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5
<귀환무사 285화>
귀환무사 2부
60화
진천의 검이 케이시 공작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의 검에 맺힌 푸른색 기운을 본 케이시 공작은 혼신의 힘으로 그것을 막아 냈다.
꽝!
쩌저정!
주변 공간이 기이한 소리를 울리며 요동쳤다.
파생된 기운이 기사들을 덮치자 갑주가 그대로 종이처럼 찢겨 나갔다.
진천의 머리를 넘어 사공진무가 날아올랐다.
“제법이군! 늙은이!”
사공진무의 검이 케이시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합!”
케이시 공작의 검이 회전을 일으키며 사공진무의 검을 막아 냈다. 굉음이 터지며 둘의 육신이 반대 방향으로 튕겨져 날아갔다. 케이시 공작의 두 눈은 불신의 빛으로 역력했다.
무슨 말이라도 뱉어 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목구멍까지 차오른 핏물이 그대로 쏟아질 것 같아 그럴 수도 없었다.
자신의 제국의 초인이다.
대륙최강이라는 케이론 제국의 테세우드 공작과도 별 차이가 없는 자신이 정면충돌을 하고서도 우위를 점하지 못한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둘씩이나…….
‘어떻게 이런 일이……!’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는 진천과 사공진무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엉뚱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멈춰!”
대지를 울리는 고함이 케이시 공작의 뒤쪽에서 터졌다. 케이시 공작의 고개가 본능적으로 뒤로 돌아갔다. 마나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대마법사 율튼과 마법사들의 전력이 담긴 마나구가 흑안의 마검사로 추정되는 인물들에게로 떨어지고 있었다.
마나구가 반사되어 하얗게 빛나던 케이시 공작의 눈동자에 흑발 사내의 영상이 채워졌다.
그는 강력한 마나의 폭풍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또 있었다.
허공에 뜬 마법사들의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인영들.
“저, 저것은……!”
케이시 공작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번쩍!
빛의 폭발이 일어났다. 주변을 둘렀던 방어막이 소멸되며 파생된 기운들이 기사들을 휩쓸었다.
콰과광!
거대한 빛의 폭발이 이어지자 세상은 온통 백색이 되었다.
* * *
레이나 공주는 바깥에서 소란이 일자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섰다.
기사들이 바삐 어디론가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냐?”
그녀는 아무나 붙잡고서 물었다.
“출전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출전 명령?”
“그렇습니다! 모든 부대에 출전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기사는 허리를 숙이고는 바삐 어디론가 뛰어갔다. 레이나 공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적이라면 보나마나 요란 제국이다.
‘전쟁이 발발한 것인가?’
군단 전체에 출전 명령이 떨어졌다면 적도 그에 상응하는 병력을 몰고 왔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무조건 전쟁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
테세우드 공작의 호전성을 감안하면 제국전쟁으로 확전까지 걱정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왜, 왜 이렇게 되어야만 했을까.’
레이나 공주는 참담한 심정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그토록 피했던 제국전쟁이다.
전쟁광들에게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협상을 자원해서 오지 않았던가. 전쟁은 온건적인 정책을 펴 왔던 황실의 힘을 무력화시키고, 더 나아가 권좌를 강경파들에게 내주게 만들 것이다.
그 강경파의 수장이 바로 테세우드 공작이다.
온건파의 입장에서는 그에 맞설 만한 이가 없었기에 여론은 급격히 강경파에게 유리한 쪽으로 치우치고 만 것이었다.
“마마!”
헤론 후작이 바삐 뛰어 오며 그녀를 찾았다.
“무슨 일이죠? 설마 전쟁이 시작된 것은 아니겠죠?”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요란 제국 측에서 케이시 공작과 대마법사 율튼이 직접 나섰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상황이 심상찮게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레이나 공주는 크게 놀랐다.
케이시 공작과 대마법사 율튼이 직접 왔다면 주력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들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왔단 말인가요?”
“전령이 그렇게 전해 왔다고 합니다. 일단, 저는 전장으로 가 봐야 하니 마마께선 이곳에 계십시오!”
“아니에요! 저도 가겠어요!”
헤론 후작이 놀란 표정으로 만류했다.
“마마! 그곳은 위험합니다!”
“공주가 되어 가지고 어떻게 보고 있을 수만 있겠어요. 하니 말리지 마세요.”
“마마!”
“제 성격을 아시니 더는 말리지 마세요.”
레이나 공주가 단호한 태도를 보이자 헤론 후작은 어쩔 수 없었다. 따라오려는 시녀들을 물리친 레이나 공주는 헤론 후작과 함께 바삐 걸음을 놓았다.
주둔군 전체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돌격 부대는 벌써 출전 채비를 끝내고 주둔지의 외곽을 돌아 북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일으킨 먼지가 하늘을 덮었다. 주변을 돌아보며 자신이 합류할 부대를 찾던 레이나 공주 앞으로 강인한 인상의 기사가 전마를 몰아 달려왔다.
고삐를 당겨 전마를 세운 그는 훌쩍 뛰어내리더니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공주마마!”
“그대는 이글스여단의 가투소 대장이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마마! 저게 마마를 호위하겠습니다. 저희부대와 함께하시지요.”
“고마워요.”
레이나 공주의 얼굴이 다소 밝아졌다.
헤론 후작도 적잖이 마음이 놓이는 눈치였다.
이글스 여단은 황제에게 충성하는 몇 되지 않는 부대들 중 하나다. 그들이 레이나 공주를 호위한다면 요란 제국과의 전쟁도 그렇지만, 난전 중에 혹시 모를 정적들의 암습에서도 레이나 공주를 보다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부탁하네.”
“목숨으로 호위하겠습니다.”
헤론 후작에게 힘주어 말한 가투소는 레이나 공주를 이글스 여단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헤론 후작은 그녀와 함께하지 못했다. 전시에 그는 별도의 단독 부대를 이끌어야 한다.
총병력 오천의 기마 병단이 그의 직속에 놓이는 것이다.
후작이라는 상위 귀족에 걸맞지 않는 소규모 병력이었지만 헤론 후작은 평소부터 그것에 대한 불만은 일절 없었다. 천성적으로 무인의 기질을 타고난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투소의 안내를 받아 걸음을 옮기던 레이나 공주가 걸음을 멈추고 헤론 후작을 돌아봤다. 그는 그때까지도 제자리에 선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레이나 공주의 눈에 안타까움이 진하게 묻어났다.
황실에 충성한 대가로 그는 실세인 테세우드 공작과 앙숙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것 때문에 수많은 전공에도 불구하고 요직에 오르지 못하고 있음을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
“몸조심하세요! 후작!”
레이나 공주의 근심 어린 눈빛을 받은 헤론 후작은 따뜻한 웃음으로 화답한 후, 전마에 몸을 실고서 질풍처럼 자신의 부대로 달려갔다.
* * *
케논 산맥의 능선은 지형이 바뀔 정도로 초토화되었다.
케이시 공작과 대마법사 율튼은 참담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죽은 기사들만 천을 넘어갔다. 전투 불능의 중상을 입은 기사들도 수백을 헤아렸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둘을 참담하게 만든 것은 마법 병단의 몰살이었다. 당초 쉰 명이 넘는 마법사들이 케논 산맥으로 왔었는데, 지금 살아남은 마법사들은 율튼을 포함하여 고작 스물에 불과했다.
카루가를 죽이려다 전혀 뜻하지 않았던 자들에게 처참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나마 그들이 스스로 물러났기에 망정이지 더 싸웠더라면 재앙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각하! 서둘러 진영을 전투 대형으로 바꾸셔야 합니다. 케이론 제국의 군대가 곧 몰려들 것입니다.”
율튼의 진언에도 케이시 공작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각하! 놈들은 잊으십시오. 당장은 테세우드의 맹공을 막아 내는 것이 시급합니다.”
“이런 피해를 준 놈들을 어찌 잊겠소.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잡아 죽여야 직성이 풀리겠소.”
“그 일은 차후, 제가 돕겠습니다. 하오니…….”
율튼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을 놓친 것은 자신이다. 마법사들의 지원을 받아 펼쳤던 미증유의 공격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자가 뛰어드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섬뜩하게 만들었던 흑발 사내의 광포했던 눈동자를 떠올리자 소름이 돋아났다.
‘인간의 눈빛이 어찌 그토록 사나울 수 있단 말인가?’
드래곤의 성난 눈빛이 그럴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찬바람이 불었다.
율튼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당장은 신호탄을 쏘고 뒤로 물러난 테세우드의 예상된 공격을 막아 내는 것이 급선무다.
테세우드는 자신들이 입은 피해를 생생하게 보고 물러섰다. 기사들의 죽음은 그다지 두려울 게 없었다.
그러나 마법사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것을 테세우드가 보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비슷한 전력에서 마법사들의 수가 많고 적음은 상당한 전력상의 불균형을 초래한다.
그것이 율튼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율튼 공!”
케이시 공작이 단호한 목소리로 율튼을 불렀다.
“예! 각하!”
“본국에 지원을 요청하시오. 놈은 약점을 보고 쉽게 물러날 놈이 아니오. 우리가 한 번은 막아 낸다 하더라도 놈은 끊임없이 마볍병단의 부재라는 약점을 물고 늘어질 것이오. 어차피 저들과 군단이 부딪치면 제국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소. 그렇다면 초전을 우리가 잡아야 하오.”
제국전쟁이란 단어는 초월의 영역에 들어선 율튼조차도 전율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그러나 율튼의 생각도 케이시 공작과 같았기에 그는 품에서 통신석을 꺼내 들었다. 오직 대마법사들만이 사용가능한 이동식 통신석인데 그 효능은 상상을 초월한다.
율튼이 요란 제국으로 통신을 하는 사이, 케이시 공작은 자신과 부딪혔던 자들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 * *
콰콰쾅!
대마법사 율튼과 마법 병단의 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거대한 마나의 덩어리는 그대로 지상으로 떨어져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케이시 공작은 순간, 그 안으로 뛰어드는 흑발 사내를 보았다.
제국에 몇 없는 초인인 자신이라도 그 안에서 목숨을 부지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력한 폭발이었다. 당연히 뛰어든 자는 누구라도 흔적조차 없이 소멸될 게 뻔했다.
“어헉!”
케이시 공작의 입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엄청난 마나의 폭발이 동그랗게 쳐진 방어막을 뚫지 못하고서 난폭한 소용돌이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여파는 주변을 둘렀던 마법사들과 기사들을 휩쓸었다.
상당수의 마법사와 기사들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어 갔다.
“이, 이게 도대체……!”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머리 위로 또 다른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공에서 가죽 북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자 케이시 공작은 홀린 듯, 시선을 위로 던졌다. 더 이상 놀랄 것이 없어 보였던 그의 두 눈이 또다시 찢어질 듯, 거칠게 올라갔다.
허공에 떠 있던 마법사들이 피를 쏟아 내며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재수 없는 새끼들!”
“모조리 지옥으로 보내 주마!”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언어가 허공에서 들려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흑발에 흑안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광포한 기운은 지상에 선 케이시 공작을 자극할 만큼 강력했다.