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9
<귀환무사 369화>
귀환무사 2부
144화
홀베른 국왕은 팔왕의 일곱을 거론했다. 혁련천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는 다른 질문을 했다.
“초인들과 싸워 본 적이 있나?”
“이곳에서만 있었던지라…….”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대와 룻거는 초인들보다 훨씬 강할 것이다.”
“너무 크게 보셨습니다.”
“아니, 그 정도론 부족하지. 적어도 산악의 후예라면 저들만큼은 강해져야 산악의 자존심이 선다. 놈은 누구보다 힘을 숭상했으니까…….”
홀베른 국왕은 혁련천후가 보지 않음에도 경건하게 허리를 숙였다.
“하루라도 잊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생명이 다해 사라지는 그날까지 가슴에 새겨 놓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찬바람이 불어와 둘의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꽃송이처럼 날리던 눈발은 어느새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며 쏟아졌다. 잠시 말없이 먼 곳을 응시하던 혁련천후의 시야에 누군가가 비쳤다.
“헤헤! 여기서 뭐 해?”
카루가였다.
허공에 둥둥 뜬 카루가는 혁련천후가 손으로 어깨를 두드리자 재빨리 그의 어깨로 올라가 앉았다.
“몸은 괜찮으냐?”
“아직 아픈데, 누나가 며칠만 지나면 괜찮다고 그랬어.”
“그래…… 내려갈까?”
“술을 준비할까요?”
“좋지. 소민과 에이미도 부르도록 하지. 칼슨이라는 그 친구도 함께…….”
칼슨은 검술 대회에 참가했던 금발 청년의 이름이었다.
그는 홀베른 국왕이 일부러 신분을 위장하여 참가시킨 인물로서 룻거 후작의 아들이었다. 물론 그도 금발에 벽안으로 변신을 한 관산악의 후예였다.
“어! 다 내려온다!”
카루가가 산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홀베른 국왕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서 그게 보이느냐?”
“헤헤! 사나운 데얀이 얼굴에 멍든 것까지 보이는데?”
“허어……!”
홀베른 국왕은 카루가의 능력에 감탄했다. 아직 그는 카루가의 진정한 모습을 모른다. 그냥 듣기에 화가 나면 전혀 다른 존재로 변신해 무시 못 할 힘을 보인다고만 알고 있었다.
“술상을 더 봐야겠어…….”
“하하! 술은 넘치도록 있습니다. 내려가시지요, 전하!”
잠시 후, 모두는 거나한 술자리를 가졌다.
데얀을 비롯한 케니언 크로우 기사단의 모든 이들은 얼굴에 시퍼런 멍 자국을 달고 있었다. 특히 데얀은 누구보다 큰 것을 달았는데 얼굴 한쪽이 시퍼렇게 물든 모습은 마치 점박이 개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표정만큼은 무척 밝았다.
카루가가 놀리며 웃어도 데얀은 껄껄 웃으며 받아넘겼다. 홀베른 국왕과 룻거 후작은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술자리가 이어지는 내내 모두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 * *
케논 산맥에서의 양 제국 간의 전투는 결국 요란 제국의 참패로 끝났다.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한 요란 제국이 테세우드 공작이 이끄는 케이론 제국에게 황제가 줄행랑을 치는 수모까지 당하면서 대참패를 당했다고 전해지자 대륙의 모든 국가들은 경악했다.
그것은 요란 제국에게 조공을 바치며 근간을 이어 오던 왕국과 공국들의 배신을 불러왔고 또 다른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승전국인 케이론의 왕궁은 예상과는 달리 조용했다. 아니 그 어느 때보다 매서운 기운이 몰아치고 있었다.
제국의 유일한 황녀, 레이나 공주의 거처에는 헤론 후작과 루안이 레이나 공주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심각하게 굳어져 있는 헤론 후작과는 달리 루안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간혹 레이나 공주를 훔쳐보며 눈빛을 반짝일 뿐이었다.
“그들이 틀림없어요.”
“그들이 강한 건 알았습니다만, 그 정도일 줄은…….”
“안타까워요, 정말 안타까워요. 그들을 내 사람으로 진즉에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녀의 안타까워하는 모습에 루안이 끼어들었다.
“그 친구들이 그렇다고 테세우드, 그 늙은이의 편에 선 것은 아니잖아. 그러니 너무 걱정 말라고.”
이들은 지금 대륙에 번져 가는 흑안의 마검사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소문에 그들은 요란 제국의 비밀 전력인 크로우 기사 단원들을 죽였다고 했다. 블랙 오우거도 죽일 만큼 강력한 크로우 기사 단원들이 흑안의 마검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은 통신석을 타고 이미 전 대륙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레이나 공주는 그들이 혁련천후 일행들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전투를 치르고 돌아온 어느 기사는 이렇게 말했다.
“흑발을 바람에 날리며 능선을 오르던 그를 보며 전율에 몸을 떨었습니다.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그 누구도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적도, 아군도 그저 그가 두려워 물러날 뿐이었습니다. 요란의 황제가 그의 검을 피해 도주하는 광경을 목격하고서도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적의 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친구도 아니었으니까요. 그가 만약 우리와 적으로 돌아선다면…….”
다른 기사는 또 이렇게 말했다.
“두 명이 더 있었습니다. 검을 든 자와 창을 든 자, 그들은 몬스터 대군의 한가운데에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걸려드는 모든 것들을 소멸시켜 버리는 파괴와 죽음의 춤을…… 놀란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보았을 때, 그들의 발밑에 요란의 대마법사 율튼이 죽어 있었습니다. 죽이는 광경을 보지는 못했지만 전 순간, 확신했습니다. 그들, 흑안의 마검사들이 대마법사를 죽였다고 말입니다.”
레이나 공주는 자신이 직접 들은 기사들의 증언을 떠올리며 붉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당장 테세우드 공작에게 넘어갈 수도 있는 황권에 대한 걱정만큼이나 그들에 대한 아쉬움은 밤잠을 설칠 만큼 컸다.
“테세우드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텐데……?”
루안이 레이나 공주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당연히 병력을 추슬러서 요란 제국의 본토로 향하겠죠. 다만 그 시가가 다소 늦어지는 점이 의아할 뿐이에요. 돌아오기가 무섭게 곧장 갈 줄 알았는데…….”
“혹시 부상이라도 당한 것은 아닐까?”
“돌아오는 날, 그를 봤어요. 외관상으론 멀쩡하더군요. 모르죠,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지도…….”
“후후! 뭔가 없다면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자가 아니지. 기사들의 말로는 전장에서 예전의 그보다는 훨씬 강력함을 뽐냈다고 하더군. 그게 이상하지 않나? 초인이라 불리는 수준에 오른 자들은 더 이상의 발전은 매우 힘든 법이거든. 특히 단시일엔 거의 불가능하고 말이야. 분명 뭔가를 사용했을 거야.”
루안의 말에 레이나 공주와 헤론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안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가 알아보지. 놈의 지나친 발전은 결국 내게도 좋은 건 아니니까.”
“조심하세요.”
“걱정 마. 누가 나를 어찌할 수 있겠어? 후후! 그건 그렇고 다음 출전 땐, 레이나도 참전할 생각이야?”
“그래야겠죠.”
“후후! 그럼 그땐 나도 불러 줘. 호위기사로 전쟁에 한 번쯤은 참전해 보는 것도 재밌을 거야.”
레이나 공주에게 한쪽 눈을 찡긋거린 루안은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사라지자 헤론 후작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만약, 요란의 본토로 출전하게 된다면 이번엔 우리도 모든 전력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테세우드 공작에게 지금보다 더 확고한 기반을 주게 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그 점을 미리 그에게 알려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할 생각이에요. 테세우드 공작의 기반, 이전에 제국의 존망이 걸린 전쟁이니까요.”
“진정, 마마께서도 참전할 생각이십니까?”
“앉아서 기다리는 건 질색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루안이 같이 가 준다고 했으니까 안전할 거예요.”
“적들의 집중포화를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레이나 공주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적들도 이젠 제가 그다지 영양가가 높다고 생각하진 않을 거예요. 어쩌면 그게 저를 더 안전하게 만들어 주겠죠. 피곤하군요. 그만 자야겠어요.”
“편히 주무십시오.”
헤론 후작이 나가자 레이나 공주는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곧장 침상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고는 이내 잠에 빠졌다.
* * *
대승리를 거둔 테세우드 공작은 자신의 권역에 머무르고 있었다.
여세를 몰아 요란 제국의 본토를 노리자는 주변의 강력한 권고를 그는 모두 물리쳤다. 모두가 그의 그러한 점을 이상하게 여기고 수군거렸지만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황궁이 무색하리만치 거대하고 화려한 테세우드 공작의 권역은 나날이 몰려드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주변 공국의 왕들도 황궁을 찾지 않고 이곳을 찾았다. 어떤 왕들은 공물을 아예 이곳으로 바치기도 했다. 그야말로 테세우드 공작은 케이론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올라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드높은 위세를 자랑했다.
그러나 그 어떤 왕들도 테세우드 공작을 만나 볼 수는 없었다. 전투 이후, 그가 자신의 비밀스러운 거처에서 한 걸음도 나서지 않았던 까닭이다.
뿌연 수증기가 사방을 가득 채운 비밀스러운 공간에 테세우드 공작이 누워 있었다. 수정으로 만들어진 제단처럼 생긴 곳에 등을 대고 누운 그의 육신은 미동조차 없었다. 얼굴 주변은 무수히 많은 빛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숨을 쉴 때마다 오르내리는 빛 덩어리들이 점점 붉은색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에 반해 테세우드 공작의 얼굴빛은 점점 밝아졌다. 내부의 독소들이 모조리 빛 덩어리들에 의해 흡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십 분쯤 흘렀을까? 감겼던 눈이 번쩍 뜨이며 형형한 안광이 뿜어졌다.
“후욱!”
상체를 일으키자 단단한 근육질이 그대로 드러났다. 크게 호흡을 한 테세우드 공작은 제단에서 내려섰다.
“후후후! 확실히 더 강해졌군.”
치르륵!
움켜쥔 주먹이 묘한 빛으로 둘러졌다. 만면에 흡족함을 드러낸 그는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밖에는 대마법사 쉐인과 부상에서 완치된 레이놀드 백작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전을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각하!”
“별일 없었습니까? 공!”
쉐인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허허! 각국의 왕들이 각하를 뵙고자 지금껏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둘러 그들부터 만나 보시지요.”
“그렇습니까? 그럼 오늘 저녁에 모두 만나 볼까요?”
“황실에 소식이 전해지기 전에 만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서두르시지요.”
테세우드 공작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이젠 그 작자 따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조만간 요란의 북부 지역을 손에 넣으면 그땐, 공식적으로 케이론의 황위에 오를 것이오!”
“당연히 그러셔야 합니다! 미리 축하드립니다! 각하!”
레이놀드 백작이 가슴을 쑥 내밀려 소리쳤다. 그의 어깨를 툭 쳐 준 테세우드 공작은 자신의 거처로 걸음을 놓았다.
그의 걸음걸이를 본 쉐인의 눈에 놀람의 기운이 나타났다.
‘전보다 더 강해지셨구나. 초인의 영역을 넘으셨단 말인가…….’
그는 테세우드 공작이 머물렀던 제단을 흘긋 돌아봤다. 그곳엔 자신도 모르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
몸을 씻고 복장을 갈아입은 테세우드 공작이 각국의 왕들과 만찬을 가지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시각은 새벽녘이 되었을 때였다.
옷을 벗고 침상에 몸을 누이려던 테세우드 공작이 흠칫하며 재빨리 입구 쪽으로 몸을 날렸다.
“누구냐!”
그의 오른손에 빛으로 형성된 검이 나타나 있었다.
“후후후! 대단한 경지를 이루었군. 마나로 이루어진 검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