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0
<귀환무사 340화>
귀환무사 2부
115화
* * *
강인한 성정을 지닌 헤론 후작조차도 함부로 덤벼들 생각을 못했다.
붉은 광망이 번뜩이는 눈동자는 지옥의 겁화를 연상시켰고 칙칙한 죽음의 향기가 사방으로 줄기줄기 뻗쳐 나갔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주변 수풀들이 생명을 잃어 갔다.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강인한 헤론 후작도 솟아나는 두려움은 어쩌지 못했다. 그러나 물러설 순 없었다. 레이나 공주를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다.
“마마! 뒤쪽으로 물러나십시오!”
헤론 후작은 레이나 공주의 전면을 막아선 채, 검을 겨누었다. 그러나 괴수는 다른 이들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탐욕으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오직 연소민에게만 고정시켰다.
“흐흐흐!”
섬뜩한 웃음은 기사들에겐 상당한 고통으로 다가왔다. 심장을 자극하는 강력한 마기 때문이다. 강자에 속하는 헤론 후작과 레이나 공주, 그리고 연소민과 요란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귀를 막아 괴수의 웃음을 차단하기에 급급했다.
“다가오지 마라!”
연소민은 검을 뽑아 든 손에 힘을 싣고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의 검에 둘러진 오러는 오히려 괴수의 탐욕을 부추겼다. 그녀보다 더욱 강력한 오러를 품은 헤론 후작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연소민은 그게 의문이었다.
‘왜 나만 노리는 거지?’
화악!
엄청난 열기가 발산되자 모두는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워낙 열기가 뜨거웠던 탓에 마법 방어막이 쳐진 갑주도 소용없었다. 상대적으로 부실한 갑주를 걸친 기사들 중, 몇은 갑주를 벗어서 던져 버렸다.
치이익!
눈 위로 떨어진 갑주에서 수증기가 피어났다. 그만큼 괴수가 발산하는 열기는 엄청났다.
그때였다.
“어머!”
레이나 공주의 입에서 놀란 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의 시선을 쫓았다.
모두는 보았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다섯 개의 점을.
연소민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 것은 선두에서 날아오는 북궁천소의 얼굴을 확인하고서였다. 그녀의 표정을 본 칸빌이 이채를 발하며 고개를 뒤로 돌리려는 찰나, 그의 어깨에 북궁천소의 대도가 작렬했다.
꽝!
“크으으…….”
칸빌의 어깨에서 불꽃이 솟아났다. 그 거대한 육신이 휘청거리더니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주르륵 밀려왔다. 뒤이어 강력한 화염이 칸빌에게 떨어졌다. 엄청난 열기가 사방으로 뻗쳐 나가자 기겁을 한 기사들이 황급히 좌우로 몸을 날렸다. 상당한 거리까지 이동해서 공격을 피한 칸빌의 붉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카루가가 소리쳤다.
“칸빌! 이 나쁜 놈!”
연소민과 모두는 재빨리 왕전 등의 뒤쪽으로 우르르 몰려가 몸을 피했다. 카루가를 본 칸빌의 화염이 크게 출렁거렸다. 놀란 눈동자는 더욱 붉은 화염을 발산하며 크게 흔들렸다.
“카루가! 네놈이 어떻게…….”
“네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어떻게 넘어왔어? 대답해!”
왕전에게 팔을 잡힌 카루가는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며 악에 받힌 소리를 질렀다. 평소였으면 벌써 다른 모습으로 달려들었을 카루가였지만 지금은 그게 불가능했다. 모두가 그의 몸속을 지배하고 있는 왕전의 내력 때문이다.
북궁천소가 성큼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이놈이냐? 네가 말했던 그놈이?”
“맞아! 저놈이야!”
고개를 끄덕인 북궁천소가 칸빌을 보며 씩 웃었다.
“이봐! 불덩어리! 혹시 우리처럼 생긴 아이를 쫓아서 넘어온 거냐?”
“크흐흐! 놀라울 정도로 강한 힘을 지닌 인간이군. 꽤 아팠단 말이야.”
칸빌은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섬뜩하게 웃었다. 더욱 강렬해진 화염으로 인해 주변의 나무들이 불길에 휩싸였다. 열기가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자 기사들은 더욱 뒤쪽으로 물러났다.
헤론 후작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이봐! 당신은 공주를 보호해야지…….”
흑야가 그를 말렸다.
그가 레이나 공주를 도우려는 것을 알았지만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다. 흑야의 눈에도 칸빌은 엄청난 놈이었다. 머뭇거리는 헤론 후작을 보던 연소민이 그의 팔을 끌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후작께서는 저희를 지켜 주세요.”
“알겠네.”
헤론 후작이 물러나자 연소민은 흑야에게 살짝 웃어 주었다. 눈빛으로 대답한 흑야는 느릿하게 칸빌의 옆쪽으로 걸어갔다. 조윤이 우측으로, 왕전은 연소민에게 카루가를 넘기고 이미 북궁천소의 옆에서 대도를 꺼내 든 상태였다.
“대답해, 불덩어리! 누굴 쫓아서 온 거야?”
“흐흐흐! 놈과 비슷한 기운을 지녔군. 네놈들도 그렇다면 이계에서 온 것인가?”
칸빌의 대답에 모두의 얼굴에 또다시 희열이 돌았다. 그가 혁련소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곧 혁련소도 넘어왔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카루가의 말을 믿었지만 칸빌의 대답으로 모두는 확신을 얻었다. 북궁천소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왕전은 이미 대도를 뽑아 들고 손에 침을 뱉고 있었다.
“흐흐흐! 좋아! 이젠 이 세상에서 거칠 게 없게 되었군. 돌아가는 일만 남았으니 힘 좀 써 보자고.”
“좋지!”
우드득!
북궁천소와 왕전의 목이 섬뜩한 소리를 냈다. 그때, 카루가가 소리쳤다.
“조심해야 해! 변신을 하는 놈이야!”
“크흐흐! 마계의 자존심까지 팔아먹은 것이냐? 카루가!”
“흥! 그건 내가 할 소리야! 나쁜 놈아!”
카루가의 팔을 꽉 붙들고 섰던 연소민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주고받던 대화 속에서 그녀는 뭔가를 느꼈다. 그녀의 눈동자가 저절로 카루가에게로 향했다.
칸빌을 잔뜩 노려보며 오만 인상을 다 쓰고 있던 카루가는 그녀의 눈빛을 보고는 흠칫하더니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형이 온 거 같아. 헤! 미안해. 저놈 때문에 말해 주지 못했어.”
“……!”
“확실하지는 않지만 저놈이 왔으면 분명 형도 왔을 거야.”
“그게 저, 정말이야?”
“헤헤! 그럴 거야.”
커다란 눈망울이 대번에 뿌옇게 흐려졌다.
“또 운다.”
* * *
드드드…….
대지가 울렸다.
칸빌의 육신을 두른 화염이 붉은색에서 새파란 청광으로 변해 가며 그의 몸집이 더욱 거대하게 변해 갔다. 시뻘건 눈동자는 지독한 탐욕으로 이글거렸다.
“후후후! 네놈들의 그 요상한 힘이 나, 칸빌에게 궁극의 힘이 되어 줄 것이라 기대한다.”
그때였다.
소리 없이 날아든 시퍼런 검강이 칸빌의 옆구리에 작렬했다. 불꽃이 일며 칸빌의 거대한 육신이 주춤거렸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칸빌의 고개가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곳에 씁쓸한 표정의 흑야가 서 있었다.
흑야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너무 얕봤군.”
제대로 작렬시켰건만 전력을 다하지 않은 탓에 갑주에 흠집을 내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덕분에 손까지 찌르르 울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상대가 어느 정도로 대단한지 여실히 증명되었기에 흑야의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강한 놈이야. 최선을 다 해야겠어…….”
중얼거림은 벗들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칸빌의 눈동자가 시뻘건 화염으로 이글거렸다.
“크흐흐! 인간의 힘으로는 뚫어 낼 수 없는 것이 이 암흑 마갑이다. 네놈들의 힘을 내 것으로 만든 후, 모조리 잿더미로 소멸시켜 주겠다!”
화아악!
엄청난 화염이 사방으로 뻗쳐오르며 지독한 열기를 동반했다. 한참을 떨어졌던 기사들은 또다시 상당한 거리 밖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칸빌을 에워싼 넷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왕전이 그답지 않게 굳은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꽤 거추장스러운 놈이야. 힘껏 싸워야겠어.”
“그래 봤자, 제깟 놈도 칼 맞으면 골로 간다. 먼저 간다!”
북궁천소가 몸을 날리는 것을 시작으로 싸움은 시작되었다. 뒤이어 왕전의 대도와 흑야의 검, 조윤의 창이 칸빌의 육신을 향해 날아들었다.
* * *
깡!
“으악!”
검과 육신이 동시에 두 조각으로 썰어지며 자욱한 피안개를 만들어 냈다.
담대소천의 청룡언월도는 거침이 없었다.
이미 주변은 죽은 자들이 흘린 핏물로 질펀하게 적셔진 상태였다. 그리고 살아남아 숨을 쉬고 있는 자들은 아벨과 다른 하나뿐이었다.
“말하라! 그러면 편안한 죽음을 내려 줄 것이다.”
“닥쳐!”
아벨의 우측에 섰던 크로우 기사 단원이 검과 한 몸이 되어 돌진해 들어왔다. 그 속도와 실린 힘은 그야말로 대단했지만 상대는 투왕 담대소천이다.
“가소로운!”
담대소천의 눈가에 찬 기운이 걸리며 그의 청룡언월도가 지독하게도 푸른 도강을 뿜어냈다.
꽝!
육탄으로 돌진했던 크로우 기사 단원의 육신이 엄청난 속도로 뒤쪽으로 튕겨 날아갔다. 비명조차 없었다. 거목에 ‘쿵’ 하고 부딪힌 기사단원의 육신이 그대로 늘어졌다.
즉사였다.
담대소천의 강렬한 눈동자가 혼자 남은 아벨에게로 향했다.
“무능한 놈이군, 너는…….”
“……!”
“무리를 이끄는 놈이라면 최소한 수하들의 목숨은 지켰어야지.”
아벨은 불신에 가득한 눈으로 담대소천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담대소천이 한 걸음, 한 걸음 아벨에게로 걸어갔다.
아벨은 케논 산맥이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도 마스터에 근접한 강자. 이를 악물고 검에 오러를 품었다.
“함께 죽겠다! 이놈!”
“후후! 그게 가능할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말하면 편안한 죽음은 보장하지.”
“개소리!”
아벨이 섬전처럼 달려들었다.
둘의 육신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를 보이며 한데 어우러졌다. 청룡언월도와 검이 부딪치며 파생된 기운은 주변 숲을 초토화로 만들었다.
죽은 자들의 육신이 갈기갈기 찢어지며 사방으로 흩날렸다. 간혹 모습을 드러냈던 고블린 몇 마리도 어김없이 기운에 휩쓸려 한 줌 핏물로 화해 사라졌다.
담대소천의 노호성이 울렸다.
“합!”
콰광!
강력한 폭발음과 함께 아벨이 뒤쪽으로 튕겨 날아갔다. 바닥을 구른 아벨의 육신이 진득한 핏물을 쏟아 냈지만 담대소천은 그 자리에 우뚝 선 그대로였다.
아벨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있어야 할 오른팔이 없었다. 무인에겐 생명과도 같은 오른팔인데 저만치에서 검을 잡은 채, 펄떡거리고 있었다.
분노도, 팔이 잘린 것에 대한 통증도 없었다.
“이, 이럴 수가…….”
절망.
오직 절망만이 아벨의 뇌리를 잠식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돌아보니 함께했던 수하이자 형제들은 싸늘한 주검으로 곳곳에 피를 뿌린 채, 널브러져 있었다.
아벨은 자신의 앞을 우뚝 선 담대소천을 올려다보았다.
비껴든 거대한 칼은 지금까지도 믿기지 않을 정도의 무지막지한 기운을 두르고서 울음을 토해 내고 있었다. 자신들의 가문이 전설로 경고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왜 수백 년을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아벨은 지금에서야 절실하게 느꼈다.
담대소천의 묵직한 음성이 아벨의 흐려진 정신을 일깨웠다.
“아직,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아벨이 웃었다.
담대소천의 눈가가 실룩거렸다. 지금 아벨의 웃음은 그가 삶을 포기한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 아벨이 고개를 젖히고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담대소천은 묵묵히 그런 아벨을 내려다보았다. 웃음이 그치고 아벨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담대소천을 응시했다.
“크크! 그러지. 무엇이 궁금한지 물어라. 모조리 대답해 주겠다. 그렇다고 네놈이 두려워서, 혹은 내가 살고자 그러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 살아갈 가치가 없어졌으니 모조리 뱉어 주마.”
아벨은 삶을 포기했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 살아난다면 그게 더 죽음보다 못한 상황이 될 것이다. 검을 쥘 오른팔을 잃었다면 차라리 죽은 게 나았다.
“중원이라는 곳을 아는 놈이더냐?”
“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