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4
<귀환무사 374화>
귀환무사 2부
149화
* * *
케이론의 황궁은 칼날 같은 분위기가 곳곳에서 느껴졌다.
정적 간의 깊은 골이 테세우드 공작의 죽음으로 더욱 깊어진 탓에 서로는 노골적으로 상대를 적대시하기에 이르렀는데 아침마다 황제가 치르는 조례도 거르는 자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때문에 황제의 호위병들은 내란 때나 있을 법한 수준으로 늘어난 상태였다.
레이나 공주도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헤론 후작이 한시도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적국과의 전쟁 때보다 더한 경호망이 펼쳐진 것이다.
헤론 후작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레이나 공주의 거처는 새벽으로 넘어가는 깊은 시각임에도 불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탁!
찻잔을 내려놓는 레이나 공주의 하얀 얼굴이 제법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휴…….”
이윽고 짙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황권과 황실을 위협했던 테세우드 공작이 사라지면 모든 게 다 해결될 줄 알았던 그녀였다.
하지만 이건 전혀 예상 밖의 결과로 나타나고 있었다.
구심점을 잃어버리면 흩어질 줄 알았던 정적들이 오히려 더욱 강하게 세를 집결시키고는 반란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오히려 테세우드 공작이 살아 있을 때보다 더한 위기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도대체 뭐가 문젤까? 그가 죽어도 우리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속내는 또 무엇일까?”
그녀는 테세우드를 맹신했던 정적들을 떠올리자 가슴이 돌로 눌러놓은 듯 답답해졌다. 문득 자신은 평생을 이렇게 살 팔자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루라도 근심이 없는 날이 지금껏 얼마나 될까라는 생각에 미치자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미치겠어. 정말…….”
그녀는 벌떡 일어나 창 쪽으로 다가가 문을 활짝 열었다.
황궁 밖으로 보이는 수도의 고요한 모습에 그녀는 잠시 모든 생각을 접고 멍하니 서 있었다.
철그럭! 철그럭!
심야에도 불구하고 대규모로 순찰을 도는 기사들의 창검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자신과 황제의 근위병들이었다. 그녀는 잠시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하루 삼교대로 이어지던 경계 순찰은 테세우드 공작의 죽음이 알려진 이후 매시간 십 분 간격으로 황궁 전체를 돌고 있었다.
레이나 공주는 기사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황권이 약한 탓에 기사들만 고생한다고 여겼다.
“잠 안 자고 뭐해?”
“어멋!”
누군가가 느닷없이 허공에 둥실 뜬 채 창문 앞에 나타났다. 깜짝 놀란 레이나 공주는 루안임을 알아보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후! 얼굴이 엉망이군. 그 작자가 죽었으면 환하게 웃어야 정상이 아닌가?”
“언제 돌아왔어요?”
“조금 전에…….”
“들어오세요.”
루안은 창문을 통해 서슴없이 실내로 들어갔다. 레이나 공주는 밖을 살펴보고는 창문을 닫았다.
“차를 마시고 있었던 모양이군.”
“한잔 드려요?”
“아니, 그냥 술 있으면 한잔 줘. 독하면 더 좋고.”
“잠시만 기다려요. 내려가서 가져올게요.”
“몇 병 가지고 와. 오늘은 컨디션이 좋아서 꽤 들어갈 것 같으니까…….”
루안을 가볍게 홀린 레이나 공주는 일 층 주방으로 내려가 술과 간단한 요리를 들고 올라왔다. 그녀가 잔을 두 개를 가져온 것을 본 루안이 슬쩍 웃었다.
“요즘 자주 술을 마시는군. 그러다 술꾼 되는 것 아냐?”
“술꾼이 되면 복잡한 거 신경 안 써서 좋겠죠. 어떨 땐, 술에 취해서 정신을 놓은 사람들이 부럽기도 해요. 무척…….”
루안의 눈동자가 살짝 빛을 발했다.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말하는군. 테세우드를 따르던 그 작자들 때문인가?”
“창검을 안 들었을 뿐, 반란이나 다름없어요. 테세우드 공작의 권역에서 생활하던 묘한 자들도 신경 쓰이고 말이죠. 느낌이 좋지 않은 자들이에요.”
“본 적이 있나?”
“전에 힐끗…… 아무튼 뭔가 사악한 느낌을 주는 자들이었어요. 당장, 반기를 든 수많은 귀족들과 군부의 장수들보다 그들이 더 꺼림칙한 건 왜일까요?”
거푸 석 잔을 마신 루안은 레이나 공주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무덤덤하게 말을 뱉었다.
“술값으로 놈들은 내가 맡지.”
“위험해요. 혼자선…….”
“후후! 나를 못 믿나?”
레이나 공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루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절대 무너질 것 같지가 않았던 초인들이 무너지고 있어요. 요란의 케이시 공작이 실각하고 테세우드 공작은 목숨을 잃었어요. 더구나 범인은 그 윤곽조차 모르는 상태이니…… 다만, 홀베른의 룻거 후작만이 아직 전면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는 있지만, 기존의 모든 힘의 서열이 몽땅 무너졌단 느낌이에요.”
“그게 내가 테세우드 공작의 권역으로 가는 것과 무슨 상관이지?”
“어디서 또 어떤 강자들이 새롭게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에요. 특히 테세우드 공작은 죽기 직전, 요란과의 전투에서 놀랄 만한 신위를 보였다고 하더군요. 알려졌던 것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말이죠. 난,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려요. 그의 권역에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는 자들, 그들이 그 부분과 관련이 있을 것만 같아서, 그래서 불안해요.”
루안이 피식 웃었다.
“말을 듣고 나니 더 가야겠는걸? 그런 위험한 놈들은 최대한 빨리 제거하는 게 레이나에게 좋은 일 아닌가?”
“루안, 당신이 강하다는 거 알아요. 초인들보다 더 말이죠. 하지만 지금은 초인들 정도는 우습게 여기는 존재들이 출현한 세상이에요. 당장, 아르소에서 함께했던 숙부들만 해도 루안보다 약하지 않아요. 특히 그들이 주공이라 부르던 그 사람…….”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혁련천후를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두려움이 덜컥 솟아났던 까닭이다. 그 모습에 루안이 묘한 빛으로 물었다.
“어떤 놈인데 그러는 거야?”
“그에게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아니, 못했어요. 마치 비어 버린 공간처럼…… 하지만 그 안에 무엇인가가 들어 있다면, 만약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를 이길 존재는 없다는 생각, 아니, 확신이 들어요.”
레이나 공주는 술로 목을 축였다. 루안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지금 레이나 공주는 순간적으로 두려움을 드러냈다.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 두려움을 심어 줄 자가 있었다니, 그는 그게 의문임과 동시에 묘한 질투심마저 생겨났다.
탁!
술잔을 내려놓은 루안은 요리를 씹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다음에 보게 되면 내게 알려 줘. 어떤 놈인지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군.”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그냥 얼굴이나 보러 온 거야. 또 가 봐야지.”
레이나 공주가 굳은 표정으로 루안을 응시했다. 눈빛에 담긴 뜻을 간파한 루안이 씩 웃어 주며 말했다.
“위험하면 알아서 도망칠 테니 염려 놓으라고.”
레이나 공주는 그가 어디로 갈 건지 예상하고 있었다. 당연히 테세우드 공작의 권역이다. 그는 항상 이랬다. 드러내지 않고 은밀했지만 모든 걸 자신을 위해 움직이고 행동했다.
“조심해요.”
“나중에 보자고! 공주! 하하하!”
루안은 창문을 통해 사라졌다. 레이나 공주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루안을 이용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그녀를 괴롭혔다.
테세우드 공작의 권역에 대한 말을 털어놓으면 그가 그곳으로 향할 것을 알면서도 자신은 말하지 않았던가.
“미안해요, 루안…….”
* * *
루안은 테세우드 공작의 권역을 이미 가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의 좌표를 알고 있었다. 텔레포트로 순식간에 이동한 그는 어둠 속에서 커다란 산처럼 웅크린 테세우드 공작의 권역을 바라보았다.
“흠! 뭔가 요상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죽어서까지 사람을 골치 아프게 만드는 인간이었어.”
그는 언제나 자신이 넘쳤다. 그리고 밝았으며 때로는 거칠기도 했다.
지금도 단신으로 호랑이굴로 들어섰으면서도 조금의 두려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평원으로 떨어진 그는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후후! 결계가 더 강화됐군.”
권역의 사방을 두른 결계도 그에겐 아무런 장애가 되질 않았다. 그에겐 강력한 힘만큼이나 특수한 능력이 있다.
인간이 두른 결계로는 그를 잡아내기란 모래사장에서 색이 다른 모래 한 알을 집어내는 것과 같았다. 어둠이 옅어지며 서서히 거대한 건축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곧 있으면 동이 틀 시각임에도 곳곳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는데 창검을 들고 오가는 기사들의 모습이 루안의 눈에 비쳤다.
“그런다고 죽은 놈이 살아서 돌아오나? 바보들…….”
구조물이라곤 작은 수풀이 전부인 평원은 경계병들에게 그대로 노출되기 십상이건만 루안은 그저 여유롭게 걸었다.
그때, 걸어가는 루안의 얼굴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얼굴만이 아니었다. 키도 몸집도 지금보다 훨씬 장대하게 변해 갔다.
“맥마흔! 놈들은 너의 죽음을 모르겠지? 워낙 치열했던 전투였으니까. 미안해. 잠시 너로 살아 볼까 한다. 네가 테세우드와는 꽤 잘 지냈으니까, 이해하라고.”
언젠가 황궁에서 자신과 대화를 나누었던 맥마흔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변신한 루안은 일부러 경계병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멈춰라!”
경계병들이 창과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놀랍게도 뒤쪽에 마법사로 보이는 자도 있었다. 마법사처럼 귀한 존재를 경계 병력에 투입하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내심 씁쓸하게 웃은 루안은 한 손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제1군단 경기병대 소속의 맥마흔 자작이다. 이곳의 책임자를 만나러 왔다.”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을 보여라!”
“이런, 이 부대 마크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지?”
“젠장! 세상에 널린 게 가짜 부대 마크다! 당장 당신이 맥마흔 자작인지 아닌지를 증명하지 못하면 침입자로 간주하겠다.”
루안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눈매가 매섭게 돌아갔다.
“이 새끼들이 감히 기사 주제에 자작에게 이따위 말버릇을 보여? 전쟁터에서 개고생을 하고 왔더니 별거지 같은 새끼들이 다 열 받게 하고 지랄이야! 이봐! 너희들, 부대 소속의 귀족을 모독하면 그 벌이 뭔지 모르나?”
루안은 강하게 나갔다. 그러자 기사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다소 두려운 빛을 보였다. 저런 반응을 보인다면 거의 통과가 된 것이나 다름없다.
“정말 각하의 예하 부대에 계셨습니까?”
“이봐! 넌, 지금 경기병대를 모욕하고 있음을 알라고. 알았어?”
“아, 아닙니다! 워낙 철저한 경계를 하라는 상부의 명이 있었던 터라, 용서하십시오!”
철커덕!
강철로 만들어진 철문이 열렸다.
사나운 눈으로 기사들을 노려본 루안은 안으로 걸으려다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마법사에게 말했다.
“자네가 안내 좀 해야겠어.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있나…….”
자작이라도 마법사에게 함부로 말을 놓을 수는 없다.
하지만 고작 경계 초소에 투입된 마법사라면 무시해도 될 만한 수준이 분명하다고 판단한 루안은 거침없이 마법사를 대했다. 다소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마법사가 느릿느릿 그에게로 다가왔다.
“동작하고는…… 어서 안내해라!”
“따라오시죠.”
“경계들 똑바로 서라.”
“예! 자작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