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5
<귀환무사 335화>
귀환무사 2부
110화
* * *
군막으로 들어서던 왕전이 흠칫했다.
하나같이 침울한 표정들을 하고는 군막에 마련된 침상을 가운데 두고 앉아 있었는데, 침상 위에 연소민이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무슨 일이냐? 쟤가 왜 저래?”
“앉아라.”
“무슨 일이냐니까?”
왕전이 다급하게 다그치자 담대소천이 대답했다.
“조금 전에 갑자기 쓰러졌다.”
“쓰러져? 왜? 멀쩡하던 얘가 왜 갑자기 쓰러진단 말이냐?”
“우리도 영문을 모르겠다.”
연소민의 파리한 안색은 핏기라곤 없었다. 카루가는 그녀가 그냥 잠을 자는 줄로 알았던지 담대소천의 말에 이내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녀를 진찰하던 우드가 난감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죄송합니다. 원인을 알아낼 방도가 없습니다.”
사공진무가 없어서 그나마 약간의 의술을 익힌 그가 다급한 마음에 나서본 것이다. 조윤이 우드에게 물었다.
“마법 치료사들 말고 진료를 할 줄 아는 자들이 있느냐?”
“의사들이 있습니다만 저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보통, 커다란 병은 마법으로 치료하는 것이 수십 년 전부터 횡행했기 때문에 의사들은 간단한 병세를 보는 것에만 이용하는 실정이라…….”
흑야가 요란을 보며 물었다.
“뭐, 아는 작자라도 없나?”
“오래전에 백마법사들의 모임에서 탈퇴한 터라 아는 치료사가 없네요. 미안합니다, 도움이 못 돼서…….”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흑야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대마법사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지! 그 늙은이가 있었군. 이봐! 우드, 가서 공주 좀 데리고 와.”
조윤의 지시에 우드는 빠르게 군막을 나갔다.
잠시 후, 레이나 공주가 헤론 후작과 함께 들어섰다.
“어머! 아리안! 아리안이 왜 이래요?”
들어서기가 무섭게 그녀는 누구보다 놀란 반응을 보였다. 그동안 상당한 정이 들었던 까닭이다. 조윤이 침중한 어조로 설명하자 그녀는 직접 대마법사 쉐인을 데리고 와서 연소민의 상세를 살피게 했다.
우드는 그가 오기 전에 이미 밖으로 도망갔다. 흑마법의 기운을 들킬까 두려웠던 까닭이다.
군막에 들어선 대마법사 쉐인의 얼굴이 다소 구겨졌다.
이들이 레이나 공주가 특별히 아끼는 근위기사들임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들어왔음에도 허리조차 구부리지 않으니 내심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쉐인 공! 친자매처럼 지내는 아리안이에요. 갑작스럽게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고 하니 공께서 좀 봐 주셔야겠어요. 부탁해요.”
“흠! 알겠습니다.”
쉐인은 대뜸 연소민의 손에 자신의 손을 밀착시켰다.
스캔을 통해 그녀의 몸 상태를 살피는 것이다. 모두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쉐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오 분을 지나 십 분이 되어 갈 즈음 쉐인이 손을 뗐다.
“어떤가요?”
“흠! 생소한 증셉니다. 어떤 충격에 의해 몸 안의 마나가 엉망으로 얽혀 있습니다. 생명엔 지장이 없으니 시간이 지나면 곧 깨어날 것입니다. 다만…….”
쉐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끝을 흐렸다.
대뜸 물어보려던 왕전의 어깨를 조윤이 잡았다. 레이나 공주가 다시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이상한 기운이 섞여 있습니다. 마나와는 다른 것인데…… 혹시, 특이한 술법 같은 것을 익힌 적이 있습니까?”
“그건, 나도 몰라요. 그게 위험한 것인가요?”
“그건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마나는 다른 기운과는 융합되지 않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지금보다 더한 상태로 두 개의 기운이 융용되었을 경우 어떤 형태로 변화가 올지는 그때 가 봐야 알 뿐입니다.”
“지금 당장은 별 이상이 없군요?”
“그렇습니다.”
쉐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털었다.
그는 조금은 불쾌한 기색으로 담대소천 등에게 말했다.
“그대들의 오만함은 곧 공주님의 명예에 흠집을 내는 것이니, 앞으로 유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주변에서 말들이 많아. 적어도 상위 귀족들에겐 최대한의 예의는 갖추는 것이 마마를 위한 길임을 명심하게!”
그 말을 끝으로 쉐인은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그가 나가자 밖에 숨었던 우드가 들어왔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이마의 땀을 훔치는 그를 보고는 요란이 피식 웃었다.
조윤이 안심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상한 기운이란 아마도 신교의 마공을 연성할 때 발생하는 마기를 말하는 것이겠군. 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어. 흠! 이거 잠깐이지만 무척 놀랐잖아, 하하!”
“그게 아니면 어쩌지?”
“그게 아니라도 곧 진무가 돌아오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흐흐! 그럼 이제 괜찮은 거냐?”
모두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쉬었다.
사실 연소민은 이제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로 부각되어 있었다. 혁련소의 연인이기보다는 정말 친조카 이상의 정이 모두에게 스며든 까닭이었다. 그 험악하고 사나운 북궁천소와 왕전도 그녀 앞에선 인상조차 찡그리지 않을 정도로 모두는 그녀를 아꼈다.
레이나 공주가 가장 부러워하는 것도 그것이었다. 삭막한 황궁에서만 살아왔던 그녀로서는 이들의 정이 넘치는 교감이 무척 부러웠다.
“부러워요, 정말…….”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헤론 후작의 눈동자에 안타까움이 어린다. 누구보다 그녀의 속내를 잘 이해하는 그였다. 왕전이 레이나 공주를 보며 씩 웃는다. 그는 눈짓으로 헤론 후작을 가리키며 말했다.
“흐흐! 거, 제법 괜찮은 양반이 사시사철 옆에 딱 붙어 있는데 부럽긴…….”
“그런가요? 그럼 저도 행복한 사람인가요?”
“충분히…….”
헤론 후작이 머쓱한 표정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조금은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지은 레이나 공주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곧 토벌이 재개될 것 같아요. 미리 준비들 해 두세요.”
“홀베른에서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소?”
“언제까지 기다릴 순 없어요. 다른 지역의 몬스터들이 합류하기 전에 빨리 끝내는 게 좋겠죠. 그리고 숙부들의 부대 편성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레이놀드 백작은 공국의 기사들과 함께 편성하고자 하더군요. 숙부들 생각은 어때요?”
담대소천이 나섰다.
“우리만 단독으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오?”
“그렇게 되면 지휘망이 너무 분산되어서 곤란하다고 하더군요. 아마 열 개 부대 정도로 나뉠 가능성이 높아요. 물론 군영을 지킬 방어 병력을 제외한 숫자예요.”
“우리가 지휘를 받아야 하는 거요?”
북궁천소의 거친 질문에 레이나 공주는 미소를 머금었다.
“미안해요. 근위기사들은 명령을 받지 않아도 되지만 명령을 내릴 지휘권도 없어요.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면 차라리 높은 작위를 내릴 것을 그랬어요.”
“알았소. 그냥 공주께서 적당한 부대에 편성시켜 주시오. 가급적이면 똑똑한 놈이 이끄는 부대에 넣어 주시오. 답답한 놈은 성질이 나서……!”
“알겠어요. 그럼, 나중에 다시 올게요.”
연소민을 다시 살펴본 레이나 공주는 헤론 후작을 대동하고 군막을 벗어났다. 왕전이 심드렁하게 말을 늘어놓는다.
“짐승을 때려잡는 데 작전이 무슨 필요가 있다고 이 지랄들이냐? 젠장!”
“짐승도 짐승 나름이니까 그렇지.”
“이곳의 짐승들은 지휘관이 있어서 명령을 받고 움직인다더냐? 그냥 보이는 족족 때려잡으면 그만 아니냐! 작전은 개뿔!”
지켜보던 요란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놈들은 지능이 꽤 뛰어납니다. 어쩌면 놈들을 부리는 지휘관이 있을 가능성도 높고 말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이런 일이 또 있었는데, 그땐 인간 세상이 거의 전멸 직전까지 몰렸다고 합니다. 당연히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지요.”
“아주 오래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하하! 제가 재밌는 전설을, 아니, 참혹한 전설을 말씀해 드리지요.”
모두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요란을 쳐다봤다.
물을 한 잔 들이켠 요란은 그때부터 자신이 알고 있는 인간 대 몬스터 간의 십 년 전쟁에 대해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 *
수정으로 만들어진 유리관은 마법 방어막의 보호 아래 세상에서 가장 음기가 강하다는 홀베른 왕궁의 지하 제단에 놓아져 있었다.
수정관은 두 개였다.
주변이 뿌연 수증기로 가득했다. 천연적으로 부패를 막아 주는 음기의 결정체가 수정관의 주변을 떠다니는 모습은 무척이나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수정관 앞에 혁련천후가 서 있었다.
진천도, 사공진무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그만이 홀로 선채 수정관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지독한 슬픔이 그의 전신을 둘렀다.
가볍게 흔들리는 어깨는 수정관을 쓰다듬은 손길까지 전해졌다.
뚝!
수정관 위로 맑은 액체가 떨어졌다.
액체는 수정관 안에서 잠을 자듯 누워 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을 잠시 흐려 놓더니 이내 바닥으로 미끄러져 흘렀다.
아름다웠다.
그 어떤 형용사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여인들은 아름다웠다. 그런 그녀들의 머리맡에는 붉은색 수실이 달린 황금색 구슬과 푸른색 구슬이 놓아져 있었다.
“생일 선물이오.”
“어머, 너무 예뻐요. 고마워요.”
“흥! 나는 없어요?”
“당신은 파란색이 어울려서…….”
“어머! 이게 더 예쁘다! 호호호!”
혁련천후의 귓속으로 여인들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렸다. 뿌옇게 흐려진 눈동자는 하염없이 맑은 액체를 쏟아 냈다.
그의 무릎이 서서히 바닥으로 향했다.
단 한 번도 굽혀 본 적이 없었던 그의 육신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진천과 사공진무는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그런 그들의 앞에는 거대한 도를 쥐고서 두 눈을 부릅뜬 사내가 서 있었다. 치렁치렁한 흑발은 사자의 그것처럼 늘어져 있었고 꽉 다문 입술은 강인한 사내의 의지가 드러나 있었다.
금방이라도 대도를 움직일 것만 같은 사내. 그러나 사내는 수정 벽면에 갇혀 움직이지도, 말을 하지도 못했다.
“산악 형님! 진천입니다! 진천이 여기 있습니다! 형님!”
“형님! 그 안에서 뭣하십니까? 당장 나와서 주공께 인사를 드려야지요! 형님!”
피 눈물을 쏟아 내며 둘은 절규를 토해 냈다.
그런 그들의 뒤에는 홀베른 국왕과 에이미 공주, 그리고 룻거 후작이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수정 벽면의 사내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그 누구도 감당 못할 폭풍의 서막은 이곳, 홀베른의 지하 제단에서 그 막을 올리고 있었다.
* * *
요란 제국의 황태자, 카르스는 텔레포트를 통해 이동해 온 자들을 바라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시커먼 묵빛 갑주를 걸친 그들은 모두 다섯. 하나같이 칙칙한 죽음의 냄새를 발산하고 있었는데, 바로 헤론 후작을 사로잡았던 크로우 기사단의 단원들이었다.
“오느라 수고 많았다. 그대들이 있으니 이젠 블랙 오우거도 두렵지 않군.”
“언제 출전합니까?”
“그대들이 왔으니 당장 가야지 않겠나?”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카르스와는 달리 폭스 후작은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크로우 기사단을 응시했다. 크루즈 백작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