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0
<귀환무사 300화>
귀환무사 2부
75화
그가 새로 부임한 지 한 달이 되어가는 어느 날이었다. 정찰을 나갔던 기사들이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오는 사건이 발생했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베린스 공작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사건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새롭게 보낸 기사들마저 모조리 죽어 버렸다. 몇 번에 걸쳐 계속되자 강한 기사들과 마법사 하나를 엮어서 보냈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가 발견하였느냐!”
베린스 공작은 차갑게 식어 버린 아홉 번째 희생자들의 주검을 바라보며 격앙된 어조로 물었다.
“순찰 임무를 교대하려던 기사들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범인의 흔적을 샅샅이 수색했으나 역시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군의관을 불러 부검을 해서라도 사인을 알아내라!”
“그렇잖아도 지시를 내려놓았습니다.”
기사들의 시신을 내려다보는 베린스 공작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죽은 자들의 몸에는 전혀 외상이 없었다. 격투를 벌인 흔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독에 당한 흔적도 없었다. 오히려 죽은 자의 혈색이 자신보다 더 좋아 보일 정도였다.
그는 군의관들에게 부검을 하려던 마음을 바꾸었다.
“시신들을 1군단으로 보낼 준비를 하여라. 아무래도 율튼 공께 부검을 의뢰하는 것이 낫겠다.”
“율튼 공께 말입니까?”
“마법에 의한 살해 가능성이 높다. 마법의 종류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게 중요하니 서둘러라!”
“알겠습니다!”
부관이 기사들을 불러 시신들을 들고 갔다. 죽은 자의 육신에서 마법의 종류를 알아내는 것은 대마법사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기에 베린스 공작은 서둘러 통신실로 이동했다.
* * *
연소민은 새롭게 생긴 숙부들과 차를 나누며 담소를 즐겼다.
이젠 제법 친숙해진 그들은 스스럼없이 숙질간의 감정을 나누기에 이르렀다. 거친 북궁천소와 왕전도 그녀에겐 더없이 따뜻하고 좋은 숙부였다.
과묵하지만 누구보다 광명정대한 심성을 지닌 담대소천은 레이나 공주도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처음엔 그들을 단순한 영지의 기사들로만 여겼던 그녀는 연소민이 숙부라 칭하자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연소민과는 전혀 다른, 마족에 가까운 용모를 지닌 그들을 처음엔 무척 이상하게 여겼던 그녀는 연소민이 그들을 돌아가신 양부의 의동생들이라 둘러대자 그제야 스스럼없이 그들을 귀족으로 대했다.
그녀도 그들을 숙부라고 불렀다.
연소민이 중원의 언어로 그들을 숙부라고 불렀기에 뜻도 모른 채 그냥 따라 하는 것이다.
탁!
“흐흐! 이거 제대로 발효되었군. 죽이는데?”
왕전이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술잔을 내려놓으며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지금 붉은색을 띤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산에서 따온 과일을 주정에 담가 속성으로 발효시킨 중원식으로 제조한 과일주였다.
레이나 공주도 전혀 새로운 술맛에 연신 술잔을 비웠다.
“으흠! 향이 끝내주는군요. 도대체 이런 주조법은 어디서 배웠어요?”
“흐흐! 이게 다 홍무라는 놈의 작품이지요.”
“홍무? 홍무가 뭔가요?”
왕전이 북궁천소에게 눈을 부라리고는 둘러댔다.
“그게, 저희 고향에 술을 꽤 잘 담그는 놈이 있었소. 그놈한테 배운 것이오, 크흠!”
“그래요? 그럼 다음에 그 사람을 황궁으로 불러야겠군요. 폐하께서도 무척 좋아하실 것 같아요. 황궁의 요리사로 채용할까?”
“우리도 부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소만…… 흐흐흐!”
왕전이 뒷말을 흐렸다.
연소민이 얇게 저민 쇠고기를 석쇠에 구워서 만든 먹음직한 요리를 각자의 접시에 담으며 환하게 웃었다.
“곧 황궁으로 돌아가셔야죠. 언제까지 이런 변방에 계실 순 없잖아요.”
“흠! 그렇지 않아도 오라고 난리들이야. 곧 있으면 황궁에서 마법사들이 이곳으로 올 거야. 그때 돌아갈까 생각 중인데…… 뭐, 가기 싫으면 여기서 아리안과 함께 살지 뭐.”
“훗! 그러시던가요. 저야 언제든 대환영이랍니다.”
“숙부들은 어때요?”
레이나 공주가 셋을 돌아보며 손으로 턱을 괴었다. 살짝 붉어진 그녀의 얼굴이 매우 고혹적인 자태를 뽐냈다. 제국의 삼대미녀에 속하는 미녀이니 비록 여자에 관심이 없는 그들이라도 가슴이 은근히 떨릴 정도였다.
“흐흐! 우리도 환영이오.”
“흐흐! 그래요?”
레이나 공주가 북궁천소의 흉내를 내며 웃었다. 그런 그녀가 말없이 묵묵히 술잔만을 기울이는 담대소천에게 시선을 던졌다.
“담대 숙부는…… 아이참! 아직 성이 입에 붙질 않네. 담대 숙부도 찬성이죠?”
담대소천은 옅은 미소로 대신 대답했다.
“원래 그렇게 말수가 적은 편인가요?”
대답은 왕전이 대신했다.
“저놈이 말수에선 주공과 막상막하지요. 하여튼 멋대가리라고는 개뿔도 없는 놈이지.”
“주공? 주공이 뭐예요? 주인을 뜻하는 건가요?”
“형님이시오. 우리 고향에선 형님을 그렇게 부르오.”
“아! 그렇군요. 숙부들 형님이면 무척 험악하게 생겼겠군요.”
그 말에 셋은 대답을 못했다. 연소민도 대답을 못했다. 지금껏 혁련천후의 용모를 잘생겼다, 못생겼다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그 존재감만으로 자신들에게 모든 것이 되어 버린 그였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섰다.
아르소의 수비대장인 토레시라는 기사였다.
“마마! 북부2군단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그는 레이나 공주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한 손을 가슴에 대었다. 레이나 공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전령? 통신이 아니고 전령이란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들라 이르세요.”
잠시 후, 전령이 들어왔다.
훤칠한 키에 그레이트 소드를 어깨에 두른 이십 대 중반의 젊은 기사였다.
두 눈에 가득 어린 총기가 매우 인상적인 그는 품속에서 전령을 꺼내어 레이나 공주에게 건네고는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기다렸다.
전령을 읽어 가던 레이나 공주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자 모두가 궁금한 표정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짧은 시간에 전령을 다 읽은 레이나 공주가 다소 짜증스러운 투로 전령을 기사에게 돌려주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 보군요?”
연소민이 물었다.
“아니야, 그냥 귀찮은 일이 좀…….”
“말해 주면 곤란한 것인가요?”
“응! 나중에 알려 줄게. 오늘은 이만 일어나야겠군요. 좋은 꿈들 꾸세요.”
레이나 공주가 서둘러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자 남은 모두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마침 전령을 전해 준 기사가 막 일어서려던 것을 아리안이 잡았다.
“영주, 아리안이라고 해요. 2군단 소속이신가 보군요.”
“2군단 마법 병단의 제노 허벤슨입니다.”
연소민을 바라보는 허벤슨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제국 최초의 여마스터라는 그녀는 대륙에선 상당히 유명한 존재였다. 그녀 자신이 그걸 잘 모르고 있을 뿐이다.
“요란 제국에서 무슨 움직임이라도 있었나요?”
“저는 그저 전령을 전해 줄 뿐이라 아는 게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안다고 해도 대답할 리 없음을 안 연소민은 알겠다는 말을 하고는 그를 돌려보냈다.
왕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북궁천소도 같은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혹시 그것 때문에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흐흐! 모르지.”
담대소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둘의 표정을 보니 뭔가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또 사고를 친 모양이군.”
“사고는 무슨, 그냥 산에 놈들의 정찰병들이 보이기에 그냥 손 좀 봐 줬다. 한, 아홉 번쯤 되니까 열 좀 받았을 거다.”
“손만 봐 줬냐?”
“흐흐흐!”
담대소천의 물음에 왕전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둘을 번갈아 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어 보인 담대소천은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잘했다.”
“정말이냐?”
“그래, 장하다.”
* * *
루안은 케논 산맥의 정상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케이론의 포로들을 탈출시키고 마법 병단을 몰살시킨 그는 이틀 전에 이곳으로 올라와 지금까지 머물고 있었다. 생명체가 살 수 없는 혹한이 몰아치는 케논 산맥의 정상에서 장비 없이 맨몸으로 이틀을 견뎌 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루안의 얼굴엔 화색마저 돌았다. 갑주도 선홍색에 보라색 무늬가 들어간 화려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흠! 언제나 이곳은 아름답군.”
눈을 감고 턱을 내민 그는 맑은 공기를 한껏 즐겼다.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아주 조금씩 흩날리더니 이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폭설로 변했다.
갑자기 루안의 표정이 심드렁하게 바뀌었다.
“지금쯤 황궁에 돌아왔을까? 그냥 한 번 가 볼까?”
누구를 떠올렸는지 루안의 얼굴이 이내 잔잔한 미소로 물들었다. 콧등에 수북이 쌓인 눈송이를 입으로 불어서 날린 그는 케논 산맥의 북쪽 평원 지대로 시선을 던졌다.
요란 제국의 1군단이 주둔하고 있는 곳이다.
“꽤 강력한 놈이었어. 역시 대마법사들은 까다로운 놈들이야. 신경 좀 써야겠어.”
그는 율튼을 떠올리며 콧등을 실룩거렸다.
“좋아! 다음엔 반드시 베어 주겠어. 누가 먼저 공격을 성공시키느냐에 달린 것이라면 속도에선 내가 앞서지, 후후!”
루안의 얼굴은 자신감으로 넘쳤다.
그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벌써 눈은 자신의 무릎까지 쌓여 있었다. 그는 두 팔을 벌리고 크게 소리쳤다.
“레이나!”
그는 레이나를 계속 외쳤다.
바보처럼 웃기도 하고 아이처럼 주변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쌓인 눈 위로 벌렁 누워 쏟아지는 눈을 입으로 받아 먹으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순간, 루안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섰던 곳에 눈처럼 하얀 은색 갑주를 걸친 인영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어깨까지 내려온 은발이 달빛에 부딪혀 보석 같은 아름다움을 뿌려 대며 신비로움을 자아냈다.
견갑의 끝 부분에 새겨진 조각은 루안의 것과 동일한 드래곤의 문양이었는데 다만 그 색이 루안과는 달리 은은한 청색이었다.
한동안 케논 산맥의 북쪽을 내려다보던 인영의 입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무서운 존재가 저곳에 있어. 누굴까? 인간이 지닐 수 없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어.”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손을 들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내자 주변이 인영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 어떤 형용사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최고의 화공이라도 결코 붓으로 그려 낼 수 없을 것만 같은 아름다움은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고혹적인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하얀 입김이 새어 나온다.
“모두 여덟, 그중 하나는 나도 장담 못해.”
살짝 찡그린 미간은 내리는 눈마저도 부끄러워 피해 갈 정도로 백옥처럼 희었다. 고혹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던 얼굴이 이내 환하게 밝아졌다.
“후훗! 어쨌든 나의 호기심을 이끌어 낸 사람이니 만나는 봐야겠지? 어떻게 생긴 사람일까? 미남이면 좋을 텐데…….”
휘이잉!
바람이 점점 더 세게 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