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3
<귀환무사 313화>
귀환무사 2부
88화
맥슨의 고함 소리에 기사들과 병사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빌어먹을 새끼들! 케논 산맥에 이어 아르소까지 넘보다니…….”
맥슨은 이를 갈며 활을 잡았다.
타고난 힘이 장사인 그는 성인 남자의 키만 한 활을 들어 선두에서 질주해 들어오는 적의 수장을 조준했다.
퉁!
맥슨이 쏜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명중된다면 몇 미르는 날아가서 떨어져야 할 정도로 강력함이 담겨 있었지만 적의 수장은 소문난 강자인 베린스 공작이다.
가벼운 고갯짓만으로 그는 화살을 피해 내고는 검을 뽑아 들었다.
“마법사들은 성곽 위의 적을 섬멸하라!”
베린스 공작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법 병단이 앞으로 나서며 일제히 장거리 공격을 준비했다. 대응할 마법 병단이 없다면 알면서도 막지 못하는 것이 마법 공격이다.
파이어에로우가 허공을 가득 덮으며 성곽을 향해 날아갔다.
“피해라! 파이어에로우다!”
콰과광!
순식간에 성곽 위는 불바다로 변했다.
전신이 불꽃으로 휩싸인 병사들이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떨어져 꿈틀거리는 병사들의 육신은 전마들의 발굽에 의해 산산이 찢어졌다.
촤르륵!
“으아악!”
성곽을 타고 질주하던 요란 제국의 기마병들에게 펄펄 끓는 기름이 쏟아졌다.
실드를 쳐야 할 마법사들이 미처 마나를 배열하기 전에 받은 공격이라 수십 기에 달하는 기마병들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쾅!
성문에 불꽃이 작렬했다.
그 단단해 보이던 성문이 한 번의 공격에 산산조각으로 박살이 나 버렸다.
마법사들의 가공할 위력에 아르소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일제히 성안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부셔진 성문을 통해 베린스 공작의 기마 병단이 들이닥쳤다.
“남자로 보이는 자들은 모조리 죽여라!”
시원한 바람이 부는 연무장의 외곽 숲에서 느긋하게 술잔을 기울이던 왕전과 북궁천소, 담대소천은 허겁지겁 뛰어 오는 연소민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전쟁이라도 났냐? 왜 그리 허둥대는 거지?”
“큰일 났어요. 요란의 기마 병단이 북문을 부수고 진입했다고 해요. 숙부들께서 도와주셔야겠어요!”
셋이 서로를 응시했다. 놀라거나 하는 표정은 절대 아니었다.
담대소천이 물었다.
“병력은?”
“기마병만 일만에 이른다고 하는군요. 북부 여단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그들이 오기까지는 이틀이 걸릴 텐데…….”
“하루 거리라고 들었는데?”
“상급 부대에 보고하고 출전 명령이 떨어지는 것까지 포함해서예요.”
“적이 쳐들어왔는데 뭐가 그리 복잡해.”
담대소천이 술잔을 치우고 일어섰다.
왕전과 북궁천소는 잔뜩 인상을 쓰고서 남은 술을 허겁지겁 마셔 버리고는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그때, 연무장의 우측에서 먼지가 일어나며 전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투소와 그의 기사들이었다.
가투소의 옆에는 놀랍게도 갑주를 차려입은 레이나 공주가 함께하고 있었다.
빠르게 그들의 앞까지 달려온 기사들은 레이나 공주가 손을 들자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함께 갈 거죠?”
레이나 공주가 담대소천을 보며 눈을 반짝거렸다.
담대소천이 왕전과 북궁천소를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좋냐? 자식아!”
“우린 네놈처럼 허접한 놈들의 패싸움 따윈 질색인데 말이야. 어쩌랴? 도와주랴?”
담대소천에게 불퉁거린 왕전이 연소민을 보며 당연한 걸 물었다.
“말을 준비하겠어요.”
“튼튼한 놈으로 골라 오너라. 그리고 기왕이면 그 톱날처럼 생긴 칼도 몇 자루 가져다주면 좋겠는데. 그럴 써 보고 싶거든…….”
북궁천소의 말에 연소민은 웃음으로 대답하고는 빠르게 자신의 전마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잠시 후, 전마 세 필과 소드 브레이커 두 자루를 쥐고 연소민이 아르소의 정예라 할 수 있는 기사들과 함께 돌아왔다.
소드 브레이커를 받아 쥔 왕전과 북궁천소가 장난감을 받은 아이처럼 히죽 웃었다.
레이나 공주가 전마의 방향을 북쪽으로 틀면서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북부 여단이 도착할 때까지 우리가 그들을 막아야 해요. 제가 선두에 서겠어요.”
단호한 결의를 비치는 그녀를 보며 기사들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흐흐! 제법인데?]
[괜히 황제가 왕자들을 제쳐 두고 저 아이를 총애하겠냐?]
[그래도 계집은 계집일 뿐이다. 간만에 몸 좀 풀어 볼까?]
[좋지!]
청룡언월도를 어깨에 비껴 두른 담대소천은 연소민에게 자신의 옆에서 떨어지지 말 것을 주의시키고는 말머리를 북쪽으로 돌렸다.
“모두들 폐하를 위해서, 아르소를 위해서 적들과 맞서 싸우세요!”
레이나 공주가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는 것을 시작으로 모두는 북쪽으로 먼지를 일으키며 질주를 시작했다.
아르소의 북부는 짧은 시간에 처참하게 부셔졌다.
거리는 죽은 자들이 흘린 피로 흥건히 적셔졌고 살아남은 자들은 공포에 몸을 떨었다.
무기를 들고 싸울 수 있는 남자들은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용감하게 싸웠던 천인장 맥슨의 목이 베린스 공작의 검에 의해 잘려 나가기까지 걸린 시간은 두 시간에 불과했다.
싸늘한 시선으로 주변을 돌아보는 베린스 공작에게 부관이 다가오며 큰소리로 물었다.
“각하! 아르소의 본성으로 곧장 가시겠습니까?”
“당연하지! 피해는?”
“이백 명가량이 당했습니다!”
“젠장!”
베린스 공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성곽을 넘어서는 데 이백 명이 죽었다면 극히 미미한 피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베린스 공작은 만족할 수 없었다. 아르소가 케이론의 최북단 외지에 불과한 자그마한 영지였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정규군이 없는 곳에서의 전투에서 자신이 직접 조련시킨 기사들, 이백 명의 죽음은 그로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수치였다.
“각하! 서둘러야 합니다! 어서 명을 내려 주십시오!”
갑주를 죽은 자들의 핏물로 적신 베린스 공작이 남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그에겐 없었다.
지금쯤이면 케이론의 북부 여단에 소식이 들어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은 하루 정도가 남았을 뿐이다.
그 안에 아르소를 평정하고 적의 지원 병력이 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
심호흡을 한 베린스 공작이 검이 남쪽을 가리켰다.
“본성을 친다! 출진!”
기마 병단이 다시 먼지를 일으켰다.
죽은 자들의 시신이 전마들에 의해 짓밟히면서 또 한 번의 죽음을 당했다.
가장을 잃은 어미와 아이들, 자식을 잃은 부모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여인들의 통곡이 전장을 울렸다.
간신히 목숨을 구한 기사들 몇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살아남은 것에 대한 기쁨의 눈물일까? 아니면 죽은 동료들에 대한 서글픔일까?
그들은 터전을 짓밟으며 달려가는 기마 병단을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했다.
“신이시여! 부디 아르소를 지켜 주소서…….”
* * *
아르소는 소문난 곡창 지대임에도 불구하고 군사적으로는 상당히 취약한 곳 중 하나다.
본토와 워낙 떨어진 변방에다가 천연의 방어막을 형성해 준 케논 산맥 때문이다.
게다가 워낙 풍요로움을 자랑하는 요란 제국인지라 아르소 정도의 곡창 지역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전쟁에서 자유로운 곳이 아르소였다.
당연히 방어 시설이 미비했고 주둔한 정규군은 전무했다.
아르소 자체 병력과 인근에 주둔 중인 정규군이 수시로 교환 근무를 하는 것이 전부인지라 방어력은 그야말로 형편없었다.
덕분에 베린스 공작은 별다른 저항 없이 아르소의 중심부까지 밀고 들어갈 수 있었다.
거침없이 질주하던 요란 제국의 북부 여단은 아르소 본성의 외곽을 가로지른 성곽 앞에서 진군을 잠시 멈추었다.
베린스 공작은 성곽 위에 늘어선 적들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흥! 이쯤 되면 항복할 때가 되었을 텐데, 영지민들을 모조리 죽게 놔둘 셈인가!”
그의 목소리는 확성 마법을 통해 성곽 위의 인물들에게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일만의 기병들이 당장에라도 성곽을 넘어설 듯, 거친 움직임을 보이며 시위를 했다.
전쟁 경험이 있는 인물이라면 항전보다는 항복이 당연했다. 게다가 이곳의 영주는 비록 마스터라고는 하지만 여인인 아리안으로 알려져 있었으니 베린스 공작은 내심 여유 만만했다.
그러나 들려온 대답은 베린스 공작의 예상과는 달랐다.
“이곳은 케이론의 영토! 지금 그대들이 전쟁을 도발했다는 것을 아느냐!”
성곽의 가운데에 금발의 늘어뜨린 미모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베린스 공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레이나 공주였다.
하지만 베린스 공작과 기사들은 그녀가 아리안이라 생각했다.
“케논 산맥이 이미 본 제국의 영토로 되었으니 이곳도 더 이상 케이론의 영토가 아니다! 성문을 열고 항복을 한다면 목숨만은 보전해 주겠다!”
“흥! 고작 그 정도의 기병으로 아르소를 넘본 것이냐! 웃기지도 않는구나! 어디 뚫어 낼 수 있으면 뚫어 보거라!”
레이나 공주는 당당했다.
“가소롭구나! 너의 그 허세 때문에 아르소는 피로 물들 것이다.”
베린스 공작은 레이나 공주를 노려보고는 말머리를 돌려 본대로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연소민이 근심스러운 빛으로 레이나 공주를 응시했다.
“수적인 차이가 거의 열 배에 이르는군요.”
“성곽에서 버틸 때까지 버텨야 해. 최대한 시간을 끌어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마마는 지금이라도 황궁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아리안! 아르소는 케이론의 영토야. 제국의 공주로서 그럴 수는 없어!”
레이나 공주의 단호함에 연소민은 쓴웃음을 짓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마마께 부탁이 있어요.”
“부탁? 지금 이 시점에서 부탁이라니?”
“전투의 지휘권을 다른 분께 맡겼으면 해요. 그래 주실 수 있으시죠?”
그 말에 레이나 공주는 희미하게 웃었다.
“부탁이 그거였어? 그러지 않아도 가투소 대장에게 맡기려고 했어.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니 잘해 낼 거야.”
연소민이 고개를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다른 분이 계세요.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주실 분이 말이에요.”
레이나 공주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연소민이 담대소천을 바라보았다.
“맡아 주실 거죠? 숙부님!”
담대소천이 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뒤쪽에서 기사들이 술렁거렸다. 아르소의 기사들과는 달리 가투소가 이끄는 기사들은 의혹 어린 눈빛으로 담대소천과 연소민을 번갈아 응시했다.
그들의 엄청난 무력은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무력만 강하다고 군을 통솔할 수는 없는 법이다.
더욱이 적은 아군의 열 배에 달했다. 이럴 때일수록 뛰어난 지휘관이 절실한 법이다.
“흐흐! 저 새끼들이 못 믿는 눈치군. 이보시오, 공주! 공식적으로 인정을 해 줘야겠는데…….”
북궁천소의 말에 레이나 공주는 움찔했다.
사실 그녀도 담대소천이 지휘권을 갖는 것에 찬성하고픈 마음이 없었다.
그들이 제법 강한 자들임은 알지만 싸움과 전쟁은 엄연히 다르다.
그녀마저 미덥지 못한 태도를 보이자 왕전의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연소민이 그의 팔을 잡아 말렸다.
담대소천이 특유의 묵직한 어조로 말했다.
“뭔가 착각들을 하고 있군. 난 이곳을 지키기 위해서 나선 것이 아니야. 이 아이를 지켜 주기 위해서지. 그러니 지휘를 받기 싫은 자들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 단, 전투 중에 방해가 된다면 내 손으로 직접 베어 주겠다. 그러니 받기 싫은 자들은 지금 이곳을 떠나는 게 좋을 것이다.”
평소의 담대소천이 아니었다.
왕전과 북궁천소가 놀란 표정을 지을 정도로 그는 매섭고 사나운 기세를 발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