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무사-334화 (332/425)

# 334

<귀환무사 334화>

귀환무사 2부

109화

* * *

“그때, 마계로 들어가셨던 분들 중, 한 분이 돌아오셨네. 우린 바로 그분의 후예들이지.”

홀베른 국왕의 이야기는 두 시간을 이어져 마침내 끝났다.

“다른 분들도 마계를 빠져나왔다고 들었어요. 다만 그분들이 어디로 가셨는지는 선조께서도 모른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우린 지금껏 그분들의 후예를 찾고 있었던 거예요.”

“사정이 있어 이곳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케이론 제국에 흑안의 마검사들이 출현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린 무척이나 흥분했었네. 그들이 그분들의 후예일 거란 생각을 하면서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신세를 원망했었지.”

국왕과 공주는 서로 말을 이어 갔다. 다시 말을 하려던 홀베른 국왕이 흠칫했다.

혁련천후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주공!”

진천과 사공진무 역시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사공진무가 큰 소리로 물었다.

“그분들의 이름을 알고 있소?”

“워낙 오래된 일이라 세월이 흐르면서 본래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네. 하지만 그분들의 초상화는 대대손손 전해져 왔다네.”

“그곳으로 나를 안내해라!”

혁련천후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무엄하다!”

룻거 후작이 소리쳤다.

스슥!

룻거 후작의 목에서 핏물이 튀었다. 혁련천후의 검이 다시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가공할 속도에 아리엘은 혀를 내둘렀다.

“일어서서 나를 그곳으로 안내하란 말이다! 어서!”

혁련천후의 그러한 태도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동자엔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이 떠올라 있었다.

“내가 안내하겠네.”

일어서는 홀베른 국왕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혁련천후의 태도에서 뭔가를 느꼈을까? 앞서 걷는 그의 육신이 휘청거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두가 홀베른 국왕을 쫓아 어디론가 빠르게 걸었다.

가장 뒤쪽에서 걸어가는 아리엘은 혁련천후와 진천, 사공진무 등을 번갈아 응시하며 묘한 눈빛을 발했다.

‘설마 이 정도까지 강력한 힘을 지녔을 줄이야.’

조금 전, 이들은 케논 산맥에서 느꼈던 강력함을 초월한 기운을 순간적으로 발산했었다. 특히 혁련천후는 자신이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엄청났었다.

‘인간이 이런 강력함을 지닐 수도 있는 거야? 그럼 곤란한데…….’

아리엘의 눈동자는 점점 어둡게 가라앉았다.

케논 산맥은 말이 산이지 그 넓이와 길이는 어지간한 왕국의 영토를 능가한다.

두 제국을 가로지르고 세 개의 왕국이 산맥에서 발원된 강을 젖줄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 대륙 최고의 산맥이자 몬스터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그곳이 참혹한 피바람으로 휩싸였다. 제국 전쟁의 전운마저도 소멸시켜 버린 양 제국과 몬스터 간의 처절한 전쟁에 대한 소문은 바람을 타고 대륙 전체로 퍼져 나갔다.

전설 속의 몬스터가 출현했음이 전해지자 세상은 들끓었다.

“성지를 침범한 인간에 대한 드래곤의 복수다!”

“마계의 문이 열리려 하고 있다.”

“드래곤의 유물을 지키려는 가디언과의 전쟁이다.”

온갖 소문과 억측이 난무하기 시작했고, 모험을 즐기는 자들이 대륙 곳곳에서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케이론 제국과 요란 제국에 또 다른 변수로 작용했다.

각각의 제후국들이 제국간의 전쟁 중지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케논 산맥에 전설로 떠돌던 드래곤 아이아스의 레어가 있다고 확신하고는 모든 국가가 공동으로 던전 탐사에 착수하자는 공통의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특정 국가가 단독으로 드래곤의 유물을 차지한다면 대륙 간의 힘의 균형이 깨어진다는 불안감이 모든 제후국들의 공통된 걱정거리였다. 특히 거대 제국인 요란이나 케이론이 드래곤의 유물마저 얻어 간다면 그들은 대대손손 제후국으로 만족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불만이자 걱정이었다.

“전쟁을 중단하고, 케논 산맥의 몬스터 토벌에 모든 제후국들도 참전하게 하라. 얻어진 이익은 참전한 모든 국가가 공평하게 나눈다.”

요란의 제후국과 케이론의 제후국들이 발표한 공동의 성명은 양제국의 몬스터 토벌이 시작되고 고작 열흘 만에 나온 것이었다. 당대의 통신 수단이 얼마나 발전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 그것은 양 제국의 지배자들에게 상당한 골칫거리였다.

제후국들은 발 빠르게 정보를 교환하며 양 제국보다 한발 앞선 움직임을 보였다. 이미 대륙엔 케이론과 요란이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었는지, 죽은 자들의 머릿수까지도 정확하게 퍼져 있었다. 모두가 제후국들이 일부러 정보를 흘린 탓이었다.

드래곤의 레어 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던 양 제국의 황제들은 대륙의 여론이 그렇게 흘러가자 어쩔 수 없이 한시적인 평화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고, 몬스터 토벌도 모든 제후국들이 합류할 때까지 작전을 중지해야만 했다.

최초, 케이론의 침공으로 시작된 케논 산맥의 전운은 엉뚱하게도 인간과 몬스터의 전쟁으로 돌변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뒤늦게 전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칠백 년 전에 벌어졌었던 인간 대 몬스터의 처절했던 십 년 전쟁을…….

* * *

케논 산맥의 정상.

언제나 만년설로 가득했던 이곳에도 폭우는 쏟아졌다. 태초 이래로 이곳에 눈이 아닌 비가 내렸던 적은 단 두 번뿐이었다.

칠백 년 전이 첫 번째였고 지금이 두 번째였다.

쩌저저적!

뇌전이 몰아치자 폭우에 녹아들던 만년설이 거대한 눈사태를 만들어 내며 주변의 모든 것들을 쓸고 내려갔다.

크르르……?

어디선가 괴수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놀랍게도 두 눈만 시뻘겋게 드러난 거대한 아이스 오우거가 하늘을 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인간과 참혹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블랙 오우거들보다 훨씬 거대한 육신을 지닌 그것은 뇌전이 번득일 때마다 낮게 으르렁거렸다.

다른 몬스터들은 없었다. 당연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명체라면 이곳에서 십 분을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는다. 블랙 오우거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는데, 정상의 아이스 오우거는 달랐다. 제법 오랜 시간 전부터 이곳을 지켰건만 시뻘건 불길처럼 일렁거리는 눈동자는 여전히 광포했으며 삶의 윤기로 번득였다.

꽈르릉…….

쩌저저저적!

“크릉!”

아이스 오우거가 깜짝 놀랄 만큼의 강력한 뇌전이 천지간을 울리며 허공에서 강력한 빛의 폭발이 일어났다. 오우거가 거대한 두 팔로 자신의 눈을 가리며 몸을 움츠렸다.

정상을 백색으로 물들인 빛의 폭발은 한동안 이어졌다.

쩌저저정!

공간이 왜곡될 때 발생하는 공명이 울리고 빛 속에서 사람의 팔이 쑥 튀어나왔다. 뒤이어 다른 팔이 나오고 붉은색 가죽으로 만들어진 다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릉…….”

아이스 오우거의 눈에 두려움의 빛이 나타났다.

나지막이 으르렁거리더니 이내 사람처럼 땅에 고개를 박고 허리를 숙였다. 그것은 주인을 기다리는 시종의 모습과도 같았다.

“으랏차!”

청아한 음성과 함께 인간의 형태를 갖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우거의 육신이 더욱 낮게 숙여졌다.

“크르릉…….”

빛이 사라지며 나타난 존재의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인간이었다.

눈처럼 부신 은발에 흑요석처럼 빛나는 검은 눈동자. 어깨엔 황금색 검을 좌우로 교차했으며 전신은 눈동자만큼이나 반짝이는 흑색 갑주를 두르고 있었다.

“네가 나를 마중 나온 모양이구나.”

아이스 오우거의 어깨를 만져 준 그는 허리를 쭉 펴고는 케논 산맥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하! 역시 공기는 인간 세상이 최고야. 그렇지 않냐?”

“크르릉…….”

사납게 쏟아지던 폭우가 뚝 그쳤다.

그리고 이내 하얀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은발 청년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여인의 그것 마냥 상큼한 미소를 머금었다.

“고마웠어! 정말 고마웠다고!”

그는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허공이 울렁거리며 요동쳤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희미한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이스 오우거보다 더욱 거대한 그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눈을 깜박거렸다.

“조심하세요, 주인님!”

굵직한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왔다.

“하하! 너도 조심해. 아마 나 때문에 널 괴롭히는 놈들이 많을 거야. 하지만 넌, 강하니까 충분히 견뎌 낼 거야. 그렇지?”

“그럼요, 주인님! 놈이 어딘가에 숨어 있을 수도 있으니 부디 조심하세요.”

“알았어! 우린 나중에 또 볼 거야. 그럼 나, 간다! 가자!”

은발 청년과 아이스 오우거가 눈 깜짝할 사이에 정상에서 사라졌다. 요동치던 허공도 이내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 * *

지독하게도 쏟아붓던 폭우가 갑자기 뚝 그쳤다.

하지만 이내 폭설이 쏟아지자 케논 산맥에 주둔하고 있던 제국과 왕국, 공국에서 모여든 연합군들은 푸념을 늘어놓았다.

“젠장! 도대체 며칠이 걸리는 거야? 제국에서 텔레포트까지 지원했으면 빨리빨리 올 것이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그러게. 하여튼 욕심들은 많아가지고…….”

“홀베른과 아소보만 오면 곧 토벌이 시작된대.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거다.”

“요란 제국 쪽은 다 모였다더냐?”

“그곳도 아직 몇 곳에서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래. 뭐, 사실 우리야 토벌이 늦을수록 좋은 것 아니냐? 괜히 일찍 출전하면 일찍 죽기밖에 더하겠냐?”

“하긴…….”

제후국들이 아직 다 모이지 않은 까닭에 몬스터 토벌이 미루어지고 있었다. 케이론은 홀베른과 아소보 왕국이 지금껏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각국에서 모여든 기사들로 케이론 제국의 본영은 매우 북적거렸다. 수가 거의 사만에 육박하자 어쩔 수 없이 주변 숲을 쳐 내고 그곳에 임시로 군막과 시설물들을 설치해야만 했다. 다국적군이 모여들자 군율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케이론의 레이놀드 백작이 사령관을 맡고는 있었지만 제후국의 기사들은 그의 명령을 잘 따르지 않았다. 지휘체계가 아직 일원화되지 않은 까닭에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움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 죽어 버리는 기사들도 생겨났다.

때론 국가 간에 집단 패싸움도 발생하곤 했다.

레이놀드 백작이 통솔에 애를 먹고 있을 때, 그런 상황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싸움이 일어나면 더욱 크게 불을 붙이는 재주를 지녔는데, 바로 왕전과 북궁천소였다.

벌써 그들의 부추김에 의해 벌어진 결투는 수십 건을 넘어갔다.

지금도 케이론 제국의 기사와 알베르 공국의 기사가 쌍방 간에 명예를 손상시켰다며 목숨을 건 결투를 펼치고 있었는데, 왕전이 심판을 보고 있었다.

깡! 깡!

“죽여! 오만한 케이론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려!”

“감히, 제국의 기사를 모욕하다니! 목을 잘라 버려!”

양 기사를 응원하는 기사들이 거친 소리를 쏟아 냈다. 한편에선 왕전이 팔짱을 하고서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윽! 졌다!”

케이론의 기사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패배를 시인했다. 견갑 사이에서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운이 없게도 흉갑과 견갑 사이의 미세한 틈새로 찔린 것이다.

“사과해라!”

알베르 공국의 기사가 검으로 목을 겨눈 채, 소리쳤다.

“패배를 시인한 것으로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이 아닌가? 또 무슨 사과를 바라는 거냐?”

“흥! 넌, 우리 알베르 공국의 모든 기사들을 모욕하는 발언을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사과해라!”

패배한 기사가 머뭇거렸다. 그때 주변에서 거친 소리들이 쏟아졌다.

“뭐야? 지금 집단전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알베르 공국!”

“못할 건 또 뭐냐? 지금 당장 붙어 볼까?”

“이런 뭐만 한 자식들이, 너희들 당장 이리 와!”

“뭐야? 이런 개 같은 새끼들이! 죽고 싶어?”

패싸움의 분위기로 이어지자 왕전은 묘한 표정으로 양측의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그가 불을 붙이기만하면 꽤 재밌는 볼거리가 만들어진다. 왕전이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다. 그때, 카루가가 저만치에서 왕전을 불렀다.

“빨리 오래!”

싸움을 붙이려던 왕전이 뒤를 돌아봤다.

“누가?”

“소천 아저씨가 빨리 오랬어!”

소리치는 카루가가 왠지 힘이 없어 보였다. 왕전은 입맛을 다시며 일어섰다. 패싸움만큼 좋은 구경거리는 없다. 조금 있으면 벌어질 그것을 보지 못하게 된 왕전은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고는 빠르게 걸음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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