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2
<귀환무사 422화>
귀환무사 2부
197화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서 눈보라가 일었다.
짧은 시간에 협곡 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평지를 달리듯 빠르게 질주했다.
하지만 곧 그들은 속도를 줄여야 했다.
협곡의 중간 지점이 눈으로 막혀 있었다.
쌓였던 눈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진 듯 보이자 혈마불은 바닥을 차고 올라 그곳을 넘어서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쩌저저정!
요란한 굉음이 터졌다. 그리고 사방에서 화살이 쏟아졌다.
“적이다!”
“저따위 화살로 감히 우리를 막으려 했다니. 무시하고 속히 협곡을 돌파하라!”
화살 따위에 당할 자는 이곳에 아무도 없다고 여긴 혈마불은 곧장 협곡의 끝을 향해 질주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먼저 쏟아지는 화살 속으로 몸을 날렸다.
퍽! 퍽!
호신강기에 부딪힌 화살들이 이상하게도 하얀 가루로 변해 날아갔다.
“가소로운 놈들!”
혈마불은 화살이 여느 화살과 다르다는 점을 미처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뒤를 따르는 무사들도 날아든 화살을 모조리 막아 내며 막아선 눈을 넘어섰다.
“모조리 죽여 주마!”
두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살폈지만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쥐새끼처럼 치고 빠지는 식으로 나서겠다? 흥! 어림도 없다!”
혈마불은 코웃음을 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하지만 또 얼마 못가서 멈춰 서야 했다. 길이 또 거대한 눈덩이로 꽉 막혀 있었다.
높이가 처음의 것보다 두 배에 달해서 사람 하나 빠져나갈 공간조차 없었다.
뒤를 쫓아오던 홍교의 고수들이 혈마불의 뒤쪽에 내려섰다.
유난히 비쩍 마른 마승이 주변을 살펴보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합니다!”
“놈들이 간교한 수작을 부리려는 모양이다만 걱정할 것 없다! 모두들 주변을 경계하며 저곳을 넘어간다!”
혈마불은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평소라면 조금의 의심이라도 해야 했는데, 지금의 혈마불은 뭔가에 쓰인 사람처럼 서두르는 모습마저 보였다.
“다시 이동한다!”
“예!”
모두가 장애물을 넘으려고 앞쪽으로 몰릴 때였다.
스슥!
협곡 위에서 아리엘과 가인, 카츄가 나타났다.
“안녕!”
“헤엣! 너희들이 나쁜 놈들이구나.”
“나쁘게 생겼잖아.”
“진짜네. 헤헷!”
둘은 조금도 긴장한 기색 없이 마치 농담을 나누듯 말했다.
“너희는 절대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해!”
아리엘이 나섰다.
그러자 혈마불의 눈동자에 순간 탐욕이 어린다.
아리엘의 눈부신 미모 때문이다.
혈마불은 색을 밝히기로 소문난 자였다. 전쟁의 와중에도 색욕을 느끼는 것을 보면 그 정도가 심각한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아리엘의 폭발적인 미모도 한몫을 했다.
“흐흐! 중원에 색목국의 계집이 있었다니.”
색욕이 줄줄 흐르는 눈동자에 아리엘의 고운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가인이 화를 냈다.
“저 자식은 내가 죽여 줄 테야!”
“흐흐! 애송이들이 꿈을 꾸고 있군.”
팍!
혈마불의 육신이 바닥을 차고 오르더니 순식간에 협곡 위쪽에 내려섰다.
진정 가공할 신법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높은 곳을 한 번 도약으로 오르다니…….
아리엘도 혈마불의 가공할 신법에 흠칫하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내 차갑게 웃었다.
“와요.”
“보고 있습니다.”
왕전의 목소리가 주변에서 울렸다.
혈마불이 아리엘의 앞에 내려섰다. 그 순간 혈마불은 전신을 압박하고 들어오는 무형의 살기를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
“왔냐?”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혈마불은 고개를 홱 돌렸다.
그곳에 거대한 도를 든 왕전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고 있었다.
“전왕!”
“눈은 제대로 박혔군, 돌중 새끼.”
혈마불은 순간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고는 재빨리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보다 아리엘과 가인의 화염 공격이 더 빨랐다.
“나쁜 놈들이니 신께서도 용서하실 거야!”
“가랏!”
화아아아악!
허공을 수놓은 시뻘건 화염이 그대로 협곡에서 서성거리던 홍교의 고수들에게 떨어졌다.
화염의 넓이는 그들의 유일한 탈출구인 허공을 완벽하게 차단하며 쏟아져 내렸다.
거기에 카츄의 능력이 더해져 파괴력은 상상을 불허했다.
꽈아앙!
콰르르르…….
“크아악!”
“피해라! 으아악!”
아비규환의 참상이 벌어졌다.
불길에 휩싸인 자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질러 대는 비명들,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동료의 검에 죽어 가는 자들…….
“대체 어떻게 저런 무공이…….”
혈마불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변해 갔다.
홍교의 최정예가 죽어 가는 데 걸린 시각은 고작 일각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왕전은 그를 내버려 두었다.
“어떠냐. 수하들이 뒈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분이.”
처척!
왕전이 대도를 어깨에서 내리며 느릿하게 혈마불을 향해 걸었다.
혈마불의 눈동자가 악마의 그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네놈들의 간을 생으로 씹겠다!”
“지랄을 하세요. 그따위 눈으로 무리를 이끄니 모조리 몰살을 당하는 거야, 돌중 새끼야!”
왕전은 여유가 넘쳤다.
혈마불은 세외에선 공포의 대명사다.
하지만 왕전은 그 이상의 거물이다. 그에게 혈마불은 저잣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삼류무사나 다름없다.
“뒈지기 전에 하나만 말해 주지. 중원을 넘본 죄로 너희 세외는 곧 피의 보복을 당할 거야. 주공께서 그리 결정하셨거든.”
“닥쳐라! 너희 중원 무림이야말로 조만간에 우리 세외의 휘하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지랄도 가지가지 한다.”
팟!
왕전이 움직였다.
눈 위를 가르며 달려들더니 그대로 혈마불을 향해 대도를 휘둘렀다.
혈마불이 쌍장을 교차하며 앞으로 뻗었다.
강맹한 장풍이 왕전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기세가 사뭇 대단하자 왕전은 대도의 궤적을 바꿔 장풍을 후려쳤다.
쾅!
굉음과 함께 주변에 쌓였던 눈이 마구 치솟아 올랐다.
“제법이군, 땡중.”
두 번째 공격이 날아갔다.
이번에도 혈마불은 간신히 막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더는 막아 낼 수가 없었다.
성난 왕전이 그만 전력을 다해 공격을 가해 버리는 바람에 혈마불의 육중한 몸뚱이가 머리만 달랑 남긴 채, 형체도 없이 갈기갈기 찢겨 날아갔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참혹한 죽음이었다.
“뭣도 아닌 새끼가. 퉤!”
“으, 너무 잔인해.”
카츄가 몸을 떨며 아리엘에게 안겼다.
왕전이 그런 카츄를 돌아보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미안, 성질이 나서 그만. 흐흐흐.”
* * *
아밀랍타는 전방에 가득 피어오르는 시커먼 연기를 바라보며 팔을 들었다.
그의 손짓 한 번에 일천에 달하는 세외의 모든 고수들이 일제히 이동을 멈추었다.
아밀랍타를 호위하는 홍교의 고수가 연기를 가리키며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혈마불이 이동한 방향입니다!”
“설마 벌써 발각되었단 말인가? 서둘러 아이들을 보내어 사정을 살펴보고 오너라!”
“예!”
경공이 뛰어난 무사가 재빨리 연기가 치솟는 곳으로 달려갔다.
무사가 돌아온 시간은 매우 짧았다.
달려오는 무사의 표정만 보고도 아밀랍타는 뭔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직감은 적중했다.
“모조리 당한 것 같습니다! 마불의 목이 협곡의 입구에 걸려 있습니다!”
“진정 모조리 당했단 말이냐!”
“협곡 아래가 초토화가 되어 있었는데, 새카맣게 타 버린 시신들이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교주님! 직진을 피해서 우회를 해야 합니다. 놈들이 벽력탄을 사용하면 아군의 피해가 매우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다른 자가 나섰다.
“우회하면 며칠을 더 소요해야 하오! 경공이 빠른 고수들을 앞세워 정면으로 뚫고 갑시다!”
“그렇소! 놈들도 지리적인 이점을 활용해 우리가 우회하기를 기다릴 것이오. 그러니 곧장 협곡을 뚫고 사천당문으로 향하는 것이 상책이오!”
이런 상황에서도 의견이 분분히 갈렸다.
아밀랍타는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어서 명령을 내려 주시오!”
“늦으면 자칫 고립이 될 수도 있으니 당장에 돌파를 시도해야 하오!”
각파의 수장들은 더욱더 강하게 정면 돌파를 고집했다.
아밀랍타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정면 돌파를 명했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협곡을 빠져나간다!”
“돌파한다!”
스스슥!
은밀한 이동이 불필요한 상황이 되어 버리자 일천의 세외 고수들은 사나운 기운을 그대로 드러내며 협곡으로 향했다.
“교주님! 지형적으로 너무 불리한 곳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회하심이 피해를 줄이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홍교의 장로 하나가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피며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아밀랍타는 돌이킬 생각이 없었다.
여기서 명령을 철회하면 우스운 꼴이 되는 것은 둘째치고 자신의 권위 자체가 위협을 받을 수도 있다.
종전 이후, 논공행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면 어떻게든 총사령의 직책을 끝까지 유지해야 한다는 게 그의 속내였다.
아밀랍타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놈들이 일부러 마불의 수급을 걸어 놓은 것은 매복을 하고 있음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더냐. 당연히 우리가 우회해서 갈 것이라 예상한 시시한 계책이다. 저곳엔 분명 소수의 전력만을 남겨 두고 우회로에 주력을 배치했을 것이다!”
“만약 적들이 그것을 역이용한 것이라면 그때 어쩌시겠습니까!”
“수적인 열세에 놓인 놈들이 그러한 여유까지는 부리지 못할 것이다. 딴말 말고 경공이 뛰어난 아이들을 먼저 협곡 위로 보내거라!”
아밀랍타의 단호한 태도에 홍교의 장로는 고개를 저으며 물러섰다.
그런 그의 눈빛이 조금은 기괴했다.
요구를 거절당한 자의 눈빛과는 거리가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