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7
<귀환무사 317화>
귀환무사 2부
92화
“그는 천 년 이상을 인간으로 폴리모프해서 살았던 존재였소. 인간을 하등 동물로 여기는 다른 드래곤들과는 달리 아이아스는 인간을 무척 아끼고 사랑했었소. 그래서 직접 도시를 짓고 그곳에 자신의 레어와 던전을 세운 것이오.”
혁련천후의 시선이 화려한 도시의 야경으로 던져졌다.
“저곳이 그가 세운 도시란 말이군?”
“그렇소. 제국에 버금가는 무력을 지닌 곳, 아이아스를 신으로 모시며 살아가는 자들의 왕국, 홀베른이 바로 저곳이오.”
진천이 끼어들었다.
“드래곤의 후예라면 고작 공국에 만족하며 살아가지는 않을 터. 너,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지? 그게 말이 된다고 지금 지껄이는 거냐?”
“믿든 말든 난, 알고 있는 것을 말했을 뿐이오.”
“주공! 그냥 환술로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도무지 믿음이 가질 않는 놈입니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도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았습니까?”
진천은 여전히 보우에게 믿음이 가질 않았다. 첫인상부터가 별로였다.
혁련천후가 없었다면 보우는 벌써 묻는 말에만 대답하는 백치가 되었을 것이다.
혁련천후는 말없이 보우를 쳐다봤다. 보우는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내심 덜컥 겁이 솟아났다.
저절로 진천의 손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이자들은 절대 허풍을 떨 자들이 아니다. 젠장! 진실을 말해 줘도 믿질 않으니…….’
그랬다.
자신이 말한 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물론 세상에서 홀베른 공국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다.
‘그들에게 데려가기 전에 내가 죽을 수도 있겠어.’
제국의 황제나 왕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을 이들에게 쉽게 알려 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믿을 만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곳까지만 데려가면 이들 정도는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거란 확신도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자신이 해를 당하면 말짱 도루묵이 된다.
“거짓말이 아니오. 내가 속였다면 내 목을 걸겠소.”
“그런 지저분한 목 따윈 관심 없거든!”
치르륵!
진천의 손에 떠오른 기운이 섬뜩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조금은 과장된 행동이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한 보우의 얼굴엔 초조함이 어린다.
진천이 보우에게 다가서며 짐짓 음흉하게 말했다.
“죽지는 않는다. 아프지도 않고, 대신 넌 죽을 때까지 그저 묻는 말에만 대답하는 멍청이가 될 뿐이야.”
“저, 정말이란 말이오!”
보우는 뒷걸음을 치며 혁련천후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혁련천후는 쳐다만 볼 뿐 아무런 행동도, 말도 하지 않았다.
“까불면 더 심한 것으로 할 거야! 그러니 고분고분하게 말 들어, 인마!”
“이 사람 좀 말려 주시오! 모든 게 사실이란 말이오!”
보우는 기어코 혁련천후의 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진천은 그제야 피식 웃고는 손을 두른 기운을 풀었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보우는 다리가 후들거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 * *
흑야와 조윤이 아르소에 도착했을 땐, 이미 전투가 끝난 뒤였다.
함께 온 써튼이 담대소천 등을 찾기 위해 기사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아리안의 성으로 돌아간 그들이 있을 리가 없었다.
“영주님의 성으로 돌아가셨답니다.”
“빨리도 갔군. 우리도 그곳으로 가 봐야지?”
조윤과 흑야는 말 머리를 북쪽으로 돌렸다. 그때 죽은 자들을 수습하던 가투소가 그들을 발견하고는 뛰어왔다.
“오셨습니까?”
“오랜만이군. 이겼다고?”
“하하! 모두가 그분들 덕분입니다. 아! 저리 가셔서 술이라도 한잔하시지요.”
조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죽은 동료들의 시신을 옆에 두고도 술이 넘어가는가 보군. 우린 일없다.”
가투소는 머쓱한 표정으로 써튼을 돌아봤다.
“하하! 이분들을 모시고 영주님의 성으로 가야겠네.”
“아, 예! 나중에 성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가투소가 머리를 숙일 때, 조윤과 흑야는 벌써 저만치 말을 몰아가고 있었다. 그런 둘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인물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이곳에 왜 저런 강한 놈들이 득실거리는 거야?’
루안이었다.
그는 멀어져 가는 조윤과 흑야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신과 격돌했던 담대소천과 비슷한 분위기를 그들이 발산하고 있었다.
“뭘 그리 유심히 보세요?”
“저놈들…….”
루안이 쳐다보는 곳으로 레이나 공주의 고개가 돌아갔다.
“저 사람들이 왜요?”
“기분 나쁜 놈들이야. 아까 그놈들처럼…….”
레이나 공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미 상당한 거리 밖을 걸어가는 그들을 그녀는 몰라봤다.
무심결에 루안을 응시하던 레이나 공주은 흠칫했다.
‘긴장?’
루안이 긴장하고 있었다.
그는 테세우드 공작 앞에서도 긴장하지 않는다.
조윤은 담대소천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놀랍군. 네가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정도의 강자가 있었단 말이냐?”
“묘한 놈이더군. 격돌할 때, 놈의 눈동자는 인간의 그것과는 달랐어. 그런 눈빛은 중원에서도 보지 못했던 것인데…….”
담대소천의 얼굴은 꽤 굳어 있었다. 왕전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끼어들었다.
“워낙 요상한 무공들이 많은 곳이라 그럴 꺼다. 제대로 붙으면 설마 네놈이 지겠냐?”
“혹시 초인이라는 그놈들 중, 하나가 아닐까?”
북궁천소의 말에 연소민이 대답했다.
“초인들 중에 그렇게 젊은 사람은 없어요. 놀랍군요. 전, 그냥 담대 숙부께서 봐주신 줄 알았는데, 그가 그토록 강했다니…….”
그들은 다름 아닌 루안에 대해서 말을 나누는 중이다.
결코 자신들의 아래가 아니라는 담대소천의 말 때문에 모두들 놀라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반가운 얼굴들이 들어섰다.
“헤헤! 여기서 뭐 해?”
카루가였다.
뒤이어 우드가 들어섰다. 모두의 얼굴이 반색으로 바뀌었다. 그들이 왔다면 혁련천후도 왔다는 것을 뜻한다.
“주공은 어디 계시냐?”
“우리 먼저 왔어. 다크에 갔는데 여기로 갔다고 해서 날아왔지.”
“그럼 주공께선 돌아오지 않으셨단 말이냐?”
우드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저희들 먼저 돌아가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해결되는 대로 곧 돌아오신답니다.”
조윤이 물었다.
“그 사냥꾼을 찾긴 했느냐?”
“그가 있는 곳으로 떠나시는 것만 보고 돌아왔습니다. 장소를 아셨으니 지금쯤이면 찾으셨을 겁니다.”
왕전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너희들을 먼저 보내셨지? 시간이 걸린다고 판단하셨나?”
“있어 봤자 도움이 안 되니 그러셨겠지.”
북궁천소의 노골적인 말에 우드와 카루가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연소민이 카루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빙그레 웃었다.
“배고프지?”
“응!”
“우드 님도 가요. 시장하실 텐데…….”
연소민이 둘을 데리고 나갔다.
“드래곤의 레어가 정말 있기는 한 걸까? 있다고 해도 들어 보니 놈들은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던데, 유물을 얻는다고 해석이 가능하겠냐?”
“그거야 모르지.”
“차라리 대마법사라는 놈들을 하나하나 찾아가서 납치를 하든가 족쳐서 알아내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북궁천소가 그다운 방법을 꺼냈다. 왕전도 동의하는 눈치다.
“그들이 방법을 알고만 있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다만 확신할 수 없지 않느냐. 괜히 벌집을 건드려 소란만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 각 나라에서 그들은 거의 보배처럼 다루지 않느냐? 괜히 잘못 건드렸다간 나라 전체가 우리를 잡으려고 들 거다.”
“흠! 그렇겠군.”
그때, 카루가와 우드를 데리고 나갔던 연소민이 다시 들어왔다.
“공주께서 좀 보자세요.”
“왜?”
“훗! 글쎄요.”
퉁명스럽게 반문하는 그들에게 연소민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전투는 끝났지만 여파는 살아남은 자들을 슬픔 속에 가두었다.
죽은 기사들의 가족들은 시신을 끌어안고 오열했다. 부상당한 기사들은 고통에 몸부림쳤고 행방조차 묘연한 기사들의 가족들은 불안한 가슴을 부여안고 곳곳을 오가며 그들의 행방을 물었다.
“대장! 삼십여 구의 시신이 더 발견됐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가투소의 얼굴은 참담하게 구겨졌다. 승전에 대한 기쁨도 잠시, 사망자와 부상자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생각보다 많은 자들이 죽었다.
완치 불능의 중상자들도 예상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들 중, 반수 이상이 이글스 여단의 기사들이었다. 가투소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직 북부 여단의 소식은?”
“아직 받은 것이 없습니다.”
“젠장! 반나절이면 올 거리를 하루가 지났는데도 오지 않다니…….”
“혹시, 전투가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간 것은 아닐까요?”
“군이 무슨 애들 장난이야? 쓸데없는 소릴랑 집어치우고 다시 통신을 보내! 부상자들이 많으니 마법 병단을 빨리 보내 달라고 독촉해 봐!”
가투소의 과격한 명령에 기사는 황급히 통신실로 뛰어갔다.
답답한 마음에 가투소는 바람이 부는 성곽으로 올라섰다. 눈앞에 펼쳐진 평원은 죽은 요란 제국의 기사들이 흘린 피로 붉은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독한 놈들! 시신을 수습하러 오지도 않다니…….”
전투가 끝나면 죽은 시신을 수습하는 것은 대륙의 관례다. 비록 적이라도 시신을 수습하는 동안에는 절대 공격을 가하지 않는다.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요란 제국 측에서는 시신을 수습하러 오겠다는 연락조차 없었다.
“그분들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이곳은…… 젠장!”
가투소는 치를 떨었다.
담대소천 등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이곳에서 평원을 바라보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루안에게 죽은 적의 수장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승리한 것이 믿기지 않는 그였다.
십분지 일의 병력으로 승전한 경우는 역사에 없는 대단한 일이었다. 그것도 대륙에 소문난 마스터나 초인도 없이 이루어 낸 성과였으니 흥분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확전으로 이어지지나 않았으면 좋겠군.”
그것이 불안했다.
아르소에서의 전투를 빌미로 양 제국 간의 전면전으로 확전되지 않을까 불안했다. 잔뜩 미간에 주름을 잡고서 평원을 바라보던 가투소의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응?! 누구지?”
평원이 이어지는 둔덕 부근에 사람의 모습이 잡혔다.
제법 멀었기에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의아한 빛으로 바라보던 가투소가 어느 순간, 눈을 부릅떴다.
분명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 속도가 실로 엄청났던 까닭이다. 순식간에 얼굴의 윤곽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하자 가투소의 두 눈이 한없이 커졌다.
* * *
“지독하군. 요란 제국이 이곳까지 넘본 모양이군.”
마법사 요란은 주변을 둘러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곳곳에 널린 시신들은 벌써 부패를 시작했는지 고약한 악취를 풍겨 내고 있었다.
“하필이면 나라 이름을 요란으로 지어 가지고…….”
우연하게도 요란 제국과 자신의 이름이 같았다. 요란 제국의 언어로 요란은 영원불멸의 불사신을 뜻한다. 물론 자신의 이름은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응! 기산가?”
요란은 성곽 위의 가투소를 발견했다.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에게 장난 삼아 손을 흔들어 준 그는 성곽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가투소는 더 이상 놀라지도 않았다.
요란이 마법사임을 알아본 것이다. 그는 전형적인 마법사들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시오? 아르소의 기사시오?”
“그런 건 아닙니다만, 제국에서 오신 마법사이십니까?”
“나도 그런 건 아니오만…… 흠! 전쟁이라도 치르신 모양이오? 저기 저, 죽은 자들은 요란 제국의 기사들로 보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