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모든 이야기는 아서가 어느 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긴 꿈을 꾸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
세르나 대륙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인페르노 제국.
대륙의 비옥한 토지를 독차지하다시피 한 드넓은 제국은 대륙인들에게 기사의 나라로 통칭되곤 했다.
하급 귀족부터 계급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황족까지 열에 아홉은 검을 익혔으며, 제국인들은 인페르노 제국이 기사의 나라로 불리는 것에 긍지를 품었다. 끊임없이 양성되는 기사와 그에 대한 자부심은 제국의 드넓은 영토를 유지하는 근간이 되었다.
아서 프란시스 폰 인페르노는 그 강대한 제국의 ‘불완전한’ 황태자였다.
백금발의 황태자.
이 호칭만으로도 아서의 흠결을 간단히 설명해 낼 수 있었다.
인페르노 제국을 떠올렸을 때 첫 번째로 언급되는 게 강인한 기사라면, 두 번째는 제국의 상징으로 알려진 흑룡이다. 붉은 눈알을 가진 검은 용은 제국 곳곳에 수놓아지고 조각되었다.
마찬가지로 제국의 황족을 상징하는 것 역시 새까만 머리칼과, 핏물을 굳힌 듯한 검붉은 눈동자였다.
그러나 아서 인페르노는 루비처럼 맑은 적안을 가졌을 뿐, 그 머리칼은 녹아내릴 것처럼 옅은 백금발이었다. 어느 때든 고귀하게 빛을 발하는 플래티넘 블론드는 아서가 흠결 있는 황족임을 증명하는 징표에 지나지 않았다.
황태자 아서의 흠결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서는 압도적으로 뛰어난 것도, 그렇다고 황좌에 오르기에 부족한 것도 아닌 어중간한 자질을 타고났다. 어느 분야에서건 적당히 뛰어난 성취에 도달하는 데까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다만 어느 분야에서든 최정점을 찍지는 못했다.
문제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이 모든 진실에도 불구하고 아서가 자신이 완전무결한 왕재임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에서부터.
황태자가 어떤 실책을 저질러도 세 치 혀로 아부를 늘어놓는 이들이 널린 황궁에서, 아서는 적당히 뛰어난 자질을 타고났다. 각자의 속셈을 품은 신하들은 황태자가 무얼 하든 세기의 천재라도 난 양 온갖 호들갑을 떨어 댔다.
그 허황된 아부를 채 여물지 못한 어린 아서는 모두 진실이라 받아들였다. 정말로 자신이 세기의 천재라도 된 양 오만하게 굴었다.
오래 가지 못할 자만이었다.
아서의 멍청한 착각은 머지않아, 그가 열다섯 살이 되는 해에 깨졌다.
카를로스. 황제에게 버림받았던 아이. 백금색 머리칼과 맑은 적안을 지닌 아서와 달리, 황족의 상징을 완벽하게 갖춘 아이.
아서는 열다섯 살 되는 해에 고작 열 살짜리 아이, 카를로스와의 대련에서 패배했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은 아서의 머릿속에 박제된 듯 남아 있다.
손아귀에서 떨어져 나간 검이 귓속을 후벼 파는 쇳소리와 함께 연무장 바닥을 굴렀다. 텅 빈 손을 멍청하게 바라보던 아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칼, 너 분명….」
「…….」
「분명 검을 배우지 않았다고 했잖아.」
그래. 분명 이런 질문을 던졌던 것 같다.
아서가 망연자실하여 추궁하듯 물었을 때, 카를로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말간 눈으로 아서를 올려다보았다.
「…형님이 알려 준 거예요.」
「내가 알려 줬다고?」
「네, 형님이 저번에 이렇게 하라고…. 가르쳐 준 대로 했어요.」
형님에게 배운 대로 한 거라고, 칭찬을 기대하고 있던 카를로스가 풀이 죽어선 변명했다.
아서는 도무지 카를로스가 그에게서 무엇을 배웠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어린 동생이 귀여워 소꿉놀이하듯 몇 번 목검을 쥐여 준 게 전부였다.
그 가벼운 장난이 이런 결과로 돌아오게 될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카를로스에게 패배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아서는 자신이 검술의 천재임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를 가르치던 이들이 ‘전하께선 분명 오러 마스터가 되실 인재’라며 입을 모아 얘기했던 탓이다.
고개를 들 수 없이 수치스러웠다. 그렇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아서는 패배감에 매몰되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기사가 될 게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자신을 위안했다.
물론 이후에 뒤따를 결과를 알지 못했기에 할 수 있었던 생각이었다. 그날이 모든 균열의 시작이 될 거란 걸, 아서는 알지 못했다.
카를로스에게 패배한 그날로부터 며칠의 시간이 지난 때였다. 형제의 대련을 지켜보던 이들을 시작점으로 하나둘 말이 퍼져 나갔다.
황태자가 어린 형제에게 패배하였다는 흥미로운 소식은 불이 번지듯 순식간에 옮겨졌다. 뒤늦게 황제는 아랫것들을 통제하려 했지만 이미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진 후였다.
예로부터 강한 기사를 숭배하는 경향이 강했던 제국인들은 천재의 탄생을 반겼다.
그 그늘에 가려질 아서는 당연히 안중에 없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서로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단둘뿐인 황자끼리 끊임없이 비교를 당하기 시작한 것은.
아서는 동생 카를로스에게 패하고, 또 패했다. 아서가 어떤 성취를 이루어 내든 진짜 세기의 천재인 카를로스의 그림자에 가려지고 말았다.
아서의 어린 동생은 아서가 애써 이루어 낸 것을 아무런 정성을 들이지 않고 쉽사리 해냈다. 그가 일주일 동안 끙끙거리며 붙잡고 있던 서적을 한 시간도 안 되어 독파한 것은 물론이고, 검을 쥔 지 두 달도 지나지 않아 아서의 성취를 뛰어넘는 기염을 토했다.
카를로스에 비하자면 아서는 태양 앞의 반딧불과 다름없었다. 반딧불은 해가 사라지고 밤이 되어서야 한 줌만 한 빛을 발할 뿐이다. 아서에게 카를로스는 거대한 벽이었다.
아서가 카를로스보다 앞선 건 기껏해야 5년 일찍 태어나 얻은 황태자라는 자리. 고작 그것 하나였다.
그가 스물여덟 살이 되도록 황태자라는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건 순전히 운이 좋아서였다. 자신의 능력과 별개로, 주변의 환경 때문에 아직까지 주제에 맞지 않게 황태자라는 칭호를 달고 있었다.
만약 모든 걸 배제하고 순전히 아서와 카를로스 둘을 비교했다면 그 누구라도 카를로스의 손을 들어 주었을 것이다. 그게 설령 그의 어머니나 아버지더라도 말이다.
대신 카를로스의 존재를 배제한다면 모든 상황이 아서의 편이었다.
황제는 카를로스를 증오했다. 황제가 사랑했던 여인이 난산 끝에 카를로스를 낳고 세상을 떴다는 이유로.
아서의 어머니, 황후 역시 아서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한때 대공가의 후계였던 어머니는 승계 다툼에서 패해 한낱 황후가 된 사실을 무척이나 치욕스럽게 여겼다. 제 굴욕의 보상을 아서에게서 돌려받으려 했다.
황후는 아서가 제위에 오르길 바랐고, 황제는 카를로스만큼은 제위에 오르지 않길 바랐다. 황제와 황후 둘 사이에 사랑은 없었으나 그들의 동맹만은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카를로스가 뛰어난 성취를 보일수록 황제는 거세게 화를 내며 아서를 재촉했다.
「내 후계가 되어서 어찌 한참 어린 동생보다도 못한 성취를 보인단 말이냐.」
「못난 것. 명심하거라. 무슨 일이 있어도 너만이 유일한 내 후계자다. 알겠느냐?」
아서를 몹시 한심하게 여기면서 그를 그 누구보다 아끼는 양 가장했다.
황후는 자신의 핏줄을 타고난 자식이 카를로스보다 못한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아서의 패배를 자신의 굴욕처럼 여기며 아서에게 모진 소리를 늘어놓았다.
「너는 황제가 되기 위해 태어난 아이다. 네 존재 가치는 오직 그것만으로만 증명될 수 있는 것이야.」
「더는 그따위 것에 뒤처져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어린 아서는 자신을 짓누르는 것들에 깔린 채로 바둥거렸다.
주변은 아서를 끊임없이 채찍질했고, 그가 팔꿈치로 기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길, 적어도 카를로스의 발끝만큼은 따라가기를 바랐다.
아서는 괴로워했고, 매일 밤 생각했다.
카를로스만 없었다면 모든 것이 완벽했을 거라고.
***
널따란 집무실. 장식이 많이 붙지 않은, 누가 봐도 값비싸 보이는 옅은 색의 가구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다.
벽 한 면을 차지한 창에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새하얀 바닥은 주인의 성정을 반영하듯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했다. 그러나 창으로 들어오는 밝은 빛과 달리 방 안의 공기는 숨이 막힐 것처럼 무거웠다.
해가 드는 창가에 앉은 황태자는 다소 고압적인 모습이었다. 그가 지닌 특유의 화려한 외모는 보는 이의 시선을 절로 끌어당기곤 했지만, 겁먹은 시동으로선 감히 그를 올려다볼 수조차 없었다.
“…태자 전하.”
시동은 고개를 숙인 채로 마른침을 삼켰다. 부디 이 순간을 무사히 넘길 수 있기만을 바라며 황태자의 발끝만 애절하게 바라보았다.
평상시엔 무정할 정도로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황태자는 그의 아우 카를로스와 관련된 일에 한해선 무척이나 예민한 사내가 되었다. 이 자리에 있는 시동은 이 순간 아서의 짜증을 대신 받아 내기 위한 일종의 희생양이었다. 이대로 얼굴에 찻잔이 날아와도 얌전히 감내해야 하는 처지였다.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 갈수록 아서는 점차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사람이 되어 갔다.
주변의 모든 이들, 심지어 그의 양친마저도 카를로스와 아서를 끊임없이 비교했다. 아서는 영원히 이길 수 없는 달리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죽는 날까지 카를로스의 뒤만 쫓는 게 제 숙명처럼 여겨졌다.
아서는 결코 둔재가 아니었다. 분명 그는 객관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 스물여덟 살에 오러 마스터라는 뛰어난 성취를 이루어 냈으며, 그 머리 또한 명석한 편이었다. 황제를 대행해 귀족 회의를 이끄는 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훌륭한 스승, 황가의 풍부한 지원, 무엇보다 끊임없는 노력을 바탕으로 일군 것들.
어디 내놓아도 결코 부끄럽지 않은 성과다. 만약 카를로스가 없었다면 아서는 적당한 성군으로 이름을 떨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신의 축복을 받은 재능의 소유자, 카를로스였다.
카를로스는 열여덟 살에 최연소 오러 마스터가 되었고, 아서는 뼈를 깎는 노력으로 스물여덟 살에 간신히 오러 마스터가 되었다. 무려 십 년의 차이다. 아서는 그 명백한 수치만큼 카를로스와 그의 차이를 잘 드러낼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겁을 집어먹고 있던 시동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2황자 전하께서… 승전보를 울렸다는 소식입니다.”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시동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노기 띤 음성이 들릴 거라 예상했으나, 황태자는 평소와 달리 전혀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그래?”
언뜻 무심하게 들리는 짤막한 물음만이 그가 보인 반응의 전부였다. 시동이 고개를 푹 숙였다.
“예, 송구하옵니다.”
“…슬슬 전쟁을 끝낼 때가 되긴 했지.”
시동이 자신에게로 날아올까 두려워했던 찻잔은 조용히 잔 받침 위로 내려앉았다. 카를로스가 공을 쌓고 귀환 중이라는 소식에도 아서의 얼굴은 평온했다.
“기쁜 소식이로군. 하루빨리 카를로스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어.”
“아? 네, 네…. 그렇사옵니다.”
기분 좋게 미소 짓는 아서를 보고 시동이 어리바리하게 대답했다. 아서는 그런 시동을 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어린 아서가 느끼던 열등감은 해가 지날수록 조금씩 축적되어 마침내 증오심으로까지 변질됐다. 아서는 매일 밤 꿈에서 카를로스를 죽였다.
그리고 오늘 아침, 눈을 뜬 아서는 깨달았다.
어차피 이 세계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단 사실을.
이미 결과가 정해져 있는 일에 아등바등 발악을 해 봤자 제 자신만 괴로울 따름이다. 그런 깨달음을 얻은 아서가 평소와 다르게 초연한 태도를 보이자, 힐끗 아서의 눈치를 본 시동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전하. 송구하옵니다만, 드릴 말씀이 몇 가지 더 남아 있습니다.”
애써 당황한 표정을 수습한 시동이 아서에게 사정을 전했다. 2황자 전하가 언제쯤 돌아올 것이고, 돌아오는 날엔 전승식이 예정되어 있다는 내용이었다.
평소였으면 화를 내며 시동을 내쫓았을 아서는 가만히 그 자리에 앉아 전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심지어 내내 입가에 은은히 미소를 띠고 있기까지 했다.
놀라운 상황에 땀을 뻘뻘 흘리던 시동은 본래라면 말하지 않았을 극히 사소한 이야깃거리마저 죄다 아서에게 고해바쳤다.
그렇게 혼이 나간 시동이 카를로스가 아끼던 전투마를 잃었다는 소식까지 읊어 대고 있을 즈음, 드디어 아서가 시동에게 축객령을 건넸다.
“그래. 이만하면 충분하니 그만 물러가거라.”
“황공하옵니다, 전하!”
물러나라는 말만 기다렸던 시동이 크게 반색했다. 그로선 도무지 어디서 보고를 끝내야 할지 혼란스럽던 참이었다.
소년은 몸을 반 접을 기세로 인사를 건네고는 도망치듯 집무실을 벗어났다.
시동이 집무실을 나가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도 아서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처리해야 할 서류에 눈길도 주지 않고 가만 턱만 괴고 있었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눈은 본래 아서와 다른 사람인 것처럼 여유로웠다.
“날 좋네.”
혼잣말과 함께 입가에 머물러 있던 미소가 흩어졌다. 그러자 본래의 냉랭한 분위기가 다시 제자리를 찾은 듯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서는 느긋하게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며 시간을 허비했다. 정말로 날이 좋았다.
슬금슬금 범위를 넓혀 들어오던 햇볕이 어느새 그의 발끝에 닿았다. 안 그래도 군데군데 금칠을 해서 번쩍이는 새하얀 궁성은 해가 차오르는 시간대엔 정말 눈이 부시게 빛이 났다.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지겹게 봐 왔던 광경이건만 오늘따라 왜 이리도 눈을 뗄 수 없이 아름다운지.
한참 뒤 자리에서 일어난 아서가 곧장 향한 곳은 반투명한 장식장 앞이었다.
좀 전 창밖의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던 것처럼, 아서는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도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흠.”
뺨에 손을 가져다 댄 아서가 제 얼굴을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맞은편에 보이는 모습이 너무나 낯설다. 28년간 보아 온 얼굴인데도, 처음으로 자신을 제대로 직시하는 기분이었다. 마치 수십 년간 이어졌던 기나긴 악몽에서 번뜩 깨어난 느낌.
악몽까진 아니지만 간밤 사이 정말로 긴 꿈을 꾸긴 했다.
어젯밤 그는 한 사람의 일생을 담은 꿈을 꾸었다. 고작 꿈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생생했던, 아마 제 전생이라고 일컬어야 할 무언가였다.
아서는 머릿속에서 조각조각 떠다니는 장면들을 다시금 천천히 되감아 보았다.
전생에서 그는 이곳에서와 달리 가난한 고아였다. 성인이 되어 제대로 된 노동을 할 수 있기 전까지 늘 배가 고팠던 것 같다. 하루하루 연명하기 급급했던 시기였기에 돈이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했고, 그러는 와중에 연기를 배웠다.
운이 좋았다. 단순히 그럴듯한 외모를 앞세워 시작했던 배우 일이 그에게 천직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타고난 재능 덕에 그는 질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적당히 남들처럼 살았다. 정당히 유명세를 떨쳤고, 그럭저럭 돈을 벌었으며, 나쁘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졌다. 젊은 나이에 외로이 홀로 급사한 것만 빼면 나쁘지 않은 인생이었다.
특별할 것 없던 인생 속에서 아서는 관조자가 아닌 당사자였다. 스스로 생각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때로는 괴로워 눈물지었다.
그 탓인지 꿈에서 깨어난 순간 아서는 자기 자신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스스로가 아서인지, 꿈속의 그 남자인지 판단 내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으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던 건 그 순간뿐이었다.
뒤엉킨 기억을 하나둘씩 정리하며 아서는 꿈속의 남자와 지금의 자신이 근본적으로 동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태어나 자란 환경이 달랐다는 점을 제외하곤, 기실 둘 다 아서 그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난 뒤로는 정해진 수순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레 전생의 자아, 현생의 자아가 뒤섞여 새로운 자아가 만들어졌다.
지금의 그는 무어라고 해야 할까. 여전히 아서이면서, 꿈속에서나마 다른 삶을 겪어 보았으니 이전의 자신과는 또 다른 자신이라 보아야 했다.
고작 하룻밤 사이에 아서의 세상이 뒤집혔다. 그의 눈을 가리고 있던 열등감이라는 장막이 사라지자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반투명한 유리에 무표정한 얼굴이 비친다. 백금빛 고수머리에 장미색 눈동자. 황족을 상징하는 흑발을 가지지 못했을 뿐 일반적인 미의 기준에 지극히 부합하는 외모였다. 나르시시스트마냥 스스로를 찬양할 만한 일은 아니나, 그렇다 하여 전처럼 제 자신을 역겨워할 필요 또한 없어 보인다.
아서는 미묘한 감상에 잠겨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집무실 구석에 있는, 한 번도 엉덩이를 붙인 적조차 없던 카우치에 몸을 눕혔다.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자유의 몸이 된 것 같은 후련함을 느꼈다.
***
“태자 전하, 에드윈입니다.”
한참 넋이 나가 늘어져 있던 아서를 깨운 건 짧은 노크 소리였다. 황제의 부름을 핑계로 피신해 있던 부관이 집무실로 돌아온 것이었다.
아서가 허락을 내리자 부관 에드윈이 긴장한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집무실로 들어왔다.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들어오는 부관에게 아서가 턱짓했다.
“그리 눈치 보지 말고 앉아, 에드윈.”
“…예, 죄송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에드윈이 주춤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의 눈동자가 주변을 탐색하듯 돌아다녔다.
어쩐 일인지 방 안이 부서진 흔적 하나 없이 멀쩡했다.
보통 2황자 전하와 관련된 소식이 전해지고 난 뒤에는 주변 집기가 남아나지 않았는데, 오늘은 모든 가구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얌전히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에드윈의 시선이 카우치에 누운 아서에게로 슬며시 향했다가 급히 제자리를 찾았다. 아서가 생전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자리에 누워 있는 것이 괴상하게 느껴졌지만, 에드윈에겐 그 점을 언급할 용기가 없었다.
이상한 점은 사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평상시였다면 눈앞에서 걸리적거리지 말고 꺼지라고 했을 상전이 웬일로 조금이나마 에드윈을 신경 쓰는 듯한 말을 했던 것이다. 눈치 보지 말고 자리에 앉으라니…?
죄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 하여 에드윈이 볼 때 아서가 딱히 화를 억누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의 희망 사항일지 모르겠으나 오히려 조금 기분이 좋아 보이는 듯도 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의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으니 부관으로선 다행인 일이었다.
에드윈은 아서를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조심 말문을 열었다.
“그… 전하. 오늘은 연무장에 가지 않으시렵니까? 혹 연무장으로 걸음하실까 싶어, 미리 준비를 해 두었습니다.”
보통 집무실을 때려 부수고 난 뒤엔 연무장으로 향하는 아서였기에, 그는 미리 아서의 대련 상대를 대기시켜 두었다.
“아, 그래. 안 그래도 곧 가 볼 참이었지.”
아서는 딱히 연무장을 때려 부술 만큼 화나진 않았지만 그러마 하고 답했다. 집무실을 벗어날 좋은 핑계를 마다하고 굳이 지루한 서류에 파묻혀 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에드윈,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지. 난 연무장으로 갈 테니 이만 들어가 보도록 해.”
“예? 그럼 오후 일정은….”
“내일로 미뤄.”
“그, 예. 그리하겠사옵니다.”
평소엔 잠자리에 들기 직전까지 업무를 보던 아서가 일찍이 일과를 마무리하려 들자, 에드윈은 보기와 달리 전하께서 속이 많이 상하셨나 보다 짐작하였다. 물론 몹시 잘못된 추측이었다.
“내일 봐, 에드윈.”
“예, 전하. 내일 뵙겠습니다. 저는 마저 정리해야 할 것이 있어서 조금만 더 있다가 가겠습니다.”
“그래. 편한 대로 해.”
터벅터벅 걸어간 아서가 집무실 한편에 걸려 있던 검을 꺼내 들었다. 에드윈의 염려 가득한 눈빛이 뒤통수를 찔렀다.
아서는 이상한 착각에 빠진 에드윈을 내버려 두고 후련하게 집무실을 나왔다. 문을 열고 한 발 내디디니 주변의 공기가 가벼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궁성 복도를 여유로이 걸으며 주위를 살폈다. 경계령이라도 내려진 양 모든 사용인들이 어떻게든 아서의 눈에 띄지 않으려 애쓰는 게 보였다.
“태자 전하, 오셨습니까.”
미리 연무장에 대기하고 있던 올리브색 머리의 기사, 티모시가 아서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가 바로 아서의 호위 기사이자 오늘의 대련 상대였다.
“말씀 전해 듣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곧장 대련을 시작하시겠습니까?”
“그러지. 거기 너, 이리로.”
아서가 손짓으로 종자를 불러들이곤 한 손에 달랑달랑 들고 있던 검을 넘겼다.
“대련용 검을 가져오겠나.”
버릇처럼 진검을 빼내 들려던 아서는 오랜만에 대련용 검의 존재를 상기했다. 아서의 명에 종자가 급히 달려가 대련용 검을 들고 돌아왔다.
“…오랜만의 대련이네, 티모시.”
“예, 전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검을 든 아서와 마주 서자 티모시의 얼굴 위로 긴장한 기색이 떠올랐다.
동등한 대련이라 하기엔 실상 티모시는 아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화가 난 아서는 이따금씩 과하다시피 기사를 몰아붙이곤 했는데, 그 순간 티모시가 할 수 있는 건 아서의 화가 풀릴 때까지 버티는 일뿐이었다. 대련이라기보단 화풀이에 가까운 행위였다.
인페르노 제국은 기사의 나라로 불린다. 강한 기사를 숭상하는 분위기가 제국 내에 전반적으로 깔려 있을뿐더러, 신분과 나이를 불문하고 대부분은 은연중에 황족 중 가장 강한 자가 황위에 올라야 한다 여겼다. 아서가 유독 검에 집착했던 건 그 탓이었다.
카를로스에 비해선 부족하지만 아서 역시 타고난 신체적 조건이나 기사로서의 재능이 평균을 훌쩍 뛰어넘었다. 오러 마스터는 재능이 있는 기사 중에서도 아주 극소수만이 도달하는 경지였다. 아서가 스물여덟 살이란 이른 나이에 마스터가 된 쾌거는 극찬받아야 마땅했다.
아서는 이제 와서 모든 과거의 기억을 재정립하는 중이었다. 가만 보면 모자람 없는 황족의 표상 그 자체인데, 왜 이렇게 열등감 덩어리로 자랐는지.
답은 간단했다. 아서의 주위엔 그의 성취를 카를로스와 비교하지 않고 순수하게 기뻐해 줄 이가 아무도 없었던 탓이다.
티모시 또한 대외적으로는 아서의 기사였으나, 진실은 그렇지 않았다.
“헉, 헉….”
대련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티모시가 검을 놓친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 헐떡거렸다.
오늘의 아서는 굳이 과거처럼 화풀이를 하느라 대련을 길게 이어 갈 생각이 없었다. 그는 기사와 몇 차례 검을 섞지 않고 상황을 빠르게 마무리 지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기사를 무심하게 훑은 아서가 달려온 종자에게 검을 건넸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대련은 평소보다 빨리 끝이 났다.
“수고 많았어, 티모시 경. 대련은 여기서 이만 끝내는 게 좋겠군.”
“예, 전하. 황송하옵니다….”
“잡고 일어나겠어?”
아서가 티모시에게 선뜻 한 손을 내밀었다. 코앞까지 내밀어진 손을 보고 티모시가 눈을 끔뻑거렸다.
“전하, 제가 어찌 감히….”
“괜찮아.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서 그런 거니까.”
아서는 그가 제 손을 잡을 때까지 기다릴 것처럼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머뭇거리던 기사가 마주 손을 잡자, 아서가 손아귀에 힘을 주고 기사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그더러 들으라는 듯이 또박또박 말했다.
“조만간 반가운 얼굴을 보게 되지 않겠나. 모처럼 기분이 좋아.”
“반가운 얼굴이라면 어떤….”
티모시는 좀 전부터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카를로스를 말하는 거야. 경도 기쁘지 않아? 제국의 영웅이 돌아올 날이 머지않았는데.”
“송구하옵니다. 저는 딱히 기뻐할 일까진… 아니라 생각합니다.”
티모시가 긴장한 목소리로 속마음과 반대로 답했다. 아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었다.
“아부하기는.”
어차피 기사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 이 대화만 카를로스에게 그대로 전해 주면 그만이었다.
“경사로운 소식도 들었겠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 쉬는 편이 좋겠어. 경도 그렇게 생각하지?”
“예.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그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수고해.”
엎드려 절받기로 원하는 답을 얻어 낸 아서가 곧이어 연무장을 나섰다. 몸을 움직이고 나니 확실히 머릿속이 좀 정리된 기분이었다.
침실로 걸어가는 내내 아서의 입가에 머문 웃음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티모시가 카를로스에게 말을 전하리라 예상하고 행동을 꾸며 낸 것이었지만, 오늘따라 기분이 좋단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전생을 보여 주었던 꿈이 설령 제 망상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아서에게는 커다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더라면 그는 죽는 날까지 카를로스의 그림자에 가려져 괴로워했을 테니 말이다.
인페르노 제국의 황태자.
전생의 그라면 꿈도 못 꿀 까마득하게 높은 지위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아서가 오를 수 있는 한계점이었다.
아서는 알았다. 자신은 황제가 되지 못한다. 여태 황제가 되는 것만 바라보고 달려온 게 다소 허망하긴 하지만, 결국 제위는 그의 형제 카를로스가 차지할 것이다. 긴 꿈에서 깨어난 뒤 자연스럽게 깨달은 사실이었다.
전생에서 그의 생활 패턴은 몹시 단순했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거나, 이따금 누구든 끌어들여 외로움을 달래거나. 그러다 가끔 혼자 있을 때엔 집에 박혀 책을 읽었다. 가학적인 섹스를 제외하면 소설을 보는 것이 그의 유일무이한 취미라 할 수 있었다.
꿈에서 깨어난 직후, 아서는 이곳이 그가 읽었던 <제국의 주인>이라는 판타지 소설 속이라는 걸 깨달았다. 말하자면 그는 소설 속에서 태어난 셈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한지는 의문이었으나 그렇게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아서는 지금도 제가 꿈을 꾸는 중인 건 아닐까…. 혹여나 자신이 정신병에 걸리기라도 한 건 아닐지 의구심을 품었다가, 끝없이 이어지는 상념에 머리가 아픈 나머지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실상 모든 게 아서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기엔 지난밤 꿈이 지나치도록 생생했다. 이미 그는 전생을 떠올리기 전의 모습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어진 행운에 감사하며 그것을 적절히 이용하는 것뿐이다.
<제국의 주인>은 전생의 아서가 죽기 직전 읽었던 소설이었다. 죽기 직전, 즉 꿈이 끝나기 직전 읽었던 터라 그 내용을 떠올리는 건 쉬웠다.
소설은 불운하던 소년이 인페르노 제국의 황제가 되는 일대기를 담고 있었다.
스토리는 단순했다. 소설의 주인공인 ‘소년’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여의고, 황제의 미움을 사 어린 나이에 변방으로 쫓겨나게 된다. 그러나 여타 주인공들에게 그렇듯, 고난은 그를 강하게 할 장치에 불과했다. 수많은 위기를 극복한 소년은 마침내 오나드 왕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끝낸 뒤 금의환향을 한다.
거기까지가 소설의 중심 스토리였다. 그 후에 그를 멸시했던 아비와 형제를 밀어내고 황좌에 오르는 부분은, 어른이 된 소년에겐 길가의 돌멩이를 치우는 것만큼이나 사소한 일이었다.
이 이야기 속 ‘소년’의 이름은 카를로스 프레데릭 폰 임페르노.
<제국의 주인>의 주인공은 반박할 여지도 없이 아서의 형제인 카를로스다.
너무나 지당한 사실이라 부정할 마음도 안 들었다. 아서는 그동안 제가 누구를 상대로 경쟁하였나 싶어 헛웃음만 나왔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남자 주인공이지 않은가.
이 이야기 속에서 아서는 그럴듯한 악역조차 되지 못했다.
카를로스에게 밀려나는 황태자이자, 그를 평생토록 시기했던 손위 형제 아서 프란시스 폰 임페르노.
질투심을 품고 카를로스를 죽이려 들긴 하나 별다른 타격도 입히지 못하고 죽으니 비중 있는 악역이라 하기에도 애매하다.
소설 속 아서는 정말 본래의 그가 했을 법한 일들만 저질러 댔다. 카를로스를 시기하고 내내 못된 짓만 이어 가다, 처형 직전 음독을 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아서의 최후였다.
만일 전생을 떠올리지 못했더라면 어땠을까. 깊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보나 마나 소설 속 내용과 같은 최후를 맞이하였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아서는 진심으로 전날 밤의 행운에 기뻐하고 또 안도하여야 했다.
***
아직 채 물기가 마르지 않은 머리칼이 축축했다. 연무장의 흙먼지를 말끔히 씻어 낸 아서는 시종이 건넨 얇은 가운을 걸쳤다.
“루이스.”
“예, 전하.”
아서의 부름을 듣고 온 루이스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궁에 몸을 담은 지 오래된 루이스는 아서 앞에서 두려움을 내비치지 않는 시종 중 하나였다.
“백색궁의 창고에는 거울이 하나도 없을 테지?”
“예, 전하. 작은 것 하나하나 빠짐없이 전부 치워 두었습니다.”
“역시 그렇겠지. 그럼 다른 궁에서 거울을 하나 공수해 와.”
“예. …예?”
“가능하면 큰 걸로.”
아서의 명에 침착한 루이스가 드물게 당황했다. 백색궁의 거울이란 거울은 죄다 치운 지가 십여 년째인데, 궁에 거울을 들이지 말라 명한 장본인인 아서가 이번엔 정반대의 지시를 내린 것이다.
루이스는 놀란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물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큰 것이라면, 어느 정도 크기를 말씀하시는지요.”
“반신을 비출 수 있는 정도면 되겠군. 쓸 만한 게 없다면 임시로라도.”
“예, 그리하겠사옵니다.”
루이스가 공손히 절을 하고 뒷걸음질로 침실을 빠져나갔다. 침실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밖으로 나간 루이스가 아서의 명을 전달하자마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명령에 여러 사용인들이 허둥지둥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서는 그런 그들의 모습이 재미있는 한편 마냥 유쾌하진 않았다. 저 당황한 모습들이 그동안 그가 얼마나 강박적으로 살아왔는지 보여 주는 하나의 단면처럼 보였다.
깊이 들여다보면 전생의 그와 현재의 그는 근본적으로는 같은 사람이었는데, 동일한 영혼을 지닌 사람이 자라난 환경에 따라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본래 아서는 일종의 신체이형장애를 — 실제로는 외모에 결점이 없거나 그리 크지 않은 사소한 것임에도, 자신의 외모에 심각한 결점이 있다고 여기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질병 — 앓고 있었다. 끊임없이 카를로스와 자신을 비교하기 급급했고, 거울 속에 담긴 제 모습을 역겨워했다. 때문에 백색궁에는 다른 궁과 달리 그 어디에도 거울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의 일이다.
“실례하겠사옵니다, 전하.”
얼마 지나지 않아 건장한 시종 두 명이 낑낑거리며 가구를 들고 들어왔다.
반신을 비출 수 있는 거울이 달린 새하얀 콘솔이 비스듬히 기울어 침실 문을 통과했다. 그 잠깐 사이 용케 아서의 침실에 잘 어울리는 모양으로 구해 온 듯했다.
“전하, 콘솔을 이쪽에 두는 게 어떠신지요.”
“그래. 거기 둬.”
침실의 넓이에 비해 가구가 몇 없던 터라 콘솔을 놓는 데에 지장은 없었다. 색깔 역시 본래 있던 물건들과 잘 어우러져 굳이 새로 제작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일을 마친 시종들이 방을 나서자 다시 아서의 주위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무도 없는 침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침대에 비스듬히 앉은 아서가 한쪽 구석에 있는 콘솔을 바라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보기 싫지 않았다. 아무래도 약간의 거부감이 드는 건 사실이나 무시할 수 있는 정도였다.
침실에 거울을 둔 건 아서 나름대로는 큰 결심이었다. 심경의 변화가 생긴 이들이 머리칼을 자르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는데, 아서의 경우는 오랜 자기혐오를 떨쳐 내고자 마음을 먹은 셈이다.
가운을 여민 아서가 무언가 확인해 볼 심산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잠깐 망설이다 콘솔 앞에 섰다. 반신 거울에 제 모습이 비추어졌다.
아무런 손질을 하지 않은 옅은 색 머리칼이 이마 위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린다. 거울 속 자신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이렇게 거울 앞에 선 게 몇 년 만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타원형의 틀 안에 자리한 제 모습이 생경하다. 유리에 비친 윤곽을 관찰한 때와는 또 다른 감흥이 일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때나 둘 다 나쁘지 않은 기분인 건 동일했다.
슬쩍 고개를 기울였던 아서가 이내 제 뺨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뺨을 조물조물하다가, 무언가 확인해 보듯 거울을 보며 이리저리 얼굴을 바꿔 댔다.
무미건조하던 얼굴 위로 아서가 생전 한 번도 지어 본 적 없던 여러 표정이 드러났다 사라졌다. 마치 종이가 한 장씩 휙휙 넘어가는 것 같은 변화였다. 과장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변화는 아서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게 되네.”
이게 될까 반신반의했는데 정말로 가능한 일이었다. 아서는 ‘질투심에 눈이 돌아 버린 자신이 자기 위안적인 망상에 빠졌을지 모른다’는 가정 하나를 슬며시 지워 냈다.
원하는 대로 표정을 바꿀 수 있는 건 전생의 아서가 지녔던 가장 큰 재능이었다. 이 별거 아닌 재주 덕에 평생 배를 곯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모든 게 제 망상 불과하거나,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몸이 달라졌으니 재능 역시 사라졌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였건만 다행히 그렇진 않았다.
전만큼, 어떤 의미에선 전보다 더 표정을 바꾸는 게 쉬워졌다. 이제 그에겐 신체 부위를 컨트롤할 수 있는 마나라는 수단이 생겼기 때문이다.
전보다 더 완벽해진 능력은 아서가 즐거움을 누리는 일에, 또 그의 목숨을 부지하는 데에 유용한 도구가 되어 줄 것이었다.
뒤이어 아서는 거울 위로 손을 올려 눈동자 부근을 만지작거렸다.
황족의 검붉은 눈과 다른,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적안. 진득한 핏물이 고인 듯한 황족의 것과 비슷한 듯 미묘하게 달랐다. 인간의 것이라기엔 기이할 정도로 맑은 빛깔을 지니고 있었다.
이 맑은 적안은 백금발과 더불어 아서가 거울을 보기 싫어했던 이유 중 하나다.
출생의 비밀은 소설적 장치로 흔히 쓰이는 소재였다. 카를로스에게 형제를 밀어낼 명분이 필요했던 건지, 조연인 아서에게도 그에 해당하는 비밀이 있었다.
하나. 아서는 그의 어머니가 이종족과 내통하여 낳은 자식이다.
둘. 카를로스와 아서는 피가 섞인 형제가 아니다.
이 두 가지 중 하나만 들통나도 아서는 곧바로 처형대로 끌려가게 될 테다. 불운한 사실이었다.
아서의 몸엔 반 정도는 몽마의 피가 흐르고 있으며, 그의 눈은 보통 황족의 검붉은 눈과 달리 루비처럼 맑은 빛깔을 지녔다. 이 눈은 그가 몽마임을 증명하는 징표나 마찬가지였다.
얼굴조차 모르는 친부의 것처럼 완전하진 않을지라도 아서 역시 몽마의 능력을 지녔다. 그는 목표하는 대상의 꿈을 지배할 수 있었고, 상대를 유혹하는 페로몬을 불완전하게나마 흘려 보낼 수 있었다.
「명심해라. 설령 네가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그 능력을 드러내어선 안 된다.」
「예, 어머니.」
황후는 현실에서도, 원작에서도 아서에게 죽는 순간까지 이능을 드러내지 말라 당부한다.
그러나 원작의 아서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왜냐, 카를로스에 대한 열등감이 그의 이성을 흐리게 만들었던 탓이다.
어느 소설에서든 주인공을 건드리는 건 곧바로 파멸의 지름길이건만. 멍청하게도 꿈을 지배하는 이능으로 카를로스를 해치려는 음모를 꾸미고 만다.
당연한 수순으로 출생의 비밀이 들통나고, 황가를 능멸했다는 이유로 아서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황후의 가문인 오를레앙 대공가까지 처절하게 무너진 건 물론이다. 완벽한 파멸이었다.
악역들도 죄다 치워 버렸겠다, 뒤이어 주인공 카를로스는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는 뻔했다.
황제가 된 카를로스의 곁엔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남게 된다. 더 이상 갈등이 생길 일도 없다.
모두모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끝나는 거다. 아서만 빼놓고.
실지 과거의 아서는 겉모양새만 멀쩡했지 그 속은 카를로스에 대한 열등감으로 곪아 버린 지 오래였다.
지금의 아서는, 솔직히 고백하자면 과거의 그림자를 완전히 떨쳐 내진 못했다. 전생을 떠올렸다고 그를 좀먹어 왔던 날들이 없던 일처럼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뒤집혔다 해도 아서는 아서다.
이젠 딱히 카를로스에 대한 열등감으로 괴로워하지는 않지만, 카를로스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도록 내버려 둘 아량 따위도 없었다.
확실히 아서는 전생이든 현생이든 선하다는 말과는 거리가 멀었다. 주인공에게 찝쩍거리다 퇴치당할 악당 역할에 딱인 인간이었다.
전생에 고아로 태어났던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단 공허함에 시달렸다. 자아가 생긴 때부터 달고 살았던 외로움은 나이를 먹을수록 몸집을 불려 갔고, 그는 제 오랜 결핍을 사람의 체온으로 잊어 보고자 했다. 충족되지 못한 다른 욕구를 섹스로 메꿨다.
침실로 끌어들인 이의 성별이 무엇이든 어떤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오직 그를 함부로 대해 주기만 하면 되었다.
가학적인 섹스와 소설. 전혀 다른 부류의 그 두 가지만이 그를 위로해 주었다. 나이를 더 먹고 난 뒤라면 조금 달라졌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철이 들기도 전에 홀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또다시 혼자인 것과 마찬가지인 몸으로 태어나, 다시 홀로 죽어 갈 운명이었다. 동생인 카를로스와는 정반대의 삶이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 게 인간의 본성이라고들 하는데…….
아서를 두고 카를로스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결말을 맞이하는 건 좀 치사하다고 생각했다. 배가 심히 아픈 나머지 산뜻하게 발을 빼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아서는 짧은 고민 끝에 이렇게 하기로 했다.
오래는 말고, 아주 잠깐만 훼방을 놓는 거다. 한 일이 년만.
카를로스 혼자만 행복해지는 꼴을 보긴 싫고, 마침 카를로스는 아서를 곱게 다뤄 줄 것 같진 않은 남자이니 목숨도 건사할 겸 같이 즐겨 보는 건 어떨까.
결정을 내리는 건 금방이었다. 벌써부터 아서의 머릿속에 미완성의 각본이 뒤죽박죽으로 펼쳐졌다. 새빨간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반짝거렸다. 다분히 충동적으로 떠올린 생각이었으나, 아서는 이보다 완벽히 제 입맛에 들어맞는 계획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
잠이 든 줄 알았는데 눈을 뜨니 낯선 장소였다.
카를로스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높은 천장에 제국의 상징인 드래곤이 쏟아질 것처럼 양각되어 있었다. 가구가 몇 없는 침실은 머리칼 하나조차 떨어져 있지 않을 만큼 결벽적으로 보였다.
묘하게 눈에 익으면서도 낯선 장소다.
‘아…, 흐….’
귓가를 스치는 희미한 소리에 이끌려 카를로스의 시선이 이동했다. 카를로스는 건조한 눈으로 침대 위에 자리한 인영을 훑었다.
백금발의 사내가 그에게서 등을 돌린 채 웅크려 있었다. 익숙한 뒷모습을 빤히 보던 카를로스가 반대편으로 돌아가 남자를 살펴보았다.
남자의 미간은 찌푸려져 있었고, 잇새로는 달뜬 숨이 새어 나왔다. 성기를 쥔 손아귀에선 미끄러운 마찰음이 흘렀다. 웅크려진 몸, 흐트러진 머리칼, 미세하게 찌푸려진 미간,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달뜬 숨.
아마 그는 남자의 하반신이 보이지 않았더라도 자위 중이란 걸 알아차렸을 거다. 그만큼이나 노골적인 모습이었다.
놀랍게도 자위를 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은 그가 익히 아는 자의 것이었다. 수려한 낯을 한 남자는 다름 아닌 그의 형제였다.
덕분에 카를로스는 침대 위의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이 모든 게 꿈이란 걸 자각했다. 꿈이 아니라면 형님이 그가 보는 앞에서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신선한 꼴을 한 형제를 위아래로 훑어내렸다. 정복을 차려입은 채 침대 위에 누워 성기만 꺼내 놓은 아서는 현실의 아서와 같으면서도 달랐다.
평상시 그의 형님은 어느 곳에서든 결벽적이다시피 완벽한 차림새를 고수하곤 했다. 나름 현실이 반영된 듯 하의를 풀어 헤친 것을 제외하자면 꿈속의 아서 역시 평소 차림 그대로였다. 차라리 아예 다 벗고 있었더라면 이렇게 기묘한 기분이 들지 않았을 터였다.
카를로스는 의자를 끌어 침대 앞에 자리 잡았다. 방 안 어디에도 거울이 없는 걸 봐선 이곳은 아서의 침실인 모양이었다.
꿈속의 아서는 제 바로 옆에 있는 카를로스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러고 있으니 마치 그가 형제의 자위를 몰래 훔쳐보는 것 같은 모양새다. 누군가의 자위를 훔쳐보는 취미 따윈 없지만, 어차피 이 모든 상황이 꿈에 불과하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읏…….’
카를로스는 신기한 물건을 관찰하듯 아서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폈다.
아서가 연신 훑는 중인 성기는 제법 굵고 길었으며 옅은 색을 띤 것이 깨끗해 보였다.
꿈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였기 때문인지, 남자의 성기를 관찰하고 있단 사실에 큰 불쾌감이 들지 않았다. 주인의 결벽적인 성미를 닮아 꼿꼿하게 뻗은 모양새가 우습다는 생각은 들었다.
성기를 훑는 손은 기사답게 마냥 곱지만은 않았다. 보드라워 보이는 부위라곤 연분홍빛을 띤 손톱 정도가 유일했다.
유심히 지켜본 바 아서의 자위는 어설펐다. 쾌락을 좇기에만 급급해 보이는, 자위라는 걸 처음 해 보는 듯한 손길이다.
어쩌면 카를로스가 품고 있던 생각이 무의식중에 꿈에 반영된 건지도 몰랐다. 그는 평상시 아서를 귀찮고 우스운 존재로 여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딱히 형제의 수음하는 모습 같은 게 궁금하진 않았는데, 어째서 이런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의문이었다.
‘…아, 흐으….’
성기를 훑는 손길은 점차 빨라졌다. 쾌락에 흐려진 눈빛이 점차 이지를 잃어 갔다. 평소 열등감 가득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던 이와 동일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색다른 얼굴이다.
항상 고고한 척 굴던 이가 이런 얼굴도 할 줄 알았던가.
아마 현실의 아서는 카를로스의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 줄 바에야 죽어 버리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카를로스는 본격적으로 턱을 괴고서 감상을 시작했다. 흥미로운 꿈이었다.
‘칼…, 읏….’
그러나 흥미롭게 지켜보던 것도 잠시만이었다. 귓가에 익숙한 이름이 스쳐 지나간 순간, 카를로스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갔다.
‘카를로스…, 아….’
‘…….’
남몰래 그의 이름을 부르며 수음하고 있는 형님. 심지어 카를로스가 그런 형님을 훔쳐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흥미로운 꿈은 순식간에 질 나쁜 꿈으로 격하되었다.
카를로스는 제가 이따위 꿈을 바랐던가 지난날을 돌이켜 봤으나, 맹세코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형제를 상대로 이런 우스운 광경을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의 그 또한 흥분은커녕 그저 생각지도 못했던 모습을 보고 흥미로워하고 있을 뿐이었다.
‘…카를, 로스…, 그만….’
연이어 들려온 소리에 카를로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도대체 저를 두고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건지. 흥미는 사라지고 미미한 짜증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읏…, 칼, 좋아….’
성기를 훑는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보아하니 절정이 가까워진 듯했다.
카를로스가 그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물론 그가 일어나 문 쪽으로 향하든 말든 꿈속의 형님은 제 할 일에만 충실했다. 상상 속에서 카를로스를 희롱하며 자위하는 일 말이다.
그걸 가만 내버려 둘 생각이 없던 카를로스는 굳게 닫혀 있던 침실 문을 열었다가 휙 밀어 닫았다.
쾅, 순간적으로 벽이 진동할 만큼 커다란 소리가 났다.
‘누구…!’
놀란 아서가 급히 문 쪽을 바라보았다. 혹여나 끝까지 그를 인지하지 못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아서는 문가에 삐딱하게 선 카를로스를 곧바로 발견했다.
방금까지 제가 하던 짓이 뭔지 알긴 아는지 아서가 급히 옷자락을 추스렸다. 그러나 이미 터질 것처럼 발기해 있는 좆이 그리 쉽사리 감춰질 리가 없다.
‘그게 가리려 한다고 가려진답니까, 형님.’
‘이게, 네가, 왜 여기에….’
카를로스의 비아냥에 안 그래도 하얀 낯짝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이 무슨 경우 없는 짓이냐. 당장 나가지 못해?’
아서가 창백하게 질려서는 소리쳤다. 용케 이불을 끌어와 제 하반신을 가렸다만 그런다고 꼴이 덜 우스워지는 건 아니었다. 카를로스가 아서에게 턱짓했다.
‘지금 누가 누구를 쫓아내야 하는 건지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봐요.’
‘…헛소리 말고 나가, 당장.’
나가, 당장 나가. 아서는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그 말만을 반복했다. 과거의 카를로스가 수백 수천 번은 들었던 말이다.
저 소리를 꿈속에서까지 듣게 될 줄이야. 카를로스의 눈동자에 불쾌감이 서렸다.
‘내가 뭐 하러. 엄밀히 말하자면 형님이 꺼지셔야지. 여긴 내 꿈인데.’
기분이 가라앉으니 좋은 말이 나오진 않았다. 어차피 꿈인 마당에 예의를 차릴 필요가 있나 싶었다. 카를로스가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오지, 읏…!’
위협을 느낀 아서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걸 그냥 도망가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던 카를로스는 침대를 내려와 측면으로 빠져나가려 드는 아서를 낚아챘다.
목뒤를 쥐고 바닥으로 끌어 내리자 아서가 발버둥을 쳤다. 어울리지 않게 겁에 질린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 모든 게 꿈이라는 자각이 보다 확실하게 들었다.
‘놔, 윽…!’
그가 구둣발로 아서의 성기를 꾹 눌렀다. 아서가 카를로스의 발목을 쥐고 떼어 내려 들었지만 큰 의미는 없는 발악이었다. 어차피 이 꿈의 주인은 카를로스였다.
카를로스는 발에 서서히 힘을 실었다. 발기한 좆을 아예 짓밟아 터트려 버릴 생각이었다.
‘카를, 아…!’
그가 무얼 하려는지 눈치챈 건지 아서가 경악하며 입을 열었다. 카를로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좀 전 아서가 그랬던 것처럼 제 할 일에만 충실했다.
‘아, 하지 마, 윽….’
애원하는 소리가 듣기 좋아 일부러 조금씩 힘을 더해 갔다. 아서의 성기가 한계까지 짓눌렸다.
그리고 마침내 짓눌린 좆이 구둣발 아래에서 터지기 직전이었을 때였다. 갑작스레 시야가 종이를 구겨뜨린 것처럼 일그러졌다.
“…….”
절벽에서 떠밀리듯 한순간 눈이 떠졌다. 미처 인지할 새도 없었다.
카를로스는 망연히 눈을 깜빡였다. 보이는 건 익숙한 침실 천장만이 전부였다. 제 발 아래에서 애원하던 형제는 이미 신기루처럼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짜증 섞인 숨을 흘려 보냈다.
혹시나 싶어 하반신을 살펴보았지만 평소처럼 반쯤 서 있는 게 전부였다. 사정을 했다거나 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몽롱하던 정신이 서서히 깨어났다. 꿈에서 깨고 나서도 불쾌한 기분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길지 않은 꿈이었으나 그 잔상은 그 어떤 악몽보다 강렬했다. 그의 이름을 부르며 수음하는 아서, 애원하는 목소리, 고통에 겨워 바르작거리던 손끝. 그 모든 게 뚜렷하게 기억이 났다.
시야에 아직 형제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귓가에는 여전히 헐떡이는 숨소리가 따라붙었다. 차라리 악몽을 꾸는 편이 이보단 뒷맛이 깔끔할 것이다.
햇살이 내리쬐는 평화로운 아침. 카를로스의 얼굴은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히 일그러져 있었다.
***
걷어 둔 커튼 틈으로 따스한 햇살이 들어온다.
길게 기지개를 켠 아서가 기분 좋게 눈을 떴다. 은은한 미소가 그려진 얼굴은 근래 들어 가장 행복해 보였다.
아, 간만에 한 발 빼고 나니 시원하네. 오랜만에 꿈속을 누벼서 그런지 아서는 온몸이 가뿐해진 기분이었다.
상황상 어쩔 수 없이 꿈을 끝내긴 했지만 카를로스를 반찬으로 삼아 마저 해치운 자위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카를로스가 보는 앞에서 조금만 더 자위를 했다간 고자가 되거나, 어쩌면 그걸로 모자라 몸통과 대가리가 분리되었을지도 모르니 아서는 우선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아무리 꿈에서라도 좆이 터지는 기분을 느끼고 싶진 않았다.
생각 같아선 아서는 매일매일 카를로스의 꿈에 찾아가고 싶었다. 다만 그랬다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서가 개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걸 들키게 될 터였다.
카를로스처럼 정신력이 강한 자는 꿈에서조차 몽마에게 쉽사리 휘둘리지 않았다. 카를로스가 본인의 꿈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나면 아무리 아서라도 꿈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니 꿈을 다루는 능력은 함부로 남발해선 안 되었다.
입가에서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아서는 나른히 늘어져 보드라운 침구에 몸을 묻었다. 기분 좋은 아침의 시작이었다.
한동안 꿈의 여운을 즐기던 아서가 설렁줄을 당겼다. 곧이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자 전하, 기침하셨습니까.”
침실 문이 열리고 녹색 머리 시종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시종은 웬일로 아서가 깨우기도 전에 먼저 일어난 것이 놀라운 눈치였다.
“세숫물을 준비해. 오늘은 좀 이르게 나서야겠다.”
“예. 곧바로 세숫물을 준비해 오겠습니다.”
간만에 자발적으로 일찍 일어난 아침이었다. 대강 아침 세안을 마친 아서는 바삐 집무실로 향했다.
드디어 내일이면 아서의 형제, 카를로스가 수도 폰테네에 도착한다.
수년의 소요 끝에 카를로스가 이끈 제국군이 오나드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군대가 귀환하는 대로 엄청난 인원이 동원된 개선식이 치러질 예정이었다.
예로부터 인페르노 제국은 마법사들이 세운 나라인 오나드 왕국과의 전쟁에서 유독 힘을 쓰지 못했다. 기사의 나라라는 이명에 지나치게 자부심을 품은 나머지 마법을 천시했던 게 그런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오나드 왕국이 제국을 상대로 버틸 수 있던 것도, 카를로스의 참전 이전까지만 가능했던 일이었다.
카를로스가 군대를 이끌기 시작하면서, 무참히 밀린 왕국은 결국 제국에게 승기를 내주어야만 했다. 아무리 왕국에서 수많은 마법사를 배출한다 해도 애초에 체급이 다른 상대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었다.
본래 원작에선 카를로스의 공에 비해 작은 규모의 개선식이 치러진다. 속 좁은 황태자 아서가 중간에 개입하여, 의도적으로 예산을 줄이고 배당된 인원을 감축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아서는 원작과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그 어느 때보다 성대한 전승식을 개최하고자 태자궁의 예산까지 상당 부분 덜어 와 배정했다.
“마법사는 전날 미리 궁성에 머무르게 해. 모자람 없이 대접하고.”
“예, 전하.”
“생화는 충분히 수급이 되었나?”
“예, 넉넉하게 들여놓았습니다.”
원작에선 종이 쪼가리나 조금 뿌리고 말았다면 이번엔 그 규모가 달랐다. 생화와 말린 꽃송이를 흩날리고 거기에 환상 마법이 더해질 것이다. 제국의 상징이 그려진 깃발까지 천 개가량 배포했다.
“기사단은.”
“일찍이 모여 대열을 맞춰 보고 있습니다.”
기사단을 동원하는 건 아서가 가장 공들인 부분이었다. 일개 병사가 아닌 기사단 전체가 화려한 갑옷을 입고 도로 양옆으로 행렬을 호위한다.
카를로스의 꿈에 찾아가고, 전승식을 호화롭게 치르고. 이 모든 게 카를로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아서의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아서는 하루빨리 카를로스와 이런저런 재미를 좀 보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지금 카를로스는 아서에 대한 관심 자체가 전혀 없었다. 그런 카를로스의 뇌리에 아서라는 존재를 각인시키려면 그의 관심부터 끄는 게 먼저였다.
우선 아서는 금을 쏟아부은 개선식으로 카를로스를 놀라게 하고, 그날 저녁 치러질 연회에서 카를로스에게 접근할 생각이었다.
“2황자는 어디쯤이라 하던가.”
“황도 근방의 셀타 영지에 머무르고 계신다 하옵니다.”
“그만하면 제때 도착하겠군.”
“예, 다른 문제가 없는 한 그러할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까진 계획했던 대로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었다. 나머지는 전승식 날 아서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렸다.
이제부터 아서는 ‘한동안은’ 모두의 앞에서 개과천선한 형님 행세를 할 계획이었다.
카를로스의 호감을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아주 작은 관심이라도 끌 수 있다면 그걸로도 만족스러웠다.
카를로스가 짜증을 내도 괜찮았다. 그만큼 아서가 그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오히려 카를로스가 화를 내는 게 좀 더 아서의 구미에 들어맞긴 했다.
어차피 아서는 카를로스와 연인 같은 관계가 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강압적인 관계에서 쾌감을 느끼는 아서에게, 연인 간의 부드러운 관계는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하기만 했다.
그런 면에서 어젯밤의 카를로스는 완벽했다. 질색을 하고 방을 나가 버리진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아서가 기대한 것 이상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탁상 위의 서류를 무성의하게 넘기며, 아서는 전날 밤 꿈을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어쩌면 두 사람은 예상한 것보다 더 완벽한 관계가 될 수 있을지 몰랐다.
***
개선식의 열기가 그대로 옮겨 온 듯 연회장은 이른 저녁부터 활기를 띠었다.
넓은 홀은 우아하게 치장한 이들로 붐볐다. 초라한 행사가 될 거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개선식은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치러졌다. 보는 이를 함께 고무시킨 행진이었기에 다들 들뜬 면면을 감추지 못했다.
전승식의 주인공 카를로스는 짧게 얼굴만 비추고 몸이 좋지 않단 이유로 잠시 자리를 비웠다. 모두가 아쉬워하는 가운데, 황제만은 기다렸다는 듯 그가 부재한 사이 빠르게 축사를 끝마쳤다.
그리고 아서는 다소 흥분한 이들 사이에서 얌전히 카를로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를로스가 없으니 그 대신이라 해야 할지, 황태자인 아서에게로 관심이 쏟아졌다. 호기심과 적대감, 호의 등 온갖 종류의 시선이 직접적으로 또는 은근히 한군데로 향했다.
표정 없는 얼굴 위로 샹들리에 불빛이 내려앉았다. 빛을 받아 푸른 기를 띤 짙은 남색의 정복이 아서의 몸을 빈틈없이 감쌌다. 아서는 늘 속살을 드러내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결벽적인 옷차림을 고수하였는데, 이번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그를 둘러싼 공기는 전보다 유해졌다. 항상 미미하게 구겨져 있던 미간은 매끈했으며, 무엇보다 깨질 것처럼 불안해 보이던 눈빛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전에 비해 나아진 것이라, 대부분은 부관과 나란히 선 아서를 힐끗힐끗 쳐다보기만 할 뿐 선뜻 말을 붙이지 못했다. 저 우아해 보이는 황족이 실은 굉장히 지랄맞은 성격의 소유자라는 걸 모르는 자가 드물었다.
드물게 먼저 다가가 인사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존귀하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반갑네, 소백작. 오랜만이로군.”
“예, 전하.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
이런 알맹이 없는 대화로 그치고 말았다.
날이 날이니만큼 모든 귀족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서를 건드리지 않았다.
연회 전날부터 불안에 시달렸던 부관 에드윈은 그제야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부관.”
“예, 전하.”
어느 순간부터 아서는 다소 심드렁해 보이는 듯했다.
“부관도 좀 놀다 와.”
“예?”
“종일 그렇게 서 있으면 무슨 재미겠나. 갔다 와. 난 여기 계속 있을 생각이니.”
뜬금없는 권유에 에드윈이 잠시 당황한 듯 벙쪘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며 사양했다.
“그, 황송하옵니다, 전하. 저는 본래 연회를 즐기지 않는 편이라 이 자리가 좋습니다.”
“뭐…. 그렇다면야.”
강요할 마음은 없었던 건지 아서는 더 이상 권유하지 않았다. 에드윈이 말씀만으로도 감사하다며 재차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한동안 아서가 짜증이 줄고, 전에 비해 훨씬 모시기 쉬운 황족이 되었다곤 하나 부관이 마음 놓고 자리를 비울 만큼은 아니었다.
그의 상전은 조용히 있다가도 2황자 전하와 관련된 일엔 쉽게 돌변하곤 했다. 상대를 벌레처럼 내리깔아 보는 건 일상이고, 거슬리는 자에게 유리잔을 던지질 않나, 어느 기사에겐 연회 도중 장식용 검을 뽑아 대련을 요구한 적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애꿎은 귀족에게 시비를 걸지는 않는단 점이다.
대신 먼저 걸어오는 도발은 피하지 않았다. 일단 한번 거슬리는 자가 생기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찍어 누르려 들었다.
그토록 상대의 머리 위에 앉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니 더더욱 2황자의 존재를 견딜 수 없었던 게 아니었을까, 에드윈은 그렇게 조심스레 추측했다.
시간이 지나자 아서는 연회에 흥미를 잃고 중앙 홀 가장자리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곤 근처를 맴도는 귀족과 짧게 사담을 나누며 시간을 때웠다.
“존귀하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전하, 오랜만에 뵙사옵니다.”
아서의 기분이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아 보였는지 어느새 그의 주변이 여러 인사들로 북적거렸다.
지켜보던 에드윈은 남몰래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쯤 슬슬 전하께서 귀찮다며 짜증을 낼 때가 되었는데 웬일로 저들을 가만 내버려 두고 있었다. 눈치 빠른 몇몇은 일찍이 이 작은 이변을 눈치챈 듯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았다.
“전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곡 부탁드려도 될까요?”
“좋지. 영광이네.”
그러던 중 한 호기심 많은 영애가 아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거절당할 것을 예상하고 가볍게 던져 본 권유를 아서가 흔쾌히 받아들이자 그쪽에서 오히려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이제 에드윈은 숫제 기절할 것 같은 눈으로 아서를 쳐다보았다. 놀란 표정은 빠르게 수습했지만 떨리는 눈동자까진 미처 감추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그로선 혼란스럽기만 했다.
아서가 사람과의 접촉을 혐오하는 건 웬만한 귀족이라면 모를 수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데 지금 사람과 손을 잡은 전하께서 저렇게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다.
심지어 춤을 추는 중간중간 웃어 보이시기까지 한다. 에드윈은 자신이 환각을 보는 건 아닌지 멀쩡히 달려 있는 눈을 의심했다.
경악한 건 비단 에드윈뿐만이 아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이들은 마치 코앞에서 괴이한 현상을 마주한 것마냥 넋이 나갔다.
곡이 끝나고 제자리에 돌아오고 나서도 아서는 여전히 평온한 모습이었다. 두 번째로 용기를 낸 영애가 다가와 춤을 청하자, 이번 역시 손을 잡고 중앙 홀로 나갔다. 다시 한번 주변이 소리 없이 경악에 휩싸였다.
사실 아서는 몸이 근질거린 나머지 아무 손이나 잡고 나간 것뿐이지만, 다른 귀족들이 그 속을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들에겐 마치 좀 전 아서의 행동이 황태자비를 간택하겠단 선포와 비슷하게 다가왔다.
그 뒤로도 아서는 여러 사람의 손을 잡고 중앙 홀을 누볐다. 귀족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에, 누군가 한 명에게 관심이 쏠리지 않도록 불특정 다수와 대화를 나눴다.
도대체 카를로스는 언제쯤 오는 거냐며, 아서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전승식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보람도 없이 카를로스와 말 한마디 섞어 보지 못했다. 전승식 도중 한순간 시선이 맞부딪히긴 했으나 그게 전부였다.
카를로스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덕에 아서가 끊이지 않는 관심의 수혜자가 되긴 했다. 카를로스의 귀환을 환영하려 개최된 연회에서 졸지에 아서가 가장 주목을 받고 있었다.
당연히 카를로스의 충성스러운 기사들에겐 영 못마땅한 상황이다. 카를로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서가 연회의 주인공 자리를 꿰차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몇몇 적대적인 시선이 아서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서와 카를로스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라 거리낄 것도 없는 듯했다. 일개 기사 주제에 황태자를 상대로 불손하기 짝이 없는 시선을 보냈다.
“늑대가 없으면 여우가 주인 노릇을 한다더니….”
“안쓰럽기 그지없군….”
작은 속삭임이 아서의 귓전에 닿았다. 만약 이전이었으면 곧바로 저 도발에 낚였을 테고, 어쩌면 검을 뽑아 들었을지도 몰랐다.
공식적인, 그것도 동생의 귀환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패악을 부리는 황태자라. 황위 계승자로서 자질이 부족하다는 소리가 나오기 알맞았다. 저들은 그런 상황을 유도하려 아서를 도발하고 있는 것일 터였다.
속으로 건방진 것들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서는 시선이 마주치는 족족 눈인사를 건넸다. 싸늘한 눈빛을 보내던 몇몇이 못 볼 것을 봤다는 양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카를로스의 기사들 중에서도 아서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이가 한 명 있었다.
평균적으로 큰 기사들 사이에서도 머리 하나만큼 더 올라오는 듯한, 유독 눈에 띄는 남자.
가브리엘 이안 폰 우드힐. 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금색 눈동자가 반갑다는 듯 살며시 휜다. 육 년이란 세월이 무색하게 그는 과거와 전혀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멀찍이서 고개를 숙이는 가브리엘에게 아서도 눈인사로 답했다. 이전이면 못 본 척 고개를 돌렸을 테지만, 한동안은 저쪽에도 잘 보여야 하므로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었다.
우드힐 공작가의 둘째 가브리엘은 카를로스의 최측근 기사로 <제국의 주인>에서도 꽤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카를로스와 유년기를 함께 보낸 친우이자, 중요한 조력자 역할을 맡았다. 약자를 지키며 또 위험에 처한 자에게 선뜻 손을 내미는 실로 정의로운 기사의 표본 같은 사내였다.
카를로스를 따라 전쟁터로 떠나기 전까지 저 다정하고 무심한 남자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순정을 훔쳤는지 모른다.
그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는, 카를로스의 휘하에 속한 몸으로 과거 죽을 뻔한 아서를 도운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세상 모든 사람을 싫어했던 이전의 아서가 유일하게나마 호감을 가졌었던 것이 가브리엘이었다. 물론 몇 번 자신의 기사로 영입을 시도하다 실패하고선 적대하기 시작했으나, 사실 미움보다는 서운함에 가까웠다.
아서의 시선이 가브리엘의 드넓은 어깨와 단단한 가슴, 쭉 뻗은 다리까지 순식간에 훑고 지나갔다. 이제는 전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가브리엘이 탐이 나긴 했다.
그렇지만 역시 아서는 좀 더 강압적이고, 그를 찍어 누르려 드는 쪽이 더 입맛에 잘 맞았다. 상대방이 제멋대로여야 아서도 양심이니 뭐니 이것저것 계산하지 않고 마음대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카를로스야말로 아서에게 퍼즐처럼 딱 들어맞는 상대였다. 특히 아서를 가차 없이 다뤄 줄 것 같은 부분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아서는 연회장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미 하늘은 푸르스름한 기미조차 없는 완연한 밤이었다.
대체로 황족들은 연회 막바지까지 버티고 있지 않는다. 곧 황제와 황후도 자리에서 일어날 것 같았다.
카를로스가 오늘 안에 돌아오기는 할까. 혹시 모든 황족이 연회장에서 꺼져 버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아서가 그런 합리적인 의심을 하고 있을 때였다.
“2황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짐승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마침내 마법 증폭기에서 카를로스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한군데로 돌아갔다.
연회장으로 들어온 뒤 카를로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황제와 황후에게 약식으로 인사를 올리는 것이었다.
“어서 오거라, 2황자. 몸은 좀 어떠하느냐.”
“황송하옵니다, 폐하. 우려해 주신 덕분에 한결 낫습니다.”
모두의 이목이 쏠려 있는 만큼, 평소 카를로스와 말 한마디 섞지 않는 황제도 몇 마디 인사치레를 했다. 그 옆의 황후는 은은하게 웃는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흠을 잡히지 않을 만큼만 간략히 인사를 마치고선 중앙 홀로 걸어 나갔다. 그가 구석진 자리에 있던 아서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절차상 황제와 황후 다음으로는 아서에게 인사를 해야 했다.
검붉은 눈동자가 연회장을 훑다 한 곳에 멈추었다. 메마른 적안에 아서의 모습이 담겼다.
서로를 못 본 지가 오래되었으나 지나간 세월이 무색하게 아서는 이전과 전혀 달라 보이지 않았다. 답답해 보이도록 목 끝까지 여민 정복도 그대로였고, 마주한 상대를 내리깔아 보는 시선 또한 마찬가지였다. 카를로스는 아서가 그를 대하는 태도 역시 전과 다를 바 없으리라 짐작했다.
“…….”
그러나 놀랍게도 카를로스의 예상이 빗나갔다. 대개 아서는 그와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지면 불쾌감을 드러내곤 했는데, 이번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던 것이다.
아서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카를로스의 눈동자 위로 점차 이채가 떠올랐다. 카를로스가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이 있건만 아서는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 또렷한 눈동자가 카를로스를 기다렸다는 듯이 응시했다.
마침내 형제가 서로를 마주하고 섰다.
“형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드디어 제대로 인사를 나누는구나…. 오랜만이야, 카를로스.”
카를로스가 웃자 아서 역시 그를 마주 보며 웃음 지었다. 아서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 것을 보고 카를로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가 아서를 위아래로 느리게 훑었다.
“그간 잘 지내신 모양이군요. 얼굴이 좋아지셨습니다.”
얼핏 듣기엔 안부 인사 같지만 어린 아우를 전쟁터로 몰아내 놓고 홀로 호의호식하였느냔 뜻과 같았다.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까. 햇수로 육 년 만이었던가. 새삼 오래간만이라는 게 실감 나는군.”
“예. 곧장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처리할 것이 많아 이제서야 인사를 드리는군요. 죄송합니다.”
몇 년 만의 재회였음에도 형제는 건조하게 서로를 맞이했다. 보고 싶었다는 소리는 두 사람 다 빈말로도 꺼내지 않았다.
“죄송하긴. 인사를 언제 하든 그게 무어가 중요하겠어.”
“그렇습니까.”
“아무리 나라도 이제 갓 국경에서 돌아온 아우를 재촉할 만큼 야박하진 않아.”
실제로 어느 누구보다 카를로스에게 제일 야박하게 굴었던 아서가 뻔뻔하게 말했다.
“…그러셨군요.”
“몸은 좀 어때. 여독을 풀기도 전에 여기저기 끌려다니고 있으니 자칫 몸이 상하진 않을까 염려스럽구나.”
“……형님께서 제 걱정을 해 주시는 날이 올 줄이야. 영광이네요.”
아서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카를로스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아는 아서는 하늘이 무너져도 제 아우만큼은 걱정하지 않을 인간이었다. 실제로 카를로스를 전쟁터로 보내는 데에 가장 앞장선 게 아서였다.
차라리 예전처럼 대놓고 비아냥거렸다면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겼을 것이다. 지금처럼 진심으로 그를 걱정하는 듯한 얼굴은 또 처음이라 그만 헛웃음을 흘릴 뻔했다.
“…제 몸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순히 여독이 쌓인 것뿐이니까요. 염려해 주신 점 감사합니다, 형님.”
“아니야. 아우가 전쟁터에서 돌아왔는데 걱정이 안 될 리가 있나.”
“…….”
이번만큼은 카를로스도 아서의 뻔뻔한 말에 도무지 대꾸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조만간 네 궁으로 보양에 좋은 것들을 보낼까 하는데, 불편하지 않다면 받아 줬으면 좋겠군.”
아서는 진심으로 그를 걱정하는 것처럼 말했다. 카를로스를 앞에 두고 있을 때면 늘 짜증으로 일그러져 있던 눈매 또한 부드럽게 휘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으레 짓던 경직된 미소와는 달랐다.
“…전혀 불편하지 않아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카를로스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나 눈가엔 웃음기가 없었다. 이번 개선식을 주도적으로 계획한 이가 아서라고 하였다. 성대한 환영으로 그치지 않고 어울리지 않게 다정한 형님 노릇까지 하고 있다.
“그래. 너와 좀 더 회포를 풀고 싶지만, 연회의 주인공을 오래 붙잡아 두어선 안 되겠지.”
“…배려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것은 유년 시절 이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형제다운 대화였다. 아서의 과거 전적을 모르는 이가 봤다면 적당히 사이좋은 형제처럼 보였을 거다. 아주 옛날엔 실제로 그러기도 했고.
익숙하되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불쾌한 감각이 조금씩 차올랐다.
찌푸려지는 표정을 감추던 카를로스는 그제서야 느껴지던 강렬한 기시감의 이유를 깨달았다.
저런 아서를 마지막으로 본 게 10년 전이었던가.
먼 과거, 카를로스에게 열등감을 품기 전의 아서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걱정할 줄 알고 자신의 것을 기꺼이 베풀어 주는 사람.
지금의 둘의 관계를 알고 있는 이라면 상상조차 못 할 테지만, 아서가 카를로스를 일방적으로 증오하기 전까지 형제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서로 다투기 바쁜 일반적인 동기간에 비하면 두 사람은 오히려 애틋한 편이었다.
형제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 버려지다시피 방치된 카를로스를 꺼내 준 게 다름 아닌 아서였으니까.
카를로스는 어머니의 목숨을 대가로 태어난 생명이었다. 아비인 황제는 죽은 황비를 사랑한 만큼 카를로스를 증오했고, 그를 외진 궁에 가둬 놓은 뒤 다시는 찾아보지 않았다. 그는 버려진 황자였다.
황성의 사용인, 황후의 위협을 피해 일찍이 황성을 떠나야만 했던 그의 누이. 어느 누구도 황제의 미움을 산 황자에게 섣불리 손을 내밀지 못했다.
어린 카를로스는 제가 버려진 줄도 모르고 작은 궁에 갇혀 조금씩 메말라 갔다. 아서는 그때의 카를로스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었다.
「네가 카를로스구나.」
알에서 깨어난 오리는 처음 본 자에게 각인을 하게 된다고 하였던가. 카를로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리석게도 그는 처음 본 형제에게 모든 정을 내어주고 말았다. 새끼 오리마냥 아서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아서와 떨어지지 않으려 애썼다.
당시의 아서는 온 세상을 자기 손에 쥐고 있는 양 자신만만한 소년이었고, 불쌍한 아우에게 자신의 것을 넉넉히 베풀어 줄 수 있을 만큼 가진 게 많은 소년이기도 했다. 어렸던 카를로스는 제 형제가 베푸는 얄팍한 애정을 갈급하게 받아먹었다. 그들은 완벽하지는 않았으나 적당히 사이좋은 형제처럼 보였다.
그랬던 둘의 사이가 망가지기 시작했던 건, 열 살의 카를로스가 열다섯 살의 아서를 대련에서 이겼을 때부터였다. 그날을 기점으로 둘 사이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래. 그랬었다.
어렸을 적엔 그 순간을 수백 수천 번 곱씹으며 후회했었지만…….
지금의 그는 다르다.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 해도 대련의 결과를 뒤바꿀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딱 그 정도의 사이에 불과했다. 단 한 번의 균열로도 쉽게 갈라질 사이 말이다.
과거의 기억은 한 번 물꼬가 트이자 손 쓸 틈도 없이 줄줄이 새어 나왔다. 깊숙이 묻어 두었던 기억들이 기어올라 와 평온하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아서가 그의 면전에다 욕설을 지껄이고 있을 때조차 아무렇지 않던 속이, 다정한 걱정 몇 마디에 뒤틀렸다.
어째서 이런 더러운 기분이 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카를로스는 제 안에 묻어 두었던 무언가를 툭툭 건드리는 아서의 행태에 의무적으로 띠고 있던 미소조차 지워 버렸다.
이 모든 게 그의 기분을 더럽게 만들 의도로 행해진 거라면 제대로 성공한 셈이었다.
카를로스는 답답하게 목을 죄던 단추를 풀었다. 그럼에도 갑갑한 기분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아서의 말은 온통 그의 신경에 거슬리는 것투성이였다. 카를로스는 곧 찾아뵙겠다는, 마음에도 없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조만간 네 궁으로 전령을 보내마.”
불순한 의도라곤 비치지 않는 얼굴로 아서가 인사했다. 카를로스는 그 무고해 보이는 낯을 믿지 않았다.
“예, 그러십시오.”
그가 짤막한 답과 함께 등을 돌렸다. 굳게 다물린 입가에 냉소가 스쳐 지나갔다.
이 자리에 단 한 순간도 더 머무르고 싶지 않다는 듯, 카를로스는 망설임 없이 그 자리를 벗어났다. 무표정한 얼굴은 얼핏 평소와 비슷한 듯했으나 달랐다. 정도가 어떻든 카를로스의 기분이 상한 것이 명명백백해 보였다.
주변에 자리하고 있던 이들이 다소 의아한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분명 과거에 비해 훨씬 정상적인 대화였는데 카를로스의 반응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카를로스가 저 멀리 떨어져 측근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고 나서야, 에드윈이 거의 들리지도 않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전하. 아무래도 2황자 전하께서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은데요….”
“…….”
아서는 에드윈의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사실 에드윈만큼은 아니었으나 아서도 조금은 당황했다.
어느 정도 의도한 상황이었음에도 이만큼이나 즉각적인 반응이 돌아올 줄은 몰랐던 터라, 아서 역시 얼떨떨한 기분으로 카를로스 쪽을 바라보았다.
***
연회 내내 썩 좋지 못한 상태이던 카를로스가 드디어 발코니로 자리를 옮겼다.
연회장 한편에 있는 발코니는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대화하기에 아주 적합한 장소다. 호시탐탐 카를로스와 단둘이 있을 타이밍을 노리던 아서가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아서는 기다렸다는 듯 발코니 입구를 찾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곧바로 카를로스와 독대하지는 못했다. 눈앞의 가브리엘이 그 앞을 막아섰던 탓이다.
“…태자 전하. 송구합니다만, 이곳은 이미 선객이 있습니다.”
발코니 입구를 지키고 있던 기사가 아서에게 정중히 양해를 구했다.
“알아. 카를로스가 이곳에 들어서지 않았던가.”
아서가 카를로스가 있을 문 너머로 눈짓을 했다.
“간만에 동생과 회포를 풀고 싶은 것뿐이니 그리 경계하지 말아. 오랜만이지 않나.”
곤란한 얼굴로 막아서는 가브리엘에게 아서는 아무런 흑심도 없는 척 말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2황자 전하께서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아 홀로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 말씀하셨습니다.”
“이해해. 수도까지 오는 여정이 고되었을 테지.”
아서가 가브리엘의 말에 선선히 동의했다. 이전의 그였으면 감히 내 앞을 막느냐며 고집을 부렸을 테지만, 오늘은 한발 물러나는 시늉이라도 했다. 이제는 전처럼 단순 무식한 방법은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경은 좀 어떠한가. 먼 길을 온 건 그대도 마찬가지일 텐데 말이야.”
“저는… 괜찮습니다. 염려 감사합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가브리엘이 한 박자 늦게 답했다.
“경과도 수년 만에 보는 것이로군. 어린 나이에 수도를 떠나 그간 고생이 많았어. 무사히 돌아와 다행이야.”
“황송하옵니다. 전부 전하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기사의 형식적인 감사 인사에 아서가 작게 웃었다.
“경은 전혀 달라진 게 없어 보이네.”
“그렇습니까.”
“몸이 자란 것 말고는 그대로인 것 같아.”
“그런가요. 어머니께선 전보다 더 애늙은이 같아졌다며 웃으시더군요.”
“우드힐 공작이?”
“예.”
아서가 완고한 인상을 지닌 중년 여성을 떠올렸다. 우드힐 공작이라면 가브리엘의 모친이자 카를로스의 후원자인 사람이었다.
공작은 카를로스의 친모와 절친한 사이였는데, 과거 형제의 대련을 기점으로 카를로스를 비호하기 시작했다. 공작의 비호 아래 카를로스와 가브리엘이 함께 검을 배웠고, 그 때문인지 두 사람은 주종 관계이기 전에 오래된 친우에 더 가까웠다.
아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의 말이 맞아. 그대가 전부터 애늙은이 같은 면모가 있긴 했지.”
“그렇습니까.”
아서의 농담을 가브리엘은 딱히 부정하지 않고 웃어넘겼다. 언제 봐도 자로 잰 것처럼 일정한 미소였다.
“전하께서는 그간 많이 변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
웃는 법을 잊은 것처럼 살던 인간이 계속 웃고 있으니 변했다는 소리가 안 나오는 게 더 이상하긴 했다.
“이제는 달라지려고 마음을 먹었어.”
“전보다 훨씬 좋아 보이십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아서는 머뭇거리다 물었다.
“카를로스도 그렇게 생각할까.”
“…아마 그러시겠지요.”
이 상황에서 꿈도 크다며 찬물을 끼얹을 순 없었는지, 기사는 누가 들어도 빈말처럼 들리는 답을 했다. 아서가 모른 척 쑥스럽게 웃자 가브리엘이 곧바로 말을 돌렸다.
“이번 개선식을 태자 전하께서 주최하셨다 들었습니다.”
“맞아. 어때, 마음에 들던가.”
“예, 물론입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저뿐만이 아니라 분명 수많은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아서는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기사가 작게 묵례하며 감사를 표했다.
진심처럼 보이는 정중한 인사에 아서는 내심 신기한 눈으로 기사를 쳐다보았다. 서로 속한 세력이 다른 상황에서 이렇게나 순수한 호의를 품을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전부터 아서는 이런 그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가브리엘은 소설 속에서 원작의 아서가 죽기 직전 유일하게 동정을 표했던 인물이었다. 뛰어난 동생을 가진 죄로 평생을 비교당하다 그 끝마저도 비참했던 아서를, 그만이 동정해 주었다.
기사가 비밀리에 구해 준 독약 덕에 원작의 아서는 고통 없이 생을 마감했다. 반역죄, 황실 기만죄, 황족 시해죄. 아서가 저지른 죄목에 비하면 무척이나 평온한 죽음이었다. 예정대로였다면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었을 아서를 그가 구원한 셈이다.
“카를로스한테도 개선식이 위로가 되었을까?”
“…예, 전하께서도 좋아하셨을 겁니다.”
정말 선한 성품을 지닌 기사였다. 아서를 상처 주지 않으려 또 기꺼이 빈말을 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렇다면 카를로스에게 한 번만 물어봐 주겠어? 내가 안으로 들어가도 되냐고.”
“…….”
“곤란한 부탁인가.”
“그건….”
“크게 난처하다면 더는 부탁하지 않겠네.”
더는 부탁하지 않겠다고 물러서는 체를 했으나, 가브리엘의 성격상 이 상황에서 냉정히 잘라 내진 못할 터였다.
혹여나 카를로스에게 거절당해도 괜찮았다. 그때는 이 자리에서 가브리엘과 시답잖은 대화나 나누며 시간을 때우면 되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카를로스가 참다못해 제 발로 튀어나올 때까지 말이다.
“…그럼, 전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가브리엘이 발코니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간 기사는 카를로스에게 이 상황을 무어라 설명하는 듯했다.
아서는 얌전히 서서 가브리엘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채 오 분도 지나지 않아 기사가 발코니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거절당할 거라 각오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쉽게 허락이 떨어졌다.
어찌 됐든 카를로스와 단둘이 있으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기에, 아서는 희희낙락하며 걸음을 옮겼다.
발코니에 들어서서 문을 닫으니 연회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희미해졌다.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아서의 뺨을 식혔다.
부러 인기척을 내며 들어갔건만 카를로스의 시선은 여전히 발코니 바깥의 정원으로 향해 있었다. 대놓고 아서를 무시하는 모양새였다.
좀 전 연회장에서 언제 불쾌감을 드러냈냐는 듯 카를로스는 태연했다. 발코니에 홀로 앉은 동안 말끔히 평정을 찾은 것 같았다.
본인 머리 색만큼이나 새까만 정복을 걸친 카를로스의 뒤로 겨울 숲의 정경이 펼쳐졌다. 다리를 꼰 채 손에 든 잔의 가느다란 허리 부분을 쓰다듬고 있는 모습이 오만했다. 아서는 팽팽하게 당겨진 허벅지나, 손등 위의 푸른 핏줄과 같은 것을 훑어보며 남몰래 입맛을 다셨다.
“피곤해 보이네, 카를로스.”
들고 있던 술병과 잔 두 개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고서, 아서가 먼저 이야기의 물꼬를 텄다. 공연히 덩달아 침묵하며 무의미한 신경전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예. 막 먼 길을 돌아온 참이니까요.”
카를로스 역시 쓸데없이 시간을 끌 생각은 아니었는지 아서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무표정한 얼굴이 심드렁했다.
“…혹 내가 눈치 없이 방해하고 있는 거라면 편히 말해 다오.”
“인사치레는 되었습니다, 형님. 용건부터 말씀하시지요.”
“따로 용건이 있는 건 아니야. 그냥 오랜만이니까.”
“오랜만이니까? 퍽이나 그렇겠군요.”
성가시게 굴지 말고 빨리 용건이나 해결하고 꺼졌으면. 검붉은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서는 못 본 척 태연하게 웃어넘겼다.
“이렇게 단둘이서만 마주 앉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 이러고 있으니 옛날 생각도 나고….”
부러 친근한 척 말을 붙이며, 아서가 자연스럽게 카를로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형제 사이에 놓인 간이 테이블은 사람이 몸을 기대면 부러질 것처럼 작았다. 두 사람 다 평균 이상의 신장인데다가 카를로스가 다리를 꼬고 있어, 아서가 조금만 다가가면 카를로스의 발끝이 아서의 정강이를 스칠 것만 같았다.
사람과의 접촉을 기피했던 전과 다르게 지금은 카를로스의 발도 핥을 수 있는 아서였으나, 그 사실을 카를로스에게 들켜서는 안 됐다.
아서는 카를로스와 닿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둔 채 빈 유리잔을 내밀었다.
“이미 마시던 잔이 있어 보인다만. 내 환영주도 받아 주겠어?”
“…환영주라니 뜬금없는 소리를 하시네요.”
‘환영’이라는 말이 거슬렸는지 카를로스가 매끈한 미간을 슬쩍 찌푸린다.
“그래? 조금 뜬금없기는 하지.”
아서가 괜스레 유리잔의 긴 목 부근을 만지작거렸다.
“용건은 그뿐입니까, 형님. 고작 술 한 잔 때문에 나를 찾으신 건 아닐 텐데.”
“꼭 그것만은 아니지만, 일단은.”
“재밌네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님께서 환영주라….”
카를로스가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마치 이 우스운 꼴 좀 보라는 듯한 손짓이었다.
“마셨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누가 들어도 비꼬는 게 명백한 물음에 아서가 표정을 굳혔다가 애써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해해. 네 입장에선 선뜻 잔을 들기가 힘들 테지.”
“알고 있다면 되었습니다.”
어차피 아서도 카를로스가 순순히 마셔 줄 거라 생각지도 않았다. 환영주는 단지 대화를 이어 나가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아서는 제 몫의 빈 잔에 들고 왔던 와인을 따랐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마치는 척 시늉만 하는 게 아닌 걸 보이려 예법에 맞지 않게 삼키는 소리를 크게 냈다.
“보다시피 아무것도 안 들었어.”
카를로스는 여전히 시큰둥했다.
“글쎄요. 고작 그 정도로 믿어 드리기엔, 그간 형님께서 하신 일들이 있는 터라.”
“……그건. 무어라 변명할 말이 없긴 하군. 그럼 이건 나 혼자라도,”
“아니요, 형님. 그보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떠하십니까.”
카를로스가 아서의 말을 끊고는, 본인이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유리잔은 반 넘게 채워져 있었으나 새것이라 하기엔 마신 흔적이 남아 있었다.
“부족한 아우는 미처 형님께 드릴 잔을 준비하지 못하였으니.”
“…….”
“형님께서 제 것을 드시는 걸로.”
그야말로 유치찬란한 도발이었다. 카를로스가 아서를 바라보며 한쪽 눈썹을 까닥였다. 타인과의 가벼운 접촉조차 기피하는 형님이 다른 사람, 하물며 카를로스가 먹던 잔을 들어 올릴 리가 없었다.
“새로운 놀이에 저를 끌어들이시려면 이 정도는 하셔야지요, 형님.”
“…뭐?”
“이조차도 싫다면 더 귀찮게 굴 것 없이 이만 여기서 끝냈으면 좋겠는데.”
카를로스가 아는 그의 형제는 몹시 참을성 없고 예민한 사내였다. 고작 눈앞의 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마시는 게 아서에게 얼마나 역겹게 느껴질지 알았다.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카를로스는 시험하듯 바라보았다. 이대로 아서가 이 자리를 뛰쳐나간다면 그는 다시 홀로 남아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좋아. 그 정도야, 얼마든지.”
그러나 예상외로 아서는 얼마 버티지 않고 카를로스의 잔을 쥐었다.
무슨 큰일이라도 치르는 것마냥 비장하게 구는 것이 우스웠다. 마신 흔적이 있는 부근을 피해 입을 대는데 그마저도 참 아서다웠다.
아서에게 제가 먹던 음료를 마시도록 강요해 놓고선 정작 카를로스는 비워지는 잔엔 관심이 없었다. 아서가 눈을 질끈 감고 힘겹게 마시는 동안 그는 아서를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어두운 감색 정복은 답답해 보일 만큼 완벽히 격식에 들어맞았다. 아서는 연회장에서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늘 저런 차림새를 고수했다.
꿈속의 아서 역시 저것과 비슷한 옷차림이었던 걸로 기억했다. 다만 침상 위에 누워 웅크린 채 좆을 꺼내 들고 헐떡거리던 아서는 눈앞의 아서와는 극명하게 달랐다.
그가 아는 형님이라면 본인의 좆을 만지는 것조차도 꺼려 할 확률이 높았다. 카를로스는 제 추측이 맞을지 내심 궁금했는데, 본인에게 물어보자니 제대로 답을 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이제 되었나.”
힘겹게 몇 모금을 삼켜 낸 아서가 잔을 내려놓았다. 고작 이 정도로 구정물이라도 삼킨 것처럼 괴로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딱히 마시던 잔을 다른 이에게 공유하는 걸 즐기진 않지만, 저렇게 싫어하는 티를 내니 오히려 더 권유하고 싶어졌다.
“맛있게 먹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넉넉히 준비해 둘 걸 그랬습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고작 한두 모금 마신 걸로 충분하겠나요. 남은 것도 마저 드시죠.”
카를로스는 손을 뻗어 환영주라는, 웃기지도 않은 이름으로 불렸던 것을 병째로 들었다. 아서의 손에 들린 잔과 술병을 마주 부딪히며 먹던 술을 마지막까지 마시기를 종용했다.
새파랗게 질린 낯으로 아서가 억지로 한 모금 더 마셔 냈다.
“생각보다 잘 드시는군요.”
낮은 목소리에 만족감이 묻어났다.
상황이 이렇게 진행되니 카를로스는 늘 성가시다고 생각했던 아서를 관찰하고 있는 상황이 불쾌하지만은 않았다. 괴로워하는 꼴을 지켜보고 있는 건 오히려 즐거운 편에 속했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아서의 손을 탄 것에 입을 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형님.”
전혀 아쉽지 않은 태도로 카를로스는 손에 든 병을 서서히 기울였다. 환영주라며 아서가 내밀었던 와인이 소리 없이 바닥을 적셨다.
“당장은 목이 마르지 않아서 그런가. 형님이 주신 술을 마시진 못하겠군요.”
가득 차 있던 술을 전부 바닥으로 흘려 보낸 뒤, 그는 빈 병을 아서의 앞에 툭 내려놓았다.
점점 퍼져 나간 붉은 액체가 어느새 아서의 발 아래까지 스며들었다.
카를로스는 아서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쯤 되면 슬슬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을까 싶었는데.
“…….”
아서는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무언가 단단히 각오한 듯한 모습이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렇게 자존심을 굽히고 꿋꿋이 앉아 있을 만큼 아서에게 카를로스가 필요한 상황인 듯했다.
“내게 뭔가 바라는 게 있나 보네요.”
“꼭 그렇다기보단….”
아서가 당황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그 모양새가 어딘가 익숙했다.
무어랄까, 마치 과거의 자신을 아서에게 투영하여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 자각이 들자 미약한 불쾌감이 드는 동시에 조금씩 심술이 일었다.
난데없이 친근한 척 다가오는 아서가 거슬리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저 꼴을 보니 궁금증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앞에서 비굴한 모습을 보이느니 차라리 목을 매고 말았을 아서가, 무엇이 필요해 이런 식으로 나오는지.
아서가 앞으로도 뚝 이렇게만 굴어 준다면야, 카를로스도 한동안은 아서를 가만 내버려 두고 제게 접근한 목적이 무엇인지 지켜볼 볼 용의가 있었다.
물론 아서가 어디까지 자존심을 굽힐 수 있나 확인해 보는 건 덤이었다.
***
뿔 나팔 소리가 길게 울렸다. 사냥제 첫날 일정이 순조롭게 끝이 났다.
땅거미가 내린 야영지는 바삐 돌아다니는 이들로 분주했다. 황실 소유의 레누스 숲에서 개최된 사냥제는 다행히 별다른 잡음 없이 치러지고 있는 중이었다.
본래 이번 전승 기념 사냥제는 원작에선 취소되었던 일정이었다. 사냥제 전날 아서가 자작극으로 황태자 암살 미수 사건을 일으켰던 탓이었는데, 이번엔 아서가 그런 허술한 음모를 꾸미지 않아 모든 행사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망신살을 피한 아서가 택한 건 카를로스에게 찝쩍대는 일이었다. 삼 일간의 연회가 끝나고, 사냥제 날 저녁이 되자 그는 카를로스의 천막에 대뜸 찾아갔다. 품 안에 작은 동물 한 마리를 안은 채였다.
“…도대체가…….”
낮 시간을 바삐 보내다 이제 휴식을 취하려던 중, 난데없이 찾아온 아서를 카를로스는 황당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품 안의 그건 뭡니까, 형님.”
“모르겠어? 새끼 여우야.”
황당한 듯한 카를로스의 물음에 아서는 이것 좀 보라는 듯 품 안의 털 뭉치를 쓰다듬었다.
안겨 있던 새끼 여우가 답답한지 꼬물꼬물 고개를 내밀었다. 뾰족한 주둥이와 보송보송한 귀가 몹시 사랑스러워 어떤 냉혈한의 심장이라도 녹여 낼 법했다.
“내가 그걸 몰라서 묻는 것 같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깜찍함이 카를로스에겐 통하지 않는 듯했다.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여우를 카를로스는 마치 혐오스러운 벌레인 양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아서는 카를로스의 냉담한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미리 생각해 놨던 말을 끄집어냈다.
“어릴 때 네가 여우를 기르고 싶다 하지 않았나. 그게 생각이 나서.”
“…그래요? 제가 그랬던가요.”
잠시 동안 생각하던 카를로스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서가 아쉬운 듯 눈매를 늘어뜨렸다.
“기억이 안 난다면 어쩔 수 없지.”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야. 죄송할 것까지야.”
아서가 카를로스의 말에 애써 담담하게 답했다.
활동하기에 용이한 복장을 갖춘 카를로스는 며칠 전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전승식 때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았다면, 지금은 그때보다 느슨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아서의 눈을 즐겁게 한단 점은 같았다.
사냥제가 시작되고 숲길을 거닐며 아서는 카를로스에게 추근댈 방법을 고심했다. 말을 붙일 사소한 핑곗거리만 있어도 충분할 텐데 영 떠오르는 게 없었다. 오래 전부터 카를로스와의 시절을 잊어버리려 안간힘을 썼던 터라, 막상 떠올리려 하니 머릿속이 텅 비어 있었다.
근방을 빙글빙글 돌면서 그렇게 한참을 골몰했다. 그러다 어릴 적 카를로스가 여우를 가지고 싶다 하였던 것을 간신히 떠올렸다.
「형님, 얼마 전에 귀여운 여우를 봤어요.」
카를로스가 그렇게 무언가를 대놓고 바란 적이 드물었기에 그건 아서에게도 꽤 인상 깊은 기억 중 하나였다.
「여우? 외무대신의 자제가 기르는 새끼 여우를 말하는 건가.」
「네, 털색이 아주 예뻤어요.」
「아아, 맞아.」
윤기가 반질거리던 게 아주 공을 들여 키우는 것 같던 여우였다. 그걸 뺏어다 줘야 하는 건가, 고민하던 어린 아서는 고개를 저었다. 마침 곧 사냥제가 개최될 시기이도 하니 직접 잡아다 주어야겠단 결론을 내렸다.
남의 것을 주는 것보다 직접 사냥해 주는 게 더 멋져 보이겠지. 당시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금빛 여우는 덩치가 작고 움직임이 날렵해 까다로운 사냥감이었다. 아서는 제 손으로 여우를 잡겠다며 고집부리다 결국 포획에 실패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대신 아쉬운 대로 그나마 비슷하게 생긴 연갈색 강아지를 카를로스의 품에 안겨 주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소중히 돌볼게요.」
나이보다 조숙한 면이 있던 카를로스는 어린아이답지 않게 아쉬움 한 점 드러내지 않고 강아지를 끌어안았다. 그에 아서도 뿌듯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이건 저번처럼 잃어버리면 안 돼.」
아서는 이전에 카를로스가 아서의 매를 숲에다 실수로 날려버린 일을 언급하며, 엄한 목소리를 냈다.
「네. …죄송해요. 이번엔 절대 안 잃어버릴게요.」
「다음에는 여우를 구해 줄게.」
「아니에요. 이제 강아지가 더 좋아요.」
아서가 알기로 카를로스는 그 강아지를 전쟁터로 가기 직전까지 키웠다. 그 이후의 소식은 관심을 주지 않아 알 수 없었다.
다행히 과거와 다르게 지금의 아서에겐 여우 사냥은 시간이 걸릴 뿐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종일 숲속을 뒤진 아서는 무리에서 낙오된 새끼 여우 한 마리를 발견해 냈다. 새끼를 안아 들고 카를로스의 막사에 도착하니 벌써 저녁 무렵이었다.
“지금 보아도 이렇게나 사랑스러운데, 어린 네 눈에는 얼마나 그러했을까.”
품 안의 새끼 여우를 내려다보며 아서가 웃었다. 이제 보니 과거 카를로스는 여우의 귀여운 생김새보다는 아서의 백금발과 비슷한 털색이 마음에 들었던 듯했다.
“그때 네게 여우를 잡아다 준다 약속하여 놓고는 지키지 못했지. 그 약속이 문득 마음에 걸리더군.”
“그러셨습니까.”
아서의 말에 카를로스는 별 감흥 없이 답했다. 그가 무표정한 눈으로 아서를 훑었다.
아서가 난데없이 여우를 찾겠다며 숲을 헤집고 있단 보고를 받기야 했다. 가죽 부츠가 흙투성이인 것을 봐선 실제로 부지런히 돌아다닌 모양이긴 한데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형님, 그 마음은 감사하긴 합니다만…. 안타깝게도 제 궁이 좁아 여우를 들여놓을 만한 자리가 없겠군요. 마찬가지로 여우를 성심껏 돌볼 여유도 없고 말입니다.”
궁이 아무리 좁아 봤자 새끼 여우 한 마리 들여다 놓을 자리조차 못 만들 리는 없었다. 여우를 돌보는 것 역시 수많은 사용인 중 하나가 대신하면 될 일이었다.
카를로스는 그냥 네가 주는 건 뭐든 받기 싫단 말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그래?”
냉랭한 거절에 아서가 짐짓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데려온 게 아쉽지 않나. 한 번 쓰다듬어 주기라도 하는 건 어때.”
“그럴까요.”
카를로스는 그 정도쯤이야 상관없다는 듯 선뜻 손을 내밀었다. 다만 손은 새끼 여우를 만지면서 시선이 아서에게로 향한 것이 어째 아서를 눈으로 쓰다듬는 느낌이었다.
그 은근한 도발을 알아차린 아서가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됐어, 이만하면.”
“겉보기엔 나쁘진 않은데…. 짐승이라 그런지 털의 감촉이 부드럽진 않군요.”
“…….”
“생각보다 얌전한 게 마음에 들기는 합니다만.”
겉보기엔 나쁘지 않으나 감촉은 별로다, 얌전하다는 말들도 어째 여우가 아닌 아서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래?”
“이리로 주시죠.”
카를로스가 아서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갑자기 마음이 왜 변했는지 모르겠으나 아서는 잠자코 새끼 여우를 카를로스에게 안겨 주었다.
아서를 빤히 바라보던 카를로스가 여우의 뒷덜미를 잡아 달랑달랑 들었다. 저걸 봐선 결코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인 건 아닌 듯했다.
“귀엽네요. 성심껏 보살펴 보겠습니다.”
“그래. 말썽을 피우면 내 궁으로 돌려보내도 괜찮아.”
“아뇨,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군요.”
그날은 그게 끝이었다.
카를로스는 사냥제 내내 여우를 제 천막 안에 두고 나름 귀여워해 주는 척 굴었다. 여우를 보러 가겠다는 핑계를 앞세워 아서도 종종 찾아가 얼굴을 마주쳤다.
한데 역시나라고 해야 할지, 사냥제만 조용히 지나갔을 뿐 이후 상황은 아서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사냥제가 끝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카를로스의 궁에서 전령이 도착했다. 아서가 애먼 시종에게 해코지하는 걸 예방하려는 듯 사용인이 아니라 기사 가브리엘이 찾아왔다.
가브리엘은 송구스럽다는 얼굴로 카를로스의 말을 전했다.
“태자 전하. 2황자 전하께서 보내신 전언입니다. ‘여우를 잃어버려 유감입니다, 형님. 숲에서 풀어 둔 잠깐 사이 그만 사라져…….’”
사람에게 안겨 있어도 얌전하던 짐승이었으니 정말로 잃어버린 건지 고의로 놓아준 건지 답이야 뻔했다.
별로 큰 기대가 없던 아서는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찼다. 기사에겐 카를로스의 상심이 크겠다며 필요도 없는 위로나 전했다.
그 뒤로도 카를로스는 비슷한 행보를 보였다. 아서가 건네는 걸 일단 받기는 받되, 얼마 지나지 않아 죄다 없애 버렸다.
귀한 약재를 보냈더니 창고에 불이 났다며 태워 버렸고, 아끼던 말을 잃어버렸다 하여 명마를 보내 주었더니 며칠 뒤 목을 베어 버렸다. 듣기로는 멀쩡하던 말이 갑자기 거품을 물고 미쳐 날뛰었다고 한다.
그러든가 말든가 아서는 꾸준히 카를로스에게 다가갔다. 이전의 카를로스가 좋아했던 그때의 그 다정한 형님 행세를 하면서 말이다.
카를로스는 대외적으로는 아서의 장단에 맞춰 주었다. 그러다 어느 날 성가셔하는 얼굴로 ‘언제까지 이러실 작정입니까.’ 묻길래, ‘…우리가 예전 같은 사이로 돌아갈 때까지?’라고 답해 주었다. 물론 몇 년을 아서에게 시달렸던 카를로스는 그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