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귀환무사 75화>
철무옥의 내심을 짐작한 동승이 슬쩍 자신들의 목적을 주지시켰다.
말없이 사라져 가는 존재들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철무옥이 동승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을 본 동승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함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철무옥의 입에서 동승을 놀라게 만드는 말이 흘러나왔다.
“련으로 돌아가라.”
“……!”
“나 혼자 움직이겠다.”
“대주님!”
철무옥이 다시 산의 능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승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런 철무옥의 옆얼굴을 쫓았다.
“가서 련주께 전해. 이 철무옥, 그동안의 보살핌에 감사드린다고.”
철무옥의 눈이 순간 섬광을 발했다.
퍽!
“크윽!”
동승의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동시에 지켜보던 다른 대원들 몇 명도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나를 쫓다가 다쳤다고 하면 용서를 해 줄 것이다.”
파르르…….
철무옥의 뜻을 짐작한 동승은 전신을 떨었다.
“대주님!”
대원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철무옥을 외친다. 동승은 철무옥을 직시했다.
그는 말려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 상처는 대주를 쫓다가 대주의 검에 당했습니다. 저 아이들은 련을 배신한 배신자를 죽이려고 달려들다가 다친 것이지요.”
철무옥은 말없이 동승을 응시했다.
동승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철무옥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가십시오.”
파르르…….
철무옥의 깊은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린다.
동승은 웃었다.
끓어오르는 가슴을 애써 억누르며 일부러 웃어 주었다.
눈앞의 사내를 위해서…….
철무옥이 몸을 돌렸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는 그를 향해 모든 무사들이 무릎을 꿇어 갔다.
뜨거운 눈물이 동승의 뺨을 타고 흘렀다.
석양은 철무옥의 육신을 빠른 속도로 삼켜 버렸다. 소리 없이 굵은 눈물을 흘리던 무사들의 귓속으로 철무옥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나를 용서하라! 형제들이여…….]
* * *
약선 이자겸이 살아가는 청수곡(淸水谷)은 심산유곡(深山幽谷)이라는 말에 딱 어울리는 곳이었다.
주변을 늘어선 숲과 몇 채뿐인 작은 마을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는 개울은, 거기에 높고 푸른 하늘은 이곳이 신선들이 살아가는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대나무와 통나무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그림 같은 모옥이 청수곡의 가장 위쪽에 그 단아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덜컹!
모옥의 문이 열리며 이자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휴! 하늘 한번 좋구나!”
하늘을 보며 가볍게 허리를 편 이자겸은 개울을 향해 휘적휘적 걸었다.
귀엽게 생긴 소녀가 개울에서 뭔가를 씻고 있었는데 노인이 나타나자 소녀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다 씻었느냐?”
“거의 다 되어 갑니다. 사부님!”
“그래, 네가 수고가 많구나.”
소녀는 이자겸이 늘그막에 제자로 거둔 연지다.
그녀는 자그마한 열매를 씻고 있었는데 그 정성스러운 손길로 보아 대단히 귀중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자겸은 그녀가 씻어 놓은 열매를 자그마한 손절구에 담아 빻기 시작했다.
녹색의 진액이 흘러나오며 향긋한 냄새가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구엽초를 두 장 넣고, 말린 칠점사의 간을 넣고.”
이자겸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손절구에 계속해서 뭔가를 넣었다.
쿵! 쿵!
어느새 일을 끝낸 연지가 쪼그리고 앉아 물끄러미 응시한다.
그렇게 한 식경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이자겸이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허허허! 이 정도면 충분하니 우리도 그만 식사를 하자꾸나.”
“네! 사부님!”
총총걸음으로 모옥을 향하는 둘은 조손지간처럼 보였다.
“어머! 깨어나셨어요!”
연지의 목소리에 주변을 둘러보던 이자겸이 모옥을 응시했다.
모옥의 마당에 상반신을 천으로 칭칭 동여맨 사공진무가 나와 있었다.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되니 냉큼 들어가게나.”
“노인장은 뉘십니까?”
사공진무는 대뜸 이자겸의 신분을 물었다.
흐린 눈빛에 파리하게 말라붙은 입술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성정하고는. 차차 말해 줄 테니 냉큼 들어가세. 어서!”
“검후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그 아이는 지금 다른 곳에 있네. 하니 걱정일랑 말고 자네 몸부터 살피게.”
“내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야 하니 어디 계신지 알려 주십시오.”
사공진무로서는 독고혜의 안위부터 확인을 해야 했다.
혹시나 잘못되었을까 하는 마음에 초조하기 짝이 없었다.
“이리 오게나.”
이자겸은 더는 말릴 수 없음을 깨닫고는 모옥의 좌측으로 걸었다.
그곳에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자그마한 집이 있었는데, 굴뚝을 통해 노란 연기가 무럭무럭 올라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대나무를 엮어 만든 문이 열리며 독고혜가 얼굴을 내밀었다.
창백한 안색이었지만 상태가 생각보다 좋아 보이자 사공진무는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이자겸이 총총걸음으로 다가갔다.
“깨어났구나!”
“조금 전에…….”
“이렇게 움직이면 안 되니 어서 들어가자꾸나.”
“어느 정도 움직일 만하니 염려 마세요, 어르신.”
독고혜의 목소리에는 힘이라고는 하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공진무는 안도할 수 있었다.
그는 믿지도 않았던 부처님에게 감사를 했다.
문을 나서던 독고혜가 휘청거렸다.
“조심하십시오!”
사공진무가 재빨리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상처에서 피가 흐르며 극심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미처 그것을 느끼지도 못했다.
“누구신가요?”
“진무입니다.”
“아! 사공 소협이셨군요.”
둘은 인사를 나눈 상태였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아주 잠깐 의식을 되찾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자신을 보며 놀라던 독고혜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서 독고무와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알려 주었다.
“바람이 차가우니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저는 괜찮으니 좀 앉혀 주시겠어요?”
“아, 예.”
사공진무는 독고혜를 조심스럽게 앉혔다.
“비켜 보시게.”
이자겸이 독고혜의 완맥을 쥐었다.
사공진무는 뒤로 물러서서 독고혜를 응시했다.
순간 그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의식이 멀쩡한데도 나를 몰라보셨다.’
독고혜는 분명 눈을 뜨고 있었다.
그런데 초점이 흐려 있었다.
‘설마…….’
사공진무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떨어야 했다.
독고혜의 완맥을 쥐고 앉았던 이자겸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약효가 점점 더 효과를 드러내고 있으니 당분간은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해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어르신께 괜한 수고를 끼쳐 죄송할 따름입니다.”
“허어, 그 무슨 섭섭한 말을 하느냐. 어디 너와 내가 남이더냐. 다시는 그런 소릴랑 말고 냉큼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연지야. 얼른 부축해서 방으로 모시거라.”
“예, 사부님.”
연지가 재빨리 독고혜를 부축하려 팔을 뻗었다.
독고혜가 그녀의 팔을 뿌리친다.
“속이 답답해서 그러니 조금만 있다가 들어가고 싶은데…….”
이자겸은 하는 수 없이 그러자고 했다.
연지는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서 얇은 이불을 가지고 와 독고혜의 몸을 덮어 주었다.
“고마워요.”
독고혜는 연지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휘이잉!
서늘한 바람이 숲을 흔들며 불어왔다. 사공진무는 그때까지도 독고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의술에 일가견이 있다.
지금 독고혜의 상태는 죽은 것과 다르지 않은, 어쩌면 강호의 여인에게는 죽은 것만도 못한 상황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는 제발 자신이 우려하는 상황이 아님을 하늘에 빌고 또 빌었다.
“부상은 좀 어떠신가요?”
독고혜가 묻자 사공진무는 거짓을 대답했다.
“의원 어르신께서 며칠 푹 쉬면 뛰어다닐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다행이군요.”
옅은 미소를 머금은 독고혜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초점 없는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녀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린다.
“날이 꽤 어둡군요.”
“……!”
사공진무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린다.
지금은 해가 중천에 뜬 대낮이 아닌가. 그런데 날이 어둡다니.
후둘후들!
두 다리마저 떨렸다.
“사부님!”
마침 사공진무를 응시하고 섰던 연지가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라서 이자겸을 불렀다.
이자겸이 돌아섰다.
사공진무와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자겸은 사공진무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독이 시력을 앗아 갔다네. 지금 당장은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털썩!
“어머!”
사공진무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 * *
사공진무는 손에 술 한 병과 삶은 돼지고기를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활짝 웃으며 뛰었다.
“여기 계셨습니까!”
혁련천후는 절벽의 끝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서 있었다.
“술을 가져왔습니다. 한데 뭘 그렇게 유심히 보고 계십니까?”
“밤하늘에 별 말고 다른 것이 있느냐.”
“아! 별을 보고 계셨군요.”
사공진무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카만 하늘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별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역시 이곳의 밤하늘은 아름답기 짝이 없습니다. 언제 봐도 설레니 말입니다. 하하하!”
“좋아하는 별이라도 있느냐?”
혁련천후의 물음에 사공진무는 손을 들어 북쪽 하늘에서 가장 크고 밝게 빛나는 별을 가리켰다.
“저는 저 별을 가장 좋아합니다.”
사공진무가 가리킨 별은 북극성이었다.
혁련천후의 두 눈에 돌연 아련한 빛이 어린다.
“너도 저 별을 좋아했느냐.”
“허면 주공께서도 북극성을 제일 좋아하십니까?”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좋아했지.”
“그게 누굽니까?”
사공진무의 물음에 혁련천후는 답을 하지 않았다. 더 물으려던 사공진무는 뒤늦게 깨닫고는 소년처럼 해맑게 웃었다.
“검후님이시군요.”
사공진무는 말을 해 놓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괜히 혁련천후의 아픈 곳을 건드렸다는 생각에 입을 꾹 다물고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모든 것이 끝나면 해 보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게 뭡니까?”
“그녀와 함께 이곳에 와서 지금처럼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지. 이곳에서 보는 북극성은 그 어느 곳보다 크고 밝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