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무사-351화 (349/425)

# 351

<귀환무사 351화>

귀환무사 2부

126화

제1장 해후

홀베른 국왕은 자신의 거처에서 비단에 적힌 무엇인가를 읽으며 감회 어린 표정을 지었다.

관옥명.

비단엔 고작 이름 석 자만이 적혀 있을 뿐이었는데 그는 그것을 보물처럼 소중하게 다뤘다.

“드디어 이 이름을 사용할 때가 되었구나…….”

그랬다.

관옥명은 홀베른 국왕의 중원식 이름이었다. 관산악의 후예들은 모두 중원식 이름을 별도로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관산악의 유지에 의한 것이었다.

“지금부터 난 관옥명이다. 숙명을 벗어 버리고 선조들의 대지로 향하는 일만이 남았을 뿐이다. 상왕 전하를 도와 내 모든 것을 불태우리라.”

그는 입술을 굳게 물었다.

그때 누군가가 들어왔다.

“왔는가?”

“잠이 오질 않아서 술이라도 한잔 할까 싶어 왔습니다.”

룻거 후작이었다. 그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는 관옥명을 보고도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당연했다. 그들끼리만 함께할 땐 언제나 본연의 모습으로 서로를 대해 왔던 까닭이다. 룻거 후작도 흑발에 흑안의 모습으로 이미 변해 있었다.

탁!

“이건 백 년을 익힌 명줍니다. 마침 오늘이 딱 백 년째가 되는 날이라 특별히 전하께 먼저 드리려고 가져왔지요. 하하!”

“한 병뿐인가?”

관옥명이 술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룻거 후작, 아니, 관상천은 관옥명의 속내를 대번에 꿰뚫고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벌써 그분께 마음을 다 빼앗기신 겁니까?”

“흐흠! 그분께서 술을 좋아하시는 건 자네도 알지 않는가?”

“상왕 전하께 바칠 술은 이미 마법으로 차갑게 얼려 놨습니다. 그것도 세 병씩이나 말입니다, 하하!”

“오! 그랬는가? 하하! 그럼 기분 좋게 마셔 볼까?”

관옥명은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쪼르륵!

모든 술은 첫 잔이 특별하다. 압축되었던 공기가 풀어지며 상쾌한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 잔은 항상 윗사람이 받는다. 관옥명은 주향이 너무나도 향기로움을 풍기자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걸린다.

“하하! 술이 향기로우니 상왕 전하께서 좋아하실 것을 떠올리셨습니까?”

관옥명의 입에 걸린 미소의 의미를 룻거 후작은 정확하게 꿰뚫었다. 관옥명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받았다.

“멋지지 않은가?”

“뭐가 말씀입니까?”

“칠백 년을 이어 온 우리 가문의 숙명과 상왕 전하와의 만남이 말일세. 난, 그분께서 본모습을 드러내실 때 숨이 멎는 줄 알았네. 전설이 전했던 것, 그 이상으로 대단함을 느꼈다네. 드래곤이 살아 있다면 아마 저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그건 저도 그랬습니다. 여왕께서 잠들어 계신 제단을 들어서실 때 뿜어졌던 그 기운은…… 하하!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룻거 후작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자! 한잔 마시세.”

쨍!

둘은 동시에 술잔을 기울였다.

몇 잔을 더 주고받은 뒤에 룻거 후작이 정색을 하고서 말했다.

“요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놈들이 심혈을 기울여 키워 왔던 크로우 기사단, 전원이 케논 산맥으로 움직이고 있음이 포착되었습니다. 이번엔 황제도 함께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뭔가 일을 벌이려는 게 분명합니다.”

“케이론에 도발이라도 할 모양이지.”

“몬스터로 인한 피해가 여전한 상황에서 도발은 무리가 아니겠습니까? 황태자 카르스의 종적이 묘연한 것과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놈이 케논 산맥에서 몬스터 토벌을 감행하던 도중 실종되었다는 풍문이 돌고 있습니다.”

관옥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룻거 후작의 말을 들었다.

“어쩌면 우리에게 좋은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놈들이 빠져나갈 때 고룡 트로이안의 던전을 급습하는 건 어떻습니까?”

룻거 후작이 눈빛을 발하며 말했으나 관옥명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도 우리가 고룡의 심장을 노린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네. 당연히 만반의 대비책을 세워 놓고 움직이겠지. 다만 황제와 크로우 기사단, 전원이 빠져나갔다면 그들을 제외한 전력으로 우리의 기습을 막아 낼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는 것인데…….”

“방심일 수도 있습니다. 워낙 오랜 세월을 서로 대치만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야. 켈베로스! 놈은 절대 작은 것, 하나조차도 간과할 놈이 아니지. 고룡의 심장을 잃어버리면 놈의 야망도 물거품이 되는 것이니 대비책 없이는 그들을 전력에서 이탈시키지는 않을 것이야. 섣불리 뛰어들었다간 낭패를 볼 수도 있다네. 참! 이 부분은 상왕 전하께 알리지 말게나. 잠들어 계신 두 분 때문에 마음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자칫, 소식이 들어가면 당장에 요란으로 달려가실 수도 있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명심하겠습니다.”

술이 떨어졌다.

룻거 후작이 재빨리 달려가 한 병을 더 가져왔다. 이어진 대화에서 둘은 화제를 돌렸다.

“공주께서 무척 좋아하십니다.”

“그렇겠지. 난생처음으로 바깥세상을 구경하게 생겼으니…… 아비로서 그동안 너무 미안했었는데, 참으로 잘된 일이지.”

“사실 저도 흥분되는 건 마찬가집니다. 비밀리에 모든 대륙을 돌아다녔다고는 하지만 떳떳하게 신분을 드러내고 다닐 것을 생각하면 밤잠을 설칠 정돕니다.”

“허허! 그런가? 이 모든 게 상왕 전하를 만난 덕분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너무 좋습니다. 그분들이…….”

둘의 대화는 밤을 모르고 이어졌다.

하늘에 걸린 달이 제 소임을 다하고 떨어질 때가 되어서야 룻거 후작은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 * *

케논 산맥은 날이 갈수록 혹한이 이어지고 있었다.

레이나 공주는 장작불 앞에 앉아 상념에 잠겼다. 아직 케논 산맥의 주둔지에서 머물고 있는 그녀는 테세우드 공작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본대와 합류하지 않고 능선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들을 잡았어야 하는데…….”

그녀는 여전히 담대소천 등을 아쉬워했다.

날이 갈수록 그들에 대한 아쉬움은 커져 갔다. 점점 심해져 가는 테세우드 공작의 전횡은 제국의 인사권에도 미치고 있었다. 주요 인사들은 모조리 그의 측근들로 채워졌는데, 그들이 어제 아침에 요란 제국의 케논 산맥 주둔군을 토벌할 것을 결의했다.

이미 이십만에 달하는 제국군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서 출전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예상대로라면 곧 명령이 떨어질 것으로 보였다.

그녀는 그게 걱정이었다.

“마마!”

헤론 후작이 급히 군막으로 들어서며 그녀를 찾았다.

“무슨 일인가요?”

“출전 명령이 연기되었습니다.”

“예? 정말인가요?”

레이나 공주는 크게 놀랐다. 어쩌면 마음속으로 원하는 것이 그것이었는데, 희박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나자 더 놀랐을 수도 있었다.

“요란 제국의 황제가 직접 이곳으로 움직였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상당한 병력도 함께 오고 있다고 합니다.”

“황제가 직접 말인가요?”

레이나 공주의 얼굴이 대번에 돌처럼 굳어졌다. 출전 명령이 지연되어 전쟁을 비껴가는가 싶었는데, 요란의 황제가 직접 군사를 몰고 이곳으로 온단다. 그럼 부대 간의 전투가 아닌 그야말로 제국 간의 전면전이 벌어질 수도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자들이 왜…….”

“요란의 황태자, 카르스가 몬스터 토벌을 감행하던 도중 실종되었다는 풍문이 돌고 있습니다. 아마 그것 때문에 황제가 직접 움직이는 것으로 보입니다.”

레이나 공주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설마 우리가 관련되었다고 보는 것은 아니겠죠?”

“그건…….”

만약 요란의 황제가 황태자의 실종이 케이론 제국의 소행으로 의심하고 움직이는 것이라면 전쟁 발발은 불을 보듯 훤했다.

“공작은 뭐라고 하던가요?”

“아직은 공식적인 입장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만, 케논 산맥의 수복이 미루어진 점에 대단히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요란의 황제가 직접 움직였다면 사후 방책을 세워 놓아야죠.”

“첩보가 입수된 시기가 불과 몇 시간 전이라 마땅한 대응책을 세우려면 조금 더 시간이 흘러야겠지요. 지금 각 군의 사령관들을 모조리 이곳으로 소집시킨다고 하니, 곧 대응책이 수립될 것으로 보입니다.”

레이나 공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군막을 서성거렸다.

초조함이 가득한 얼굴로 한참을 서성거린 그녀는 헤론 후작을 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즉시 본대로 합류해야겠어요. 서둘러 주세요.”

“공작을 만나려고 그러십니까?”

“그래요. 그가 독단적으로 어떤 대응책을 낼지 몰라서 불안하군요. 최소한 저라도 그의 독단을 살펴야겠어요.”

“알겠습니다. 곧장 이동 준비를 하겠습니다.”

헤론 후작이 군막을 벗어나자 레이나 공주는 서둘러 자신의 물품을 챙겼다. 대충 물품을 챙긴 그녀가 군막을 벗어나려고 할 때 통신석에 불이 들어왔다.

“어딜 가려는 거지?”

귀에 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레이나 공주는 놀란 표정으로 통신석을 돌아봤다. 통신석 안에는 가볍게 미소 짓고 있는 루안의 모습이 있었다.

“루안! 지금 어딘가요?”

“그냥,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고 있지…….”

“이곳으로 빨리 와 줘야겠어요. 서둘러요!”

레이나 공주의 다급함에 루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서두르는 거지?”

“오면 말할게요. 급하니 최대한 빨리 평원에 주둔한 본영으로 오세요. 알았죠?”

“그러지.”

팍!

통신석이 꺼졌다.

레이나 공주의 얼굴에 어렸던 초조함이 다소 가셨다. 루안이라도 곁에 있다면 테세우드 공작의 독단을 조금은 견제할 수 있다. 그도 루안만큼은 함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통신석까지 챙긴 레이나 공주는 빠른 걸음으로 군막을 나섰다.

* * *

두두두두…….

대지가 은은히 울렸다. 수십만의 대군이 질주하는 평원의 하늘은 자욱한 먼지로 가려졌다. 휘황찬란하게 치장된 거대한 마차가 군의 선두에서 깃발을 휘날리며 질주를 하고 있었는데, 마차 주변을 호위하는 시커먼 갑주의 기사들은 아군의 접근조차도 막아 가며 주변을 날카롭게 살피고 있었다.

칼 드베인 막스!

전쟁광으로 소문난 요란 제국의 황제가 그 마차에 타고 있었다.

황금색 갑주에 눈처럼 흰 백발을 뒤로 넘겨 묶고 손엔 역시 황금으로 치장된 황제검을 든 인물이 느긋한 표정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산천에 시선을 던져 놓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막스 황제였다.

핏빛 갑주를 걸치고 어깨엔 거대한 대도를 교차한 인물이 빠르게 마차로 다가왔다. 모든 이들의 접근을 막던 크로우 기사들이 그는 막지 않았다.

그가 바로 크로우 기사단의 단장이었기 때문이다.

보기에도 섬뜩한 눈빛을 지닌 그는 막스 황제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케논 산맥이 한 시간 거리에 접어들었습니다.”

황제, 막스가 그를 돌아봤다. 심유한 눈길은 전쟁광으로 소문난 자의 것으로 보기엔 어려울 정도로 고요함을 담고 있었다.

“평원의 끝에서 군영을 차리겠다. 케논 산맥은 짐과 너희들만 갈 것이다.”

“존명!”

가슴에 손을 얹고 대답한 기사단장이 빠르게 좌측으로 전마를 몰아갔다. 동시에 거대한 뿔 나팔이 일제히 소리를 울리자 질주하던 군마들이 서서히 속도를 늦추었다.

처저적!

짧은 시간에 대군이 멈추었다. 그것만으로도 평소 그들의 훈련양이 어느 정돈지는 쉽게 짐작이 갔다.

“군막을 설치하고 마법사들은 주변에 결계를 설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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