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5
<귀환무사 295화>
귀환무사 2부
70화
“아직 멀었어. 고작 반 시간을 뛰고 지치다니…….”
가쁜 숨을 몰아 쉰 그녀는 품속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색색의 구슬들이 들어 있는 병의 마개를 열어 구슬 하나를 꺼낸 그녀는 그것을 삼켰다. 마법사들이 특별히 제조한 그것은 고갈된 마나를 단시간에 보충해 준다.
효과는 대단했다.
다소 거칠었던 그녀의 호흡이 대번에 잠자는 아기처럼 고르게 돌아왔다.
끼아악!
상공에서 소름 끼치는 울음이 들려왔다.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회색의 독수리가 그녀의 머리 위, 상공을 선회하며 날카로운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흉측해…….’
레이나 공주는 시뻘건 독수리의 눈을 보고는 소름이 돋았다. 그때 독수리 하나가 엄청난 속도로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방향은 레이나 공주가 있는 거목의 끝부분이었다.
‘사람을 공격하는 몬스터였나?’
레이나 공주는 검을 뽑아 들었다.
“감히 미물 따위가!”
그녀의 검이 새파란 광채를 품었다. 하찮은 독수리 따위에게 드러낼 오러가 아니었지만 인간을 공격하는 것에 화가 치민 것이다.
서걱!
카악!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던 독수리가 그대로 두 조각으로 잘라지며 선연한 핏물을 뿜어냈다. 바닥으로 추락하는 독수리의 주검을 바라보는 레이나 공주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검에 묻은 핏물을 마나를 주입시켜 태워 버린 그녀는 땅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콰직!
꿈틀거리던 독수리 머리를 그냥 사정없이 밟아 버린 그녀는 시선을 전방으로 던졌다. 산맥 반대편엔 요란 제국 1군단의 주둔지가 있다. 그곳에 루안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레이나 공주는 다시 달렸다.
그녀가 사라지자 죽은 짐승들을 먹고사는 작은 포유류들이 사방에서 우글거리며 나타났다.
죽은 독수리의 사체는 그들에겐 만찬이었다. 짧은 시간에 독수리는 뼈만을 남기고 자연의 일부로 화해 소멸되었다.
* * *
상당한 속도로 질주하던 레이나 공주가 어느 순간, 두 눈을 부릅뜨며 급하게 멈추었다. 전방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율튼!”
백발백염의 노인이 질주하던 방향을 가운데를 막아서며 나타나 있었다.
그를 호위하는 젊은 마법사들은 검처럼 날카롭게 생긴 지팡이를 레이나 공주에게 겨누고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쉐인이 다녀간 모양이군. 오랜만이오! 공주!”
레이나 공주를 바라보는 율튼의 눈동자엔 차가운 한기가 채워져 있었다. 레이나 공주도 마찬가지였다.
“흥! 요란 제국의 개가 되더니 낯빛이 무척 좋아졌군요. 율튼!”
“후후! 주는 밥이 다르니 그럴 수밖에…….”
모욕적인 언사에도 율튼은 담담했다. 아니, 상당히 차갑고 냉철했다.
젊은 마법사들이 발끈하여 공격을 퍼부으려고 했지만 율튼이 그들을 말렸다. 그는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차갑게 웃었다.
“내가 이곳에 있음을 알고도 텔레포트를 사용하다니,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모양이오?”
“겁날 것도 없죠.”
레이나 공주는 당차게 나갔다.
그러나 속내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재빨리 주변을 살폈지만 마땅히 도주할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린아이가 마스터에게 덤비는 것과 같은 꼴이다.
‘방법이 없어! 어떻게 나를 찾아낸 거지?’
위기였다.
죽는 것보다 이들에게 잡혀 인질로 활용될 것이 더 두려웠다. 특히 눈앞의 율튼은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알고 있는 인물이다.
“공주! 도망갈 곳은 없소. 품위를 손상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순순히 나와 함께 갑시다.”
“흥! 당신도 품위라는 걸 알고 있었군요.”
여전히 냉랭한 레이나 공주를 율튼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여전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 손을 쓰지는 않았다. 그녀가 자신에게서 도주할 방도가 없음을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앗!”
레이나 공주의 입에서 갑작스럽게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순간 그녀의 검이 무지막지한 오러를 뿜어냈다.
쾅!
율튼의 지척에서 폭발이 일었다. 흠칫한 율튼의 양팔이 좌우로 교차되며 앞으로 뻗어졌다. 좌우를 섰던 마법사들도 일제히 레이나 공주가 섰던 곳으로 몸을 날렸다.
율튼의 얼굴이 보기 싫게 구겨졌다.
“이런 방심을…….”
눈앞에서 레이나 공주가 사라지고 없었다.
재빨리 스캔 마법을 운용한 율튼의 귓속으로 동북쪽으로 멀어져 가는 레이나 공주의 기운이 포착되었다.
“흥! 감히!”
율튼의 얼굴에 독한 기운이 서리더니 그대로 쏘아진 화살처럼 동북쪽으로 날아갔다. 헛손질을 했던 마법사들도 이내 방향을 틀어 율튼의 뒤를 쫓았다.
제6장 아르소에 온 레이나 공주
혁련천후는 아르소의 첨탑에서 등을 기대로 앉아 여전히 낯선 두 개의 달이 뜬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중원의 밤하늘보다 곱절은 많아 보이는 별빛까지 더해 주변은 무척이나 밝았다.
드르렁!
카루가는 그의 다리를 베개 삼아 꿈속을 헤매는 중이었다. 요즘 들어 부쩍 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카루가를 혁련천후는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어떨 땐, 혁련소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가 아들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흑야와 진천이 앉아 있었다. 다른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 계셨군요.”
상큼한 향기가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아리안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 혁련천후를 잠시 유심히 바라보았다. 다시 봐도 다크 영지의 영주와 흡사한 외모였다.
사소한 인기척에 카루가가 눈을 떴다.
아리안이 서 있는 것을 본 카루가는 눈을 비비고는 혁련천후를 올려다보았다.
“춥다, 들어가서 자야지.”
“들어가?”
“들어가.”
“알았어요.”
엉거주춤 일어선 카루가는 아리안의 육신을 곳곳이 살펴보고는 밑으로 내려갔다.
슬쩍 얼굴을 붉힌 아리안은 느린 걸음으로 혁련천후에게로 다가갔다.
“내게 할 말이 있어 보이더군…….”
“그래요.”
“뭐지?”
아리안은 잠시 머뭇거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내일이면 이들은 다크 영지로 떠난다.
그 안에 자신의 비밀에 대한 것을 물어보고자 올라온 것이다. 안면이 있는 흑야에게 물어볼까 했지만 그보다는 일행의 수장으로 보이는 혁련천후에게 물어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그녀였다.
물론 그들의 입장에선 황당할 수도 있겠지만 비밀을 밝히고자 하는 강렬한 충동은 자제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제가 꾸는 꿈 때문에 여쭤볼 게 있어서요.”
“난 해몽가가 아니다.”
“신교라고 아시나요?”
혁련천후의 눈동자가 매섭게 돌아갔다.
그녀의 입에서 신교가 흘러나오다니.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
아리안은 순간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분명 앉아 있었던 혁련천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코앞에 나타나 있었다.
뒤쪽에서도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흑야가 그녀의 목에 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전부터 수상하다 싶더니…….”
흑야의 검이 아리안의 목을 살짝 파고들었다. 붉은 피가 검신을 타고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혁련천후가 눈빛을 보내자 흑야는 검을 거두고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 아리안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똑같은 꿈을 오 년 동안 꾸어 왔어요. 당신들처럼 흑안에 흑발을 지닌 사람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나타나더군요.”
“……!”
“꿈에선 분명 생생하게 보았던 얼굴이 깨어나면 전혀 기억이 나질 않더군요. 하지만 하나만은 또렷하게 기억이 나더군요.”
“계속…….”
“누군가가 나를 향해 소리치더군요. 넌 신교주의 딸, 연소민이라고……!”
순간, 아리안의 뒤쪽에 섰던 흑야가 지독한 살기를 발산했다.
“닥쳐라! 계집! 그 아인 너와 다르다!”
“흑야!”
혁련천후의 단호함에 흑야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물러섰다. 그러나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아리안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아리안이 자신들을 이 세상으로 오게 만든 인물과 관련이 있다고 여겼다.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에서 중원의 신교를 아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오 년이에요. 그 오 년 동안 똑같은 사람들에, 똑같은 말만 되풀이되더군요. 단순한 꿈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확신했어요. 생각해 보니 제 어렸을 적의 기억이 전혀 없더군요. 그저 어느 한순간 이 세상에 뚝 떨어졌다는 느낌…… 그런 느낌만 들었어요. 물어볼 사람도 없더군요. 양부께서 돌아가시면서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이 어느 한순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어요. 그래서 당신들을 찾았어요. 흑발에 흑안을 지녔으면 내 꿈을 말해 줬을 때, 혹시라도 뭔가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심정에 말이에요.”
혁련천후의 눈동자에 차가운 기운이 돌았다.
“노리는 것이 무엇이냐?”
“……!”
“난 수작을 부리는 계집은 무척 싫어하는 편이지…….”
꽉!
아리안의 목덜미가 혁련천후의 손아귀에 잡혔다. 아리안은 숨이 막히는 고통보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한기가 더욱 고통스러웠다.
“거짓말을 그럴듯하게 하는군. 그게 그토록 궁금했다면 내 아들과 저 친구를 보았을 때, 그때 물어봤어야지…….”
“그, 그건…….”
“놈과 어떤 관계지?”
“오, 오해…… 악!”
아리안의 가냘픈 육신이 흑야의 발아래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때 진천이 다가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주공! 거짓말이 아닌 듯합니다.”
“비켜!”
“주공! 저 눈은 절대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고정하십시오!”
스르릉!
중원을 통일시킨 그의 검이 손에 쥐어졌다.
“말하지 않으면 너의 영지를 핏물에 잠기도록 해 주지.”
분노했다.
자제했던 그의 분노가 활화산처럼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돌아온단 기약조차 없는 미지의 세상으로 떠나보낸 아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분노로 이어진 것이다.
“주공!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진천이 황급히 그를 말렸다.
혁련천후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잠시 아들을 잊은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새롭게 솟아올랐다. 검을 늘어뜨리는 그를 보며 진천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리안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다크 영주와 이 사람은 흑안이 아닌 벽안이라 물어보지 않는 것뿐이에요.”
“……!”
굳게 다문 혁련천후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흑야의 눈동자는 지금도 흑안이 아닌 벽안이었다.
쨍그랑!
손에 쥐어졌던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언제 왔는지 카루가가 재빨리 검을 주워 멀찌감치 물러섰다.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혁련천후를 흘긋거리는 카루가를 진천이 보듬어 주었다.
* * *
달이 지고 태양이 떠올랐다.
떠오른 태양이 중천에 걸릴 때까지도 아리안은 거처에서 나오지 않았다. 시녀도 들이지 않았다.
집사가 식사를 권하러 몇 번을 갔었지만 그녀는 되돌려 보낼 뿐, 거처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창에 기댄 아리안의 얼굴은 온통 슬픔으로 가득했다.
부어 버린 눈 주변은 그녀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눈물을 흘렸는지 짐작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