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1
<귀환무사 381화>
귀환무사 2부
156화
이 정도면 뻔뻔함의 극치다.
하지만 아리엘은 왠지 그런 게 자연스레 잘 어울렸다. 전혀 음탕하지도 않아 보였다. 그게 혁련천후는 스스로도 의아했다.
슥!
아리엘이 손을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혁련천후의 시선이 그녀의 손을 향했다. 하얀 손 위에 무엇인가가 있었다.
“이거, 당신 줄게요.”
“이게 뭐지?”
“엘프의 돌! 켈베로스가 무척 탐내는 거죠. 물론 우리 엘프들에겐 생명과도 같은 것이고요.”
“그렇게 소중한 것을 왜 내게 주는 것이냐?”
아리엘은 혁련천후의 침상에 걸터앉더니 벌렁 누우며 말했다.
“그걸 주고 대신 뭘 해 달란 소린 안 할 테니 걱정 마요. 아! 푹신푹신한 게 너무 좋네!”
그녀는 이불까지 끌어다 덮으며 요염한 눈으로 혁련천후를 응시했다.
“나, 예쁘지 않나요?”
“전혀!”
“흥!”
그녀는 다시 벌떡 일어서더니 탁자에 주변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화사한 병에 담긴 술을 통째로 입으로 가져가더니 그대로 반병이나 남았던 걸 모조리 마셔 버렸다.
“크…… 쓰다!”
“미쳤군. 그걸 그렇게 마시다니…….”
아리엘이 마신 술은 세상에서 가장 독한 술이었다.
독주를 좋아하는 혁련천후를 배려해 홀베른이 특별히 양조한 것이었다. 효과는 대번에 나타났다. 아리엘의 옥처럼 흰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녀, 자신도 지독히도 빠른 효과에 놀랐다. 동공이 흐려지며 몸에 힘이 빠져나가자 그녀는 침상으로 기어가다시피 걸어가서는 그대로 누웠다.
“독하면 미리 말을 해야지…… 쳇!”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아리엘은 말이 없었다.
혁련천후는 지금처럼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잠든 아리엘을 내려다보았다. 그것도 잠시 측은지심이 생겨났다.
터전을 잃고 소중한 사람들마저 잃은 그녀가 아닌가.
하지만 결코 아프거나 힘든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무리를 이끄는 사람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
아리엘은 남은 엘프들을 보살펴야 한다.
자신도 보살피고 이끌어야 할 사람들이 많다. 아내들과 헤어지고 아들마저 마계로 보냈을 때 자신도 아리엘처럼 내색하지 못하고 스스로 견뎌 냈었다.
그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흐트러진 천을 끌어다 그녀의 가슴까지 덮어 주었다.
“으응……!”
그녀가 뒤척이자 황급히 허리를 편 그는 의자에 앉아 엘프의 돌을 살폈다.
말 그대로 그냥 평범한 돌이었다. 어떤 힘을 지녔는지는 모르겠지만 켈베로스가 노리는 것이라면 결코 평범할 리 없다.
그는 다시 아리엘을 돌아봤다.
‘깨어나면 물어볼 수밖에…….’
* * *
“이걸 보호해 주세요.”
“너희 종족의 모든 것이 들었다면 당연히 네가 보호해야지.”
“종족의 모든 것이 들었기 때문에 부탁하는 거예요. 잘못되면 모든 게 끝나니까요.”
아리엘은 잔뜩 인상을 쓰고 말했다.
술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기 때문이다. 혁련천후는 그녀를 담담히 응시했다. 이럴 땐 결코 시선을 피하는 법이 없는 그녀다.
흐릿했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발하며 그를 똑바로 응시한다. 슬쩍 시선을 피한 혁련천후는 엘프의 돌을 품속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놈을 처치하면 그때 돌려주마.”
“싫어요.”
“……?”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그런 거 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
아리엘의 요염한 입술이 삐죽 움직인다. 혁련천후는 내심 불안한 마음으로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리엘이 잠시 말을 끊고 그를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눈빛은 사양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난, 보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다.”
“쳇!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난, 인간의 나이로 삼백 살은 넘어요!”
혁련천후는 놀랐다.
그는 엘프의 수명이 몇 백 년을 간다는 걸 전혀 몰랐다.
아리엘이 심호흡을 하고는 그윽한 시선으로 혁련천후를 바라보았다. 혁련천후는 여전히 그녀의 그런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전쟁이 끝나면 우릴 당신이 살던 세상으로 데려가 줘요.”
“뭐!”
놀란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순간적으로 아리엘의 얼굴이 크게 확대되더니 입술에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졌다.
쪽!
“저 밥 먹으러 가요!”
손까지 흔든 아리엘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혁련천후는 그대로 목석이 되었다.
* * *
왕국의 성문을 빠져나가면 드넓은 평원이 나온다.
주로 왕국의 기마병들이 훈련을 할 때 이용하는 곳이다.
하지만 오늘은 기마병들이 아닌 육중한 전차들이 평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두두두두…….
전차들이 대지를 울리며 바쁘게 움직였다.
평원의 둔덕에는 북궁천소와 혁련소가 전마에 몸을 싣고 전차들의 움직임을 예리한 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그 옆에 지금까지 전차 부대를 이끌었던 부대장이 둘에게 열심히 설명 중이다.
그들이 선 뒤쪽, 평원의 외곽 지역은 일만에 달하는 기마병들이 별도의 움직임을 보이며 분주하게 평원을 헤집고 다녔고 그 뒤쪽과 또 뒤쪽은 또 다른 기마병들로 가득했다. 모두가 요란과의 전쟁을 대비한 훈련이었는데 홀베른의 주 병력이 모조리 평원에 모인 것이다.
각자 맡은 부대를 별도로 나누어 호흡을 맞추고 담대소천이 전수한 전술, 전략을 숙지하는 훈련이었다.
팔왕이 대부분의 부대장을 맡았으나 그들의 옆엔 기존, 홀베른의 부대장들이 이십사 시간 보필하며 그들을 도왔다. 가장 신경을 쓰는 부대는 전차 부대와 마법 병단이었는데 북궁천소와 혁련소는 다른 이들보다 몇 시간은 더 훈련해야만 했다.
홀베른으로서도 아직 전차 부대를 실전에 투입한 적은 없었다.
얼마 전부터 제작에 들어가 혁련천후가 홀베른에 입성하기 직전에 완성된 탓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평원인 홀베른에겐 가장 최상의 전투 부대가 전차 부대와 기마 병단이다.
특히 전차 부대는 대규모 병력끼리 맞붙는 전면전에서 큰 위용을 떨칠 거라 모두는 자신하고 있었다.
수련은 하루를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러기를 이십여 일이 지났을 때, 홀베른은 본격적인 전시 체제로 돌입했다.
* * *
레이나 공주가 홀베른을 찾은 건 출전을 앞두고 성대한 파티를 벌일 때였다.
전쟁을 앞둔 나라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온한 홀베른의 분위기에 그녀는 무척 놀랐다.
이십만에 달하는 대병력이 평원에 모두 모인 것을 보고 한 번 더 놀랐고 그들이 동시에 술판을 벌인다는 것에 다시 놀랐다.
“어서 오시오.”
“왕을 뵙습니다!”
홀베른 국왕이 레이나 공주를 반갑게 맞았다.
레이나 공주 역시 제국의 황녀라는 신분을 초월해 예의를 다해 홀베른 국왕을 대했다. 홀베른에 파견되었던 헤론 후작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황궁을 비우는 탓에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전날 케이론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직통 포탈이 있는 까닭에 레이나 공주는 수행원 없이 홀로 방문했다.
연소민이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담대소천 등도 고개를 살짝 숙여서 그녀를 맞이했다.
“더욱 멋져지셨군요, 숙부들!”
“공주 역시 더욱 아름다워지셨소.”
레이나 공주는 진심으로 그들이 반가웠다.
조윤이 대표로 그녀에게 덕담을 건넸다. 그때 홀베른 국왕이 그녀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상왕 전하께 먼저 예를 올리셔야 합니다.”
“어머! 이런 결례를…….”
그녀는 재빨리 옷매무새를 고치고는 홀베른 국왕의 뒤를 따랐다. 오거의 가죽을 엮어 만든 커다란 의자에 앉은 혁련천후가 앉은 그대로 그녀를 응시했다.
“반가운 마음에 결례를 범했습니다. 케이론의 황녀 레이나가 상왕을 뵈옵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화답한 혁련천후는 의자를 가리키며 담담하게 말했다.
“초면은 아니군. 앉으시오.”
“그렇습니다. 지난날 케이론에서 뵌 적이…… 그땐 신분을 몰라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녀는 케논 산맥으로 이동할 때 잠시 그들과 함께했던 것을 거론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그저 허름한 영지의 기사 정도로만 여겼지 않았던가.
“그땐 아무것도 아닐 때였으니 개의치 마시오.”
“감사합니다.”
레이나 공주가 자리에 앉는 것을 머뭇거리자 혁련천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불편하면 소민 옆에 앉아도 되오만…….”
“그, 그러겠습니다.”
레이나 공주는 허리를 굽히고는 몸을 돌려 연소민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
헤론 후작을 통해 그가 홀베른의 상왕임을 전해 듣고는 얼마나 놀랐던가. 그런 상태에서 직접 보게 되니 지난날의 느낌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드세요.”
연소민이 직접 뽑은 음료를 그녀에게 건넸다.
“고마워. 잘 지냈지?”
“그럼요. 행복해서 죽을 정도로 잘 지냈어요. 공주님은 무척 바쁘다고 들었는데, 얼굴이 좀 야위셨군요.”
“죽을 맛이야. 하루하루가…….”
“그래도 소문이 자자해요. 국정을 무척 잘 이끈다고 말이에요.”
“소문은 무슨…… 그건 그렇고 헤론 후작 말로는 연인이 생겼다며?”
연소민이 다소 부끄러운 빛을 보인다.
그녀는 옆에 앉은 혁련소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해요? 인사드리지 않고…….”
“혁련솝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레이나라고 해요. 무척 미남이시군요.”
“하하! 하도 그런 말을 많이 들어서…….”
혁련소의 옆구리에 연소민의 손가락이 찌르고 들어왔다. 둘을 바라보는 레이나 공주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걸렸다.
‘부러워…….’
그녀도 스물여섯의 처녀다.
남들처럼 연인도 사귀어 보고, 데이트도 해 보고 싶은 마음이야 어찌 없을까?
하지만 자신은 그럴 시간도, 해서도 안 되는 위치가 아닌가.
가슴 한구석이 아려 왔다.
“공주님도 조만간 좋은 분을 만나셔야죠.”
“아리안이 소개해 주면 생각해 볼게.”
“훗! 좋아요. 제가 멋진 남자를 찾아보죠. 기대하셔도 좋아요.”
그녀들의 대화 도중에 홀베른 국왕이 말을 건네 왔다.
“요란이 국경 근처까지 이동했다고 들었소. 케이론의 차후, 방향을 듣고 싶소.”
음료로 목을 적신 레이나 공주가 대답했다.
“홀베른은 우방국이니 당연히 돕겠습니다. 기병 십만이 일단 일주일 이내로 홀베른에 입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전황에 따라 추가 병력은 언제든지 홀베른을 향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혁련천후가 물었다.
“그곳에 마스터급은 몇이나 되오?”
잠시 몇 명인지 곰곰이 생각하던 레이나 공주가 대답했다.
“서른 명입니다.”
“공주를 포함해서요?”
“그, 그렇습니다.”
레이나 공주는 내심 크게 놀랐다. 혁련천후의 눈동자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내가 마스터라는 건 아무도 모르는데…….’
그건 그녀의 부친인 황제도 모르는 극비 중의 극비였다. 테세우드 공작도 자신의 힘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혁련천후는 그것을 꿰뚫어 보았다.
그녀는 손아귀에 흥건히 스며드는 식은땀을 느꼈다.
그가 다시 물었다.
“도와준다면 흔쾌히 도움을 받겠소. 단, 전반적인 작전에 대한 지휘권은 본인이 갖겠소. 그래 줄 수 있겠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