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무사-327화 (325/425)

# 327

<귀환무사 327화>

귀환무사 2부

102화

* * *

연회장은 생각보다 조촐했다.

출전자들을 제외하면 왕과 공주, 그리고 룻거 후작만이 참석했다. 시중을 드는 시종 하나를 제외하면 근위병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왕이 배짱이 있어 보입니다.]

[자신감이겠지.]

[저 룻거라는 작자도 보통이 아닙니다. 저 정도면 헤론 후작은 상대가 안 되겠군요. 이거, 확실히 의심스러운 곳입니다.]

혁련천후는 홀베른 국왕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는 기운을 갈무리할 수준의 고수였다. 룻거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저 정도면 중원에서도 강자로 군림할 정도다. 이 세상에 와서 가장 강한 고수들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저쪽이다.’

혁련천후의 눈동자는 홀베른 국왕의 뒤편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강력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듯, 전신에 가볍게 소름이 돋아날 정도였다.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도대체 이 엄청난 기운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서두르지 마라.]

둘의 전음은 홀베른 국왕이 입을 열면서 멈추었다.

“마음껏 들고 마시게. 오늘은 그대들을 위한 날이니 필요한 것은 뭐든지 말만 하게나.”

“폐하의 성은에 감사드립니다.”

금발의 청년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그 외의 다른 출전자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아마도 그 청년 기사만 홀베른 출신인 듯 보였다. 출전자들의 문호를 적국만 아니라면 모두 개방했기 때문에 혁련천후와 진천처럼 케이론이나 다른 왕국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연회를 시작하기 전에 이 아이를 소개해야겠지. 홀베른 왕국의 꽃이라는 내 딸아일세.”

국왕의 말이 끝나자 공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이미라고 해요.”

그녀는 아주 짤막하게 자신을 소개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얼굴은 한기가 돌았다. 진천의 눈에 흥미로움이 떠올랐다.

[강제로 혼인을 시키는 모양이군요. 표정이 장난이 아닙니다, 하하!]

[잘해 봐라.]

[이러다가 자칫 잘못하면 셋째 주모님을 모실 수도 있습니다, 하하!]

[결승에선 너한테 져 주지.]

[정말입니까?]

[……!]

에이미 공주는 소문대로 아름다웠다. 아리안으로 행동하는 연소민이나 케이론 제국의 레이나 공주와 비교해도 결코 손색이 없어 보였다. 한기가 풀풀 뿜어지는 차가운 표정이 오히려 그녀의 매력을 돋우고 있었다.

‘셋째 부인? 어림도 없지…….’

자신에겐 천하 최강의 말썽꾸러기 아내가 있다.

만약 자신이 세 번째 부인을 데려간다면 아마 세 번째 부인이 될 여인은 온몸으로 그녀의 성질을 받아 내야 할지도 모른다.

문득 그녀가 떠오르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에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시종이 일일이 술잔에 술을 채웠다. 모두의 술잔에 술이 채워지자 홀베른 국왕이 잔을 들었다.

“여러분들 중, 세 명은 홀베른과 운명을 함께할 것이다. 물론 본인이 사양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홀베른에 모든 것을 바치겠다면 홀베른은 그대들을 소중히 대할 것이며 가족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또한 나머지 두 명도 본인이 원한다면 왕실 기사단의 단원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내일, 모두가 최선을 다해 주기 바라며 다치는 자가 없기를 신께 비는 바이다!”

모두가 동시에 잔을 비우는 것을 시작으로 연회는 시작되었다.

* * *

두 개의 달이 세상을 비추는 늦은 밤, 홀베른 왕궁의 좌측에 자리한 울창한 숲속으로 시커먼 그림자가 빠르게 스며들었다.

울창한 숲을 상당한 속도로 달렸음에도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조차 없었다. 한 번 도약으로 상당한 높이의 암벽을 뛰어넘은 그림자는 경계병들이 상주하는 초소 근처에서 질주를 멈췄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눈동자는 섬뜩하게도 붉은 광망이 흘렀다. 주변을 날카롭게 살핀 자가 손짓을 하자 좌우에서 또 다른 그림자들이 유령처럼 모습을 나타냈다.

“저곳입니다!”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다만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라니?”

“그자가 연회장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보고를 받던 인물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커졌다가 가늘어졌다.

“빌어먹을! 일부러 이날을 택했건만…….”

“다음을 노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속전속결로 처리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시간을 끌면 왕궁에 있는 그자의 수하들이 몰려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집니다. 일단, 연회에 참석하신 전주님께도 소식을 전해야겠습니다.”

“젠장!”

분기를 떠올려서 그런 걸까? 모두의 눈동자가 야수의 그것마냥 진한 광망을 쏟아 냈다. 그들이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의 나무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있었다.

사공진무였다.

‘전주! 전주는 중원에서 사용하는 단어, 그렇다면……!’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진천이 느꼈다는 중원의 마도 고수들의 마기가 어쩌면 사실일 가능성이 농후해졌다. 그것은 곧 자신들처럼 이 세상으로 넘어온 중원의 고수들이 더 있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다.

‘전주라는 놈이 연회에 참석했다면…… 그놈이군! 어쩐지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이거, 주공께 알려 드려야 하는데, 어쩌지.’

자신은 시종의 입장이라 왕궁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렇다고 슬쩍 잠입해서 알리자니 그것도 마땅치 않았다. 자칫 들키기라도 한다면 레어를 찾으려고 왕궁에 들어서려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공진무가 잠시 갈등을 하고 있을 때,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의논하던 자들이 어디론가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포기하는 모양이군.’

그랬다.

그들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사공진무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일단은 놈들의 정체를 조금 더 알아보자! 다른 일은 주공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사공진무의 육신이 사라진 자들을 쫓아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사라졌던 자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사공진무는 기운을 죽이고 다시 나무에 몸을 숨겼다.

‘뭐야? 왜 저렇게 허둥대는 거지?’

그랬다.

그들은 마치 누군가에 쫓기는 듯, 허둥대고 있었다. 사공진무의 시선이 그들의 너머로 던져졌다. 순간 어지간해선 놀라지 않는 그가 눈을 부릅떴다.

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달, 그 사이에 사람이 떠 있었다. 아니, 떠 있는 게 아니라 날아오고 있었다. 그 속도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지나가는 주변의 모든 숲이 태풍을 만난 듯 크게 휘청거렸다.

‘엄청나다! 저런 고수가 있었다니…….’

경공으로는 천하제일이라던 사공진무다.

그런 그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흥! 가소로운 것들! 감히 이곳을 침범하고도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지?”

쫓기던 자들의 앞으로 떨어져 내린 존재는 은발에 은색 갑주를 걸치고 새하얀 광채로 둘러싸인 검을 든 미청년이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백색 일색인 그의 주변 공간이 아지랑이가 일듯 일렁거렸다. 어두운 밤임에도 그것이 확연하게 느껴질 정도라면 미청년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되었다.

“길을 잃어서 들어온 것일 뿐, 결코 고의로 숲을 침범한 것은 아니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긴장감이 다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흥! 교활한 놈들! 네놈들이 이곳에 나타날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거짓말을 할 셈이냐? 그리고 나무 위의 너! 너도 내려오는 게 좋을 거야.”

사공진무는 다시 놀랐다.

흑야를 제외하고는 은신과 잠입에 최고봉이라 자부하던 자신이 들킨 것이다. 놀란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중원에서 온 것으로 의심되는 자들도 놀란 눈으로 그가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쩝! 거, 되게 귀가 밝은 친구군.”

사공진무가 사뿐히 땅으로 뛰어내렸다.

어느새 긴장감을 몰아낸 그는 자신을 쳐다보는 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 여유를 보였다.

“너희들 때문에 나까지 들켰으니 알아서들 해.”

“네놈은 다크 남작이라는 놈의 시종!”

“어! 그걸 어떻게 알았지? 오호! 그러고 보니 그 눈알이 시뻘건 놈의 동료였던 모양이구나?”

사공진무는 짐짓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입조심하지 않으면 사지를 잘라 주겠다.”

“지랄! 지금 그럴 입장이 아닌 것 같은데?”

팔짱을 한 사공진무는 전혀 긴장한 모습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의 그런 태도에 은발 미청년의 미간이 슬쩍 구겨졌다. 어이가 없다는 뜻이다.

사공진무는 그런 미청년을 빠르게 살폈다.

‘엄청난 힘을 지녔어. 일부러 발산하는 것 같지가 않은데 저 정도라니…… 젠장! 잘못하면 피 좀 보겠는데.’

한껏 여유를 보였지만 속내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느껴지는 기운만으로도 상대는 강해도 너무 강했다. 자신이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미청년의 붉은 입술이 벌어졌다.

“스스로 죽을 기회를 주겠어. 너희처럼 사악한 놈들의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아! 그러니 어서 죽어!”

사공진무를 포함한 여섯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이봐! 난 그냥 달밤에 바람 쐬러 나왔단 말이야. 그러다가 저 친구들이 작당을 하는 것을 우연히 보았을 뿐인데, 그런데 나보고 죽으라니, 이거 너무한 것 아니냐?”

“이곳을 침범하면 왕이라도 죽어야 한다. 홀베른에 왔으면 홀베른의 법을 미리 배웠어야지. 그러니까, 당연히 너희들은 죽어야 해.”

“참, 이거 웃기는 곳이군. 사람 목숨을 무슨 똥파리쯤으로 여기는 거야, 뭐야? 이봐! 당신들, 왜 가만히 있어? 뭐라 말 좀 해 봐!”

사공진무는 잔뜩 긴장하고 있던 다섯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들은 미청년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그를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사공진무도 그들이 거론했던 자가 미청년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만만치 않아 보이는 그들이 이토록 긴장하는 미청년의 정체가 궁금해서 말을 돌려 본 것이다.

그때였다.

그들을 차갑게 노려보던 미청년의 눈동자가 묘한 빛을 발했다.

“너희들, 흑안을 지녔구나. 그렇다면 마족들이겠군.”

사공진무는 재차 놀랐다. 미청년이 나타나면서부터 놀람의 연속이었다. 설마 자신이 변신을 한 것까지 눈치챌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이거 정말 놀라운 놈이군. 동공 색을 바꾼 것까지 간파하다니…….’

사공진무는 실로 강적을 만났음을 직감했다.

“마족이라면 내가 직접 죽여 주지! 감히 이 신성한 아이아스의 영토에 마족이 들어오다니!”

‘아이아스의 영토? 그렇다면 이곳이 맞긴 맞는 모양이구나!’

사공진무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미청년의 전신이 새하얀 빛으로 둘러지기 시작했다. 주변이 심상치 않은 요동을 보이자 사공진무는 내심 긴장했다.

다른 자들도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붉은 광망이 더욱 짙어진 눈을 보니 싸우기로 작정한 듯 보였다. 그들이 작정하고 기세를 발산하자 주변이 은은한 진동을 울리기 시작했다.

* * *

드드드…….

갑작스럽게 건물이 흔들렸다.

유리잔과 유리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졌다. 홀베른 국왕과 에이미 공주가 자리에서 다급히 일어섰다.

“이게 무슨 일이냐?”

“지진인 듯 합니다!”

룻거 후작은 벌써 둘의 뒤쪽으로 이동해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는 자세를 취했다. 지진이라는 말에 홀베른 국왕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겨났다.

“지금껏 지진이라곤 한 차례도 없었던 이곳에 웬 지진이란 말이냐? 나가서 알아보고 오너라!”

어디서 나타났는지 국왕의 주변을 차단하고 섰던 자들이 유령처럼 밖으로 뛰어나갔다. 출전자들도 술잔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혁련천후는 앉은 자세로 여전히 술잔을 기울였다.

[주공! 지진이 아닙니다. 이건 우리가 느꼈던 기운들 중, 하나와 같은 것입니다!]

[……!]

[놀랍군요. 설마 이 정도의 위력일 줄은…….]

진천의 말대로였다.

다만 가장 강력한 기운은 지금 이 순간도 움직임이 없었다. 술잔을 쥔 혁련천후의 손에 가볍게 힘이 들어갔다.

팍!

술잔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그의 옷을 더럽혔지만 그는 여전히 앉은 자세로 일어서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진천이 그런 그를 보며 의아함을 보였다.

그가 조금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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