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귀환무사 73화>
“저…… 허락을 해 주시면 저희들이 대협들께 술이라도 한번 대접을 해 드리고 싶습니다만…….”
“술?”
지금껏 무덤덤하게 반응하던 왕전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발했다.
관산악과 담대소천도 입맛을 다셨다.
술을 밥보다 좋아하는 그들은 영웅 대회가 시작된 며칠 뒤부터 지금까지 술을 마시지 못했다.
은자가 똑 떨어진 탓도 있지만 혁련천후가 가급적 술을 자제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청년이 말을 이었다.
“괜찮으시다면 청옥관으로 모시고 싶습니다만…….”
“청옥관? 거기는 엄청나게 비싼 술만 판다고 하던데?”
왕전과 관산각이 눈빛부터가 달라졌다.
청옥관은 각파의 중진급들이나 들어갈 수 있는 최고급 객잔이다.
정도맹에서 자체적으로 운용하는 곳인데, 워낙에 술값이 비싸 어지간한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괜찮을까?”
왕전이 묻자 담대소천과 흑야는 대답을 피했다. 관산악이 벌떡 일어섰다.
“간단하게 한 잔만 하고 오지 뭐.”
청년들의 표정이 단박에 환하게 밝아졌다.
청년들이 청옥관으로 올라갈 것을 권유하자 일행들은 주저 없이 이 층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청년들은 술자리가 진행되는 내내 모두에게 흠모의 눈길을 퍼부었다.
모두는 청년들을 간간이 응시하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왕전이 전음을 날렸다.
[계집이 남장까지 하고 접근을 했다면 뭔가 있다는 건데, 그냥 확 족쳐서 알아내는 게 어떻겠냐?]
[그놈의 성질머리하고는.]
[나쁜 아이들은 아닌 것 같으니 좀 더 지켜보자.]
흑야와 담대소천의 연이은 대답에 왕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술잔을 기울였다.
사실 그들은 술에 혹해서 따라온 것이 아니었다. 청년들이 뭔가 의도한 바가 있어 고의적으로 접근을 했음을 눈치채고는 일부러 응해 준 것이었다.
게다가 한 명은 남장을 한 여자였다.
한편, 관산악은 아주 희희낙락이었다.
그에게는 사람을 웃기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청년들은 다른 셋보다 관산악에게 정성을 쏟고 있었다.
왕전이 그 모습을 보고는 투덜거렸다.
[살판났네, 살판났어.]
[후후! 질투 나면 너도 수다를 떨어 봐.]
[됐다, 자식아.]
* * *
송가장의 장녀 송영은 눈앞의 관산악을 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부탁을 들어주실까? 거절하면 어떡하지?’
그녀는 절박한 뭔가가 있어서 관산악 등에게 접근했다.
그들이라면 위기에 처한 가문을 구해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남장까지 하고서 접근을 한 것인데, 정작 자리가 마련되니 좀처럼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영웅 대회에 온 이유도 가문을 위기에서 구해 줄 수 있는 협객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가문의 보물을 몽땅 처분해서 거액까지 마련했다. 물론 도와주면 그 보답으로 줄 요량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망설이던 송영은 가문을 위해서라도 지금 말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는 용기를 내었다.
“저…… 대협!”
송영은 조심스럽게 관산악을 불러 봤다.
관산악이 자신을 쳐다보자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한 송영은 술잔을 쑥 내밀었다.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좋지!”
송영은 관산악의 잔에 술을 채웠다.
자신이 말을 꺼내는 순간 모두의 눈빛이 변했다는 것을 그녀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뭘 저렇게 망설이는 거야?]
[그러게.]
왕전과 흑야가 송영을 보며 전음을 주고받을 때였다. 거푸 술잔을 꺾던 관산악의 눈이 돌연 동그랗게 커졌다.
탁!
술잔을 번개처럼 내려놓고는 벌떡 일어서는 관산악. 모두가 휘둥그레 쳐다볼 때, 혁련천후가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주공.”
모두의 낯빛이 굳어졌다.
금주령을 내렸는데 여기서 술판을 벌이고 있었으니. 담대소천이 재빨리 자신이 앉았던 의자를 내놓았다.
“앉으십시오, 주공.”
송영을 비롯한 송가장의 청년들은 자리에 앉는 혁련천후를 주목했다.
관산악 등을 볼 때보다 눈빛이 더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송영은 사실 혁련천후가 명수진인을 꺾는 것을 보고서 부탁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다.
[의도를 가지고 접근을 한 놈들입니다. 해서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천하의 담대소천이 제발이 저려 이실직고하자 혁련천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관산악이 마시던 술잔을 들어 마셨다.
탁!
“한 잔 더 하십시오.”
마치 제 술처럼 잔을 채우는 관산악. 모두는 혁련천후가 별다른 화를 내지 않을 듯 보이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혁련천후의 시선이 송영과 청년들을 향했다. 그러더니 대뜸 묻는다.
“우리에게 할 말이 있느냐?”
“……!”
속을 들킨 송영은 당황한 기색을 비쳤다.
[캬! 역시 주공이시다. 그냥 대놓고 물어보시네.]
왕전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다가 혁련천후의 눈빛을 받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담대소천이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접근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혼내지 않겠다. 하지만 거짓을 고하면…….”
“아, 아닙니다! 절대 나쁜 의도로 온 것은 아닙니다! 믿어 주십시오!”
당황한 송영이 황급히 대답하며 낯빛을 붉혔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행동에 모두는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혁련천후가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인지 말을 해 보아라.”
“저…… 대협들께 부탁이 있습니다.”
“무슨 부탁?”
잠시 머뭇거린 송영이 돌연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어 탁자에 올려놓았다.
모두는 한눈에 그것이 전표임을 알 수 있었다.
혁련천후는 전표 뭉치를 보며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도와주십시오!”
돌연 무릎을 꿇어 가며 외치는 송영. 그러나 알 수 없는 무형의 힘이 그녀를 떠받치면서 다시 일어서야 했다.
담대소천이 주변을 돌아보고는 호신강기를 펼쳐 목소리가 흘러나가는 것을 차단했다.
다른 이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주르륵!
송영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자신이 처한, 아니 송가장이 처한 상황을 모두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잠시 후, 혁련천후는 먼저 화산파의 거처로 돌아갔다.
나중에 모두는 그곳에서 다시 모였다.
“놈이 이곳에 있다고?”
“그렇습니다. 남장을 한 것도 그놈의 시선을 피하기 위했던 것 같습니다.”
왕전이 눈을 부라리며 말을 꺼낸다.
“육십이 넘은 늙은이가 이제 스물을 갓 넘은 아이를 넘보다니. 맞아 죽어도 싼 놈입니다.”
관산악이 말을 받았다.
“죽여도 곱게 죽여서 될 놈이 아닙니다. 허면 그 아이들의 부탁을 들어주시는 겁니까?”
“영백의 죽음 때문에 제법 혼란스러울 것이다. 대회가 끝나면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덕분에 제법 큰돈을 벌었습니다. 그 정도 금액이면 일 년 정도는 장원을 꾸려 나갈 수도 있겠습니다.”
“돌려줘!”
“…….”
“돈은 나중에 흑야가 해결하면 된다.”
순간 흑야의 고개가 광속으로 혁련천후를 향해 돌아갔다. 반면에 다른 이들은 흑야를 돌아보았다.
혁련천후는 흑야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청부 몇 건을 받아야겠다. 장원에 돈이 없어.”
“…….”
“한 건에 금 오백 냥 이하는 안 받는다고?”
“……그렇습니다.”
“세 건 정도만 뛰어.”
“예.”
흑야의 싸늘한 시선이 관산악을 향해 돌아갔다.
일전에 관산악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흑야가 뛰어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의 시선을 슬그머니 외면한 관산악은 재빨리 전표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장원에 갔던 청명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이냐?”
“올 때가 지났는데 오지 않는 것을 보면 놈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담대소천이 슬쩍 끼어들었다.
“검후님은 일이 끝나면 찾아뵈실 생각이십니까?”
혁련천후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엽차를 입으로 가져간 그는 단숨에 마셔 버리고는 흑야를 불렀다.
“흑야!”
“예. 주공.”
“시간이 되면 그녀가 이곳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혁련천후는 눈을 감았다.
“좀 잘 테니 깨우지 마라.”
“편히 쉬십시오.”
모두는 재빨리 자리를 피해 주었다.
* * *
명수진인은 하늘을 보며 울분을 토해 냈다.
자신이 처한 현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구천각의 각주를 지내며 맹을 좌지우지하던 자신이 하루아침에 보릿자루 신세가 되었다.
그것도 자신이 꾸민 꾀에 스스로 당해 버렸으니 그로서는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을 할 노릇이었다.
십 년을 머물렀던 정도맹을 나서 사문으로 돌아가는 길이 이렇게 비참할 줄이야.
“크윽!”
부상 부위에서 극심한 통증이 올라오자 이내 얼굴이 땀으로 흥건히 젖는다.
함께 사문으로 돌아가고 있는 무당의 제자들은 축 처진 어깨를 하고서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몇몇은 연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아침에 천하의 조롱거리가 되었으니 힘이 날 까닭이 없다.
“반드시 쓸어버리고야 말 것이다! 이놈들!”
명보진인은 끝없이 화산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내었다.
그때였다.
선두에서 말을 몰아가던 제자 하나가 뒤를 돌아보며 나지막이 소리쳤다.
“앞쪽에 화산파의 복장을 한 자가 있습니다.”
“뭣이?”
화산이라는 말에 명수진인의 눈에 번쩍하는 살기가 솟아났다. 명보진인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다를 바가 없었던 까닭에 대번에 전방을 주목했다.
화산의 검수로 보이는 청년 하나와 계절에 맞지 않는 두꺼운 털옷을 걸친 사내, 그리고 어깨에 기다란 막대기를 멘 사내가 관도를 따라 자신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놈을 데려오너라!”
화산파를 생각하며 분노에 치를 떨고 있었던 명수진인은 대뜸 그렇게 명령을 내렸다.
무당의 제자들 몇이 빠르게 전방으로 달려 나갔다.
북궁천소와 조윤을 정도맹으로 안내하던 청명은 난데없이 전방에 무당파의 사람들이 나타나자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그러다가 무사 몇 명이 빠르게 달려오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당파의 사람들입니다. 이쪽으로 오는데요?”
북궁천소와 조윤은 달려오는 무당파의 검수들을 발견하고는 슬그머니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 표정이 별론데?”
“그러게.”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를 잡으러 오는 놈들처럼 보이는데? 혹시 너희 화산과 무슨 다툼이라도 있었느냐?”
조윤의 물음에 청명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