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6
<귀환무사 326화>
귀환무사 2부
101화
제1장 마계전사 칸빌
새롭게 배정된 거처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엄청났다.
어지간한 왕국의 왕족들이 기거하는 곳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넓었다. 배치된 시종들과 시녀들의 수만 해도 열 명이 넘었다. 그들은 방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옷이며 신발을 벗는 것까지 수발을 들었다.
물론 사공진무는 예외였다. 오히려 그에게는 노려보기까지 했다.
“오우! 확실히 강자는 어딜 가나 대접을 받는다니까요. 이거 완전히 초호화판입니다! 하하!”
진천이 푹신한 침대에 몸을 던지며 소리쳤다.
“저, 저기 이곳은 이분의 거처인데요?”
기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진천을 쳐다봤다. 대자로 침대에 벌렁 누웠던 진천이 눈을 동그랗게 하고서 기사에게 물었다.
“함께 사용하는 것이 아냐?”
“저기, 검사께서 쓰실 거처는 옆방입니다.”
“옆방?”
“예. 한 분에 방 하나씩을 배정받았습니다. 옆방에서 시종들이 무척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시녀도 있지?”
“열 명이나 있습니다!”
기사가 손가락을 펴 보이며 대답하자 진천은 용수철이 튕기듯 침상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녁에 놀러 오겠습니다!”
바람처럼 사라지는 진천을 보며 사공진무는 배가 쓰렸다.
“너도 가.”
“예?”
“가서 진천의 수발을 들어 주라고.”
“정말입니까?”
“싫은가 보군?”
“저녁에 뵙겠습니다!”
사공진무도 바람처럼 사라졌다. 옅은 미소를 머금은 혁련천후는 시종과 시녀들을 물리고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 욕실부터가 달랐다. 뜨끈하게 데워진 물이 가득 찬 욕조엔 온갖 꽃들이 뿌려져 있었고 최고급 술과 요리들이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후후! 자신들의 사람으로 만들려는 수작인가?”
첨벙!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 마음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꽃들이 발산하는 향기가 후각을 자극했다.
스르르…….
모처럼 느끼는 아늑함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욕조 주변이 뿌연 수증기 같은 기운으로 둘러지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이 뿜어내는 수증기는 아니었다.
천살강기였다.
목욕을 하면서 천살강기를 발산할 이유는 없다. 잠을 자고 싶었다. 무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수면. 요즘 들어 부쩍 꿈을 꾸는 것에 취미를 붙여 가고 있었다.
꿈속에서는 사랑하는 아내들과 아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퐁!
천정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경쾌한 소리를 울릴 때, 그는 비로소 잠이 들었다.
* * *
똑! 똑! 똑!
잠결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잠을 깨기가 싫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되어 버린 아내의 다리에 머리를 대고 잠이 든 꿈이 이대로 지속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점점 선명하게 들려왔다.
동시에 아내들의 영상이 사라지며 눈을 떴다.
“주공!”
진천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그의 목소리가 짜증스러웠다.
“들어와!”
삐그덕!
문이 열리며 진천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한 수증기는 어느 순간 말끔하게 사라졌다.
“주무셨습니까?”
“무슨 일이지?”
“모두 모이라는 전갈입니다. 왕이 직접 온다고 합니다.”
첨벙!
혁련천후가 일어섰다. 전신이 검상으로 가득한 그의 탄탄한 육신이 드러났다. 욕실에 걸린 천으로 하체를 가린 그는 물기를 닦을 생각조차 않고 그대로 욕실을 나섰다. 진천이 뒤를 따르며 말을 이었다.
“우승자와 결혼할 공주도 온답니다. 하하!”
“그게 내가 좋아할 일이냐?”
“아, 예! 제가 좋지요, 하하!”
머쓱한 표정의 진천이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은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영문을 몰라서다.
“어디냐?”
“궁전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밖에 마차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진무는?”
“시종들도 데려가도 된답니다. 벌써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옷을 갈아입은 혁련천후가 진천을 차갑게 응시했다.
“다음부터 잠을 잘 때는 절대 깨우지 말도록!”
“……!”
제2장 홀베른의 왕궁으로
다섯 대의 마차가 일렬로 늘어서서 달렸다.
왕궁까지는 제법 거리가 멀었다. 워낙 도로가 잘 닦인 탓에 마차가 질주하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한 시간 정도를 달리자 거대한 왕궁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요란 제국의 엄청났던 황궁과는 다소 손색이 있었지만 홀베른의 왕궁도 대단한 규모를 자랑했다.
혁련천후는 마차의 창을 통해 바깥 풍경을 내다봤다. 여전히 강력한 기운들이 자신의 오감을 자극했다.
왕궁과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것은 더더욱 극명하게 느껴졌다.
“확실히 엄청난 기운입니다.”
사공진무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기운은 강력했다. 혁련천후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이 아니란 것인가?’
그랬다.
사람이라면 호흡을 할 때, 미세하게나마 변화를 보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느껴지는 기운은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곧 왕궁입니다! 준비하십시오!”
마차를 모는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차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왕궁이 가까워지자 주변을 늘어선 기사들의 수가 점점 많아졌다. 거대한 왕궁의 정문에 이르러 다섯 대의 마차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멈추었다.
“내리시지요.”
네 번째 마차를 타고 온 진천이 재빨리 뒤로 뛰어 와 마차의 문을 열었다. 기사가 뻘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진천은 개의치 않고서 혁련천후가 마차에서 내릴 때까지 문을 잡았다.
다른 마차에서도 출전자들이 내렸다. 먼저 내린 아리엘이 다시 눈을 찡긋거리는 것을 본 진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 새끼, 혹시 변태 아냐?”
“주공이 마음에 드는 모양입니다.”
사공진무는 둘의 매서운 눈길을 받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두 번째 마차에서 내린 인물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흑색 갑주를 걸치고 어깨까지 흑발을 늘어뜨린 기사였다. 혁련천후에게 패했던 붉은색 눈동자를 지녔던 자와 동료로 보이는 인물이었다.
세 번째 마차에서는 금발에 벽안을 지닌 전형적인 대륙의 용모를 지닌 청년이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그에게서 풍겨졌다. 셋, 모두가 혁련천후와 진천을 흘긋거리고는 안내하는 기사의 뒤를 따랐다.
성문의 좌우엔 범상치 않은 기운을 발산하는 기사들이 도열해 있었는데 중앙에 황금색 갑주를 걸친 중년인과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백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출전자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출전자들을 바라보는 여인의 표정이 꽤 차가웠다. 마치 나오기 싫은 자리에 억지로 나온 듯, 그녀는 간혹 짜증스러움을 비추기도 했다.
“표정을 고치거라.”
“억지로 그러지 못함을 아시잖아요.”
“어쩌면 저들이 왕국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 물론 모든 것은 네게 달려 있음이야.”
“딸의 인생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아버지가 놀라울 뿐이에요.”
냉랭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둘은 여전히 걸어오는 출전자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들과 오백 미르 거리에서 출전자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도열한 기사들의 가장 앞쪽에 섰던 인물이 앞으로 나서며 묵직하게 소리쳤다.
“모두 예를 갖추라!”
출전자들을 안내했던 기사가 속삭이듯 말했다.
“국왕 전하이십니다! 모두 예를 갖추십시오!”
처처척!
모두가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오른쪽 손을 가슴에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인사하는 방법을 몰랐던 혁련천후와 진천은 조금 늦게 그들과 행동을 맞추었다. 사공진무는 아예 근처까지 오지도 못했다.
시종들을 적정 거리 안으로 들어서지도 못하게 기사들이 제지했기 때문이다.
“최종 오 인에 든 사람들인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전하! 하나같이 출중한 자들이옵니다!”
“흠!”
여인과 대화를 주고받던 중년인이 놀랍게도 홀베른의 국왕이었다. 그렇다면 여인은 당연히 우승자와 결혼을 한다는 그 공주일 것이다.
“모두들 일어서거라.”
“일어서십시오!”
처척!
출전자들이 모두 일어섰다. 그들을 바라보는 왕의 눈동자엔 흡족함이 묻어났다. 그는 한 사람씩 차례로 쳐다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공주의 눈빛은 여전히 차갑고 매서웠다.
왕의 시선이 혁련천후에게서 멈추었다.
“그대의 작위가 어찌 되는가?”
“남작입니다.”
“케이론에서 왔는가? 복장이 그러한데?”
“다크 영지에서 왔습니다.”
“오호! 다크 영지라면 흑안의 마검사들이 자주 출몰한다는 곳이 아닌가? 그래, 그들을 한 번 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혁련천후는 내심 죽을 맛이었다.
하필이면 자신에게 질문을 쏟아 낼 게 뭔가. 그의 내심을 읽기라도 한 듯 왕은 다른 출전자들을 살폈다. 그러나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단장은 이들을 연회장으로 안내하게.”
왕과 공주가 돌아가자 예의 그 기사가 출전자들 앞으로 걸어 나왔다. 형형한 안광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그가 바로 홀베른의 최강자라는 왕실 기사단장의 단장, 룻거 후작이다. 이미 이십 년 전에 마스터를 넘어섰다고 알려진 그는 대륙의 초인들과 차이가 없다고 알려진 강자임과 동시에 마법까지도 부릴 수 있다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각자 무기를 해지하기 바란다.”
모두가 머뭇거렸다.
그러나 이내 검을 끌러 바닥에 내려놓았다. 무기가 없었던 진천은 몸수색을 당했고 형편없는 철검을 내려놓은 혁련천후는 모두의 의아한 시선을 받았다.
“체술을 익혔나?”
“그렇소.”
룻거 후작이 묻자 혁련천후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에게까지 극존칭을 쓰려니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룻거 후작의 눈이 묘한 빛을 발했다. 잠시 그를 쳐다보더니 등을 돌리고 앞장섰다.
“따라들 오게.”
모두가 룻거 후작을 따라 연회장으로 이동할 때 사공진무는 마차에 기대어 사정없이 얼굴을 구겼다.
“젠장! 이게 뭐냐고?”
“너희들은 나를 따라오너라.”
기사 한 명이 시종들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시종은 그만이 아니었다. 다른 출전자들이 데리고 온 시종들도 있었다.
누군가가 물었다.
“어디로 갑니까?”
“배불리 먹이라는 지시가 있었다. 전하의 은덕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국왕 전하 만세!”
사공진무가 두 팔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심기가 뒤틀렸던 그는 배불리 먹여 준다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까짓것 공짜로 술을 준다면 이것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금방 기분이 풀어진 사공진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기사의 뒤를 따랐다. 다른 시종들도 연신 웃음을 발했으나 단 한 명은 예외였다. 붉은 눈동자를 지녔던 출전자의 시종은 굳은 표정으로 주변을 기웃거렸다.
‘응……?’
사공진무는 그의 얼굴이 지나치게 굳어 있는 것을 보고는 이채를 발했다. 마침 사공진무를 돌아보던 그는 시선이 부딪치자 재빨리 시선을 돌려 버렸다.
‘이상한 놈이네?’
고개를 갸웃거린 사공진무는 이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기사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