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6
<귀환무사 296화>
귀환무사 2부
71화
“소……!”
그녀의 입에서 혁련소의 이름이 흘러나온다.
또다시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그랬다. 그녀는 기억을 되찾았다. 진천의 환술 덕분이었다.
아침까지 계속된 환술은 그녀를 완벽한 연소민으로 되돌려 놓았다.
화려했던 금발은 윤기 나는 흑발로 돌아와 있었으며 보석같이 화려했던 벽안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흑요석처럼 빛을 발했다.
그러나 간절했던 자신의 비밀이 풀어지자 슬픔이 밀려왔다. 기억에 없던 혁련소의 영상이 자신의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기이한 현상에 가슴을 떨었던 그녀는 그가 이 세상에 없음을 듣고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와의 모든 것들이 그녀의 머리에, 가슴에 남아 있었다. 비록 사랑을 운운할 정도의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확신했다.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흑!”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따뜻한 태양빛이 위로라도 하듯, 그녀의 육신을 포근히 감싸 주었지만 흐느낌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 창문으로 얼굴 하나가 쑥 나타났다.
“울어?”
카루가였다.
아리안, 아니, 연소민이 고개를 들어 카루가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형 때문에 우는구나?”
“그래, 그 사람 때문에 너무 슬퍼서 우는 거야.”
“헤헤! 그럼 울지 마. 내가 약속했어. 돌아오게 해 준다고…….”
연소민의 눈동자가 한 차례 출렁거렸다. 카루가의 얼굴에 천진난만한 웃음이 떠올랐다.
후광을 받은 카루가의 미소가 무척이나 따뜻하다고 느낀 연소민은 아이와 약속하는 엄마처럼 힘주어 물었다.
“반드시 그렇게 해 줄 거지? 그렇지?”
“응! 반드시!”
연소민은 카루가를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에 안았다. 따뜻한 눈물이 카루가의 얼굴로 떨어졌다. 카루가의 얼굴이 붉어졌다.
“윽! 숨 막힌다.”
* * *
써튼은 아르소의 외곽 풍경을 감상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우드 경!”
“아름답군, 과연 제국 최고의 밀 생산지답게 모든 것이 제대로 정비가 되어 있기도 하고 말이지. 전쟁이 아니었다면 조만간 대도시로 발전할 수도 있었을 텐데…….”
“설마 확전이야 되겠습니까? 제 생각엔 그냥 케논 산맥에서의 전투로 끝날 것 같습니다. 솔직히 제국전쟁이 일어나면 양측 모두가 엄청난 피해를 입을 텐데 말입니다. 아마 정치적으로 적당한 합의점을 찾고는 흐지부지될 겁니다.”
우드가 짐짓 놀랍다는 듯, 웃으며 써튼에게 말한다.
“하하! 장담하는가?”
“흐! 장담까지는 아니고…….”
“하! 공기 한번 좋구나. 이런 곳에서 여생을 보내면 딱 좋겠는데…….”
크게 공기를 들이마시며 탄성을 발하던 우드의 얼굴이 착잡함으로 굳어졌다.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던 까닭이다.
써튼도 그걸 아는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때 허공에 카루가의 모습이 보이더니 둘에게 소리쳤다.
“빨리 오래!”
“응!”
둘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사방을 둘러봤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헉!”
써튼의 얼굴이 노래졌다. 우드도 같았다.
둘을 태운 말이 코에서 김을 뿜어내며 앞으로 달렸다. 주변 풍경을 구경하느라 그만, 자신들이 한참을 뒤처진 것을 몰랐던 것이다.
써튼과 우드는 북궁천소와 왕전의 무시무시한 눈길을 피해 담대소천의 뒤쪽으로 슬쩍 숨었다.
사공진무가 웃어 주자 둘은 눈빛으로 고맙다는 뜻을 보여 주고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했다.
“너도 고향으로 가야지?”
묵직한 음성이 들렸다. 담대소천이다.
“저 말입니까?”
써튼이 물었다. 담대소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써튼은 씁쓸하게 웃었다.
“다른 자의 손에 넘어갔지 않습니까. 그리고 가족도 없습니다. 저는…….”
“그 나이에 가족이 없단 말이야?”
사공진무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부모님은 오래전에 돌아가셨습니다. 형제라야 저 하나라서…… 결혼도 못했고 말입니다. 뭐, 나쁘지는 않습니다. 신경 쓸 것도 없고, 눈치 볼 사람도 없으니 말입니다.”
“몇 살이야?”
“서른넷입니다.”
사공진무가 피식 웃는다.
“한창때네.”
우드는 그런 사공진무를 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사공진무가 써튼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모두가 써튼보다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궁금해도 참아. 너희들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는 것만 알아 둬.”
사공진무가 우드의 어깨를 툭 쳐주면서 말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빠르게 앞으로 달려간 그는 혁련천후에게 무슨 말인가를 건넸다.
“잠시 쉬었다 갑니다!”
사공진무가 뒤를 보며 모두에게 소리쳤다. 연소민의 앞자리에 함께 타고 있던 카루가가 좋아서 펄쩍 뛰었다. 배가 고팠던 카루가는 재빨리 숲으로 날아갔다. 물론 과일을 따러 간 것이다.
써튼과 우드도 숲으로 뛰어들었다. 언제나 사냥은 둘의 몫이었다.
혁련천후는 연소민을 돌아보며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초췌한 그녀의 모습에 가볍게 고개를 저은 그는 읊조리듯 말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거라.”
“아닙니다. 아르소의 끝까지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녀는 혁련천후를 자신의 아버지를 대하듯 행동했다. 중원에서는 감히 마주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던 존재가 혁련천후다.
검을 들고 살아가는 무사들에겐 신처럼 떠받들어지던 그가 자신의 마음을 채운 사람의 아버지였다.
그래서 그녀는 공경하면서도 편하게 대하기로 작정했다. 혁련천후도 그것을 말리지는 않았다.
흑야에게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자신의 아들도 연소민을 특별하게 여기고 있음을 말이다.
혁련천후가 힘주어 말했다.
“소는 반드시 돌아온다. 그러니 앞으로 다시는 눈물을 보이지 마라.”
“그러겠습니다.”
“저 친구들이 너를 보호해 줄 것이다. 숙부들이라 여기고 잘 지내라.”
혁련천후가 담대소천 등을 가리켰다.
연소민도 그들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숙부님들처럼 모시겠습니다.”
지금 이들은 다크 영지로 가는 길이었다.
그곳에서 혁련소가 돌아올 때까지 세상일에 관여치 않고 시간을 보내기로 작정한 것이다.
다만 담대소천과 북궁천소, 왕전은 아르소에 남기로 했다. 물론 연소민, 혼자 두기가 불안했던 혁련천후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조금을 더 가면 아르소와 다크 영지의 경계가 나온다. 그곳까지 혁련천후를 배웅하러 나온 연소민은 이 자리에 혁련소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에 다시금 눈시울이 적셔졌다.
흑야의 시선이 연소민을 향했다.
연소민도 그를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그들이다.
연소민이 애써 환하게 웃었다. 슬픔이 묻어나는 미소였다.
“놈이 돌아오면 꽤 좋아하겠군.”
“제 생각을 하시던가요?”
“했지, 오 년 동안을 하루도 빠짐없이…….”
“……!”
“후후! 울라고 한 소리가 아니다. 주공의 말씀처럼 울지 마라. 혁련 가문의 여인들은 절대 울지 않는 법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숙부님!”
“응?”
흑야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갑작스러운 호칭 때문이다. 흑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혁련천후에게로 돌아갔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혁련천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가족이니까…….”
“하하! 그렇군요.”
좀처럼 보기 드문 흑야의 미소 짓는 모습을 모두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족!’
그 말에 연소민은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이런, 또…….’
생사를 모르는 부친과 오라버니가 떠오른다. 또 눈물이 차오른다. 참는다고 참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냥 울기로 마음먹었다.
오늘 한 번만 실컷 울고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다짐하고는 그냥 소리 내어 펑펑 울어 버렸다.
“엉엉!”
카루가도 따라서 울었다.
“자식아! 넌 왜 울어?”
“엉! 엉! 그냥…… 엉! 엉!”
* * *
쾅!
마법사들의 손에서 발출된 화염이 레이나 공주의 측면에서 폭발했다. 뜨거운 기운이 얼굴을 덮치며 시야를 가렸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뒤를 쫓은 요란 제국의 마법사들은 생포를 포기하고 죽이기로 마음을 바꾼 듯, 강력한 장거리 공격을 퍼부었다.
레이나 공주는 가장 강력한 기운이 조금씩 거리를 좁혀 오는 것을 느끼고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보지 않아도 기운의 주인공은 율튼이다.
‘시간이 없어!’
일정 거리까지 좁혀지면 잡히는 건 시간문제다. 십 미르 안에서 대마법사들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초인들뿐이다.
쾅!
우지끈!
그녀는 검을 뽑아 무작정 나무를 베었다.
최대한 추격자들의 속도를 늦춰 보려는 심산이었다. 효과는 있었다. 몇 개의 기운이 조금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가장 두려운 존재의 기운은 변함이 없었다.
숲이 끝났다.
강렬한 태양이 눈을 자극하며 드넓은 평원 지대가 레이나 공주의 앞에 나타났다.
그녀로서는 최악의 환경이었다.
쾅!
“앗!”
지척에서 폭발이 일며 뜨거운 화염이 그녀의 오른쪽 어깨까지 덮었다. 다행히 방어막이 둘러진 갑주라 부상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탐스러운 금발이 상당 부분 불에 타 버렸다.
“멈추지 않으면 죽는다! 공주!”
율튼의 섬뜩한 경고음이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레이나 공주의 검이 바닥을 긁었다. 흙과 돌들이 튀어 오르자 검에 한껏 마나를 주입시켜 뒤로 후려쳤다.
무지막지한 속도로 뒤로 날아간 돌들은 제아무리 마법사들이라도 맞으면 중상을 입게 된다.
레이나 공주도 강자였기 때문에 돌에는 살상이 가능한 정도의 파괴력이 있었다.
퍽!
“욱!”
운이 없게도 마법사 하나가 어깨를 맞고 질주에서 멀어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공격 방식에 율튼도 다소 당황했다.
방어막을 치면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는 돌들이지만 그렇게 되면 속도가 떨어진다.
따다다당!
그도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방어막을 폈다.
부딪힌 돌들이 가루로 변해 흩어졌다. 그러나 그 짧은 틈은 레이나 공주와의 간격을 이십 미르까지 벌어지게 만들었다.
율튼이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만 더 가면 아르소와의 국경선이다. 그 전에 결판을 내야 한다!’
초조했다.
레이나 공주는 사로잡는 그 순간부터 엄청난 효용 가치가 생긴다.
케이론의 황제는 그녀를 자신의 목숨처럼 아낀다. 당연히 그녀를 인질로 내세우면 상당한 정치적, 군사적 이득을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국경을 침범할 수도 없었다. 자칫 제국전쟁의 단서를 자신이 주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죽이든가, 사로잡든가, 무조건 요란 제국의 영토 내에서 해결해야 했다.
레이나 공주의 기상천외한 공격은 계속되었다.
율튼을 제외한 다른 마법사들은 제법 먼 거리까지 벌어져 있었다.
‘아르소다! 제국의 국경이다!’
레이나 공주의 시야에 아르소의 경계 지역을 두르고 있는 거대한 경계 철망이 보였다.
기사들이 상주하는 건물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희망이 어렸다.
쾅!
우지끈!
공격은 동시다발로 이어졌다. 레이나 공주는 방향을 바꿔가며 사력을 다해서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