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7
<귀환무사 297화>
귀환무사 2부
72화
달리면서도 루안을 떠올렸다. 그가 있었다면 이런 곤경엔 처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자 분했다.
‘천방지축 같으니……!’
루안이 앞에 있다면 주먹을 날리고 싶은 충동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것도 율튼의 추격을 뿌리치고 난 뒤에나 가능한 것. 레이나 공주는 마지막 마나까지 끌어올려 추진 동력으로 삼고는 오직 직선으로 달렸다.
* * *
연소민은 자꾸 뒤를 흘긋거렸다.
이미 혁련천후와 일행들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졌건만 아쉬움에 저절로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짧은 시간에 정이 듬뿍 들어 버린 카루가의 울먹이는 모습이 떠오르자 가슴이 찌르르하게 시큰거렸다.
“휴…….”
처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그녀를 왕전이 보고 있었다.
“가까우니 자주 뵐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속내를 이해한 그는 어울리지 않게 따뜻한 말로 달랬다. 고개를 끄덕인 연소민은 이젠 숙부가 되어 버린 존재들을 응시했다.
북궁천소는 말에 앉아 졸고 있었고, 담대소천은 전마에 몸을 싣고 묵묵히 전방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음이 든든했다.
중원에선 천하무적이었던 그들이다.
한 명만 움직여도 강호가 들썩였던 그들이 자신의 가족처럼 이어졌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더 엄청난 존재로 올라설 그들이다. 흑야의 막강함을 두 눈으로 보고 겪었던 그녀이기에 때로는 제국의 초인들이 이들을 당해 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곤 했다.
하물며 모든 이들의 하늘에서 군림해 온 혁련천후는 드래곤이라도 그를 이겨 낼까 하는 의문이 절로 들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괜한 수고를…….”
“우린 가족이 아니냐! 크하하하!”
왕전이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었다.
담대소천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북궁천소는 여전히 졸고 있었다. 그때 북궁천소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전방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한 번 붙어 보면 자연스럽게 몸에 상대의 기운이 저장된다. 절대의 영역에 오른 강자들만의 권리다.
왕전도 담대소천을 돌아본다. 담대소천이 느꼈다면 그도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뒤쪽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이 새끼들이 여기까지 와서 설치고 지랄들이야.”
눈을 뜬 북궁천소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어깨에서 대도를 끌어내리고 있었다.
“마법사라는 놈들의 기운이다. 넌 뒤쪽으로 빠져 있어야겠다.”
“알겠습니다.”
대답한 연소민이 말 머리를 돌려 일행의 뒤쪽으로 갔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마법사들의 기운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제국 최초의 여마스터라도 그들과는 비교 불가의 경지일 수밖에 없었다.
쾅!
그들의 눈에 폭발과 함께 허공으로 솟아오르며 기우뚱거리는 인영이 잡혔다. 모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저 계집은 그 공주라는…….”
“전의 그 공주가 틀림없군.”
“그냥, 무조건 구해 줘야겠지?”
“당연하지.”
셋이 느릿하게 전마에서 내려섰다.
쾅!
자욱한 먼지가 연소민의 얼굴을 덮쳤다. 그저 놀랄 수밖에 없는 그들의 속도에 연소민의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대단해…….’
* * *
“억!”
율튼의 입에서 괴상한 신음이 터졌다.
레이나 공주를 포기하지 않은 그는 국경선을 넘어서까지 그녀를 추격해 잡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전방에서 바람처럼 달려오는 셋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들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자신의 마법 병단을 박살 내 버린 존재들. 그 무지막지함에 지금도 한 번씩 깜짝깜짝 놀라는 그였다. 그는 빠른 시간에 결단을 내렸다.
자칫하면 자신의 목숨이 이름도 없는 초야에서 소멸될 수도 있는 인생 최대의 위기였다.
“돌아간다!”
황급히 명령을 내린 그는 허공에서 방향을 틀어 케논 산맥이 있는 방향으로 날았다.
뒤쪽에서 따르던 마법사들은 워낙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미처 몸을 멈추지 못하고서 그대로 주르륵 한참을 미끄러진 후에야 멈출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레이나 공주의 향기로운 육신이 아닌 죽음의 사신들이었다.
퍽!
“으악!”
북궁천소의 주먹이 마법사의 가슴에 정통으로 작렬했다. 볼 것 없이 뼈가 으스러지고 내장이 터져 즉사였다. 담대소천의 우악스러운 손은 다른 마법사의 목줄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는 마법사를 죽이지 않았다.
“이제부터 너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으며, 네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숨 쉬는 것뿐이다. 허튼짓을 한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을 맛보게 될 것이니 알아서 행동하도록!”
털썩!
혈도가 제압당한 마법사는 짚단처럼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기관은 오직 눈동자뿐이었다.
“당신들은……?”
그들이 몸을 돌리자 레이나 공주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그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셋은 레이나 공주를 멀뚱거리며 바라볼 뿐 허리를 굽히거나 고개를 숙이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레이나 공주의 얼굴에 불쾌함이 떠올랐다.
자신이 제국의 공주임은 그들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예를 취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자신을 숲속에서 튀어나온 원숭이 보듯 했다.
“무례하군요!”
생사의 갈림길을 달려온 그녀의 표정은 어느새 황녀의 고결함과 권위를 되찾고 있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레이나 공주의 표정을 본 북궁천소의 눈썹이 슬쩍 팔자로 휘어졌다.
성질이 나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반응이다.
담대소천이 쓴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잠시 경황이 없어 예가 늦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야! 너 미쳤냐?]
[그러게, 자식아! 목숨 구해 주고 절까지 하냐?]
왕전과 북궁천소의 전음이 연이어 담대소천의 귓속을 울렸다.
[헛소리들 말고 대충 인사해라. 얼른 돌아가야지. 저 아이가 무척 지쳤어.]
왕전과 북궁천소는 연소민을 흘긋 쳐다봤다.
수척한 그녀의 얼굴에 둘은 끓어오르는 열불을 삭이고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마마를 뵙소!”
“안녕하시오!”
도저히 공주에게 하는 인사라고는 보기 힘든 태도였지만 레이나 공주는 고개를 끄덕여 화답했다. 이미 연소민도 그녀에게 예를 갖춘 후였다.
“써튼인가 하는 남작의 호위들이군요. 구해 준 공은 폐하께 상신하여 포상하겠어요. 일단 나를 아르소로 안내하세요.”
그르르르…….
어디서 늑대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착각이 들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북궁천소와 왕전을 담대소천은 웃으며 전마로 끌고 갔다.
“아르소엔 어인 일로 가시나요?”
연소민이 레이나 공주에게 물었다. 레이나 공주는 무심결에 대답했다.
“그냥 가까워서…….”
말끝이 흐려졌다. 스스로도 대답해 놓고 보니 무척 민망했다. 고운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그때 그녀를 민망함에서 구해 준 것은 연소민이었다. 그저 별생각 없이 감탄만 했던 연소민의 미모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제국의 삼대미녀라는 자신과 별반 차이 없는 폭발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 자신처럼 갑주를 걸치고 있었다. 순간, 무언가가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제국 최초의 여마스터이자 여인으로서는 최초로 영주의 자리에 오른 철의 여인, 아리안이 레이나 공주의 뇌리에 떠올랐다.
“혹시……?”
연소민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르소의 영주 아리안입니다.”
“어머! 그랬군요. 제가 놈들에게 쫓기다 보니 경황이 없긴 없었군요. 당신처럼 유명한 사람을 지금에야 알아보다니…….”
“과찬이세요, 공주님!”
자신들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는 레이나 공주를 험악한 얼굴로 노려보던 왕전은 담대소천이 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자 어깨를 으쓱하며 눈빛으로 물었다.
담대소천이 턱으로 전마를 가리켰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왕전에게 담대소천이 이번엔 눈으로 레이나 공주를 가리켰다.
그때야 뜻을 알아챈 왕전의 눈이 대번에 고리눈으로 변했다.
[나는 싫다! 튼튼한 네놈이 걸어서 와라.]
[그럴 거냐?]
[영원히 쭈우욱! 이럴 거다!]
왕전을 슬쩍 노려본 담대소천이 북궁천소에게 시선을 던졌다. 상황을 눈치챈 북궁천소는 이미 전마에 몸을 싣고는 앞서 나가고 있었다. 왕전도 잽싸게 전마에 올라 북궁천소의 옆을 따라붙었다.
가볍게 숨을 토해 낸 담대소천이 레이나 공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담대소천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린다.
‘젠장……!’
그녀는 이미 연소민의 전마에 함께 올라타고는 저만치 앞서 가고 있었다.
* * *
아리소의 서북쪽은 케논 산맥의 끝부분에 해당되는 해발 이천 미르의 높은 산, 우르타고라가 천연의 장막처럼 아르소를 두르고 있었다.
워낙 험준한 우르타고의 지형은 대규모의 병력 이동이 불가능했기에 접점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양국 간에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사소한 국지전은 간혹 발발했지만 그 정도는 어느 지역에나 흔히 일어나는 소규모 전투였기에 정세에 끼치는 영향은 극히 미미했다.
우르타고를 중심으로 동북쪽은 케이론 제국, 서북쪽은 요란 제국의 영토로 나뉜다. 우르타고가 끝나는 지점은 양 제국 간의 국경 지역으로서 화살을 날리면 서로의 영토에 떨어질 만큼 가까웠기에 가히 최전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곳은 아리안이 영주로 있는 아르소와 혁련소가 영주로 있었던 다크 영지의 중간에 해당되는 지역이었는데, 눈으로 적의 군사 시설이 보일 만큼 가까운 그곳에 수천의 기마병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첨탑에서 적진을 살피던 케이론 제국의 경계병들은 갑작스럽게 늘어나는 요란 제국의 기마병들을 보고는 통신석을 통해 곳곳으로 소식을 급파했다.
통신은 아르소에도 전해졌다.
방금 영지로 돌아온 연소민은 들어서기가 무섭게 전해진 통신을 보고는 레이나 공주에게 사실을 알렸다.
레이나 공주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설마 이곳까지…….”
“요란 제국이 이런 변방을 넘보지는 않겠지요. 그냥 단순한 부대 이동일 가능성이 높겠군요.”
“그럴 수도 있지만, 워낙 민감한 시기라서 걱정이 앞서는군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케논 산맥에서의 대전투는 벌써 전 대륙에 소문이 돌고 있었다. 항간에는 압승을 거둔 요란 제국이 조만간 대대적인 군사 행동을 할 것이라고 말하는 자들도 생겨나고 있었다.
덕분에 주변 왕국이나 공국들은 초비상 사태까지 접어든 것으로 전해졌다. 걱정은 연소민도 제법 컸다.
말은 단순한 부대 이동이라 했지만 그곳은 아르소와 접점 지역이다.
요란 제국이 군사 행동을 개시한다면 최우선 목표가 바로 아르소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인근에선 아르소가 가장 번성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물론 강력한 공국인 홀베른이 다크 영지의 북방에 위치하고 있어 요란 제국도 섣불리 군사 행동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겠지만 전쟁이란 괴물은 언제나 상식을 넘어선다. 당연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황궁까지 연결 가능한 통신석인가요?”
“해 보진 않았지만 최신 기종이라 충분히 가능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