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만의 밤 1권
프롤로그
주인공. 연극, 영화, 소설 따위에서 사건의 중심이 되는 인물. 어떤 일에서 중심이 되거나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
모든 소설에는 주인공이 있다.
인위적으로 누군가의 손길이 개입된 게 아닌, 모든 현실에서도 무릇 주인공 역할을 맡을 사람은 정해져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인과가 결정되어 있는 소설 속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다.
주인공의 주변에는 조연 혹은 엑스트라가 있었고, 그 외에는 소설에 한 줄도 등장하지 못한 이름 모를 인물들이 어슴푸레하게 존재했다.
아서 프란시스 폰 인페르노. 이름만 그럴듯한 그는 무수히 많은 조연 중 한 자리를 맡았다. 차라리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 중 한 명이었다면 사정이 나았을 텐데, 아서가 맡은 역할은 소설 속에서 흔히 보이는 ‘주인공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속 좁은 형제’였다.
그 전까지 아서는 제가 제국의 주인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죄다 착각이었다. 알고 보니 자신은 소설 속에서 채 몇 줄의 대사조차 얻어 내지 못한 악역 조연 중 하나였다.
그러나 다소 암울한 진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아서는 제가 별 볼 일 없는 악역이란 사실에 분노하기는커녕 안도했다.
몇 줄 등장했다가 또 몇 줄로 끝이 났을 인생을, 주제 파악이란 걸 하게 되면서 부지하게 되었으니까.
목숨만 부지했을 뿐일까? 이 순간 아서는 평생토록 시기하고 질투하던 카를로스와 붙어먹기까지 하고 있었다.
아서가 떨리는 손으로 침대보를 움켜쥐었다. 눈앞이 흐릿했다.
“아, 아… 아, 윽! 으…. ”
뒤에서 쿵쿵 처박는 대로 몽롱한 시야가 앞뒤로 흔들렸다. 아서는 새어 나오는 신음을 감추는 척 제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었다. 고의로 터트린 입술에 핏방울이 맺혔다.
눈을 감으면 뒤를 쑤시는 황홀한 감각이 더욱 선명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눈앞이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마치 독한 약에 취한 것만 같았다.
“내가, 반드시, 네놈만큼은…. 읏…!”
이를 악물고 뱉던 말은 아서의 뒤를 거칠게 몰아붙이는 움직임에 강제로 삼켜졌다. 카를로스가 그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형님, 아직, 도.”
“죽여, 버릴….”
“지껄일, 힘이 있으셨던가요.”
“윽…!”
뒤통수를 다 덮을 만큼 커다란 손이 머리채를 휘어잡고 이불 위로 아서의 머리를 처박았다. 가느다란 백금발이 거친 손아귀 안에서 구겨졌다.
보통 때면 포근히 몸을 감싸 안아 줄 침구가 아서의 숨통을 빈틈없이 조였다. 아서가 어깨를 비틀었다. 어차피 아무리 발악해도 카를로스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으니, 마음껏 발버둥을 쳤다.
카를로스가 알지 못한 사이 아서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기분 좋은 무력감이 아서의 뇌리를 눅눅하게 적셨다.
“형님, …뒷구멍 하나만큼은, 쓸 만하군요.”
“으, 윽…!”
카를로스는 아서의 입을 틀어막고 나서야 만족한 얼굴로 양껏 제 욕구를 채웠다. 뚝뚝 끊기며 새는 신음은 그의 비틀린 욕구를 더욱 부추겼다.
“무능하다는 말은, 취소해 드리겠습니다.”
정사의 영향으로 평소보다 느슨히 풀어진 눈이 제 아래에 깔린 이를 진득하게 훑어 내렸다. 아서는 쾌감에 젖어 떨리는 몸을 애써 감추었다. 카를로스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솜털이 곤두서는 듯했다.
혈관이 툭 불거진 손이 머리채를 쥐어 끌어당겼다. 아서의 허리가 한계까지 휘었다.
“윽…!”
이불 틈에 고개를 박고 양껏 느끼고 있던 아서가 재빨리 얼굴을 바꿨다. 열락에 가득 차 있던 그는 언제 그랬냐는 양 카를로스를 증오스럽다는 듯 노려보았다.
형제의 시선이 바투 마주쳤다. 아서는 속내를 숨기고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마주하고 있던 카를로스의 눈동자가 점차 어두운 빛깔로 물들었다.
기나긴 밤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