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3
<귀환무사 293화>
귀환무사 2부
68화
포로들은 별도로 지정된 장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아군 귀족들을 바라보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자신들을 감시하는 적군보다 그들이 더 얄미울 지경이었다.
“잡담 금지!”
감독관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고서야 그들은 잠잠해졌다.
해가 중천에 오르자 종소리와 함께 점심시간이 주어졌다.
포로들에게 지급되는 식사는 감자 한 개와 허여멀건 수프가 전부였다. 반면에 같은 포로라도 귀족들은 고기가 지급되었다.
포로에게 지급되는 고기는 대부분 케논 산맥에서 사냥해서 잡아 온 짐승들의 고기였지만 병사들에 비하면 진수성찬이라 할 수 있었다.
처음엔 자존심과 명예 때문에 음식을 거부하던 귀족들도 차츰 배고픔이라는 원초적인 고통을 겪으면서 변해 갔다. 어떨 땐, 배급을 놓고 다투는 일도 벌어졌고, 서로 결투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 모든 것이 요란 제국의 기사들에겐 즐거운 눈요깃거리였다.
“하하! 고상한 척하더니만 고기 한 점을 놓고 다투는 꼴이라니…….”
“원래부터 케이론의 놈들은 겉만 번지르르 기름이 흐르고 속은 똥으로 가득한 놈들이라 소문났었지. 직접 보니 소문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군. 저런 것들도 작위를 받아 귀족이라 거들먹거리며 살았겠지?”
“하하! 놈들이야, 작위를 세습하는 제도를 가졌지 않느냐. 당연히 상대가 안 되지. 실력을 우선시하는 본 제국을 따라오려면 아마 천 년은 더 지나야 할 거다.”
요란 제국의 기사들은 선선한 바람이 부는 곳에서 식사를 하며 저마다 케이론 제국의 기사들에 대한 흉을 늘어놓았다.
그들의 식사는 푸짐했다.
군단 간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에 대한 황제의 특별 포상이 있었기에 특별한 날에만 먹던 진귀한 음식들이 나날이 지급되고 있었다.
당연히 기사들과 병사들의 사기는 높아질 수밖에 없었고 이참에 케이론 제국의 북부 지역을 모조리 쓸어버리자고 하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승리는 이래서 좋은 것이다.
그래서 모든 제국들은 본격적인 전면전에 앞서 벌어지는 전초전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긴다. 전군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그 중요성 덕분에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가장 뛰어난 무장을 전초전의 선봉으로 삼는다.
그들로 하여금 적장과 일대일의 결투를 벌여 전군에 사기를 드높이는 방법을 선호했는데, 그러한 전투 방식은 고대 때부터 이어져 온 전투 방식이었다.
물론 케논 산맥에서의 전투는 그런 것과는 다소 다른 양상으로 벌어진 전투 형태였다.
워낙 많은 수의 병력이 전면전을 벌인 탓이기도 했지만 양측에 대마법사들이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땡! 땡!
갑자기 종소리가 울렸다.
“이건,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잖아!”
“서둘러!”
늘어졌던 기사들이 장갑을 갖추고는 어디론가 빠르게 달려갔다.
전마에 올라 포로들을 감시하던 기사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켰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포로들은 먹던 음식을 내려놓고 상황을 주시했다.
“아군이 온 것은 아닐까?”
“설마, 이곳은 이미 적의 주력 부대가 모조리 몰려들었다고.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이토록 깊숙한 곳까지 오지는 않을 거다. 뭔가 다른 일이 벌어졌겠지.”
“그렇겠지…….”
잠시 희망을 품었던 그들은 이내 낙담한 빛으로 얼굴을 굳혔다. 그때였다.
쾅!
노역 현장의 끝부분에서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어찌나 강력했는지 대지가 심하게 흔들릴 정도였다.
포로들의 고개가 일제히 뒤로 돌아갔다.
쾅!
다시 폭발이 일었다. 자욱한 먼지구름이 하늘로 솟구치며 주변을 온통 뿌옇게 만들었다.
우측에서 요란 제국의 기마병, 백여 기가 빠르게 폭발이 일어난 곳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그들의 눈에 잡혔다.
“분명해! 이건 아군이 온 거야!”
“제발…….”
낙담했던 포로들의 얼굴이 다시 희망으로 물들었다.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던 전마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고함 소리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뒤섞이며 순식간에 주변은 혼란에 빠졌다.
“지원을 요청하라!”
“마법 병단에 통신을 보내어 지원을 요청하라!”
다급한 소리들이 곳곳에서 터졌다.
“으악!”
전마들의 사이에서 황금빛이 번득이자 어김없이 처절한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황금색 갑주를 걸치고 그에 못지않은 찬란한 금발을 늘어뜨린 사내는 기마병들의 곳곳을 누비며 검을 휘둘렀다.
움직임이 워낙 빠르다 보니 기사들도 일제히 전마를 버리고 바닥으로 내려서서 상대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짧은 시간에 상당한 수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고작 이따위들에게 패한 거야? 웃기지도 않는군.”
여인처럼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그는 자신을 포위하며 서서히 좁혀 오는 기사들을 바라보며 웃음을 흘렸다. 그가 검을 멈추자 죽음의 광풍도 멈추었다.
지켜보던 포로들의 얼굴에 실망감이 어렸다. 지원 부대라 여겼건만 달랑 혼자였던 것이다.
사방에서 요란 제국의 기사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바람에 몸을 맡기고 서 있을 뿐이었다.
“비켜라!”
기사들의 뒤쪽에서 우렁찬 음성이 들렸다.
“궁병이다!”
“젠장맞을 놈을 죽여라!”
요란 제국의 궁병들은 다른 여타의 궁병들과는 차원이 다른 궁술을 자랑한다.
화살에 마나를 싣는 기술은 케이론 제국도 할 수 없는 고차원적 기술이다.
위력이 열 배가량 증폭하는 그것은 궁병 열 명이 오우거 하나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위력적이라 소문나 있었다.
케논 산맥에서의 전투에서도 궁병들의 활약은 대단했었다. 그런 이유로 기사들의 궁병에 대한 믿음은 대단했다.
“놈을 죽여라!”
로브를 걸친 자의 고함에 궁병들이 금발 사내를 향해 화살을 겨누었다. 금발 사내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흥! 고작 그따위로 나를 상대할 수 있다고 보는 모양이지?”
쾅!
그가 바닥을 차고 날아올랐다.
동시에 마나를 두른 화살들이 그에게로 쏘아졌다.
지켜보던 포로들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인간이라면 도저히 살아날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화살들이 금발 사내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콰자자자자!
“으아악!”
“피, 피해라!”
예상은 빗나갔다.
황금빛을 번쩍 뿌리더니 일거에 열 명의 궁병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모조리 죽여 주마!”
제법 강인해 보이던 기사들이 사내를 막아섰다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어 나갔다.
호랑이의 코털을 뽑은 것일까? 사내는 더욱 광포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검을 들어 막으면 검과 사람이 함께 동강이 났다. 화살을 쏘면 화살이 튕겨 날아가 엉뚱한 동료들의 목을 꿰뚫었다.
“으…… 인간이 아니다!”
도주하는 기사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사내는 도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믿기지 않을 정도의 속도와 도약 거리를 보여 주며 도주하는 기사들의 목을 잘라 냈다.
“바보들! 뭐 해! 땅을 팔 힘이 남아 있으면 도망들을 가란 말이야!”
포로들의 귓속으로 생생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그제야 넋을 놓았던 포로들의 눈에 빛이 돌았다.
이미 귀족 포로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까운 곳에 서서 감시하던 기사들을 때려눕힌 그들은 죽은 자들이 흘린 검을 주워 들고 싸움에 끼어들고 있었다.
갑주가 없었지만 그들은 힘이 넘쳤으며 용맹스러웠다. 조금 전까지 그들을 비난하던 일반 사병들도 주변에 널린 검들을 주워 들고 한 무리를 이루면서 뛰었다.
“누가 너희들보고 싸우랬어?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도망가란 말이다!”
달려가던 병사들이 귀를 막고 괴로워했다.
목소리가 뇌리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케논 산맥의 서북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곳으로 가면 제국의 변방인 아르소가 나온다.
“포로들이 탈출한다! 막아라!”
뒤늦게 발견한 요란 제국의 기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전마를 몰아 왔다.
“흥! 어딜!”
사내의 검이 포로들을 쫓아가던 전마들에게 떨어졌다.
어김없이 피를 쏟으며 죽어 가는 기사들. 짧은 시간에 엄청난 피해를 입은 요란 제국의 기사들은 달려들 생각을 잊었다.
공들여 닦았던 도로가 미처 다져지기도 전에 전마들의 발굽 아래 산산이 파헤쳐졌다.
금발 사내가 제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공간은 넓었고 기사들의 수는 많았다. 그의 공격 범위를 벗어난 기사들의 검에 의해 뒤처졌던 포로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기사들과는 달리 일반 사병인 그들이 전마에 몸을 싣고서 달려드는 기사들을 상대하기란 계란으로 바위에 부딪치는 형국과도 같았다. 순식간에 서른이 넘어가는 포로들이 싸늘한 주검으로 화해 대지를 뒹굴었다.
“젠장! 이러다가 모조리 다 죽겠어! 흩어져라!”
“흩어져 새끼들아!”
포로들은 사력을 다했다.
어떤 이들은 도주하는 것을 포기하고 두 팔을 들어 올리다가 그대로 목이 잘려 쓰러졌다. 포로들을 사냥하던 기사들 앞에 황금빛이 번득이며 나타났다.
“후후! 사냥을 너무 실감나게 하는군. 이젠 너희들이 사냥감이 될 차례야!”
검이 번득이자 기사 둘의 수급이 하늘을 날았다. 질주하던 전마들이 황급히 방향을 틀어 금발 사내를 피하고자 했지만 워낙 빠른 속도로 달렸기에 스스로 그 앞에 목을 들이미는 결과로 이어졌다.
연이어 핏물이 터졌다.
싸움이 아닌 살육이었다. 기사들은 절망했다. 그 용맹하다는 요란 제국 1군단의 특수 부대 소속인 그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다.
쐐액!
허공을 찢는 소음과 함께 거대한 빛의 화살들이 금발 사내를 향해 날아들었다. 기사들의 얼굴이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바뀌었다.
“지원군이 왔다!”
콰과광!
금발 사내의 주변에 강력한 마나의 폭발이 일어났다.
여력에 휩쓸린 기사들이 전마와 함께 통째로 날아갔다. 실로 대단한 위력이었다.
모든 이들이 폭발이 일어난 지점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자욱한 연기가 모든 것을 가렸다. 연기는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꿀꺽!
누군가가 침을 삼켰다.
강력한 폭발이었기에 사람이라면 죽었어야 옳았다. 연기에 가려 육신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닥을 적신 핏물 정도는 보여야 하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바닥은 파헤쳐진 돌들만 있을 뿐 사람의 피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휘이익!
바람 소리와 함께 기사들의 옆으로 로브를 걸친 자들이 내려섰다. 모든 기사들이 그들에게 공경스러운 자세를 취했다.
“놈은 살아 있다!”
나타난 마법사들은 모두 다섯. 그들은 좌우로 길게 늘어지며 마나를 모으기 시작했다. 뿌연 연기 속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동자는 무척이나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살아 있다는 말에 기사들은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났다.
“후후! 고작 이 정도였어? 이 정도에 패배한 건가? 그 잘난 테세우드가…….”
시커먼 실루엣이 연기 사이로 비쳤다.
무릎까지 덮은 황금색 부츠가 먼저 연기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팔 하나가 나오고 마지막으로 육신과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투구 사이로 늘어진 금발이 태양빛을 받아 눈부신 광채를 발산했다.
사내의 견갑과 흉갑은 핏빛처럼 붉었는데 그곳엔 드래곤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루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