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3
<귀환무사 333화>
귀환무사 2부
108화
* * *
옥을 깎아서 만든 커다란 원탁에 모두는 모였다.
진귀한 차가 김을 모락모락 피워 내며 실내를 향기로 가득 채웠다. 그러나 모두의 찻잔은 비워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홀베른 국왕만이 찻잔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무거운 정적이 실내를 감돌았다.
탁!
찻잔을 내려놓은 홀베른 국왕이 잠시 모두를 느릿하게 쓸어 보았다. 에이미 공주와 룻거 후작 역시 모두를 담담한 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홀베른 국왕이 입을 열었다.
“말을 돌릴 필요 없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겠네.”
모두는 그를 직시했다.
“이곳에 드래곤, 아이아스의 레어가 있음은 그대들도 알고 있을 것이네.”
뜻밖의 말이 흘러나오자 혁련천후와 둘은 흠칫했다. 자신들의 목적을 알고 있었던 것에 내심, 꽤 놀랐다. 홀베른 국왕의 말이 이어졌다.
“자네가 싸웠던 데얀은 바로 그곳을 지키는 수호신의 하나라네.”
그의 시선이 사공진무를 향했다.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왕의 입을 통해 확답을 듣자 모두는 다소 흥분기를 보였다.
“그곳을 가고자 하는 목적을 알고 싶네. 물론, 그것을 가지고 자네들을 핍박할 생각은 조금도 없음을 미리 말해 두겠네. 말해 줄 수 있겠나?”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자신들이 이계에서 왔노라고 어찌 대답할 수 있겠는가. 에이미 공주가 나섰다.
“당신들이 이 세상의 사람들이 아닌 것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 목적을 말씀해 주세요. 결코 해를 입히지는 않을 테니까…….”
혁련천후의 차가운 시선이 그녀를 향해 돌아갔다.
“어떻게 아셨소?”
대답은 룻거 후작이 대신했다.
“공주께서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셨다. 그 능력으로 그대들의 본모습이 흑안에 흑발임은 진즉에 눈치채셨지. 물론 당신도!”
그는 아리엘을 쳐다보며 말에 힘을 주었다.
여유만만해하던 아리엘이 처음으로 놀라는 빛을 보였다. 룻거 후작의 말에 혁련천후는 아리엘을 응시했다.
‘당신도……?’
아리엘에게 당신이라는 호칭을 했다.
왕국의 기사단장이 일개 검술 대회의 출전자에게 붙일 호칭은 아니었다. 그는 문득 아리엘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에이미 공주가 말을 이어 갔다.
“혹시, 당신들이 온 세상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한 것은 아닌가요?”
“……!”
혁련천후와 진천, 사공진무는 다시 놀랐다. 아리엘이 끼어들었다.
“후후! 난, 아니야. 나를 알고 있다면 당연히 그런 것쯤은 알겠지?”
“물론이에요.”
“대답들 해. 정말 다른 세상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으러 온 거야?”
아리엘이 셋을 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셋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에이미 공주는 잠시 혁련천후를 쳐다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들처럼 흑안에 흑발을 지닌 사람들은 이 세상에도 꽤 많아요. 하지만 당신들이 지닌 그런 종류의 힘을 지닌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해요. 도주한 페펠 자작이란 자도 당신들과 같은 용모에 비슷한 힘을 지녔더군요. 그리고…….”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홀베른 국왕을 돌아본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발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지간해서는 감정의 변화조차 보이지 않는 혁련천후가 두 눈을 부릅뜰 정도였다.
팍!
에이미 공주의 용모가 변했다.
화려했던 금발 대신 칠흑같이 검은 머릿결이 출렁거렸고, 보석처럼 반짝이던 벽안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새카맣게 빛났다. 그녀뿐이 아니었다.
홀베른 국왕도, 룻거 후작도 자신들과 같은 중원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역시 많이 놀라는군요.”
“……!”
“우린 당신들을 기다렸어요. 수백 년 동안을…….”
“우리를 기다렸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감정이 흔들린 혁련천후는 자신도 모르게 중원어로 물었다. 놀랍게도 에이미 공주 역시 중원어로 대답했다.
“신의 계시라고 할까요…….”
진천과 사공진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중원어를 하다니…….”
“누구냐?”
채챙!
둘의 손에 무형의 검이 쥐어졌다. 그러나 홀베른 국왕과 룻거 후작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서 둘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리엘만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혁련천후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중원에서 온 것이냐?”
순간, 주변이 광포한 기운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담담함을 유지하던 홀베른 국왕과 룻거 후작, 그리고 심드렁했던 아리엘의 얼굴이 급변했다.
쩌저정!
대전의 유리창이 모조리 박살이 나며 산산조각으로 흩어졌다. 에이미 공주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지며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어, 어떻게 이런 힘을…….”
“중원에서 온 것이냐고 물었다.”
치르륵!
천살강기로 만들어진 검이 홀베른 국왕의 목에 겨누어졌다. 상상할 수 없는 시간에 그가 그곳에 나타나 있었다. 검을 뽑으려던 룻거 후작을 홀베른 국왕이 제지했다.
광포한 기운에 얼굴 근육이 심하게 뒤틀렸음에도 그는 매우 침착했다. 어느새 적당한 거리 밖으로 벗어나 섰던 아리엘은 고개를 흔들며 혁련천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허허! 모든 걸 말하겠네. 그러니 이 검을 치워 주겠나?”
“충분히 말을 할 상황은 된다고 보는데?”
“흠! 할 말이 참으로 많다네. 검을 목에 꽂고 그럴 순 없지 않은가.”
스슥!
검이 사라졌다.
“수작을 부린다면 이곳을 세상에서 지워 주지.”
제4장 해후
칠백 년 전, 대륙은 일차 대륙전쟁이라 불리는 백 년 전쟁이 발발했다.
당대 최강의 국가라, 자타가 공인하던 케이힐 제국의 세르비언 왕국 침공을 시작으로 발발한 백 년 전쟁은 세 곳의 왕국과 열네 곳의 공국이 멸망하는 것으로 그 끝을 보았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대륙전쟁은 인간의 삶을 참혹한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그 삶이 얼마나 참혹했으면 산 자가 죽은 자를 부러워한다는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였다. 간신히 멸망을 면한 국가들도 방어 병력이 형편없이 약해진 까닭에 몬스터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으며, 몬스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살던 터전을 버리고 대륙의 곳곳으로 흩어졌다.
대륙전쟁의 당사자인 케이힐 제국마저도 간신히 몬스터의 침공을 막아 낼 수 있을 정도로 대륙은 피폐해져 버렸다. 인간 세상이 생겨난 이후로 가장 암울하고 참혹한 시기를 맞은 것이다.
“평화롭게 살아가던 인간을 시기한 신이 저주를 내린 것이다!”
“대륙전쟁은 신의 농간에 의한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신을 저주했다.
결국은 전쟁의 광기에서 유일하게 비껴났었던 신성 국가, 바르잔을 향해 저주의 칼날을 들이밀기에 이르렀고, 오직 신만을 모시며 살아가던 바르잔은 참혹한 저주의 칼날 아래 저항 한 번 못 해 보고서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인간의 광기는 신의 자비를 넘어섰다.
바르잔의 국민이라면 무조건 죽이자는 법령이 대륙의 모든 국가에서 공통으로 합의되었으며 참혹한 인간 사냥이 시작되었다. 바르잔의 국민들은 대륙의 곳곳으로 흩어져 삶을 도모했지만, 그들의 제외한 모든 국가와 국민들이 바르잔의 적이었기에 그들을 숨겨 주고 보호해 줄 곳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었다.
노인들은 세상을 농락한 신의 대리인이라는 명분으로 목이 잘려 나갔으며 여인들은 악마의 자식을 잉태한 죄를 물어 참혹하게 죽어 갔다. 신을 모시는 신전이 세워졌던 홀베른 평원이 죽어 간 수십만의 바르잔 국민들의 시신으로 땅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을 때, 홀베른 평원에 일단의 무리들이 빛과 함께 나타났다.
그들은 이 세상의 사람들과 달랐다. 흑발에 흑안을 지녔으며 하나같이 신에 버금가는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을 이끌던 여왕이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 세상에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있나요?”
사람들은 대답했다.
“이 세상에 마족을 제외하고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여왕이 다시 말했다.
“우리를 마족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세요.”
사람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며 대답했다.
“마족은 마계의 종족들이라 인간이 갈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그곳을 가는 인간들은 다시는 환생이 불가능한 저주의 소멸을 당하게 되니, 우리는 결코 그곳으로 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여왕에게 절을 하고는 뿔뿔이 흩어지며 도망쳤다.
그때, 사람들은 보았다.
절규하는 여왕의 모습을…… 그리고 분노하던 한 노인이 무리를 이끌고 사라지던 광경을…….
몇 년이 흐르자 사라졌던 그들이 다시 홀베른에 나타났다. 전설 속의 존재라는 드래곤의 시신을 끌고 홀베른에 돌아온 그들은 그곳에 성을 세우고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그곳은 언제나 구슬픈 여왕의 울음소리로 가득했으며 분노한 노인의 광포함으로 인해 생명체가 다가갈 수 없는 죽음의 대지가 되어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을 멸망으로 몰아갈 만큼의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라졌던 전설의 몬스터들이 인간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블랙 오우거와 블러드 와이번을 선봉에 세운 몬스터 군단은 겨우 전쟁의 참화를 이겨 내려던 인간 세상을 침공했다.
백 년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십 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인간 대 몬스터의 전쟁은 사람들을 다시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다. 흉포한 몬스터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였으며, 그런 몬스터들을 지배하는 존재는 다름 아닌 마계의 전왕, 발록이었다.
인간 세상에 발록을 막아 낼 존재는 없었다.
유일하게 발록과 상대할 능력을 지닌 대륙의 초인들은 이미 대륙 전쟁 시, 서로의 가슴에 검을 쑤셔 박고 상잔해 버린 뒤였다.
발록은 거침이 없었다. 닥치는 대로 부수고 죽였으며 항복해 오는 인간들마저도 가차 없이 화염으로 불살랐다. 그러나 두 개의 왕국을 멸망시킨 발록은 바르잔의 대평원, 홀베른에서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폭우가 멈추고 하늘에 두 개의 달이 뜨던 어느 날, 성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여왕과 노인을 비롯한 일단의 존재들이 발록을 향해 걸어 나왔다.
여왕이 발록에게 마계에 자신들처럼 생긴 사람들이 있냐고 물었다. 발록은 화염의 채찍을 휘두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들은 실로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마계의 전왕이라는 발록이 그들을 이겨 내지 못했다. 분신과도 같은 화염의 채찍이 두 동강으로 잘리고 뿔이 부러진 다음에야 발록은 마계로 도주했다.
도주하면서 발록은 저주를 퍼부었다.
“마계엔 네놈들과 똑같은 마족들이 있다. 마계로 오라! 늦으면 놈들은 전부 나의 손에 죽을 것이다! 살리고 싶다면, 네가 찾고자 하는 놈들을 보고 싶다면, 마계로 오라!”
그들은 발록을 쫓아 곧장 마계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가자 차원의 문이 닫혀 버렸다. 돌아가지 못한 몬스터들이 대륙의 곳곳으로 흩어지면서 인간과 몬스터간의 전쟁이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