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2
<귀환무사 382화>
귀환무사 2부
157화
“케이론에 홀베른의 국왕보다 강한 인물이 있다면 흔쾌히 양보할 수도 있소. 전쟁에서 우두머리는 강해야 하오. 다 이겨 놓은 전쟁도 왕이 죽으면 그대로 역전이 되어 버리는 게 국가 간의 전쟁이오. 따라서 당연히 내 뜻을 이해하리라 믿소만……?”
“그렇게 하십시오.”
레이나 공주는 거부하지 못했다.
거부할 수가 없었다. 이미 헤론 후작을 통해 이곳의 누가, 어느 정도로 강한지는 이미 줄줄 외고 있었다.
헤론 후작이 전한 홀베른 국왕의 무력은 죽은 테세우드 공작보다 강하면 강했지 절대 약하지 않은 수준으로 알고 있었다. 케이론엔 당연히 그만한 강자는 없다.
루안이 있었지만 그는 자유로운 영혼 같은 존재다.
그를 강제된 틀 안에 구속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은 승전을 기원하는 날이니 맘껏 드시고 즐기시길 바라오.”
그 말을 끝으로 혁련천후는 더 이상 레이나 공주와 말을 섞지 않았다.
* * *
수천에 달하는 숙수들은 평원으로 음식과 술을 나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십만이 먹어야 하는 탓에 그들은 아예 수백 대의 마차를 이용해 술과 음식을 날라야 했다.
마차엔 통째로 삶거나 구워진 소와 돼지들이 가득했고 거대한 통에 담긴 술도 수천 통이 평원으로 옮겨졌다.
평원의 외곽엔 일반 백성들 수만 명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들에게도 병사들과 똑같은 음식과 술이 배달되었다.
모두가 흥겹게 마시며 즐기는 자리는 밤을 넘어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가 더 지나자 혁련천후가 담대소천을 불렀다.
“시작하지.”
“알겠습니다!”
요란이 혁련천후와 담대소천의 옆에 섰다.
확성마법을 펼치기 위함이다. 캐스팅이 끝나자 혁련천후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곧 요란과 존망이 걸린 한판 승부를 벌어야 한다! 그들은 이미 이곳, 홀베른으로 창검을 겨누고 달려오고 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우린 싸워서 이기는 것만이 남은 것이다! 나, 혁련천후는 반드시 홀베른에 승리의 영광을 가져다줄 것을 약속한다!”
우아아아!
이십만이 일제히 환호했다.
평원이 뜨거운 기운으로 요동쳤다. 혁련천후가 말을 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부대 편성을 할 것이다. 총사령관은 내가 맡겠지만 전투에서의 지휘는 소천이 맡을 것이다! 소천!”
“예! 주공!”
“시작하도록 해.”
우드가 재빨리 커다란 두루마리와 걸대를 가져와 담대소천의 옆에 놓았다.
담대소천이 두루마리를 펼치자 지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 홀베른이 만들어 놓은 대륙의 지도였는데, 작은 도시 하나까지도 세밀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담대소천이 요란 제국의 이동 동선으로 예상되는 지형을 짚으며 하나하나 설명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장시간에 걸쳐 설명이 끝나자 이번엔 열 개의 부대로 이루어질 왕국군의 각 부대장들을 나누었다.
하나씩 살펴보면 선봉은 담대소천이 맡고 휘하에 삼만 기병이, 선봉군을 반나절 거리에서 지원할 부대엔 조윤과 이만 기병이 적을 기습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다른 부대들을 보면,
왕전이 백병전 특수 부대인 철갑기사 이만을, 흑야는 오직 케니언 크로우 기사단만을 이끌고 적의 수뇌부만을 노리는 저격 부대로 편성되었다. 또한 북궁천소와 혁련소가 전차 부대와 기병 일만에 보병 이만을 이끌고 선봉부대와 이틀간격으로 요격을 떠나기로 결정되었다. 연소민이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혁련천후에게 간청하여 혁련소와 함께 편성되었다.
나머지 오만은 홀베른 국왕과 룻거 후작의 휘하에 두어 혹시 모를 변화를 대비하여 홀베른과 가장 가까운 평원에 주둔하게 되었다.
각 부대엔 마법사들이 골고루 배치되었는데, 마법사들로만 이루어진 단독 부대도 별도로 편성되었다.
진천과 사공진무가 부대를 이끌기로 한 그들은 전장에 상관없이 월등한 기동력으로 전장, 곳곳을 돕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혁련천후는 아리엘과 에이미 공주만을 데리고 모든 전장을 살피기로 했다. 두 여인들의 엄청난 마법 능력을 빌어 그 누구보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는 장점을 백분 살려서 선봉에서부터 요격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전투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물론 카루가도 그와 함께하기로 결정되었다.
장시간에 걸쳐 부대 편성이 결정되자 모두는 크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혁련천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쓸어 보았다.
“잔을 들어라!”
모두가 잔을 들었다.
“살아오면서 단 한 번의 패배조차 없었다. 그것은 그대들 선조들의 명예이자 나의 명예이기도 하다. 그 명예를 지켜 주길 바란다. 홀베른을 위하여!”
“홀베른을 위하여!”
왕궁이 쩌렁쩌렁 흔들렸다.
뒤이어 담대소천이 잔을 들고 외쳤다.
“신마성을 위하여!”
“신마성을 위하여!”
마지막으로 홀베른 국왕의 외침이 어둠이 깔린 왕궁을 울렸다.
“상왕 전하를 위하여!”
제3장 감도는 전쟁의 기운
모두가 술을 마시며 밤을 보낼 즈음 혁련천후는 홀로 왕궁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걸었다. 아내들이 잠을 자고 있는 곳은 사공진무가 펼쳐 놓은 죽음의 절진이 철통처럼 두르고 있었지만 그는 익숙하게 진 안으로 들어갔다.
이중 삼중으로 펼쳐진 죽음의 방어막을 지나 수정관이 있는 마지막 방에 이르러서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벽면의 수정관 속에는 칠백 년 동안을 잠을 자며 자신을 기다려 온 관산악이 있었다.
누구보다 전투적인 성향을 보였던 그와의 추억이 떠오르자 혁련천후는 한동안 제자리에서 관산악을 바라보았다.
“성질이 급한 네가 너무 오랫동안 참았구나, 산악…….”
관산악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어서 꺼내 주시기나 하시죠’라고 대답하는 것만 같았다. 그의 오른손에 굳게 쥐어진 대도의 끝부분에 선연한 핏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칠백 년을 지나면서도 선혈은 방금 막 흘러내린 것처럼 생생한 색깔 그대로를 지니고 있었다.
“훗날, 주인께서 이곳을 찾으신다면 이 산악의 피로 예를 대신하겠노라고 전하라.”
관산악은 기나긴 잠 속으로 빠지기 직전에 후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대도의 끝부분을 적신 선혈은 바로 그가 흘린 것이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그는 애틋한 눈으로 관산악의 곳곳을 천천히 살펴보고는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감과 거의 동시에 혁련소와 연소민이 그곳으로 들어섰다.
“산악 숙부! 언제 봐도 참 어울리지 않습니다, 후후!”
“조금만 참으시면 저희들이 깨워 드리겠어요. 제가 신교의 딸이라고 혼내시면 안 된답니다.”
“산악 숙부는 나를 무척 좋아하셨으니 대번에 용서하실걸?”
“훗!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요.”
혁련소는 혁련천후가 들어간 문을 돌아보며 가볍게 한숨지었다.
자신의 아버지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저곳에서 보냈다. 물론 자신도 수시로 드나들며 잠자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보곤 했다. 부모들의 사랑 이야기는 전 중원의 모든 선남선녀들이 꿈꾸는 그런 사랑이었다.
자신이 태어나고 성년이 될 때까지도 그 사랑은 오히려 깊어지기만 했다는 것을 혁련소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연소민이 혁련소의 어깨에 기대며 낮게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도 저분들처럼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겠죠?”
“그건, 글쎄…….”
혁련소의 아리송한 대답에 연소민이 고개를 들고는 그를 노려보았다. 혁련소가 묘하게 웃었다.
“나도 아버지처럼 최소 둘은 되어야…… 윽!”
옆구리에서 화끈한 통증이 피어나자 혁련소는 더 이상 뒷말을 잇지 못했다. 짐짓 숨이 넘어갈 듯한 표정으로 엄살을 부리던 혁련소가 정색을 하고서 연소민의 팔을 끌었다.
“그냥 나가지. 여긴 아버지만의 공간이니까, 우린 방해만 될 뿐이야.”
여전히 삐친 듯 보이는 연소민의 입술에 기습 입맞춤을 한 혁련소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 * *
두두두두두…….
이십만에 이르는 대병력의 이동으로 하늘은 온통 먼지로 덮어졌다.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출진 행렬의 선두에는 거대한 마차가 이동하고 있었는데, 마법사들의 철통같은 근접 호위와 아군조차도 접근을 불허하는 크로우 기사 단원들로 인해 마차 주변은 그 누구도 다가가지 못했다.
케논 산맥에서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 크로우 기사 단장 레인의 모습도 보였고, 제7강습여단장인 루턴 후작도 전방을 바라보며 날카로운 눈빛을 뽐내고 있었다.
레인의 안광이 전에 비해 한층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는 간혹 마차 쪽을 흘긋거렸다. 아군조차도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엄청난 존재가 그 안에 타고 있다. 마차를 경호하는 음침한 기운의 마법사들은 레인의 시선이 마차를 향할 때마다 섬뜩한 기운을 뿌려 댔다.
“시선을 거두어라!”
그러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죽일 듯 그들은 잔혹한 살기마저 드러냈다. 시선을 돌리는 레인의 눈동자가 일순 섬광으로 빛났지만 이내 정상으로 돌아왔다.
‘난전이 벌어지면 네놈들 먼저 죽여 주마. 재수 없는 유령 새끼들…….’
아군이되 적보다 못한 사이가 그들이었다.
마법사들은 오직 켈베로스만을 추종한다.
하지만 레인은 막스 황제와 꽤 친밀한 관계다. 그것에서부터 그들의 관계는 조금씩 틀어진 상태였다.
전날, 케논 산맥의 평원에서 벌어졌던 케이론과의 전투에서 마법사들은 켈베로스가 내린 명령만을 수행했다. 레인과 막스 황제가 혁련천후의 추격을 피하며 도주할 때도 그들은 쳐다보지도 않았었다.
그들은 아군이 죽어 나가는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힘을 전부 드러내지 않았다. 모든 게 켈베로스의 명령에 의해서였다.
전투의 결과는 요란 제국의 패전으로 끝났지만 마법사들은 켈베로스에게 크나큰 포상을 받았다. 이유는 테세우드 공작의 힘을 끌어내고 그것을 켈베로스에게 전송했기 때문이다. 전송을 받은 켈베로스는 자신의 또 다른 분신을 테세우드 공작의 권역으로 보내어 그를 암살하고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얻어진 힘을 믿고서 궁극의 적, 홀베른으로 출전하는 것이다.
레인은 마법사들을 쓸어 보며 이를 갈았다.
‘감히 죽어 버린 껍데기 주제에 인간을 무시하다니…….’
그랬다.
마법사들은 죽은 자들이었다. 강력한 힘이 봉인된 어둠의 로브를 걸친 그들은 켈베로스와 소멸을 같이한다. 그가 죽으면 비로소 마법사들도 죽는 것이다. 그전엔 세상의 그 어떤 물질이나 기운으로도 그들을 소멸시키지 못한다.
뿌우우우…….
나팔 소리가 울렸다.
선두에서 척후를 겸해 이동하던 기사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빠르게 돌아오는 모습이 모두의 눈에 잡혔다. 레인이 손을 들자 마차가 이동을 멈추었다. 동시에 크로우 기사 단원 하나가 달려오는 척후병들에게로 마주 달려갔다.
곧 기사가 돌아와 레인에게 알렸다.
“십만 정도로 보이는 케이론의 기마병들이 국경 지대 근처를 타고 동북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