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0
<귀환무사 310화>
귀환무사 2부
85화
쓰러지는 기운을 느끼고 돌아보니 목과 육신이 분리되어 따로 뒹굴고 있었다.
베린스 공작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어쌔신들은 이런 수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부분 마력이 깃든 화살을 이용한다. 간혹 검을 든 저격수나 어쌔신들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면 당연히 눈에 보여야 한다.
그들은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키워진 자들이기에 목적을 달성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도대체 누가 이런 능력을……!’
만약 사람이 벌인 짓이라면 초인도 불가능한 경지다. 아니, 초인이라면 이렇게 숨어서 암습을 가하지는 않는다.
짧은 시간에 결론은 내려졌다.
‘초인에 버금가는 고수, 아니면 대마법사! 둘 중 하나다. 쉐인! 그자가 온 것인가?’
베린스 공작은 케이론 제국의 대마법사 쉐인을 떠올렸다. 그라면 이 정도의 혼란은 우습게 여길 만한 존재. 의심은 확신으로 이어졌다.
퍽!
“우악!”
그의 지근거리에 있던 기사 하나의 육신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놀랍게도 육신과 갑주가 통째로 베어져 낭자한 선혈을 뿜어냈다.
강력한 실드를 두른 갑주가 종이처럼 잘려지자 베린스 공작의 눈이 부릅떠졌다.
지켜보던 기사들도 엄청난 광경에 모두 물러서기 바빴다.
“으…….”
저절로 신음성이 이빨을 뚫고 흘러나왔다. 그때 섬뜩한 음성이 베린스 공작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두려운가.]
“닥쳐라! 모습을 드러내라!]
[후후후! 내가 모습을 드러내면 넌 죽는다.]
“쉐인, 이놈!”
베린스 공작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그는 어둠 속의 존재를 대마법사 쉐인으로 오인했다. 검술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초인들이라면 최소한 모습은 보였어야 했다.
“쉐인, 이 죽일 놈의 새끼!”
자신의 인생이 이대로 끝난다는 생각이 베린스 공작을 광기로 몰아갔다.
그가 광기 어린 모습을 보이자 기사들이 주춤거리며 뒤쪽으로 물러섰다. 흑야의 전음은 오직 베린스 공작에게만 들렸기 때문이다.
쾅!
성난 베린스 공작의 오러가 날뛰는 전마들 사이로 떨어졌다. 전마들이 뿌린 피가 하늘을 덮었다.
기사들은 다가가지도 못한 채, 베린스 공작의 광기 어린 동작을 지켜봐야만 했다.
“모습을 보여라! 쉐인! 이 추악한 테세우드의 추종자야!”
[후후! 착각하고 있군. 그깟 마법사와 나를 비교하다니…… 오늘은 여기까지다, 베린스.]
주변을 몰아쳤던 섬뜩한 기운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기사들은 두려움에 찬 시선으로 주변을 살폈다.
동료 기사들 말고는 보이는 자,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극도의 긴장감을 보이며 언제 목숨을 앗아 갈지 모르는 어둠 속의 칼날을 염려했다.
“각하! 놈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부관 하나가 베린스 공작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여전히 흥분을 삭이지 못한 그는 부관의 말에도 뽑아 든 검을 거두지 않았다.
살아남은 마법사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기사들도 결계 밖으로 뛰어나가 날뛰는 전마들을 되돌려 놓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날뛰던 전마들도 서서히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남은 수는 고작 천여 필에 불과했다. 베린스 공작의 눈동자가 광기를 버리고 절망의 빛으로 채워졌다.
자신을 좌천으로 몰아갔던 케논 산맥에서의 피해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엄청난 손실을 입고 말았다.
‘끝이다, 이젠 모든 게 끝이다.’
광기와 절망에 이어 허탈감이 몰려왔다.
“각하! 전마들이 몰려간 방향이 케이론의 아르소 북부 지역입니다. 일부러 그쪽으로 향하는 방향의 결계만 뚫어 낸 것으로 보아 간악한 놈들의 계략이 분명합니다. 당장 군사를 몰아 아르소를 치십시오!”
절망감으로 육신을 가누기조차 힘들었던 베린스 공작의 눈동자에 한 줄기 섬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부관들의 말이 이어졌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당장 전 병력을 몰아가서 아르소를 각하께 바치겠습니다!”
“아르소는 케이론의 본토와 상당히 떨어진 곳입니다. 지금 그곳을 지키는 병력은 고작 일천이 되지 않습니다. 북부에 주둔하고 있는 놈들의 여단이 오려면 하루가 꼬박 소요됩니다. 그 안에 아르소를 충분히 점령할 수 있으니 어서 출전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부관들이 앞다투어 출전을 거론했다. 이번 사태가 이대로 끝난다면 그들도 출셋길이 막히는 것은 베린스 공작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해서 그들은 베린스의 결정을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었다.
베린스 공작은 수하들의 열망 어린 눈빛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래! 이렇게 허무하게 물러날 수는 없다. 싸우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번 해 보는 거다! 아르소를 각하께 바친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만회할 수 있다.’
결국 그는 아르소를 공격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 * *
퍽!
주먹이 작렬한 얼굴은 이내 피를 쏟아 내며 시뻘겋게 부어올랐다.
뒤이어 무자비한 폭력이 넘어진 자의 육신 위로 가해졌다.
“반항하면 죽는다고 했을 텐데…….”
섬뜩한 목소리가 폭력을 멈추게 만들었다.
얼굴이 피범벅이 된 중년인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응시했다.
문신이 얼굴을 가득 덮은 자의 눈빛과 마주치자 그는 이내 고개를 숙였다.
“이봐, 홀튼! 네놈이 밖에선 백작이었는지 몰라도 이곳에선 나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충실한 개일 뿐이다. 그런데 그걸 망각하다니, 고향 땅을 밟아 보지도 못하고서 죽고 싶으냐?”
“죄송합니다. 실수로 그만…….”
“후후! 실수? 백작까지 지낸 놈이 개도 안 할 실수를 한단 말이지?”
“그게 아니라, 그들이 협박을 하는 통에…….”
“오호! 그러니까? 그 새끼들은 무섭고 나는 무섭지 않다?”
“아, 아닙니다. 으윽!”
홀튼이라는 인물의 얼굴에 발길질이 작렬했다.
맥없이 뒤로 나뒹군 그의 육신에 또다시 폭력이 이어졌다.
홀튼이 혼절을 하자 무자비한 폭력은 그제야 멈추었다. 발길질을 한 사내가 일어섰다. 막상 일어서자 거의 이 미르에 육박하는 엄청난 체구였다.
너덜너덜한 죄수복 사이로 비치는 근육들은 붉어진 힘줄로 인해 터져 나갈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 왔다.
“단장님! 새로운 놈들이 여섯이나 들어왔다는데 다른 놈들이 손을 뻗기 전에 얼른 놈들에게 가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특이하게도 파란색 머릿결을 지닌 청년이 사내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를 바라보는 사내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을 발했다.
“후후! 여섯이나 새롭게 들어왔단 말이지?”
“슬쩍 물어보니 케이론의 공작과 후작이랍니다. 모처럼 거물급들이 들어왔습니다, 헤헤!”
“오호! 제국의 공작 나리께서? 이거 재밌겠군. 안내해라!”
사내가 몸을 돌리자 다른 인물들도 재빨리 그를 쫓았다.
* * *
혁련천후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시커먼 줄이 쭉쭉 그어진 죄수복은 닳고 닳아서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얇아져 있었는데, 무릎과 팔꿈치 쪽은 이미 구멍이 나 맨살이 드러나 있었다.
“멋지십니다! 주공!”
진천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환하게 웃었다.
그때 사공진무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뒤이어 우드와 카루가도 같은 복장을 하고서 뒤를 따랐는데, 둘의 손에는 음식을 담은 그릇이 들려 있었다.
진천이 물었다.
“헤론, 그 양반은 안 오냐?”
“바람을 좀 쐬고 싶다더군. 꽤 착잡한 표정이던데 견뎌 낼 수 있을까 걱정이다.”
우드와 카루가가 음식이 담긴 그릇은 허름한 탁자에 올려놓았다. 정체 모를 음식들이 그릇에 제법 듬뿍 담겨져 있었다.
“배급하는 놈들이 다른 죄수들보다 많이 줬습니다. 죄수들의 노려보는 눈들이 장난이 아니더군요, 하하!”
“공작이라고 신경 좀 쓴 모양이네?”
우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원래는 백작 이상은 별도의 공간에 수감했다고 들었습니다만, 범죄 사실을 보다 쉽고 빠르게 자백받기 위하여 얼마 전부터 모두 한곳에 수감한 것으로 들었습니다. 거친 용병들이나 중죄인들과 함께 부딪치는 것, 자체가 상위 귀족들에겐 크나큰 고통이니 요란 제국의 입장에선 꽤 효율적인 수단인 셈이지요.”
진천이 머리를 끄덕였다.
사공진무가 그릇에 담긴 음식을 입에 넣고는 말했다.
“이건 완전히 방목형 감옥이야. 창살이 없는 감옥이라니…… 솔직히 지금도 생소해.”
그랬다.
최악의 범죄자들이 수감된다는 어둠의 숲은, 말 그대로 숲이었다. 당초 모두는 거대한 건물에 수감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들이 갇힌 곳은 어지간한 영지와 맞먹는 넓이에 드문드문 지어진 집들 중 한 곳이었다.
그 집에 모든 죄수들이 갇힌 것은 아니었다. 곳곳에 세워진 집들이 수백 채가 넘었는데, 그 집에 최소한의 인원들이 거주하며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평범한 영지의 주민들로 착각할 수도 있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배급도 첫날만 지급하고 다음부턴 스스로 자급자족을 하라던데 사냥이라도 해야겠습니다. 산에서 사냥하는 것은 허락한다고 하더군요.”
“이게 감옥이 맞긴 맞냐?”
말없이 듣고만 있던 혁련천후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가급적, 힘을 드러내선 곤란해. 우리도 다른 자들처럼 이곳에서 말하는 모든 마나를 잃은 것처럼 보여야 한다. 그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알겠습니다.”
덜컹!
헤론 후작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혁련천후를 흘긋거린 그는 구석의 외진 곳에 등을 기대고 앉더니 그대로 눈을 감았다.
진천의 눈썹이 슬쩍 뒤틀렸다.
“이봐! 공작께 인사는 하고 자빠져야지.”
헤론 후작이 눈을 떴다. 그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진천을 노려보더니 다시 눈을 감고는 몸까지 돌렸다.
진천이 발끈하며 일어서려고 할 때 혁련천후가 그를 말렸다.
“답답하군. 식사는 밖에서 하지.”
모두는 음식 그릇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거친 흙투성인 마당엔 널찍한 바위 하나가 박혀 있었는데 그곳에 음식 그릇을 올린 모두는 식사를 시작했다.
용케 구해 온 사과 하나를 맛있게 먹던 카루가가 전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누가 온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돌아갔다. 엄청난 체구를 자랑하는 인물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구겨진 인상이나 건들거리는 행동으로 보아 좋은 뜻으로 오는 것이 아님은 대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의 죄수들인가 본데, 아마도 텃세를 부리러 오는 모양입니다.”
“흠! 저 정도 덩치면 마나가 없는 이곳에서 거드름 피우면서 주름잡을 만하군. 나도 내공을 사용하지 말고 완력으로 한번 두들겨 패 볼까?”
사공진무가 눈을 반짝 빛냈다.
모두의 눈에 흥미로움이 번졌다. 지금껏 순수한 완력으로 싸워 본 적이 없었던 그들이다.
덩치로만 따진다면 자신들이 상대가 될 리 없을 정도로 그들은 장신에다 육중한 몸매를 지녔다.
특히 가운데 인물의 팔뚝은 카루가의 몸통만큼이나 굵었다. 사공진무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혁련천후를 돌아봤다.
“물어봐.”
“……!”
“사냥꾼의 거처.”
“아하! 알겠습니다.”
일어나려던 사공진무의 어깨를 누르고 진천이 빠르게 일어섰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오는 자들에게로 걸어갔다. 호리호리한 그가 마주 걸어오자 인물들의 얼굴에 가소롭다는 빛이 번졌다.
“흐흐! 알아서 기려는 모양입니다.”
“벌써 소문을 들은 모양이군. 적당히 주무르고 겁을 주도록 해. 그래야 딴마음을 품지 않고 고분고분해질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