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6
<귀환무사 366화>
귀환무사 2부
141화
카르스는 옆을 흘긋 돌아봤다.
그곳에 자신과 싸우던 인간들이 모두 모여 있었는데, 가장 강인한 느낌을 주었던 흑발을 늘어뜨린 사내가 마침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놈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카르스는 혁련천후를 보며 그렇게 판단했다.
판단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칸빌을 부축해서 일으켰다. 동시에 강력한 기운이 자신들에게로 몰아쳐 들어옴을 느꼈다.
카르스는 그게 누구의 기운인지 보지 않아도 알았다.
“마계로 모시겠습니다!”
스스슥!
콰아앙!
그들이 섰던 곳에 혁련천후의 천살강기가 떨어졌다. 주변이 초토화로 변하며 솟아오른 자욱한 먼지구름이 하늘의 달을 가렸다. 먼지가 가라앉자 주변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혁련천후는 이미 등을 돌리고 아들에게로 걸어가고 있었다.
노렸던 자들이 사라졌음을 이미 깨달은 것이다.
“크아아…….”
“끄어어어!”
몬스터들이 갑자기 울부짖기 시작했다.
여전히 평원을 가득 메운 몬스터들은 갑자기 뒤쪽 숲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요란 제국의 제7강습여단은 잠시 당황한 태도를 보였다.
“추격하지 마라!”
루턴 후작은 몬스터들을 포기했다.
하룻밤을 이어진 전투로 인해 그는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그 지경이라면 다른 기사들은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드디어 참혹한 피의 전투는 막을 내렸다. 평원 위에는 죽은 자들의 주검과 살아남은 요란 제국의 기사들, 그리고 혁련천후 일행뿐이었다.
“각하! 저들을 만나 보시겠습니까?”
부관의 말에 루턴 후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고민했다. 그들 덕분에 몬스터가 물러갔다. 몬스터를 조종하는 데스나이트가 그들 때문에 도주했다고 그는 여겼다.
그러나 그들이 적인지 아군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이 망설이게 만든 이유였다.
“어? 그냥 갑니다! 각하! 명령을 내려 주시면 데려오겠습니다!”
루턴 후작이 부관을 돌아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전부 다 죽일 일이 있느냐? 본토로 돌아간다!”
* * *
아리엘은 홀베른의 왕궁으로 들어서는 초입에 위치한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뭔가를 찾기라도 하듯 두리번거렸다.
“흠! 역시 사람이 많은 곳은 시끄러워.”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본다.
손에 먹음직한 과일을 든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도심의 한복판을 씩씩하게 걸었다.
제국 전쟁이 발발했다고 전 대륙이 초긴장 상태로 빠져들었지만 홀베른은 평상시의 번잡함,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곳곳에 케이론 제국과 요란 제국이 케논 산맥에서 드디어 격돌했다는 전단이 수도 없이 붙어 있었지만 사람들은 식당이나 술집의 개업 전단지쯤으로 여길 뿐이었다.
“훗! 확실히 웃기는 곳이야, 이곳은…….”
아리엘은 그런 홀베른의 국민들을 흥미롭게 여겼다.
사람들 틈을 요리조리 걷던 그녀는 두 갈래로 갈라지는 교차로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허공에 대고 말했다.
“나와!”
미치기라도 한 것일까? 누구에게 한 말일까? 대답도, 나타나지도 않자 그녀는 다시 말했다.
“가인! 네가 온 것을 알고 있으니까 얼른 나와!”
스슥!
“쩝! 역시 네 눈은 속일 수가 없군.”
그녀의 뒤쪽에 가인과 카츄가 모습을 나타냈다. 아리엘이 몸을 돌려 둘을 바라보았다.
“날 데려가려고 온 거야?”
“알면서 왜 물어?”
“당연히 족장님이 시키셨겠지?”
“당근이지.”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가인과는 달리 카츄는 아리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런 카츄를 아리엘은 환하게 웃으며 팔을 벌렸다.
“호호! 카츄! 누나가 보고 싶어서 온 거지? 이리와!”
카츄가 기다렸다는 듯 폴짝 뛰어서 그녀의 품으로 안겼다. 카츄를 번쩍 안아 든 아리엘이 가인을 슬쩍 노려보았다.
“일단은 카츄, 밥부터 먹이고 얘기해. 따라와!”
“킁!”
셋은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걸은 아리엘은 작지만 무척 깔끔한 외관을 자랑하는 건물로 가인을 데리고 들어갔다.
* * *
“오호! 이곳에 이런 곳도 있었네?”
가인이 주변을 둘러보며 눈을 동그랗게 했다.
그들이 들어간 곳은 대륙에서 생산되는 모든 술을 판매하는 술집이었다. 바깥에서와는 달리 내부는 무척 넓고 화려했다.
대낮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는데 카츄가 코를 막으며 인상을 썼다.
“술 냄새…….”
“애한테 참 좋은 교육을 시킨다.”
가인이 비꼬듯 말하자 아리엘은 주먹을 들어 때리는 시늉을 하며 툭 쏘아 댔다.
“모르면 잠자코 계셔!”
“모르긴 개뿔! 여긴 술집이잖아. 많고 많은 식당을 제쳐 두고 하필이면 이런 곳이냐?”
“기다려 봐. 멋진 음식이 나올 거니까. 그런데 우리 카츄는 키가 좀 컸니?”
“응! 한 뼘이나 컸는걸.”
“어이구, 그랬어요.”
아리엘은 카츄를 무척이나 귀여워했다. 카츄도 그녀의 곁에 착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그 모습에 질투가 났는지 가인은 영 표정이 그랬다.
심드렁한 가인을 잠시 바라본 아리엘이 정색을 하고서 말했다.
“난 돌아가지 않아, 가인.”
“족장님의 명령을 어길 셈이냐?”
“그건 아니지. 하지만 당분간은 이곳에 있을 거야. 아니 무조건 이곳에 있어야 해!”
“쳇! 백마를 탄 왕자님이라도 발견한 거냐?”
가인의 심드렁한 반응에 아리엘은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그건 나중에 돌아가서 말해 줄게. 그러니까 식사하고 마을로 돌아가. 곧 있으면 이곳도 전쟁에 휘말릴 수 있으니까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싫다! 난, 족장님께 약속했어. 반드시 널 찾아서 데려 갈 거라고 말이야. 그러니까 혼자선 절대 못 간다!”
카츄가 끼어든다.
“나도 싫어. 아리엘이랑 같이 있을래.”
아리엘이 고운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잠시 말없이 가인을 응시하더니 다시 말했다.
“너, 내 고집 알잖아. 그러니까 포기해.”
가인이 고개를 쑥 내밀며 물었다.
“왜 돌아가지 않겠다는 건지 이유를 말해 봐. 들어 보고 결정하지. 얼른 말해 봐.”
“그건 나중에 말한다니까!”
“그럼 나도 이곳에 남겠다. 너도 내 고집 알지? 그러니까 딴말 마라.”
가인이 팔짱을 하고서 고개를 돌려 버리자 아리엘은 숨을 내쉬며 양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때 점원이 주문한 음식을 가지고 왔다.
점원은 아리엘의 미모를 흘긋거리다가 가인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갔다. 점원의 뒤통수를 째려보던 가인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너, 혹시 남자라고 생긴 거 아니야?”
“글쎄……!”
“글쎄? 오호! 정말인 모양이네? 너, 족장님이 아시면 얼음 굴에서 최소 십 년이야!”
아리엘이 음식을 입에 넣고 씹으며 가인을 노려봤다.
“됐으니까, 밥이나 드셔! 카츄! 많이 먹어!”
“엘프의 돌을 지켜야 할 네가 이렇게 돌아다니니까 족장님을 비롯한 어른들께서 하루를 편하게 주무시질 못하잖아. 그건 알기는 하냐?”
“너도 충분히 강하니까 네가 잘 지켜.”
“말을 말자. 에구, 밥이나 먹자. 카츄! 많이 먹어라.”
결국 가인이 고개를 젓고 말았다.
셋은 잠시 대화를 끊고 식사에 열중했다.
그런 그들을 조용히 바라보는 눈이 있었다. 조명이 어두운 구석진 곳, 그곳에 회색 로브를 뒤집어쓴 인물이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간간이 아리엘을 향하곤 했다.
잔을 내려놓는 그의 손가락에 녹색 구슬이 박힌 반지가 끼워져 있었는데 놀랍게도 반지는 시시각각 다른 색, 다른 빛을 발하고 있었다.
* * *
홀베른 왕궁의 가장 깊숙한 곳.
그곳에 주변이 숲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백색 벽돌을 쌓은 벽에 붉은색이 칠해진 원형의 지붕을 덮은 건물은 요정이 사는 집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좌우를 곱게 늘어선 나무들 사이로 좁게 난 길 위를 누군가가 왔다 갔다 하면서 서성이고 있었다.
“휴…….”
연방 한숨을 푹푹 내쉬는 그는 바로 카루가였다.
머리에 흰 천을 감은 카루가는 어른처럼 뒷짐을 하고서 자꾸만 건물을 흘긋거렸다. 잔뜩 찌푸린 얼굴에 볼록 튀어나온 볼은 뭔가 불만이 가득한 듯했다.
“쳇! 그 안에서 영영 살 거야?”
누구에게 하는 소릴까?
대상은 아마도 벽돌집 안에 있는 것 같았다.
“너 여기서 뭐하냐?”
카루가의 뒤쪽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목소리를 들은 카루가의 고개가 자라처럼 쏙 들어갔다. 왕전이었다.
“오셨어요……?”
“여기서 뭐 하냐니까?”
“그냥, 심심해서…….”
“심심해? 이 콩알만 한 놈아! 누군 땀을 뻘뻘 흘려 가며 개고생인데, 심심해? 이게 머리를 다치더니 완전 맛이 갔네? 너, 그것도 엄살이지?”
카루가가 질색을 하며 대답했다.
“정말 아파요. 피를 얼마나 많이 흘렸는데…….”
“피는 개뿔, 먹물이지. 헛소리 말고 얼른 따라와!”
왕전은 카루가의 목덜미를 잡고는 성큼 걸음을 놓았다. 대롱대롱 매달린 카루가는 끌려가면서도 벽돌집을 돌아보며 울상을 지었다.
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벽돌집의 이 층 창문이 열렸다.
그곳으로 사람의 머리가 쑥 튀어나왔다.
“갔어요?”
“응! 잡혀갔어. 개처럼…….”
“어휴! 말 하고는…….”
“흠! 공기 한번 죽인다!”
눈부신 은발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쓸어가자 관옥 같은 얼굴이 나타났다.
혁련소였다. 그리고 그 옆에 연소민이 행복한 표정으로 함께하고 있었다. 행복이란 단어가 절로 떠오를 만큼 둘의 얼굴은 웃음으로 가득했다.
“너무 좋아요. 시간이 이대로 멈추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만큼…….”
“그게 다 나 때문이지.”
“그래요. 맞아요. 이게 다 잘난 그대 덕분이에요.”
“하하! 그럼, 당연하지!”
연소민이 혁련소를 가볍게 노려봤다.
“그거 알아요?”
“뭘……?”
“무척 뻔뻔하고 능글맞아졌다는 거요.”
“쩝! 그런가? 그래서 싫어?”
“그건 아니고…….”
화사한 햇빛이 둘을 따사롭게 비추었다. 산들바람이 불어 가볍게 흔들린 나무들이 일제히 축복의 노랫소리를 울려댔다.
둘에게 세상은 분홍빛, 그 자체였다. 턱을 괴고 먼 곳을 그윽하게 바라보던 연소민의 눈동자가 갑자기 크게 떠졌다.
“어멋!”
화들짝 놀란 그녀가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혁련소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볼 때, 일 층 길 위에 누군가가 스윽 나타났다.
“좋냐?”
“어! 전왕 숙부!”
“좋으냐고?”
왕전이었다. 그가 왜 또 왔을까? 혁련소는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럼 싫겠습니까?”
“부르신다.”
“누가요? 아버지가요?”
“빨리 오라신다.”
“왜요?”
“나도 몰라. 난 분명히 전했다? 그럼 간다!”
스슥!
왕전이 또 사라졌다. 혁련소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왕전이 사라져 간 방향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뒤에서 연소민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빨리 가 보세요. 부르신다잖아요.”
“왜 부르시지? 아직 부상 중인데…….”
“풋! 부상은 무슨…… 일러바치기 전에 얼른 가 봐요. 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