형님. 말씀하세요.”
“…지금 이건 나를 시험하는 건가?”
조금 발끈한 어투였다. 눈앞의 보상에 혹해 순순히 물러났다가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든 듯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무슨 뜻으로 말하는 건지 알잖아.”
“글쎄요. 형님께서 전처럼 돌아가고 싶어 하시니, 저도 예전처럼 형님을 편하게 대하는 것뿐입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고작 애칭을 부르는 정도로 형제의 ‘예전처럼’을 논하기는 일렀다. 그들이 정말로 예전과 같은 사이로 돌아가기엔 지금 수준으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 시절 형제는 대부분 손을 잡고 다녔으며, 일주일의 절반 이상을 같은 침실에서 잠이 들었다.
과거 아서는 제 동생인 카를로스가 스스로의 이름조차 쓰지 못한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고는, 카를로스의 선생님이 되기를 자처했다. 동화책을 한가득 가져와 직접 글을 가르쳐 주고 식사 예절을 하나씩 차근차근 알려 주었다. 식사 때마다 카를로스의 손 모양과 자세를 교정해 주고 때로는 직접 먹여 주기도 했다. 당연히 그 모든 과정엔 친밀한 스킨십이 동반되었다.
하나하나 나열하자면 끝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아서 또한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형님께서 애쓰고 계시니 저도 나름대로 노력하는 겁니다만, 싫다고 하시면 그만두겠습니다.”
“…….”
아서가 무어라 답할 말을 못 찾고 시선을 회피했다.
꽤나 머릿속이 복잡한지, 최근 들어 항상 은은히 짓고 있던 미소조차 사라진 얼굴이었다. 매끈한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자 예민해 보이는 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저게 카를로스가 아는 아서의 본모습이다.
그로서는 이 순간 아서에게서 어떤 반응이 나오든 상관없었다. 아서가 여기서 포기한다면 그의 기분은 또다시 바닥으로 처박히겠지만, 이쯤에서 제 오랜 미련을 떨쳐 버릴 수 있으니 객관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싫은 게 아니라….”
아서는 선뜻 대꾸하기를 망설였다.
“편히 말씀하세요.”
조금 초조해진 카를로스가 재촉하듯 말했다.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던 아서가 이윽고 시선을 옮겨 카를로스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좋아.”
“…….”
“네 말이 맞아. 전처럼 돌아가려면 나도 지금보다 더 노력해야겠지.”
“다행이군요. 형님과 내 생각이 같아서.”
카를로스의 얼굴 위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비록 그의 강요에 의한 답이라고는 하나 어쨌든 선택은 아서의 몫이었다. 아직까진 아서에게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그의 곁에 있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서가 이렇게까지 굽히고 나오는 이유를 아직까진 정확히 몰랐다. 카를로스는 그게 온전히 순수한 목적으로만 이루어졌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아서도 그에게 무언가 바라는 바가 있을 것이다. 권력, 황좌, 일신의 보존 또는 그의 기사, 가장 최악의 경우는 그의 목숨이 될 테다.
형제는 그렇게 각자 원하는 바를 쟁취하고 대화를 마쳤다. 이후로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깨끗한 모습으로 대련을 간단하게 마무리 지었다. 두 사람 다 대련에 집중하지 못해 힘을 쓸 것도 없었다. 어차피 친목을 다지기 위한 형식적인 자리에 지나지 않았다.
***
넓게 펼쳐진 먹구름이 해를 가렸다. 눈을 찌르던 햇빛이 줄어드니 날이 선선해졌다.
가벼운 옷차림을 한 아서는 연무장 한구석에서 천천히 몸을 풀었다. 오늘은 점심 즈음 가브리엘과의 대련이 예정되어 있었다. 달리 할 일이 없던 그는 가브리엘이 오기 전 먼저 도착하여 홀로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설렁설렁 검을 휘두르고 있다 보니 멀찍이서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벌써 약속된 시간이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아서는 제게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시선을 돌렸다. 어쩐 일인지 백색궁 연무장을 찾은 이는 가브리엘이 아니라 카를로스였다. 예고 없이 찾아온 카를로스를 보고 아서가 의아한 눈을 했다.
“…카를로스?”
“아, 형님. 먼저 와 계셨군요.”
카를로스는 마치 제가 약속의 당사자라도 되는 양 태연하게 연무장으로 걸어 들어왔다. 종자에게 다가가 대련용 검을 받아 드는 모습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오늘은 제가 가브리엘 경 대신으로 왔습니다.”
아서가 무어라 묻기 전에 카를로스가 먼저 사정을 설명했다.
“아, 그래서….”
“그쪽은 바쁘다더군요.”
“…네가 아니라 가브리엘 경이 바쁘다고?”
“예.”
아서가 고개를 기울였다. 요즘 카를로스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건 황성의 모든 사람이 아는 사실이었다. 그 많던 일거리가 벌써 다 사라졌을 리는 없고, 아서를 보기 위해 잠깐 시간을 낸 것 같았다. 아닌 척 시치미를 떼는 모습이 귀여웠다.
지지부진하던 전쟁이 끝났지만 외교 문제는 아직까지 마무리되지 않았다. 특히 포로로 끌고 온 왕세자의 귀환과 관련된 문제로 말이 많았다.
제국에선 왕세자를 즉위 직전까지 붙잡고 있겠다 통보했고, 오나드 왕국에선 왕세자만은 귀환시켜 달라며 수차례 사절을 보냈다. 물론 패전국의 말뿐인 요구엔 힘이 없었다. 왕국이 왕세자의 가치에 부응하는 만큼의 대가를 치른다면 모를까.
하여 최근 오나드 왕국에서 왕세자의 귀환을 요구하며 큰 규모로 사절단을 보내왔다. 공물로 왕국의 영지 몇을 떼어다 바친 데다가, 수천 명에 달하는 노예까지 끌고 온 탓에 결재를 요하는 서류가 끊임없이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전쟁 배상에 관한 권한을 위임받은 카를로스는 물론이고, 그 아래 적색궁 전체가 바삐 돌아가는 중이었다.
“바쁠 줄 알고 리엘에게 따로 부탁한 건데. 네가 바쁘지 않다면야.”
아서가 가볍게 말했다. 가슴 한쪽에 보호구를 걸치던 카를로스가 멈칫 아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리엘? 그간 가브리엘과 많이 가까워지셨나 보군요.”
“그간 리엘 경과도 너만큼 자주 봤으니까.”
아서는 별거 아니라는 듯 답하였다.
“그렇군요.”
대놓고 표정만 구기지 않았지, 카를로스는 누가 봐도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서의 옆에선 키가 작은 종자 두 명이 붙어 보호구 착용을 돕고 있었다.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것 같자 그들의 움직임이 즉각 일사불란해졌다. 공손히 대련용 검을 건넨 종자들이 멀리 구석진 곳으로 서둘러 물러났다.
잠자코 서 있던 아서가 조용히 웃음 지었다.
“그러고 보니 넌 예전부터 유독 소유욕이 강했지. 네 기사니까, 그렇게 부르지 말까?”
마치 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말투였다. 내 기사여서가 아니라…. 카를로스가 짜증 섞인 눈으로 아서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예. 가브리엘을 그리 부르는 건 자제하는 게 좋겠군요.”
막상 답을 하고 나니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들려, 카를로스는 제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아서는 그런 카를로스를 보며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카를로스의 질투는 아서가 제일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다.
더 추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카를로스는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했다.
“…그리고, 바쁠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급한 일은 처리하고 왔고, 가브리엘 경이 저 대신 자리를 채우고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그렇다면야. 후에 가브리엘 경에겐 고맙다는 인사라도 전해야겠군.”
“가브리엘 본인이 스스로 자처한 것을, 그럴 필요까진 없습니다.”
“그래. 아예 말도 붙이지 말까?”
아서의 눈가에 웃음기가 비쳤다. 그걸 본 카를로스가 싸늘하게 표정을 굳혔다.
“…대련이나 시작하시죠.”
“좋지.”
아서는 군말하지 않고 검을 빼 들었다.
처음 친목을 목적으로 시작했던 대련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본격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강한 기사 둘에게 가르침을 받은 덕분에 아서의 실력이 몇 개월 사이 급속도로 늘었다.
“오늘은 형님께서 한 번 막아 보십시오.”
“노력은 해 보지.”
몇 걸음 공간을 둔 채로 형제가 마주 보고 섰다. 아서는 얼굴의 웃음기를 지워 내고 진지한 태도로 대련에 임했다. 기분이 좋아 그런지, 날은 흐린데 아서의 몸뚱이는 날아갈 듯 가벼웠다.
요사이 아서는 이보다 좋을 수가 없을 만큼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카를로스가 아서에게 조금씩 애착을 보이는 듯했고, 시시때때로 아서를 건드려 댔다. 보는 이가 없을 때의 아서는 들썩이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해 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옆에서 자꾸만 아서를 만지작거리는 탓에 매번 저 홀로 욕구를 해소해야 하는 게 유일한 흠이긴 했다. 물론 그 정도는 큰 문제도 아니었다. 카를로스의 입장에선 괴롭힌답시고 하는 스킨십이, 아서에겐 흡사 오랜 가뭄 끝에 주어진 단비와 같았던 것이다.
아서가 보기에 스스로 자각을 못 하고 있을 뿐, 카를로스는 이미 아서에게 성적인 욕구를 느끼고 있었다. 시작은 장난 반 심술 반이었을지라도 더 이상은 아니었다. 아서를 건드리는 손길부터가 이미 담백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카를로스는 둔한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보통 사람보다 눈치가 빠른 편에 속했다. 같은 성별에다가 형제라는 장벽이 있어 그렇지 어떤 계기만 주어진다면 자신의 감정을 곧바로 깨달을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오늘 대련은 나쁘지 않은 기회였다.
이미 갈등의 도화선엔 불이 붙어 있었다. 카를로스가 아서를 시험하며 아서의 인내심을 건드린 지도 꽤 오래되었다. 이쯤 되면 아서가 참다못해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서는 오늘 이 자리에서 다쳐 쓰러지는 걸로 불이 붙은 심지에 기름을 끼얹을 것이다.
대련은 평소처럼 별말 없이 시작되었다. 가브리엘을 애칭으로 부른 것 때문인지 오늘따라 카를로스는 유난히 아서를 거세게 몰아붙였다.
“읏.”
눈앞까지 다가온 검을 아서가 다급히 쳐 냈다. 이어서 섬뜩한 칼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조차 없이 그의 심장을 노리고 들어왔다.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아서는 반사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나 피하고 재차 찔러 들어오는 검을 쳐 냈다. 대련임을 인지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잠깐 사이 다섯 번의 공격이 짓쳐들어왔다. 눈으로 인식하고 나서는 이미 늦은 뒤였기에 아서는 오로지 육감만을 이용해 공격을 막아 냈다.
카를로스는 베이는 순간 저세상 구경부터 하게 될 부위만을 노렸다. 카를로스의 검은 오직 효율적인 살육을 위한, 전쟁에 특화된 살검이었다.
반면 아서의 검은 방금 검술서에서 튀어나온 것마냥 정직하기 짝이 없었다. 그보다 경지가 낮은 기사를 상대로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찍어 누를 수 있을지 몰라도, 비슷한 수준의 기사를 만나는 순간 몇 합 겨루지 못하고 패배할 게 뻔했다.
쏟아지는 공세를 막아 내느라 다른 생각을 할 틈조차 생기지 않았다. 대련 중에 일부러 다칠 것이라 마음먹었던 것이 무색하게 아서는 그저 저를 밀어붙이는 검을 막아 내기에만 급급했다. 다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잠깐이라도 긴장을 내려놓으면 목이 잘릴 판이었다.
한참 힘겹게 공세를 피해 내다, 심장을 노리는 섬뜩한 예기에 마침내 아서가 연무장 바닥을 굴렀다.
“허억… 허억….”
아서는 제 패배를 인정했다. 실전 경험이 부족한 아서로서는 카를로스와의 대련에서 일부러 다칠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그동안의 대련은 카를로스가 아서의 사정을 많이 봐주었던 모양이다. 카를로스가 방어만 하다 가끔 날카롭게 반격했던 이전의 대련과 지금의 것은 완전히 달랐다.
“잡고 일어나세요.”
카를로스가 아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평온한 모습이었다.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하아…. 괜찮아. 숨이 좀, 차지만.”
숨을 몰아쉬며 아서는 카를로스가 내미는 손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바닥에서 일어나야 했지만,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이대로 드러누워 있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쁘게 숨을 들이켜느라 흉곽이 찢어질 것처럼 부풀었다 꺼졌다.
멍한 시야에 카를로스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아서는 카를로스가 다가와 상체를 일으켜 세워 주는 것까진 모른 체하지 않았다. 바닥에 앉아 두 팔로 몸을 지탱한 채로, 숨을 천천히 가다듬었다.
“잘하셨습니다, 형님. 생각보단 오래 버티셨군요.”
카를로스는 제가 내민 손이 무시당했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래? 다행이군….”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다음번엔 바닥을 구르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
카를로스의 말에 순간 아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두 형제는 다퉈 온 세월이 긴 만큼 서로가 어떤 발언에 과민하게 반응하는지 잘 알았다. 아서의 약점은 두말할 것도 없이 ‘카를로스를 향한 열등감’이었다.
그러므로 저 칭찬 같지 않은 칭찬은 아서를 자극하기 위한 말임이 명백했다.
만일 예전의 아서였다면 지금쯤 이성이 아슬아슬하게 끊기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바닥을 뒹군 것도 자존심 상한 마당에, 제가 아서의 우위에 있는 게 당연한 것처럼 구는 카를로스까지. 안 그래도 열등감 가득하던 속이 엄청나게 뒤틀렸을 테다.
지금은 저런 재수 없는 소리를 들어도 아무렇지 않다. 아서의 새로운 인생 목표는 재산 많고 작위는 없는 자유인이었다. 카를로스가 유능하면 유능할수록 마음 편히 얹혀 지낼 수 있으니, 말하는 싸가지가 좀 없는 것 정도야 이해 가능했다. 이왕이면 잠자리에서도 저렇게 재수 없게 굴어 준다면 좋겠다.
물론 아서는 그런 속내와 달리 카를로스의 도발에는 착실하게 반응했다. 저런 소리를 들었는데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건 그답지 않았다.
아서는 순간적으로 카를로스를 노려보다 재빨리 시선을 내리깔았다. 애써 감추고 있던 열등감이 비죽 솟아올라 온 순간을 뒤늦게 수습하려는 듯이.
어쨌든 다치겠단 계획은 반쯤 성공했다. 카를로스가 딱 죽지 않을 만큼의 강도로 아서를 몰아붙여 준 덕분이었다. 따라붙는 공격을 피해 내느라 순간적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근육을 사용하고 말았다.
오른 다리가 경련이 온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아서의 의지와 상관없이 허벅지가 움찔움찔 튀는 것이 육안으로도 보였다.
아서는 스스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근육을 쥐어짜는 통증에 도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절로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맺혔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이미 아서가 어떤 상태인지 알면서 카를로스는 아서의 화를 자극하듯 물었다. 대련용 검을 시종에게 건넨 그가 느긋하게 아서에게 돌아갔다. 굳이 서둘러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어차피 저런 다리로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이제 아서는 허벅지를 움켜쥔 채 가만히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동생에게 압도적인 차이로 패한 데다가, 그 여파로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으니 자존심이 상할 만도 했다.
“형님.”
다시 한번 불렀으나 아서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굴었다. 숨을 쉴 때마다 들썩이는 어깨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대놓고 그를 무시하는 걸 봐선 이대로 그가 화를 내며 가 버리길 바라는 듯했다.
하지만 그 염원이 쉽게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호의로 내민 손을 무시당한 탓에 카를로스는 이미 어느 정도 기분이 상해 있는 상황이었다.
“형님, 못 일어나겠습니까?”
“…….”
여전히 아서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아서를 빤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내 방식이 형님께는 조금 무리였나 보군요….”
아서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로 툭툭 신경을 건드리자 낯빛이 서서히 뒤바뀌는 게 보였다.
고통 때문인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볼 만했다. 그를 노려보는 새빨간 눈동자엔 얼핏 살기마저 감돌았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카를로스와 다르게, 아서의 뺨엔 땀에 젖은 머리칼이 지저분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저런 얼굴로 노려봐야 그의 흥이나 더 돋울 뿐이다.
의외였던 건 서늘하게 노려보는 시선이 예전처럼 성가시게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썩 만족스럽기까지 했다. 주변 다른 것들을 전부 배제한 채 오로지 카를로스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말이다.
카를로스는 답지 않게 한 번 더 아서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기로 했다.
“이대로 두면 더 고통스러울 겁니다. 풀어 드리겠습니다.”
노려보는 시선을 무시하고 아서의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숨만 들이쉬고 있던 아서가 그제서야 고통으로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싫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용케 아서는 카를로스의 손을 쳐 내지 않았다. 이걸 끈기 있다고 해야 할지. 대체 아서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성질을 누르는 건지 저 머리통을 열어 보고 싶었다.
카를로스는 능숙한 손길로 엉킨 허벅지 근육을 풀어냈다. 뭉친 근육을 푸는 동안 아서는 고집스레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꿋꿋이 참고 있는 모양인데 저렇게까지 참고 있으면 오히려 더 건드리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아직 이 정도까진 참을 만하신가 보군요.”
입술을 짓이기면서 신음을 참는 모습에 카를로스가 손아귀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아프다는 말이 나오면 곧바로 그만둘 생각으로 가볍게 시작한 괴롭힘이었다.
“뭐, 윽…!”
쥐가 난 곳을 움켜쥐자 아서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반사적으로 아서가 카를로스의 손목을 세게 움켜쥐었으나 그를 밀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카를로스는 아서를 빤히 쳐다보다 허벅지 살을 움켜잡고 주물렀다.
“아…! 아윽!”
고통을 견디지 못한 아서가 카를로스의 손목을 세게 움켜쥐었다. 손톱이 파고들어 살갗 위로 핏물마저 비치는데 카를로스는 멈추지 않았다.
“흐, 윽…!”
아서 특유의 옅은 살 내음이 카를로스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산들바람처럼 희미하게 이어지다가 그 끝엔 달짝지근한 여운이 남는 향이었다.
분명 처음엔 가벼운 장난으로 시작한 일이건만, 이유를 알 수 없는 열기가 서서히 카를로스의 머릿속을 잠식했다. 건드릴 때마다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에 카를로스가 한순간 아서의 허벅지를 터트릴 것처럼 움켜쥐었다. 아서를 응시하는 눈동자 위로 찰나 기이한 기색이 비쳤다.
아서가 숨을 헉 들이켰다. 노골적으로 고통을 주려는 의도가 담긴 손길을 버티다 못해 결국 카를로스의 이름을 불렀다.
“카를로스…!”
“…….”
“아파, 아프다고……. 그만, 칼…!”
기어이 아서의 입에서 애원하는 소리가 나오고 나서야 허벅지를 쥐고 있던 손아귀에 힘이 풀렸다.
“…….”
뒤늦게 정신을 차린 카를로스가 자신도 모르게 짧은 탄식을 흘렸다. 그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토해 내듯 뱉었다. 제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이유 없이 탈력감이 차올랐다.
마치 무언가에 홀렸다 빠져나온 것만 같았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맞닿은 아서의 손이 안쓰러울 만큼 바들바들 떨렸다. 무어라 탓할 힘도 없는지 떨리는 몸이 그의 가슴팍 위로 무너졌다.
카를로스는 힘겹게 숨을 들이쉬고 있는 낯을 홀린 듯이 내려보았다.
핏물이 맺힌 입술이 시야에 들어왔다. 찰나 밀려드는 강한 충동에 손끝이 움찔 튀었다.
“……미친, 새끼….”
아서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간만에 듣는 적대감 어린 목소리였다. 정신 나간 자신을 일깨우는 소리 같기도 했다.
숨기고 있던 아서의 이면을 엿보았으니 유쾌한 기분이 들어야 마땅할 텐데, 어쩐지 뱃속이 끓는 물을 들이부은 듯 무겁게 아려 오기만 했다. 그의 손 아래에서 괴롭힘을 당한 건 아서이건만 반대로 자신의 몸을 쥐어짜 낸 기분이다.
“…죄송합니다.”
카를로스는 끝내 아서의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아프다는 소릴 안 하시길래, 괜찮은 줄로 알았습니다.”
“뭐? 하…. 그걸, 말이라고…….”
말끝이 파르르 떨렸다. 분을 참기가 힘든 것처럼 보였다.
카를로스가 재차 사과를 건넸으나 당연히 무시당했다. 그렇다고 아서를 이대로 바닥에 둘 수는 없어 부축하려 들자, 아서가 거칠게 손을 쳐 냈다.
“건드리지 마.”
창백하던 얼굴 위로 옅은 홍조가 떠올랐다. 불규칙하게 내쉬는 숨이나, 가느다란 금발이 가닥가닥 달라붙어 있는 얼굴은 막 정사를 끝마친 사람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혼자는 못 일어나지 않습니까.”
“됐어. 내가 알아서 해.”
아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카를로스는 물러나지 않고 재차 권유했다.
“침실까지는 부축해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잘못한 거니까요.”
그는 아서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서 한편으론 아서를 샅샅이 살폈다.
카를로스의 시선이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 초점이 흐려진 붉은 눈동자, 옅은 홍조를 띤 뺨, 핏물로 엉망인 입술을 느릿하게 훑어 내렸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땀에 젖은 목덜미와 실루엣이 비치는 얇은 셔츠 아래의 살갗까지 모조리 다 시야에 담아냈다.
검붉은 눈이 어둡게 침전했다.
“그리고 형님께서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하고 계신 꼴이… 남에게 보여 주기 창피한 모습이라.”
“뭐…….”
아서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흙먼지로 엉망이 된 제 모습을 뒤늦게 의식한 것이었다.
“형님도 지금 이 모습을 아랫것들에게 보이고 싶진 않으시겠죠.”
“…….”
“다른 이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데려다드리겠습니다.”
카를로스는 모든 게 아서의 위신을 위한 것이라는 양 말했다. 그런 그에게선 어떤 사심도 엿보이지 않았다.
아서의 고개가 느릿느릿 제자리로 돌아왔다. 불신과 체념이 담긴 눈동자가 카를로스를 올려다보았다.
놀랍게도 그 순간, 카를로스는 아랫배가 꽉 조여드는 감각을 느꼈다.
“…형님.”
그가 한숨처럼 아서를 불렀다. 아서의 눈을 바라보자 착각이 아니라는 듯 다시 한번 좀 전의 감각이 재현되었다.
시야가 이상하게 울렁였다. 이 익숙한 열감은 아서와 함께할 때마다 종종 느꼈던 것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서가 부축을 해달라는 듯 카를로스의 팔을 잡았다. 하얗게 질린 손끝이 카를로스에게 닿았다.
“천천히, 일어나 보시겠습니까.”
제 팔을 쥔 아서의 손 위로, 카를로스는 자신의 손을 겹쳐 잡았다. 아서가 붙잡힌 손을 빼내려 했지만 깍지를 끼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그 상태로 반대쪽 손을 아서의 팔 아래로 넣었다.
“갑자기 당기면, 윽….”
한 손으로 허리를 잡고 일으켜 세우니 아서가 비틀거렸다. 카를로스는 휘청이는 몸이 제게로 기댈 수 있게 자연스럽게 유도했다.
“…힘들면 이리로 기대세요, 형님.”
어둡게 가라앉은 적안이 제게 기댄 형제를 응시했다. 카를로스는 제 눈을 가리고 있던 장막 하나가 걷힌 듯한 감각을 느꼈다. 이제서야 그는 저를 달구는 열기가 무엇으로부터 기인한 것인지 알아차렸다.
***
꿈속의 아서와 마주한 카를로스는 현실에서 그를 죄고 있는 것들을 보다 느슨히 풀어내곤 했다. 아서가 그의 형제이며 그를 꺼림칙하게 여긴단 사실 따위는 의식 한편에 밀어 두고 모르는 체했다.
아서가 자위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끌어안고, 내키는 대로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아무렇지 않았다. 모든 건 그저 꿈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날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꿈속의 아서를 아무 의미 없는 무의식의 부산물 중 하나라 치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매일 밤 꿈을 꿨다. ‘그날’의 꿈을.
‘칼.’
매일이 그날의 반복이었다. 밤이 깊어지고, 의식이 어딘가로 깊숙이 가라앉으면 어김없이 그곳에선 형님이 그의 발치 아래 주저앉은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 자신을 어떻게 좀 해 달라는 것처럼.
‘아파, 못 일어나겠어. 도와줘.’
바닥을 굴러 흙먼지투성이인 손은 늘 당연하다는 듯 카를로스를 아래로 끌어 내렸다.
처음 꿈속에서 그날의 아서를 마주하였을 땐 나쁘지 않다 되뇌었다. 그가 형님을 상대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었으니까.
그를 위해 카를로스는 무의식 깊숙이 쑤셔 넣어 두었던 충동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날의 아서에게 하고 싶었던 그대로, 핏물 맺힌 입술에 입을 맞추고 땀에 젖은 목덜미를 핥았다. 아래에 깔린 꿈속 아서가 몸을 바르작거렸다.
‘아, 칼…, 읍…!’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이딴 소리에 동요하고 마는 저 자신이 불쾌했다. 아서의 입을 틀어막고, 꿈틀대는 몸 위에 올라타 그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날과 같이 지저분하고 엉망인 얼굴.
저도 모르게 어떤 충동이 욱신 끓어올랐다. 감히 외면하거나 부정하는 것을 꾀하지 못할 만큼 지독하게 타오르는 열기였다. 온몸의 피가 끓어올라 살갗마저 지끈 달아오르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손끝이 튀는 감각이었다.
그는 그것에 무어라 이름 붙이기를 주저했다. 이 정체 모를 갈증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어째서, 다른 누구도 아닌 아서에게.
카를로스는 아서를 알았다. 아서가 그를 필요로 할 때 그가 우위에 서서 제멋대로 아서를 휘둘렀던 것처럼, 카를로스가 진심으로 아서를 원하게 되는 때에는 그가 아서에게 휘둘려야 할 것이었다.
아서는 어떤 목적을 품고 그에게 접근한 것뿐이며, 실은 그와 손이 닿는 것조차 불쾌해한다. 그간 체감했던 사실을 끊임없이 되새기려 했지만…….
꿈은 그런 카를로스를 비웃듯, 혹은 세뇌시키듯 반복되었다.
카를로스, 본래부터 나는 네 것이었어. 잠깐 주변의 방해로 떨어져 있었던 것뿐이지. 매일 밤 꿈속의, 카를로스가 만들어 낸 아서가 그의 뺨에 입 맞추며 독 같은 말을 속삭였다.
그것이 정녕 아서가 하는 말인지 스스로가 듣고 싶은 말이었는지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우습게도 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꿈속의 비밀스러운 만남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놀랍지만은 않은 흐름이었다. 자각하지 못했을 뿐 언젠가부터… 어쩌면 먼 과거부터 그의 안에 자리 잡고 있었을 열망이었다.
실체를 알 수 없던 열망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형태를 선연히 드러냈다.
그는 형님을 원한다. 섬세한 눈매, 흰 목덜미, 쉬이 무너지지 않을 단단한 육체, 형님의 전부를 원했다.
이따금씩 나오는 다정한 말투, 열등감 어린 눈동자, 서늘하게 노려보는 시선마저도 모조리 탐이 났다. 좋은 걸 가질 수 없다면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라도 전부 손안에 넣고 싶었다.
여전히 그는 이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갈망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결정 내리지 못했다. 실은 명칭 따위는 중요치 않은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엇으로 불리든 간에 감정의 형태는 달라지지 않으니.
꿈은 매일 밤 처음과 다를 바 없이 반복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지고 있었다. 꿈의 주인이 달라진 탓이다.
고작 아서의 몸을 조금 건드리고 말았던 지난 나날이 무색하게, 꿈은 점차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 내키는 대로 허벅지를 쓰다듬던 손이 은밀한 부위로 곧장 파고들었다. 제 형제를 탐하고 있으면서도 그의 손길엔 아무런 죄악감이 묻어나지 않았다.
커다란 손바닥이 망설임 없이 아서의 성기를 쥐었다.
‘읏…, 칼…!’
아서가 카를로스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서의 성기는 곧바로 단단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늘 그랬듯 반항은커녕 오히려 카를로스의 손길을 기다렸다는 태도였다.
현실의 아서였다면 지금쯤 카를로스를 밀치고 욕설을 내뱉었을 테지만, 꿈속의 아서는 아무런 거부도 하지 않았다. 단지 어색한 얼굴로 카를로스를 올려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꿈속의, 눈앞의 아서는 카를로스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했다. 손이 닿을 때마다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지만 결코 그의 손을 피하지도 않았다. 머뭇거리며 그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물결처럼 일렁였다.
그는 이 신호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순간 한숨보다 짧은 숨이 터져 나왔다. 조소였다.
제 아우를 사랑하는 아서. 말 그대로 꿈에서나 있을 법한 얘기였다.
꿈은 꿈꾸는 자의 욕망을 반영한다. 이미 수차례 반복된 꿈을 통해 깨달은 바였음에도, 이따위가 그 자신이 만들어 낸 아서라고 생각하니 우습기도, 놀랍게도 조금 비참하기도 했다.
그의 손이 닿는 것조차 불쾌해하는 아서를. 그런 제 형제를 꿈에서라도 탐하려 드는 저 자신의 어리석음을 어찌 비웃지 않을 수 있을까.
아직까지도 그를 노려보던 아서의 눈빛이 선연했다. 다정함을 위장하던 껍질이 벗겨지자 그 안에는 여전히 그를 증오하는 형제가 있었다.
그날 그는 아서에 대한 욕망을 자각함과 동시에, 아서가 여전히 전만큼 혹은 전보다 그를 더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뼈 아픈 진실을 엿보았다.
돌이켜 보면 지겨울 정도로 익숙하고 익숙한 감각이었다.
어린 날의 카를로스는 매일을 꿈속에 살았다. 아서에게 버림받고 난 뒤부턴 아서의 뒷모습만 쫓아야 했다. 꿈속의 아서와 손을 잡고, 끌어안고, 다정한 입맞춤을 건네고, 그리고 꿈에서 깨면 공허함에 잠겼다.
그때의 어리석은 아이에서 완전히 벗어난 줄 알았던 건 오로지 그의 착각이었던 거다.
카를로스는 망설임 없이 아서의 다리를 벌렸다. 양손으로 형제의 오금을 움켜쥔 채 벌어진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 발기한 좆을 곧장 박아 넣을 것처럼 비벼 댔다.
꿈속이었다. 그가 제멋대로 아서를 휘두른다 해도, 형님의 다리를 벌리고 이대로 좆을 박아 댄다 해도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에겐 더 이상 그 무엇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형님.’
‘칼, 읏….’
동생을 사랑하는 꿈속의 형님은 스스로 다리를 벌렸다. 카를로스는 아서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막 이갈이를 시작한 짐승마냥 살갗을 깨물고, 살결이 검붉게 달아오르도록 게걸스레 빨아들였다.
한 손은 이미 셔츠 자락을 파고 들어가 아서의 가슴을 움켜쥔 채였다. 탄력 있는 가슴을 뭉개질 정도로 세게 주무르며 다른 손으로는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아프, 칼…. 윽, 조금만 천, 천히….’
‘하아…. 형님.’
하의를 벗길 시간조차 아쉬워 막무가내로 뜯어냈다. 그 와중에도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어 댔다. 그는 꼭 무언가에게 쫓기는 사람같이 조급하게 굴었다.
단 한 번도 이성 앞에 보잘것없는 욕망을 앞세운 적이 없던 카를로스였다. 그는 이제 정욕 앞에서 인간이 짐승이 된다는 걸 절실히 체감했다.
머릿속을 지배한 열기는 모든 잡념들을 불살라 내고, 그를 한낱 발정 난 짐승으로 끌어내렸다.
형님이 그를 이토록 달라지게 하였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결코 되돌리고 싶지도 않았다.
‘흐, 칼, 아, 아파…. 이제 그만, 윽,’
‘조금만, 더, …형님….’
꿈속의 아서를 끝없이 탐한다 할지언정 목이 타는 갈증은 채워지지 않는다.
아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오직 카를로스만이 기억할 은밀한 행위들. 그것을 현실로 끌어내고자 하는 갈망이 치미는 건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다.
그는 곧 머지않아 제가 이런 허상 따위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가 언제가 되었든 간에, 그를 위해 어떤 저열한 수를 쓰든 간에 자신은 끝끝내 진짜를 손에 쥐고 말 것이었다. 예감을 넘어선 확신이었다.
2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